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6권 19화 – 지켜야 할 책임과 피로 이어진 혈연
지켜야 할 책임과 피로 이어진 혈연
―통곡(痛哭)!
그녀, 예청은 외로웠다.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존재인 남편은 어쩔 수 없이 흑천맹으로 떠나고 지금 그녀의 곁에 없었다. 그 서찰에 일단 따르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 이다.
‘하지만 흑천맹주의 암살이라니…….?’
그것도 다름 아닌 정천맹주가, 백도의 장이 흑도의 장을 살해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 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만으 로도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였다.
“흑도와 백도의 전면전쟁…….”
전 무림이 말려들고, 수천, 수만 명의 피가 흐를 대전쟁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갈 게 불 보듯 뻔했다. 때문에 그녀는 무림인의 한 사람으로서 남편인 나백천을 말려 야 했다. 딸아이 목숨 하나를 위해 전 무림을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다고.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성의 목소리. 예청은 끝내 나백천을 말리지 못했다. 아마 그녀의 남편 역시 지금쯤 그곳으로 향하는 배에 오른 채 그녀와 똑같은 고민 을 하고 있을 것이다.
만일 그 비류연이란 아이와 그의 일행이 제시간에 나예린을 구출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그녀가 가진 유일한 통신 수단인 전서응으로 나백천에게 제시간에 연락을 줄 수 없다면 나백천은 괴로운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될 것이다.
‘무림 전체의 안위냐, 아니면 소중한 딸의 안전이냐…….?
전 무림의 평화와 한 여자아이의 목숨. 어느 쪽이 무거운지는 저울에 달아볼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버리지 못했다. 그녀의 남편 역시 그러했다. 사실 지금 은 그 선택을 미루고 있었다, 최후의 최후까지.
그 선택의 기로에 남편이 놓이기 전에 그를 이 지독한 고뇌에서 구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막막한 상태였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기다 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기다리는 것은 예청의 장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손에 넣기 위해 스스로 행동하는 여인이었지, 무언가가 일어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유형의 여인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기다리는 데 재주가 없기에 혼자 남겨진 이 시간이 더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존재가 한없이 무력하게 느껴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도 지면 안 된다고, 지금 각자 다른 방향으로 향한 이들은 그녀보다 더 괴로운 상황에 직면해 있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그녀는 스스로를 더 자책하게 되 었다. 기다리는 이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구나.’
그녀는 강렬한 위기감을 느꼈다. 멍하니 수평선만 바라보면서 배가 돌아오길 기다리다가는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기다리는 데도 재주가 없었지만, 남에게 기대고 약한 소리를 하는 데도 그다지 재주가 없었다. 평소에는 그 높으신 무림맹주님도 그녀 앞에서는 고 양이 앞의 쥐처럼 벌벌 떨고 만다. 그런 그녀가 누구에게 나약한 소리를 할 수 있겠는.
“아!”
불현듯 한 사람의 얼굴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있었다!
빙월선자라 불리며 주변의 경외를 받는 그녀가 기댈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이 강호란도에 있었다. 그 사람이라면 안절부절못하며 괴로워하는 그녀의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어줄 수 있었다.
할아버지.’
갑자기 왈칵 눈물이 솟아나려 했다.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는 그녀로선 지극히 드문 일이었다. 그만큼 그녀가 약해져 있다는 증거이리라.
예청은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행선지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강호란도의 모처에 위치한 ‘흑영의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현재 혁중 노인이 머물고 있는 곳은 한 의원으로 이곳은 그의 입김이 미치고 있는 곳이라 다른 곳에 비해 안심이 되었다. 보다 정확히는 노인을 극진히 따르는 철 각비마대 대주 질풍묵흔 구천학의 입김이었다. 그는 예전에 이 의원 주인의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 녀석의 상태는 어떠냐?”
“아직 깨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송 의원의 말로는 이제 목숨에는 지장이 없을 거라고 합니다. 다행히 처치가 빨랐던 모양입니다.”
“그나마 다행이구나.”
구천학은 아직도 중독 상태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는 칠상흔, 과거에는 이벽한이라 불렸던 자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칠상흔은 심신이 약해진 상태에서 독무의 공 격을 받은 탓인지 아직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우는 아이도 벌벌 떤다는 철각비마대의 대주가 병자 간호라니,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그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똑똑.
그때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분명 ‘진료 종료’라는 팻말을 걸어놨는데 대체 누가……?”
이벽한을 간호하던 구천학의 몸이 그의 애병인 오성묵룡창(五星墨龍槍) 중 하나를 집어 들고는 질풍처럼 움직여 문 옆쪽의 벽에 몸을 찰싹 붙였다. 그리고는 오감 으로 바깥의 상황을 살폈다. 다행히 기척은 하나뿐이었다.
다시 한 번의 기척도 없이 벌컥 문이 열렸다.
쉬이익!
구천학은 장기인 무영창(無影槍)으로 무단 침입자를 공격해 갔다.
스륵!
그러나 그곳에 이미 침입자의 인영은 없었다.
땅!
묵직한 충격과 함께 그의 창이 옆으로 튕겨 나갔다. 그리고 전혀 예기치 못한 사각에서 서늘한 검기가 날아왔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검이었다.
‘고수!’
막기는 이미 늦었다고 판단한 구천학은 창끝을 돌려 적을 찔러 나갔다. 동귀어진을 꾀해 침입자를 저지하려 한 것이다.
검과 창이 상대의 주인을 맞찌르려는 바로 그때!
“둘 다 그만!”
혁중 노인에게서 우렁찬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살기등등하게 찔러 나가던 검과 창이 거짓말처럼 우뚝!’ 멎었다. 조금만 더 갔더라면 서로의 몸을 여지없이 꿰뚫었으리라.
“아는 아이다. 창을 거두거라.”
그제야 구천학은 얼른 창을 거두며 물러갔다. 그제야 그는 침입자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헉!”
침입자는 깜짝 놀랄 정도로 기품이 흘러넘치는 미부인이었다. 그러나 구천학이 더 놀란 것은 그 역시 아는 얼굴이었던 때문이다.
“공주님…….”
그녀는 다름 아닌 빙월선자 예청이었던 것이다.
“방금 전 그림자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창이 누구의 창이었나 했더니, 바로 구 대주의 창이었군요. 예전보다 창법의 조예가 더욱 깊어진 듯하군요.” 갑작스런 기습을 당했는데도 예청의 얼굴에서는 별다른 감정의 동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해진 것은 구천학 쪽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공주님.”
사실 구천학과 예청은 같은 시기에 마천각을 다니던 동기였다. 그러나 당시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던 구천학에 비해 예청은 칠공주파의 한 사람으로서 각 내에 명 성이 자자했었다. 그리고 구천학의 은밀한 우상이기도 했다.
“공주님이라는 호칭은 그만둬 줘요, 구 대주. 모두 옛날에 철이 없었을 때의 일이니까. 이제는 우리 모두 나이가 들어버렸지요.”
“아니오. 여전히 아름다우십니다.”
부동자세를 취하며 구천학이 대답했다. 긴장하고 있는 것이 역력히 느껴졌다.
“빈말이라도 고맙군요, 구 대주.”
물론 그것은 자신의 십이 할 진심이었다, 라고 외칠 뻔한 걸 구천학은 간신히 참아냈다.
“그건 그렇고, 네가 여긴 웬일이냐? 하마터면 다칠 뻔하지 않았느냐? 게다가 그 녀석은?”
그 녀석이란 물론 정천맹주 나백천을 의미했다.
“흑천맹에 잠깐 볼일이 있어서 떠났어요.”
“볼일이라니? 무슨 볼일? 저번에 만났을 때는 아무 이야기도 없었지 않느냐?”
예청의 안색에 어두운 그림자가 깔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로 흑천맹주의 암살이요.”
제아무리 두 사람이라도 그녀의 이 말에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구천학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마터면 예청한테 다시 창을 휘두를 뻔했다. 그러나 혁중은 쌓아놓은 연륜이 깊은 만큼 대처도 침착했다.
“무슨 일이 있었구나?”
조용한 어조로 묻는다. 예청은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로 혁중을 바라보았다.
“딸아이가, 예린이가 납치당했어요.”
감정이라고는 모두 사라져 버린 듯한 그런 무미건조한 말투였다.
“납치라니? 대체 감히 누가 말이냐?”
예청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그녀는 그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혐오스럽다는 듯이 그 이름을 내뱉었다.
“서천멸겁, 바로 그자에게요.”
“…….”
혁중 노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 역시 지금의 서천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혁중은 예청의 등 뒤쪽에서 무슨 일인가 싶어 목을 길게 내밀며 서 있던 구천학에게 잠깐 밖에 나가 있으라고 눈짓을 줬다.
철컥!
구천학이 아쉬움을 뒤로하며 나가자 문이 닫혔다.
“그놈이 예린이가 갈가리 찢겨 버리는 것을 보고 싶지 않으면 흑천맹주의 목을 가지고 오라고 했답니다.”
북해의 얼음처럼 차갑고 무표정한 얼굴, 무감동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냐?”
혁중 노인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이는 백도무림을 책임지는 장입니다. 저는 그의 아내이고요.”
여전히 무감동한 목소리로 예청이 말했다. 있는 사실을 그저 나열한다는 듯한 그런 말투였다.
“알고 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그 자리에 걸맞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렇지.”
“때에 따라서는 대의멸친(大義滅親)할 각오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전 예전에 그 각오를 했었습니다. 나는 정천맹주의 아내에 걸맞은 당당한 여장부로 살아가겠 다고.”
“넌 그렇게 하고 있다.”
혁중 노인이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없어요. 전 그 아이의 어미인 것을 포기할 수가 없어요.”
무감동하던 예청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차갑고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던 예청의 얼굴에 감정의 파문이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고개가 푹 숙여진 예청의 꽉 쥐어진 주먹으로부터 시작된 떨림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갔다.
혁중 노인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작은 한숨을 내쉬며 예청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떨리는 예청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에 쌓여 있던 감 정이 폭발했다.
“할아버지!”
예청은 울음을 터뜨리며 혁중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끝없이 울음을 토해냈다. 그녀가 약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 앞에서. “힘들었겠구나.”
혁중은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예청의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예린아…… 예린아…… 예린아……!!!”
그녀는 울고 울고 또 울었다.
혁중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뒤,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싶었을 때 비로소 입을 열었다.
“자초지종을 말해보거라.”
예청은 정천맹주 나백천 앞으로 전달된 한 장의 초대장으로부터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곳 강호란도로 동행해 와 딸아이와 연비라는 아이를 만났던 일. 결승전이 끝나고 대기실로 갔을 때 딸이 납치되었던 일. 윤미라는 아이의 증언, 정보상 구노이의 죽음, 그리고 나백천 앞으로 보내진 목관과 그 안에 들어 있던 서찰, 그리고 그 내용까지 모두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혁중은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쯧쯧. 마천각의 아이들과 천무학관 아이들의 충돌은 피할 수가 없겠구나. 아니, 이미 충돌하고 있겠군.”
여기서 출발한 시간으로부터 얼추 계산해 보면 초반에 전멸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한창 싸우고 있을 때였다.
“너는 왜 마천십삼대의 부대가 십삼대를 칭하면서도 왜 열두 개밖에 없는지 알고 있느냐?”
예청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오. 보이지 않는 십삼대는 전설일 뿐 아니었나요?”
마천각에서 십삼대에 관련된 이야기는 거의 괴담 같은 거였다. 마천각 창설 이래 아무도 본 일이 없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십삼대는 있다.”
단호한 목소리로 혁중이 단언했다.
“그게 정말인가요?”
“노부가 너에게 거짓말을 해서 무엇 하겠느냐?”
“그들은 대체 어디 있죠? 혹시 할아버님이 키우신 비밀 부대인가요?”
혁중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는 그런 것 키운 적이 없다. 사실 십삼대는 항상 너희들 옆에 있었다. 다만 너희들이 보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지.”
“항상 존재하고 있었지만 우리들이 보지 못했을 뿐이다, 그 말씀이신가요?”
“그래. 뭐, 자신들이 십삼대임을 자각하지 못한 그녀석들도 문제이긴 똑같지만 말이다. 쯧쯧쯧.”
혁중 노인은 또다시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혀를 찼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감이 안 잡히는걸요?”
사실 그녀의 주위에서 그 비밀을 아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잘 생각해 보거라. 그러면 알 수 있다.”
“그러다가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도 못 알아차린 거 아니에요. 그러니 가르쳐 주세요.”
“안 된다. 절대 비밀이다!”
과장될 정도로 엄숙한 목소리로 혁중 노인이 말했다.
“…라는 건, 거짓말이다!”
그러고는 만면에 웃음을 띠며 혀를 내밀었다. 그리고는 껄껄껄 웃었다.
감히 보리라 생각하지도 못했던 그 익살스런 표정에,
“풋!”
예청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의외의 존재가 상상불허의 의외의 행동을 한 만큼 그 효과는 훨씬 대단했다.
“이제 좀 웃는구나.”
혁중 노인이 그제야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연륜 깊은 노인이 가끔씩 살짝살짝 보이는 그런 개구진 웃음이었다.
“할아버지…….?”
아무래도 혁중 노인은 예청의 기운을 북돋워 주기 위해 이 이야기를 꺼냈던 모양이다. 확실히 혁중 노인이라는 전설적인 존재가 곁에 있으니 예청도 조금은 기분 이 안정되었다. 뭔가 희망이 손에 잡힌 것 같은 그런 느낌이었던 것이다. 이 세상에서 불가능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존재, 예청에게 있어 혁중 노인은 그런 존 재였다.
“내 크게 선심을 써서 너에게만 알려주마.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말해주면 안 된다. 알겠느냐?”
“네, 약속할게요.”
예청이 선뜻 대답했다.
“음중양(陰中陽), 양중음(陽中陰)에 대해서는 너도 알고 있겠지?”
“물론이죠. 태극 문양에서 보면 검은색 속의 흰색 작은 원, 흰색 속의 검은색 작은 원이 바로 그것들이잖아요?”
태극 문양에서 검은 쪽은 ‘음(陰)’을 상징하고 흰 쪽은 양(陽)을 상징했다.
“그래, 음이 오래되면 양이 되고, 양이 오래되면 음이 되는 것을 상징하는 것들이지. 음과 양이 완전히 이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음 속에 양이 품어져 있고, 양 속 에 음이 품어져 있는 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음양의 순환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죠.”
“잘 아는구나.”
“그런데 그거랑 마천십삼대랑 무슨 상관이 있나요?”
“십삼대가 바로 ‘음중양’이다. 흑중백이 바로 그들이지.”
혁중 노인의 말은 생각 이상으로 짧고 알쏭달쏭했다.
“……”
예청이 아직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것을 본 혁중 노인이 불쑥 한마디를 던졌다.
“그럼 너는 그동안 괜히 ‘교환생도’ 제도가 있었다고 생각했더냐?”
“교환생도제도…… 흑 속의 백, 백 속의 흑…… 설마……!”
잠시 이리저리 생각하던 예청은 너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짚이는 곳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 임시 열세 번째 기숙사를 쓰는 그들이 진짜 십삼대다.”
“그럴 수가!”
마천십삼대는 사실상 마천각의 인원들로 이루어진 부대가 아니었다. 천무학관, 즉 ‘백(白)도’에서 ‘흑(黑)도’인 마천각으로 온 천무학관 사절단, 바로 그들이 ‘보 이지 않는 십삼대’였던 것이다.
“흑도와 백도가 힘을 합쳐 천겁령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지. 그런데 지금은 마음을 합하기는커녕 서로 충돌하고 있을 뿐이니……. 쯧쯧.”
음이 양이 되고 양이 음이 되는 것. 그 순환이야말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음중양, 양중음은 그 변화의 중간에 있는 과도기이자 일종의 완충장치였다. 음양을 교류 시켜 주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것을 깨우쳤으면 싶었다. 좌가 없이는 우가 없고 음이 없이는 양도 없다. 균형과 조화를 이룰 필요가 있었다.
그런 사실을 스스로 깨달아주길 바랐다.
무신과 무신마라는 절대적인 존재가 강압적으로 명령해서는 의미가 없었다. 그런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조화와 균형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서 끝없이 실험하고 시험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난 것 같았다.
“쯧쯧, 미증유(未曾有)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거늘 적의 꼬임에 넘어가 서로 싸움질이나 하고 있으니…….’
백 년을 쏟아 부었던 원대한 계획은 그다지 좋은 수확을 거두지 못했으니 혁중 노인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친구와 함께 세웠던 그 뜻이 지금에 와서는 세월에 풍화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남아 있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전투구뿐이었다.
천무학관과 마천각을 세웠던 무신과 무신마 그들의 마음이 지금 시대에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지난 세월 동안,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들의 정신과 목소리는 인 간의 욕망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열화되어 이제는 그 잔재조차 남겨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의 의도와 마음이 시대를 넘어 전해지길 바랐건만 그것은 덧없는 꿈과도 같았던 모양이다.
“우리들의 마음이 시대를 뛰어넘어 너희들에게 전해지길 바랐건만 아무래도 그것은 덧없는 꿈과도 같았던 모양이구나.”
참으로 쓸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예청은 송구스러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무림에 사나운 폭풍이 불어닥칠 듯하구나.”
혁중 노인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 반쪽짜리 세계가 다가오는 미증유의 위기에 직면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노인은 그 끔찍한 대답을 알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건만…….’
백 년 전 강호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던 ‘천의 후예들. 표면화되지 않았을 뿐,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여전히 소리없는 싸움이 벌어져 왔었다. 그러나 수법이 비상하여 꼬리를 잡는 데 실패했다. 아니, 꼬리는 잡았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그 꼬리를 자르고 도망갔다. 그 꼬리들은 몸통이 아닌 깃털들이라 해서 ‘천우’라 불 렸다. 그러나 지금 움직이고 있는 이들은 달랐다. 드디어 몸통이 직접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는 건 싸움의 때가 다가온다는 거군.’
지금으로서는 그것을 피해갈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 이 겉보기뿐인 평화를 더 길게 이어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난 백 년 동안 안락한 평화 속에서 살아왔던 이들이 과연 다가오는 싸움을 극복할 수 있을까??
배부르고 등 따시게 보낸 탓에 자신들의 이권밖에는 머릿속에 넣지 못하고 있는 저들이?
“진짜 무인은 얼마나 남았을까?’
그걸 막기 위한 마천각과 천무학관이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마천각은 포기해야 될지도 몰랐다. ‘불찰이다.’
작금의 사태는 산 위에서 굴러 떨어지기 시작한 바위랑 같았다. 이미 저지하기에는 너무 때가 늦었다.
‘좀 더 빨리 전 무림에 경종을 울렸어야 했던 것을…….’
아이들이 스스로 정신을 차리기를 기다리며 그저 지켜보고 있었건만, 아무래도 쓴맛, 매운맛을 모두 본 다음에야 정신을 차릴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나 마찬가지가 될 터였다.
“하아…….”
혁중 노인은 좀처럼 하지 않는 한숨을 내쉬었다.
강호의 앞날에 두꺼운 암운(雲)이 끼어 있는 것처럼 느껴져서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심려 때문에 짓눌릴 만큼 약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곧 혁중 노 인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예청을 보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래, 그건 그렇고… 좀 나아진 것 같구나.”
예청은 좀 전보다 훨씬 안정되어 있었다. 혁중이라는 존재가 큰 지지대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네, 만일 그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땐 그자는 어미의 무서움을 알게 될 겁니다.”
그것이 그녀가 지금 내릴 수 있는 결단이자 각오였다.
“아직 최악의 상황을 생각할 때는 아니다.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그 비류연이란 아이는 믿을 만하다. 지금은 믿고 기다리도록 하자.”
비류연이란 아이를 믿어라, 그 말에 예청은 깜짝 놀랐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할아버지가 믿을 만하다고 인정하다니…… 대체 그 애의 정체가 뭐지? 어디에나 굴러다니는 말 뼈다귀는 아니었단 말인가?”
할아버지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어지간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했다. 본인의 무력이 전설 급인만큼 사람을 보는 눈은 상상 이상으로 짰던 것 이다. 예청이 멍하게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혁중 노인이 문밖을 향해 외쳤다.
“밖에 있는 세 녀석, 네놈들도 마찬가지다! 모두들 경거망동하지 말고 꼼짝 말고들 있거라!”
문밖에는 구천학 한 사람밖에 없어야 하는데 언제 세 사람이 되었단 말인가?
“특히 빨간 머리, 지금 혼자 마천각으로 쳐들어간다거나 하는 생각일랑은 꿈에도 품지 말아라.”
언제 왔는지 구천학 옆에서 들어오지도 못한 채 왔다리 갔다리 하고 있던 염도는 화들짝 놀라 선착장 쪽으로 달려가려던 발을 슬그머니 내려야 했다.
“파란 놈, 너도 마찬가지다.”
염도와 마찬가지로 어디론가 달려가려던 빙검은 어쩔 수 없이 들었던 발을 내려놓아야 했다.
이 둘은 혁중 노인의 심부름으로 해독에 쓸 약을 구하러 갔던 것이다. 천하의 염도와 빙검을 한 묶음으로 심부름 보낼 수 있는 것은 아마 이 노인과 비류연뿐일 것 이다.
“쳐들어간다니요? 그런 마음 품은 적 없습니다, 노야.”
문밖에서 변명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염도의 목소리였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야. 저는 성격이 폭급한 이 녀석과는 다릅니다.”
뒤이어 들린 목소리는 예청도 익히 아는 빙검의 목소리였다.
“그래? 그럼 됐고. 어쨌든 안 돼. 알겠지? 문제를 더 키우지 말아라. 그건 그렇고, 심부름시켰던 약재들은 모두 가져왔는냐?”
“네, 모두 가져왔습니다.”
염도와 빙검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리고는 서로를 쏘아보며 ‘따라 하지 마!’라고 동시에 외쳤다. 한 사람만 보내도 되는데 두 사람 모두 내보냈던 것은 붙여놓기만 하면 둘이서 만날 투닥투닥 싸우기 때문에 환자가 정양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시끄러워서 내보냈던 것이다.
“셋 모두 알겠느냐?”
확인하듯 다시 묻자,
“…예.”
마지못한 듯한 대답이 문밖에서 들려왔다.
‘예린아, 제발제발 무사하거라…….?’
지금 예청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며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크나큰 인내를 필요로 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