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7권 7화 – 생사무허가 불락구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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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7권 7화 – 생사무허가 불락구척

생사무허가 불락구척

-불락구척에게 부탁해요

옥유경의 안내 덕분이었을까?

마천 외벽을 지난 그들은 거의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사번대가 있는 영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멀리서도 사번대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외 벽을 지나 얼마 가지 않아서 진한 약향이 확 하고 풍겨왔던 것이다. 그들은 약향이 점점 더 진해지는 방향을 향해 다가갔다.

사번대 대원들의 복장은 특이했다. 모두들 무복을 입은 위에 백색 무명옷을 껴입고 있었다. 그런 만큼 백의를 걸치고 있지 않은 그들 일행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 다.

“어이쿠, 옥 대장님 아니십니까!”

사번대 대원 중 두 명이 달려와 옥유경을 맞이했다. 그들의 면면을 훑어본 비류연 일행의 머릿속에 순간 똑같은 감상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 두 사람, 정말 의원 맞아?’

다들 덩치가 산만 한데다, 둘 모두 머리를 깍둑썰기라도 한 듯 짧고 반듯하게 깎았는데, 그들의 얼굴에는 기다란 상처가 세 개씩 나 있었다. 하나같이 길고 깊은 게 평범한 일로 얻은 상처가 아니었다. 그리고 저들의 우락부락한 팔뚝은 사람을 살리는 일보다는 사람을 때려잡는 일에 더 어울릴 듯했다. 여기가 의원 소굴인지 깡패 소굴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게다가 저 피는 또 뭐지?”

이 둘의 백의 무명옷 위에는 새빨간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피분수라도 쌨나? 게다가 손에 끼고 있는 하얀 장갑 위의 팔목 아래 부분은 피에 젖어 모두 새빨갛 게 변해 있었고, 각자 날카로운 소도 하나씩을 들고 있었다.

“대체 뭘 하다 온 걸까?”

방금 사람 여럿 잡고 온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런 모습으로 옥유경에게 생글생글 웃고 있으니 보면 볼수록 기괴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옥유경은 그런 그들의 모습이 익숙한 듯 별달리 개의치 않는 모 습이었다.

“불락 대장님은 어디 계시느냐?”

옥유경이 물었다.

“항상 계시던 곳에 계십니다. 요즘 하고 계신 연구가 진척이 있으셨거든요.”

“그건 축하할 일이구나.”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오른쪽 눈썹에 상처가 있는 사내가 비류연과 그 일행들을 훑어보며 물었다. 특히 남궁산산을 업고 있는 현운에게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시선이 머물러 있었다. 번쩍번쩍, 그들의 두 눈에서 기광이 번뜩였다.

살기가 아니었다. 그것의 일종의 열망. 자기 손으로 환자를 치료하겠다는 의원으로서의 열망이었다.

당장에라도 산산을 치료하기 위해 달려들 기세였다. 환자를 강탈해 가기라도 할 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그들이 참은 것은 옥유경이 함께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내 손님들이다. 그리고 보다시피 불락 대장님께 보일 환자지.”

“저런… 대장님한테…….”

“그거 아깝군요.”

“우리도 잘 고칠 수 있는데…….”

대장님에게 직접 보일 환자라는 말에 두 사람은 크게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붉은 십자가를 받지 않은 걸 보니 자네들은 아직 의원 면허가 없지 않나?”

사번대에서는 의원 시험을 통과한 자에게 사방이 같은 길이의 붉은 십자가를 새겨주는 이상한 전통이 있었다.

붉은 십자가, 즉 적십자(赤字)를 받는다는 것은 한 사람의 어엿한 의원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러자 두 사내가 외쳤다.

“문제없습니다. 대장님도 면허는 없으신걸요!”

“그럼요, 여러 환자를 접해봐야 실력도 오르고 시험에도 합격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의원 시험이 두 달밖에 안 남았습니다. 이제부터는 누가 더 많은 임상 경험을 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겁니다!”

비류연 일행은 동시에 생각했다.

‘문제없긴 엄청 많구만.

도대체 이 사번대의 인간들은 어떻게 돼먹은 인간들일까? 의호 하우수도 그렇고 하나같이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하는 인간들이 없는 듯했다.

“불락 대장님은 항상 있는 곳에 있다고 했지?”

“예? 예.”

“환자도 있으니 서둘러야겠다. 의원 시험에선 꼭 합격하길 바란다.”

“옙! 감사합니다, 옥 대장님!’

그렇지 않으면 더 많은 선의의 희생자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니 말이다. 이래서 여기 사번대로 진료받으러 오는 걸 그녀의 학생들도 항상 꺼리는 것이다.

““따라들 와요.”

이곳에 여러 번 온 듯 옥유경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사번대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전각에 도착했다. 그 전각의 이름은 바로 ‘생사전’이 었다. 그 앞에 멈춰 서 옥유경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방금 전 두 사람 봤죠?”

비류연 일행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사람들보다 몇 배나 더 괴팍하다고 생각하면 돼요.”

옥유경이 최후의 경고라도 하듯 말했다.

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끼이이익. 생사전의 문이 열렸다.

“윽, 뜨거워!”

비류연 일행이 맨 처음은 느낀 감각은 뜨겁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 느낀 감각은 ‘커헉, 독한 냄새!’였다.

사번대의 구역에 들어올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지독한 약향이 그 안으로부터 흘러나왔다.

그 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질식할 것만 같은, 약향이 아니라 독(毒)이 아닌가 의심 갈 정도로 지독한 향이었다. 뭔가 검은 뭉게구름이 쏟아져 나오는 듯한 무시 무시한 느낌이었다.

좌우로 수십 개의 약탕이 늘어서 있고, 모든 약탕에 불이 들어와 있어서 안은 쇠를 담금질하는 대장간만큼이나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그 검은 뭉게구름과 약탕들의 한가운데에, 키가 구 척이나 될 법한 사내가 하나 앉아 있었다. 좀 전에 봤던 두 사내는 이 사내의 덩치에 비하면 어린애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근육 또한 훨씬 더 울퉁불퉁하고 단단하게 단련되어 있었다. 더운 탓인지 소매가 없는 얇은 마의 하나만을 걸친 채, 그 사내는 약탕기들을 뚫어지게 바라 보고 있었다.

“약을 달일 때 함부로 문을 열면 화력(力)에 변화가 생기니 주의하라고 누누이 말하지 않았나? 고막 확장 수술이라도 해야 정신을 차리겠나?”

거구의 사내가 으르렁거리듯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눈빛은 의원의 그것이라기보단 살인자의 눈빛에 가까웠다. 하지만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는 이내 눈 빛이 누그러졌다.

“뭐야, 옥 대장이었군. 난 또 우리 멍청한 조수 녀석인 줄 알았지.”

“들어가도 될까요, 불락 대장님?”

불락구척은 옥유경보다 나이가 열 살 정도 많았기에 옥유경은 어느 정도 예의를 갖춰주고 있었다.

“들어오게.”

“이자는 서천이 아니군.”

조끼 사이로 드러난 우람한 팔뚝을 보며 비류연이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두 번째로 든 생각은 ‘정말 의원 맞아?”라는 생각이었다.

얼굴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꿰맨 상처 자국, 그리고 한 줌만 새하얗게 변한 머리카락, 구 척 장신의 거구. 도무지 침을 쥐는 데는 어울리지 않는, 철판도 종잇장처 럼 찢어낼 것 같은 굵은 손가락, 그리고 육체파 외가무공 수련자들을 능가하는 강철처럼 단련된 근육들.

하나부터 열까지 이 사람 진짜 의원 맞아?”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게 되는 그런 모습이었다.

“의원 맞네.”

사람들의 얼굴을 한 번 훑어본 다음 대뜸 불락구척이 말했다.

“그, 그걸 어떻게?”

자신들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익숙하니까.”

그는 사람들의 의문 섞인 얼굴에 상당히 익숙해져 있어서 표정만 보고도 그들 속에 든 의혹을 읽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비류연은 그런 일에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 역시 이 근육의원에게는 상당히 흥미가 이는 참이었다.

“굉장한 근육이군요. 의원이 의술만 익히지 않고 그렇게 몸을 단련하다니, 왜죠?”

단련을 게을리해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육체였다.

“의료는 체력이지. 체력이 없는 자는 변변한 의료조차 못하고 나가떨어지게 돼 있어. 의료 현장이야말로 전장이지. 생과 사가 갈리는 전장. 그 전장에서 살아남는 자는 강인한 자뿐이다.”

의원치고는 무척이나 특이한 사고방식이 아닐 수 없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죠?”

“내가 키우고자 하는 것은 ‘전의’이기 때문이다!”

불락구척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전의(戰醫)?”

싸우는 의원이란 말인가? 그러나 비슷하면서도 조금 의미가 다른 듯했다.

“그래, 전쟁 전, 의원 의, 전의다!”

그는 항상 전쟁과 같은 대량 환자가 발생하는 극한의 상황을 상정하고 부하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평화시에는 하루에 열 명의 환자도 채 생기지 않을지도 모르 지만, 전쟁이 벌어지면 한 시진에만 수백 명의 환자들이 발생한다. 죽음의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지는 환자들을 가장 신속한 방법으로 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전 의’였다.

그 혹독한 전장에서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는 극한의 상황에 언제든 대처할 수 있는 몸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육체의 체력이 받쳐 주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는 의원도 전사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상당히 극단적인 사고방식이었지만, 그는 항상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 부하 들을 교육시키고 있었다.

“옥 대장, 여기는 웬일인가? 비상령이 발령된 이때에? 대장회의 때도 자리를 비워 섬 밖으로 나간 줄 알았는데?”

막 대장회의에 참석하려던 옥유경은 갑작스런 장홍의 방문 때문에 그만 회의 참석을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아, 그때는 급한 일이 생겼었거든요.”

“긴급 대장회의에 참석 못할 정도로 급한 일이었나?”

“그럼요, 집 나간 남편이 바람을 피고 있는 증거를 발견한 만큼 중요한 일이었어요.”

“그것참 큰일이었겠군. 그 집 나가서 바람핀 남편을 제거할 독약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게. 여기 널리고 널린 게 그런 것들이니까.”

그 말을 들은 장홍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어머, 그건 어디까지나 비유였어요.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굳이 번거롭게 독약을 빌릴 필요가 있겠어요? 이 손에 들린 검 한 자루면 충분한데?”

“하긴 그렇겠군. 그렇다면 찔러도 아프기만 하고 죽지는 않는 급소가 어딘지 알고 싶으면 말하게. 언제든지 해부학적으로 알려줄 수 있으니까.”

무뚝뚝한 불락구척의 말에 장홍의 얼굴이 핼쑥함을 넘어 푸루죽죽하게 변했다.

“어머,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비유였다니까요. 하지만 그런 지식들은 무척 유용할 것 같네요. 나중에 가르침을 받아야겠어요.”

“좋은 책이 있으니 나중에 빌려주도록 하겠네.”

“그럼 사양하지 않도록 하죠.”

이미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변한 장홍은 나중에 그 책을 반드시 불태워 버리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자네가 이곳을 방문한 것도 그 급한 일이랑 관련이 있나?”

“음,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급한 환자라도 생겼나? 자네가 직접 챙겨야 될 정도의 환자가? 내가 직접 봐줬으면 하는 환자가?”

“네, 그래요. 환자가 생겼습니다. 불락 대장님이 꼭 봐주셨으면 하는 환자가 목숨이 경각에 달린 환자죠.”

“어떤 환자든 이곳 생사전 안에서 죽으려면 내 허락을 받아야 하네.”

대단히 광오한 자신감이 아닐 수 없었다.

“과연 불락 대장님다운 말씀이시군요. 믿음직스럽네요.”

옥유경이 눈짓을 하자 현운이 산산을 업은 채 앞으로 나섰다. 불락구척의 날카로운 시선이 산산의 창백한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흠, 상당한 중상이군. 폭발에 당한 상처인가? 등 뒤는 파편에 찔린 상처 같군. 원인은 충격에, 출혈과다로군.”

순식간에 원인을 파악해낸다.

“네, 맞습니다. 뇌탄의 폭발에 말려든 후 계속해서 혼수상태입니다. 살리실 수 있겠습니까?”

현운의 말에 불락구척은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날 누구라고 생각하나?”

불쾌한 어조로 불락구척이 반문했다.

“죄, 죄송합니다.”

현운이 엉겁결에 사과했다.

“이 처자가 비록 죽음의 문턱까지 가 있지만 살리겠다고 본 의원이 마음만 먹는다면 살릴 수 있네.”

“가, 감사합니다.”

산산이 살아날 수 있다는 말에 현운이 반색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살리지 않겠네.”

딱 잘라서 말했다.

“어째섭니까? 살릴 수 있다면서 살리지 않겠다니, 그러고도 당신이 의원입니까?”

숙였던 현운의 고개가 발딱 치켜지며 소리쳤다.

“그녀는 우리 마천각의 사람이 아니지?”

그 질문에 현운은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저희들은 천무학관에서 정식으로 파견된 사절단입니다. 이곳 마천각에서는 저희들을 치료해 줄 의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침입자이기도 하지.”

“큭.”

대체 어떻게?

“이런 상처를 그냥 학생들이 입었다는 건 생각할 수 없군. 게다가 그녀의 어깨에 있는 상처랑 자네가 입은 찰과상들, 그건 남해왕 녀석이랑 싸워서 얻은 것이로군. 칼에 베인 것도 창에 찔린 것도 아닌 이 상처들은 그 녀석의 매혼전에 의해 난 상처니까. 내 말이 틀렸나?”

“…….”

상처만 보고 누구의 무공에 당한 어떤 상처인지 한눈에 파악하다니, 과연 명의는 명의였다.

“그렇게 온몸에 침입자라고 선전하고 다니는데 모를 수가 없지. 지금 자네는 이 마천각을 침입한 침입자를 치료해 달라는 거네.”

“잠깐만요, 불락 대장님. 그들이 이 일을 벌인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옥유경이 어떻게든 설명해 보려 했다.

“난 이유 같은 거엔 관심이 없네, 옥 대장.”

그의 관심은 오직 신기한 병과 싸워 이겨내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그가 몸담고 있는 진짜 승부의 세계였다.

“하지만 일단 들으시는 게 좋을 겁니다. 왜냐하면 당신도 마천십삼대의 대장 중 하나니까요.”

자리에 앉아 있는 이상 싫든 좋든 책임이 있다는 뜻이었다.

“좋네, 말해보게.”

말은 그렇게 하지만 별로 신중하게 들을 기색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어쨌든 옥유경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해 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이 마천각 안에 천겁령의 마수가 뻗어 있으며, 몇몇 대장은 이미 천겁의 편에 가담했을지도 모를 위험에 대해서. 그리고 정천맹주 나백천의 딸을 납치한 자의 정체가 서천멸겁 이며 그가 이곳의 수뇌부에 있다는 사실까지 남김없이 이야기했다.

“흠, 그렇단 말이지. 천겁령이라……. 난 뭐 신선한 환자만 많이 확보할 수 있으면 상관없네.”

불락구척의 반응은 무척이나 뜻밖의 것이었다.

“사번대 대장님! 그 말 설마 진심인 건 아니시겠죠?”

옥유경의 외침에는 분노가 실려 있었다. 여차하면 검이라도 뽑을 기세였다.

“농담이었으니 그리 흥분하지 말게. 흥분은 체내에 흐르는 기를 흐트러뜨리고 노폐물이 쌓이게 하지. 지나친 분노는 몸을 상하게 한다네.”

“제가 흥분한 게 아니라 대장님께서 흥분시키신 거죠!”

옥유경이 다시 항의했다.

“예전의 자네는 훨씬 침착했는데, 며칠 못 본 사이에 마치 바가지 긁는 여편네처럼 성질이 폭급해졌군. 헤어졌던 남편이 어딘가에서 바람을 핀 다음 돌아오기라도 했나?”

“그, 그걸 어떻게…….?

과연 명의는 그 사람의 상태만 보고도 그런 개인사까지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방금 건 농담이었네만, 정말이었나? 설마 아까 비유라는 것도…….”

그 말에 옥유경의 말문은 그만 닫히고 말았다. 뒤에서 장홍은 억울한 얼굴로 ‘바람 안피웠거든요?”라고 중얼거렸지만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 다.

“좋네. 일단 자네가 제시한 천겁령 침투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믿도록 하지. 하지만 그거랑 이거는 별개일세.”

여기서 말하는 ‘이거란 남궁산산의 치료를 뜻했다.

“하지만……..

뭐라 항의하려고 하는 옥유경의 말을 끊으며 불락구척이 말했다.

“하지만 칠번대 대장의 얼굴을 봐서 만일 내 조건 하나를 들어준다면 생각해 보겠네.”

옥유경은 내용을 듣지도 않고 난색을 표했다.

“그건…….?”

그때 현운이 앞으로 나섰다.

“그 조건이란 게 뭡니까? 산산을 살릴 수 있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현운이 장담했다. 아직 남궁산산을 침상에 눕히지도 못한 채 업고 있는 현운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그런 장담 쉽게 하지 않는 게 좋아, 청년.”

옥유경이 경고했다.

“왜입니까?”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왜냐고? 그야 당연히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지.”

현운이 답을 하기도 전에 불락구척이 끼어들었다.

“어허, 그렇게 말하니까 엄청 비장해 보이는군. 간단한 일이네. 지금 만들고 있는 약이 있는데 그걸 먹어주면 되네. 그 효과를 확인해 볼 임상 환자가 마침 필요하 던 참이었거든.”

당장에 고개를 끄덕이려는 현운을 옥유경이 말렸다.

“약이 아니라 독을 잘못 말씀하신 모양이군요, 불락구척 대장님.”

옥유경의 반박에 일행들은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비류연만이 긴 앞머리 때문에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독(毒)…….”

불락구척은 이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약도 지나치게 쓰면 독이 되고, 독도 적재적소(適材適所)에 쓰면 약이 되는 법이지. 의술의 세계에서 약과 독의 경계는 무의미한 거라네.”

“그럼 대장님께서 먹이시려 하는 그 ‘약’의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물론 불락구척으로는 감출 이유가 없었다.

“물론이지. 그 약의 이름은 ‘만독(萬毒)’일세.”

“에에에에에에에엑!”

일행이 모두 경악하는 가운데 공손절휘가 외쳤다.

“잠깐! 그게 어디가 약 이름입니까? 약이 아니라 십이 할 독이잖아요! 그것도 혀로 핥아만 봐도 죽을 것 같은 맹독 냄새가 풀풀 나는 이름 아니에요?”

“뭘 그리 놀라나? 좀 전에도 말하지 않았나. 약과 독은 표리일체. 약도 과하게 쓰면 독이 되고 독도 때에 따라서는 약이 되는 법. 의원이 독을 연구하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

아까는 약이랬으면서 은근슬쩍 독으로 말이 바뀌어 있었다. 장홍마저 울컥하고 말았다.

“이 아저씨가……!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아니긴 뭐가 아니라는 건가? 만독을 연구하는 것은 곧 그 해독을 연구하는 거지. 당가 놈들의 치졸한 수에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독의 연구란 아주 중요하다네. 옥 대장도 마천십삼대의 대장 중 한 명이니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텐데?”

정말 말귀가 통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옥유경은 한숨을 쉬며 답했다.

“지금은 그 생각과 의의를 문제 삼는 게 아닌 것 같은데요? 그 방법을 문제 삼는 거지.”

“방법은 또 뭐가 문제란 말인가? 희생없이 진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하나의 치료법이 발견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이 낙화유수처럼 흩어진다고 생각 하나?”

“……”

“희생없는 진보란 있을 수 없네. 자네들이 지금 받고 있는 치료는 수십만, 아니, 수백만 명의 희생 끝에 얻어진 거라는 걸 잊지 말게. 끝없는 실패와 희생 속에서 얻 은 의학의 진보. 멋지다고 생각하지 않나? 인간의 수명을 늘리기 위해서는 얄궂게도 보다 많은 죽음이 필요한 거라네.”

“그렇다고 꼭 인체 실험을 해야 하느냐는 거지요. 그것도 우리 중 한 명을 써서!”

효룡도 나서봤지만 불락구척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당연하지. 동물 실험은 이미 여러 번 끝냈네. 이제 남은 것은 사람뿐이야. 그런데 최근 지원자가 없어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지.”

지원자가 아니라 희생자를 잘못 말했겠지. 장홍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틀렸어. 이 미친 의원, 전혀 이야기가 통하지 않아.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한다고.”

“곧 만독이 완성되려 하네. 그러기 위해서는 자원해서 실험해 줄 사람이 필요해. 더도 말고 딱 한 사람. 그렇게 하면 저 아가씨도 치료해 주지.”

“크으으으으으으.”

일행 여기저기에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참고로 빨리 결정하는 게 좋을 걸세. 앞으로 일각이 지나면 저 아가씨의 목숨은 되돌릴 수 없을 테니 말일세. 자, 어떻게 할 텐가? 자네들이 굳이 하지 않겠다면 강제로 할 생각은 없네. 하지만 더 이상 자네들한테 볼일은 없으니 우리 부대에서 나가주길 바라네.”

그때 현운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의 두 눈은 단단한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잘 생각했군. 그렇게 걱정하지 말게. 나도 결국은 의원 나부랭이라서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치지는 않는다네.”

“그렇다는 말은?”

“물론 ‘해약(解藥)’도 준비되어 있지.”

그러면서 푸른 단약 하나를 꺼내 보였다.

‘그런 건 좀 더 일찍 말해, 이 똘아이 광의야!!’

모두들 속으로 동시에 그렇게 외쳤다.

“뭐, 들을지 안 들을지는 모르지만 말일세.”

“……”

조금 안심의 기운이 퍼져 나갔던 모두의 얼굴이 다시 딱딱하게 굳었다.

“독이란 해약과 함께 갖추어졌을 때 비로소 완벽해지는 것일세. 해약이 없는 독약 따위는 그저 죽음을 부르는 오물에 불과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만드는 것은 어리석은 자나 행할 일이지. 무림에서 통용되는 진정한 독이란 얼마나 치명적인가보다는 인간의 손에 의해 얼마나 자유롭게 통제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네.” 통제할 수 없는 무기는 언제 자신의 몸을 멸할지 모를 양날의 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걸 대량생산하는 것은 그저 어리석음의 극치일 뿐이다.

“때문에 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그 독을 중화시킬 해약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되네. 알겠나?”

“빨간 단약을 먹은 다음 파란 단약을 먹으라는 말이군요.”

“맞네. 그 두 개를 먹고 자네가 살아난다면 만독은 완성된 것이지. 만일 자네가 죽는다면 만독은 여전히 미완성으로 남을 것이네. 그런데도 하겠나?” 어찌 됐든 현운으로서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제 결심에 변함은 없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시작하지요.”

“상당히 기개가 있는 친구군. 좋네, 자네가 죽든 살든 저 여자아이는 살려주겠네.”

“감사합니다. 그 약속만으로도 상당히 안심이 되는군요.”

이때, 아까부터 옆에서 묵묵히 사태를 주시하고 있던 비류연이 손을 들어 올려 현운을 제지했다. 수상쩍은 의원이지만 자발적으로 손을 쓰게 해서 산산을 살려야 만 하니 억지로 개입할 수가 없어 추이를 지켜보고 있던 참인데, 현운이 돌이킬 수 없는 한마디를 하자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정말 그걸로 괜찮겠냐?”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무미건조한 목소리였다.

“네, 전 그걸로 만족할 수 있습니다, 대사형.”

뻑!

순간 현운의 눈앞에서 별들이 번쩍였다.

“대, 대사형! 가, 갑자기 왜, 왜 때리십니까?”

“이 멍청한 사채꾼 놈! 일단 몇 대 더 맞자.”

비류연은 정말로 큰 결심을 한 현운의 머리통을 인정사정없이 후려쳤다.

“악악악! 대, 대체 왜 때리시는 겁니까?”

대사형한테 얻어터지는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니지만, 일단 맞을 때 맞더라도 이유나 알고 맞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내가 아까도 말했지? 이 세상에 제일 변제하기 힘든 게 마음의 빚이라고 했어, 안 했어?”

“하, 하셨죠.”

그거랑 이 일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현운은 짚이는 곳이 전혀 없었다.

“쯧쯧, 그렇다면 네놈은 산산에게 얼마만한 빚을 지울 셈이냐?”

“….. .!”

“산산이 살아났을 때 네놈이 자기 때문에 뒤졌다는 걸 알면 참으로 행복해하겠다. 뭐? 자기는 죽든 살든 산산은 살려준다니 약속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바보 같은 놈!”

“그, 그건…….”

현운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네 녀석, 산산에게 평생 마음의 빚을 지울 셈이냐? 그녀가 네놈을 생각하면서 평생 마음고생하도록? 이놈 알고 보니 아주 나쁜 놈일세.”

갑자기 천하에 둘도 없는 나쁜 놈 취급당한 현운은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현운도 할 말은 있었다.

“하지만 일단 살아나야 마음고생을 하든 말든 할 것 아닙니까!”

목숨이 아까운 줄도 모르고 비류연을 향해 버럭 소리쳤다. 소리치고 나자마자 허걱!’하고 ‘아차!’ 했지만,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맞는다!’

그러나 날아온 건 주먹이 아니었다.

“쯧쯧쯧……”

비류연은 다시 한 번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둔하기는! 그러니까 말하는 거잖아. 살든 말든이 아니야! 절대로 죽지 마라! 근성으로라도 살아나! 알겠냐?”

그 말에 뇌 속에 박아 넣어주겠다는 기세로 비류연은 손가락으로 현운이 미간을 후벼 팠다.

“그, 그런 억지가…….”

“안 그럼 넌 내 손에 죽어! 귀신이 돼서도 나한테 얻어터질 줄 알아라!”

대사형이라면 어쩐지 귀신도 팰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오싹하고 한기가 들었다.

“네, 대사형! 반드시 살아나겠습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픈 걸 참으며 현운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 장담도 잠시 후 진행되는 실험을 본 다음에는 입 안으로 쏙 들어가고 말았다.

찍찍! 찌ᅳ익! 찌ᅳ익!

쥐새끼 한 마리가 난동을 부린다. 자신이 살고 있던 우리를 때려 부술 기세로 난동을 부린다. 눈알을 하얗게 까뒤집고 입에 거품을 문 채 데굴거린다. 그 행동을 보 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속이 메스꺼워졌다.

찌익! 찌익!

쥐새끼의 여기저기에 거품이 이는 것처럼 수포가 일어난다.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품이 점점 더 많아지더니 쥐새끼의 몸을 녹이기 시작했다. 수포가 터지고, 그 수포에서 흘러나온 진액이 쥐새끼의 몸 전체를 뒤덮는다. 그리고 마침내 숨이 끊어졌다.

“이, 이건..”

놀라운 것은 그다음이었다. 쥐새끼의 몸 전체에서 부글부글 거품이 일어나더니 서서히 녹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화골산 한 바가지를 들이부운 듯한 무시무시 한 현상이었다. 곧 쥐새끼가 있던 자리에는 한 줌 핏물밖에 남지 않았다.

이 모든 과정이 진행되는 데 고작 일각밖에 걸리지 않았다. 모든 것은 바로 일각 전, 얼굴에 사선으로 꼬맨 상처가 나 있는 남자가 던져 준 ‘빨간 단약’을 맛있어 보 이는지 낼름 먹은 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뻐끔뻐끔뻐끔.

그 광경을 처음부터 지켜본 비류연 일행은 황당해서 그저 입만 뻐끔거렸다. 무엇부터 딴지를 걸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응, 왜 그렇게 숨찬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고 있는 건가?”

그걸 몰라서 묻나, 이 미친 의원아! 이 순간 모두의 마음이 하나로 합쳐졌다. 모용휘마저 모골이 송연해진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현운 선배에게 저걸 먹으라는 겁니까?”

“응. 그런데?”

“그런데는 뭐가 그런데입니까? 몸이 녹아버리면 해약이고 뭐고 필요없잖아요!”

공손절휘가 기가 막혀서 외쳤다. 해약을 먹을 몸이 남아 있어야 독을 해독하던가 말던가 할 게 아닌가. 그렇다. 좀 전에 쥐 우리에 던져 준 빨간 단약이야말로 최근 불락구척이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만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보시다시피였다.

“걱정 말게. 저건 저 쥐새끼가 너무 작아서 몸뚱이가 만독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소한 일일 뿐이니까. 쥐새끼의 수십 배에 달하는 몸무게를 지닌 인 간이 먹으면 저렇게까지 녹지는 않는다네. 그러니 안심하게.”

안심은 무슨 얼어죽을 놈의 안심! 이런 양심도 없는 광의 같으니라고!

다시 한 번 모두의 마음이 하나로 합쳐졌다.

꿀꺽!

현운의 목구멍을 타고 마른침이 넘어갔다. 이상하게 목이 타는 듯 갈증이 심했다.

그의 귀에는 그 말이 어떻게 들어도 안심하고 죽으라는 이야기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싫으면 포기하게. 그러게 잘 생각해 보라고 미리미리 동물 실험까지 해 보여준 것 아니겠나? 강요하지는 않겠네. 뭐, 치료는 해주지 않겠지만.”

“그런 걸 강요라고 하는 거거든요? 이 미친 의원 아저씨!’

일행은 모두들 마음속으로 제각기 욕설을 퍼부어댔다. 마천각에는 터가 나빠서 그런가, 아님 출신이 나빠서 그런가, 정말 괴이한 인물들이 몰려 있는 듯했다.

“…….”

“흠, 이제 반의반 각 정도 남았군. 빨리 결정을 내리게.”

그 시간이 지나면 이제 산산의 생명은 포기하라는 뜻이었다.

“전 이미 결심했습니다. 주십시오. 그 빨간 단약을 먹겠습니다.”

현운의 결심은 확고했다.

“……”

비류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바보 같은 녀석을 말리는 것은 이미 늦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다면, 이 미친 의원을 족쳐서라도 산산을 고치는 방법을 찾 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번거로운 방법을 쓰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고, 위험이 너무 컸다.

“그래, 잘 생각했네. 자, 먹게.”

현운은 자신의 손에 들린 빨간 단약을 한 번 내려다본 후 치료용 침상에 누워 있는 남궁산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산산, 내가 무사히 깨어난다면 당신에게 할 말이 있소. 꼭 살아주시오! 반드시! 다시 그대의 잔소리를 들을 수 있게 말이오.”

그리고는 비류연 쪽을 바라보았다.

“대사형…….”

그러나 비류연은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안 들을래.”

“네?”

“나머지는 네 녀석이 깨어나면 듣겠다. 그리고 누누이 말하지만 난 책임 안 진다.”

“대사형..

“산산은 네가 책임져라. 난 책임 안 질 거니까.”

그제야 현운은 깨달았다. 대사형은 자신이 뭐라고 말하려는지 알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부러 듣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네, 대사형.”

현운은 눈을 질끈 감고 빨간 단약 ‘만독’을 삼켰다.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커헉!”

만독을 삼킨 현운이 땅에 무릎을 꿇더니 파들파들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입에서 왈칵, 검은 피를 토해냈다. 그의 몸 안에 축적된 내공이 독을 몰아 내기위해 움직였으나 만독을 몰아내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양이었다.

“뭐 하시오, 빨리 해약을 먹이지 않고!”

장홍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으나 불락구척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다리게. 아직 완전 중독 상태가 아니니. 지금은 그저 전신을 향해 독이 퍼지고 있을 뿐이네.”

피를 토해내며 기침을 하는 것도 잠시, 현운은 온몸을 들썩이며 경련을 반복하다가 숨이 막히는지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어떻게든 입을 크 게 벌리고 호흡을 해보려는 듯했지만, 입가에선 검은 피와 침이 뒤섞여 독액 같은 액체가 흘러나올 뿐이었다. 차마 눈 뜨고 지켜볼 수 없는 목불인견의 참상이었다. 그러나 비류연만은 눈을 돌리지 않은 채 현운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더 이상 저항할 힘도 남아 있지 않은지 현운은 바닥에 쓰러져 몇 차례인가 움찔거렸다. 곧 그의 온몸이 피부 구석구석까지 검게 물들어갔다. 그리고 길게 늘어져 버린 현운은 숨을 멈추었다.

“저, 저거 죽은 거 아니오? 숨을 쉬지 않잖소! 빨리 손을 쓰시오, 빨리!”

현운의 숨이 끊어지는 것을 본 장홍이 기겁하며 불락구척의 멱살을 움켜쥐고는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인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소란 떨지 말게, 아직 죽은 게 아니니까. 단지 가사상태에 빠진 것뿐이네. 이른바 ‘완전중독’ 상태지. 숨을 안 쉬는 것 같지만 아주아주 길게 쉬고 있지. 심장도 아 주아주 느리게 뛰고 있고. 중요한 건 지금부터라네.”

멱살을 잡힌 채 불락구척은 품속에서 파란 단약을 꺼냈다.

“지금부터 해약 ‘만해(萬解)’를 투여하겠네.”

파란 단약이현운의 입 안으로 들어갔다. 혈도를 몇 군데 치자 곧 단약이 물처럼 변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이미 숨이 멈춘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간당간당한데 알약을 삼킬 힘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 현운의 목숨은 저 파란 알약의 효용에 달려 있었다.

주먹을 꽉 쥔 채 한마디 말도 없이 지켜보고 있던 비류연의 시선이 처음으로 불락구척을 향했다. 비류연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활짝 웃었다. 그리고는 건조한 목 소리로 말했다.

“살리는 게 아마 좋을 거예요. 그 약이 제대로 듣기를 바라시죠. 아니면 다음에 저 바닥에 누워 있는 건 당신이 될 테니까요. 자신이 만든 만독의 맛이 얼마나 지독 하게 더러운지 음미하면서 말이죠.”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그의 말이 철저한 진실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기대하도록 하지. 자, 그럼 약속대로 환자를 보도록 하지.”

불락구척은 침상에 누워 있는 남궁산산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가볍게 손짓을 한 번 하자 흰옷을 입을 청년 하나가 잽싸게 달려와 가죽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이 아가씨도 운이 좋군. 자신을 위해 목숨을 던져 줄 남자가 있다니 말이야. 지금부터 치료를 개시한다.”

불락구척은 남궁산산의 침상 앞에 앉은 다음 옆에 가죽 주머니를 펼쳐 놓았다. 그 안에는 장단과 굵기가 다른 십수 개의 침과 수십 개의 각기 다른 모양의 소도와 집게들이 잔뜩 들이 있었다. 불락구척은 남궁산산을 뒤집은 다음 상의를 벗겼다. 매끄럽고 아름다웠을 그녀의 등은 지금 나무 파편들에 유린당해 무척 끔찍한 모습 을 하고 있었다. 큰 파편만 대충 제거되어 있을 뿐 아직 뽑혀 나오지 못한 파편들도 많았다.

“흠!”

불락구척은 그 광경을 보며 코웃음을 한 번 친 후, 양손에 얇은 가죽으로 만든 하얀 장갑을 끼었다.

“마취.”

백의청년이 기다란 금침 하나를 건네주자 그는 망설임없이 그 금침을 산산의 목덜미에 깊숙이 꽂았다.

“삼(三)!”

옆에 서 있던 청년이 가죽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 중 삼(三)이라고 적힌 소도를 꺼내 건네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왼손을 들어 올리며 짧게 말했다. “집게.”

백의청년이 다시 집게를 건네주었다. 그걸로 모든 준비가 끝났다.

“하합!”

생사경계의술(生死境界醫術)

오패 개시(始)!

그 순간 불락구척의 손이 마치 여섯 개로 나뉘어지는 듯한 착각과 함께 빠른 속도와 정확한 솜씨로 등에 박힌 파편들을 제거해 나갔다.

‘오패’란 글자 그대로 깊게 가른다는 의미를 지닌 기술로 생사경계의술이 지닌 신묘한 묘법으로 한 사람이 동시에 셋으로 불어난 것처럼 빠르게 수술을 행할 수 있는 절기였다. 빠르고 적절한 처치가 사람의 생사를 가른다는 사상에서 나온 의술법이었다.

“봉합!”

순식간에 파편들이 제거되고 큰 상처는 실로 봉합되었다. 그 위에 재빠르게 붕대가 감겼다. 그는 남궁산산을 원래대로 돌린 다음, 기력을 회복시키기 위한 단약을 탕약에 녹여 먹인 다음 온몸을 추궁과혈했다. 그러자 파리하던 남궁산산의 얼굴에 서서히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여섯 개로 나뉘어졌던 그의 팔도 다시 원래대로 돌 아왔다.

“이제 괜찮을걸세. 목숨을 건졌어. 운이 좋은 아가씨군.”

의술 도구들을 백의청년에게 건네주고 소독을 명한 다음 불락구척이 만족스러운 듯 말했다. 그러자 아까부터 무표정하게 불락구척의 급소들을 이리저리 구경하 듯 훑어보고 있던 비류연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운이 좋은 건 당신이죠.”

확실히 이불락구척이라는 자는 성격이 괴팍하고 세간의 도리와는 상반된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지만 실력만큼은 확실한 모양이었다.

“대단하군.”

장홍의 입에서 절로 경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그렇긴 하지만……..”

모용휘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장홍의 입에서 다시 한 번 흘러나오는 감탄사.

“으음, 정말 대단해.”

옥유경의 전신이 이글이글 분노로 붉게 타올랐다.

“이 사람들이! 당장 그 눈 안돌려욧! 감히 어딜 보는 거예요, 죽고 싶어요, 당신!”

그제야 장홍은 ‘아차, 그 사람이 옆에 있었지’라는 사실을 기억해 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불락구척이 치료 중에 산산의 몸을 돌리는 바람에 아무것도 가리 지 않은 남궁산산의 봉긋한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던 것이다. 의도한 바 없는 어디까지나 사고였다. 그러나 그 급작스런 사태를 맞이한 사내들은 당황은 했으되 눈을 돌리지 못했으니, 옥유경의 진노를 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미 옥유경의 혈봉검은 검집으로부터 반쯤 뽑혀 나와 있었다.

“당시이이이인!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오오오오! 영령아!”

“예, 교관님!”

차캉!

영령이 즉시 대답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부, 부인! 오해요, 오해!”

사색이 된 장홍이 기겁하며 외쳤다.

“문답무용!”

그리고 외쳤다.

“쳐라!”

“존명!”

분노에 가득 찬 두 여인의 검초를 피하기 위해 사내들은 사력을 다해야 했다. 자칫 잘못했으면 송장 여럿 치울 뻔한 사건이었다.

“이 모든 게 가슴 때문이야!’

자기가 전생에 가슴이랑 무슨 원한을 졌기에 이 꼴을 당해야 하는 건가? 장홍은 억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본 건 사실이지만, 눈을 돌리지 않긴 했지만 억울한 건 억울한 거였다. 그리고 이 모든 걸 미리 경고해 주지 않았던 불락구척, 이 모든 게 차도살인지계를 노리고 벌인 그놈의 음모가 분명했다. 그러나 물론 그런 변명은 옥유경에게 눈곱만큼도 통용되지 않았다.

“이거참, 오늘따라 생사전이 좀 소란스럽군. 불락, 무슨 일 있나?”

만일 그때 진료실 밖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면 오늘에서야말로 장홍은 목숨을 잃었을지도 몰랐다. 불락구척이 문밖에 서 있는 사내를 보고 반색 했다.

“웬일이십니까, 무명 대장님? 좀처럼 저희 쪽에 발걸음을 안 하시던 분이 갑자기?”

다른 이들을 대할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근사근한 태도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대체 저 은발사내가 누구이기에?

단 효룡의 얼굴만은 무척이나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아, 치료받을 일이 있어서 말일세.”

그 말에 불락구척은 의아한 얼굴을 했다.

“무명 대장님이 말입니까? 그것참 믿을 수 없군요. 병이라고는 걸리지 않는 분이 이런 곳엘 다 오시고. 지금까지 잔병치레는커녕 상처 하나 입은 적이 없는 분 아 닙니까?”

그는 불락구천이 이곳 마천각에 들어온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의원을 찾은 적이 없었다. 대체 어떤 이유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지 꼭 한 번 해부해 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아, 나 말고 치료가 필요한 건 이 여인일세.”

비류연은 무명이라 불린 그 남자가 안고 있는 여인을 보자 눈이 부릅떠졌다.

“예린!”

그 여인은 틀림없이 그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나예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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