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초지적(敵)
-풀려진 봉신환
팟!
무언가 섬광처럼 한순간 번쩍였다. 그 순간 비류연은 볼에 화끈함을 느껴야 했다. 몰아친 경력의 여파로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하마터면 반응하지 못할 뻔했다. 팟팟! 뻥뻥!
비류연의 주변에서 공기 터지는 소리가 연속해서 울려 퍼졌다. 그럴 때마다 비류연의 긴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세차게 펄럭거렸다. 천둥이 연속해서 울려 퍼지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온다.
팟팟팟팟팟! 뻥뻥뻥뻥뻥!
그 소리는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모두 비류연의 몸 주위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러나 무명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제일초(第一)
무흔권(無痕拳)
그냥 멈춰 서 있는데도 주변의 공기가 터져 나가는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주먹을 내뻗고 있는 것이었다. 그가 쓰는 것은, 그림자는커 녕 흔적조차가 없는 권법이라 해서 ‘무흔권’이라 이름 붙여진 권법이었다.
비류연은 그 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못한 채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팡팡팡팡팡!
그 역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주먹을 내뻗고 있었다. 다만 역시나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움직이고 있기에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중간에 날아오는 주먹을 쳐내지 않았다면 비류연의 몸은 이미 무명이 내지르는 주먹세례를 받고 피떡이 되었을 것이다.
계속해서 들리는 공기 터지는 소리는 두 개의 주먹이 허공에서 눈에 보이지 않을 속도로 부딪치면서 공기를 터뜨려 진공상태로 만드는 소리였다.
누구의 주먹이 더 빠른가, 누가 먼저 지칠 것인가.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승부는 나지 않고, 공기가 터지는 소리만 시끄러울 정도로 천지를 울릴 뿐이었다. 더 이상 의 초식 겨루기가 의미없음을 깨달은 무명이 먼저 주먹을 멈췄다.
“내 일권을 막아낸 사람을 만나는 건 오랜만이군.”
무명은 약간 감탄한 듯했다.
“이 정도야 별거 아니죠.”
비류연이 싱긋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욱신욱신!
‘별거 아니긴, 개뿔.’
확실히 막아내는 데는 성공했다. 하지만 겨우겨우 막아내는 게 다였다. 틈을 봐서 보기 좋게 한 방 먹여줄 생각이었는데, 반격기를 날릴 틈은 조금도 없었다. ‘거의 같은 빠르기라고 생각했는데, 정중앙에서 권격을 떨어뜨리지 못했어.’
그러기는커녕 조금만 권경의 기세가 밀렸다면 지금쯤 그는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진 채 바닥에 누워 있어야 했을 것이다.
“자, 그럼 이건 어떨까?”
무명의 손바닥이 천천히 앞으로 뻗어왔다.
제이초(第二招)
무상장(無像掌)
척 보기에는 무명의 손바닥은 그다지 빨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매우 느리게 보일 정도였다. 그런데도 비류연은 쉽게 그 일장에서 몸을 빼낼 수가 없었다. 일견 느릿느릿하고 간단무쌍해 보이는 단 일초의 장법에 만 가지 변화가 응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상대의 움직임에 따라 그에 대응하여 무상한 변화를 보
여줄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비류연이 움직이는 순간 저 장법도 변화를 시작한다는 것이니, 섣불리 움직이기라도 하면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변화의 해일에 휩 쓸려 버릴 위험이 있었다.
그렇다고 그냥 있어도 되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가만히 서 있는 상황만큼 때려잡기 쉬운 표적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냥 있어도 당하고 움직여도 당할 판국이었 다.
그야말로 천라지망세!
응축된 변화가 무형무상의 압력이 되어 비류연의 움직임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단순한 보법으로는 절대로 이 공격을 벗어날 수 없다. 빗방울 사이를 빠져나갈 수 있을 정도의 신법이 아니면 말이다.
비뢰문(飛雷門) 독문운신보법
봉황무(鳳凰舞) 비전극상오의(秘傳極上奧義)
우중거(雨中去) 불점의(不)
극쾌
비류연은 묵룡환을 찬 채 우중거 불점의를 펼쳐냈다. 예전에는 양 발목의 묵룡환을 모두 풀어내야만 사용할 수 있는 오의였으나, 좌수룡 한 마리를 제압하게 된 이후로는 내공이 늘어나 묵룡환을 찬 채로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류연은 아직 함부로 다른 묵룡환을 풀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비류연의 몸이 수십 개로 나눠지는 듯한 잔영을 드리우더니, 이내 한줄기 빛으로 화하며 무명의 무상장이 뿜어낸 천라지망세의 기세를 벗어났다. 무상한 변화에 무한한 쾌변으로 맞상대한 것이다.
“좋아, 아주 좋아! 이 초 이상 받아내다니, 예상외의 성과네. 자네라면 내 삼초지적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무명은 연거푸 두 초식이나 실패했는데도 오히려 기쁜 듯했다.
삼초지적……. 다른 곳에서는 하수에게나 쓰이는 표현이 그에게는 오히려 대단한 고수를 지칭하는 말처럼 쓰이고 있었다. “아직 놀라기는 이르죠. 다음 초식도 당연히 받아낼 거거든요. 그리고 삼초지적이 아니라 삼천초지적(三千招之敵)이겠죠.” 좀 전의 무흔권과 무상장의 위력을 몸소 경험했으면서도 자신감이 전혀 줄지 않는 것을 보니 비류연은 역시 비류연이었다. “꼭 그래 주어야 해. 만일 그러지 못하면 자네는 죽어야 하거든. 그건 정말……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지.”
그의 말은 결코 협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비류연이 자신의 세 번째 초식에 죽으면 어쩌나 걱정하는 듯했다.
“점점 기대되네요. 일 초는 권(拳), 이 초째는 장(掌), 삼 초째는 뭐죠?”
“마지막 삼 초는 검(劍)일세.”
“검이요? 검이 어디 있는데요?”
비류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그거야 당연히 내 허리에…….”
자신의 허리를 살펴본 무명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어, 어라, 내 검이 어디 갔지? 분명히 여기 허리춤에 차둔 것 같은데?”
무명은 이상하다는 듯 자신의 허리춤을 이리저리 더듬어보았다. 그러나 귀신이 곡할 노릇인지 어디에도 자신의 검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옆에서 긴 한 숨 소리가 들려왔다. 부대장 장소옥이 매우매우 붉어진 얼굴로 조그맣게 속삭였다.
“저기요…… 대장님?”
“왜 그래, 소옥아? 난 지금 검 찾느라 바쁜데 조금 있다가 얘기하면 안 될까?”
“아뇨, 지금 꼭 해야 하거든요…….”
그의 목소리는 부끄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왜? 무슨 일인데?”
시선도 돌리지 않은 채 무명이 대꾸했다.
“그… 대장님이 찾으시는 검 제가 들고 있거든요…….”
무명의 고개가 장소옥을 향해 홱 돌아갔다. 장소옥의 얼굴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민망함으로 인해 홍당무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아니, 왜 내 검을 네가 들고 있는 거야?”
도저히 이해 못하겠다는 듯한 그의 얼굴을 보며 장소옥은 심한 절망감에 몸부림쳐야 했다.
“잊으셨습니까? 당연히 잊으셨겠죠. 하아… 그거야 당연히 대장님이 아까 검을 한 번 쓴 다음에 저 아가씨 안는다고 저보고 들고 있으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니 제 가 들고 있었던 거죠.”
그제야 무명은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치며,
“아차, 까먹었다!”
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아무래도 진짜 까맣게 잊었던 모양이다.
“……”
비류연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험험, 좀 미안하게 됐네. 검을 써본 지 하도 오래돼서 말이야. 험험. 늙다 보면 건망증이 심해진다니까…….”
“그 정도면 건망증이 아니라 치매 수준인데요?”
“하하하하, 그래서 사람들이 나를 치매대장이라 부르지. 아하하하하하!”
무명이 양손을 허리에 올려놓고 자랑스러운 듯 홍소를 터뜨렸다.
“웃을 일이 아닙니다, 대장님. 웃을 일이!”
그러나 무명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장소옥은 이젠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없으면 자기가 삽으로 파서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그 검은 언뜻 보기에는 평범해 보였으나, 오랜 시간 동안 강호를 헤쳐 나온 연륜이 묻어 있었다. 감히 측량할 수 없는 세월의 무게가 그 검에는 녹아 있었다.
“에흠, 이 검의 이름은 ‘무명검(無名劍)’. 나랑 마찬가지로 이름이 없다네. 하지만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래도 상당히 좋은 검이지.”
무명은 받아 든 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끼이이이익!
장구한 세월 동안 검집에서 잠들어 있던 검이 세상을 향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좋은 검이긴 한데 끼이이이익??
스르릉도 아니고 웬 끼이이익?
무명의 검집에서 뽑혀 나온 검을 본 사람들은 경악으로 눈을 부릅떴다.
“저기요, 이런 말 하긴 뭐 하지만…… 아무래도 검을 손질하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셨던 모양이지요?”
비단 무명이 잊은 것은 검이 있는 장소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뽑혀 나온 그의 검 전체에는 덕지덕지 붉은 녹이 잔뜩 슬어 있었다. 일렁이는 파문과 푸른 광망 이 번뜩여야 할 날은 녹이 슬었을 뿐 아니라 곳곳에 이가 빠져 있어 상한 톱니를 연상케 했다.
“진짜로 끝내주게 좋은 검이네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비류연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주었다.
“그럼, 좋은 검이지.”
비꼬는 말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무명이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뇨, 상대편한테는 좋은 검이라고요.”
칼을 맞아도 베이지도 않을 것 같은 검인데 어찌 좋은 검이 아닐 수 있겠는가. 상대하는 이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정말 훌륭한 검이었다.
“그렇게 무시하지는 않는 게 좋을 걸세. 의외로 사납거든, 이 녀석은.”
찰칵!
더 많이 보여주는 게 아깝다는 듯 무명은 무명검을 검집 속에 도로 집어넣었다.
“저번에 칼날 손질한 게 언젠데요?”
무명은 기억을 떠올려 보려고 했다.
“으으음…….”
기억을 떠올려 보려고 다시 노력했다. 조금만 더 하면 기억이 날 듯한데…….
“으으으음..”
한참을 고민하던 무명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으음, 까먹었네!”
아아하하, 웃으며 무명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
진짜로 백 년 동안 한 번도 갈아주거나 닦아주거나 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운 생각까지 들었다.
“제가 그 검에게 이름 하나 지어줘야겠네요.”
“뭐라고 말인가?”
“백년녹’이라고 말이죠.”
말 그대로 백 년 동안 녹슨 쇳덩어리라는 의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