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龍)과 싸우다
-공(空)의 둥지
“제자야.”
“왜요, 사부?”
딱!
“아야! 우쒸, 왜 때리고 그래요!”
“어째 넌 그런 것 하나 제대로 못하냐? 그래서야 우리 비뢰문의 노예 녀석이 너보다 훨씬 낫겠다.”
“노예라니, 그런 호화스런 물건이 어디 있어요, 이 짠돌이 문파에?”
“없긴 왜 없느냐? 예전엔 있었어. 이대로라면 네놈은 기껏해야 식순이로 끝날 판이지.”
“저, 식순이였던 겁니까?”
“원래 제자는 노예 혹은 식순이랑 종이 한 장 차이야.”
“그 종이 한 장 차이가 뭔데요?”
“그야 당연히 비뢰문의 무공을 배울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거지. 그것 말고는 다 똑같다고 생각하면 돼.”
“그것 말고는 다 돈 벌고, 밥 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거잖아욧!”
“그래, 그렇지. 당연한 걸 뭐 하러 물어보느냐?”
“우쒸!”
“분하면 너도 제자를 키우던가. 그러려면 그전에 이 ‘공저물사低物事)’의 요체를 터득해야 하지 않겠느냐? 세상을 모두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을 먼저 비우 지 않으면 안 되는 법. 자신을 비우지 못하는 자, 얻지도 못하리라. 서로 다른 기운들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텅 비워라. 많이 비울수록 많이 얻을 수 있 는 것이다.”
“그런가요?”
“물론. 자, 그러니 네 주머니도 비우도록 해라.”
“주머니는 왜요?”
“이 이치는 돈에도 마찬가지다. 주머니를 많이 비우면 더 많은 돈을 채울 수 있지 않겠느냐?”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이 사부의 말을 못 믿겠다는 거냐? 세상의 큰 이치를 가르쳐 주려는 이 사부를?”
“당연하죠! 주머니에서 돈을 비우면 가난해질 뿐이라고요!”
다른 말은 다 믿어도 마지막 말만은 당최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사부 몰래 꼬불쳐 둔 돈이 있다는 건 어떻게 귀신같이 알아서는. “쯧쯧, 용(龍) 한 마리도 제대로 제어 못하는 미숙한 녀석이 의심병은 깊어서는. 잘 들어라, 제자야. 네 몸에 깃들게 된 네 마리의 용. 그 용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힘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 언제가 네 몸을 잡아 뜯을지도 모르지. 그래서는 평생 묵룡환을 벗지 못한다. 하지만 명심해라. 그 네 마리의 용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결 코 ‘뇌신(雷神)’을 얻지 못한다는 것을! 자, 그러니 비워라!”
비워라 비워라ᅳ비워라ᅳ
“으윽……”
비류연은 눈을 감고 가부좌를 튼 채 짧게 신음을 흘렸다. 옛날에 들었던 사부의 말이 귓가에 환청처럼 반향되고 있었다.
현재 비류연은 운기행공 중이었다. 그런데 그 장소가 별로 좋지 않았다. 보통 운기행공 중에는 신체가 무방비 상태에 놓이는 일이 대부분이라 외부의 작은 충격에 도 주화입마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은밀한 곳에서 조용히 하게 마련이다. 그것이 강호의 상식. 그러나 지금 비류연은 적진의 한복판에서 수십 명의 적들에게 둘러싸인 채 운기행공을 하고 있었다. 그를 지키는 것은 효룡 한 사람뿐이었다. 이 뻔뻔스럽기까지 한 행동에는 서해왕 락비오도 어이가 없을 수밖에 없었 다.
“저 친구 간이 배 밖으로 나왔나?”
그렇게라도 효룡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효룡은 조금 부끄러워져서,
“어흠, 그런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은 묻지 말아주시오.”
라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었다. 본인 스스로 정정당당하다고 주장하는 락비오인지라 부하들을 통해 공격하지는 않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적진 한가운데서 마음을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효룡은 흑도 출신인만큼 잘 알고 있었다. 흑도인의 약속만큼 신용 안 가는 것도 드물다는 걸. 그리고 락비오가 가만히 있는다 해도 공을 앞세우려 서두르는 자가 있을 수 있었다. 무능한 대장을 대신해 자신의 이름을 올리려는 자가. 그렇기 때문에 효룡은 조금도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비류연을 지키 는 방패가 되어야 했다.
‘제발 빨리 깨어나라고, 이 친구야. 내가 피가 말라 죽기 전에.’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애써 감추며 효룡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의 태평하기 짝이 없는 친구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사실상 비류연 역시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치열한 싸움을 전개하는 중이었다. 그의 내부에서 소용돌이치는 세 가지 기운과!
첫 번째는 비류연이 원래 가지고 있던 기운이었다. 비뢰도의 수련을 통해 그가 얻었던 힘, 그리고 두 번째는 묵룡환이 풀리면서 깨어난 힘이다. 이것 역시 비류연 이 얻은 힘이지만 아직 제대로 제어하지는 못하고 있는 힘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의외로 락비오가 준 단약의 기운이었다. 락비오의 장담대로 그것은 독약이 아니 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좋아할 수 없는 게, 의외로 강력한 약효 때문에 안 그래도 폭주하기 직전의 기운에 새로운 기운이 더해졌던 것이다. 이들 기운 중 가 장 거대한 것은 바로 묵룡환에서 풀려 나온 좌수룡의 기운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현재는 세 가지 서로 다른 기운이 그의 몸 안에서 충돌하고 반발하고 얽히고 소용돌 이치며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장마 중의 저수지처럼 제방을 부수고 금세라도 분출할 기세였다. 이 엄한 기운을 비류연은 어떻게든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목숨조차 보 장할 수 없었다. 자기 안의 기운에 자기가 무너지려 하다니……. 만일 사부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미숙한 놈이라고 족히 십 년은 놀려먹었으리라.
‘이런 상황, 예전에도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였더라?”
왠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화산지회 때의 일이었던 것 같다. 그러자 어떻게 그때 그 상황에서 벗어났는지 기억이 났다. 그때는 거의 무의식중에 해결 했던 일이라 기억이 희미했던 것이다.
‘그렇다. 그걸 왜 잊고 있었을까? 그때의 일을?
사람을 과거를 통해 배우고 현재를 발전시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 아니었나. 순간 머리가 비구름이 지나간 것처럼 맑게 개였다.
‘공저물사(空物事)!’
자신을 텅 비움으로써 자유자재의 변화를 얻는 것. 그것이야말로 천변만화하는 무형(無形)의 힘. 무형이기에 틀에 얽매이지 않는, 무(無)의 본질.
고정된 틀을 부수고 세상의 중심에 나 자신을 세우는 것.
그것이 바로 뇌신으로 가는 길.
‘아, 망할 사부! 그런 의도였구나.’
그제야 비류연은 용을 풀어놓은 사부의 의도를 파악했다.
오랜 시간의 수련을 통해 자신의 몸 안에 쌓여 있는 거대한 기. 그 거대한 기의 흐름은 마치 승천하는 용과 같이 사납고 거칠고, 또한 위력적이다. 자칫 잘못하면 소 유주의 몸까지도 뜯어먹을 위험이 있는 거대한 힘. 묵룡환이라는 것은 거대한 힘의 분출을 제압하는 안전장치이기도 했다.
이미 망할 사부에 의해 안전장치는 해제됐다.
용의 해방.
한번 풀려난 용을 다시 묶어둘 방법은 없다. 그 용을 길들이지 않는 이상, 그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그런데도 사부는 웃으면서 제자를 사지로 밀어 넣었다.
그 용을 제압한다는 것은 바로 완전한 자기 제어로 가는 길. 이 날뛰는 용을 제어하지 않는 이상, 비류연에게 뇌신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사부는 제자에게 뇌신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려 한 것이다.
‘아아……사부…….’
이런 빌어먹게 감동적인 마음 씀씀이라니!
그렇다면 제자 된 도리로서 이 사지에서 웃으면서 걸어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사부의 얼굴에 한 방 먹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지옥의 문턱 관광은 잘하고 왔다고. 참으로 짜릿짜릿한 경험이었다고. 사부도 꼭 한 번 가보시라고. 적극 추천이라고! 효도 관광차 손수 보내 드리겠다고!
그러니 여기서 꾸물거리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좌수룡과의 싸움은 스스로와의 싸움, 그것은 그 어떤 싸움보다도 가혹한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 선 예린이, 예린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이든 뭐든 제압해 주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비류연의 몸속에서 수많은 기운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그 기운을 모아 하나로 엮는다.’
그것이 지금 비류연이 해내야 할 일이었다. 그때 화산지회에서 한순간 그랬었던 것처럼.
‘자, 와라! 좌수룡! 네가 먹히나 내가 먹히나 해보자.’
강제로 억누르려 하지 마라, 억누르려고 하면 할수록 그것은 반발하게 마련이다. 억지로 자기를 누르고 눌러도 그것은 언제가 다시 서너 배가 되어 되튕겨 오르게 마련이다.
억누르려 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용을 키울 수 있는 그릇. 자신의 몸을, 자신의 단전을 용이 살 수 있는 둥지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무(無)!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공(空)이리니.
만물에 응(應)하여 천변만화하는 현현지문(玄玄之門)이니.
내가 변하지 못할 것은 없고, 내가 담지 못할 것은 없다.
천지 우주가 모두 내 안에 있다.
내가 바로 우주, 우주가 바로 나.
나는 지금 이 순간 하늘과 땅 사이에 우뚝 서는 태극(太極)의 축이 된다.
비뢰도(飛刀) 독문심법(獨門心法)
뇌령심법(心극의極
공저물사(空低物事)
천지인(天地間立人)
삼재지묘(妙) 초의(初意)
태극(太極) 입立軸)
비어 있어도 비어 있는 게 아니며, 없어도 없는 게 아니다.
하나[一體]는 전부[全體], 전부[全體]는 하나[一體].
만상일귀(萬象歸).
모든 것은 하나에서 나왔으니, 하나로 돌아가리라!
그 돌아갈 곳은 바로 세상과 우주의 중심, 바로 ‘나[我]’다.
그의 몸 안에서 회오리치고 있던 세 가지 기운이 하나로 녹아들며 거대한 용의 형상을 이루었다. 그 용이 미칠 듯이 하늘 위로 올라간다. 그리고 그 용은 구름을 뚫 고 하늘로 올라 마침내 우주로 올라갔다.
이곳이야말로 내가 태어난 곳, 이곳이야말로 내가 돌아올 곳. 마침내 용은 그 광대한 우주 안에서 똬리를 틀며 잠이 들었다.
그 우주의 이름은 ‘비류연’이라 했다.
포룡귀원(抱龍歸元)
용을 그 단전 안에 품고 비류연은 각성했다.
“이럴 수가!”
자신이 그린 원 안에서 쌍검을 빼 든 채 호법을 서고 있던 효룡은 깜짝 놀랐다. 그 순간 비류연의 몸이 황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펄럭펄럭,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비류연의 검은 무복과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듯 세차게 펄럭거렸다.
그리고 나부끼는 머리카락 속에서 비류연의 두 눈이 천천히 떠졌다. 두 호안석의 눈동자는 찬란한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스르르르륵!
한 번 밖으로 방출되었던 바람이 이번에는 비류연을 향해 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미풍처럼 약했으나 흐름은 곧 강풍으로 변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아니, 이 현상은 그런 걸로는 설명할 수 없었다. 마치 무저갱을 향해 세상의 기운이 모두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리곤 언제 그랬냐는 듯 순식간에 옷자락의 펄럭임과 머리카락의 율동이 잔잔해지더니 모든 것이 조용해졌다.
바람도, 소리도, 사람도, 모든 것이 비류연에게 빨려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명경지수 같은 고요함이 장내를 가득 채웠다.
“흐아아아아암!”
이 순간이면서도 영원과도 같은 침묵을 깨기라도 하듯 비류연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긴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이. 주위를 한 바퀴 빙 둘 러본 후 비류연은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응? 뭐 볼 게 있다고 다들 모여 있어? 초절정 미소년 처음 봐?”
여느 때와 같은 비류연이었다. 그제야 효룡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심했다.
“이제 괜찮나, 류연?”
“물론이지, 룡룡. 난 최상이야. 더할 나위 없이 최고의 상태지. 여기 이 구경꾼들이 다 덤벼도 멀쩡할 만큼 말이야. 못 믿겠으면 직접 보여줄 수도 있고.”
비류연이 싱긋 웃었다. 그의 도발에도 발끈해서 움직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지금 비류연의 분위기는 이 장내에 있는 인간 모두를 지배하고 있었다. 조용한 위압 감이라면 이런 걸 말할 것이다. 정말 볼 때마다 어처구니가 없는 친구였다. 그 끝이 도무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저런 걸 친구로 둔 자신은 행운아일까, 아니면 천하 에 다시없는 불행아일까? 그런 의문을 뒤로하며 효룡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을 것 같군.”
“자, 그럼 쉬기도 푹 쉬었겠다, 친구 녀석들을 찾으러 가볼까.”
“그것참 좋은 생각일세. 나도 마침 이곳에 계속 이 자세로 서 있는 것도 지루하던 참이었거든.”
효룡은 알 수 있었다. 자신들이 이곳을 나가도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거라는 것을.
그러나 괜히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고언이 태곳적부터 전해져 오는 게 아니었다. 보는 눈이 없는 자에게는 뭐든 통하지 않는 법이다. 보지 못한다는 것은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고,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것은 바로 만용(蠻勇)으로 이르는 지름길.
지금 비류연의 등 뒤는 그야말로 허점투성이. 지금이라면 걸어서 내보내지 않아도 된다, 보는 눈이 부족한 자에게는 그렇게 생각될 정도로 무방비했다.
“우리 십번대가 함부로 들어왔다 함부로 나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십번대 대원 중 하나가 비류연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상당히 서열이 높은 듯, 그 일격은 범상치 않았다.
“그만둬, 부대장!”
락비오가 말렸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그러나 그 일격은 간단하게 비류연의 두 손가락 사이에 잡혔다.
“이, 이럴 수가!”
그 대원은 자신의 필생의 신력이 담긴 일격이 겨우 손가락 두 개에 제압당하자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번쩍.
비류연의 오른손 팔뚝 주위에서 황금빛 실 같은 것이 춤을 추듯 번뜩였다.
샤샤샤샥!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검을 비롯해 그가 입고 있던 옷과 머리카락이 조각조각 벗겨졌다. 피부에 상처 하나 없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사내는 허공 중에서 알몸이 되어 땅에 떨어졌다.
“흠, 제대로 제어되는 모양이군. 머리카락 한 올 두께까지 되는 걸 보니.”
의도적으로 피부를 다치게 하지 않고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빗나가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비류연은 덕분에 별로 보고 싶지 않은 걸 보고 말았다.
“윽, 쓸데없는 것을 베어버렸군. 눈이 썩을 것 같아.”
털이 수북한 사내의 알몸 따윈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자네가 생각없이 벤 탓이니 누굴 탓하겠나.”
별로 보기 좋지 않다는 데는 효룡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또 해볼 사람??
비류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십번대 대원들을 둘러보았다.
주춤,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움찔하여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눈에는 비류연의 부드러운 미소가 사악함으로 가득한 악마의 미소처럼 보였다.
“그럼 룡룡, 빨리 여길 떠나자고. 빨리 예린을 만나러 가야지.”
떠나는 두 사람을 막는 이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락비오는 그제야 비류연과 정면으로 싸웠으면 자신에게 승산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서 저런 괴물 같은 놈이 튀어나온 거지?”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산을 본 것 같아 락비오는 입맛이 무척이나 썼다.
* * *
그는 이름이 없었다. 어릴 때 산에 버려져 늑대의 젖을 먹고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늑대들과 함께 자고 늑대들과 함께 달렸다. 형제와 다름없는 창랑아와 함께 같은 어미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그를 길러준 늑대가 자칭 백도의 무림인에게 살해당했다. 사람들을 위협하는 흉수(凶獸)를 처치한다는 명분이 었지만, 실상은 푸른 늑대의 모피가 진귀해서 비싼 값에 팔리기 때문에 사냥당한 것이었다.
아직 이빨이 덜 자란 그와 창랑아는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 어린 창랑아와 함께 도망친 그를 거둔 것이 바로 사부 ‘혈랑객’이었다. 혈랑객은 한 마리 붉은 늑대를 데리고 다니는 자였는데, 그는 늑대 젖을 먹으며 자란 그에게 무척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어릴 때부터 늑대와 함께 산속을 뛰어다녔기 때문에, 일반인을 훨 씬 능가하는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늑대와 뒹굴어 사납기 짝이 없던 창랑이었지만, 혈랑객의 상대는 될 수 없었다. 그를 처음으로 길들인 것도 혈랑객이었고, 그에게 사람의 말을 가르쳐 준 것도 혈랑객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것도 혈랑객이었다.
그는 사부 밑에서 수련을 쌓아 마침내 그가 살던 무리를 죽인 무림인들에게 복수할 수 있었다. 그 무림인이 있던 곳이 바로 하남이었다. 다만, 소림사를 목표로 한 것은 혈랑객의 염원이었다. 소림사의 역사에 오명을 남기는 것이 그의 목표였던 것이다.
백팔나한진 탓에 혈랑객의 염원은 완벽하게 달성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창랑은 어느 정도 한을 풀 수 있었다. 그의 어미를 모피로 만든 무림인들에게 복수하는 와 중에, 그 어미의 몸을 되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그는 푸른 늑대의 모피를 머리째로 옷처럼 두르고 다니며 한시도 몸에서 떼지 않았다. 어미 늑대의 거죽을 몸에 걸치고, 가슴에 늑대의 문양을 새기고, 두 눈에 늑대의 그것처럼 푸른 귀광마저 서린 그의 모습은 이미 한 마리의 늑대라 할 수 있었다.
“이 어머니의 가죽을 걸치고 있는 이상, 난 질 수 없다. 덤벼라! 마랑혈풍조의 먹이로 삼아주마!”
창랑의 손에서 다시 육섬조강이 날아들었다.
모용휘가 급히 은하유성검법의 은하강기를 펼쳐 육섬조강을 막아냈다.
검강에는 검강으로 대항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칫 회피했다간 부상당한 산산을 업은 현운과 아직은 미숙한 공손절휘가 그대로 노출될 것이기에 다른 수가 없었다. 때문에 내공의 소모가 거의 한계에 달한 상태를 감수하고서라도 모용휘는 검강을 쥐어짜 냈다.
창랑의 말이 맞았다. 지금껏 과도하게 진기를 소모한 그들이 이길 승률은 매우 희박했다.
그들이 이길 방법은 단 하나.
‘속전속결’
오직 그것뿐이었다.
지금, 시간은 그들의 적이었다. 아니, 아까 전부터 그들의 적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산산의 상태는 더욱 위급해질 테니까.
시간을 끌 마음은 없었다.
“제가 우선 저자의 양손을 묶겠습니다. 그 틈에 선배님이 공격하십시오. 절휘, 자네도.”
“알겠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동시에 공격하면 제아무리 마랑객이라 해도 어쩔 수 없을 겁니다. 이 일격에 끝내야 합니다. 저희에겐 시간이 없으니까요.”
“이미 뼈저리게 알고 있네.”
등에 업고 있는 산산의 몸에서 생명이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것을 현운은 누구보다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저 짐승 같은 놈 때문에 여기서 발이 묶여 있으니 갑 갑해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갑니다!”
창랑이 다시 거리를 좁히지 않은 채 육섬조강을 펼치려 했다.
그 순간, 모용휘가 보법 유성관천(流星貫天)을 펼치며 그자의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유성의 꼬리처럼 모용휘의 신형이 길게 늘어나는 것으로 보아 그가 얼마나 빠르게 움직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야말로 순신(瞬迅)!
채앵!
검과 조가 부딪치며 불꽃을 일으켰다.
육섬조강은 발출되지 않았다.
“이럴 수가!”
창랑의 입에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칼날의 속도가 최고점에 달하지 못하면 진공인은 발생시킬 수 없지요!”
더욱이 강기를 원거리로 뿜어내는 것도 불가능했다. 때문에 모용휘는 일부러 몸을 던진 것이다.
“이땝니다!”
낭아조가 봉쇄된 틈을 놓치지 않고 현운과 공손절휘가 동시에 달려들었다. 그러나 육섬이 봉쇄됐음에도 창랑은 전혀 곤란해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득 의만면한 웃음을 지으며,
“이 정도론 곤란하지!”
찰칵!
창랑의 오른발에서 세 개의 쇠 발톱이 돋아났다.
부웅!
창랑이 오른발을 차올리자 진공의 칼날이 모용휘를 덮쳐 왔다.
“헉!”
창랑의 손에만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모용휘는 방심하고 말았다.
깡!
모용휘는 급히 검을 끌어당겨 진공인을 막아냈다. 하지만 속도가 부족해 상쇄하지 못한 진공인이 모용휘를 덮쳤다. 터져 나오는 짧은 비명.
“모용 선배님, 괜찮으십니까?”
달려오던 공손절휘가 사색이 되어 외쳤다.
“난 괜찮네. 스쳤을 뿐이야.”
상처로부터 피가 뿜어져 나왔지만, 다행히 치명상은 피했던 것이다.
오른쪽 발차기로 ‘삼섬각’을 펼친 창랑의 몸이 허공으로 부웅 떠오르면서 허리를 뒤집으며 공손절휘에게 왼쪽 발차기를 날렸다. 단순한 발차기가 아닌 진공의 칼 날을 품은, 살상력이 넘치도록 풍부한 발차기였다.
“헉!”
공손절휘는 급히 방어 초식을 전개했다.
카가가가가가강!
세 개의 진공인이 질풍이 되어 공손절휘의 몸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직격은 흘려버렸지만, 아직 예기가 죽지 않았는지 진공인이 옷과 살을 찢고 지나갔다.
창랑은 자유롭게 된 두 팔을 교차시키며 현운을 향해 육섬을 전개했다.
너무나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이라 풍우만곡을 펼칠 시간도 없었다. 현운은 급히 검극으로 원을 그리며 화경을 전개했다. 하지만 공격에 정신이 팔려 있어 완벽한 화경을 펼치지 못하고 그만 공격의 반을 허용하고 말았다.
창랑은 몸을 가볍게 뒤집으며 사뿐하게 땅에 착지했다. 그의 몸에는 어떤 상처도 없었으나, 모용휘, 현운, 공손절휘 세 사람 중엔 멀쩡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 다.
“이런, 내가 말 안 했었나? 늑대는 발이 네 개라고?”
그의 얼굴에는 득의만면한 미소로 가득했다. 반면 모용휘를 비롯한 세 사람의 얼굴에는 낭패가 가득했다. 속전속결로 끝내려다가 속전속결로 당할 뻔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천십삼대 대장의 진짜 실력인가…….’
아무래도 창랑의 역량은 그들이 상상하는 이상이었던 모양이다.
“허억허억, 허억!”
간신히 자세를 유지하며 서 있는 세 사람의 숨결이 점차 가빠져 왔다. 몸이 금방이라도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 같았다.
지금 그들을 세우고 있는 것은 오직 ‘의지’뿐이었다.
***
“뭐야, 이 멍멍이들은? 멍멍이 주제에 갑옷을 입었네?”
갑자기 자신에게 덤벼든 늑대에게 한 방 먹이며 비류연이 중얼거렸다. 그 늑대는 가죽 위에 쇠가죽을 한 겹 더 걸치고 있었는데, 그것도 철 송곳이 여기저기 박혀 있는 아주 흉험한 물건이었다.
“류연, 아무리 봐도 얘들은 멍멍이가 아니라 늑대 같은데?”
“섬 한가운데 웬 늑대? 요즘 늑대는 수영이 취민가?”
“아마 창랑대에 사육되던 녀석들이겠지. 소문으로 들은 적이 있어. 창랑대에서 비밀리에 사육하고 있다는 철갑늑대들의 소문을.”
아무래도 이 녀석들이 바로 그 녀석들인 모양이었다.
“뭐야, 역시 멍멍이 맞잖아? 사람의 손에 가축처럼 사육된 녀석들은 이미 늑대라고 부를 수 없지.”
“하지만 무시할 건 아니라네. 이들은 체계적인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야생의 늑대보다 훨씬 무섭다고.”
“설마 뾰족뾰족 갑옷이 늑대들의 최신 유행은 아니겠지? 애견복치고는 꽤 비싸 보이는 옷이네.”
쇠로 만들어져서 상당히 무거울 텐데 이놈들의 움직임에는 그다지 둔해진 기색 없이 여전히 재빨랐다. 하지만 일반인이 보기에 그렇다는 거지 비류연의 눈에는 한 없이 느려 보일 뿐이었다.
깨갱!
다시 늑대 한 마리가 비류연의 손에 얻어맞고 나가떨어졌다.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기세를 보니 아직 야생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야생의 난폭함이 남아 있으면서도 묘하게 연계가 잘 되어 있었다. 동물 주제에.
“될 수 있으면 그 야생을 억제하지 않은 채 기른다고 하더군. 게다가 그 철갑늑대들이 두른 갑옷은 웬만한 칼날도 안 들어가는 물건이라고 하네.”
“쳇, 귀찮게 됐군. 대체 이놈들 몇 마리나 있는 거야?”
좀 전부터 계속 경공을 발휘하며 뿌리치고 몇몇 놈들은 권격으로 깨갱거리게 만들었지만, 뒤를 추적해 달려오는 늑대들의 수는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난 것 같았다.
“소문으로는 대원 한 명당 한 마리의 늑대를 담당해 키우고 있다던데…….”
“거기 파란 늑대들 인원이 몇 명인데?”
“거기는 다른 대보다 훨씬 더 인원이 많아. 한 구십 명은 될걸?”
“뭐야? 그럼 저런 놈들이 구십 마리나 된다는 거야?”
그래, 라며 효룡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귀찮게 됐네…….”
비류연은 경공을 늦추지 않은 채 혀를 찼다. 야생의 늑대들을 상대하는 것은 상당히 위험했다. 게다가 거의 백 마리에 가까운 늑대들이라니…… 어지간한 심산유 곡에서도 쉽게 조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비류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놈들을 상대하려면 못할 것도 없었다. 비록 저 흉험한 애완동물복이 단단하긴 해도 마음만 먹으면 뚫을 수 있었다. 쓰러뜨릴 수 도 있었다. 하지만 저만한 수를 상대하려면 막대한 기력을 소모해야 한다. 방금 전 늑대 주제에 보여준 상당한 연계력으로 미루어 보아 이놈들은 조직적으로 단련된 놈들이었다.
‘그 녀석들 괜찮을까??
사해도로 향하던 다른 세 조는 모두들 적어도 이미 한 번의 전투를 치렀을 터이니, 진기를 상당히 소모한 상태일 게 분명했다.
그런 상태에서 차륜전에 말려들었다면, 상당히 위험했다.
“다섯, 아니 적어도 넷은 있어야 되겠는데…….’
그들의 상대를 또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이런. 손해 보는 장사는 하지 않는 주의인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
“자, 늑대는 먹이를 가지고 장난치지 않는 법. 이제 마무리를 지어주지.”
좌우로 교차한 창랑은아조에서 푸른 강기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창랑의 머리카락과 가죽 옷이 세차게 펄럭였다. 소모될 대로 소모된 세 사람의 내공과는 비교 도 안 될 정도로 풍부한 내공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전력을 발휘하려 하고 있었다.
“최강의 이빨로 너희들을 먹어치워 주마!”
다음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순간적으로 창랑의 신형이 여섯으로 나뉘어졌던 것이다.
“으하하하하, 목은 씻어놨겠지?!”
사방에서 쏘아보는 열두 개의 눈동자 속에서 푸른 안광이 빛을 발했다. 늑대의 입가를 타고 잔인한 미소가 번져 나간다. 그것은 맹수가 쫓을 대로 쫓은 사냥감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직전의 눈빛이었다.
마랑혈풍조(魔狼血風爪) 최종 사살기
오의
질풍육랑섬(風狼閃) 잔(殘)
좌에서 나타났다 싶으면 우에서 나타나고, 우에서 나타났다 싶으면 뒤에서 나타나고, 뒤에서 나타났다 싶으면 앞에서 나타나고, 앞에서 나타났다 싶으면 위에서 나타났다. 눈으로 좇아갈 수 없을 정도의 빠름이었다.
모용휘를 비롯해 현운과 공손절휘는 어떻게든 창랑의 움직임을 따라가 보려 했으나, 검이 지나갔을 때 그의 신형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세 사 람의 전의를 완전히 사라지게 하려는 듯 사방에서 동시에 나타났다. 동시에 펼쳐지는 육섬의 공격.
“방어에 전력을!”
모용휘는 급히 검막을 펼치고, 현운은 태극혜검의 화경을 극성으로 일으켰다. 공손절휘도 급히 검강을 일으키며 대응했다.
“크아아아아악!”
세 사람의 신형이 대포를 맞은 것처럼 뒤로 날아갔다. 그중에서 가장 멀리까지 날아간 것은 공손절휘로, 그는 땅바닥을 다섯 번 정도 데굴데굴 굴러야 했다. 튕겨 져 나간 신형을 가장 먼저 가눈 사람은 모용휘였다. 현운은 남궁산산의 몸을 지키려고 억지로 버텨내는 바람에 쓰러지진 않았다. 차라리 좀 더 많은 타격을 허용해 서 몸이 엉망이 되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산산을 더 이상 다치게 할 수는 없었다.
“질풍처럼 빠른데다가 육(六) 분신까지 쓰다니…….”
여섯 분신에 의한 동시 다발적인 ‘육섬’ 공격. 폭풍처럼 사방에서 몰아치는 창랑의 공격에 세 사람은 하마터면 치명상을 입을 뻔했다. 세 사람의 검을 쥐고 있던 손 이 욱신거리고, 전신은 상처로 가득했다. 이렇게 강한 자가 왜 무리를 이루려 했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하하하, 믿을 수가 없군. 설마 이 기술을 막아낼 줄이야. 자네들, 생각 이상으로 대단한 사냥감들이었군.”
다행히 이번 기술은 내공의 소모가 큰 만큼 창랑도 바로 다음 공격으로 이어가지는 못하고 있었다. 하긴 기본적으로 여섯 분신에서 각각 여섯 줄기의 조강을 뿜어 내는 공격이다. 사실 그는 지칠 대로 지친 모용휘 일행이 이런 필살기를 막아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의 최후의 송곳니가 빗나간 적은 지금까지 딱 한 번밖 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 사람 역시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위험하군, 위험해. 다음 한 번이 한계겠어.”
현운은 비틀거리며 침음성을 흘렸다. 산산을 업고 있는 탓에 그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타격도, 피로도도 심했다. 좀 전처럼 무지막지한 강공을 두 번 연속으로 막 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앞으로 한 번…….’
그것이 한계였다.
그런데 저 파란 늑대는 아직도 힘이 철철 넘쳐 보였다. 상황은 무척이나 절망적이었다.
“그렇다는 것은 다음 한 번은 막아내실 수 있다는 겁니까, 현운 선배님?”
모용휘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한 번이라면.. 가능하네. 한 번이라면.”
한 번을 강조하며 현운이 말했다.
“저 역시 딱 한 번 공격할 힘이 남아 있습니다.”
그 말에 현운의 얼굴이 절로 찌푸려졌다.
“별로 좋은 소식은 아니군.”
그러나 모용휘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결코 절망이 아니었다.
“제게 저자를 쓰러뜨릴 방법이 있습니다.”
“어떻게 말인가?”
다급한 목소리로 현운이 되물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절휘, 자네 힘이 필요하네.”
현운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공손절휘를 쳐다보며 모용휘가 말했다.
“네, 저 말입니까?”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공손절휘가 새총 맞은 참새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자네 말이네, 절휘!”
잘못 들은 것도, 환청도 아니라는 듯 모용휘는 잔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전 못합니다.”
공손절휘는 창백한 표정으로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강호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에 비하면, 몇 번의 실패로 한 백 배 정도는 의기소침해진 공손절휘였다. 게다 가 동해도에서 있었던 일 이후 모용휘를 마음속에서 인정해 버리게 되다 보니, 지금까지 그를 악으로 받쳐 주던 왜곡된 ‘목표’ 역시 깨끗이 소멸된 이후였다. 모용휘 를 쓰러뜨리고 공손세가를 강호제일가로 올려놓겠다는 그 건방이 하늘을 찌르던 청년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 자네는 할 수 있네!”
“하지만…….”
공손절휘는 여전히 자신없는 듯 말했다.
“할아버님께 들은 적이 있네. 공손 가문의 지존검법의 진정한 위력은 절세보법(絶世步法) ‘지존군림보’에서 나온다고.”
“그, 그건..
말끝을 흐리기는 하지만 부정하지는 않는다.
“어떤가? 자네의 지존군림보가 십성의 경지에 도달했다면 저 창랑의 신법을 막을 수 있을 걸세.”
“……”
공손절휘는 선뜻 할 수 있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감을 잃어버린 지금 그는 실패가 두려웠던 것이다. 창랑의 창랑은아조에 맺힌 푸른 강기가 점점 더 빛을 더해 가고 있었다. 그의 기력이 급속도로 회복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절휘 군, 보시다시피 나 역시 한 번의 공격이 한계야. 첫 공격은 현운 선배한테 부탁해서 막는다 해도, 그다음 이어질 저자의 움직임을 붙잡을 힘이 필요하네. 그 걸 할 수 있는 건 자네의 지존군림보’뿐이네. 자네가 지금까지 노력해 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네. 처음 만난 그날 이후로 자네는 계속 발전해 왔네. 그러니 자네 자 신을 좀 더 믿어주게.”
“발전해 왔단 말입니까?”
“그래, 계속해서 깨지기만 했지만 원래 스스로를 깨지 않으면 인간은 앞으로 나가지 못할 뿐이네. 자네는 그동안 가문이라는 틀 안에 너무 갇혀 있었네. 그걸 깨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갈 수 없었기에 난 그걸 깨준 것이네. 자네는 이제 스스로 걷기 시작했네. 그러니 자신을 믿게. 그동안 쌓아왔던 수련이, 자네의 지존군림보’이 진짜라는 걸 증명해 보이게! 우리 두 사람의 목숨을 자네에게 맡기겠네!”
“모용 형님…….”
공손절휘는 감동한 눈으로 모용휘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철저히 무시당했다고 느껴왔건만, 도저히 그 격차를 메울 수 없을 거라 포기하고 있었는데, 그는 자신 에게 적대적이던 그를 후배로서 지금까지 이끌어주었던 것이다.
“이 못난 후배는 늘 선배님에게 신세만 지는군요.”
이 얼마나 멋진 선배란 말인가.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대인배라 할 만했다. 이제는 증오를 넘어 사…… 아니, 존경으로 변하려 하는 공손절휘였다.
“신세랄 것도 없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걸 깨끗이 일소할 때가 바로 지금일세.”
그때, 보다 못한 현운이 끼어들었다.
“저기…… 여보게들, 서로 감동을 나누는 중에 미안하지만, 조금은 저 늑대에게 집중해 주지 않겠나? 지금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거든. 빨리 결정해 주게.” 그제야 퍼뜩 정신이 차린 공손절휘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해보겠습니다. 아니, 하겠습니다. 하게 해주십시오.”
“자네, 정말 할 수 있겠나?”
현운은 여전히 공손절휘가 못 미더웠다. 그가 지금까지 대사형 비류연에게서 배운 것이라고는 배경이 밥 먹여주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아직 그의 실력이랄 만 한 것을 보지 못한 현운으로서는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현운 선배님,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그는 분명 잘해낼 수 있을 겁니다!”
“여섯은 힘들더라도 넷으로 줄여주시면 어떻게든 성공해 보이겠습니다.”
“넷이라…….”
그 역할은 현운의 역할이었다.
“좋네, 휘 군. 이렇게 되면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자네의 안목에 걸어보겠네.”
산산의 위중함은 일각을 다투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 그들에게 남은 것은 단 한 번의 기회뿐, 그들이 지닌 모든 것을 이 일합(合)에 쏟아부어야 했다.
다음에 부딪칠 때야말로 어느 한쪽이 깨지는 때였다.
“작전 회의는 끝났나? 솔직히 기다리다가 지쳤거든.”
창랑의 이죽거림과 동시에 그의 여섯 발톱에 어린 푸른 강기가 갑자기 세찬 빛을 발하며 솟구쳤다. 그의 두 눈에서 늑대의 푸른 안광이 번뜩이더니, 맹수를 연상케 하는 무시무시한 기세가 그의 온몸에서 폭출했다.
찌릿찌릿.
온몸의 솜털이 곤두세워지는 박력이었다. 그가 이 일격에 그의 모든 위력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한입에 잡아먹어 주지!”
크르릉, 그의 외침은 마치 늑대의 울음소리를 연상케 했다.
“당신을 쓰러뜨리고 산산을 구해내겠소!”
현운이 결의를 담아 외쳤다. 공손절휘도 지지 않고 외쳤다.
“우린 좀 질깁니다. 이빨 안 빠지게 조심하세요!”
마지막으로 모용휘가 조용히 말했다.
“사냥당하는 쪽이 어느 쪽인지 이제 곧 알게 될 겁니다.”
마침내, 창랑의 몸이 움직였다. 순식간의 여섯으로 나눠지는…….
“이런! 맙소사!”
현운과 공손절휘와 모용휘는 깜짝 놀랐다. 이번에는 창랑의 신형이 여덟로 갈라졌던 것이다.
“팔 분신?!”
경악하는 세 사람을 보며 창랑이 광소했다.
“자, 과연 이 공격을 막아낼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나 창랑이 지닌 최후의 송곳니다!”
마랑혈풍조(魔狼血風爪)
극오의極)
팔영잔뢰 혈풍(風)
여덟로 나뉜 창랑의 신형이 질풍처럼 세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현운이 태극혜검의 팔성 오의 풍우만곡을 전개했다. 주위를 휘감는 대기의 움직임에 창랑이 펼치는 육섬의 공격이 흐트러졌다. 동시에 창랑의 신형이 하나씩 줄어 나갔다.
하나, 둘, 셋…….
그러나 그것이 한계였다.
남은 신형은 다섯.
“크윽!”
풍우만곡을 펼치다 기력을 모두 소모한 현운의 무릎이 휘청거렸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화경의 기운이 흐트러지려 하고 있었다.
“절휘, 가게!”
모용휘가 외쳤다. 회전력의 속박이 약해지기 전에 결판을 내야 했다.
지존군림보(至尊君臨) 비기(秘技)
지존편재(至尊遍在)
넷으로 늘어난 공손절휘의 신형이 창랑을 향해 날아갔다.
오(五) 대(對)사(四).
승패는 명확했다.
남은 창랑의 신형이 공격 초식에 힘을 모으느라 무방비 상태인 모용휘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공손절휘 같은 애송이는 언제든지 제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
였다.
“정말로 끝이다!” 땅!
모용휘의 숨통을 끊기 위해 달려온 창랑의 은아조가 한 자루의 검에 가로막혔다. 그 검의 주인은 바로 공손절휘였다.
“이런, 애송이. 사 분신밖에 쓸 수 없는 것 아니었냐?”
의외의 사태에 창랑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공손절휘의 지존검법에 당한 나머지 분신들이 사라진 지금, 공손절휘에게 막힌 이 신형이야말로 그의 실체였다. 하얗 게 빛나는 검으로 창랑의 일격을 비지땀을 흘려가며 막아내고 있는 공손절의 입가에 한 가닥 미소가 맺혔다.
“완벽하게 부릴 수는 없지만, 서 있는 정도라면 하나 정도 더도 가능하지요.”
완전하게 자유자재로 부릴 수는 없지만 그 정도라면 가능했다. 현운이 내공을 모두 소모하고 지금 창랑의 목표는 최후의 일격을 가하기 위해 힘을 비축하고 있던 모용휘라는 것을 공손절휘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기다리면 되었으니까.
이 순간 창랑의 움직임이 완전히 멎었다.
“지금입니다, 선배님!”
우웅, 맑은 검명을 울리며 모용휘의 검이 창랑을 향해 뻗어나갔다.
은하류銀河流) 개벽검(開闢劍)
오의(義)
은하멸멸銀河滅滅) 섬閃
밤하늘에 흐르는 유성우 같은 검강의 세례와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창랑의 몸을 후려쳤다. 그가 자신만만해했던 늑대의 발톱이자 송곳니였던 ‘창랑은아조’가 동강 나서 부서져 나갔다. 창랑은 피를 뿜으며 오 장 밖으로 날아갔다. 그리고는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쓰러뜨렸다.”
털썩!
세 사람은 동시에 땅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검이 그들의 지팡이였다. 이번 일합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기에 그들 역시 손가락 하나 꼼짝할 수 없었다.
“쿨럭쿨럭! 내가 졌다.”
잠시 후 쓰러진 창랑의 입에서 피와 함께 신음 섞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지독한 맷집이 아닐 수 없었다.
“쿨럭쿨럭! 하지만…… 아직 ‘우리’는 지지 않았다.”
‘우리?”
그 순간 창랑의 입에서 피 섞인 외침이 터져 나왔다.
“창랑아아아아아아아아아!”
아우우우우우우우우!
그 순간 모용휘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아차, 어째서 잊고 있었을까!’
창랑이 타고 왔던 그 거대한 늑대를.
크르르르르르르!
어느새 올라가 있었던 것일까? 창랑이 쓰러진 건물 지붕 위에 거대한 푸른 갈기를 지닌 늑대 ‘창랑아’가 입에 날카로운 송곳니 대신 거대한 양날검을 물고 으르렁 거리고 있었다. 두 눈에는 형제를 쓰러뜨린 적에 대한 분노가 가득했다.
펄쩍!
더 이상 포효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창랑아가 모용휘 등을 향해 뛰어들었다. 저 거대한 양날검이면 한 번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꼼짝 못하고 있는 세 사람을 단숨에 두 동강 낼 수 있었다.
“이대로 죽는 건가.’
이겨놓고 죽다니, 분하기 짝이 없었다. 그때였다.
“비켜, 이 똥개야!”
도약해서 떨어져 내리는 창랑아와 그들 셋 사이를 가로막는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뻐억!
다음 순간 큰북의 가죽 찢어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깨갱!
정면으로 날아오던 창랑아의 몸이 직각으로 꺾인 채 측면으로 튕겨 나갔다. 단 일격을 뻗었을 뿐인데, 엄청난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쯧쯧, 내가 뭐랬어? 마지막까지 방심하지 말랬잖아. 항상 마지막 한 푼은 남겨놓으라고 했지? 하얗게 불태운다고 다 좋은 건 아니라고. 이렇게 뒤통수를 당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거대한 늑대를 단 한 방에 깨갱거리게 만든 검은 인영이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모용휘와 현운은 불지불식간에 나타나 그들을 구해준 이를 보고 깜짝 놀라 동시에 외쳤다.
“대(大)사……!”
“류연!”
나타난 검은 인영이 뒤를 돌아보며 씨익 하고 웃었다. 소매가 헐렁한 검은 무복을 걸치고 기다란 앞머리를 늘어뜨린 청년, 비류연이었다.
“다들 안 죽고 살아 있네?”
세 사람은 잠시 멍한 눈으로 비류연과 바닥에 배를 까뒤집은 채 거품을 물고 있는 늑대 창랑아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좀 전에 그들을 향해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 으며 달려들던 그놈이랑 도저히 동일 짐승이라 볼 수 없는 비참한 몰골이었다.
아미산을 주름잡던, 짐승 주제에 강기까지 쓸 수 있는 하양이랑 만날 투닥투닥 해왔던 비류연이었다. 사부에게 조련당한 하양이에 비하면 이런 덩치만 큰 늑대 따 위는 얌전한 강아지에 불과했다.
“아, 그리고 댁들도 움직이지 않는 게 좋아요.”
“끄아아아악!”
그때 비명 소리 하나가 길게 울려 퍼졌다. 창랑대 한 명이 팔이 잘린 채 괴로워서 지른 비명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적에게 암습을 가하기 위해 칼을 들어 올렸다가 당한 봉변이었다.
“아, 깜빡 잊고 말을 안 했는데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면 사지 중 하나가 달아나거든요. 그러니 움직이지 말아요. 자기 목숨은 자기가 챙겨야죠.”
그 태평한 말에 창랑대원들은 어이가 없어 속으로 소리쳤다.
‘그런 건 좀 더 일찍 말하란 말이야!’
눈앞에 떡하니 본보기가 있는지라, 결코 허풍으로 치부할 수가 없었다. 그제야 그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수상쩍은 청년의 한 줌 손아귀에 자신들의 목숨이 달려 있 다는 것을 깨달았다.
늑대들의 저항의지는 급속도로 수그러들었다. 늑대가 아무리 사납다 해도 호랑이는 당해내지 못하는 법. 그리고 지금 그들 앞에 있는 것은 그 호랑이도 때려잡는 인간이었다.
“이들도 운이 좀 나쁘군요.”
모용휘는 손가락 하나 꼼짝 못하고 그대로 굳어버린 수십 명의 인간늑대들을 보자 처량한 마음이 솟구치는 것을 자제할 수가 없었다.
“하아, 그러게 말일세.”
현운도 이 인간늑대들이 오늘 운이 좀 많이 안 좋다는 사실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연민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 에?”
그 둘 사이에 왜 느닷없이 공감대가 형성되는지 알 길이 없는 공손절휘는 그저 멍한 눈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기만 할 뿐이었다.
“산산이 다쳤다고?”
비류연이 미간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그러나 긴 앞머리 때문에 찡그려진 미간이 보이지는 않았다.
“네, 저를 감싸려다…….”
비류연은 현운의 등에 업힌 산산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어떤 얼굴 표정을 지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산산의 얼굴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조심스 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크크, 이렇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그 ‘못된 놈’ 때문이겠네.”
웃고 있었지만 웃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사번대 대장 불락구척을 찾아가야 한다고?”
“네, 그의 별호가 생사무허가라고 합니다.”
“어떻게 찾아가지? 위치는 정확하게 들었어?”
“일단 마천제일벽이라는 외벽을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데까지는 들었습니다.”
“그 뒤는 못 들었다는 얘기네?”
“산산이 위급하여 마음이 급하다 보니.
더 이상 길게 듣지 못하고 산산을 들쳐 업고 무작정 뛰쳐나온 것이다.
“자, 그럼 사번대까지 어떻게 간다…….”
비류연의 중얼거림에 현운이 깜짝 놀랐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대사형?”
“응, 뭐가?”
“그게 대사형은 대사저를 구하러 가셔야 하잖습니까? 산산을 치료하러 가다 보면……?
그것은 돌아가는 길이 된다.
뻑!
비류연의 주먹이 현운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멍청한 놈, 그럼 나보고 산산을 갖다 버리라고? 너네들이 죽든 말든 상관하지 말까? 그렇게 하면 진짜로 즐겁겠냐?”
혹이 난 머리를 감싸 쥐며 현운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렇게 된 이상, 네 녀석들부터 해결하고 다시 대장들을 한 놈씩 깨나가는 수밖에 없어. 단서도 다시 찾아내야 하니까.”
네 개의 관에 들어 있던 건 그들의 저승길로 안내하기 위한 초대장일 뿐이었다. 그 이상의 단서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 산산을 구하고 나면, 이제 가장 무식한 방 법 하나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난 빚지는 건 절대 싫어. 그중 가장 찝찝한 건 마음의 빚이지. 넌 내가 빚쟁이가 되어야 속이 시원하겠냐?”
“그, 그건 물론 아니지요.”
비류연이 빚지는 걸 죽는 것만큼이나 싫어한다는 것은 오랜 시간을 지내오면서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잔말 말고 가자고. 알겠어?”
“네, 대사형. 감사합니다.”
현운이 포권한 채 허리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감격한 현운은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비류연의 얼굴에 의문이 스치고 지 나갔다.
“내가 안 본 새에 둘이 혼인이라도 했냐? 그렇게 짧은 시간에?”
“네? 넷? 아니…… 그,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그런 것치고는 얼굴이 굉장히 빨갛구나.”
입으로 속였지만 얼굴까지는 속이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 그건 그러니까…..
속마음을 들켜 버렸는지 엄청나게 당황한 현운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인데다가 그는 도사 지망생이 아닌가. 원래대로라면 연애 하고는 아주 거 리가 있어야 할 처지였다.
“거참, 무슨 일이 있긴 있었구나.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 보니.”
“...그냥 찔러보신 거였습니까?”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그래, 산산을 향하는 네 마음이 예전과는 전혀 달라 찔러본 거다. 넌 여전히 미끼를 잘 무는구나. 그런데 사번대까지는 어떻게 가지?”
“그건 내가 안내해 주겠네.”
비류연이 고개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돌아갔다.
“어라, 장 아저씨! 아직 살아 있었네요?”
“뭔가, 그 유감스럽다는 듯한 말투는? 하마터면 죽을 뻔한 사람한테 너무 매정한 거 아닌가?”
“죽을 뻔하다니 누구한테요?”
“아, 그건..
적의 손에서가 아니라 부인 손에 말이지, 하고 반사적으로 답해주려다 장홍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뭐라고 하려고요? 어디 한번 말해보시지?”라는 듯한 옥유경의 싸늘한 눈길이 뒤통수를 서늘하게 훑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눈에 익은 사람이 한 명 같이 있네요. 아까 전엔 분명 없었는데?”
비류연의 시선이 옥유경의 뒤를 따르고 있던 한 여인을 향했다. 그녀는 바로 나예린이 사자 독고령이라고 확신했던 인물, 바로 영령이었다.
“아, 소개하지 않아도 알 거라 생각하네만, 영령 소저일세. 북해도에 혼자 있는 걸 발견했지. 당분간 우리랑 행동을 같이하기로 했다네.”
“이유는 뭐죠?”
“나 소저를 구출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는군.”
그 말을 들은 비류연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예린이 무척 좋아하겠네요.”
그러자 영령이 얼굴을 붉히며 코웃음을 쳤다.
“차, 착각하지 말아요. 난 단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을 뿐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구하는 거예요. 그러니 그 아가씨의 황당한 이야기를 내가 믿었다고 생각 하면 무척 곤란해요.”
비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렇다고 해두죠. 누구나 인정하는 게 부끄러운 게 있으니까요.”
“그건 그렇고, 장 아저씨가 사번대 가는 길을 알고 있다고요?”
영령의 반발을 사전에 봉쇄해 버리며 비류연이 장홍에게 물었다.
“내가 아니라 이 사람이 우리를 사번대로 안내해 줄 걸세.”
그러면서 옆에 있던 옥유경을 가리켰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여자아이가 다친 것을 그냥 두고 볼 수야 없지. 따라들 오너라, 사번대로 안내할 테니. 하지만 한 가지 너희들에게 충고해 두마.”
“그게 뭐죠?”
“생사무허가에게 쉽게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는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