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을 올리다
-하얀 목록
“빨리빨리! 서둘러! 그분들은 어디까지 오셨나?”
“지금 삼백 장 밖까지 오셨습니다. 검마 초월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분은 이삼 일 뒤에나 올 게다! 아무튼, 그래서 속도는?”
“평상 걸음이십니다.”
“곧 도착하신다! 어서 무사들을 집결시켜라!”
“굼벵이를 삶아먹었냐, 빨리빨리 움직여라!”
“이백 장 밖이십니다.”
“개문(開門)! 정문을 활짝 열어라! 흑천무사들은 양옆으로 정렬!”
“백장 밖!”
“일동 차렷! 각 잡아라.”
“삼십 장 밖.”
“입 닫아라.”
“십장밖!”
“숨도 쉬지 마!”
남문으로부터 구천현녀를 비롯한 삼대낭랑과 신마팔선자의 도착 전갈을 받은 흑천맹의 내부는 비상이 걸린 듯 분주해졌다.
대체 이게 무슨 소란이란 말인가?
흑천맹의 젊은 무사들은 왜 이렇게 원로들이 창백해진 얼굴에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바짝 긴장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건드리면 그대로 베어버릴 듯 신경질적인 살기에 입도 뻥끗할 수 없었다.
“긴장해라! 정신 바짝 붙들어매! 안 그럼, 죽.는.다!”
그리고 마침내, 구천현녀를 비롯한 삼대낭랑과 신마팔선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야? 여자잖아??
몇몇 젊은 무사들이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젊은 흑천무사들은 자부심이 대단했기 때문에, 왜 원로들과 간부들이 겨우 여자들한테 벌벌 떠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 다.
“에계, 겨우 여자들 때문에 이런 소란을 일으킨…… 컥!’
그 순간, 맨 앞에 서 있던 구천현녀의 발이 흑천맹의 정문을 밟았다.
쿵!
그 순간, 엄청나게 농후한 무형의 살기가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크헉!”
젊은 흑천무사들 몇몇이 그 압력을 견뎌내지 못한 채 눈을 까뒤집고 입에 거품을 물며 픽픽 쓰러져 나갔다. 그녀들이 한 걸음씩 걸어 들어올 때마다 무사들의 어깨 를 짓누르는 압력이 천 근씩 더 늘어나는 것 같았다. 좀 전에 웃는 낯으로 중양표국 일행과 헤어진 여인들과 동일인이라곤 도저히 생각하기 힘든 분위기였다. “한심한 것들!”
썩은 통나무처럼 바닥에 쓰러져 가는 무사들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홍련선자 단혜가 혀를 차며 마뜩찮은 어조로 말했다.
“단련이 전혀 되어 있지 않구나! 그런 한심한 놈들은 필요없다! 쫓아내라!”
쿵!
다시 한 번 구천현녀가 발을 구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존재감과 압박감과 살기에 젊은 무사들은 창백해진 채 푸들푸들 몸을 떨어야 했다.
“여기서 쓰러지면 죽는다!’
선 채로 기절한 이들도 있지만, 누구도 그들을 비난하지 못했다.
신마군림보(神魔君臨步).
흑천맹에서 잔뼈가 굵은 원로들은 조금 전의 발 구르기에 무신마의 절기 중 하나인 신마군림보의 묘용이 배어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사람의 심신을 제압하는 군림보의 힘이.
몇몇 장로 급이라 칭해지는 사람들은 눈에 띄게 긴장했다. 이빨이 딱딱 부딪치는 걸 막기 위해 그들은 어금니를 피가 나도록 깨물어야 했다.
그들에게는 죄가 있었다.
자신들의 우두머리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가.
아직도 흉수를 잡지 못했다는 죄가.
그들의 마음을 읽은 것일까, 구천현녀 무화가 냉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죄는 나중에 묻겠다.”
그리고는 깊은 슬픔과 짙은 분노가 깊게 가라앉아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의 아들은…… 어디 있느냐?”
장내의 모두가 숨을 삼켰다.
갈중천의 관은 대전(大殿)에 자리하고 있었다.
대전의 서쪽 계단 앞에는 대나무에 매달린 깃발이 세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구천현녀 무화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서서 물끄러미 깃발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두 눈동 자에 무한한 어둠이 차올랐다.
이곳에 갈중천의 널(柩)이 모셔져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깃발, 명정(銘旌)이었다.
대전 전체가 거대한 사당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남쪽 창 밑엔 관이 놓여 있고, 그 앞엔 거목으로 깎은 목패가 세워져 있었다. 그 위에 세로로 적힌 글자를 읽어 내려간 무화의 눈동자가 격정과 슬 픔으로 크게 흔들렸다.
흑천맹주 갈중천 신위(神位).
결코 살아생전에 볼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아들의 위패가 그곳에 세워져 있었다.
구천현녀 일행을 알아본 백발의 제관이 서둘러 달려왔다. 그는 흑천맹 내에서 천기(天氣)를 읽는 ‘성운관(星運)’을 관장하고 있는 성독노군(星讀老君) 하성이었 다. 성운관은 천기를 읽고 맹주에게 조언을 하는 곳으로, 그는 그곳의 수장이었다. 전대 맹주인 무신마 갈중혁의 시대 때부터 자리하고 있던 이였다. 때문에 구천현 녀하고도 잘 아는 사이였다.
성독노군 하성넙죽 절하며 인사했다.
“오, 오셨습니까, 큰마님! 하성이 큰마님을 뵙습니다!”
노군(老君)이라는 말이 붙을 정도로 나이가 많은 무림계의 원로였지만, 구천현녀보다는 한참 배분이 아래였다.
“…….”
침묵이 돌아왔다.
한참이나 아무 말이 없었다. 오체투지하고 있던 하성은 살짝 시선을 들었다가 흠칫 몸을 굳히고 말았다.
세 명의 어머니는 위패 너머에 놓인 관을 바라본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관을 열어라.”
구천현녀가 이상하리만치 무미건조하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그 말을 거역할 수 없어 하성은 덜덜 떨리는 다리를 재촉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분부대로 관이 놓인 곳으로 다가가서는 조심스레 뚜껑을 열었다. 삼대낭랑과 신마팔선자들은 무거운 침묵과 함께 관 쪽으로 다가갔다.
관 안에는 흑천맹주 갈중천이 잠을 자듯 누워 있었다.
그를 본 신마팔선자들의 눈에 핏발이 서며 새빨갛게 변했다. 펑펑 오열하고 싶은 것을, 입술에 피가 날 정도로 깨물며 참아내는 듯했다.
부르르르.
성독노군 하성은 갑작스런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어야 했다.
“이것은…….”
하성은 자신의 떨리는 입에서 새어 나오는 하얀 입김을 보며 몸을 한차례 더 부르르 떨었다. 한겨울도 아닌데 어디선가 불어온 북풍한설에 온몸이 꽁꽁 얼어붙는 것 같았다.
이런 기현상을 겪는 이는 비단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대전 안에 도열해 있던 다른 무사들 역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몸을 오돌오돌 떨고 있었다. 그중 가장 심한 이는 하성으로, 그의 옷과 얼굴에는 새하얀 서리까지 일고 있었다.
짚이는 바가 있어 하성은 삼대낭랑 중 셋째 처인 빙련선자 사란을 살짝 바라보았다. 관을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지극히 무표정했지만, 북해의 심처에서 불어오 는 듯한 이 차가운 눈보라는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순간 하성의 눈앞이 하얘지며 그는 세차게 몰아치는 겨울의 눈보라 속에 내동댕이쳐졌다.
‘으아아아악! 뭐, 뭐지??
그는 끝없이 하얀 눈으로 뒤덮인 눈의 대지 위에 서 있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눈의 대지. 그 대지 위에 그는 조난당해 있었다.
이 눈과 얼음의 대지 위에 조난당한 것은 비단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대전의 무사들 대부분이 그와 함께 이 대지 위에 조난당해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경 악과 공포로 하성은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건 환상이야…….?
그러나 그 살과 뼈를 얼리는 냉엄한 한기는 대체 뭐란 말인가!
쩌저저적!
그 순간 그와 흑천무사들이 서 있던 얼음의 대지에 거대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대단절이 일어나듯 갈라진 공간으로 그들은 떨어졌다. 그 밑은 용암이 부글부글 끓 는 초열지옥이었다. 그들의 살과 뼈를 검은 재로 불태울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사방이 불꽃의 지옥이었다.
‘물…….?”
목이 말랐다. 폐가 불에 그슬리는 것 같았다. 목구멍이 불로 지져지는 듯했다. 여기저기서 불꽃에 고통받는 이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사, 살려줘……. 무……. 물을…….뜨…. 뜨거워…….”
으아아아아아아아악!
참을 수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사방에서 이글거리던 불꽃들이 일제히 꺼졌다.
하성은 몇 발자국이나 뒷걸음질치다가 바닥에 몸을 뒹굴었다.
“여, 여긴……..
꼴사납게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다음 사방을 둘러본 하성은 자신이 좀 전과 다름없이 대전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의 얼굴은 좀 전과 달리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대전 주위에 도열하고 있던 무사들 역시 얼굴에 핏기가 없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개중에 몇몇은 이미 혼절해서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이건 설마…….?”
성독노군 하성은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홍련선자 단혜와 빙련선자 사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와 대전에 있던 모든 무사들이 방금 전 환상에 먹혀 죽임을 당할 뻔했던 것이다.
‘환살(幻殺)…….?’
초극의 경지에 이른 최절정의 고수는 무형지기를 발해 사람을 상하게 할 수도 있는데 이것을 강호에서는 ‘의기상인(意氣傷人)’이라 부른다.
좀 전에 흑천맹의 정문에서 기절한 이들은 이 무형지기에 당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하성을 비롯한 대전의 무사들이 겪은 환상은 단순한 무형지기로 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그 이상의 것이었다.
‘환영살인殺人)!’
무형지기의 위력이 지나치게 뛰어나 그 무형지기가 일종의 환상을 두르게 된 경지다. 비록 보이는 것은 환상이라 해도, 그것은 곧 현실. 오히려 혹독한 현실에 뇌 가 그에 준하는 환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죽음 직전에 보는 주마등과 비슷한 효과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붙은 게 환살(幻!
환상과 함께 죽인다는 의미였다.
딱딱딱!
이 긴박한 순간에 뭐가 이리 시끄럽지?! 막 화를 내려던 하성은 그것이 자신의 이빨 위아래가 서로 부딪치며 내는 소리라는 것을 깨닫고는 숨을 삼켜야 했다. 하지만 그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딱딱딱딱딱딱딱딱딱!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비 오듯 식은땀을 흘리며 이빨을 부딪치고 있는 것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거의 흑천맹의 모든 무사들이 집단 합주라도 하듯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떨고 있었다.
그때였다.
물끄러미 관 안을 바라보고 있던 무화가, 하얀 옥수를 뻗어 갈중천의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는 것이 보였다.
그런 그녀에겐 생기라곤 전혀 없었다. 죽어 있는 것은 관 속의 갈중천이 아니라 그녀라고 하는 편이 나을 정도였다. 하성은 도리어 그 모습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무화의 입에서 한탄과도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일어나거라…… 일어나거라…….?”
잠든 갈중천을 흔들어 깨우기라도 하려는 것일까.
그녀의 손가락이 아래로 내려가더니, 심장 부근에서 멈추었다.
바로 나백천의 애검 ‘백뢰’가 심장을 뚫은 바로 그곳이었다.
스윽.
구천현녀의 떨리는 손가락이, 구멍이 뚫린 가슴 언저리를 훑었다. 비록 수의에 감싸인 몸이었지만, 그녀는 손가락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아들의 가슴에 뚫려 있 는, 백뢰가 남긴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이것…… 이것 때문이더냐……?”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고작 이 몹쓸 구멍 때문에…… 너는 영영 일어날 수 없다는 말이더냐……?”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과 동시에, 지금 그녀의 가슴은 다시금 갈가리 찢어지고 있었다. 억지로 억눌러 놓았던 비통함이, 죽음의 기운과 함께 다시 깨어나려 하고 있었다.
공기가 정지했다.
대전 여기저기에 놓여 있던 식물들이 갑자기 말라죽기 시작했다.
“쿨럭!”
“커헉!”
“컥.”
숨죽인 채 긴장하고 있던 젊은 무사들뿐 아니라, 나름 경력이 많은 중간 급 간부들까지도 피를 토하며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몸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한 충격에, 그만 순간적으로 각혈을 하며 쓰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쓰러진 그들의 몸에서 어디론가 생명이 빠 져나가고 있었다.
그녀들이 이 급한 길을 말을 타고 오지 않았던 것도, 모두 제어되지 않는 무화의 무형지기를 이기지 못하고 말들이 쓰러져 나갈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쿵! 쿵! 쿵!
아직까지 버티고 서 있던 원로들이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외쳤다.
“대부인! 저희들을 죽여주십시오.”
한 사람이 말하자 나머지가 일제 복창했다.
“저희들을 죽여주십시오!”
쿵! 쿵!쿵!쿵!
이마가 깨져 피가 튈 정도로 세게 고두하며 원로들이 외쳤다. 머리카락과 수염이 허연 장로들이 이마를 대전 바닥을 찧으며 오열했다. 그리고는 벌을 청했다. 주인을 지키지 못한 죄를 청했다.
“저희들은 죽이시되, 제발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대부인!”
이대로는 젊은 애들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게 분명했다.
“제발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대전의 무사들이 일제히 오체투지하며 동시에 외쳤다. 그러나 무럭무럭 일어나는 살기는 거두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어머님, 잠시 노여움을 거두시지요. 이대로는 젊은 애들이 다 죽겠습니다.”
갈효혜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러나, 사실 지금은 말을 하는 갈효혜 그녀 자신조차도 자신의 마음을 쉽게 제어하기 힘든 그런 상황이었다.
다다다다다다.
그때, 대전 문밖에서 다급한 종종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하얀 소복을 젊은 여인 한 명이 뛰어들어 왔다. 그 여인은 얼마나 다급했는지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바로 은설란이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은설란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고, 새하얀 볼에는 눈물 자국이 지워지지 않은 채 뚜렷이 남아 있었다.
은설란이 구천현녀를 보고는 반색하며 외쳤다.
“큰마님!”
은설란이 달려와 구천현녀의 품에 안겼다.
갑작스런 그녀의 등장에, 다시금 절망의 나락에 빠질 뻔하던 정신을 잠시 되찾은 구천현녀는 말없이 은설란을 안아주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앙!”
구천현녀의 품에서 은설란은 참지 못하고 억눌렀던 울음을 터뜨렸다. 구천현녀는 은설란의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그래, 울어라, 울거라. 네가 내 대신 울어주는구나. 아니다. 아니야. 울지 마라, 아가야. 한때 신마가의 아홉 번째가 되려 했던 아이가 이렇게 쉽게 눈물을 보여서 야 되겠느냐?”
그녀의 말대로 신마팔선자는 신마구선자가 될 수도 있었다. 은설란이 약혼자였던 갈효봉과 결혼만 했다면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연인을 잃었다.
상처는 길었고, 이제야 겨우 그 아픈 과거를 잊어가고 있던 중이었다.
아무도 받아들이지 못할 줄 알았던 그녀의 마음에 한 사람이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참혹한 비극이 또다시 발생했다.
또 한 사람의 아버지와 같았던 갈중천이 살해당한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정천맹주 나백천의 손에!
그녀는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목격자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흑천십비의 일인인 검마 초월이고, 나머지 한 사람이 마천각주인데 어떻게 그 말에 불신을 표명할 수 있겠는가.
앞으로 흑도와 백도는 두 번 다시 양립하지 못하리라.
흑천맹 전체가 분노와 증오로 들끓고 있었다. 피의 복수를 외치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모용휘와 적이 되었다.
바로 이 순간, 그 모용휘가 그녀가 철천지원수로 여기고 있는 나백천을 구출하기 위한 구출대가 되어 이곳에 왔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는 그녀였다. 만일 알았다면 다른 결정을 내렸을까?
그녀는 나백천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가 아무리 정천맹의 맹주라 해도 그는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었다. 감히 더러운 방법으로 흑도의 하늘을 암살하다니. 도 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가 그런 짓만 하지 않았어도…..
“너는 지아비가 될 사람과 아버님이 될 사람을 잃었고, 나는 아들과 손자를 다 잃고 말았구나. 하지만 아직 우리에겐 할 일이 남아 있느니라. 향을 올려야 한다, 향 을! 나는 그 일을 끝내기 전에는 결코 눈물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오열하던 은설란의 울음이 잦아들었다.
누구보다 울고 싶은 것은 구천현녀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마음속에는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자신의 마음속에 피눈물이 흐르게 한 대가를 그녀는 받아낼 작정이었다.
“이 피의 값은 반드시 내 손으로 받아낼 것이다. 반드시 그리할 것이니라…….”
구천현녀의 말은 나직했지만 무시무시한 살기가 깃들어 있었다. 은설란은 강철의 칼날처럼 단단하고 날카로운 그 의지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은설란은 알고 있었다.
이분은 한 번 내뱉은 말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라는 것을.
그 말을 현실로 만들 힘이 그녀 안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난 어떻게 해야 하지?”
그날, 갈효봉이 갑자기 광기에 들려 미쳐 날뛰었던 그 악몽의 밤 이후. 그녀는 그와 파혼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갈중천은 그녀를 친딸처럼 보살펴 주었다. 그리고 너무 상심하지 않도록 신경 써주었다. 아마 그분이 없었다면 자신은 그 슬픔과 충격을 견디지 못했으리라. 그녀에게 있어 갈중천은 또 한 명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 었다. 그런 분을….
은설란의 마음속에 결심이 섰다.
“큰마님, 저도 따라가게 해주세요!”
구천현녀를 올려다보며 은설란이 간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도 맹주님의, 저를 딸처럼 여겨주신 그분의 원수를 갚고 싶습니다! 그분의 딸로서!”
구천현녀는 한동안 각오 어린 은설란의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 역시 한때 신마가의 여인이 될 뻔했던 아이……. 원수를 갚을 자격은 충분하겠지.”
동생들과 딸들을 쳐다보자 그녀들 역시 같은 생각이라는 듯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충분했다.
“각오는 되어 있느냐?”
순간 은설란의 머릿속으로 한 사람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아무것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네가 아는 사람, 네가 좋아했던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그동안 네가 백도랑 쌓아온 모든 인연이 끊어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느냐?”
은설란의 뇌리 속으로 한 사람의 얼굴이 점점 또렷하게 떠올랐다. 언제나 깨끗한 백의가 잘 어울리는 그런 사람의 얼굴이. 그러나 은설란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 다.
그가 지금 이곳에 있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는 정천맹 소속도 아니고, 아직 천무학관의 학생 신분이니까. 이 일에 휘말릴 일은 없었다. 그래도 만난다 면…..
“상관없습니다, 큰마님. 전 이미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그 누군가의 얼굴을 떨쳐 내기라도 하듯 고개를 저은 다음, 은설란이 단호한 어조로 대답했다. 구천현녀는 하염없이 향이 타들어가고 있는 관을 바라보았다. 그리 고는 조용히 말했다.
“저 아이도 원수의 피를 보지 않고는, 그 뼈와 살이 타는 냄새를 맡지 않고는 편히 잠들 수 없을 게다. 좋다, 따라오너라.”
“감사합니다, 큰마님!”
은설란이 깊이 읍하며 말했다.
“말했던 것은 준비되었는가?”
무화의 물음에 옆에서 단혜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예, 큰언니. 말씀하신 대로 만들어두었습니다.”
무화가 고개를 끄덕이자, 단혜가 명령했다.
“깃발을 올리거라!”
“네, 어머님.”
단혜의 목소리를 들은 둘째 딸 효홍이 세로로 긴 깃발을 들어 올렸다. 하얀 주련처럼 긴 깃발의 맨 위쪽에는, 칼을 휘두른 듯 날카로운 글씨로 다음과 같은 글자 석 자가 적혀 있었다.
살생부(殺生簿).
그 밑에는 ‘살자지원(殺子之怨)’, 즉 아들을 살해당한 원한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이름들이 쭈욱 나열되어 있었다. 목록에 오른 대부분의 이름은 나 씨로 시작되고 있었다. 물론 맨 위에는 나백천이라는 이름이 똑똑히 적혀 있었 다.
“이 목록에 적힌 흉수와 연관된 모든 이들은 단 한 사람도 이 세상에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나씨 가문의 대를 끊어버리리라, 남김없이!”
무화를 대신한 단혜의 선언이 아니더라도, 그 깃발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여기에 적혀 있는 이름이 모두 지워지기 전까지 그녀들의 행보는 결코 멈추지 않으리라.
“가자.”
구천현녀가 딸들에게 고했다.
“예, 어머님.”
망설임없는 걸음으로 대전 밖을 나서는 구천현녀의 뒤로, 일제히 검은 흉복을 입은 열 명의 여인과 생백견(生白絹흰 명주)으로 만든 하얀 상복을 입은 여인이 뒤 따랐다.
대전 앞에 몰려 있던 사람들의 무리는 마치 바다가 갈라지듯 좌우로 갈라지면서 길을 만들었다.
“흑천불멸(不滅)!”
“신마강복(神魔降福)!”
“현녀출세(玄女出世)!”
정신을 되찾고 좌우로 도열한 무사들이 일제히 그녀들을 향해 검례를 올리며 최대한의 예(禮)와 함께 그녀들을 전송했다.
삼대낭랑과 신마팔선자의 길을 막는 간 큰 행동을 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을 열어라!”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흑천맹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마침내 지독한 한을 그 속에 품은 채, 강호에서 가장 무서운 여인들이 출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