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7권 8화 – 비류연, 무명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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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7권 8화 – 비류연, 무명과 만나다

비류연, 무명과 만나다

-신법 대결

“뭐? 나 소저라고?!”

갑자기 왜 이런 곳에 납치되었다던 나예린이 나타난단 말인가? 비류연의 외침에 놀란 일행들의 고개가 일제히 무명을 향해 돌아갔다. 이십대 후반에서 삼십대 초 반으로 보이는 은발남자의 양팔에 안겨 있는 것은 틀림없이 나예린이었다.

그 순간 비류연의 몸이 희끗해지더니 어느새 무명의 코앞에 나타났다. 동시에 나예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 남자의 신원 파악 같은 건 예린을 돌려받은 다음에 해도 늦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분명히 닿았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손은 어느새 허공을 훔 치고 있었다. 무명은 어느새 반 발짝 뒤로 물러나 있었던 것이다.

‘내 순신(瞬身)을 간파하다니!”

방금 펼친 신법은 간단해 보이지만, 그만큼 빨라서 보통 사람의 눈에는 그저 팟! 하고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절정의 신법이었다.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순신(瞬身)’이라 불릴 정도니, 보법의 쾌가 극에 달해야 이를 수 있는 경지였다. 순신을 넘어선 자는 ‘축지(縮地)’에 도달한다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전설 상의 경지이니 사실상 순신은 궁극의 신법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비류연의 손 역시 그가 도저히 피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사각으로 뻗은 것이었다. 제아무리 절정고수라 해도 방금의 한 수에는 당해내지 못하는 게 순리였 다. 그런데도 방금 저 무명이라는 자는 그 한 수를 완전히 간파해 낸 것이다. 이렇게 기술이 완전히 간파당한 것은 사부 이래로 처음이었다. 어딜 봐도 범상한 인물 은 아니었다.

“당신이 바로 그 빌어먹을 서천인가요?”

무명을 똑바로 바라보며 비류연이 물었다.

“서천? 서천이 무슨 뜻이지? 난 그런 거 아닌데.”

무명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대체 비류연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태도였다.

“당신이 바로 천겁령의 서천멸겁이 아니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른다고는 하지 않으시겠죠?”

“글쎄, 천겁령이야 알고는 있지만, 내가 건망증이 좀 심해서 말이지. 그것마저 깜빡하고 까먹은 게 아니라면 분명 내가 서천멸겁이었던 적은 없는 것 같은데.” “호오, 일단 부정하고 보시겠다 그건가요? 그렇다면 힘으로 불게 하는 수밖에 없겠네요.”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에 비류연의 무복이 거세게 펄럭이기 시작했다.

그때 급하게 효룡이 끼어들었다.

“잠깐 기다리게, 류연!”

“왜 그래, 룡룡? 급한 용건 아니면 조금 후에 얘기하면 안 될까?”

지금 비류연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급한 용건이 있었다. 그러나 효룡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분 말이 사실일세, 류연. 무명 대장님은 마천각의 창설과 함께하신 분. 서천멸겁 따위가 아닐세.”

무명 대장의 능력은 그야말로 미지수. 그 바닥을 알 수 없었다. 지금 함부로 싸우는 것은 지극히 위험했다.

“그 말대로지. 그런데 자네, 날 아는 것 같은데 혹시 우리 전에 만난 적이 있나? 음, 그러고 보니 어쩐지 눈에 익기도 하고…….”

효룡은 급히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아, 아닙니다. 다만 무명 대장님의 대명은 익히 들어왔기 때문에 말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가? 이상하네…….”

무명의 건망증이 오늘만큼 다행인 적이 없다고 생각하며, 효룡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와, 우리 대장님한테도 대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다니! 그동안 치매대장이라고 놀림만 받았는데, 흑흑흑!”

효룡의 말에 감동했는지 옆에서 수행하고 있던 장소옥이 감격해서 눈물을 흘렸다.

물론 효룡은 무명을 만난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밑에서 무공을 배운 적도 있었다. 다만 지금은 그 사실을 밝혀서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잠시 생각하던 비류연이 다시 물었다.

“좋아요. 그럼 일단 아니라 치고, 그렇다면 왜 당신이 기절한 예린을 데리고 있는 거죠?”

그 광경을 봤으니 비류연의 눈이 홱 돌아가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야 우연히 만나서지.”

무명은 대답을 거리낄 이유가 없었다.

“우연히? 지금 그걸 믿으란 말인가요? 그거야말로 코웃음이 절로 나오는 말이네요.”

“믿거나 말거나 자네 맘이지만 사실인걸. 원래 세상일의 대부분은 우연과 우연이 겹겹이 쌓이면서 일어나지. 필연을 따지는 건 이야기 속의 세계뿐이야.” 무명은 오히려 따지는 비류연 쪽이 더 이상하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럼 우리 예린은 돌려받겠어요. 괜찮겠죠?”

아까 전부터 다른 남자가 예린을 안고 있는 게 심히 마음에 안 들던 비류연이었다. 얼른 나예린을 건네받기 위해 비류연은 무명의 앞으로 걸어가 왼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그 손은 무명의 손에 의해 금세 저지되었다.

“웃차, 그건 안 될 말이지.”

비류연의 손을 막은 채 무명이 웃었다. 비류연의 몸이 움찔 멈추더니 목소리가 한 단계 가라앉았다.

“호오, 왜 안 된다는 거죠?”

“자네야말로 왜 이 아가씨를 데려가려는 건가? 일단 내가 주운 이상, 기절한 아가씨를 아무한테나 줄 수는 없다고.”

분위기는 한층 더 팽팽하게 긴장되기 시작했다.

“왜 데려가긴요? 그야 예린이 있을 자리는 원래부터 내 옆이니까요. 만물이 제 갈 길을 찾아가듯 그것은 당연한 이치지요.”

비류연도 입가에 밝은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두 사람의 팔은 교차된 상태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정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두 사람 사이에는 치열한 힘겨루기가 행해지고 있었다.

“더 수상쩍은데? 거기다 그건 자네 말이지 이 아가씨 말은 아니잖아. 자네들이 이 여인의 동료인지 적인지 어떻게 알아?”

“동료인 거야 척 보면 알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척 봐도 모르겠는데. 아무튼 처음 보는 사람들한테 이 아가씨를 넘길 수는 없어.”

무명이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자, 공기가 더더욱 팽팽하게 당겨지고 진동한다.

미묘하게 흉험해지는 분위기 속에서 장홍은 은발남자의 실력에 경탄했다.

‘저자, 류연 저 친구의 공격을 저렇게 간단히 막아내다니…….”

현재의 공방은 매우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기세와 기세가 허공의 한 점에서 격렬하게 맞부딪치고 있었다. 저만한 비류연의 공격을, 사람을 안은 채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한 손으로 막아낸 무명의 솜씨는 가히 놀라울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두 사람의 표정에는 미소뿐이었다. 아니, 기세가 격렬해지면 격렬해 질수록 미소도 더 강해졌다.

“뭐, 애초부터 예린을 찾아가는 데 허락 따윈 필요없어요. 실력으로 받아가면 그만이니까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한텐 그게 최고죠.”

그 말에 무명은 실로 유쾌하다는 듯 홍소를 터뜨렸다.

“호오, 실력으로 받아가겠다고? 그것참 재미있군. 아주 재미있겠어. 하하하하!”

비류연도 마주 보고 웃었다.

“재밌다니 다행이네요. 자, 그럼 예린을 받아갈게요.”

대치하고 있던 손을 거두며 비류연은 다시 나예린을 향해 쾌속하게 오른손을 뻗었다. 비류연의 오른손은 이미 묵룡환이 벗겨져 있었기 때문에 그 속도는 왼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쉬익!

비류연의 오른손이 마치 번개처럼 허공을 갈랐다. 그 속도는 암천에 번쩍이는 한순간의 섬광처럼 재빨랐다. 이번에야말로 성공이다, 라고 비류연은 생각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어느새 무명의 오른손이 그의 손을 막고 있었다. 왼손은 그새 급히 품으로 거두어 나예린을 안은 채였다.

“소용없네!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거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도 둘 모두 놀라고 있었다.

‘좀 전의 일격을 막아내다니!’

“내 오른손까지 쓰게 하다니!’

두 사람 모두 지금의 현실이 믿겨지지 않는 듯했다. 만일 나예린을 안고 있지 않았더라면 양손을 모두 써야 했을 터였다. 충격에서 먼저 빠져나온 것은 비류연, 그래서 먼저 움직인 것도 비류연이었다.

비류연은 다시 절정보법인 ‘순신’을 써서 다시 무명을 압박했다.

“안 된다니까.”

무명은 어느새 나예린을 안은 채 일 장 뒤로 물러나 있었다. 이미 자네의 보법은 간파했네, 라고 말하는 듯했다.

“사람을 안고서도 굉장한 신법이네요.”

그 목소리는 무명의 등 뒤에서 들렸다. 어느새 비류연은 무명의 등 뒤를 점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방비 상태인 무명을 향해 비류연이 손을 뻗었지만, 그의 손은 허 무하게 허공을 훑고 지나갔다.

“칭찬 고맙군.”

그 말에 비류연은 깜짝 놀랐다. 어느새 무명이 나예린을 안은 채 그의 등 뒤에 있었던 것이다. 신법에는 상당히 자신만만했는데, 두 번 연속으로 간파당하고 말았 다.

“연환순신(連環瞬身)이라, 좀 하시네요.”

““자네도.”

승패는 나지 않았지만, 신법에서는 비류연이 반 수 밀렸다고 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무명은 한 사람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그만큼 움직임이 둔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따라잡지 못하다니.

“이거 진짜로 해야겠네요.”

무명에게 등을 잡힌 비류연의 신형이 넷으로 나뉘면서 무명의 주위를 둘러쌌다.

“사(四) 분신(分身)!”

사방에서 동시에 솟아난 듯한 비류연의 신형에 무명은 내심 놀랐다.

“자, 예린을 돌려주시죠.”

비류연의 손이 동서남북에서 번개처럼 뻗어왔다. 그러나 잡았다, 하고 생각한 순간 무명의 그림자가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허상(虛像)!”

네 명의 비류연의 눈이 허공으로 향했다. 지면과 이 장 정도 떨어진 그곳에 나예린을 안은 무명이 서 있었다. 그는 마치 허공에 발판이라도 있는 것처럼 다섯 번을 박차며 빠르게 오 장 밖으로 물러나더니 건너편 건물 지붕 위에 사뿐히 내려섰다.

“허공순보(虛空瞬步)!”

공기를 발판처럼 사용해 고속(高速)으로 움직이는 허공답보의 상승 경지였다. 허공답보와 순신을 조합한 절기라 할 수 있었다.

허공순보는 얼마나 많은 발판을 사용해 몸을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가에 따라 경지가 달랐다. 강호에 회자되는 바에 의하면 곤륜파의 절세 독문보법 인 ‘운룡대구식’의 최고 경지가 바로 허공에서 아홉 번의 변화를 일으키는 허공순보라고 한다.

하지만 사람을 안은 채 허공 중에서 다섯 번을 움직이다니! 게다가 허공을 박차는데도 아무런 무리가 없는 듯 가벼운 동작이었다.

“얕보지 말아주세요.”

비뢰문(飛雷門) 독문운신보법

봉황무(鳳凰舞) 오의(奧義)

봉황번천(鳳凰飜天) 오식(五式)

비류연이 허공을 연속해서 박차며 몸을 날렸다. 다섯 번을 박차고 오른 비류연은 금세 무명의 머리를 위를 장악했다.

이에는 이, 허공순보에는 허공순보.

봉황(鳳凰分환상익幻想翼)

마지막으로 위로 솟구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래로 내리꽂히기 위해 공기의 발판을 박찬 비류연의 신형이 순간 여섯으로 갈라졌다. 허공순보에서 바로 분신(分身)으로 전환.

여섯으로 나뉜 비류연의 신형이 무명을 향해 쇄도했다. 그중 손바닥 하나가 무명의 코앞에 내밀어졌다.

비류연은 망설이지 않았다.

비뢰도(飛刀)검기(劍氣) 오의(義)

편익봉황(片翼鳳凰)의 장(章)

오뢰인

세 개의 광망이 비류연의 오른손에서 뿜어져 나갔다. 나예린을 안은 무명으로서는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신속한 공격이었다. 마침내 무명은 안고 있던 나예린을 놓 았다. 이제 떨어지기 전에 그녀를 받아내기만 하면 되었다.

그 순간 무명의 양손이 허공에서 기이하게 움직이며 완벽한 원을 그렸다. 그다음 순간 다섯 줄기의 뇌전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벽력같은 속도로 쇄도한 공격을 단 일수에 흘려낸 것이다.

“화경()? 말도 안 돼!”

비뢰도를 휘게 하는 화경이라니?

원래대로라면 비뢰도가 화경을 꿰뚫었어야 옳았다. 보통의 화경으로는 절대 비뢰도를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뢰인을 튕겨낸 무명은 다시 나예린을 받아 들려고 했다.

비뢰도가 튕겨 나갔다는 사실이 충격적이긴 했지만, 무명의 손이 나예린에게서 떨어지는 기회를 그냥 흘려버릴 비류연이 아니었다.

“받으시죠!”

비류연은 다시 무명을 향해 두 자루의 비뢰도를 방출했다. 이번에도 무명은 몸을 살짝 틀어 두 줄기 섬광을 피해냈다. 그 순간 비류연의 입가에 득의한 미소가 떠 올랐다.

‘걸렸다!’

이번에는 무명을 공격하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떨어지는 나예린의 몸을 뇌령사가 휘감자, 그때를 기다리고 있던 비류연은 즉시 뇌령사를 잡아당겼다. 나예린의 몸이 깃털처럼 가볍게 허공으로 부웅 떠올랐다.

“아차, ‘받아가죠’를 잘못 말했었네요, 실수.”

비류연은 허공에서 내려오며 무엇보다 소중한 것을 다루듯,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물을 다루는 듯한 손길로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나예린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깃털이 내려앉듯 아무런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 자세로 지상에 내려섰다.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던 비류연은 한 손으로 흐트러진 나예린의 귀밑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비류연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오랜만이에요, 예린. 드디어 다시 만났네요.”

겨우 하루였지만, 마치 십 년 같은 하루였다.

“어라? 어라? 어라?”

무명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뺏겼네? 어째서?”

그는 좀 전에 일어난 일이 믿을 수 없는지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은 비단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의 부관인 장소옥 역시 하늘처럼 믿고 있던 대장님이 한판 빼앗겼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듯했다. 건망증이 치매 수준으로 심하기는 하지만 무공에 있어서 누군가에게 밀린 적은 한 번도 없었던 무명 이 아닌가.

“얼레레? 실수한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지?”

무명은 팔짱을 낀 채 잠시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그가 전력을 내지 않았다지만, 저렇게 젊은 청년한테 한 수 밀렸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지금까 지 그의 확신이 깨어지는 일은 좀처럼 없었던 것이다. 갑자기 이 앞머리가 길어서 눈까지 가리고 있는 정체불명의 청년에 대한 흥미가 마구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자네, 나와 한번 ‘진짜로’ 싸워보지 않겠나?”

눈을 반짝 빛내며 무명이 말했다. 지금까지의 싸움은 진짜가 아니었다는 듯이. 자신은 전혀 전력을 내지 않았다는 듯이.

“싫어요.”

비류연의 대답은 단호했다.

“왜?”

금세 시무룩해진 얼굴로 무명이 반문했다.

“그야 당연히 예린을 치료해야 하니까요.”

나예린을 받아 들면서 맥을 짚어본 결과 다행히 기력의 소모가 심할 뿐, 산산처럼 중상은 아니었다. 비류연은, 치료비를 아끼기 위해선 항상 어지간한 응급 상황에 도 대처할 수 있는 의술을 익혀놔야 한다는 사부의 터무니없는 지론 때문에 기본적인 의술 정도는 익혀놓고 있었다. 혹시 자신도 현운처럼 빨간 단약을 삼켜야 하나 했더니, 그런 각오까지는 필요없을 듯했다.

“그거라면 내가 불락 저 아이에게 부탁해 줄 테니 걱정 말게. 그렇지, 불락 군?”

겨우 삼십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무명이 사십은 되어 보이는 불락구척을 서슴없이 ‘아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불 락구척의 반응이었다.

“하아, 저도 이제 대장입니다. 그때 선생님이 가르치던 꼬마는 더 이상 아니니 ‘아이’라고 부르는 건 그만둬 주십시오. 하지만 무명 선생님 부탁이라면 어쩔 수 없

지요, 치료해 줄 수밖에.”

이 괴팍한 광의가 무명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경악했다.

“대체 저 은발의 남자가 누구기에 이 정신 나간 광의가 이리도 순한 양처럼 군단 말인가?” 직접 보지 못했으면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이런 희한한 광경에 어떤 의문도 품지 않는 것은 칠번대 대장 옥유경과 효룡뿐이었다.

“자, 이제 됐나?”

치료도 부탁해 줬으니 다시 싸워보자는 얘기였다.

“글쎄요, 난 아무런 이득도 되지 않는 싸움은 하지 않는 주의라서요.”

사실 나예린이 치료를 받게 된 마당에 비류연이 싸워야 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득이라? 그거라면 있지.”

무명이 다행이라는 듯 싱긋 웃었다.

“그게 뭔가요?”

너무나 순수한 표정으로 활짝 웃으며 무명이 말했다.

“그야 물론 자네 친구들의 목숨이지.”

순간 비류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비류연이 반문했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무명은 태평하게 말을 이었다.

“자네들, 오늘 각에 방문한 침입자들이지? 알지 모르겠네만 지금 자네들에게는 말살 지령이 내려져 있다네. 나도 일단 마천십삼대의 대장 중 한 명이라서 말이지. 자네들은 본 이상 일단 죽여야 한다네.”

사람들을 모두 죽인다고 말하고 있는데도 그의 표정이나 눈동자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마치 사람의 생과 사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그런 눈이었다. 아니, 관 심이 없다기보다 오히려 그 눈은 생과 사를 벗어나 있는 듯했다.

하지만 비류연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죽인다고 한다면 진짜 죽일 거라는 것을. 생사에 초탈했기에 오히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람의 생명을 끊어놓을 수 있다는 것을.

“아, 그렇게 똥 씹은 얼굴 하지 말게. 아직 안 죽였으니까. 약한 사람 괴롭히기도 싫고. 자네가 내 ‘삼초(三招)’만 받아낸다면 여기서 자네들을 만났다는 것은 눈감 아주겠네. 그럼 자네 친구들도 목숨을 구할 수 있겠지. 그 정도면 충분히 이득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나? 모두모두 만만세지.”

그의 눈은 ‘뭐, 만일 안 받아들이면 나머지를 다 죽인 다음에 싸우면 되겠지’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눈빛이 마치 어린아이처럼 맑고 깨끗하다. 한 점의 살기도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눈동자였다. 그가 자신들을 죽인다고 하는데도 어떤 분노도 치밀어 오르지 않았다. 우스운 얘기지만, 그가 아무런 나쁜 뜻 없이 어린아이처럼 무구한 마음으로 말하고 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기 때문이다.

“하아, 거래를 좀 할 줄 아는 분이네요. 그렇게 나오면 안 받아들일 수가 없겠네요.”

비류연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또 쓸데없이 몸을 혹사시키게 되고 말았다. 어차피 저자가 서천이 아닌 이상 싸울 이유는 전혀 없는데. 문제는 이쪽은 없 어도 저쪽은 있다는 데 있었다.

“잘 생각했네. 똑똑한 친구로군. 덕분에 나도 수고를 덜 수 있겠어.”

무명은 비류연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활짝 웃었다.

비류연은 무명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맑고 깨끗하면서도 깊으면서도 무구한 눈이다. 어딘지 공허한 눈. 그 눈이 공허한 것은 아마 그가 현실을 보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도저히 인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눈, 그 눈은 오욕칠정이라는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조차 뛰어넘어 있었다. 어딘가 어리버리하게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이자는 깊 이를 알 수가 없었다.

‘저런 눈을 가진 걸 인간이라고 할 수 있나?”

비류연은 저런 눈을 가진 사람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세상의 이치를 한 번에 꿰뚫어 볼 것 같은 눈, 그의 눈에 이 세상은 어떻게 비춰지고 있는 걸까? 나예린의 용안과는 또 다른 느낌의 눈이었다.

‘설마 생사(生死眼)?”

에이, 설마… 곧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런 건 전설에나 나오는 눈이었다. 이런 데 굴러다니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확실히 아니라고 단정 짓지 못하는 자신(自身)이 있었다.

만일 저것이 전설의 그것이라면 이번 싸움은 결코 쉽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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