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8권 23화 – 흑천십비(黑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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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8권 23화 – 흑천십비(黑碑)

흑천십비(黑碑)

-흑견(犬)이 지키는 성문을 돌파하라

“튀, 튀자고? 류연, 자네 그 말 진심인가?”

평소 결벽증이 있어 조금의 흐트러짐도 보이는 법이 없는 모용휘가 말을 더듬을 정도로 당황해하며 반문했다.

“물론, 진심이지.”

왼손에 쥐고 있던 비뢰도 한 자루를 슬그머니 소매 속으로 집어넣으며 비류연이 말했다.

“왜? 이유가 뭔가?”

“우선 전력 부족이야. 지금 우리들만으로 달려드는 것 위험해. 그리고 일단 살았잖아. 저 파란 아줌마 말로 미뤄봐서는 당분간 죽일 것 같지 않잖아. 아예 모르는 사이도 아닌 것 같고. 그리고 몰래 듣기론 객잔 안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비밀 통로를 통해 빠져나간 것 같고.”

“음, 확실히 저 신 용산객잔의 비밀 통로는 성벽 바깥까지 연결이 되어 있네. 발각이 두려워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었지만 말일세.”

장홍이 비류연이 말을 확인해 주었다.

“거봐. 그리고 일단 살아 있으면 다시 구출할 기회가 있어. 지금 달려들어서 우리들까지 잡히면 나중에 있는 기회마저 지금 차버리는 꼴이 된다고. 어때, 내 말 틀 렸어?”

비류연의 말은 지극히 냉정하고 이성적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성적인 판단은 감성의 환영을 받지 못한다.

“하지만…….”

모용휘는 납득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니, 판단이 틀리지 않지만 감정적으로 수긍할 수 없는 것이다.

“휘, 자네는 그럼 염도와 빙검 두 사람을 단신으로 찜 쪄먹는 저 괴물 같은 깜장 옷 아줌마한테 이길 수 있어? 저 아줌마랑 그 동생 아줌마 두 명만 막아준다면, 그 다음은 내가 어떻게 해볼게. 어때?”

모용휘도 명색이 무인이었다. 그것도 검성 모용정천에게 어릴 적부터 직접 단련받은 순종 중의 순종이라 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는 어느 정도 격이 다른 강함이란 걸, 그걸 지닌 사람이 어떤 느낌을 풍기는가 알고 있었다.

“이길 수 있겠어?”

대답하는 데 고민은 필요없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할아버지가 오셔도 저 부인을 막을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하겠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할아버지께서 진다는 건 결코 아닐세.”

자신의 말이 조금 마음에 걸렸는지 그가 즉시 부연했다.

“허참! 그 정도란 말인가…….”

장홍은 제멋대로 자란 턱수염을 긁적거리며 침음했다.

“설마 그 정도라니…… 정말 믿을 수가 없군.”

믿기지 않는 건 남궁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천무삼성(天武三聖)이 누군가.

흑백 양도, 대강남북의 모든 무림인들이 추앙하는 영웅 중의 영웅이 아닌가. 두 명의 신화를 제외하고는 무도의 첨단(尖端)에 서 있는 전설적인 인물들이 아닌가. 그중 한 사람인 검성이 와도 이길 수 있을지 장담을 하지 못할 정도라니, 아무리 친손자인 모용휘의 말이라지만 실감이 날 리가 없었다.

비류연은 입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룡룡 녀석, 저런 무시무시하고 괜히 젊어 보이는 괴물 같은 할머니가 있으면 미리 얘길 해줬어야지.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생겨 버렸잖아, 그것도 그림 자체를 완 전히 다시 그리지 않으면 안 되는.”

삼대낭랑과 신마팔선자의 등장은 비류연으로서도 예상 밖의 전개였다. 그것도 계획에 엄청나게 차질을 주는 변수였다.

“자, 그럼 튀는 거에 동의하는 거야, 휘?”

모용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부탁이 있네.”

“뭔데?”

“튀자는 말은 좀 듣기 그렇지 않나? 적어도 작전상 후퇴라고 해주게.”

여전히 겉보기에 신경을 많이 쓰는 모용휘였다. 하지만 이번의 그의 생각에는 장홍도 남궁상도 적극 동의하는 바였다.

“장 아저씨, 혹시 무창에 다른 숨겨진 비밀 통로 같은 건 없어요?”

“그렇게 입맛에 딱딱 맞고 수월무쌍하게 일이 풀리면 얼마나 좋겠나? 하지만 세상일이란 건 종종 그 반대로 일어나는 법이지.”

“한마디로 없다는 얘기네요. 짧게 하면 될 걸 길게 하기는. 그럼 여기서 제일 가까운 성문은 어디죠?”

“사람은 가끔 짧은 걸 길게 돌려서 말하고 싶은 법일세. 그리고 여기서 제일 가까운 성문이야 당연히 남문이지.”

“그럼 선택의 여지가 없네요, 남문으로 갈 수밖에.”

그 말에 장홍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거길 지키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알면서 그러나?”

“물론, 흑천십비 중 하나인 흑견이라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도 거기로 간단 말인가? 흑천맹 십대고수가 지키고 있을지 모를 곳으로?”

“일이 이렇게까지 된 걸 보면 다른 쪽 성문에도 이름깨나 있다는 무사들이 이미 이중삼중으로 지키고 있을걸요? 어차피 갇힌 거, 제일 가까운 곳으로 가는 게 낫 죠. 혹시 알아요? 비상소집되어서 다른 곳으로 불려갔을지.”

“그럼 얼마나 좋겠나만…….”

망설일 틈은 없었다. 더 이상 있다가는 들킬 염려가 있었다.

아니면 이미 들켰거나.’

비류연은 앞을 바라보며 힘차게 땅을 박찼다.

“이 사부가 구해줄 때까지 당분간 사이좋게 묶여 있으라고요.’

그리고는 신법을 전개해 남문을 향해 나는 듯이 달려갔다.

***

“이런, 무슨 일이든 그냥 수월하게 건너뛰는 게 없네. 난 거저먹는 것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데 말이야.”

비류연은 저 앞에 보이는 남문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는 웃으며 말했다.

“자넨 이런 상황에서 잘도 웃는구만.”

“이건 분명 장 아저씨의 말이 씨가 된 게 분명해.”

“허참. 그럼 이게 다 내 잘못이라는 건가?”

“그럼요. 그렇지 않으면 저 아저씨가 왜 저기 서 있겠어요?”

세상은 장홍의 말마따나 그렇게 재수 좋게 일이 이루어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굳게 닫힌 남문의 한가운데에서 검은 밧줄을 움켜쥔 채 서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흑천십비의 일좌, 최강의 병졸 흑견(黑犬)이었다.

“이래서 사람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니까.”

말 한번 잘못했다가 덤터기를 쓰게 된 장홍은 억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흰소리 그만 하고, 이제 어쩔 텐가?”

비류연, 장홍, 모용휘, 그리고 남궁상.

남문을 향해 신법을 전개해 달려가는 이들 중 속도를 늦추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럴 땐 당연히 정면돌파지, 다른 수가 없잖아요?”

남문 앞에서 자신의 독문무기인 묵색 밧줄 ‘흑오박룡삭(黑烏縛龍索)’을 들고 버티고 서 있던 흑견은 잠시 기가 막혔다.

자신을 발견하고도 세 명의 침입자가 전혀 발걸음을 늦출 생각이 없는 듯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대강남북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흑천십비를 너무 물로 보는 처사 였다. 조금 본때를 보여줄 필요가 있을 성싶었다.

“멈춰라아아아아아! 너희들을 모두 체포한다!”

흑견이 허리를 뒤로 젖히며 쓰으으으읍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그의 가슴이 풍선처럼 불룩하게 솟아올랐다.

“조심하게! ‘흑견후(黑犬吼)’일세!”

견문이 넓은 장홍이 급히 귀를 막으며 주의를 주었다. 흑견후는 그의 독문무공 중 하나로, 사자후 계열의 음공이었다. 흑견은 활처럼 뒤로 젖혔던 몸을 앞으로 숙 이며 들이마셨던 숨에 내공을 실어 외쳤다.

“크허어어어어어어엉!”

순간, 맹수의 포효 같은 외침이 밤하늘을 쩌렁쩌렁 울리며 비류연들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자 소리와 함께 돌풍이 일어나듯 흙먼지랑 자갈이 요란스럽게 소용돌이

치며 비류연들을 향해 쏘아져 갔다.

“미쳤어요? 겨우 개 짖는 소리에 멈추게!”

비류연은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은 채 오른손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그 순간 그의 우수에서 하얀 뇌광 같은 빛무리가 벼락 치듯 떨어졌다.

비뢰도(飛雷刀) 비전(秘傳) 오의(義)

벽력단절(霹靂斷切)의 장(章)

뇌절단음(雷切斷音)

촤아아아아아악!

내리쳐진 하얀 벼락이 공기의 포탄처럼 날아오는 흑견후와 부딪치자, 풀 먹인 천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갑자기 세상이 한순간 적막으로 변했다. 이 초식은 말 그대로 벼락이 천둥을 끊듯 소리의 파동을 끊는 묘용을 지닌 상승수법이었다.

“개는 사람 가는 길 막지 말고 저리 비켜요! 갈 길이 바쁘니까!”

웬 애송이가 자신이 자랑하는 흑견후를 정면으로 뚫고 달려들며 지르는 소리에 흑견의 얼굴이 황당함과 어이없음과 분노로 대변했다.

무창에서 흑천십비의 존재는 언제나 외경의 대상이었기에, 누구나 그에게 한 수 양보하는 것은 상식처럼 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가 언제 비류연처럼 어린놈에게 수모를 당해보았겠는가.

“이놈이 감히 누구한테 개라고 욕하는 것이냐!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놈이구나! 내 오늘 네놈을 포박하고, 그 배를 갈라 네놈의 간이 얼마나 부었는지 확인해 보마!”

그리고는 흑오박룡삭을 마구 요동치듯 휘둘렀다. 그러자 그의 손에 들린 검은 밧줄이 쭈욱 늘어나더니 비류연의 사방을 그물처럼 감싸며 공격해 들어왔다. 그러나 비류연에게는 어떤 동요의 기색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마에 떡하니 개라고 적어놓은 사람을 개라고 부르지 그럼 뭐라고 불러요?”

반성하기는커녕 입을 쉬지 않는다. 흑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열탕과 냉탕을 오고 갔다.

“이노오옴! 감히이이이! 날개라고 부를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뿐이다!”

대노한 흑견이 밧줄을 휘두르자 검은 밧줄들이 마치 살아 있는 뱀처럼 영활하게 움직이며 비류연의 사방을 그물질을 하듯 조여갔다. 이 기술은 그의 독문무공인 ‘박룡삼십육식(縛龍三十六式)’의 일초인 묵색포망(墨索捕網)이었다.

비류연의 입가에 가소롭다는 듯한 웃음이 맺혔다.

“흥, 이런 어설픈 그물에 누가 걸린다고 그래요? 코끼리도 다 빠져나가겠네.”

그의 무공인 비뢰도에 비하면 이런 그물은 성겨도 너무 성겼다.

비류연의 신형이 길게 주욱 늘어나는가 싶더니 흑오박룡삭의 그물코 사이를 쏘옥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한마디 했다.

“이건 뭐, 우중거 불점의 정도는 쓸 필요도 없네요.”

비류연이 검은 밧줄의 포위를 너무나 수월하게 빠져나가자 흑견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비류연을 길잡이 삼아 모용휘, 남궁상, 장홍이 차례대로 흑오박룡 삭의 공세를 빠져나갔다.

여전히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한 손을 들어 올린 비류연의 입가에 짓궂은 웃음이 맺혔다. 그는 자신감이 넘실거리는 활기찬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진짜 그물이란 건 이런 거예요!”

비뢰도(飛刀) 오의(義)

은망포천(銀網包天)의 장(章)

천라은망지세(天羅銀網之勢)

뇌망옥(獄)

들어올린 비류연의 다섯 손가락 사이로 은색의 가느다란 실 무리가 신기루처럼 번쩍였다.

“허억!”

다음 순간, 흑견은 자신이 거대한 감옥에 갇힌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감옥, 단 한 발자국만 움직여도 온몸이 난도질당할 것 같 은 스산한 살기. 그의 몸이 순간 굳었다. 흑천십비 중 하나가 긴장으로 인해 움직임을 멈춘 것이다.

그러나 그 스산하고 섬뜩한 살기는 펼쳐질 때만큼이나 사라지는 것도 빨랐다.

“어라?”

막 정신이 돌아온 흑견의 눈앞에 쇄도하고 있는 것. 그것은 비류연의 굳게 말아쥔 주먹이었다.

“역시 개한테 이게 직방이지!”

삼복구타권법(三伏狗打拳法) 오의(奧義)

돌아온 말복[回天末伏]

천지무견(天地無犬) 삼년구타(三年狗打)

비류연의 말아쥔 주먹에서 비장의 일식인 말복 천지무견의 무시무시한 연환권격이 폭사되어 나왔다. 그것도 통상 구타의 세 배 속도로!

다다다다다다다다다! 뚜쉬뚜쉬! 다다다다다다! 뚜뚜뚜쉬! 다다다다다다다다다! 다다! 닥닥! 닥닥!

흑견은 피를 뿌리며 오 장 밖으로 나가떨어졌다. 그리고는 죽었는지 기절했는지 일어나지 못했다. 손가락 끝이 푸들푸들 떨리고 있는 걸 보니 죽지는 않은 모양이 었다. 흑천맹 십대고수 중 한 명이 너무나 쉽게 당하자 남아 있던 무사들이 경악하며 우왕좌왕했다. 지휘자가 쓰러져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듯했다.

“이 틈일세! 어서 문을 열게!”

달리는 걸 멈추지 않으며 장홍이 외쳤다. 흑견의 생사 따위는 그들의 관심 사항이 아니었다.

“어떻게요? 개문 장치가 어디 있는데요?”

당황해서 주위를 둘러보는 남궁상을 향해 비류연이 소리쳤다.

“개문 장치는 무슨! 시간없어! 부숴!”

“부, 부수라니요? 불가능합니다, 대사형!”

거대한 공성기에 두들겨 맞아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된 게 바로 성문 아니던가!

“불가능은 무슨 얼어죽을! 검강은 익혀뒀다 어디 쓰게? 한 번으로 안 되면 세 번 치면 돼! 삼인연환이다! 궁상, 휘, 장 아저씨! 길을 열어!”

비류연의 지시에 따라 남궁상은 이미 본능적으로 뇌전검법의 절초인 뇌궁섬뢰(雷弓閃雷)를 쏘아 보내고 있었고, 장홍은 출처를 알 수 없는 특이한 잿빛 검강을 쏘 아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용휘가 은하유성검법의 절초인 은하만상(銀河滿上)을 펼쳤다.

세 절정고수의 검강이 한곳을 향해 쏘아졌다.

콰콰콰쾅!

제아무리 만(萬)의 병력을 막는다는 단단한 성문이라 해도 그것을 견디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검강의 경력(經力)을 견디지 못하고 성문이 천둥 같은 굉음을 내며 사방으로 부서졌다. 여기저기 흙먼지와 함께 불통이 튀자 사방에서 비명 소리가 들리며 병사들과 무사들이 흩어졌다. 흑견이 당한 이상 뻥 뚫린 성문을 지킬 만큼 담이 큰 자는 없는 듯했다.

“휘유! 이거, 이거! 무주공산이 따로 없네! 좋아! 튀자고!”

조금 거친 방법으로 열린 성문을 제일 먼저 통과하며 비류연이 기세 좋게 외쳤다.

“제발 작전상 후퇴라고 해주게, 류연!”

뒤에서 쫓아가며 모용휘가 한마디 부탁했다.

“좋아, 그럼 작전상 튀자!”

비류연이 다시 한 번 정정했다.

“그게 아니잖나, 류연!”

모용휘의 항의 어린 외침만을 여운처럼 남긴 채, 곧 네 사람의 그림자는 밤의 어둠 속에 묻혔다.

바람을 타고 몰려온 구름이 달을 가려 버리는 바람에 주변은 오직 암흑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비류연과 모용휘, 남궁상, 그리고 장홍, 이 네 사람은 무사히 밤의 어둠 속으로 그 모습을 감추었다.

***

잠시 후.

흩어졌던 무사들이 큰 대(大) 자로 뻗은 채 쓰러져 있는 흑견의 주위로 하나둘씩 몰려들었다. 그들의 오른쪽 가슴에는 하나같이 검은 개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중에서 유난히 얼굴이 하얀 삼십대 초반의 사내가 무리들의 앞으로 걸어나오더니, 쓰러진 흑견을 물끄러미 보며 한숨을 푹 내쉬곤 말했다.

“언제까지 그렇게 누워 계실 겁니까, 대장님? 그러다 주무시겠습니다.”

비류연의 일격에 당해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흑견이 눈을 빼꼼 뜨며 부대장 백구를 바라보고 물었다.

“갔냐?”

흑견대 부대장 백구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알면서 묻는 말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대장님도 아시잖습니까. 다들 갔습니다.”

그제야 흑견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어땠나, 내 연기? 죽여주지 않았냐? 진짜로 진 것 같지 않았어?”

으쓱으쓱 자랑하는 듯한 흑견의 말에 다시 한 번 백구가 한숨을 내쉬며 담담한 어조로 찬탄했다.

“네, 정말 멋진 패배였습니다. 저도 정말 대장님이 저런 애송이한테 당해서 쓰러지는가 싶었습니다.”

정말 불성실한 찬탄이 아닐 수 없었다.

“크하하하! 설마 그럴 리가 있겠나! 내가 그런 애송이한테 지다니 말도 안 되지!”

흑견이 양손을 허리에 가져다 댄 채 홍소를 터뜨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뼛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용솟음쳐 나오는 격통에 하마터면 허리를 꺾을 뻔했다.

‘커헉!’

흑견은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억누르며, 휘청거릴 뻔한 다리에 힘을 주었다. 흑천맹 십대고수라는 체면이 있지, 오랜만에 소집한 부하들 앞에서 어찌 추태를 보일 수 있겠는가.

“왜 그러십니까, 흑견 대장님? 안색이 별로 안 좋으십니다?”

의아한 표정으로 묻는 부대장 백구의 말에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 아닐세. 아무것도 아니야. 잠시 딴생각을 했을 뿐이네.”

흑견은 이를 악물고 아무 일도 없는 척했다. 그러나 등을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온몸이 요동치듯 욱신거리고 있었다.

‘고작 단순한 주먹질로 나의 흑살강기를 뚫었단 말인가?”

흑견은 저절로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가 비류연이 내지른 주먹질을 그대로 맞은 것은 자신하는 바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체득한 독문 호신강기인 ‘흑살호신강기’는 이미 절정에 이르러 어지 간한 권장(拳掌)에는 티끌만 한 타격도 입지 않았다. 도검으로도 그의 피부에 상처 하나 입힐 수 없을 정도였다. 그 최절정고수의 호신강기를 맨주먹으로 부수고 이 만한 충격을 입혔다는 사실에, 그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직도 오장육부에 충격이 머물러 있다니, 퇴물 병졸 생활이 너무 길었나…….’

흑견은 아무래도 몸을 좀 더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꼭 이럴 필요가 있었을까요? 오랫동안 내버려 두시던 저희들 흑견대까지 다 소환하시고.”

부대장 백구의 의견에 흑견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필요가 있고말고. 다른 사람도 아닌 셋째 아가씨의 명 아닌가. 십지선녀라고까지 불리는 아가씨일세. 그 아가씨의 지시에 틀림이 있을 리 없지. 모두 아가씨 의 계획대로 돌아가고 있는 걸세.”

“그러면 좋겠습니다만…….”

“자네는 훌륭한 사냥개가 어떤 사냥개인지 아나?”

“그거야 사냥감을 잘 잡는 개가 훌륭한 사냥개 아닙니까.”

“아닐세. 자넨 아직 멀었군. 주인을 사냥감이 있는 곳으로 잘 안내하는 개가 훌륭한 사냥개일세. 사냥감의 숨통을 끊는 건 사냥개의 역할이 아냐. 그건 주인의 역할 이지.”

그가 말하는 주인은 당연히 구천현녀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비류연 일행이 사라진 어둠 속을 보며 흑견이 중얼거렸다.

“자, 우릴 정천맹주라는 하얀 호랑이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 주실까.”

그의 입가에 먹이를 쫓는 맹수를 연상케 하는 미소가 맺혔다. 그는 곧 그의 뒤에 일사불란하게 집결한 부하들을 향해 외쳤다. “쫓아라, 흑견대! 주인을 사냥감이 있는 곳까지 안내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검은 사냥개 흑견대의 사명이자 역할이다!”

그 외침에 응답이라도 하듯 일제히 함성이 터져 나왔다.

“몰이를 시작한다!”

우두머리의 호령이 떨어지자 검은 사냥개들이 어둠을 가르며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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