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산일응, 선녀들을 만나다
ᅳ신마팔선자
형산일응 곽현은 달리면서 생각했다.
도대체 일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
처음에 열한 명의 사제와 함께 사부님한테 불려갔을 때만 해도, 설마 이런 악몽이 일어나리라고는 누가 상상했겠는가.
그가 사부님에게 받은 명령은 열한 명의 사제를 이끌고 나가 최근 호남성을 시끌시끌하게 하고 있는 ‘연쇄강간살인마’를 잡아 강호 정의(正義)의 이름으로 처단하 라는 것이었다.
겨우 색마 하나 잡는 데 형산파의 새로운 간판, 형산십이검이 모두 나선다는 것은 좀 우습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러자 그들의 사부가 신중한 얼굴로 한마디 했 다.
“사공 연마의 의혹이 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 경우엔 최악의 상황도 벌어질 수 있으니 결코 방심하지 말거라.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게 강호이니라.”
하지만 그들은 젊었고 자신들의 검법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 열두 명이 함께 있으면 어떤 두려울 것도 없었다. 그들에게 이번 일은 그저 오랜만 에 바깥바람이나 쐬고 들어오는, 그러면서 덤으로 기부금도 받고 협의를 행하는 소소한 일에 불과했다. 형산십이검이 모두 출동하면 그런 색마들쯤이야 열 놈이라 도 잡아들일 수 있었으니까.
곽현은 열한 명의 사제와 함께 형산파에 기부금을 바친 그 촌장이 산다는 장가촌으로 현장 답사를 떠났다. 그런데 때마침 그 장가촌에서 또 다른 납치 사건이 발생 한 것이다. 일반인들이라면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무공을 일정 수준 이상 익힌 사람이라면 충분히 알아볼 수 있는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형산십이검은 당장 추적을 시작했다. 도망가면서 남긴 흔적을 보면 그 색마 녀석은 무공이 그렇게 썩 대단한 수준도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추적은 생각 외로 오 래 걸렸고, 그들은 계속 북상해 어느덧 호남성의 경계를 넘어 호북성에 도착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한 이름없는 고개 앞에서 생생한 흔적을 발견했다. 그들은 추 적에 속도를 붙여 고개를 넘었다. 이제 색마의 목은 그들의 손아귀에 있는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함정이었다.
그들…… 색마는 한 명이 아니었을뿐더러, 매복까지 하고 있었다.
뒤에서 갑자기 덮쳐 온 기습에 곽현은 세 명의 사제를 잃어야 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유인했던 것이다.
그들의 무공은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중 가장 젊어 보이는 백색 유삼의 사내가 펼치는 한빙장공은 실로 경천동지할 정도의 위력이었다. 겨우 이 십대 중반밖에 되지 않았을 자의 내공이 그토록 심후할 줄은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그가 펼쳐 낸 극음의 장법에 세 자루의 검이 부러지고 그 주인들의 몸에서 피분수가 터졌다. 형산십이검은 쫓는 입장에서 쫓기는 입장이 되었고, 첫 기습에 셋이 당한 후 그들은 산산이 흩어져 각개격파당했다.
뭉치지 않은 힘은 모래성처럼 싱겁게 무너졌다. 그동안 쌓아왔던 지난 십 년의 적공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남은 것은 곽현, 그 하나뿐 나머지 사제들은 모두들 피가 얼어붙은 채 허무하게 한 사람씩 쓰러져 갔다.
증거를 인멸하려는 그들의 추적을 피해 달리면서도, 곽현의 마음속에선 자책이 멈추지 않았다.
왜 방심했을까? 단순한 색마라고 경시하다니. 직접 싸워보기 전에는 모르는 법인 것을.
방심은 곧 패배를, 패배는 곧 죽음을 불러왔고, 이제 형산십이검 중 살아남은 자는 오직 그 혼자뿐이었다.
그것은 분명 치욕이었다.
그래도 그는 살아야 했다. 치욕을 무릅쓰고라도 살아야 했다. 이대로 복수도 하지 못하고 죽는다면, 지하에 있는 사제들을 볼 면목이 없다.
하지만 고갯길을 홀로 달려 내려가는 그의 발걸음은 그리 빠르지 않았다. 그 역시 격전 중에 한빙장을 얻어맞은 것이다. 그의 다리는 점점 느려졌고, 안색마저 점 점 파리해져 갔다.
아직 해가 중천에 걸려 있는데도 그는 한겨울밤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얀 숨을 내쉬고 있었다. 뼛골로 파고드는 냉기가 서서히 몸 전체로 퍼져 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그의 피는 얼어붙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 있던 희망의 촛불도 점차 꺼져 가고 있었다.
그들의 추적은 이제 바로 등 뒤에까지 임박해 있었다.
“이제 끝인가?”
그는 앞을 가로막은 숲을 뚫고 나갔다. 그리고 그는 두 무리의 사람들이 관도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두 무리 중 한 무리는 검은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인들 이었다.
그것을 본 곽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이 아리따운 여인들이 모조리 색마의 밥이 될 게 뻔했던 것이다.
여인들을 바라보며 곽현이 할 수 있는 일은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는 것뿐이었다.
“도망쳐! 도망치시오!”
그러나 다급한 나머지 발을 구르며 외치는 그의 경고에도 사람들은 아무도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선두에 서서 붉은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검은 옷만을 걸치고 있는데도 어딘가 화려하다는 인상을 주는 귀부인 하나가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우리에게 무엇을 피해 도망치라는 것이냐?”
목소리마저도 화려한 위엄이 있는 여인이었다.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공포에 질려 있는 게냐? 몹쓸 일을 당한 것 같은데 한번 말해보거라.”
형산일응 곽현은 웬 젊어 보이는 여인이 다짜고짜 반말을 하니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그녀들을 도와주려고 하는데, 도망가기는커녕 되레 초면부터 반말이라니? 어딜 봐도 그녀는 사십도 안 된 듯했다. 반면 그 자신은 이미 사십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 아닌가?
“난 형산일응 곽현이라는 사람이오. 뒤에서 지금 색마들이 쫓아오고 있소. 그러니 어서 이 자리를 피하시오! 나 혼자서는 여러분들을 지켜줄 수 없단 말이오!” 중인들 중 몇 명이 그의 이름을 듣고 깜짝 놀랐다. 형산십이검의 수좌인 형산일응의 명성은 강호상에서도 꽤나 유명했다.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형산일기 백무영 이었다. 도저히 그가 알던 대사형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몰골이었던 것이다. 그 준수하고 힘이 넘치던 사람은 어디 가고, 곧 죽을 것 같은 초췌한 몰골을 하고 있단 말인가? 하도 바뀌어 있어서 처음엔 쉽게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였다.
“색마? 멀쩡한 사내가 왜 그런 바퀴벌레 같은 색마들에게 쫓긴단 말이냐? 참 기이한 일이로구나.”
붉은 머리칼의 여인은 그렇게 말하더니, 자신의 옆에서 용두장을 짚고 서 있는 고아한 여인을 바라보았다. 뭔가 무언의 허락을 구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용두장의 여인은 끝을 알 수 없이 현현한 눈동자를 살짝 들어 먼 곳을 향하더니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붉은 머리칼의 여인 역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그래, 우리가 지금 바삐 길을 가는 중이긴 하지만 간단히 들어볼 시간은 되겠구나. 어찌 된 사정인지 짧게 얘기해 보려무나.”
곽현은 말이 통하지 않자 답답해졌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래도?! 다들 여러 명이서 칼 좀 들고 있다고 안심하는 거요? 놈들은 보통 색마들이 아니오! 우리 형산십이검조차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단 말이오!”
그러자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자신의 옆에서 투명한 물빛 머리칼을 틀어 올린 채 소리없이 서 있던 여인에게 물었다.
“형산십이검? 동생, 자네는 아는가? 하나는 형산일응이라는데.”
물빛 머리칼의 여인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맑은 목소리로 답했다.
“제가 기억하는 이름은 아닙니다만, 혜아는 기억할 듯합니다.”
“그래? 혜아야, 궁금하구나. 어떤 아이들이더냐?”
마치 ‘기억할만한 애들도 아니고, 몰라도 될걸요?’라는 말과 ‘그래? 그래도 궁금하잖아. 걔들은 누구야?”라는 말이 고상하게 변신한 대화 같았다.
혼자서라도 도망쳐 버릴지 말지 고심하고 있었던 형산일응 곽현은 그만 그 자리에서 딱딱하게 굳고 말았다.
‘형산십이검이 누군지 모른다고? 게, 게다가 아이라니? 누가 아이라는 건가? 설마 나?”
이미 불혹의 나이에 이르러 있던 그는, 눈앞에 서 있는 세 명의 미부인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많이 잡아도 삼십대 중후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녀들은, 복색도 그렇고 언행도 그렇고 사실 지위가 좀 높아 보이긴 했다. 하지만 형산일응이 누군가. 형 산파의 차기 장문인으로까지 거론되고 있는 이름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들은 그런 그를, 형산파의 차기 장문인 후보인 그를 들어본 적도 없는 아이’ 취급 하는 것이 아닌가. 그때, 어느새 자신의 위치로 돌아가 있던 갈효혜가 공손히 공수를 하며 나와 말했다.
“네, 둘째 어머니. 최근 들어 명성을 얻기 시작한 이들로, 형산일응이라면 그들 열두 명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지요. 그 외에 기억해 둘 만한 사항은 없습니다.” 좀처럼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이 없었던 곽현은, 다급한 상황마저 잊고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굴욕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렇구나. 아이야, 이제 네 차례다. 시간을 지체했으니 사정 설명은 됐고, 너를 쫓는다는 색마들의 이름이나 말해주고 가거라.”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이번엔 곽현을 재촉했다. 마치 길거리에서 우는 아이를 달래면서 왜 우냐고 묻고 가는 행인 같은 말투였다. 그는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왠지 그녀와 시선을 부딪치자 이상하게도 기가 죽어서 순순히 답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아마도 심신이 극한에 몰려서 지친 탓이리라.
“그들은, 색정광풍 초운과 채홍칠마라고 하오.”
끼어들기도 애매하고 도망치듯 가버리기도 애매해서 멀거니 지켜보고 있던 비류연 일행 중 몇몇은 그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형산십이검을 꺾었다기에 굉장히
유명한 색마인 줄 알았는데, 거의 처음 듣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들으신 적 있습니까, 노사님?”
남궁상이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염도에게 물었다.
“아니, 없다. 내가 아는 놈들 중에 최근 유명한 색마라면 색정광풍 한 놈뿐이다.”
“아, 오십 년 전 강호의 여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는 바로 그 색정광풍 말이군요. 듣자 하니 그자의 한빙장이 가공할 경지라 많은 무림인들이 그자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고 하더군요.”
“그래, 물론 직접 싸워본 적은 없다.”
무림공적으로 지정된 그자가 척살대에 의해 절벽 아래로 떨어졌을 때, 그는 아직 십대 중반이었던 것이다.
“그럼 신흥 색마 집단인 걸까요?”
“나도 모르지.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그럼 뭔가요?”
“어떻게든 티 안 나게 이 자리를 빠져나가야 된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
염도의 말은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남궁상은 염도 노사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편 갈효혜에게 ‘그런 별호를 지닌 자들에 대한 정보는 따로 없었습니다, 둘째 어머니. 아마 극히 최근에 본인들끼리 적당히 붙인 별호가 아닐까 합니다’라는 말 을 듣던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칠마라면 일곱일 테니, 또 한 놈을 더하면 모두 여덟이나 되는 것 아니냐? 아직도 이렇게 가까운 곳에 색마 따위가 득실득실 출몰하게 놔두다니, 그것도 하필 이럴 때에…….”
그 말에, 지금까지 무겁게 침묵을 지키고 있던 용두장의 현의부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확실히 최근 흑천맹은 일 처리가 너무 물러진 것 같구나.”
그녀는 심연(深淵)처럼 깊은 눈동자로 은은히 미간을 좁혔다. 어딘가 태산 같은 위엄과 기도가 흐르는 여인이었는데, 그녀가 살며시 미간을 찌푸리자 비류연 일행 은 대부분 무심결에 기묘한 압박감을 느끼며 흠칫 놀랐다. 염도나 빙검의 경고도 그렇고 행색이나 면면도 범상치가 않긴 했지만, 저 용두장을 든 현의부인이 처음으 로 입을 열어서 한 말이 흑천맹에 관련된 것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일행을 더욱 놀라게 한 건 그다음에 오가는 대화들이었다.
“네, 큰언니. 가서 재교육을 좀 시킬 필요가 있겠습니다.”
단호한 목소리로 화답한 붉은 머리 여인의 말이었다. 현의부인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더니, 조용히 서 있던 물빛 머리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시선 을 받은 여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예, 정리하겠습니다.”
염도와 빙검이 무의식중에 초립을 조금씩 더 눌러쓰는 가운데, 일행은 제각기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속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어쩐지 구출대로선 절대로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을 길거리에서 무더기로 마주치고 말았다는 느낌이었다.
보는 이들의 속마음이야 어떠하든, 붉은 머리칼의 여인은 아까부터 혼돈에 빠져 있던 곽현을 불렀다.
“좋다. 그럼 너는 하나만 더 말해주고 가거라. 어디 있느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곽현이 반문했다.
“네, 어디 있느냐니 무슨 말씀입니까?”
곽현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그렇게 무시를 당했던 그지만, 이미 이들의 대화를 들은 터라 반항은커녕 반말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그는 경황 중이라 방금 전에 정확히 무슨 대화가 오간 것인지는 파악이 되지 않았으나, 뭔가 엄청난 내용 같았다는 것은 파악이 되었던 것이다.
얼떨떨한 얼굴로 반문하는 그에게 여인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 색마 놈들 말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크흐흐흐, 이런 산중에서 비련의 미녀들을 열하나나 만나다니! 흐흐흐흐, 오늘 운수가 좋군!”
“킬킬킬킬킬, 누가 아니라나? 한동안 귀찮게 굴던 형산십이검도 처리했겠다, 오늘 저녁은 여인들의 신음과 함께 밤을 불태울 수 있겠어!”
사방에서 들려오는 듯 방향을 알 수 없는 목소리에 사람들의 미간이 동시에 찌푸려졌다. 목소리에는 질펀한 음심이 출렁거리고 있어서 듣는 이들에게 생리적인 혐 오감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떤 천박한….”
발끈한 마하령이 주위를 둘러보며 화내려는 것을 용천명이 급히 뜯어 말렸다. 그녀들이 여성이라는 것을 숨기고 있었는데, 목소리를 내면 자칫 이 위험한 상황에 서 발각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여자 무사들이 이렇게 많은 표행이 이 강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다음 순간,
허공에서 일곱 명의 괴한이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희한하게도 적(赤), 주(朱), 황(黃), 녹(綠), 청(靑), 남(藍), 자(紫)의 옷을 제각기 걸치고 있었다. 이들이 바로 최
근 호남성에서 연쇄납치강간사건을 일으킨 주범인 채홍칠마였다.
그들이 방금 펼친 수법은 나뭇가지를 박차고 그 반동으로 높이 뛰어올라 하늘 높은 곳에서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는 등천낙지(登天落地)의 상승경공이었다. 이 수 법은 마치 인간이 아무것도 없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 같은 효과를 내기 때문에, 저절로 두려움을 심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이 공포스런 광경을 본 곽현의 눈이 삽시간에 절망으로 물들어갈 때쯤, 공중에서 백삼을 입은 남자 하나가 그들을 따르듯 유유히 착지했다. 화려한 백옥 부채를 살 랑살랑 부치는 모습에는 자신감과 여유가 넘쳐흘렀다. 채홍칠마의 의형인 색정광풍 초운인 모양이었다.
이십대 중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는, 도저히 색마들을 이끌고 연쇄납치사건을 획책주도할 인물로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 이상으로 준수해서 마치 장 래가 촉망되는 강호의 후기지수처럼 보였다. 또한 나타나기도 전부터 추잡한 입담을 선보였던 채홍칠마와는 달리, 그는 그저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부채를 살랑일 뿐이었다.
“너, 뭐 하려는 거냐?”
급히 앞으로 튀어나가려는 모용휘의 손을 움켜잡으며 염도가 작지만 강한 목소리로 물었다. 바른 생활 청년 모용휘가 의협심에 불타는 눈으로 염도를 돌아보았다. “왜 막으십니까??
그 눈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몰라서 물으십니까? 당연히 저분들을 구하러 갑니다.”
확고한 어조로 모용휘가 대답했다.
“구하다니, 어느 쪽을?”
대답은 옆에 있던 남궁상이 대신했다.
“그야 당연히 저 염치없는 색마들에게 위협받고 있는 여인들이지요.”
비단 앞으로 나서려는 이는 모용휘뿐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흑도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해도, 아름다운 여인들이 색마들에게 겁탈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데 의분 (義奮)을 느끼지 않을 이가 어디 있겠는가. 다만 당장 달려나가지 않은 것은, 아까부터 구출대에게 전언을 보내 경고하던 염도와 빙검의 찜찜한 지시 때문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는 영령의 눈에도 의아한 것이 포착되었다. 이런 일에 가장 먼저 분노하며 달려나갈 것 같은 옥유경이, 화내기는커녕 의외로 뭔가 고민이 있는지 심 각한 표정으로 관전할 뿐이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그런 모습에 의혹은 느끼기는 장홍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옥유경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그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허락을!”
모용휘는 협의를 실천하기 위한 허가를 나직한 목소리로 염도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염도는 그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아서라, 그러다가 죽는 수가 있다.”
염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연히 허가가 떨어질 줄 알았던 모용휘는 그 의외의 대답에 그만 분노하고 말았다.
“갑자기 겁쟁이라도 되신 겁니까? 여인들이 색마들의 위협을 받는 상태에서 그냥 두 눈 뜨고 지켜보기만 하라는 겁니까? 전 저런 색마 따위 두렵지 않습니다!” 나직한 목소리긴 했지만, 평소 항상 지나칠 정도다 싶을 정도로 예의 바른 모용휘치고는 상당히 거친 말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그만큼 그가 흥분하고 있다 는 뜻이고, 그가 느끼는 의분이 크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무리 저 여인들이 흑도와 연관이 있어 보이기로서니, 그는 결코 이런 불의를 좌시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런 옳지 못하고 지저분한 자들을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그의 결벽증이 용납하지 않았다. 저런 쓰레기들은 이 세상을 위해서라도 깨끗이 청소해야만 했다.
모용휘의 말에 염도의 붉은 눈썹이 한순간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는 어찌 된 일인지 폭발하는 대신 억눌렀다.
자제라니. 오늘의 염도는 정말 평소와는 달랐다. 그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이듯 말했다. 모용휘마저 잘 안 들릴 정도의 목소리였다.
“이 멍청한 녀석아, 누가 저 쓰레기들한테 죽는다고 했느냐?”
“그, 그럼?”
그러자 염도는 아예 전음을 써가며 주변의 혈기방장한 청년들에게 경고했다.
“일단 간단히 말하겠다. 함부로 나섰다가는 저 아줌마들한테 다 죽는다, 멍청이들아!”
“…아, 아줌마??
다들 나이가 많아봐야 삼십대 중반을 넘을 것 같지 않은데, 염도의 입에서 아줌마라는 말이 나오다니……. 전음을 전해 들은 구출대의 청년들은 어안이 벙벙해졌 다.
염도의 말은 어딘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모용휘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다들 이해할 필요 없다. 그냥 각오 단단히 하고 지켜봐라. 그럼 알게 될 테니.”
이번에는 빙검의 전음이었다.
어딘지 걱정스러워 보이는 빙검에게 염도가 전음으로 물어왔다.
“그냥 확 말해주는 건 어때?”
“아서게. 그러다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누군가 실수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놀란 도둑이 장군 댁 사기그릇 깨는 격이지?”
“말 한번 되게 어렵게 하네.”
“쉽게 말해 모르는 게 약이라는 걸세.”
이 둘이 하나로 뜻을 모으는 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만, 오늘은 두 사람이 연달아 한마음 한뜻이 되는 날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경고에도 마음을 좀처럼 가라앉히지 못하는 것은 비단 모용휘 혼자만이 아니었다. 남궁상과 용천명 역시도 자신의 병장기에 손을 올리고 투기를 끌 어올리며 싸울 태세를 갖추고 앞으로 나섰다. 아니, 나서려 했다.
그들이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찰나, 그들의 발걸음을 막는 손이 있었다.
“너희는 그곳에 가만히 있거라.”
그것은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손이었다. 어떤 주름도 그 손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손 위에서 세월이 얼어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 발걸음을 막 은 그 손의 주인은 바로 선두에 서 있던 검은 옷의 대부인이었다.
그녀의 말에는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 실려 있기라도 하는지, 세 사람은 동시에 한 발짝도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삼십대 중반에서 후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부인이 그들을 아이 취급 하는데도 어떤 불쾌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의 말 안에 깃들어 있는 자연스러움 때문이었다.
“네? 하지만…….”
의외의 사태에 당황한 모용휘가 뭔가 우물쭈물 뭔가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검은 옷을 입은 대부인의 태도는 단호했다.
“불의를 두고 지나치지 않는 마음 씀씀이는 기억해 두겠다. 하지만 자신의 몸은 스스로 지키는 것이 바로 우리 가문의 법규다. 저들의 악의와 위협은 우리를 향하 고 있으니, 바쁘지만 이제 본녀는 마땅히 이 일을 처리하고 가야겠구나.”
마땅하긴 뭐가 마땅하단 말인가?
모용휘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어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다른 여인들 같았으면 공포와 두려움에 질린 목소리로 도움을 요청했을 상황이었다. 무공을 갖춘 여인의 경우라도, 남자들과 함께 있다가 색마 같은 추잡한 부류 의 악당들을 만나면 보통 직접 나서는 일은 드물었다. 두 눈을 멀뚱멀뚱 뜬 채 뭐 하냐고, 빨리빨리 구해주지 않고 뭐 하냐고 신경질을 부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뭐든 스스로 해결할 거면 무리를 지을 필요도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녀들은 오는 도움도 거절했다, 그것도 마치 아이들은 물러나라는 듯이.
처음부터 범상치 않은 내력을 갖춘 듯 보이긴 했지만, 참으로 기가 막힌 여인들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끝내 모용휘는 어째서 염도와 빙검이 그녀들을 두려워하 는지, 왜 나섰다간 죽는다고 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그녀들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