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7권 1화 – 바닥과 바닥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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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7권 1화 – 바닥과 바닥 사이

바닥과 바닥 사이

-비류연, 피 토하다

동이 트기 직전의 새벽녘.

잿빛의 어둠이 깔린 호수는 자욱한 안개로 둘러싸여 있었다. 사람들이 왕래하기에는 이른 시각인지라, 인기척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호숫가의 텅 빈 선 착장으로 물살을 가르며 배 한 척이 들어왔다. 사람을 오십여 명 정도 태울 수 있는 중형 배였다.

덜컥덜컥, 배에서 가교가 내려지더니 십여 명의 사람이 어슬렁거리며 그 위를 지나갔다. 뭍으로 내려온 이들은 저마다 졸린 눈을 비비거나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안개 속으로 흩어졌다. 모두들 밤을 배에서 보낸 이들이었다. 타고 있던 선원들도 망꾼 한 명만을 남겨놓은 채 술과 음식, 잠자리가 기다리고 있는 주막을 찾아 떠났 다.

“흐아아아아아암! 씨앙! 지랄 맞게! 왜 내가 또 당직이야!”

닷 발이나 튀어나온 전칠의 입에서, 늘어지는 하품과 함께 불평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제 갓 들어온 신참이라고 궂고 귀찮은 일은 죄다 그에게 떨어지는 것 같았 다. 지금쯤 고참들은 따뜻한 주점에서 따뜻한 음식을 먹으며 팔자 좋게 늘어져 있으리라. 이쯤이면 불만이 차곡차곡 쌓여 산을 이루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 었다.

“나도 그냥 확 처자버려?”

번을 서야 되는 처지라고 해서 간밤에 제대로 쉬게 해준 것도 아니었다. 천근만근 무거워진 눈꺼풀이 언제 아래로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잠의 유혹은 때때로 여자의 유혹보다 무서운 법이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곧 가로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래도 일을 맡았으니 제대로 번을 서고 있어야지. 만일 자고 있다가 성깔 나쁜 선주한테 걸리기라도 하는 날엔…….”

그 뒤는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해고라니……. 백수라니……! 내가 백수라니…….

고자 다음으로 무서운 게 바로 백수 아닌가!

결국 그는 요즘 젊은이답지 않게 자신이 맡은 일에 충실하기로 결정했다.

‘오오, 혹시 난 십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의지의 선원인 게 아닐까??

그렇게 자화자찬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끼이이익!’ 하는 기괴한 소리가 들렸다.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 비명의 출처는 분명 배 안이었다. 전칠은 갑자기 간담이 서늘해졌다.

‘배, 배 안에는 아무도 없는데? 서, 설마 귀, 귀신?’

당황한 채 주위를 둘러본다. 여전히 주위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어 십 보 앞을 제대로 분간하기도 힘들었다. 마치 이 배만 세상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듯했 다. 전칠은 점점 더 무서워졌다. 그때였다.

저벅저벅저벅!

사람이 남아 있을 리 없는 선실 안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발자국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무언가가 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주먹질에 자신있다고 큰소리 땅땅 치며 맨손으로 번을 서고 있던 전칠은 무기가 될 것이 없나 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옆에 뒹굴고 있던 망치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망치를 주워 들자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귀신을 쫓는 데 도움이 될지 안 될지는 아직까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조금 마음의 위안은 되었다.

“이, 이럴 때는 선제공격이야!’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전칠은 선실의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까지 센 다음 문을 벌컥 열었다. 그리고는 높이 치켜든 망치를….

“얼레? 아무것도 없네?”

문 뒤는 텅 비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객실로 내려가는 계단을 확인해 보았다. 역시 아무것도 없었다. 삐걱거리는 마찰음도, 저벅거리는 발소리도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안심이 된 전칠은 마음이 조금 누그러졌다.

“에이, 역시 기분 탓이었나?”

혼자 남아 있다 보니 신경이 날카로워졌던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몸을 돌리는 순간, 그의 앞에는 하얀 옷을 입은 사내가 한 사람 서 있었다.

“헉! 누구. .!”

백의인의 손이 잠깐 움직이는 듯하더니, 전칠은 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툭!

뎅그렁!

느슨해진 손에서 미끄러진 망치가 바닥에 떨어지며 데구루루 옆으로 굴렀다.

“미안하네. 잠깐 자두도록 하게. 다른 사람의 눈에 띄면 아니 되어서 말일세.”

바닥에 쓰러진 전칠을 내려다보며 백의인이 중얼거렸다. 머리카락은 새치 하나 없이 까맣고, 두 눈에는 부리부리한 정광이 가득한 사내였다. 검고 윤기 나는 검은 수염이 가슴께까지 흘러내려 있어 마치 삼국지의 관운장을 연상케 했다.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이 중년인의 온몸에서는 자연스럽게 위엄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삿갓이라도 하나 구입해서 올걸 그랬나. 경황이 없긴 했지만 검 한 자루밖에 못 챙겼으니, 원.”

그는 품 안에서 서찰 한 장을 꺼내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읽기 시작했다.

“린아의 목숨을 그런 말뼈다귀 같은 녀석한테 맡기지 않으면 안 된다니!”

주변에 자욱한 안개처럼 고심과 한탄이 뿌옇게 뒤섞여 있는 얼굴이었다. 중년인은 잔뜩 찌푸린 얼굴로 입맛을 다시더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노려보듯 한 번 쓸어 보았다. 마치 자신을 주시하는 적들이 안개 속에 숨어 있기라도 한 듯이.

“안개가 걷히기 전에 서둘러야겠군.”

갑판을 가볍게 박차자, 그의 몸이 비조처럼 하늘을 향해 부웅 떠올랐다. 놀라운 경공이 아닐 수 없었다. 검은 수염을 휘날리며 중년인의 신형은 곧 짙은 안개 속으 로 사라졌다.

***

“따라오게.”

서해왕 락비오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는지, 의외로 군말없이 비류연들을 목관이 보관되어 있는 장소로 안내해 주었다. 정말로 흑도인답지 않게 정정당당한 걸 좋 아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이렇게까지 깨끗한 인정은 백도에서도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자세였다.

“자기 자신을 찾아, 류연! 정신차리란 말이야!”

서해왕 락비오와 싸우던 중 효룡의 한마디에 퍼뜩 정신을 차린 비류연은 다시 본래의 냉정함을 되찾았다. 마치 뜨거운 증기에 쪄진 것처럼 뜨겁게 달구어져 있던 머리가 일순간 차갑게 식은 느낌이었다. 그러자 좀 더 자신의 상황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서해왕락비오와의 내기에서 이길 수 있었 다.

원래 비류연은 항상 자기 자신을 한 발짝 떨어져서 관찰하는 경향이 있었다. 순간적인 충동에 욱해서 자신의 감정대로만 움직이는 것은 그의 성향에 맞지 않았고, 그러기도 싫었다. 그런 행동은 항상 손해를 불러일으키게 마련인데, 그는 손해를 입는 게 무엇보다 싫었다. 하지만 잠시 동안 객관적인 시각을 잊고 있었던 모양이 다. 언제나 뇌 한쪽 구석에서 자동으로 돌아가던 계산이 멈추어 있었던 것이다. 그만큼 나예린의 존재가 그에게 중요하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어쨌든 계속 그대로 나갈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정작 중요한 나예린을 구출하기도 전에 죽는다면 개죽음도 그런 개죽음이 없었다. 개죽음도 등급으로 따지자면, 사냥개[獵犬] 등급보다 한참 아래인 지나가던 똥개 등급쯤 된다 할 수 있겠다. 그런 질 낮은 개죽음은 사양이었다. 지금은 분노의 힘을 아끼고 다스려야 할 때다. 우 선은 꾹꾹 눌러 담고 전진하다 보면 곧 한꺼번에 터뜨릴 때가 반드시 올 것이었다.

‘우선 몸부터 회복해야 해.’

이 상태로는 평소 실력의 반의반조차 제대로 내기 힘들었다. 지금은 몸의 회복을 최우선으로 해야 했다.

‘일단 목관부터 열고.’

그다음 운기요상으로 몸을 회복시켜야겠다고 비류연은 결심했다.

락비오는 그들을 대청 뒤쪽에 위치한 별실로 인도했다. 문지방을 넘은 비류연의 눈이 번쩍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바로 저것일세. 나도 아직 한 번도 열어본 적이 없네.”

목관은 별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틀림없군.”

예리한 시선으로 목관을 살펴본 비류연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 눈에도 그렇게 보이네, 친구.”

분명 강호란도에서 그들이 보았던, 나백천에게 전해졌던 목관과 똑같은 재질, 똑같은 기술을 사용해 만든 목관이었다. 그 재수없는 서찰이 들어 있던 그것과도 의 심할 여지없이 똑같았다.

“자, 어서 확인해 보게.”

락비오는 자신은 이제부터 관여하지 않겠다는 듯 벽 한쪽으로 물러섰다. 따로 부하들을 데려오지도 않았을뿐더러, 뒤에서 암습을 하거나 할 기미도 전혀 없었다.

“…..”

목관을 본 이후 비류연의 말수는 극히 줄어들어 있었다. 이 별실에 들어온 순간부터는 시선마저 목관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류연, 어떻게 하겠나?”

친구의 침묵을 참다못한 효룡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걸 물어서 뭐 해? 물론 열어봐야지.”

저 관을 열어보기 위해서 여기까지 그 고생을 해가며 온 것이 아닌가.

“자, 그럼 빨리 꾸물거리지 말고 어서 열어보게.”

락비오가 다시 한 번 재촉했지만, 비류연은 목관을 이리저리 뜯어보기만 할 뿐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목관, 목관, 노래를 부르기에 누구보다 빨리 달려 갈 줄 알았던 비류연이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미동도 하지 않으니 자연스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대체 왜 그러나?”

락비오는 평소에도 성격이 화급했기 때문에 우물쭈물하는 것은 딱 질색이었다.

“음, 역시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저 관 뚜껑은 락 대장이 여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주억거리는 비류연의 말에 락비오가 어리둥절해하며 반문했다.

“아니, 내가 왜?”

그는 너무 단순해서 비류연의 속뜻까지는 읽지 못한 모양이었다. 비류연은 나직이 한숨을 하아, 내쉬며 말했다.

“그야 당연히 저 관 안에 내가 원하는 것 대신 뭔가 못된 장치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죠.”

“날 뭐로 보고 그러나! 나 사나이 락비오는 그런 비겁한 짓 하지 않는다!”

락비오가 버럭 성을 냈다. 비류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나도 그렇게 믿어요. 그러니까 스스로 열어서 증명해 주면 되겠네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한다.

‘저래야 비류연이지.’

원래 돌다리도 세 번쯤 두드린 다음에, 희생양 하나를 먼저 시험적으로 보내보는 거야말로 전적으로 비류연다운 행동이었다. 효룡은 원래대로 돌아온 친구를 보며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락비오는 전혀 만족스럽지 않은 모양이었다. “세, 세, 세상에, 그런 믿음도 있나?”

어이없어하는 락비오를 보며 비류연은 단박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력이 많이 안 좋은가 봐요? 어디 있긴요? 여기 있잖아요, 여기.”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비류연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저 망설임없는 뻔뻔함 역시 비류연다운 거지.’

물론 당하는 쪽은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는 비분에 가득 차올라 속이 터질 것 같아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락비오가 딱 그런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미 비 류연의 말은 락비오가 도망칠 만한 퇴로를 교묘하게 차례차례 봉쇄해 나갔기 때문에, 종국에 가서는 비류연 말대로 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아니면 뭔가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도 있나요? 마음에 거리낄 게 없으면 그렇게 뺄 필요도 없을 텐데요?”

마지막 남은 길목까지 봉쇄되자 락비오의 선택권은 이제 오직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좋다, 이 몸이 직접 결백을 증명해 보여주지. 하면 될 것 아니냐, 하면!”

씩씩 화를 내며 성큼성큼 목관으로 다가간 락비오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목관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끼이이이익!

마침내 목관이 활짝 열렸다.

“응? 이건……..”

락비오는 잠시 말을 잃었다.

“제길……”

목관 뚜껑을 열고 안을 들여다본 비류연의 입에서 망연자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터—엉!

목관 안은 허탈할 정도로 텅 비어 있었다.

“…..”

짐작은 하고 있었다. 각오도 하고 있었다. 하지만 비류연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안에 나예린이 갇혀 있으리라고는 물론 믿지 않았지만, 마지막 남은 일말의 희망까지 버리는 데는 실패했던 것일까. 정작 현실로 닥치고 보니 실망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때 락비오가 손가락으로 목관 밑바닥을 가리키며 한마디 내뱉었다.

“이보게, 여기 서찰 하나가 놓여 있는데?”

목관 안은 엄밀히 말해 완전히 비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강호란도의 선착장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 바닥에는 서찰 한 통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혹시……??’

범인은 정말 변태 중의 변태인지, 자기 과시를 위해서라도 뭔가 단서를 남겨둔 모양이었다. 그 빌어먹을 자식은 어딘가에서 지금 자신들을 농락하며 그걸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백천에게 흑천맹주 암살 같은 말도 안 되는 일을 지시한 것일 테지. 제발 딱 한 번만 실수해라. 그럼 당장 끝장을 내주마, 이 변태야!’”

지금 의지할 만한 것이라곤 적의 자존광대에 의한 사소한 실수 같은 애매한 것들뿐이라는 사실이 씁쓸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라도 단 서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휘익!

텅! 하고 돌멩이 하나가 관 바닥에 떨어졌다. 정확히 서찰이 있는 그 장소였다.

“흠, 별 반응은 없군.”

어느새 주워 들었는지 비류연의 손에는 작은 돌멩이 몇 개가 쥐어져 있었다.

휘익! 텅! 휘익! 텅!

한 번으로는 성이 안 차는지 비류연은 두 번 더 돌멩이를 던지고 나서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목관 쪽으로 걸어갔다.

“음?!”

한 발짝 뒤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효룡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뭐지, 뭐가 걸리는 거지?”

뭔가 이상했다.

“대체 뭐냔 말이다, 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는 이 불안은??

효룡은 심신을 뒤흔드는 불안을 도저히 주체할 수가 없었다. 관이 열리기 전에도 불안했는데, 관이 열린 후에도, 그 관 안이 텅 빈 것을 확인한 후에도 그 불안은 가 시기는커녕 더욱 증폭되고 있었다. 뚜껑을 여는 것과 동시에 폭발하는 그런 비밀 기관장치는 전혀 장착되어 있지 않은 텅 빈 관인데,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 것은 어째서일까?

‘어째서…… 어째서 계속 가슴이 이렇게 쿵쾅거리는 거지?”

그때 효룡의 뇌리에 할아버지께 들었던 말이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사람의 뇌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기억하고, 많은 것을 추론한단다. 다만 보통은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할 때가 많지. 대부분이 무의식 속에 묻혀 버리고 마는 게야. 하지만 어느 땐가 ‘순간의 번뜩임’이 느껴진다면, 그건 결코 틀리는 법이 없는 진실이란다. 그럴 때마저 자신의 직관과 무의식을 무시하는 자들 은, 결국 많은 것을 잃게 되는 법이지.”

“그래, 나의 무의식은 무언가를 보았어. 다만 아직은 그게 뭔지를 자각하지 못한 것뿐이야!’

그렇지 않고서야 마음이 이리도 미칠 듯이 불안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자신이 보고도 자각하지 못한 것, 무의식중에 놓친 것은 무엇일까?

순간 효룡의 머릿속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방금 이 방에 들어와 자신이 봤던 것들을 점검해 나갔다.

관, 목관, 텅빈관, 텅 빈 바닥, 바닥, 바닥, 깊이!

“알았다! 흡!”

효룡은 마침내 뭐가 계속 마음에 걸렸는지를 깨달았다. 목관의 바닥이 선착장에서 봤던 것에 비해 이상할 정도로 얕았던 것이다. 그게 뭐?’ 하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깨달음과 동시에 효룡은 지체없이 땅을 박찼다.

이때 비류연은 막 관에서 집어 든 서찰을 펼쳐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온 신경이 이 한 장의 서찰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서찰 안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죽어라!

슈욱!

그 순간 아무것도 없던 관 밑바닥에서 꼬챙이처럼 날카로운 검이 불쑥 솟아오르더니 비류연의 심장을 향해 무정하게 찔러 들어왔다.

“피해!”

나예린에 대한 생각으로 서찰에 정신이 팔려 있던 비류연보다 먼저 도약한 효룡 쪽이 더 빨랐다.

챙!

암습자의 쇠꼬챙이처럼 뾰족한 검은, 비류연의 가슴에 다다르기도 전에 효룡에 검에 의해 저지되었다. 효룡의 빠른 대응이 아니었다면, 목숨까진 아니어도 비류연 의 가슴에 적잖은 상처를 안겨줬을지도 모를 암습이었다.

“정체를 드러내라!”

효룡은 암격을 막아낸 자세 그대로 발로 목관을 힘껏 걷어찼다. 엄청난 기세로 찬 탓이라 그런지 무거운 목관이 허공중에 부웅 떠오르며 산산조각이 났다.

“아니, 이럴 수가!”

벽 쪽에 서 있던 락비오의 눈이 부릅떠졌다.

산산이 분쇄되는 나뭇조각 틈 사이에 아주 몸집이 작은 검은 옷의 암살자가 섞여 있는 것이 똑똑히 보였던 것이다. 그자는 난쟁이처럼 키가 작고 비정상적으로 비 쩍 마른 자였는데, 암습자답게 얼굴에는 복면을 쓰고 있었다.

“역시 바닥 밑이 비어 있었어!’

목관 바닥 밑은 이중 바닥으로 되어 있어, 그 밑에 누군가가 잠복해 있었던 것이다. 편지는 표적을 더 가까이 끌어들이기 위한, 시선을 빼앗기 위한 미끼였던 것이 다.

효룡의 입에서 조소가 터져 나왔다.

“흥, 그 정도는 되어야 자리를 덜 차지하겠지.”

첫 일격에 표적을 죽이지 못한 암습자는 이미 실패한 암습자였다.

“잘됐군. 몸집이 아담하니 무덤 자리도 덜 차지하겠어.”

효룡이 쌍검을 휘두르며 암습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백색 광망이 번뜩이며 허공에 비산하는 나뭇조각들을 분쇄해 나갔다.

그러나 자신이 이미 실패했음을 깨달은 난쟁이 암습자는 정면으로 싸우기보다 곧바로 도주를 선택했다.

파바바바밧!

허공에서 땅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난쟁이 암습자는 손을 바람처럼 움직여 일장을 내질렀다. 주변의 파편들이 일제히 효룡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갔다. 난쟁이 암습 자는 그 반동을 이용해 몸을 뒤로 뺐다. 그대로 도주할 심산인 게 뻔했다.

“룡룡! 저 난쟁이 똥자루, 반드시 생포해!”

서찰을 구겨 든 비류연의 목소리였다. 서찰에 아무런 단서도 없는 이상, 이제 남은 단서는 저 왜소하고 깡마른 난쟁이밖에 없었다.

“물론이지.”

효룡이 을진무쌍검법을 펼치며 암살자를 향해 쇄도해 갔다. 효룡이 펼친 검풍에 목관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어차피 여기에서 나갈 만한 곳은 대청으 로 이어진 정문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은 이미 비류연에 의해 막혀 있었다.

그러나 전문적인 도주 훈련을 받은 난쟁이 암습자의 도주 솜씨는 보통이 아니었다. 몸집이 작은 탓에 더 재빠른 것인지 순식간에 효룡의 검권(劍圈)에서 몸이 빼 냈다. 난쟁이는 별실 벽 높다란 곳에 달린 조그만 채광창을 향해 몸을 날렸다. 보통은 몸이 빠져나가기는커녕 머리나 안 끼이면 다행일 정도로 작은 구멍이었다. 상 식적으로는 절대 도주로가 될 수 없는 곳, 그러나 이 난쟁이 암습자에게는 저 조그만 채광창도 훌륭한 출입구나 다름없었다.

“어딜 감히!”

쫓아가도 이미 늦었다고 판단한 효룡이 쌍검을 휘둘러 검기를 날렸다.

“무쌍십자검(無雙十字劍)!”

십자 모양의 검기가 벽을 갈랐다. 그러나 아슬아슬한 순간에 난쟁이 암습자는 이미 채광창으로 미꾸라지처럼 몸을 빼내고 있었다.

“이런, 놓쳤나!”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락비오가 인상을 찌푸리며 외쳤다. 그러나 효룡의 눈에서는 아직 의지의 불꽃이 꺼지지 않은 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아까는 실수로 친구 를 부담스럽게 만들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다시 암습자를 놓치는 실수를 범할 수는 없었다. 그 스스로가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하압!”

효룡이 두 자루의 검을 허공을 향해 집어 던졌다. 그러나 자포자기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괜한 화풀이도 아니었다.

“날아라아아아아!”

효룡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두 자루의 검이 채광창을 빠져나가 아직도 도주하고 있는 적을 향해 화살처럼 날아갔다. 이 화살은 의지를 가진 화살이었다.

오의(奧義) 비조쌍월인(飛鳥雙月刃)

섬광처럼 날아간 두 자루의 검은 저 멀리 도주하고 있던 난쟁이 암습자의 양 허벅지를 관통하더니 그대로 땅에 꽂혔다. 암습자가 바닥에 쓰러졌다. 상당히 과격한 방식이었지만, 몰래 숨어서 암습하는 암습자한테 인정사정 봐줄 의리는 없었다. 남에게 칼침을 먹이려면 자기도 칼침 먹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거기 가만있어라!”

펑!

돌아갈 시간 따위 없었다. 독한 훈련을 받은 놈이라면 저 상태에서도 또다시 도망가려 할지도 몰랐다. 효룡은 양손에 기를 모은 다음 그대로 벽을 후려쳤다. 쾅쾅쾅쾅쾅!

강력한 내공이 실린 일격에 벽이 그대로 날아가자 구멍이 뻥 하고 뚫렸다.

“내 건물이! 내 건물이!”

자신의 부대 건물에 커다란 바람구멍이 난 것을 본 락비오는 비명을 질렀다. 비류연은 말없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주었다. 잘했다는 뜻이었다.

사람 두 명이 충분히 지나갈 만한 구멍이 뚫리자 효룡은 망설임없이 몸을 날려 땅에 쓰러진 암습자를 향해 달려갔다.

“잡았다! 이제부터 천천히 즐거운 이야기를 시작해 보실까?”

파바바밧!

재빨리 몸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점혈을 한 다음 쓰러진 암습자를 돌려 눕혔다.

“자, 이제 그만 부끄러워하고 얼굴 좀 보여주시지.”

효룡은 재빨리 암습자의 복면을 벗기고 얼굴을 확인했다. 그 순간 효룡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 이런 짓을.

놀랍고도 끔찍하게도 난쟁이 암습자의 입은 철사로 꿰매져 있었다. 변색된 철사는 주위의 살들 속에 파묻혀 있어서 어디서부터 철사이고, 어디서부터 살인지 구분 하기도 애매했다. 오래전부터 이런 상태였다는 뜻이었다.

“우웁!”

효룡은 순간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려 했다.

아무것도 발설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입막음 조치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조치였다.

“이, 이런! 안 돼!”

갑자기 효룡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철사로 묶여진 입술 사이로 한줄기 피가 흘러나왔던 것이다.

피의 색깔은 검은색, 중독이라는 뜻이었다.

“이런! 자결할 셈인가!”

난쟁이 암습자가 망설임없이 입 안의 독단을 깨문 것이다. 철사로 입을 꿰매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입을 봉하기 전에 독단까지 심어놓은 모양이었다. 효룡은 독이 더 이상 번지지 않게 혈도를 제압하고 독혈을 토해내게 하려 했지만, 입이 철사로 막혀 있어 불가능했다.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살아나! 살아나! 살아나!”

효룡이 미친 듯이 외치며 암습자의 몸에 내공을 불어넣었다.

어떻게 잡은 단서인데,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허무하게…….

“이미 늦었어, 룡룡. 벌써 숨이 끊어졌거든. 그러니 그만 해.”

거의 발광하다시피 하는 효룡을 말린 것은 의외로 비류연이었다. 말리는 그의 표정 역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사실 이 암습자에게 들어야 할 용건이 있는 사람은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마지막 남은 단서는 제멋대로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갔군.”

아무런 단서도 없던 그 순간으로.

효룡은 친구를 볼 면목이 없었다.

“미안하네, 류연. 내가 좀 더 정신을 차렸더라면…….”

자신이 좀 더 신속하게 대처했다면.. 그놈들이 이보다 더 혹독한 수법을 쓸 수도 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으면서도, 미처 대비하지 못한 것은 다른 누 구도 아닌 자신의 실책이었다.

이 암습자만 해도 효룡의 생각으로는 방금 전의 싸움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힘을 소모한 비류연 대신 자신이 포획하는 게 마땅했다. 서해왕과의 싸움에서 도움이 되지 못했던 만큼, 다른 부분에서 도움이 됐어야 했는데도 또다시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이다. 때문에 다른 누군가를 원망하는 대신 효룡은 자신을 탓했다.

효룡은 자괴감 때문에 침울해졌다. 그러나 정신은 놓고 있었던 건 비류연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철저한 준비 없이 접근한 것도 그, 텅빈 관 안에서 조심성없게 서찰을 집어 든 것도 바로 그였다. 그러나 굳이 그 사실을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자신에게 빚진 상태로 만들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계산을 그 밑바

닥에 깔면서. 비류연은 어찌 되었든 비류연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침울해 있지 마.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우리에겐 아직 여기서 할 일이 남아 있잖아.”

“그게 뭔가?”

관은 산산조각 났고, 유일한 단서인 암습자도 죽은 마당에 더 이상 무슨 할 일이 있단 말인가?

그러자 비류연의 시선이 락비오를 향했다.

거구의 사내가 순간 움찔했다.

길게 자란 앞머리에 가려져 있었어도 그 날카로운 기세만큼은 충분히 전해지고도 남았다.

“왜 없겠어? 우릴 비겁한 함정에 빠뜨린 저 비겁한 대장님한테 입이 있으면 변명이라도 해보라고 해야지. 물론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은 없겠지만 말이야. 그나마도 최후의 양심이 있다면, 이라는 전제하에서 하는 말이니까 실제론 어떨지 모르겠네.”

팔짱을 낀 채 도발적인 자세로 락비오를 쏘아본다.

“무, 무슨 말이냐? 난 저 암습자랑 아무런 관계도 없다! 절대로 없다!”

락비오가 억울하다는 듯 소리쳤다. 비류연은 실망스럽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보니 양심도 없었군.”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한마디가 락비오의 가슴에 가서 푹 하고 박혔다.

“그러게 말이야. 좀 전까지는 그렇게 정정당당을 찾더니, 다 거짓말이었군. 비겁하게시리.”

효룡이 옆에서 거들자, 비류연이 ‘맞아, 엄청 비겁하지’라며 그 의견에 수긍했다.

푹푹! 다시 비난의 말이 비수가 되어 락비오의 심장에 날아가 꽂혔다.

“아니야, 아니라니까! 제발 내 말 좀 들어보게.”

물론 비류연과 효룡은 그의 말을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럴 거면 애초에 정정당당을 찾지 말던가.”

“난 정말 몰랐어! 몰랐단 말이야! 난 억울하네! 정말로 억울해!”

“정말 몰랐어요?”

“정말 몰랐네. 하늘과 땅과 우리 아버지의 이름에 걸고 맹세해도 좋네.”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거짓은 없을 터였다.

아마도.

그러나 거짓이 없으면 또 어떤가. 흐흐흐,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두고 넘어갈 비류연이 아니었다.

“그럼 그렇다 치죠. 그런데 그냥 몰랐다고 하면 끝날 문제인가요?”

그 말에 락비오는 다시 움찔하며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

“무, 무슨 뜻인가?”

대답 대신 비류연은 양팔을 벌리고 주변을 돌아보더니, 도리어 락비오에게 반문했다.

“여긴 어디죠?”

“그야 물론 서해도일세.”

몰라서 묻는 건 아닐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곳 서해도는 누구의 영역이죠?”

비류연이 조용한 목소리로 하나씩 하나씩 짚어나가기 시작했다.

“그야 우리 십번대 영역이지.”

“그 십번대의 책임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무, 물론 날세.”

서해왕 락비오 말고 책임자가 누가 또 있겠는가. 락비오의 목소리는 좀 전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작아져 있었다.

“당신 말고 다른 사람이 더 위에 있는 것은 아니라 그 말이죠?”

“그거야 그렇지만…….”

“호오, 그럼 역시 댁의 책임이 맞네요. 자기 영역 안에서 벌어지는 일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데다가 암습자의 존재도 간파하지 못하다니, 설마 그런 큰 실책을 범 하고도 책임이 없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죠? 아니면 혹시 그건가요? 책임자란 희희낙락 권리만 누릴 대로 다 누리고 책임은 있는 대로 방기해도 되는 자리란 ‘책임감없는 생각을 갖고 있다거나 하는? 에이, 설마. 천하의 사천왕 중 한 사람이 설마 그러진 않겠죠?”

“그, 그건…… 물론 아니네만…….”

그렇게 대답하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었다. 이 단순한 남자는 죽어도 스스로를 비하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말발에서 락비오가 비류연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책임, 있지요? 남자답게 인정하는 게 어때요? 남자답게?”

일부러 ‘남자답게’를 두 번씩이나 강조하는 비류연이었다. 락비오는 그 말에 너무나 취약했던 것이다. 여기서 부정하면 남자답지 못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것은 락비오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태였다.

“조, 좋네. 책임이 있네. 남자답게 인정을 하지. 인정하면 될 것 아닌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락비오가 외쳤다.

“과연 남자다운 십번대의 대장답군요. 다시 봤어요.”

실로 감탄했다는 듯 비류연이 팔짱을 낀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런가? 하하하, 뭘 이 정도 가지고. 어흠, 그래도 내가 좀 남자답긴 하지.”

칭찬을 받자 락비오는 조금 우쭐해졌다. 역시 남자답게 인정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뭐래도 자신은 싸나이 아닌가. 자신이 비류연에게 완전히 농락당 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할 만큼 그는 ‘남자답게’ 단순했던 것이다. 여기까지가 단지 서론에 불과하다는 것 역시 눈치채지 못할 만큼 말이다.

“자, 그럼 책임이 있다고 했으니, 어떻게 책임지실 건가요?”

의기양양해하는 락비오를 향해 비류연이 대뜸 질문해 왔다.

“어떻게라니?”

“뭔가 구체적으로 책임을 지는 방법이 있어야 할 것 아니에요? 아니, 그럼 설마 말만으로 때울 생각이었던 건 아니겠지요?”

설마 그런 파렴치한 짓을 저지를 생각은 아니었겠지요, 하는 시선으로 비류연이 락비오를 쳐다보았다. 옆에 있던 효룡도 락비오에게 미묘한 시선을 보내며 침묵으 로 비류연을 거들었다.

“무, 물론 입바른 말만 하고 끝낼 생각은 없었네. 무, 물론이고말고. 오해야, 오해.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나?”

“딱 한 가지. 적절하게 책임을 지는 방법이 있지요.”

“그게 뭔가?”

그러자 비류연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락비오 앞으로 손을 불쑥 내밀었다.

“이 손은 뭔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락비오가 반문했다.

“이곳에서 가장 운기요상하기 좋은 ‘명약’ 급의 단약 두 알을 주세요. 그럼 이번 일을 없었던 일로 하지요.”

“뭐, 뭐라고?”

“소양단 같은 싸구려 약 말고 괜찮은 걸로 부탁하도록 하지요. 설마 이곳 서해도를 책임지고 있는 서해왕씩이나 되는 분이 효과 좋은 요상단 같은 것도 한두 알 없 단 말은 아니겠지요?”

살짝 자존심을 긁는 말에 락비오는 금세 발끈해서 소리쳤다.

“없을 리가 있나! 난 스승님한테 받은 비장의 비약도 두 알이나 가지고 있다고… 흡!”

‘아차!’

락비오는 황급히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호오, 비장의 비약이라? 그것참 흥미로운 이야기로군요.”

비류연의 눈은 이미 먹이를 포착한 매의 눈빛이었다.

“아니,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고 하산할 때 스승님한테서 받은 거라네. 별거 아니지만 가장 긴급한 상황에서 먹으라고 주신 ‘소생단(憨生丹)’이라는 이름의 구명 요상단 두 알일 뿐이네. 물론 난 강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한 번도 그 약을 쓴 적이 없지.”

소림 대환단 같은 천하의 이름을 떨치는 명약은 아니지만 락비오에게 있어서는 나름 소중한 물건이었다.

“딱 좋군요. 그걸 줘요.”

락비오의 얼굴에 망설임이 떠올랐다.

“그, 그걸 말인가? 물론 사부님이 대단한 비약은 아니라고 하셨지만…..

“호오, 방금 책임감있는 자세를 보이겠다고 한 건 다 거짓말이었나요?”

“그것과 이건 전혀 다른 문제 아닌가? 그건 사부님이 마지막으로 챙겨주신 건데. •사부님은 별거 아니라고는 했지만. 위급할 때만 먹으라고 하신 거고.” “지금이 바로 위급한 상황이에요. 지금보다 더 위급한 상황이 있을 것 같아요? 지금 당신은 신용의 위기에 빠진 거예요! 힘과 정의로 세상에 부딪쳐 보겠다던 락 비오라는 한 당당한 사내대장부가, 책임감없는 거짓말쟁이에 암습이나 일삼는 천하의 비겁자가 될 판이라고요. 그런데도 이게 위기가 아니고 무엇이 위기겠어요?”

“난 거짓말쟁이도 비겁자도 아니네!”

락비오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거짓말에 암습이라니, 그런 것은 그의 정체성 전체를 위협하는 행위였다.

“맞아요. 아니죠. 그러니까 단약을 줘요. 그럼 인정해 드리죠.”

결론이 어째 그렇게 나버리고 말았다.

“두 알 다…… 말인가?”

아까운 기색이 역력한 투로 되묻는다. 하지만 이미 절대 안 돼, 라는 단계는 벗어나 있었다.

“일단 가져와 봐요.”

“아, 알았네. 잠깐만 기다리고 있게.”

얼렁뚱땅 비류연의 말발에 넘어간 락비오는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 채 소생단을 가지러 갔다. 잠시 후 돌아온 그의 손에는 손아귀에 들어갈 작은 상자 두 개가 들려 있었고, 각각의 상자에는 상당히 굵기가 굵은 금색의 단약 두 개가 들어 있었다.

“어라, 별거 아니라는 것치고는 너무 그럴듯하게 생겼는데?”

비류연은 좀 더 조그만 단약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직접 보니 너무 그럴듯하게 생겨 있었다.

“물론 약은 겉보기로 알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약은 옷과 달라 겉보기로는 그 효능을 판단할 수가 없는 물건이긴 하다. 하지만 상자를 열었을 때부터 풍겨져 나오는 그윽한 향기는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나도 양심이 있으니 딱 한 알만 받도록 하죠. 잠깐 그 단약 두 알 이리로 주시겠어요?”

“아, 여기 있네.”

락비오는 순순히 비류연에게 단약을 건네주었다.

비류연이 상자를 살짝 흔들자 단약 두 개가 허공으로 툭 튀어 올랐다.

가느다란 백선 두 개가 번쩍이더니 두 개의 금색 단약이 네 조각으로 나뉘어졌다. 분노한 락비오가 버럭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인가!”

비류연은 락비오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반쪽짜리로 나뉜 금색 단약 각각을 따로 합쳐서 단약을 하나 만들고는 락비오에게 건네주었다. “자, 먹어요.”

“아니, 왜 이걸 나한테 주는 건가? 자네가 다 먹는 것 아니었나?”

락비오가 의심을 품는 것은 당연했다.

“먹어보면 알아요.”

비류연은 금단을 락비오의 입속으로 던져 넣었다.

“어……억!”

얼떨결에 락비오는 그것을 받아먹었다. 금단은 그대로 락비오의 뱃속으로 사라졌다.

“흐읍.”

잠시 후 락비오의 안색이 대춧빛처럼 불그스름해지기 시작했다. 약효가 그의 전신을 돌기 시작한 것이다.

“대체 이 단약은…….”

락비오는 좀 전의 싸움으로 소모됐던 내공이 급속도로 회복되는 것을 느끼곤 깜짝 놀랐다. 그제야 비로소 비류연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내뱉었 다.

“흠, 독(毒)은 아닌가 보네.”

락비오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소중히 아끼며 간직해 두었던 비장의 비약을 꺼내주었는데, 고작 한다는 소리가 독은 아닌가보네라니!

“다, 당연하지! 이 몸을 뭘로 보고! 내가 단약을 독이라고 속여서 줄 사람 같으냐?”

사람을 모욕해도 유분수라는 표정으로 락비오가 항의했다.

“여긴 적진 한가운데잖아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죠. 이런 걸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고 하는 거예요. 댁한테는 좀 어려운 개념일지 모르지만요.” 그런 당연한 상식도 모르는 걸 보니, 머리통 안에 돌만 든 게 분명하다는 말투였다.

“나, 나도 유비무환 정도는 알아!”

락비오가 버럭 소리쳤다. 자신을 무시하지 말라는 뜻이었겠지만, 그런 외침에 눈썹 한 올 까딱할 비류연이 아니었다.

“알지만 한 번도 그걸 실천해 본 적은 없잖아요? 안 그래요?”

“그, 그걸 어떻게?”

락비오가 뜨끔해하는 걸 보니 본인도 찔리는 구석이 없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척 보면 착이죠.”

뭘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얼굴로 비류연이 대답했다.

조금 더 락비오의 상태를 지켜본 후, 그의 몸이 좋아지면 좋아졌지 나빠지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비류연은 반쪽씩 합쳐 하나로 만든 금단을 망설임없이 꿀꺽 삼켰 다.

한시라도 빨리 내상을 회복해서 나예린을 구출하기 위해.

그리고 단약을 삼킨 후.

채 반 각이 지나기도 전에 비류연은 왈칵, 피를 토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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