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7권 9화 – 승부는 지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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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7권 9화 – 승부는 지금부터

승부는 지금부터

-생사(生死)

생사(生死).

그것은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눈동자로, 생과 사를 꿰뚫는 눈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수백만, 아니, 수천만을 넘어 셀 수 없는 생과 사를 지켜본 자만이 얻을 수 있으며, 모든 것을 간파하고 본질을 꿰뚫는다는 눈.

이것은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나는 눈이 아니었다. 생사의 갈림길을 수천, 수만 번 넘어서며, 생사의 경계에서 그 몸을 비우고 마음을 무(無)로 만들면 일체의 관 념으로부터 해방되어 사물의 본질을 직시할 수 있는 눈을 얻을 수 있게 된다고 한다. 오직 생과 사를 초월한 정각자(正覺者)만이 얻을 수 있다는 눈.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비류연은 곧 자신의 추측을 부정했다. 그런 건 전설 속의 옛이야기에서나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머리로는 부정하면서도 비류연은 무명의 눈에서 시선을 뗄 수 가 없었다.

무명의 눈은 무척이나 특이했다. 깊고 맑은 그 눈은 끝없는 허무를 응시하고 있는 듯했다. 모든 현상을 그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눈동자에서 해체해 버릴 것 같은 느낌이었다.

생사안을 가진 자는 두려움을 모른다. 무수한 죽음을 그 눈으로 보아오며 생과 사의 경계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생사안을 얻은 자에게 있어 죽음이란 그저 하나 의 현상에 지나지 않았다.

‘견적이 안 나오는군.’

무명과 대치한 지금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 점이었다. 그의 역량이 읽히지 않는다. 비류연이 사부에게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상대의 역량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었다.

일명, 견적 내기!

어차피 무공 대결이라는 것은 실력 대 실력의 대결이다. 뒷배경 같은 것은 강호에서 행세할 때는 편할지 몰라도, 직접 싸우는 그 순간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 특히 그 상황이 일대일 대결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가 지금까지 흘려왔던 땀과 쌓아왔던 경험만이 진실로 남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견적부터 내서 상대를 파악하는 게 제일이었다.

물론 비뢰문에서 견적을 내는 이유는, 적이 나보다 강하면 도망치자는 선택지 따위를 마련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다만 가장 효율적이고 적절한 초식을 써서 최 소한의 비용으로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저 무명이라는 자는 견적이 나오지 않았다. 때문에 어떻게 싸워야 할지, 얼마만한 위력의 초식을 얼마만큼 써야 할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저자가 강한지 약한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두려움 같은 게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판단을 내릴 수 없는 대상을 만나다 보니 마음도 움직임을 보류한 듯한 느낌이었다. 이런 느낌을 준 자는 사부 이래로 처음이었다.

“그 점만으로도 충분히 조심할 만하지.’

비류연은 양팔을 아래로 자연스럽게 내려놓았다. 언뜻 보면 싸움을 포기한 것 같지만, 이것이야말로 비류연이 진심을 내기 위한 준비 자세였다. 잘 알 수 없을 때 는 전력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었다.

무명은 만족스러웠다.

사실, 여기 있는 침입자 모두를 죽이는 것도 정말로 그에겐 별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살아 있든 죽어 있든 그에게는 큰 의미가 없었다. 아니, 생과 사 자체가 그에겐 별다른 의미를 주지 못했다. 생과 사조차 그에게는 당연한 자연 현상의 일부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가 아직껏 초월하지 못한 것은 오로지 ‘기억’뿐.

그러니 지금 이곳에서 그에게 흥미를 줄 만한 것은, 안고 있던 여인을 자신에게서 빼앗아간 비류연과의 대결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선보였던 그 초식…….. “대체 뭐였을까, 그 초식은?”

어째서인지 무명의 머릿속에서는 방금 전 보았던 그 번개 같은 초식이 계속 맴돌면서 신경을 쓰이게 했다. 자신의 두 팔을 쓰게 했던 무공. 강호에 이런 무공이 있 었나 여겨질 정도로 독특한 무공. 백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도록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무공. 그런데도 어째서 그는 그것이 눈에 익은 것일까?

좀 더 좀 더 알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좀 더 싸워볼 필요가 있었다.

기억을 떠올리려면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은 대체 어느 녀석이었을까? 언젠가 그렇게 말한 녀석이 있었다. 사번대의 의원 녀석이었던 것 같은데, 그게 불락구척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강한 자가 나타나면 싸워보곤 했다. 좀 충격을 받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지 않는가. 다만 지금까지는 사실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기는 게 당연했으니까. 그런데 그의 예측을 살짝 벗어난 인간이 오늘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그가 지키고자 한 것을 빼앗아가다니…….

그 점이, 좀처럼 동하는 법이 없던 그의 흥미를 자극했다.

“조심하게, 류연! 절대 방심하면 안 되네! 전력을 다하게, 전력을!”

효룡은 떨고 있었다. 그리고 상당히 초조해 보였다. 비류연은 효룡이 이렇게 떠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효룡은 효룡대로 걱정이 태산 같았다.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감출 마음도 없었다.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다고, 절대로 피해가고 싶다는 상대와 이렇게 정면으로 딱 마주치다니, 정말 운이 나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눈앞에 있는 이가 바로 육번대 대장 불사신 무명. 마천십삼대, 아니, 마천각의 시작과 함께 한 불사신의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만나고 만 것을. 만나고 만 이상 어쩔 수가 없었다. 기대할 만한 것은 무명의 ‘맹함’과 ‘건망증’뿐이었다.

싸우기에 앞서 비류연은 한 가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하필 나죠?”

왜 이렇게 싸우고 싶어하는 건가? 그에겐 돈과 명리는커녕 생사조차도 별 의미가 없어 보이는데.

“다른 아이들은 아직 부족해. 내 상대가 되기엔 아직 한참 미숙하거든.”

무명은 많은 학생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져 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개중에는 꽤 눈여겨볼 만한 녀석들도 있었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녀석들도 있었다. 주변에 서 천재라고 칭해지는 녀석들도 물론 봐왔었다.

“내가 이 대장 직에 세월아 네월아 앉아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봐왔다고 생각하나?”

“글쎄요, 일단 억수로 많겠죠.”

“그래, 개중에는 주변에서 천재라고 치켜세워 주는 녀석들도 많았지. 천재란 녀석들은 보통 사오 년 주기로 한 명씩은 나왔거든. 심한 경우에는 매년 천재니 천고 의 기재니 하는 녀석들도 나왔고 말이야. 하지만 그중 강호사에 이름을 새긴 녀석들은 극히 드물어. 수많은 천재들이 마지막에서 가서는 둔재가 되어 사라져 갔지.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지워져 갔고.”

“그것참 안타깝군요.”

“맞아, 특히 내 눈에 띄는 녀석들이 하나도 없다는 점이 가장 안타까웠지.”

어찌 보면 광오하기 이를 데 없는 발언인데도 무명의 담담한 어조에선 허세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자넨 좀 달라. 아직 최고로 빛나고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눈에 띄니 말이야.”

“나에 대해 꽤 안다는 듯이 말하시네요?”

그렇게 받아치면서도 속으로는 살짝 흠칫했다.

“아직 빛나고 있지 않다니……. 내 상태가 만전이 아니란 걸 안단 말인가?”

역시 방심할 수 없는 상대였다.

“그럴 리가. 자네는커녕 나 자신이 누군지도 모르겠는걸.”

비류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또 무슨 선문답이란 말인가. 수상쩍은 아저씨와 이런 상황에서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고 싶진 않았지만, 견적도 나오지 않은 이 상 함부로 덤빌 수는 없었다. 이럴 땐 적당히 받아치면서 상대를 탐색해 보는 게 최선인 법.

“그건 또 무슨 선문답이죠?”

“자네는 부모님의 얼굴을 기억하나?”

“물론 기억하죠.”

“태어나서 자란 곳도?”

“그럼요. 다들 날 천재라 부르던 마을이었답니다.”

“자신을 가르쳐 준 사람은 어때? 기억하나?”

“잊고 싶은데 유감스럽게도 기억하고 있네요. 어디 잊으려 해도 잊어져야 말이죠.”

비류연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자넨 행운아야.”

“불행아를 잘못 말한 거겠죠.”

사부를 생생하게 기억하는 게 그다지 행운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사부 때문에 오십만 냥 대회에 참가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 을지도 모를 일 아닌가. 강호란도에서 꼬리를 잡힌 게 애시당초 실수였다.

“자넨 ‘나’라는 게 뭐라고 생각해?”

무명이 갑자기 물었다.

“나라니요? 갑자기 나는 왜요?”

비류연이 반문했다. 싸움을 앞두고 묻기에는 참으로 뜬금없는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중요한 문제잖아. 사람은 뭘 가지고 자기가 자기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걸까? 사실 별달리 근거도 없잖아? 이게 바로‘나’라고 하기엔 말이야.”

“핏, 그런 것도 몰라요?”

“응, 난 아직까지도 나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 지난 수십 년 동안 알기 위해 노력해 왔는데도, 다 소용이 없더군.”

“기억상실이라도 걸렸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모를 리가 없잖아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태도로 비류연이 대꾸했다.

“어떻게 알았지? 맞아, 난 소위 말하는 ‘기억상실증’이야. 그것도 중증이지. 그래서 과거에 대한 기억은 나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네.”

그냥 해본 말인데 진짜라는 소리를 들으니 아무리 비류연이라도 깜짝 놀랄 수밖에 없다.

“진짜 기억상실증이라고요?”

무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마천각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얘기였다. 덧붙이자면 그가 기억을 잃은 원인을 기억상실증 때문이 아니라 치매 때문이 아닌가 의심하는 이들이 상당수 존재, 아니, 대부분이었다. 일각에선 아주 오래전, 입에 거품을 물고 바닥에서 뒹굴다 죽었던 소고기를 구워먹은 뒤 부작용으로 저렇게 되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난 그 모든 기억이 없거든. 부모의 모습과 이름도, 내가 자란 마을도, 그리고 나에게 무공을 가르쳐 준 사부도, 심지어 내 이름까지도 말이야.”

그래서 그의 이름은 무명이었다. 이름이 없기 때문에 이름이 ‘무명(無名)’이었다.

그는 이 이름을 아주 오랫동안 사용해 왔다. 그러나 그 까마득한 시간이 흐르는 뒤에도 그는 여전히 이름없는 자, 무명이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이름을 찾지 못 했고, 때문에 이름을 찾기 위해 방황하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쯤부터 기억이 없는데요?”

“으음…… 글쎄, 한 백 년쯤 전인 것 같아.”

“호오, 농담 좀 하시네요.”

비류연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농담이면 얼마나 좋겠어.”

그러나 그건 애석하게도 농담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렸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아나?”

비류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철이 들고 난 다음부터는 한 번도 잃어버린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이 발언은 몇몇 사람의 공분(公憤)을 자아냈지만, 대놓고 항의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건…… 디딜 발판이 없는 곳에 서 있는 느낌이랄까. 물론 백 년 동안 새로운 기억을 쌓아오긴 했지만……. 뿌리가 없는 나무는 결국 나무가 아닌 거지. 그런 나 무는 열매를 맺을 수 없어. 자기가 무엇을 맺어야 하는지 이미 잊어버렸기 때문이지.”

“씨 없는 열매는 열매가 아닌 것처럼요?”

“그건 그냥 고자고.”

무명이 딱 잘라 대답했다.

“아무튼, 그래서 난 나 자신이 누구인지 찾기 위해 백 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왔네. 하지만 아직도 못 찾고 있지.”

“백 년씩이나 찾았는데 못찾았다고요? 그렇게 간단한 걸?”

“간단하다고?”

나에게는 그 이상의 어려운 것이 없는데, 라는 얼굴로 무명이 반문했다. 그게 그렇게 쉬운 거면 그가 백 년이나 삽질할 이유가 전혀 없지 않은가.

“그것도 몰라요? 내가 나라고 규정한 게 바로 나죠.”

그런 건 상식이에요, 하는 말투로 비류연이 말했다.

“내가 나라고 규정한 게 바로 나다?”

“당연하죠. 누군가의 아들이자, 누군가의 아버지이며, 누군가의 동생이기 전에, 내가 누군가로 살기로 결정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나죠.” 어떤 목적도 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져서, 그 무의미한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 아닌가.

“원래 삶이란 건 맨 처음엔 백지부터 시작하는 거잖아요? 의미 같은 건 살면서 만들어가면 되는 거라고요.”

“그런 사람이 못 되면? 왜, 능력이 달려서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 못 되는 경우도 있지 않나?”

“그럴 경우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던 게 바로 그 사람이 되겠죠.”

“내가 나라고 규정한 게 바로 나라…….”

잠시 생각해 보던 무명이 반문했다.

“그 규정이란 것도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할 수밖에 없잖아? 그건 즉, 기억에 의지한다는 거고.”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역시나, 아무래도 나는 내가 누군지, 나 자신이 무엇인지를 안 다음에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뭐가 될지를 규정하려면 말 이야. 뭣보다도 내 안에 있는 뭔가가 ‘나’를 찾으라고, 불완전한 나를 완전히 되찾으라고 날마다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게 그 증거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무명을 보고, 비류연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럼 다시 맨 처음으로 돌아간 거잖아요? 그러니까, 자신이 누군지는 대체 어떻게 알아낼 건데요?”

“사실, 기억을 잃은 나에게도 유일하게 남겨진 것이 있긴 해. 바로 무공이지. 지금까진 내 무공이 어떤 문파의, 누구의 무공인지 밝혀내지 못했지만, 무공은 나에게 있어서 유일한 실마리고, 그렇기 때문에 난 강한 녀석이랑 싸워보고 싶어.”

“싸우면 기억이 되살아난다는 건가요?”

“글쎄 뭐랄까, 그들의 강함이 내 안의 무언가를 일깨울 수 있을 것만 같거든. 하지만 최근엔 그런 영감이 느껴지는 상대가 없었지. 그래서 그냥 잠만 자고 있었는 데, 오늘 이렇게 자네를 만난 거야. 자네랑은 느낌이 좋아. 이렇게 마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극이 느껴지거든.”

“제 취향은 정상이라서요. 반하는 건 삼가주시겠어요?”

“하하하하, 재미있는 친구로군. 걱정 마. 난 지극히 정상이니까. 굳이 말하자면 자네보다는 조금 전 만났던 여자아이가 좀 더 취향이지.”

비류연의 미소가 잠시 정지했다.

“방금 그 말은 그냥 넘겨들을 수 없네요. 포기하시죠. 그쪽은 이미 임자가 있거든요. 아참, 좀 전에 제가 전력을 냈다고 생각하진 않겠죠?”

감히 쓸데없는 생각을 품으면 전력으로 제거하겠다는 뜻이었다.

“그것참 잘됐네. 마침 나도 전력을 내지 않았거든.”

스윽, 무명이 자신의 왼팔을 들어 보였다. 거기에는 거무튀튀한 묵색으로 된 팔찌 하나가 차여 있었다. 그 팔찌 위에는 ‘봉(封)’이라는 글자가 양각되어 있었다. “설마…….”

그 팔찌를 본 비류연은 깜짝 놀랐다.

그와 비슷한 걸 본 기억이 있었다. 당연했다. 그와 비슷한 것이 십대 초반부터 언제나 그의 팔목과 발목에 차여져 있었던 것이다. 그의 눈이 서둘러 무명의 오른팔 과 양다리의 발목으로 향했다.

“…..!”

있었다. 의심의 여지조차 없는 팔찌와 발찌가 그자의 오른쪽 팔목과 양쪽 발목에 차여져 있었다.

“내가 애용하는 팔찌와 발찌야. 하도 오랫동안 차고 있어서 이제는 내 몸의 일부가 된 녀석들이지. 왠지는 몰라도 사람들은 이걸 ‘봉신환(封神環)’이라고 부르더 군. 별 필요성을 못 느껴서 지난 몇십 년간은 한 번도 풀어본 적이 없는데, 자네한테라면 하나쯤 풀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대, 대장님, 진짜 풀어내시려구요?”

안색이 창백해진 장소옥이 기겁하며 외쳤다.

“왜? 안 돼?”

눈을 끔뻑이며 무명이 되물었다.

“가, 각주님이 절대로 허가없이는 풀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혹시라도 그걸 풀려고 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하는 게 바로 육번대 부대장이 대대로 맡은 역할이었다.

“소옥이만 눈감아주면 아무도 모를걸?”

또 못 본 척해달라는 뜻이었다.

“사번대 대장님도 저기서 눈을 부릅뜨고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혼자서는 불리하다고 생각한 소옥이 불락구척을 끌어들이려 했다.

“안 보고 있는데?”

불락구척은 전혀, 아무 말도 못 들었다는 듯이 나예린의 치료에 전념하고 있었다. 일부러 외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봤으면서도 못 본 척, 들었으면서도 안 들은 척하고 있는 것이다. 대체 저 성격 나쁜 광의에게 무명이 어떤 존재이기에 저렇게 순순히 이 망할 대장님의 말을 따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자, 소옥이도 눈감아줄 거지?”

순순히 항복하라, 넌 이미 패배했다, 라고 무명의 눈은 말하고 있었다.

“크윽, 하지만 저에겐 부대장으로서의 의무가…….”

최후의 저항을 시도해 본다.

“소옥이는 육번대의 내부관이지 마천각주의 부관인 건 아니잖아?”

“그, 그건 그렇지만…….”

고민하고 있는 게 장소옥의 얼굴에 역력히 드러났다. 그러다가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만일 제가 싫다고 하면 어쩌실 건데요?”

그러자 무명이 싱긋 웃었다.

“그땐 할 수 없지. 소옥이를 힘으로 쓰러뜨리고 하고 싶은 걸 할 수밖에.”

당연한 걸 뭐 하러 물어, 라고 말하는 듯했다.

“역시나…….

장소옥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이 사람, 남의 말을 듣는 사람이 전혀 아니었지.. 남이야 어찌 되든 자기 할 건 다 하는 인간이었다. 게다가 그 무시무시한 경력 때문에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마천각주 한 사람뿐이었는데, 그것마저도 잘 듣지 않았다. 좀 전에도 무려 마천각주라고 ‘님’ 자 빼고 막 부르지 않았던가. 항상 까먹었다고 말하는 게 이 건망 증대장의 입버릇이었다. 그러나 가끔은 안 까먹은 것도 까먹은 척하는 것 같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맘대로 하십쇼, 맘대로. 어차피 맘대로 하실 거니까.”

장소옥이 한숨을 푹 내쉬며 항복을 선언했다. 포기하면 모든 게 편한 법이다.

괜히 전 부대장이 자신한테 부대장 직을 넘겨줄 때,

“이보게, 소옥이. 육번대 부대장이 되면 제일 먼저 배워야 할 게 뭔지 아나? 그건 바로 포기하는 법이라네. 포기해. 포기하면 편해. 나처럼 위에 구멍도 안 뚫리네.”

라고 말했던 게 아니었다.

“으윽, 위가……”

장소옥은 자신의 위 부위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역시 자신이 마천십삼대 부대장 중 가장 재수없고 불쌍한 부대장이라는 것에 의심의 여지는 없는 듯했다.

“자, 허락도 받았고…….”

무명은 즐거운 듯 왼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짧게 외쳤다.

“봉신환 해제!”

찰캉!

쇠가 울리는 소리와 함께 무명의 왼손에 차인 팔찌가 풀렸다. 그리고 당연하게 땅으로 떨어졌다.

쿠웅!

순간 지진이 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무튀튀한 봉신환이 떨어진 곳을 쳐다본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봉신환이 떨어진 곳을 중심으로 청석 바닥 위에 거대한 균열이 가 있었던 것이다. “흠흠, 흠흠.”

무명은 자신의 왼손을 두어 번 조물락조물락 움켜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언제 풀었는지는 언제나처럼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오래된 것만은 확실했다. 무명은 왼 주먹을 쥐락펴락 하며 비류연을 향해 웃어 보였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쿵!

그 순간 비류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 생소한 감각에 비류연은 놀라기보다는 어이가 없었다.

‘뭐지, 이 감각은? 왜 이 감각을 저 사람 앞에서 느끼는 거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각은 아니었다. 저 의문의 봉신환을 봤을 때 그랬던 것처럼, 친숙하기까지 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그 감각을 다른 사람에게서 느껴보 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왜 사부한테서나 가끔 느끼는 감각을 저 은발머리남자에게서 느끼는 거지? 겉보기에는 별로 아무런 위압감도 느껴지지 않는데?

물론 그는 외모로 사람의 강함을 판단하는 그런 멍청이는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겉보기라는 것엔 기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숨겨놓고 있는 기세 까지도 파악해 견적을 낼 수 있었다. 싸움의 기본은 나 자신을 알고 남을 아는 것. 그래야만 싸우기도 전에 이길 수 있는 법이었다.

지금까지는 그는 나름 그것을 정확히 계량해 왔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계량을 통해 언제나 정확한 견적을 내곤 했었다. 그런데 견적은 고사하고 그 계량 마저 먹히지 않는 상대를 만난 것이다.

저자는 계량할 수조차 없었다. 아니, 한계를 정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무량(無量)!

그 사실이 그를 한없이 불안케 했다. 항상 평상심을 잃지 않고 있던 마음이 미세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명경지수(明鏡止水)의 심경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천무삼성을 앞에 두고도 불안해하지 않던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무언가를 저 무명이라는 자는 가지고 있었다.

“우선 제일초! 가겠네!”

미지의 존재가 그를 향해 첫 번째 공격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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