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의파해破解)!
ᅳ파(破)!
제일초는 쾌섬(빠르기), 이초는 둔중(느림), 그렇다면 제삼초는 무흔, 무상 다음에는 무형(無形)인가?
그냥 이대로 선 채 무명의 검초를 기다리는 것은 지극히 위험했다. 저 검이 아무리 녹이 팍팍 슨 고물 검이라지만, 무명 정도 되는 자에게 칼날이 서 있고 없고가 의 미나 있는지 의문이었다. 최절정의 고수라면 풀잎 하나로도 적을 격살할 수 있는 법이다. 단순한 막대기도 고수의 손에 걸리면 더없이 강력한 검으로 돌변하는 것이 다. 게다가 검강이라는 것이 있었다. 어떤 무딘 검도 최강의 보도로 만들어줄 수 있는 검강이. 무명이라면 검강 정도는 몇 장을 뿜어내느냐가 문제지, 뿜어내느냐 못 뿜어내느냐는 전혀 문제가 아니었다.
“아참, 약속을 하나 하지. 검강은 쓸 생각이 없어. 안 쓴 지 한 백 년 정도 된 것도 같고. 막상 쓰려다가 잊어버렸으면 좀 부끄러우니까 안 쓸 걸세.”
보통 잊나? 그런 걸?
순간 모든 사람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생각이었다.
“이쪽으로서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죠.”
그런 걸 사양할 비류연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답례도 잊지 않는다.
“그렇다면 답례로 이번에는 이쪽이 먼저 갑니다!”
무명에게 더 이상 집중할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비류연이 움직였다. 묵룡환이 벗겨진 비류연이 앞으로 뻗어 나오며, 펄럭이는 소매 속에서 다섯 줄기 뇌광이 폭사 되어 나왔다. 무수한 금빛 실과 함께.
동시에 비류연의 손가락이 은은히 반짝이는 뇌령사 위를 누비며 벼락의 연주를 시작했다.
비뢰도(飛刀)검기(劍氣)
오의(義)
풍운뢰명(風雲雷鳴)의 장(章)
뇌광류하곡(雷光流河曲)
금빛으로 반짝이는 현의 물결이 그물처럼 활짝 펼쳐지며 해일처럼 무명을 덮쳐 갔다. 처음은 완만하던 연주가 어느새 거친 물살처럼 폭급하게 변해 있었다. 하늘 을 격자로 가르고 있는 이 빛의 실 한 가닥 한 가닥이 모두 예리한 기를 품고 있었기에 이 실에 닿으면 날카로운 보도에 베이는 것처럼 쇠조차도 잘려 나간다. “이…… 이건……..
비류연이 펼치는 초식을 본 무명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어떤 일에도 흔들릴 것 같지 않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린 것이다.
순간 무명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었다.
비류연이 펼친 초식에 압도되어서가 아니었다. 갑자기 지끈 하고 두통이 엄습했던 것이다.
그러나 멈춘 것은 잠깐. 다시 그의 몸이 움직였다.
제삼초(第三招)
무형검無形)
스릉!
더없이 맑은 소리와 함께 한줄기 섬광이 천지를 둘로 갈랐다. 동시에 사방을 에워싸며 덮쳐 오던 그물을 그대로 끊어버렸다.
“……!”
녹슨 검의 단 일검에 오의가 깨지자 아무리 비류연이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뇌광류하곡은 그가 가장 오랫동안 익혀왔던 초식이었다. 가장 처음 터득한 오의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 오의를 터득했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그 후로도 이 오의를 갈고닦는 데 소홀히 한 적은 없었다.
“이럴 수가……”
그런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깨진 적이 없던 오의가 깨진 것이다. 가장 비뢰문다운 오의가, 이름도 없는 녹슨 검에 깨진 것이다. 아무리 배짱이 두둑한 비류연이라 해도 망연자실해질 수밖에 없었다. 방심한 탓인지, 마음의 틈이 벌어진 탓인지 한순간 완전한 빈틈이 드러났다. 무명 정도의 고수라면 충분히 그 허점을 꿰뚫고 비 류연을 무릎 꿇리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었다. 그러나 무릎을 꿇은 것은 오히려 무명 쪽이었다.
“크으으으윽!”
비류연의 뇌광류하곡을 단 일검에 파해한 무명은 땅에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움켜쥐며 괴로워했다. 머리통이 바스라질 것 같은 두통이 엄습했던 것이다. 그는 지 금까지 이런 고통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눈앞에서 시커먼 어둠 속을 가르는 벼락의 빛에 드러나는 경물처럼, 어떤 광경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바람이 불었다. 비류연의 앞머리가 바람에 날리며 흩날리자, 그 아래로 황금빛으로 빛나는 두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짧은 순간, 무명의 시선이 그 두 눈동자와 마 주쳤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악!”
무명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괴성을 터뜨렸다.
“대, 대장님, 괜찮으세요?”
깜짝 놀란 장소옥이 사색이 된 채 그를 불렀다. 그러나 무명은 비명을 터뜨릴 뿐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축 늘어졌다.
기절한 것이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비류연은 쓰러진 무명을 내려다보며 망연히 중얼거렸다.
분명 좀 전에 위험했던 것은 자신이었다.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던 비뢰도의 오의 중 하나가 깨진 충격에 한순간 방심 상태에 빠진 그는 완전히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무명은 그 빈틈을 찌르려면 얼마든지 찌를 수 있었다. 저자는 건망증은 중증일 정도로 심했지만 실력만은 확실했다. 그런 틈을 놓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오히려 쓰러지다니…….
이럴 때 할 말은 딱 한마디뿐이었다.
“땡잡았다!”
영령은 쓰러진 무명이 실려 들어오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좀 전에 들었던 무명의 말이 그녀의 귓가에 이명처럼 남아 떠나질 않고 있었다.
***
“뿌리가 없는 나무는 결국 나무가 아닌 거지. 그런 나무는 열매를 맺을 수 없어. 자기가 무엇을 맺어야 하는지 이미 잊어버렸기 때문이지.”
‘뿌리가 없는 나무…….”
무명의 말은 그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었다. 영령 역시, 그녀 자신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기억의 여기저기에 구멍이 나 있는데다가, 지금은 그 기억마저도 거짓으로 만들어진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고 있는 중이었다. 거짓된 뿌리를 가진 나무 라니, 그건 뿌리가 없는 나무보다도 더 허황된 존재였다.
거짓된 기억이라는 것은 거짓된 인생을 살아왔다는 뜻이다. 아니, 살아오지조차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조작된 것일 뿐이니까.
“거짓된 기억… 거짓된 목표… 거짓된 삶……..”
무명은 말했다.
자신의 안에 있는 뭔가가 ‘나’를 찾으라고 말하고 있다고. 불완전한 자신을 완전하게 되찾으라며 괴롭힌다고.
“내가 누군지, 나 자신이 무엇인지를 안 다음에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뭐가 될지를 규정하려면 말이야.”
무명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화살이 되어 영령의 가슴에 와서 박혔다. 이명처럼 남아 있는 그의 말이 그녀의 정신을 뒤흔들고 있었다. 그녀는 인정하지 않 을 수 없었다. 자기 자신이 거짓이라고 밝혀지는 것이 두려웠다는 것을. 그녀 자신이 지금 자신의 어딘가가 잘못됐다는 것을 외면해 왔다는 것을.
—자신이 진짜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을 두려워해 왔다는 것을!
지금 기억하고 있는 모든 것이 부정당한다는 것은 영령이라는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영령이라는 기억이 그녀가 자신을 더 이상 의심하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진짜 나를 찾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에 독고령이었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었든 지금부터는 영령으로 살아가려고 했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그분’께 바치기 위해, 나의 몸과 정신은 모두 ‘그분’의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것 역시 모두 거짓된 기억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동정호변에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접수를 받고 있었을 때, 자신의 이름을 ‘은명(隱名)’이라 밝혔을 때, 그리고 다시 만나 자신이 그 녀의 주인임을 밝혔을 때 보여주었던 그 눈빛. 그리고 그 눈빛을 봤을 때 느꼈던 감각은 대체 뭐란 말인가?
‘그 느낌도 모두 거짓이란 말인가?”
그 느낌은 그녀의 기억이 아니었다. 가슴이 따끔하고 아릿하고 왠지 저며오면서 슬픈 감정, 그러면서도 아련한 그리움.
‘그 느낌은 대체……??
그 느낌을 충성심이라 부르지 않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녀만의 느낌이었다. 그 사람을 그때 처음 만난 거라면, 왜 그런 그리움을 느꼈을까? 혹시 그 느낌은 지금의 기억이 아닌 또 다른 기억을 가진 나의 경험에서 바탕하는 것은 아닐까?
‘확인해 보고 싶다!’
그 느낌이 무엇인지 그녀는 확인해 보고 싶었다. 아니, 확인해야 했다. 그 느낌은 그냥 몰래 품고 있기에는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나예린이란 아이를 봤을 때도 분명 어떤 느낌을 받았다. 처음 봤을 때 느꼈어야 할 생경함과는 오히려 반대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녀의 원수인 검각(劍閣) 출신 이라는 말을 듣고 발끈했지만, 이제 자신의 기억을 믿지 못하는 이상 그 이야기는 모두 거짓일 수도 있었다.
정말이지, 조금 전에 들었던 무명의 이야기가 하나도 틀린 게 없었다. 그녀는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역시 망가져 있었구나……..
그리고 깨달았다. 거짓된 기억을 갖고 있기보다는 차라리 기억상실인 편이 더 낫다는 것을.
자신이 너무나 위태롭고 불안한 존재라는 사실을, 영령은 슬프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진짜 자기를 찾기 위해서는 지금의 자신을 깨뜨릴 용기가 있어야 한다. 남이 심어준 기억의 얽매임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그녀는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 같 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지금의 자신을 깨뜨릴 용기가 내게 있을까?”
그때 그녀의 어깨 위에 놓이는 가녀린 손 하나가 있었다.
“물론 할 수 있고말고요. 언니는 망가진 게 아니에요. 다만 잊고 있는 것뿐이니까요.”
그녀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희미하게 미소 짓는 나예린이 서 있었다. 불락구척의 솜씨가 확실히 범상치 않은지 벌써 몸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된 모양이 었다.
““예린아…….”
그녀는 자신의 입에서 무심코 흘러나온 말에 깜짝 놀랐다. 방금 자신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예린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네, 언니. 저예요, 예린입니다.”
나예린은 그녀가 자신을 친근하게 불러주자 마음이 동요되는지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는 자신의 심장이 욱씬, 하는 것을 느꼈다. 이 아이가 우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 그녀의 심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은명을 생각할 때 느끼는 느낌, 그리고 나예린을 생각할 때 느끼는 느낌. 종류는 다르지만 그것은 분명히 머릿속 기억에 의존하지 않는 순수한 감정이었다. 다른 모든 것이 거짓이라 해도 그 느낌만은 변함없는 진실이었다.
과연 나는 누구인가? 어느 모습의 내가 진짜인가? 그리고 그 사람은 나에게 있어 어떤 사람인가?
그녀는 나예린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아직 내가 누군지는 확신할 수 없어. 기억을 믿을 수 없으니 모든 게 뒤죽박죽이네. 하지만 지금부터 찾아보려고 해. 이 심장에 느껴지는 느낌을 길잡이 삼 아……. 날 도와줄 수 있겠어?”
나예린은 영령이 내민 손을 두 손으로 꼬옥 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물론 도와드리고말고요. 꼭 언니가 자신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어요.”
그 한 발 앞에 무엇이 있을지는, 독고령이 기다리고 있을지 영령이 기다리고 있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한 걸음을 내딛기로 결심했다.
“자매 상봉이라…… 역시 두 사람은 같이 있어야 어울려요. 물론 나랑 예린만큼은 아니지만 말이에요.”
나예린의 고개가 목소리가 난 방향으로 돌아갔다. 그곳에 비류연이 서 있었다.
어떻게 그가 여기에 있는지 나예린은 묻지 않았다. 왜 사절단도 아니었던 류연이 여기 있는지 어떤 의문도 들지 않았다.
그렇다. 그녀는 막연히 깨닫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 비류연이 계속 있었다는 것을. 천무학관을 떠난 후 지금까지 그녀는 그의 부재를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
이다. 때문에 그가 여기 이 자리에 자신을 구하러 왔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어떤 의문도 가지지 않았다.
비류연과 나예린의 시선이 마주쳤다.
“……”
그러나 비류연의 입에서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예린의 입에서도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대체 뭐라고 말하면 좋단 말인가?
그녀에게 뭐라고 말하면 좋단 말인가? 그는 누군가에게 조언을 구하는 유형의 인간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누가 대신 가르쳐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늦게 와서 미안하다는 말부터 해야 할까, 아니면 어떻게 서천에게서 빠져나왔느냐고 먼저 물어야 할까, 아니면 축하한다는 말부터 해야 할까?
불시에 납치된 그녀를 구하는 것은 그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녀가 더 괴로운 일을 당하기 전에 그녀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주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럴 생각으로 다시 이 섬에 와서 지금까지 싸워 이겨온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녀는 스스로 그 절망 속에서 빠져나온 듯했다.
비류연의 마음에는 그녀에 대한 자랑스러움과 호기심이, 그리고 그녀를 더 빨리 구해주지 못한 미안함이 복잡하게 뒤얽혔다.
그러나 결국,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운 것은 무엇보다도 그녀가 그의 곁으로 돌아온 것에 대한 충만한 기쁨이었다.
드디어 돌아왔다.
떨어져 나간 일부가 자신에게 다시 돌아온 느낌이었다. 불완전했던 자신이 이제야 비로소 완전해지는 느낌이었다. 무언가가 결여된 것 같았던 느낌, 그 결여가, 결 손이 채워지지 않아 계속해서 불안하고 안달이 났던 기억들이 점점 사그라진다.
비류연은 모든 말을 잊고 조용히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빛나는 밤하늘이 담긴 두 눈동자, 한 번 본 사람은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검은 눈동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검은 보석, 그리고 그 위에 송송 곱게 뻗어 있는 고운 아 미를 본다. 대가의 솜씨, 아니, 신(神)의 솜씨로 그려진 듯한 그녀의 속눈썹에 조금의 소실도 없는지 눈을 부릅뜨며, 단 한 올의 소실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시선은 점점 올라가 칠흑처럼 검은, 우아한 흑비단실처럼 느껴지는 풍성한 머리카락, 항상 은은한 향기가 배어 있는 머리카락, 얼굴을 묻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하는 머리카락, 가끔씩 손가락으로 빗질하듯 쓸어내려 주면 다섯 손가락 사이로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느낌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좋은 머리카락을, 헤어졌을 때보 다 혹여 푸석해지지는 않았는지, 눈을 부릅뜨고 살핀다.
그러던 중 비류연의 미간이 살짝 꿈틀거렸다.
아래로 향한 시선이, 오뚝한 코와 붉은 입술을 지나 나예린의 뺨을 바라보았던 시선이, 뺨이 약간 홀쭉해지고 붉고 도톰한 입술에서 약간 핏기가 빠져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만큼 그녀가 마음고생을 했다는 증거이자 현재 기력을 막대하게 소모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혹여 솜털 하나라도 다쳤다면 그렇게 만든 놈들은 모조리 찾아서 대가를 치르게 해주겠다는 듯한 기세로 비류연이 자신을 바라보자, 나예린은 그만 조금 동요하고 말았다. 집요할 정도의 시선에 나예린의 뺨은 살며시 홍조를 띠었다. 하지만 미묘하게도 불쾌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살짝 두근거렸다.
상당히 오랜 시간 나예린의 여기저기를 꼼꼼하게 살펴본 비류연은, 약간 창백해진 것 외엔 모든 것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비로소 길게 안도의 한숨 을 내쉬었다.
“휴우, 다행히 잃어버린 건 없는 것 같네요.”
가슴을 쓸어내린다. 불안해하던 마음이 이제야 조금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그럼요, 겨우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걸요?”
그녀의 말에 비류연은 매섭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사람에겐 단 하루일지 몰라도 나에겐 안 그랬어요. 일일천추라는 말을 이런 일로 실감하고 싶지는 않아요, 절대로! 두 번 다시!”
지난 하루 동안 벌어진 일이, 자신이 어떻게 행동했었는지에 대한 상당 부분이 기억에서 빠져 있었다. 확실히 제정신이 아니긴 아니었던 모양이다.
“류연, 저에게도 긴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믿었어요. 류연이 꼭 와줄 거라고 말이죠.”
만일 비류연이 자신을 구하러 온다는 확신이 없었다면, 그 지독한 절망과 공포에 당당히 맞서지 못했을 것이다.
“예린을 구해주지는 못했는걸요. 내가 좀 늦었죠?”
약간 고소를 머금으며 비류연이 말했다. 예린이 무사해서 무엇보다도 다행이긴 했지만, 혼자서 그자의 손에서 빠져나온 것이 기쁘고 자랑스럽긴 했지만, 그동안 그녀는 얼마나 홀로 마음고생을 했을 것인가. 그녀가 과거의 악몽을 헤쳐 나오는 그 멋진 순간에 옆에서 든든히 지켜주면서 그녀를 살펴주지 못한 것은 실로 안타까 운 일이었다.
“좀 더 빨리 예린을 찾았어야 했는데. 난 옛날부터 숨바꼭질이 서툴렀다니까요. 아하하하하하.”
비류연은 뒷머리를 긁으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나예린은 고개를 살포시 저었다.
“류연은 늦지 않았어요. 시간에 딱 맞춰왔는걸요?”
“그런가요? 잡혀 있는 예린을 구출해 주지 못했는데도요? 예린이 힘들어하는 순간에야말로 옆에서 지켜줘야 하는 건데, 고생시켜서 미안해요.”
“아니요, 당신은 제 마음을 구했는걸요. 그리고 아직 완전히 탈출한 것도 아니잖아요?”
그녀의 말대로, 이 섬 자죽도를 벗어나지 않은 이상 구출은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선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확실히 제대로 활약해야겠네요. 지각한 것을 만회하려면 말이죠.”
“기대하고 있겠어요, 류연.”
나예린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매우 미약한 미소처럼 보일이지 모르지만, 비류연은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전적인 신뢰의 미소라는 것을.
“강해졌네요, 예린.”
비류연은 나예린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마침내 팔 하나 뻗으면 닿을 만큼 접근한 비류연은 살짝 웃는 나예린의 어깨를 한 손으로 감싸 안았다. 나예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비류연의 몸에 팔을 둘렀다.
무서웠으리라. 두려웠으리라. 도망치고 싶었으리라. 그러나 그녀는 도망치지 않았다. 두렵지만 과거의 악몽과 맞서 싸웠다. 그리고 스스로 일어났다. 그가 도움의 손길을 뻗기도 전에.
“고생했어요, 예린. 잘 돌아왔어요.”
나의 곁으로, 라는 말은 속으로만 삼켰다.
나예린은 비류연의 옷을 꼬옥 움켜잡았다. 등 뒤의 옷을 움켜잡고 있는 손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소리없이 오열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녀왔어요, 류연.”
또르륵, 나예린의 백옥 같은 하얀 뺨 위로 수정 구슬 같은 눈물방울이 한 방울 흘러 떨어졌다. 파르르 몸을 떠는 나예린을 껴안은 채 비류연은 생각했다. 다행이다. 정말로 다행이다, 라고.
그리고 또 생각했다.
‘눈치챘을까?”
자신을 감싸고 있는 사내의 손이 지금 부르르 떨리고 있다는 것을.
긴장이 풀린 탓일까? 아무리 멈추려 해도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그녀가 납치당했을 때도 떨리지 않았던 손이 왜 지금 와서 떨리는 걸까?
그는 공포라는 것을 몰랐다. 두려움이라는 것을 몰랐다.
공포도 두려움도 모두 ‘그날’, 부모님들의 무덤 속에 함께 묻었다. 그 후로 그는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지 않았다. 차례차례 쓰러져 가는 마을 사람들, 용암처럼 펄 펄 끓다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가는 아버지, 어머니의 시체 옆에서, 보름인지 한 달인지 시간조차 알 수 없는 그 죽음의 소용돌이 속에서 공포라는 것을 모두 소 모해 버렸었기에.
하지만 지금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녀를 하마터면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그의 몸과 그의 마음이 진심으로 두려움과 공포를 느꼈다는 것을 명백히 증명하고 있었다.
불완전한 자신을 완전하게 만들어줄 사람.
그의 소중한 것…….
그제야 무언가 떨어져 나갔던 것이 완벽하게 되돌아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소중한 것을 되찾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