꿈에서 깨어나다
-물컹?
그녀는 꿈을 꾸고 있었다.
멀리서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작은 소녀의 목소리이다. 아무래도 자신을 부르고 있는 듯하지만 뭐라고 하는지는 잘 들리지 않는다. 귀를 기울여 본다.
‘……사자, ……사자…… 독고…… 사자…….’
누구지? 누굴까?
자신을 향해 앙증맞은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작은 소녀의 그림자가 보인다. 그러나 그 얼굴만은 안개가 낀 것처럼 희뿌예서 누군지 알 수가 없다.
대체 누구지? 저 소녀는 누구를 부르고 있는 걸까? 저 소녀가 부르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일까?
생각을 하려 하자 지끈 머리가 아파온다. 왜 이럴까? 생각을 이어가기가 힘들다. 왜 이러지? 머릿속이 뒤죽박죽 혼란스럽다.
느닷없이 세상이 녹아내리며 다시 장면이 바뀐다.
파도가 치는 해안가 바위 위에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인다. 옷 한쪽에 열두 날개를 가진 새가 수 놓여져 있다.
“저분은 누구지??
자신은 그녀 뒤에 무릎을 꿇고 있다. 왜 자신이 이렇게 무릎을 꿇고 있는 걸까? 저 뒷모습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만 같다. 한없는 애정과 존경이 마 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난다.
“어째서?”
난 저 여인을 알지도 못하는데 어째서? 눈물이 넘쳐흘러 내릴 것만 같다.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올라 참을 수가 없다. 저 뒷모습의 여인을 향해 뭐라고 외치고 싶었다.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숨통이 꽉 막히며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입만이 공허하게 뻐끔거릴 뿐이다. 단 한마디 말인데도, 자신은 그 말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도 그 한마디 말은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계속 입속에서 맴돌 뿐이었다. 자기도 모르게 여인을 향해 손을 뻗는다. 다른 한 손으로 가슴을 움켜쥔 채 외친다.
‘도와주세요! 도와주세요!’
왜 자신은 저 여인을 향해 도와달라고 외치는 걸까? 왜? 왜?
한 번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저 여인을 향해 왜 도와달라고 외치는 걸까?
가슴 저 밑바닥에서 용솟음치는 이 알 수 없는 그리움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러나 손을 뻗으면 뻗을수록 여인의 뒷모습은 점점 더 그녀에게서 멀어져 갈 뿐이었다.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길 잃은 아이가 엄마를 찾는 듯한 애통한 목소리로 부른다. 손이 닿는다면 옷깃을 움켜잡고 매달리고 싶었다. 저 여인의 옷깃을 붙잡고 자신은 무어라고 할 생각이 지? 멀어져 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쫓아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린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지만, 심장이 터질 것 같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무언가 기억에 없는 광경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훑고 지나간다.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를 구해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그녀에게 서 점점 멀어져 갈 뿐이었다. 아무리 손을 뻗어도 그 구원에는 닿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외친다.
“날 여기서 구해주세요!”
왜 구해달라고 하는 걸까? 왜? 자신은 부족한 것 하나 없지 않은 것 아니었나? 그녀에게는 모실 주인이 있었다. 그 사실을 당연하다고 생각했고 후회 따위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왜일까? 왜 그 나예린이라는 아이를 죽이라고 했을 때 그렇게 동요했을까? 왜 검끝에 망설임이 깃들어 있었을까? 왜 그 아이의 목소리는 그리도 귓 가에 익숙했을까? 왜 그 목소리에는 가슴 한구석을 따뜻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을까? 그녀와 검을 부딪치는 것이 왜 그리도 그립게 느껴졌을까? 생사가 교차하는 그 가운데서도 그녀는 그 안에서 그리움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검이, 아니, 자신의 영혼이 공명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마침내 비통한 목소리로 외쳤다.
“….사부님!”
뒤돌아 있던 여인이 멈춰서더니 천천히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얼굴은.
번쩍!
눈이 떠졌다.
***
눈은 떴지만, 정신은 아직도 멍했다.
영령은 아직도 꿈속을 헤매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가벼운 현기증과 함께 단편적인 기억들이 명멸한다.
“내가 방금 무슨 꿈을 꿨지??
방금 전 뭔가 굉장히 중요한 꿈을 꿨던 것 같은데 무슨 꿈을 꿨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굉장히 가슴 아프고 그립고 슬픈 느낌의 꿈이었다. 그러나 깨어나는 순간에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지워지기라도 한 것처럼 깨끗이 날아가고 없었다.
정신을 잃기 전에 있었던 일들이 마치 아득한 꿈처럼 느껴진다. 그만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충격이 너무나도 생생했기에 지워지지 않는 기억. 그때 떠올랐던 선명한 충격을 그녀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대체 그 검초는 뭐였지??
자신의 손에서 펼쳐졌던 그 화려한 검초를 떠올려 본다. 하지만 다시 되새겨보려고 하니 기억이 도려내어진 듯 막막하다.
분명 자신은 그 검초를 펼쳤다. 그러나 어떻게 그 검초를 펼칠 수 있었는지는 그녀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런 검초는 배운 기억조차 없는 것이다. 한데 배우지도 않은 걸 어떻게 펼칠 수 있었지?
‘그냥 몸이 펼쳤다.”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위기의 순간에 몸이 무의식적으로 반응했다고, 그렇게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그 나예린이란 여인이 펼치던 검법과 너무나 똑같은 검법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위기의 순간에 펼쳤던 그 검법과 나예린이 펼쳤던 검법이 같은 원리(原理)하에서 나온 검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만큼 그 검법이 가지 고 있는 색깔은 독특했고, 그것은 함부로 흉내 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자신의 몸은 그 검법을 알고 있는 거지? 어째서?
그 부분을 생각하려고만 하면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온다. 마치 머리가 기억해 내기에 저항하는 것 같았다. 그러자 한 가지 의문에 도달할 수밖에 없었다. ‘난 대체 누구지?”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이 자신이 아닌 것 같은 기묘한 감각에 사로잡힌 영령은 피할 수 없는 의문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지금 이 질문에 대한 명쾌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 역시 동시에 깨달았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으음…….?
영령은 쿡쿡 쑤시는 두통 때문에 짧은 신음을 흘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가 눈을 뜬 곳은 어두캄캄한 방 안이었다. 주위는 차가운 돌 벽으로 되어 있고, 희미한 촛불 하나만이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벽에서 느껴지는 싸늘한 냉기로 보아 이곳은 아무래도 지하실인 것 같았다. 방 한가운데 놓여 있던 침상에서 몸을 일으킨 영령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언제 이런 곳으로 옮겨진 거지?”
강호란도에서 나예린과 싸운 이후로 기억이 없었다.
서둘러 몸을 확인해 본다. 일단 치료는 되어 있었다. 진기를 돌려 몸을 점검해 본다. 그러고 보니 주위에는 희미한 약향이 맴돌고 있는 것으로 보아 치료실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너무 음침했다.
아직 따끔따끔하고 기의 흐름이 불안정하긴 하지만 다행히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았다.
“그렇게 격렬하게 싸웠는데…….?
이 정도로 끝났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만일 마지막에 나예린이 자신의 검을 그대로 받아내지 않고 반격을 가했다면 과연 자신이 무사할 수 있었을까? 솔직히 말해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나예린이 보인 검각의 새하얀 검기는 전율이 일어날 정도로 위력적이었다. 그때, 마지막에 그 초식을 보며 느꼈던 것은 분명 증오가 아닌 감탄의 마음이었 다.
“왜일까? 저주스러워야 마땅할 검각의 검기를 보고 왜 나는 그런 전율을 느꼈을까? 왜 눈물이 흘러내렸을까? 내 한쪽 눈을 빼앗아간 증오스러운 적일 텐데?? 그리고 왜 그리도 그리울까…….
검기와 검기가 교차하는 그 가운데서 보았던 그 부인은 대체 누구일까? 왜 그 여인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아파올까?
무엇 하나 명확하지가 않았다.
“몽무? 환무?”
불러봐도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거기 아무도 없나요?”
여전히 침묵만이 되돌아올 뿐이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방 한쪽에 위치한 계단이 보였다. 위로 향하는 계단이었다. 영령은 아직도 약간 멍한 얼굴로 그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이곳은 답답했다. 이런 곳에 있다 보면 왠지 안 좋은 기억이 떠오를 것 같았다.
—자, 괜찮아요. 곧 모든 게 편해질 테니…….
—새로운 삶을 사는 거예요.
그건 대체 언제였지? 그리고 그 사람은 대체 누구였지? 손에 기다란 침을 들고 웃고 있던 그 늙은 남자는…..
“큭!”
갑자기 엄청난 두통이 그녀를 엄습했다. 그 두통 때문에 생각을 더 이어갈 수 없었다. 머리가 깨질 것만 같고,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오른손으로 벽을 짚고 왼손으로 머리 한쪽을 쥔 채 영령은 힘겹게 계단을 올랐다. 곧 막다른 길이 나왔다.
어둠에 조금씩 적응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아도 문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이게 대체…….’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바로 그때,
드르르릉!
문이 열리며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너무나 눈부신 빛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감고 말았다.
얼굴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그 벽 앞에 서 있었다. 상당히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영령이 대응 자세를 취하기도 전에 그 사내는 아직도 시계가 하얗게 타버린 그녀 를 향해 우악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물컹.
비극은 그렇게 일어났다.
* * *
북해도는 텅 비어 있었다. 장홍과 옥유경은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많던 인원들이 움직이는데도 아무런 동요도 감지할 수 없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 다.
게다가 지금은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대비해야 되는 특급 비상 체제하였다.
대체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심지어 오번대의 대장 집무실까지 텅 비어 있었다. 무단으로 들어가 여기저기 들춰보지만 쌓여져 있는 것들은 그저 논어나 맹자 같은 경전들뿐이었다.
“거참, 흑도인이 경전이라니…….”
“흑도인은 경전 보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좀 그렇지 않소?”
“어디에 속해 있든 자기가 읽고 싶은 책을 읽는 데 타인이 왈가왈부할 건 없다고 생각해요.”
제오 기숙사 대장 집무실의 서적들과 서찰을 모두 뒤져 보았지만 별달리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없었다.
“혹시 다른 장소에 숨겨놨나?”
이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비밀 방 혹은 비밀 금고가 존재할 것 같았다.
“좋아. 그런 걸 찾는 게 바로 이 몸의 특기지.’
장홍은 전문가의 눈빛으로 방 안 여기저기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여기서 짠 하고 비밀 방의 입구를 찾아내 옥유경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럼 그녀도 틀림없이 자신의 능력에 감탄하리라. 대단하다고 확껴안아주고 볼에다가 쪽 하고 뽀뽀까지 해줄지도 몰랐다. 상상만으로도 입 주위의 근육이 풀리는 듯했다.
‘저건가?”
방 안 여기저기를 살피던 장홍의 눈에 수상한 물건 하나가 보였다. 그건 바닥 위에 솟아오른 사자상이었다. 위치가 좀 특이했다. 별로 있어야 할 곳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발로 밟아 여는 방식의 비밀 통로였던 것이다.
‘좋았어! 열려라, 참깨!’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장홍은 그 돌을 밟았다. 그러자 드르르르릉, 기관이 작동하는 소리와 함께 벽이 열렸다.
“유경, 여길 보시오.”
장홍이 옥유경 쪽을 쳐다보며 그녀를 불렀다.
“여기요, 여기.”
여전히 옥유경을 쳐다본 채 싱글벙글 웃으며 장홍은 열려진 비밀 통로 안으로 손을 불쑥 집어넣었다.
물컹!
그 순간 부드럽고 야들야들한 무언가가 그의 손아귀에 한 움큼 잡혔다.
‘크다!”
그 순간 장홍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둠이 곧 밝아지며 벽 앞에 한 여인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손은 무엄하게도 그녀 쪽을 향해 뻗어 있었다. “무슨 일이죠, 홍식?”
하필이면 그 순간 옥유경이 무슨 일인가 싶어 장홍 쪽을 바라보았다. 옥유경의 두 눈이 동그래지더니, 이윽고 지옥의 불길과도 같은 새빨간 홍염이 광채를 내며 타 오르기 시작했다.
***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영령은 한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아무것도 만지지 않았는데 갑자기 비밀 통로가 열렸다. 그 앞에 어떤 사내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사내가 뻗은 손이 어느새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고 있었다. 한순간 머릿속이 백지가 되었다가, 겨우 사태를 이해한 영령의 얼굴이 수치심으로 인해 새빨갛게 변했다.
“꺄아아아아아아아!”
영령은 서둘러 가슴을 두 손으로 가리며 비명을 질렀다. 약간 몽롱한 탓인지 무인으로서의 반응보다 여인으로서의 반응이 더 빨랐다.
“아, 아니, 소저… 지금 이건…….”
급 당황한 장홍이 화상이라도 입은 듯 화들짝 놀라 손을 떼며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다. 그 순간 옥유경의 입에서 분노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장.홍식!”
어버버버버버!
장홍은 손을 뻗은 상태 그대로 돌처럼 굳어버렸다. 혀도 함께 굳어졌는지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말을 심하게 더듬기 시작한 것은 옥유경도 마찬가지였다.
“다, 다, 당신이란 사람은…… 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아, 아니오, 부인. 이, 이건 사고요. 절대 고의가 아니오! 그, 그렇소. 이건 불행한 사고였던 거요!”
“저번에 복도에서 나한테도 그러더니……. 당신이란 남자는 아저씨가 되어서도 그렇게나 여자의 가슴이 좋단 말인가요! 시도 때도 가리지 않을 만큼!”
옥유경의 얼굴이 분노로 인해 야차처럼 변해 있었다. 장홍이 오돌오돌 떨며 손사래를 쳤다.
“진짜요. 믿어주시오. 물론 좋긴 하지만 지금 이건 사고요. 게다가 가슴은 당신이 훨씬 크오. 훨씬 부드럽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가 말하려던 건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찰캉!
맑은 검명과 함께 옥유경의 검이 발검 태세로 들어갔다.
“닥치시죠! 그런 시답잖은 변명은 염라대왕 앞에나 가서 하시죠!”
퍼버버버버버벅!
장홍은 직싸게 얻어맞았다. 하지만 지금 그는 회피 불능이었다. 방어도 불능이었다. 피하는 것도 막는 것도 입을 놀려 변명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뺨을 때리 면 때리는 대로, 주먹으로 패면 패는 대로, 발로 차면 차는 대로 고스란히 얻어맞는 수밖에 없었다. 찍소리하지 않고 당하는 게 유일한 속죄의 길이었다. 그리고 마 침내 옥유경은 왼손으로 장홍은 손목을 잡고 오른손으로 혈봉검을 치켜들었다.
“자, 잠깐! 지금 뭐 하려는 거요?”
“가만있어 봐요. 이런 버릇없는 놈은 잘라 버려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계속 이 여자 저 여자 찝쩍거릴 게 분명해요.”
“머, 멈추시오, 부인! 아니, 마님!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어허, 다 큰 어른씩이나 돼서 소란 떨지 말아요. 금방 끝나니까요.”
번쩍! 치켜들린 혈봉검이 섬뜩한 검광을 발했다.
“끄아아아아아아악!”
파렴치한 장홍의 손목을 자르려 할 바로 그때,
그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한 장홍을 구한 것은 다름 아닌 영령이었다.
혈봉검의 검이 죄인의 목을 치는 작두처럼 장홍의 죄수(罪手:죄지은 손)를 뎅겅 자르려는 찰나, 영령의 입에서 아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옥유경 대장님?”
내려치려던 혈봉검이 허공에서 우뚝 멈추었다. 경황이 없던 옥유경은 그제야 그 목소리가 귀에 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응? 너는 영령이 아니냐? 네가 어찌 여기에? 게다가 그 차림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난 장홍도 다른 의미에서 놀랐다.
“령 소저 아니시오? 아직 강호란도에 있는 줄 알았는데? 언제 이곳에?”
원통투기제 준결승전에서 나예린과 격전을 벌인 이후 내상을 크게 입은 것이 명약관화해 당연히 강호란도에서 정양하고 있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 그녀가 느닷 없이 북해도의, 그것도 북해왕의 비밀 방에서 모습을 드러냈으니 장홍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저도 그런 줄 알았는데…….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영령도 이제 막 깨어난지라 뭐가 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괜찮다. 좀 혼란스러운 것뿐이다. 천천히 떠올려 보도록 해라. 같은 여자끼리 아니냐. 내가 널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령이 불안한 시선으로 장홍 쪽을 흘깃 바라보았다.
“아, 저 파렴치한 변태 아저씨는 신경 쓸 것 없단다. 그냥 장식이라고 생각하렴. 아니면 칼 빌려줄까? 마음이 편해질 때까지 네댓 방 찔러도 된단다.”
옥유경은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 따스한 미소를 보며 장홍은 오금이 저려오지 않을 수 없었다.
“찌, 찌르다니요. 괜찮습니다.”
“아니다. 사양할 것 없단다.”
‘설마 이건 차도살인지계?”
두 여인의 다정한 대화를 들으며 장홍은 후덜덜 두려움에 몸을 떨어야 했다.
“아뇨, 전 정말로 괜찮습니다.”
“그래, 착한 애네. 그럼 타협해서 마구 패기만 하는 건 어떠니?”
“저, 정말로 괜찮습니다.”
그리고는 왠지 그 화제를 계속 끌고 가는 게 불편했는지 자신이 겪었던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일단 같은 여자이기에 변태 아저씨에게 이야기하는 것보 다 훨씬 마음이 놓였다.
“그러니까… 깨어보니 이곳 북해도였다, 그 말이냐? 그것도 비실(秘) 안에 있었다?”
“예…….”
“어떻게 옮겨졌는지도 기억에 없고?”
“예, 예.”
“치료는 모두 되어 있었다, 그거지?”
“예.”
“흠.
그 이외에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단편적인, 두통을 동반하는 꿈뿐이었다. 그러나 그 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한편 영령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장홍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지?”
장홍은 나예린이 영령을 화산지회에서 행방불명된 독고령이라고 확신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확실히 영령과 독고령 두 사람은 쌍둥이가 아닐까 여겨질 정도로 닮아 있었다. 미묘하게 얼굴의 특징이 다르기는 하지만, 그 정도쯤 변형하는 것은 무림에선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장홍은 위치상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일 어나는 일이나 강호에서 금기시되어 오는 제령술법이나 인격 변형, 기억 변조 등에 대해서도 상당히 자세히 알고 있었다.
거의 전설처럼 내려오는 몇 가지 비법을 쓰면 본인도 모르게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내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가설이고, 이 영령 소저처럼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된 것을 보는 건 처음이지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영령이 독고령과 동일 인물일 때의 이야기였다. 장홍 역시 아직 이 영령이라는 아가씨가 독안봉 독고령이라는 증거는 가지고 있지 못했 다.
“거참…… 의외의 사태가 되고 말았군. 게다가 단서도 거의 남아 있지 않으니…….’
지금은 영령만이 이곳 북해도에 남겨진 유일한 단서였다. 지금은 그녀를 중심으로 주변을 파악해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두 분은 이곳에 어쩐 일로 오신 거죠?”
두 사람은 서로를 한 번 쳐다보며 진상을 이야기해 줘도 괜찮다는 사실에 동의한 다음 다시 영령을 쳐다보았다.
“우린 납치된 한 여자아이를 찾고 있단다.”
“납치라니요? 대체 누가 그런 짓을?”
“그건 아직 우리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납치당한 아이는 너도 잘 아는 아이일 게다.”
“전 여기에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요?”
“꼭 그렇지만도 않지. 바로 어제 서로 한바탕 검까지 섞은 사이인데 모를 리가 있겠느냐.”
그동안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일어났지만, 시간은 아직 하루 열두 시진도 채 경과하지 않은 상태였다.
“서, 설마…….”
마음에 짚이는 바가 있어 영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긍정의 의미로 옥유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검후님의 애제자이자 정천맹주 나백천님의 무남독녀인 나예린, 바로 그 아이다.”
“설마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그래서 그 목관을 찾으러 이곳 북해도에 오신 거군요.”
“그런 거란다.”
모든 자초지종을 말한 옥유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그런 일이 강호란도에서 일어났었다니…… 그것도 제가 쓰러진 직후에…….”
그녀가 쓰러져 있던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엄청나게 많은 일이 일어나는 데 부족함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역시 날 이곳으로 옮겨온 것은 그분일까?”
그럴 만한 사람은 한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분은 왜 자신을 홀로 남겨두고 이곳을 떠난 것일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지? 조그만 실마리 조차 잡히지 않았다.
“아마 미리 계획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런 완벽한 기회를 잡기란 힘들었겠지.”
정천맹주의 외동딸을 납치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외동딸이 뛰어난 고수일 때는 더욱더. 하지만 그때만은 모두의 시선이 나예린에게서 일순간 떨어져 있었다. 곁에 붙어 있던 윤미를 제외하고는.
“때마침 진기도 모두 소진하고 있었으니 그토록 포획하기 쉬운 사냥감이 또 어디 있었겠느냐? 얄궂게도 네가 그 일에 큰 역할을 담당하고 말았구나.”
“저, 전 관계없습니다.”
영령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그래, 안다. 너를 의심하거나 탓하는 건 아니란다. 넌 우연히 어쩌다가 이 납치 사건에 한 팔을 거든 것뿐이지. 지독히 운이 나빴던 것이다. 그뿐이야.”
그러나 그 말에도 영령의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속의 동요는 사나운 소용돌이처럼 용솟음치고 있었다.
‘내, 내가 왜 이러지? 왜 이렇게 마음이 불안한 거지? 왜? 왜?’
그녀를 자신의 사자 독고령이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던 그 무례하기 짝이 없던 아이가 납치당했다는 사실에 왜 이리도 심한 충격을 받고 동요하고 있는 것인 가.
나랑은 관계없는 일이라고 못 본 척하려고 하면 할수록 불안은 점점 더 심해질 뿐이었다. 당장이라도 몸이 뛰쳐나가려 하고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지 못 하면서.
‘이래서야 내가 진짜 그 나예린이란 아이를 걱정하고 있는 것 같잖아? 마치…… 마치…….?’
진짜 그녀의 사자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이 이렇게 동요하는 이유를 그녀 자신도 잘 설명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절대로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랬다가는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에 짓눌려 미쳐 버릴지도 몰랐다. 어느새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외치고 있었다.
“저도 함께 데려가 주세요, 옥 교관님!”
갑작스런 영령의 부탁에 옥유경의 눈이 크게 떠졌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저도 그 나예린이라는 아이를 찾는 데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넌 아직 어제 싸움으로 인한 내상도 완치되지 않은 상태 아니더냐?”
확실히 어제 나예린과의 싸움에서 입은 내상은 하루아침에 깨끗이 나을 정도로 가벼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거의 다 회복했습니다. 저도 돕고 싶습니다. 제발 돕게 해주십시오.”
자신과 별 관계도 없는 아이를 위해 왜 이렇게 필사적이 되는지 알지 못한 채 영령은 애걸하다시피 외쳤다. 옥유경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참…..
한참을 고민하던 옥유경이 장홍 쪽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눈빛이었다.
“괜찮지 않겠소??
장홍의 눈빛은 그렇게 대답하고 있었다. 옥유경은 잠시 더 고민하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따라오너라.”
“감사합니다.”
영령이 머리를 깊숙이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알았다. 알았으니 이 옷깃 좀 놓거라. 찢어지겠구나.”
영령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옥유경의 옷을 손가락이 파래질 정도로 꽈악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나! 죄, 죄송합니다.”
화들짝 놀란 영령이 급히 옷에서 손을 뗐다. 얼마나 힘껏 움켜쥐고 있었는지 아직도 그녀의 손에는 그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난 다시 한 번 그 아이를 만나야 해.”
일단 그녀의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는 이 감정을 확인해 보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다시 한 번 나예린을 만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라도 꼭 그럴 필요가 있었다.
“저…….?”
겨우 마음을 진정시킨 영령이 옥유경을 향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응? 무슨 일이냐?”
“옥 교관님,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물어보거라.”
영령이 약간 움츠린 자세로 쭈뼛쭈뼛 장홍을 가리켰다.
“저기…… 옥유경 교관님은 저 변태 아저씨랑 아는 사이신가요?”
그 질문에는 옥유경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 뭐… 좀 아는 사이라고나 할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가깝다면 참 가까운 사이라 할 수 있고 멀다면 참으로 멀다고 할 수 있지. 참고로 피는 한 방울도 안 섞인 사이란다. 미안하지만 그 이상 말해주기가 곤란하구나. 사적인 일이거든.”
“아뇨, 저야말로 당돌한 질문을 드려 죄송합니다.”
“아냐, 아냐. 괜찮다. 정말로. 치한이 과연 누구인지 여자애라면 누구나 알고 싶은 법이지.”
그럴 리가 없잖소, 라고 힘차게 외치고 싶었지만 그럴 권리는 치한 혐의를 받고 있는 지금의 장홍에겐 없었다.
“자자, 일단 좀 더 주위를 둘러봅시다. 목관까지 가져갔는지 안 가져갔는지 확인도 해야 하지 않겠소?”
그리고는 불편한 자리를 피하기라도 하듯 황급히 자리를 떠나 앞장서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장홍은 망연자실한 눈으로 목관을 바라보았다.
결론적으로 말해 북해도의 사람들은 목관을 챙겨가지 않았다. 장홍은 부대 본부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방에서 그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목관이 그곳에 있긴 있 었지만, 그대로 두어져 있지는 않았다.
목관의 한가운데에는 보란 듯이 검이 박혀 있었다. 대검은 마치 흉흉한 묘비처럼 관 뚜껑을 뚫고 깊숙이 박혀 있었다.
“이건 대체 무슨 장난이죠?”
옥유경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저, 저 안에 설마…….”
파랗게 질린 얼굴로 영령이 중얼거렸다.
“그런 끔찍한 일은 되도록 상상하고 싶지 않군.”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장홍 역시 끔찍한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흔들며 그 불안한 생각들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관 쪽으 로 다가갔다.
“조심하세요.”
옥유경이 걱정스런 어조로 말했다. 장홍은 고개를 살짝 한 번 끄덕여 보인 후, 관에 박힌 검을 천천히 빼내기 시작했다. 검끝에서 약간의 저항이 느껴졌다. 손아귀 전체에 퍼지는 이 가벼운 저항의 느낌을 장홍은 잘 알고 있었다. 이 감촉은 검이 사람의 몸에 박혔을 때의 바로 그 감촉이었다. 다시 한 번 일어나는 불길한 느낌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듯 장홍은 서둘러 검을 뽑았다.
쑤욱!
뽑혀 나온 검끝에 묻어 있는 선명한 진홍색은 의심할 여지 없는 사람의 피였다.
이 피는 대체 누구의 피일까?
“꿀꺽.”
장홍은 긴장된 마음으로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관 뚜껑을 열었다.
끼이이이이익.
관이 열리는 마찰음이 야밤의 공동묘지에서 들려오는 흐느낌처럼 들려 소름 끼쳤다. 그건 이 안에서 시체가 누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 다.
덜컹.
마침내 관 뚜껑이 완전히 열렸다.
“이건…….”
관을 열고 안을 확인한 장홍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분명 그 안에는 시체가 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시체는 나예린이 아닌 복면을 한 사내의 시체였다.
장홍은 망설임없이 복면을 벗겼다. 나예린이 아닌 것만 알았으면 그에게 마음에 걸릴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정도 시체가 옆에 있는 것은 그에게는 일상적인 일 이었다.
“본 적이 있는 얼굴이오?”
장홍이 돌아보자 옥유경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에요. 확실히 제육 기숙사의 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제가 검술을 가르칠 때 꽤 실력이 있어 얼굴을 기억하고 있어요.”
그녀에게 얼굴이 팔렸다는 것은 즉, 우등생이었단 뜻이다.
“그런 우수 학생이 왜 이런 관 속에 복면을 한 채 누워 있는 거요?”
“당연히 누가 시켰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가 맡은 역할은 물어볼 필요도 없이 암습이었다.
“그렇다면 설마 육번대 대장이 이번 납치 사건의 범인이란 말이오?”
원래 각 부대의 대원들은 무공 수업 이외에 다른 일에 관련해서는 다른 부대의 대장 말은 듣지 않는다는 것을 장홍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게 아무리 무교관이라 해 도 말이다.
“그럴 리가 없어요. 그분은 그럴 만한 분이 아닌데…….”
옥유경이 강하게 부정했다. 무명은 자신이 마천각의 어린 학생일 때도 여전히 육번대의 대장이던 사람이었다. 오랜 시간 알아온 그녀로서는 그 가설에 선뜻 동의 할 수가 없었다.
“혹시 그 사람, 외팔이이면서도 외팔이가 아닌 사람 아니오?”
장홍이 진지한 표정으로 묻는다.
“외팔이이면서도 외팔이가 아닌 사람이라니요? 지금 말장난하는 건가요?”
옥유경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건…….”
장홍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범인의 정보를 말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서천에 대한 정보를 말하는 순간 안 그래도 복잡한 이 일이 훨씬 더 복잡해질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대로 숨길 수는 없었다. 게다가 그는 더 이상 옥유경에게 무언가 비밀을 가지고 있기가 싫었다. ‘그’ 일만 빼고. 그리고 현재의 상황을 좀 더 알게 된다면
마천각에 대해서 그보다 훨씬 더 상세하게 알고 있는 옥유경이라면 무언가 그가 놓치고 있는 부분에서 단서를 발견할지도 몰랐다.
“당신,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나요?”
“음…… 유경!”
장홍이 옥유경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힘주어 말했다.
“왜, 왜 그러시죠?”
옥유경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당신에게 긴히 할 이야기가 있소. 중요한 이야기요.”
“하, 하세요.”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사랑의 속삭임 같은 것은 아니었다. 대신 장홍은 자신이 비류연에게서 들은 서천에 관한 이야기를 옥유경에게 하나둘씩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약간 맥이 빠졌던 그녀였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 될수록 옥유경의 표정은 더욱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깊이 분노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인즉슨, 지금 마천각 안에 그 핵심적인 영역까지 천겁령의 손이 뻗쳐 와 있다는 이야기랑 똑같은 이야기였던 것이다.
“여기 마천각뿐만이 아니오. 모르긴 몰라도 천무학관 안, 아니, 정천맹과 흑천맹까지, 전 무림에 그들의 촉수가 뻗어 있을 것이오. 오랜 시간 큰 나무의 뿌리가 땅 속으로 파고들 듯 그 뿌리는 거미줄처럼 전 무림의 모든 영역에 걸쳐 뻗어 있는 게 틀림없소.”
“그 말은..
“그렇소.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이 평화는 아주 열악한 기반 위에서 겨우겨우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것 없는 사상누각. 그것이 지 금 우리가 백 년 동안 누렸던 길고 따분한 평화의 정체요.”
“그리고 정천맹주의 친딸인 나예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이 아슬아슬한 평화는 단숨에 무너져 내릴 것이 분명하오. 그럼 우린 이 따분했던 평화를 그리워하게 될 거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오늘을.”
그런 사태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아직 그 방법에 대해서는 막막하기만 했다.
“일단 다른 친구들이랑 합류해야겠소. 그쪽도 지금쯤이면 나름대로 결판이 났을 테니.”
“과연 무사할까요? 상대는 아무리 학생 신분이라 해도 마천십삼대의 대장들이에요. 일대일, 아니, 이 대 일로 싸운다 해도 쉽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에요.” 마천십삼대의 실력을 얕보지 말라,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얕보는 건 결코 아니오. 쉽지 않으리란 건 이미 알고 있소. 다만 내 친구들을 믿을 뿐이오. 물론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다른 관에도 자객들이 숨어들어 있다면, 방심하고 그 관을 연 이들이 매우 위험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의 어린 친구들을 믿는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조심하게, 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