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6권 18화 – 법과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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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6권 18화 – 법과 힘

법과 힘

-락비오의 과거

서해왕 락비오의 아버지는 한 지방의 판관이었다. 즉, 법에 따라 죄를 심판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매우 강직하고 정직했다. 쉽게 부패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니고 있 으면서도 그의 아버지는 부패하지 않았다. 법이야말로 그의 아버지에게 있어 정의였다. 어릴 적 그는 엄중한 법에 따라 죄를 판단하는 아버지를 존경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죄인이 잡혀왔다. 그런데 문제는 그 죄인이 그 지역 유지의 아들이라는 점이었다. 그 지역 유지는 그 도시의 부와 어둠의 세력까지 한 손에 쥐고 있는 자였다.

당연히 얌전히 자신의 아들을 풀어주라는 청탁이 들어왔다. 거대한 돈 궤짝과 함께. 그의 아버지는 그 궤짝을 받지 않았다. 그러자 그다음에는 협박이 들어왔다. 가족들과 함께 장수하며 살고 싶으면 얌전히 말에 따르라고. 이 현에서는 그들이 바로 법이라고. 그러나 그의 아버지에게 있어 법은 법전에 적혀 있는 법뿐이었다. 그 이외의 법에 아버지는 따르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자신의 소신에 따라 그 유지의 아들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 온갖 사기를 일삼고, 부녀자를 밥 먹듯이 강간 하고, 심심하면 살인을 저지르는 그놈을 그냥 둘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의 정의가 용서치 않았다.

그러나 그때 그런 그의 아버지를 용서치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었다. 바로 그 지역의 유지였다.

돈과 권력의 멍멍이가 되지 않는 법관 따위는 그에게 필요없었다. 돈을 한 손에 움켜쥐고 있는 그들은 법이란 힘있는 자의 입맛에 맞추어 해석되는 것이야말로 세 상의 섭리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런 자들이었다.

그들에게 정정당당이란 말도 안 되는 개념이었다. 어차피 공정함이란 것은 그들의 기준에서는 없는 일이었다. 불공정한 것이야말로 그들에게 있어 공정한 것이었 다.

그자는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수하들을 풀어 현청을 습격했다. 이미 현청을 지키는 대부분의 병졸들은 그자에게서 돈을 받아먹지 않는 이가 없었기에 저항은 미미 했다.

자신이 한 일에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던 아버지는 도망도 치지 않은 채 자신이 집무를 보는 그 자리에 앉은 채 목숨을 잃었다. 어머니도 도망가지 못하고 그들에 게 잡혀 수모를 당한 다음 죽임을 당했다.

락비오 혼자만이 아이 하나 정도만 들어갈 수 있는 비밀스런 공간에 숨어 있다가 화를 면했다. 아버지가 지키려 했던 법이 적혀 있던 법전이 아버지, 어머니의 시 체와 함께 불타서 재가 되어 날아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법 따위는 힘 앞에서 너무도 무력했다.

그는 현청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온 한 덩치 큰 고수에 의해 거두어졌다. 얄궂게도 그 고수는 예전에 아버지의 공정한 판결에 의해 은혜를 입은 적이 있는 사람 이었다. 그는 무림인은 은원(恩怨)을 명확히 해야 한다며 그를 제자로 거두었다. 그의 사부는 강호의 숨어 있는 절정고수 중 한 명으로 별호가 ‘흑금강(黑金剛)’이라 했다. 그리고 그는 사부로 모시게 된 그 사내와 함께 산으로 들어가 무공을 연마했다. 그때 전수받은 무공이 바로 금강반탄신공이었다.

“그 일로 난 깨달았지, 법과 규칙을 숭상하던 아버지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이 세상에서 오직 힘만이 정의라는 것을. 다른 것은 모두 힘 앞에서 무력할 뿐이라 는 것을. 그때부터 오직 힘만을 추구하기로 했지. 그리고 마침내 힘을 손에 넣은 난 하산하여 그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었다. 그들의 방식대로 힘에 의한 처절한 복 수를. 법 따위는 전혀 내 복수를 도와주지 못했어. 오직 힘만이 나의 복수를 성사시켜 주었다.”

그리고 복수를 끝마친 그 길로 그는 마천각에 입관했다, 바로 더 강한 힘을 손에 넣기 위해서.

“난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이 힘을 손에 넣었다. 난 정의를 손에 넣었다. 그러니 난 더 이상 지지 않는다. 난 더 이상 불행해지지 않아!”

내심 속으로 감정이 거칠게 소용돌이치고 있던 락비오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불행한 과거를 듣고도 비류연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런 일에 동조해서 엉엉엉 울 만큼 무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비류연의 입가에 걸려 있는 건 비웃음이었다.

“풋, 거짓말은 좀 그만 하시죠. 웃기니까.”

“뭐가 거짓말이라는 거냐?”

예기치 못한 조롱을 당한 락비오의 두 눈에서 분노의 불꽃이 번뜩였다.

“자신을 좀 돌아보는 게 어때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

“뭐가 이상하다는 거냐?”

“이거 중증이네. 이봐요, 당신. 지금 왜 나랑 혼자 싸우는 거죠? 양쪽에 늘어선 수십 명이나 되는 부하들을 놔두고 왜 일대일을 고집하죠? 힘을 원한다고 하지 않았 나요? 얘길 들어보니 다수의 무력에 한 사람의 법이 무너진 것 같은데? 그런 처참한 꼴을 두 번 다시 당하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단체로 덤볐어야 할 것 아니에요? 마흔이든 쉰이든 한꺼번에 짓쳐들어 오면 될 것을. 그럼 좀 더 쉽게 끝낼 수도 있었을 텐데?”

“그, 그건…….?”

웬일인지 락비오는 그 쏟아지는 질문에 하나도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정말 이상하다 생각하지 않아요? 게다가 아까 내기를 할 때부터 왜 그렇게 규칙에 집착하죠? 한 대든 두 대든 마음 내키는 대로 치면 되잖아요? 왜 귀찮게 규칙을 정해 그것에다가 스스로를 묶어놓는 거죠? 당신이 말하는 힘이란 그런 규칙 따위는 간단히 부숴 버리는 그런 것 아니었나요?”

“그건 어디까지나 재미로……….”

확신이 들어 있지 못한 락비오의 대답에 곧바로 비류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건 변명일 뿐이에요. 이제 좀 자각하는 게 어때요? 규칙이나 법이나 이름만 다르지 똑같은 거죠. 당신은 혼자서 규칙을 지키면서 이기고 싶었던 거예요. 단 혼자의 힘으로도 다수에게 밀리지 않는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은 것뿐이죠.”

“우, 우…….”

락비오의 입에서 이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무척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지금 그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비류연은 공세의 고삐를 늦추지 않으며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아직도 모르겠어요? 당신이 지금까지 계속 아버지의 그림자를 쫓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로는 극구 부정하고 힘이 정의입네 하고 떠들었지만, 당신의 행동은 그 렇지 못했어요. 당신의 무의식은 아직 당신의 아버지가 옳다고 믿고 있어요. 좀 전에 아버지를 어리석다고 했나요? 아니, 어리석었던 건 바로 당신이에요! 그리고 지금도 그저 어리광이나 부리고 있을 뿐이에요.”

락비오의 몸이 벼락맞은 사시나무처럼 부르르 세차게 떨렸다.

“난, 난…….”

단숨에 정신적인 궁지에 몰려 버린 락비오는 무언가 반박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는 진짜로 그렇게 믿고 있었 던 것이다. 의식의 한구석에서 계속 그렇게 믿어왔던 것이다. 그 사실로부터 계속 도망쳐 다닌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 자신이 바로 가장 큰 겁쟁이였던 것이 다. 이 순간 락비오의 정신은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이때다!’

비류연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고, 만질 수 없는 것을 만진다는 ‘홀황의 경지’에 들어간 비류연 의 눈이 락비오의 마음속에 생겨난 균열을 정확히 감지했다.

“그동안 육체의 갑옷은 상당히 단단하게 연마한 모양인데, 그럼 정신의 갑옷은 얼마나 단단할까나?”

말이 끝맺어지기도 전에 비류연의 몸이 한줄기 뇌전으로 화(化)했다.

비뢰도(飛刀

검기(劍氣) 오의(奧義)

단심무형(無形의 장(章)

심뢰 열파裂破)

비류연의 손에서 비뢰도 하나가 한줄기 섬광이 되어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섬광은 락비오의 이마 한가운데를 정확히 베고 지나갔다. 그 순간 무형의 번개 한 줄기가 락비오의 혼란스런 마음과 정신을 관통했다. 그는 벼락에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뇌 속이 순간 새하얗게 백지가 되어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은 것이다.

비류연은 이것과 비슷한 기술로 예전에 무당산에서 심령제어술에 걸려 있던 갈효봉의 금제를 푼 적도 있었다. 이 기술이 베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이었다. 갈 효봉이 심령제어술에 걸려 있었듯, 락비오 역시 과거에 입었던 정신적 상처에 속박되어 있었다. 이 기술은 그런 것을 베는 기술이다. 하지만 이것은 부드러운 정신 상담과는 달랐다. 이것은 상당히 강제적인 개입이었다. 그리고 마음의 상처가 낫는 경우보다는 훨씬 더 벌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당연했다. 원래는 그런 균열을 비 집고 들어가 완전히 부숴 버리는 것이 이 기술의 본래의 용도였다. 사람의 정신을 부수기 위한 목적을 가진 실로 무시무시한 기술인 것이다.

그걸 비류연은 약간 변형해서 쓰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비류연 본인도 잘 알 수가 없다. 무책임하다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육체와 달리 정신 에 가한 충격은 여러 가지 형태로 표출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방금 비류연은 락비오의 단련된 단단한 육체의 갑옷과는 달리 생각 이상으로 불안정한 정신의 갑옷을 이 일격으로 부숴 버린 것이다. 락비오는 잠시 정신적으로 공백 상태가 되었고, 비류연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비뢰도(飛刀) 오의(義)

환영분신(幻影分身)의 장(章)

팔섬

뇌광굉타(光打)

순간 여덟 개로 불어난 비류연의 신형이 사방에서 락비오의 몸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전처럼 튕겨 나오거나 그러지 않았다. 다만 비류연의 주 먹이 부딪치는 곳마다 둥둥 하는 북소리가 울려 퍼지며 파문이 내달렸다. 정신이 약간 아득해진 상태에서도 육체에 새겨진 무공은 그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이미 간파했어요.”

파문이 퍼져 나가는 반대쪽에 위치한 비류연의 분신이 다시 주먹을 날렸다. 좀 전에 비류연이 맞혔던 곳과 정반대의 장소였다. 그 파문이 서로 부딪치더니 그대로 상쇄되었다. 그것과 비슷한 일을 여덟 개로 나뉘어진 분신으로 동시에 해결한다. 그러다 보니 파문이 빈번히 상쇄되어 반격을 가하는 게 불가능했다.

퍼져 나가는 파문이 다시 돌아올 때 그 힘을 유도해 공격으로 바꾸는 것이 바로 그의 기술 ‘반탄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수의 방향에서 동시에 공격을 가하니, 힘의 흐름을 원활하게 제어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원래 락비오는 인체의 구 할이 넘는 몸 안의 물을 이용해 받은 충격파를 분산시키곤 했는데, 이런 상태라면 그 물이 얼어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충격파를 감쇄시키지 못하게 된 락비오는 자랑하던 육체의 갑옷까지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것은 곧 받은 충격을 그대로 감내해야 된다는 뜻이었다. 쿠쿵!

거대한 탑이 무너지는 것처럼 락비오의 몸이 무너졌다. 그는 그대로 땅에 무릎을 꿇었다. 더 이상 그의 몸에는 반격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금강반탄신공이 완전히 흩어져 버린 것이다. 다시 회복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온몸에서 힘이 썰물처럼 쭉 빠져나가 있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렇게 힘을 숭배하던 그가 힘으로 진 것이다. 완벽한 패배였다.

“내가 져…… 졌다…….”

약간 멍한 목소리로 락비오가 패배를 시인했다. 이 싸움에서 패배했다는 사실보다 비류연의 말발 정신 공격이 더 큰 충격으로 남아 있었다. 망연자실해 있는 락비오를 향해 비류연이 말했다.

“자, 그럼 약속대로 목관이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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