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6권 20화 – 개안(開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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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6권 20화 – 개안(開眼)!

개안(開眼)!

-봉황의 날개를 묶은 사슬

“어머니…….”

침상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나예린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백자기 같은 새하얀 이마와 가녀린 몸은 식은땀으로 홍건히 젖어 있었다. 정상적인 운기 조식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현상. 또다시 실패였다.

“역시 안 돼.

나예린은 자신이 갇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계속해서 관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곳이 지상이 아니라 ‘지하인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이곳 은 쇠창살이 달린 조그만 창 말고는 천장에 뚫려 있는 조그마한 통풍구가 전부였다. 그리고 그곳으로 흘러들어 오는 차갑고 눅눅한 공기에는 땅속 특유의 냄새와 감 촉이 배어 있었다. 다만 감옥치고는 가구들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어서 황량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붉은 색조의 비단을 쓴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기방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예린은 이곳이 강호란도인지, 마천각인지, 아니면 전 혀 다른 별개의 장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서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장담할 수 있었다.

이곳은 바로 지옥(地獄)이었다.

시시각각으로 공포와 두려움이 그녀의 정신을 갉아먹으려 벼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뼈를 깎는 수련을 통해 쌓아왔던 내공은 완전히 봉쇄되어 있는 탓에 그녀의 몸은 한없이 무력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녀를 이 지옥에 가둔 자는 그녀가 가 장 두려워하는 악마 같은 자였다. 그의 존재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등골이 오싹해지고 마음이 불안으로 요동쳤다. 그 역시 그녀가 이렇게 공포와 불안으로 몸부림치길 바라고 있을 것이다. 몸부림치면 칠수록, 자신이 놓인 상황에 절망하면 할수록 그녀의 영혼은 점점 더 마모되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은 그를 매우 흡족하게 해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녀의 의지는 아직 꺾이지 않았다. 아니, 꺾일 수 없었다. 이대로 무너지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다. 그 정도 자각은 가지고 있었 다. 마음이 무너지면 그녀는 완전히 그에게 패배하고 만다.

과거에 그녀의 정신을 유린했던 악몽에서 두 번 다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반드시 여기서 탈출해야 해!’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부자유스럽게 속박된 이 몸을 어떻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그녀에게는 무엇보다 더 시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그건 바로 진기가 돌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운기조식을 위해 한 시진(두 시간) 이상을 앉아 있었는데도 성과는 조금도 나타나지 않았다.

몇십번을 시도했지만 마찬가지였다. 운기조식을 해서 몸을 회복하려 해보았지만, 진기가 돌지 않았다. 마치 내공이 모두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처음에는 설마 단전이 파괴된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그자라면 충분히 할 법한 일이었다. 그러나 살펴본 바로는 그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점혈’을 생각해 볼 만했다. 하지만 점혈이라는 것도 만능은 아니었다. 그녀는 여러 가지 ‘해혈술’을 숙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방법들이 전혀 듣지 않았다. 해혈술을 사용했는데도 점혈된 혈이 감 지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점혈술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금제(禁制)…….?’

그것도 전혀 그 존재를 느낄 수 없는 것을 보면 상당히 고도의 금제가 분명했다. 모종의 금제와 족쇄가 그녀의 자유를 구속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지? 난 무엇을 해야 할까……..

여러 번 시도해 보았지만, 역시 진기를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렇게 완벽한 폐맥금제술이 있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금제는 점혈과는 다르다. 그것은 시간이 지난다 해서 풀리는 일도 없이 영원히 지속되는 궁극의 족쇄였다. 영령과의 싸움으로 인해 탈진한 상태에서 금제를 당한 나예린의 힘은 평범한 소녀 정도에 불과했다. 지금 이런 상태에서 그자에게 무슨 일을 당한다면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때는 아혈이 점해지기 전에 혀를 깨무는 수밖에.’

그 이외의 선택지는 없었다. 상황은 절망적이라 해도 좋았다. 지금 이런 몸 상태로는 저 철문이 활짝 열려 있다 해도 탈출은 불가능했다. 검이 손에 들려 있다 해도 시시한 일반 무사에게도 꼼짝없이 제압되고 말 것이다. 그 뒤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굴욕뿐이었다.

‘이 지옥을 탈출할 방법은 정말 없단 말인가…….’

그때, 나예린의 마음이 꺾이려 할 때 그녀의 뇌리 속으로 항상 자신만만하게 웃고 있는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포기하지 말아요. 모든 방법을 다 써본 다음에 포기해도 늦지 않아요. 뭐, 그러다 실패하면 한번 웃어버리면 그만이죠. 내공이 다 없어져도 강력한 의지만 있다면 어떻게든 해볼 수 있는 거예요.”

그 얼굴이 떠오르자 짓눌려 터져 버릴 것 같던 가슴이 이상하게 차분해졌다. 그녀는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을 불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봉긋한 가슴에 갖다 댔다. 돌처럼 무겁게 누르고 있던 무언가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래, 아직 어느 것 하나 끝나지 않았어.’

아직 자신은 이렇게 살아 있었다. 밖에서는 비류연이 그녀를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어쩐지 나예린은 그 사실을 더없이 명징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이 포기하지 않는데 내가 먼저 포기할 수는 없어.”

밤하늘처럼 깊고 아름다운 눈동자 깊은 곳에서 별빛 같은 빛이 반짝였다. 희망을 모두 버리기에는 아직 너무 일렀다. 그녀는 이제 겨우 한 가지밖에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 몇 가지 더 해볼 수 있는 것이 있을 터였다.

“진기는 봉쇄됐지만 내 의지까지 봉쇄되어 있는 건 아냐!”

그자는 그녀의 정신에까지 금제를 가하지는 못했다.

나예린은 가부좌를 튼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진 또 하나의 힘, 내공과는 상관없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힘. 바로 용안의 힘을 더욱 강하게 발현시키기 위해서.

용안의 힘을 더욱 날카롭게 연마하는 것이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자신의 내면 안으로 침잠해 들어갔다.

이 행동 끝에 희망이 기다리고 있을지, 절망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과연 이게 무슨 도움이 될까 회의를 품고서 여기서 이대로 주저앉는 것도 하 나의 선택지였다. 그리고 그저 누군가가 자신을 도와주길 절망 속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저 하늘에서 누군가가 구원의 동아줄을 내려주길 바라며.

‘그런 것은 이제 딱 질색이야. 그저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기만 해서 어쩌겠다는 거지? 나의 마음은 이미 꺾여 있을 텐데? 이 이상 그자를 즐겁게 만들어줄 수는 없어.”

가능성이 남아 있는 이상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고 그녀는 결심했다. 스스로 희망의 끈을 놓아버리면 그 순간 그녀에게 남아 있는 것은 끝없는 절망의 구렁텅이 뿐이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한 끝까지 희망을 놓치지 않겠다고 그녀는 다짐했다.

그녀의 정신은 한 사람과의 만남 이후 조금씩 조금씩 단련되어 왔던 것이다. 그와 보낸 시간이 그녀의 영혼을 지탱해 주고 있었다.

‘류연…….”

그 따뜻하고 소중한 기억들이 있기에 그녀는 아직 포기할 수 없었다.

용안(龍)!

그것은 뭐랄까, 어느 날부터 그녀에게 있었던 능력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이나 감정이 마치 눈에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읽어내지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스스로 제어되는 능력은 아니었다. 타인의 마음을 읽고 싶지 않을 때, 그 추악한 마음에 접촉하고 싶지 않을 때 의식적으로 능력을 차단할 순 없었다. 인간 의 정신은 깨끗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아니, 인간의 정신만큼 오염되기 쉬운 것도 없다. 강한 의지를 지닌 몇몇 사람만이 그 오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어 린 소녀에게 인간의 숨겨진 추악한 정신을 읽는다는 건 견뎌내기 힘든 일이었다.

때문에 아직 어렸던 그녀의 정신은 주위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추악한 감정의 소용돌이를 견딜 수 없었고, 점점 더 마음을 닫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되었던 것이 다.

또한 용안과는 별도로 그녀가 가지고 태어났다고밖에 할 수 없는, 보는 사람의 마음에서 어두운 본능을 자극하는 체질은 그녀에게 있어 치명적인 맹독이었다. 때 문에 그녀의 능력은 그녀에게 고통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자연스럽게 사내들의 어두운 욕망을 자극해 그들을 휘어잡는 그녀의 그런 체질은 인간의 마 음을 읽는 용안을 지닌 그녀에게 있어서 최악의 체질이라 할 수 있었다.

차라리 알고 싶지 않고 무지한 채로 있고 싶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정신의 어두운 부분을 외면하거나 스스로를 속여가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녀의 몸에 새 겨진 능력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했다. 그래서 한때는 이 눈을 저주하기도 했다. 이 더러운 체질과 함께.

그래서 그녀는 마음의 벽을 차곡차곡 쌓은 다음 그것을 얼림으로써 자신의 마음을 보호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얼음을 녹여줄 한 사람을 만나기 전까진. 그러니 그 녀는 이런 곳에서 포기할 수 없었다.

다시 한 번 그와 만나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자신의 정신 깊은 곳으로 침잠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자신 안에 잠재되어 있는 이 능력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지금 그녀가 유일하 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용안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지녀왔던 이용안이란 능력에 대해 처음으로 직시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마음 깊숙이 침잠해 있던 나예린은 그동안 자신의 용안이 읽어왔던 것들을 되짚어보았다. 그것들 중에는 단순히 독심의 영역을 넘어가는 것들도 많이 있었 다. 특히 상대의 공격을 예측할 때, 사실 그녀는 상대의 마음을 읽고 그것을 피해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검의 궤도를 알 수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공격 들을 읽어내고 피해낸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렇다면 난 그동안 무엇을 읽어온 거지?”

나예린은 천천히 눈을 떴다. 칠흑의 밤하늘처럼 깊은 눈동자 깊숙한 곳에서 별무리 같은 빛이 반짝였다. 그녀는 사람이 아닌 다른 것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토옥!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진다.

토옥! 토옥! 토옥! 토옥!

돌천장에 낀 습기가 방울로 맺혀 바닥에 떨어진다.

그것은 무척 기묘한 감각이었다. 집중하면 할수록 그녀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좀 더 자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타인의 마음을 읽어내는 독심 능력이 아니었 다. 그것 이상의 것을 그녀의 눈은 비추고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 그녀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기에 의미를 가지지 못했을 뿐이다.

‘모두 일곱 곳.’

그 사실을 읽어낸 다음에야 나예린은 이상한 점을 눈치 챘다. 그녀가 갇혀 있는 방 안 어디에도 물방울은 맺혀 있지 않았던 것이다. 방금 전 그녀가 알아차린 것은 모두 문밖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나예린은 좀 더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자연의 흐름이 보다 선명하게 눈에 잡혔다. 두꺼운 철문과 돌벽에 가려져 보일 리가 없는데도 마치 직접 눈에 보여지는 것처럼 그녀의 머릿속에 용안으로 읽어낸 정보들이 재구축되며 영상이 비춰지고 있었다.

토옹!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에 떨어진 물방울이 파문을 일으키며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그 울림이 사방의 벽을 두드린다. 벽에 부딪친 소리가 반향되어 다시 다른 방향 으로 퍼져 나간다.

솨아아아아아!

좁은 통로로 바람이 분다. 물이 떨어진다. 그리고 저 멀리서 사람의 미약한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그들의 심장 소리까지 귓가에 또렷이 들리는 듯했다. 상당한 고 수인 듯했다. 역시 아무에게나 감시를 맡기지는 않았던 듯하다.

지키는 사람은 두 사람. 고수이긴 했지만 생각보다 많은 수는 아니었다. 그만큼 금제를 신뢰한다는 반증. 그들은 지금 그녀의 방으로부터는 상당히 떨어진 곳에 위 치해 있었다.

“내공만 회복할 수 있다면.

경비 두 사람 정도는 어떻게 할 수 있을 듯했다.

지금 그녀는 무의식중에 이 세계의 흐름을 읽어내고 있었다. 거의 예지안에 가까운 힘이었다. 모든 현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이었다.

징조를 읽어내는 눈,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만 국한되지 않고 세계의 징조조차 읽어낼 수 있었다. 거대한 현상이 발생하기 전에 나타나는 징조를 통해 그녀는 앞으 로 벌어질 현상조차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의 흐름, 음양의 변화와 오행의 상생상극을 읽어냄으로써 보이지 않는 것조차도 선명히 볼 수 있었다.

용안의 진정한 개안(開眼)이 시작되고 있었다.

‘일단 어떤 금제가 가해졌는지 알아야 해.’

그녀는 개안된 용안의 힘을 이용해 자신의 몸을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그냥 있는 정도로는 별다른 이물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몸에 가해진 금제는 매우 미세한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먼지보다 작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우선 그것을 찾아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무언가를 관찰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다. 자기 몸에 어떤 조치가 취해졌는지 모른 채 그것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나예린은 의식을 집중했다. 그리고는 자신을 낱낱이 해체하는 기분으로 스스로를 관조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아무리 작다 해도 그것은 그녀의 몸 외부에서 들어온 이물질이었다. 애초에 그녀에게 속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단서로 그녀는 자신의 내부를 바라보았다. 뼈와 근육과 피의 흐름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근육과 자신의 의지에 관계없이 움직이는 근육들을 관찰한다. 심장이 맥동하며 전신으로 피를 보내는 것을 관찰한다. 심장을 출발한 피가 사 지백해를 향해 흘러나간다. 생명의 힘이 그 피를 타고 움직인다. 폐가 신선한 공기를 받아들이고 다시 탁한 공기를 내뱉는다. 그녀는 호흡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찰 한다. 그리고 이해한다. 호흡을 통해 들어온 공기가 피를 타고 사지로 전해지는 것을. 자신의 몸 구석구석에 공기가 전해지는 것을. 이런 현상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 지 모르지만,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의 몸에나 일어나는 현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이것은 기의 수련과는 또 다른 과정이었다. 이것은 생명의 맥동이었다.

그녀의 의식이 피를 타고 전신 구석구석을 돌아다닌다. 모아졌다 확산되었다가 다시 모아진다.

돌고 돌고 돌고.

면면부절(綿綿不絶) 끊임없이 움직이는 생명의 고동 속에서 그녀는 인간의 육체를 이해한다. 그리고 찾기 시작했다. 자신의 육체에 침입한 이물질을. 이 생명의 순환에서 떨어져 나가 있는 이단을.

‘찾았다!’

마침내 그녀의 의식이 생명의 순환 고리 바깥에 위치한 이물질을 감지해 냈다. 개수는 모두 총 서른여섯개. 그 엄청난 숫자에 그녀는 잠시 놀랐다. 위치를 특정할 수 있었기에 그중 하나에 의식을 집중한다. 그러자 그것이 머리카락만큼이나 가는 금침이라는 사실을 읽어낼 수 있었다. 길이는 모두 제각각이었고, 모두 그녀의 중 요한 혈들을 제압하고 있었다. 그것은 기가 지나가는 길에 말뚝처럼 박혀서 그것들의 운행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나 가늘고 은미(隱微)해서 통증은커녕 이물감조차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방식은 설마…… 쇄봉금인!’

나예린의 봉목(鳳目)이 경악으로 인해 부릅떠졌다.

육육쇄봉익금침폐맥대법(六六鎖鳳翼金針閉脈大法)!

머리카락보다 가느다란 서른여섯 개의 금침을 육체 깊숙이 박아 넣어 기의 흐름을 완전히 봉쇄하는 대법으로, 한 번 시술되면 두 번 다시 풀 수 없다는 궁극의 금 제 수법이었다. 무림에 큰 죄를 지은 무림공적에 한해 그들의 내공을 영구히 봉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궁극의 금제

“난 두 번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지 못하는 건가…….?

목이 타는 듯 아프고 머리엔 현기증이 났다. 마음 한가득 절망이 차오른다. 너는 두 번 다시 과거로 돌아가지 못해, 라고 마귀가 귓가에서 속삭이는 듯했다. 갑자기 검은 악의를 몸에 두른 ‘그자’가 생각나 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안 돼! 정신 차려, 나예린!’

스스로를 북돋우기 위해 속으로 외쳐 보지만, 마치 먼 곳에서 누가 외친 것처럼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또다시 그녀의 앞을 가로막은 잔인한 시련에 마음이 무너 지려 하고 있었다.

가장 흉포한 악인들만 감금된다는 무림뇌옥 무간옥’에서 지금까지 그 금제를 풀고 탈출한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강한 내 공을 지닌 자라 해도 한 번 이 금제가 행해지면 평범한 일반인으로 돌아가고 두 번 다시는 예전의 내공을 회복하지 못한다고 한다. 개중에는 그 사실에 절망해 자살 하는 자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난 이제 어쩌면 좋지…….’

그녀의 날개를 속박하고 있는 족쇄만 찾아낸다면 이 어둡고 차가운 지옥의 밑바닥에서도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가 찾아낸 것은 날개를 묶 는 사슬이 아니라 그녀의 날개를 부러뜨린 잔인한 칼이었다.

‘난 이대로 두 번 다시 날아오를 수 없는 건가…… 이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눈앞이 캄캄해지고 목이 꽉 막힌 듯 숨 쉬기가 힘들었다. 구렁텅이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손을 뻗어보지만, 그녀가 디디고 있는 바닥은 밑이 없는 늪처럼 더욱더 깊 어질 뿐이었다. 빛을 향해 뻗은 손은 희망에 닿지 않은 채 공허한 어둠만을 움켜쥘 뿐이었다.

두 눈 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난 여기서 이대로 그자에게 농락당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나의 운명은 더 이상 나의 손으로 움직일 수 없단 말인가??

그녀가 절망의 밑바닥으로 잠겨 익사하려 하는 찰나, 그녀를 향해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ᅳ안 돼요, 예린!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요. 운명을 움직이는 것은 인간의 의지니까요!

그것은 그녀가 가장 잘 아는 한 남자의 목소리, 바로 비류연의 목소리였다. 방금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똑똑히 들렸던 것이다. 나예린은 깜짝 놀란 방 안을 이리저 리 살펴보았다. 그러나 역시 비류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환청이었나…….

그러나 그런 것치고는 마치 바로 곁에 있는 듯한 생생함이었다.

나예린은 비류연의 정신이 꺾이는 것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어떤 권력도, 힘도, 배경도, 관습도, 관례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했다. 좀 제멋대로인 면이 있고 막무가내인 면도 있었지만, 그는 이 잔혹한 세계를 향해 꿋꿋이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켰다. 타인이 이해해 주지 않더라도, 타인이 손가락질하더라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서 그녀가 가진 능력이 그의 모습과 성격 그대로 눈동자 안에 비춰지고 있는 듯했다.

갑자기 그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절망이란 말을 모르는 듯 언제나 씨익 웃고 있던 장난스런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모두가 포기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절망의 한가운데서 그는 미소 지을 줄 알았다. 그리고 그 손으로 운명의 파도에 맞서 싸웠다.

그러니 나도 맞서 싸우자.

“나는 아직 살아 있지 않은가!’

아직은 생명의 끈을 확실히 이 손안에 움켜쥐고 있었다. 그걸 놓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그가 해주었던 말대로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 미래가,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말이다.

‘나의 미래는 내 손으로!’

그녀는 자신의 손을 한 번 내려다본 다음 힘껏 움켜쥐었다. 아직 그 안에서는 생명이 느껴졌다.

‘포기하는 그 순간이 모든 가능성을 내던지는 순간. 그렇죠, 류연?’

이 길 끝에 남아 있는 게 비록 절망이라 해도, 그것이 나오는 그 순간까지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리라 나예린은 결심했다.

아무리 날개를 꺾였다 해도 봉황은 다시 날아오를 수 있다. 재가 되어도 불 속에서 다시 부활해 날아오르는 것이 바로 봉황이기에. “아직 나의 영혼은 꺾이지 않았어!’

그녀의 정신에 깃든 영혼의 불길은 아직 꺼지지 않고 있었다. 그 불이 꺼지지 않은 이상, 아직 봉황은 죽은 게 아니었다.

“나도 싸울 테다.”

이 지옥에서도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싸우기로 결심했다. 과거의 악몽에 짓눌린 채 사는 삶은 이제 지겨웠다. 그녀는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이 지옥으로부터도, 그 리고 과거로부터도.

나예린은 정신을 집중해 의지력을 높였다. 그리고는 그 의지를 이용해 원래라면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없는 몸 안의 근육들을 의식적으로 자극해 움직이기 시작했 다.

혈류의 흐름도 그 속도를 조절한다. 그리고는 세세한 근육들과 혈류의 압력을 이용해 그것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에 박혀 있는 가시를 빼낸다는 느낌 으로 계속해서 의식을 집중했다.

중요한 것은 금침의 크기와 위치를 정확히 인지하는 것이었다. 그래야만이 정확히 근육과 피를 움직여 그것에 작용하도록 할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은 쉽지 않았 다. 무엇보다 지금 그녀는 내공의 도움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온몸에 충만한 기가 좀 더 쉽게 근육 조직들을 움직이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한 지금 그녀는 순수하게 의지의 힘만으로 육체를 조작해야만 했다. 그것은 매우 힘들고 지루하고 막대한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하 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시작할 때부터 결정해 놓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녀는 지루하고 끈질긴 작업을 계속해 갔다.

그녀의 날개에 박힌 말뚝을 뽑아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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