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無名), 나서다
-심심풀이
“하암, 졸린데 우린 그냥 돌아가서 잠이나 더 자는 게 어떨까? 어때, 좋은 생각 같지 않아, 부대장?”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무명(無名)은 잔뜩 긴장한 채 서 있는 장소옥을 돌아보았다.
“안 됩니다. 절대로 안 됩니다.”
작은 체구의 장소옥이었지만 반대할 때는 단호했다. 대장이 시도 때도 없이 게으름을 피우려 할 때마다 강력하게 반대하는 것이 바로 육번대 부대장이 대대로 맡 아온 본분이라고 주장하는 이다웠다.
“정말 안 돼?”
심히 은근한 목소리로 묻는다.
“그런 애처로운 눈동자로 바라보셔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침입자가 마천각 내를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지금 잠이 오십니까?”
“엉.”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무명이 대답했다. 마천십삼대에서 가장 불행한 부대장으로 불리는 장소옥은 자신도 모르게 ‘끄응’ 하고 신음 소리를 내고 말았다. “제육번대 대장님답게 자리를 지키세요. 덤으로 체통도.”
전자보다 후자 쪽이 더 요원했다.
“졸린데…….”
무명에게 있어서 잠이란 것은 언제나 자도 자도 부족한 느낌이 드는 어떤 것이었다. 지금도 또 졸리다. 가서 더 자라고 몸이 명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지는 그 자신도 알지 못한다.
다만 눈을 뜨고 있어도 여전히 자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자신이 지금 깨어 있다는 자각이 전혀 들지 않는 것이다. 덤으로 자신이 과거에 누구였는지 역 시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의 자신은 누구였는지 알고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마천각의 제육 기숙사를 담당하는 사감이자 그 아이들을 이끌고 있는 육번대 대장이라는 대외적인 직책을 빼면 남는 게 뭐가 있을까? 이 육번대 대장이라는 자리 도 그에게 있어서는 누가 하라고 하니까 했고, 누군가가 그 자리를 주고서 뺏고 있지 않으니 관성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계속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그 자리가 어쩐지 자신과 동일해져 버린 듯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그런 자리 따위는 어찌 되든 상관없었다. 당장 빼앗아간다 해도 아무런 저항감도 없을 것이다. 원 래 그 자리는 자신의 자리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있을 곳이 어딘지 정확히 아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그냥 마지못해 이 자리에 계속 습관적으로 머물러 있는 것뿐이다.
“난 무엇일까?”
꽤 철학적인 질문인 것 같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였다. 그것은 ‘난 무엇이었을까?’에 후행하는 질문이기도 했다.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있다. 그리고 현재를 양분으로 미래가 생겨난다. 이 셋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삼각형이다. 높음과 낮음, 뜨거움과 차가움, 김과 짧음 같이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천지인, 정기신과 같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절대적인 가치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삼각형은, 그의 완벽한 조화는 부서져 있었다. 과거라는 꼭지점이 부서진 그는 현재와 미래만이 하염없이 늘어서 있는 직선일 뿐이었다. 지금의 그는 뿌리가 없는 나무였다. 나무가 아무리 굵고 크다 해도 뿌리가 없으면 무슨 소용일까? 그래도 의미가 있는 것일까?
아무리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고, 아무리 강하다 해도 무슨 소용인가?
자기 자신의 진짜 이름조차 모르는데 말이다.
ᅳ나는 망가져 있다.
그런 자각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좋다’라고 생각하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저 되는대로 흘러가는 대로 살아왔다. 그가 지닌 명백한 의사라고 해봤자 ‘단것이 좋다’라는 것뿐이었다. 아마 그것이 그의 몸에 남겨진 과거의 잔재이겠지. 그의 몸이 기억하고 있는 과거. 확실히 단것을 먹을 때 그는 행복하다. 잃어버린 과거와 접촉했다는 그런 느낌도 든다. 하지만 역시 그것은 짧은 환상 같은 것이다. 사탕이나 엿이 입속에서 사르르 녹아 모두 사라지고 나면 덧없는 꿈처럼 과거와 의 접촉도 끊어지고 만다.
그래서 그런 그에게 있어서 삶이란 것은 따분함과의 대결이었다. 어쩐지 살아 있으니 계속 살아갈 뿐이다. 가끔씩 자신이 누구였을까? 고민해 보면서.
처음에는 그도 열심히 자신이 누구였을까? 자신의 이름은 뭐였을까? 그리고 자신은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끊임없이 생각하고 치열하게 질문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십 년이 지나고 이십 년이 지나자 서서히 그런 질문은 줄어들었고, 자기 탐구열 역시 소멸되어 갔다. 그리고는 그런 자기 존재의 의문을 품는 질문조 차 습관적인 것이 되어갔다. 답에 대한 갈망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서서히 마모되어 나갔던 것이다.
비상소집 같은 것은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총대장의 명령 따위도 아무래도 좋았다. 하지만..
‘어떤 녀석들일까?’
그가 안주하고 있던 세계가 약간 흔들렸다. 불시의 침입자에 의해. 이런 일은 수십 년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천겁령의 대공세 같은 것도, 백도의 총공격 도 아니다. 상대는 아직 어린애들이라고 한다. 오히려 그 부분이 그의 흥미를 자극했다.
“대체 어떤 아이들일까?”
완고하게 굳어져 있던 그의 주변 세계를 흔드는 ‘이질성’, 변수, 그것에 그는 조금 흥미를 느꼈다.
“무엇을 하고자 하는 걸까?”
그리고,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그것이 약간 궁금해졌다.
알아봤자 곧 잊어버리겠지만, 시간 때우기로는 딱 좋을 것 같았다.
따분함이라는 것은 어지간해서는 쓰러지지 않는 초강력한 적인 것이다. 마주 서는 것만으로도 두근거릴 수 있는 생사대적 따위는 이 무의미하고 무반응하고 지루 하기 짝이 없는 따분함 앞에서는 상대도 되지 못한다.
따분함이라는 것을 쓰러뜨리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마음부터 쓰러뜨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하지만 무패를 자랑하는 그 역시 아직도 이 따분함이라는 녀석만 큼은 쓰러뜨리지 못했다. 그 절대강함을 자랑하는 따분함에 허무하게 패배한 그는 지속적으로 공물로써 ‘흥밋거리를 제공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 따분함이 잠잠해질 수 있도록 달래주지 않으면, 이 따분함이 분개해서 날뛰며 그의 정신을 미쳐 버리게 할지도 몰랐다.
평소에 그는 그 일을 잠으로 해결해 왔다. 잠을 자다 보면 따분함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 것이다. 이 허무한 세계보다 꿈속의 세계가 혹시 진짜 세계인 게 아닐까, 혹 시 꿈속에 있는 자신이야말로 진짜 자신이 아닐까 여겨질 때가 있다. 그는 꿈을 통해 따분함을 따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잠을 자지 않고도 그의 따분함을 진정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한번 찾아가 볼까?”
무명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는 것을 보며 부대장인 장소옥이 물었다.
“어딜 말입니까, 대장님?”
“아, 당연히 침입자들을 찾아가는 거지. 방금 그렇게 명령받지 않았나?”
“대장님께서 명령받은 그대로 하신다고요? 그 말 진심이십니까?”
장소옥의 눈에는 불신의 빛이 가득했다.
“아하하하하! 아니, 내가 그렇게 신뢰가 없었나?”
“당연히 없습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명령에 제대로 따르신 적이 없잖아요. 그래서 저희 제육 기숙사가 다른 대장님들한테 얼마나 많이 미운털이 박혔는데요.” 무명의 전설적인 짬밥이 없었다면, 상당히 실질적인 부당한 처우를 당했을 것이다.
“아하하하, 그랬었나? 몰랐네.”
“관심이 없으시니까 그렇죠.”
“어쨌든 마음이 그렇게 정했으니, 그렇게 할 거다.”
웃으며 그렇게 선언한다.
“에휴…… 할 수 없죠. 정 그러시다면 따를 수밖에요.”
무명이 지금까지 하겠다고 하고 하지 않은 일은 한 번도 없다. 일단 한 번 정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꼭 하는 인간이었다.
“좋아, 그럼 침입자들을 구경하러 출발!”
오른손을 힘차게 치켜올리며 어린아이처럼 외쳤다.
“자, 잠깐만요! 지금 구경이라고 하신 겁니까? 잡으러 가는 게 아니고요?”
그러나 장소옥의 이의 제기가 들리지 않는지 무명은 벌써 저 앞으로 성큼성큼 멀어져 가고 있는 중이었다. 또 시작이다. 장소옥은 한숨을 내쉬며 그 뒤를 쫓아 달 렸다.
“대장님, 같이 가요!”
역시 자신은 마천십삼대에서 가장 불쌍한 부대장 같았다.
<『비뢰도』 제27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