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8권 3화 – 서찰을 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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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8권 3화 – 서찰을 전하다

서찰을 전하다

-여인천하

두두두두두두두두!

“멈추어라!”

거대한 장원의 정문을 지키고 있던 장신의 여무사 두 명이 저 멀리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한 필의 준마를 향해 소리쳤다. 오른쪽 여무사는 사람 팔뚝처럼 굵은 은창을 들고 있었고, 왼쪽 여무사는 관운장이나 쓸 법한 청룡언월도를 들고 서 있었는데, 두 여인의 체구는 구 척 장신 사내에 비해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또 한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 삼엄한 기세 또한 일반 고수의 범위를 벗어나 있었다.

그러나 숨이 끊어질 듯 헐떡이면서 달려오는 갈색 준마의 속도는 조금도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경고한다! 멈추어라! 다음에는 벤다!”

장신의 여무사 두 명이 이번에는 내공을 담아 소리쳤다. 도저히 정문을 지키는 일개 경비무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실력이었다. 하긴, 어느 세가에서 정문 에다가 여무사를 경비로 세우겠는가.

두두두두두두두두!

그러나 여전히 준마의 속도는 떨어지기는커녕 마지막 기력을 짜내기라도 하듯 더욱 빨라졌다.

“침입자를 멈춘다[止]!”

파앙!

오른쪽의 장신 여무사가 들고 있던 굵은 은창이 허공을 꿰뚫으며, 달려오는 준마를 향해 무찔러 갔다.

아직 준마까지의 거리가 삼 장 정도 남아 있었는데도, 은창으로부터 커다란 파공음과 함께 쏘아져 나간 무시무시한 창경(槍勁)이 준마의 몸통을 그대로 꿰뚫고 지 나갔다.

“침입자를 참斬)한다!”

왼쪽에 서 있던 여무사가 족히 백 근은 되어 보이는 청룡언월도를 부웅 하고 크게 휘둘렀다.

슈화아아아아앙!

새하얀 도기가 초승달 같은 궤적을 그리며 날아갔다.

서걱!

달려오던 준마의 가슴께에 커다란 구멍이 뻥 하고 뚫리며 피가 튀었다. 동시에 다리를 꺾으며 쓰러지던 말의 목이 그대로 날아갔다.

“아니!”

원래대로라면 말의 목과 함께 말을 탄 자도 허리가 두 동강 나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땅에 떨어진 것은 말의 목뿐이었다. 말에 탄 자는 이미 허공으로 몸을 날린 이 후였다.

“우리 신가문장(神家門將)의 첫 일격을 피하다니 제법이구나! 하지만 더는 가지 못한다.”

허공에 뜬 사내는 그녀들을 향해 무언가를 말하려 했으나,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모양인지 입만 뻐끔거렸다.

파앙! 부웅!

은창과 청룡언월도가 일제히 허공을 갈랐다.

챙! 따당!

사내는 뽑아 든 검으로 그녀들의 참격을 막아냄과 동시에, 교차한 창과 언월도를 발판 삼아 정문 안으로 몸을 날렸다.

안으로 몸을 날린 침입자는 오 장을 날아간 후, 낙법으로 몸을 두세 번 구른 다음 한쪽 무릎을 꿇어앉아 그대로 정지했다. 챠자자자자자자장!

갑자기 날아온 수십 개의 검날 끝이 사방에서 정확히 그의 숨통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검의 주인들은 모두 여인들이었다.

사내는 채 일어나지 못한 자세에서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대낮에 신마가에 침입하다니 배짱 한번 좋구나. 어디, 얼굴이나 보자!”

이 여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호리호리한 여인이 기다란 묵빛 장창을 어깨에 걸치고 검림 너머로 호기롭게 나타났다. 웬만한 사내들보다도 커다란 키와 탄탄한 몸매에, 이목구비도 아리땁다기보다는 늠름한 쪽에 가까운 여인이었다.

“일곱째 아가씨!”

“효효 아가씨!”

여인들이 갈라지면서 길을 내주었다.

장창을 걸친 여인은 짧은 소매에 치맛자락이 길게 트인 검은 무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성큼성큼 걸을 때마다 치마 사이로 엿보이는 탄력있는 허벅지와 시원스럽게 쭉 뻗은 늘씬한 다리가 건강미를 물씬 풍기며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녀는 바로 이 집의 일곱째 딸, 갈효효였다.

“이야아… 이거 말로만 듣던 그거, ‘침입자’ 아냐? 잡아놓고 기념 초상화라도 한번 떠야겠는데?”

효효는 구경이나 해보자는 듯 느긋하게 다가가 상대의 얼굴을 확인했다.

침입자는 먼 길을 달려온 듯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백발이 성성한 노령에 혈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리고 부상을 입었는지 가슴에 사선으로 붕대를 매고 있었다. 그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효효의 눈이 크게 떠졌다.

“검마(劍魔) 할아범?”

여인들의 검끝에 포위당한 사내는, 얼굴에 사선으로 그어진 두 개의 검상이 반쪽짜리 효(爻) 자처럼 가로질러져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흑천십비의 한 사람인 검마 초월이었다.

대체 흑천맹 십대고수의 한 사람인 그가 왜 이런 시간에 이런 곳에서 이런 몰골을 하고 있단 말인가?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았다기보다는, 밝힐 기력도 없을 정도로 숨차게 달려온 모양이었다. 저렇게 엄중한 상처를 입고도…….

그녀는 아직도 피가 배어 나오는 그 상처가 검상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대체 검마에게 검으로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자는 누구란 말인가?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 작했다.

“헉헉헉!”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검마 초월이 품속에서 단단히 봉인된 서신을 꺼내고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대부인께… 신마가에…… 급히 전할 전언이 있소이다!”

검마 초월 정도 되는 고수가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직접 가지고 와야 할 정도의 내용……. 효효는 짙은 눈썹을 날카롭게 곤두세웠다.

효효를 따라 외당(外堂)으로 간 검마는, 홍의의 비단옷을 걸친 신마가의 현숙한 둘째 딸 갈효홍에게 인계되어 안쪽으로 안내받았다. 내원(內院)을 지나 연무장 옆 으로 통하는 회랑을 빠져나온 검마는 수려한 정원을 등지고 있는 내당(堂) 한가운데에 자리한 고고한 안채를 묵묵히 올려다보았다.

현월전(玄月展).

이곳은 신마가를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있는 여주인이 기거하는 장소. 아무리 검마라 해도 저절로 고개가 숙여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이곳으로 안내된 그는 허리 를 숙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숨을 죽인 채 떨고 있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차분한 몸가짐으로 안내하는 효홍을 따라 검마는 눈을 꾹 감았다 뜨고는 현월전에 올랐다. 머뭇거리는 발걸음으로 들어가자 효홍과 효효를 비롯한 각양각색의 여 인들 십여 명이 양측으로 단정히 늘어선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가운데, 중앙에 놓인 커다란 자단목 의자에는 칠흑의 밤처럼 검은 옷을 걸친 여인이 앉아 있었다. “필부 초월이 대부인(大夫人)을 뵙습니다.”

그 여인을 보자마자 검마가 그 자리에서 무너지듯 큰절을 올리며 인사했다.

이 검은 옷의 여인이야말로 신마가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실질적인 주재자이자 안주인, 무신마 갈중혁의 첫 번째 처이기도 한 대부인 ‘무화(無化)’였다.

오체투지하듯 넙죽 엎드린 검마를, 깊이를 알 수 없는 깊고 검은 눈으로 물끄러미 쳐다보며 검은 옷의 여인이 물었다.

“전언이 있다고?”

“…예에.”

“그래, 무슨 소식인가?”

필히 길한 소식은 아닐 것임을 이미 짐작한 것일까. 무심하면서도 어쩐지 침중함이 깃든 것만 같은 목소리였다.

“그것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연 검마는 뒷말을 채 잇지 못했다.

저 여인은 지난 백 년 동안 무신마 갈중혁과 함께해 온 여인이며, 그 신화 속의 인물과 함께 흑천맹을 세운 여장부이기도 했다. 검마 초월 또한 한때 그녀의 밑에서 부하로 일했던 적이 있으며, 그 일을 지금까지도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여인에게 그가 어찌 ‘그것’을 쉽사리 전할 수 있단 말인가.

심상치 않은 검마의 태도에, 여인의 시선은 찬찬히 그를 훑다가 그의 등에 걸려 있는 하얀 꾸러미에 가서 얹혔다.

“가져와 보게.”

그 말에 가슴을 베이기라도 한 듯, 검마의 어깨가 한차례 부르르 떨렸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쿵!쿵! 쿵!

세 번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고두한 다음, 검마는 등에 지고 있던 하얀 꾸러미를 끌러 바닥에다 풀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곱게 개어진 한 벌의 상의 피로 검붉게 물든 옷이었다.

초월은 떨리는 손으로 피 묻은 옷을 머리까지 들어 올린 채, 무릎걸음으로 여인의 면전까지 다가간 다음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이, 이 옷을…….?”

목이 멘 듯 검마의 목소리가 잦아드는 순간, 전각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폐부를 찌를 듯 첨예한 적막이었다.

어떤 일에도 태산처럼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던 여인은 미미하게 떨리는 손으로 옷을 펼쳐 들었다.

펄럭, 소리와 함께 옷이 펼쳐졌다.

상의의 등과 앞가슴 쪽에는 날카로운 마름모꼴의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곳을 중심으로 피가 번져 나가 있었다.

“어찌 된 일이냐, 초월!”

여인의 입에서 벼락같은 일갈이 터져 나왔다. 검마는 전신을 두들기는 거대한 압력에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검은 옷의 여인을 올려다보는 검마의 두 눈에 눈 물이 고이더니 상처가 새겨진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맹주님께서. .! 살해당하셨습니다!”

“뭐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누가 감히 그 아이를 해할 수 있단 말인가!”

쾅!

그녀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오른손을 내려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자단목의 손잡이가 그대로 가루가 되어 부서져 나갔다.

검마 초월은 눈물을 비 오듯 흘리며 그녀 앞에 부복한 후 오열하며 외쳤다.

“증오스럽기 짝이 없는 흉수(兇手)는 바로 정천맹주 나백천! 그 악적이었습니다!”

휘청!

현의(衣)부인은 몸이 휘청거리자 의자 옆에 세워져 있던 용두장을 들어 바닥을 내리찍었다.

쿵!

현월전 전체를 울리는 충격음과 함께 바닥에 쩌저적 금이 가기 시작했다. 쓰러지던 그녀의 몸이 다시 균형을 되찾았다. 어느새 그녀의 발은 바닥에 한 치 이상 깊 게 박혀 있었다. 그녀의 몸은 충격으로 인해 석상처럼 굳은 채였다.

그때, 현의부인의 우측에서 이글거리는 눈으로 검마를 노려보고 있던 여인이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허튼소리! 그것이 어찌 가당키나 하단 말이냐?! 당장 똑바로, 사실대로 고하지 못할까?!”

타오르는 불꽃처럼 붉은 머리칼을 가진 신마가의 두 번째 안주인, 갈중혁의 두 번째 처인 홍련선자 단혜였다. 마치 당장에라도 검마를 불태워 버릴 듯 쏘아보는 눈 길에, 오열하던 검마는 바닥에서 더더욱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러자 현의부인의 좌측에 서 있던 여인이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대는 신마가를 혼란에 빠뜨린 채 울먹이기 위해 이곳에 왔는가? 검마 초월은 즉시 정확하게 사실을 고하여 이곳에 온 소임을 다하라.”

그녀는 깊은 물빛의 머리칼을 지닌 신마가의 세 번째 안주인, 즉 셋째 처인 사란이었다. 검마는 등골에 스며드는 그녀의 목소리에 정신이 바짝 들어 눈을 부릅떴 다.

“검마 초월이 고합니다! 그것은. 그것은…… 등에 검을 찌른 비겁한 암습이었습니다!”

***

검마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그는 자신이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만큼 비현실적이었다. 흑천맹의 한가운데에서, 그 최심부에서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검마의 머릿속에서는 덧없는 물음이 메아 리치고 있었다.

‘거짓말이겠지? 악몽이겠지?’

순간, 머리는 상황을 이해하기를 거부한다. 그만큼 그것은 현실과 동떨어진 광경이었다.

나백천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새하얀 검 한 자루가 붉은 피를 그 몸에 적신 채 들려 있었다.

무림인들 중에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한 백검. 검마 역시 한번 부딪쳐 본 적이 있던 바로 그 백검. 백도무림연합 정천맹의 맹주 진천뢰백검 나백천의 애검, 하얀 뇌 광 ‘백뢰(白雷)’. 틀림없이 바로 그 검이었다.

그 검날과 그의 손에 흥건히 묻어 있는 선홍색 피. 그 피의 본래 주인은 지금, 그가 늘 애용하던 집무실 책상에 엎어져 있다.

피바다 속에서.

이 모든 것을 돌아본 검마의 눈에서, 그제야 이 모든 일의 원흉인 나백천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동공을 휘감았다. 그러나 그보다도 먼저 움직인 사람은 따로 있었

다.

“이노오오오오옴!”

대갈일성을 터뜨리며 나백천을 향해 달려드는 이의 얼굴에는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바로 마천각주였다.

“감히 흑천맹주를 암살하다니! 그러고도 네가 정천맹의 맹주라고 할 수 있느냐, 나백천!”

마천각주가 일장을 내뻗어 나백천을 공격했다. 엄청난 경력이 그의 손바닥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쳤다.

“이, 이건 모함이오!”

치명적인 위력을 지닌 육장을 피해 물러서며 나백천이 다급히 항의했다. 하지만 그 변명이 먹힐 리 없다는 것은 나백천 본인도 잘 알고 있었으리라.

“닥쳐라! 정천맹의 맹주씩이나 되는 자가,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 비겁하게 변명이냐! 나백천, 추하기 짝이 없구나!”

마천각주는 망설임없이 두 번째 장을 내질렀다.

“믿어주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소!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오!”

마천각주의 장력을 피해내며 나백천이 다시금 외쳤다. 마천각주의 일장 일장에는 산을 허물 듯한 엄청난 경력이 소용돌이치고 있어서, 나백천조차 반격의 틈을 잡 기가 힘들었다.

“그따위 추한 변명은 염라전에 가서나 해라!”

그 순간, 마천각주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그 손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검강도 아니고 장력(掌)도 아닌 무형의 기운이 나백천을 향해 날아갔다. 그를 향해, 그를 베기 위해.

나백천은 아직도 붉은 피가 엉겨 붙어 있는 백뢰를 휘둘러 그 보이지 않는 공격을 튕겨내려 했다. 나백천의 백뢰는 그 무형의 궤도를 정확히 베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자기 그 무형의 칼날은 수십 개로 분리되었다. 수십 개로 불어난 무형의 칼날은 살기를 발산하며 나백천의 전신을 찢어발기기 위해 전방위에서 쏘아져 날아왔다. 나백천은 검의 궤도를 억지로 틀어 급히 검막을 펼쳐 냈지만, 그 공격은 방어를 뚫고 나백천의 앞가슴을 그대로 난도질했다.

“크윽!”

나백천의 방어를 그냥 공기처럼 통과하더니 마천각주의 공격이 그대로 그의 가슴에 상처를 입힌 것이다. 그것도 상당히 깊은 상처를 입힌 것임이 틀림없었다. 나 백천의 피가 허공중에 튀며 피바다로 떨어졌다.

“이건 모두 음모요! 누군가의 계획이란 말이오! 난 갈 맹주를 죽이지 않았소!”

신음을 삼키며 나백천이 외쳤다.

“대화를 합시다, 싸움이 아니라 소통을!”

마천각주와 검마는 일견 억울하다는 듯한 그의 말투에 격노했다.

“증거는 명백하다! 그런데도 아직도 변명이냐? 차라리 그냥 인정하고 덤벼라, 악적!”

그러자 나백천이 소리쳤다.

“어떻게 하지도 않은 일을 죄라 인정할 수 있겠소. 난 무죄요. 죄가 없단 말이오. 무엇보다 이유가 없지 않소?!”

신음을 억누르며 나백천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글쎄, 과연 그럴까?”

마천각주가 손가락을 들어 나백천의 가슴께를 가리켰다.

투욱! 쿵!

그다음 순간, 나백천의 베어진 앞섶 틈으로 피와 함께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지는 것을 검마는 보았다.

“저, 저것은!”

검마 초월의 입에서 경악성이 튀어나왔다.

나백천의 얼굴은 금세 사색이 되었다. 아차 하는 얼굴이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검마는 강호의 경험이 풍부했기 때문에 그 흉악한 물건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다.

“쇄혼독비(碎魂毒比)!”

저 시커먼 몸체와 그 위에 새겨진 두 마리 검은 전갈의 양각 문양은 틀림없이 저주스런 금단의 마병인 쇄혼독비가 분명했다. 그것은 결코 좋은 마음을 품은 자가 품 안에 숨기고 있을 법한 물건이 아니었다.

“이 쳐 죽일 놈! 잘도 우리 맹주님을!”

검마 초월의 마음속에 완전한 확신이 심어졌다. 나백천이, 정천맹주가 흑천맹주를 암살했다는 사실이.

“난 함정에 빠진 걸세, 초월! 내가 왜 갈 맹주를 암살하겠나? 왜?!”

그러나 쇄혼독비를 목도한 그에게 더 이상 의문은 남아 있지 않았다.

“닥쳐라, 나 가(家)야! 더 이상 더러운 변명 따위 듣지 않겠다! 당장 항복하고 그 죗값을 갚아라!”

검마는 이제 완전히 검을 빼 들며 가세했다. 무시무시한 쾌검이 나백천의 몸을 조각내기 위해 날아들었다.

마천각주의 공격에 흑천십비(黑天碑)의 하나인 검마까지 가세하자, 나백천은 금세 힘이 부치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무리 나백천이 라 해도 승산이 없어진다는 것은 자명한 일.

나백천은 이를 악물고 반격에 나섰다. 이제 말뿐인 변명 따위는 집어치우기로 한 것 같았다.

그는 분노에 의해 흔들리고 있는 검마의 검초를, 검극을 비틀어 흘려보낸 다음, 백뢰진천검법 중 역습식(逆襲式)인 ‘백뢰일섬(白雷一閃)’을 펼쳤다.

슈칵!

나백천의 검끝이 검마의 몸을 사선으로 훑고 지나가며 붉은 핏방울이 튀었다.

“큭!”

“미안하네, 초월! 하지만 여기서 죽을 수는 없네! 내 무죄를 밝히기 전에는!”

“헛소리 마라, 흉수!”

검마의 일갈에 나백천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외쳤다.

“백뢰격격(百雷擊擊)!”

백뢰가 수십 줄기의 검강을 뽑아내며, 검강의 화살이 마천각주와 검마를 휩쓸고 지나갔다.

막거나 피하는 것 외엔 다른 수가 없는 공격. 재차 나백천을 공격해 들어오던 마천각주와 검마는 할 수 없이 방어로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때, 쾅!

엄청난 충격이 자욱하게 일어나는 분진과 함께 집무실 안을 휩쓸고 지나갔다. 분진이 안개처럼 두 사람의 시야를 가리는 그 한순간, 나백천은 고속 순신(瞬身) ‘백 뢰섬보(白雷閃步)’를 사용해 집무실에서 몸을 빼냈다. 그러나…….

“천박한 수군. 이런 어린애 장난쯤이야!”

촤아아아아아악!

분진은 마천각주가 휘두른 일수에 검광의 장막이 천이 찢어지듯 그대로 찢겨져 나갔다.

나백천은 일단 집무실 밖으로 몸을 빼내는 데 성공해 운신의 폭이 좀 더 넓어졌으나, 좋아하기엔 너무 일렀다.

삐이이이이익!

분진을 빠져나온 즉시 검마는 당직용으로 가지고 있던 비상 호각을 불었다. 높은 피리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 마천각을 지키고 있던 마천각의 경비무사들이 한꺼번 에 몰려왔다. 상상 이상으로 빠른 집결.

흑천맹 역시 매일 놀고 있는 건 아니었다. 매일 장소를 바꿔가면서 비상소집 훈련을 정기적으로 두 번씩이나 행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이렇게 빠른 결집이 가능했 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백천에게 매우 안 좋게 작용했다.

“흑천의 무사들은 당장 ‘팔쇄진(八鎖陣)’을 펼쳐라!”

팔쇄진이란 여덟 겹으로 된 포위망을 뜻했다. 백여 명에 달하는 무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겹겹이 포위망을 펼쳤다.

“흑천의 무사들은 저 암살자를 당장 제압하라!”

검마가 나백천을 가리키며 외쳤다.

흉수 나백천의 세불리(勢不利)는 명확했다. 그러나 그는 정천맹의 맹주 직을 꿰찰 만큼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어둠을 가르는 뇌광 수십 줄기가 끊임없이 번쩍 거렸다. 하얀 뇌광이 어둠을 가를 때마다 흑천 무사들의 비명이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보고드립니다! 침입자가 팔쇄진을 뚫고 흑천맹의 성벽을 넘어 탈출했습니다.”

검마의 입에서 벼락같은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노오오오옴!”

붉은 피가 흐르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검마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뿌드득!

어찌나 세게 악물었는지 그의 입가를 타고 선혈이 흘러내렸다.

“당장 광역포위추살진인 ‘천라지망 무문진(天羅之網 無門陳)’을 펼쳐라!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된다! 크윽!”

격노한 탓에 기혈이 진탕되어 검상이 더욱 벌어졌다. 벌어진 상처로부터 흘러나온 피가 그의 상의를 붉게 물들여 갔다. 상승 내가검기에 의해 입은 검상이라서 충 격이 피육의 상처뿐만 아니라 오장육부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검마의 몸이 한차례 휘청거렸다.

“어서 치료를..”

철썩!

부축하려는 부하의 손을 세차게 뿌리치며 검마가 우뚝 섰다.

“닥쳐라! 그럴 시간 따위 없다! 내 자격으로 긴급 비상회의의 소집을 요청해라!”

부하를 뒤로한 채 걸어가며 검마가 분노와 증오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전쟁이다!”

***

콰앙!

석상처럼 굳어 있던 현의부인이 힘껏 내리찍은 용두장을 중심으로 현월전의 사방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들어서는 자들은 닿기만 해도 거죽이 터져 버릴 것처럼, 전각 안이 온통 고통스런 울림으로 떨리고 있었다.

지금은 식어버린 그 갈중천의 육신을 산고 끝에 직접 낳아 길렀던 현의부인은 물론이고, 살해당한 자의 몸 안에 흐르고 있던 것과 같은 피를 지닌 친혈육들, 그리 고 그를 애지중지 아껴왔던 신마가의 안주인들마저 자신들의 심장이 불에 달구어진 칼날에 꿰뚫리기라도 한 듯 몸을 떨고 있었다. 아니, 떨리고 있는 것은 몸이 아 니라 그녀들의 영혼이었다.

지이이이이잉!

현월전의 공기는 지금 이들이 일으키는 영혼의 경련에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것은…… 거짓이니라.”

마치 무딘 톱날에 조금씩 가슴을 썰리고 있기라도 하듯, 현의부인의 폐부 깊숙한 곳으로부터 고통에 겨운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이것은…… 꿈이니라!”

그것은 절규라고 해도 좋으리만치 고통스런 외침이었다. 여인은 당장에라도 검마의 몸통을 찢어버릴 듯 노려보며 외쳤다.

“어서 말하거라! 이것이 모두 거짓이라고! 그 아이는 아직 건재하다고! 어서!”

그러나 말없이 눈물을 흘리던 검마는 끝내 이마로 바닥을 찧으며 소리쳤다.

“저를. .! 죽여주십시오!”

쿵!

검마는 바닥이 울리도록 머리를 부딪쳤다. 그의 이마에는 대번에 붉게 피가 맺혔다.

“큰마님……!”

쿵!

그의 이마에서 살이 터져 나가며 바닥으로 피가 튀었다.

순간 넋을 잃은 듯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현의부인의 눈동자에 깊은 절망감이 어린 투명한 물막이 서서히 고이기 시작했다.

검마는 더더욱 거세게 이마를 땅에 부딪치며 외쳤다.

“주인을 지키지 못한 저를!”

쿵!

“죽여주십시오!”

왈칵!

하얗게 금이 갔던 현월전의 바닥이 한 줌의 선연한 핏덩이로 붉게 적셔졌다.

“가모님!”

“큰언니!”

비탄과 충격으로 기혈이 진탕되어 피를 토해낸 현의부인을 보고 여인들이 놀라 외쳤다. 가슴을 부여잡고 크게 몸을 휘청이던 그녀는 자신을 급히 부축하려던 여인 들에게 손을 들어 막았다.

“나는…… 나는, 단지…….”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으며, 피로 붉게 물든 이를 악물었다. 용두장을 잡은 그녀의 손엔 한껏 힘이 들어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다들…… 이곳에서…… 물러가거라…….”

“가모님!”

“큰마님!”

흐느낌과 일그러짐이 뒤섞인 얼굴로 여인들과 검마가 깊이 읍을 하고 뒷걸음쳐서 전각 밖으로 물러남과 동시에, 핏빛으로 충혈된 그녀의 눈에서 붉은 이슬처럼 부 풀어 올랐던 물막이 ‘투욱!’ 바닥을 적시고 있던 선혈 위로 떨어져 내렸다. 방금 전 그녀가 토해냈던 피웅덩이에 붉은 눈물방울이 파문을 일으켰다.

피웅덩이 위에서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붉은 파문과 함께, 그녀의 세상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그녀의 가슴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오장육부를 갈가리 찢어발기고 살을 한 점씩 한 점씩 잡아뜯는 수천, 수만의 나찰들에게 휩싸인 채 지옥의 불길에 던져진 듯 고통스러울 뿐이었다. 비탄과 슬픔으로 몸부림칠수록 알 수 없는 고통이 그녀의 영혼을 수만 근의 무게로 숨 막히게 짓눌렀다.

스으으으…..

그녀의 몸에서 뭉클뭉클한 검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검은 아지랑이에 닿은 전각 안의 화초들이 급작스럽게 말라가기 시작했다.

푸스스스스스.

현월전의 실내를 장식하고 있던 식물들이 불에 그슬린 듯 검게 말라죽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였다. 비통한 살기는 만 개의 창이 되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비탄에 빠진 그녀의 폭발과도 같은 절규에 전각의 기와들이 부르르 요동쳤다.

쿠르르르르르릉!

지진이라도 난 듯 전각 안이 뒤흔들렸다.

그녀의 가슴속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그녀의 몸과 마음을 집어삼키며 거세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통한의 화염에 휩싸여 비틀거리며 현월전 밖으로 걸어 나갔다. 갑갑한 전각 안에서는 그대로 압사당할 것 같아 참을 수가 없었다.

물러가라 했는데도 현월전 앞에서 오열하고 있는 여인들과 검마의 머리 위로 곱게 석양이 내려앉고 있었다.

곱디고운 석양이었다. 그녀의 아들은 그녀의 눈이 닿지도 않는 곳에서 몸에 구멍이 뚫려 차갑게 썩어가고 있을진대, 세상은 축제를 벌이듯 곱디고운 주홍빛으로 현월전의 후원과 호숫가를 물들이고 있었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보는 순간, 그녀의 검고 깊던 눈빛은 나락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쿵.쿵.쿵.

그녀가 후원 위로 비치는 석양을 향해 한 발짝 한 발짝 걸을 때마다, 발걸음이 진각처럼 땅을 뒤흔들었다. 슬픔의 무게가 덧얹어진 용두장이 땅을 찢었다. 터벅. 터벅. 터벅.

그녀는 현월전 옆에 만들어져 있던 호숫가 곁을 넋이 나간 듯 걸어갔다. 그러자 그녀가 지나간 호수에서 금빛의 잉어들이 둥둥 떠오르기 시작했다. 호수 안에는 어 느덧 죽음만이 가득했다.

그녀가 한 걸음 한 걸음을 내걸을 때마다 초목이 비명을 지르고 그녀가 밟은 풀들이 말라죽어 갔다.

그녀는 후문을 열어 젖힌 다음, 후원 뒤에 펼쳐져 있는 작은 숲으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갔다. 비통함에 휩싸여 걸어가는 그녀를 감히 잡아두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 었다. 장원 안에 있는 모든 여인들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 통곡하고 있었다.

장원 뒤에 펼쳐진 초록 숲. 그곳은 그녀가 두 동생과 함께 아이들을 키우며 무공을 가르치던 장소였다. 그녀의 아들 역시 이곳에서 그녀에게 무공과 지식을 배웠 다.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 돌멩이 하나에도 추억이 깃들어 있는 곳.

잠시 후, 단장을 끊는 듯한 비통한 울음소리가 그 안에서 울려 퍼졌다.

그 울음소리는 신마가를 비탄으로 뒤흔들었다.

그 울음소리를 듣고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모두들 바닥에 엎드린 채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

부상자들은 당장 의원으로 옮겨졌다.

마침 혁중이 있는 거점이 의원이니 그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천무학관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마천각에서 탈출하다 부상을 입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중 남궁산산과 현운, 노학을 포함한 몇 명은 자칫하면 생명까 지 위험할 정도였다. 강호란도를 떠나 더 멀리까지 가기에는 중환자가 너무 많았다.

물론 이곳 강호란도가 마천각의 영향권인 건 무척이나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감히 혁중 노인을 건드릴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름

잘 숨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이 섬에 내렸다는 증거는 이미 이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은 이후였다.

현재 가장 안전한 곳은 오히려 이곳 강호란도였다.

주위를 탐문하고 다니는 마천각의 밀정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마치 썰물처럼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이.

“이런 걸 보고 바로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는 거지.”

비류연이 의원 이층에서 창밖을 내다보곤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들은 저희들이 제정신이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남궁상이 말을 받았다.

“그 녀석들이 제정신이라면 강호란도로 도망갔을 리가 없다. 거기는 마천각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니까, 하고 말이지?”

“네, 아마 마천각 추적대들은 대부분 천무학관으로 향하는 길목을 따라 수색 범위를 넓히고 있는 중일 겁니다.”

자연 강호란도에 대한 감시는 오히려 평소보다 더 엷어졌다. 추적 범위를 넓히기 위해 인원을 더 차출한 것이다.

“게다가 현재 이곳에는 염도 노사님과 빙검 노사님, 그리고 아미신녀 진소령 여협과 점창제일검 유은성 대협이 계십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남궁상은 마음이 든든했다.

“그리고 ‘그’ 할아버지가 있지.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라 해도 그 할아버지를 건드리지는 못할걸?”

“대체 그분은 정체가 뭡니까?”

남궁상은 아직 그 할아버지란 분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염도, 빙검 노사와 진소령, 유은성 소노사가 그분을 지극히 공손하게 대하는 것을 보고 굉장한 신분의 소유자라는 것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아직 몰라도 돼. 알아서 별로 좋을 것도 없고.”

“왜요?”

전설을 함부로 건드릴 만한 배짱이 있는 놈들이 이곳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흑도무림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시시콜콜한 설명은 모두 생략되었다.

“알면 죽어.”

비류연의 입가에 무시무시한 미소가 맺혔다.

“주, 죽는다니요? 살인멸구라도 당하는 겁니까?”

그렇게까지 해서 감춰야 할 신분이란 말인가? 그 말에 비류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살인멸구라니, 무섭게시리. 아니, 심장마비로 죽어.”

“시, 심장마비요?”

“그래, 너무 놀라서.”

그걸로 비류연은 입을 닫았다. 더 묻지 말라는 뜻이었다. 궁금증이 계속해서 솟아올랐지만 남궁상은 일단 억누를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지금 중요한 것은 그들이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확신이었다.

“여차하면 이곳도 전쟁터로 변하겠지.”

지나가는 듯한 비류연의 한마디에 남궁상의 가슴속에 긴장이 내달렸다. 그렇다, 여기는 아직도 적진. 언제 싸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우선은 그런 가능성 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여차했을 때 맞서 싸울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일단 쉬어둬.”

아직 부상자들이 많았다. 희생자도 있었다.

남궁산산과 현운은 아직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한 팔을 잃은 노학도 마찬가지였다.

희생자도 한둘이 아니었다.

‘문혜…….?’

텅 비어버린 주작단의 한자리를 생각하자 남궁상은 다시 우울해졌다.

나에게 조금만 더 힘이 있었더라도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텐데..

그 생각이 금세 얼굴로 드러났는지, 그의 우울한 얼굴을 보고 비류연은 쯧쯧 혀를 찼다.

“멍청아, 자책하지 마. 지금은 그럴 여유도 없으니까. 일단 쉬어두라고. 궁상떠는 건 다음으로 미루고.”

“네…….”

대답은 하지만 힘이 없었다.

“그만 가봐. 가서 쉬어.”

남궁상이 인사를 한 다음 문을 닫고 나갔다.

긁적긁적.

비류연이 뒤통수를 긁으며 중얼거렸다.

“이거이거, 중증이군.”

남궁상이야 평소 궁상떠는 게 장기라지만, 문제는 주작단의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현재 완전히 좌절 상태에 있었다. 그만큼 동료의, 당문혜 의 죽음이 충격적이었으리라.

지금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휴식이 필요했다.

상처 입은 마음을 쉬게 하고 잃어버린 기력을 다시 채울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휴식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백섬은 돌아오지 않았다.

예청은 하루에 네다섯 번쯤 백섬이 날아갔던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시리도록 푸르기만 할 뿐, 그녀가 기다리는 소식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날이 가면 날이 갈수록,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다시 해가 뜨기가 반복되면 반복될수록 불안감은 더욱더 커졌다.

그러나 애써 예청은 그 불안을 억눌렀다.

모든 일이 잘 풀렸다. 백섬이 돌아오지 않는 것은 뭔가 착오가 있는 것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불안감이 누그러들기는커녕 점점 더 커져만 가고 있었다.

‘제발…… 여보, 무사히…….’

“큰일 났습니다, 큰일!”

수신호법 남궁진이 의원의 문을 박차며 들어왔다.

안에서는 칠상흔이 잠든 채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그는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해독은 모두 된 것 같으나, 몸이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계속 잠든 상 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했다. 혼절 상태가 아니라 단순히 잠을 자고 있는 것이니 안심해도 좋다는 것이다.

그 옆의 침상에는 남궁산산과 현운이 누워 있었고, 그 옆의 침상에는 피 묻은 붕대만이 하얀 침상 위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어제까지 노학이 누워 있던 자리였 다.

“여기는 의원입니다, 남궁 호법. 정숙해야 할 곳이죠. 좀 진정하세요.”

예청이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남궁진은 도저히 진정할 수 없는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그럴 수가 없습니다, 마님!”

그는 도저히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예청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한 가문의 가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렇게 자신을 잊을 정도로 당황하다니, 좀처럼 없는 일이다.

남궁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 누군가가 있는지 없는지 급히 살피는 듯했다.

“그분께서는?”

예청은 그분이 혁중 노인을 가리킨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남궁진은 혁중 노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면 하는 모양이었다.

“왜죠? 그분께서 들어서는 안 되는 얘기이기라도 하나요?”

“그게…….”

“진정하고 말씀해 보세요, 남궁 호법.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거죠?”

남궁진은 마른침을 삼킨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정하고 들으셔야 합니다.”

“걱정 마세요. 전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으니까요.”

예청이 대답했다.

“일단 앉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오늘 따라 대체 왜 이러지? 항상 진중하던 남궁세가의 가주다운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전 이대로 괜찮습니다.”

예청이 고집을 피웠다. 남궁진은 할 수 없는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흑천명이 정천맹에 대해 전면전쟁을 선포했습니다.”

예청의 몸이 굳었다,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굳은 것은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막 문을 열고 들어온 염도와 빙검, 그리고 구천학 역시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었다.

“정사대전이라고……? 설마 그럴 리가…….”

세 사람은 서로를 마주본 다음 침묵했다. 세 사람은 서로의 굳은 얼굴을 보고 자신이 조금 전 들은 이야기가 환청이 아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보시게, 남궁 호법, 그런 질 나쁜 농담은 철회해 줬으면 하는 바람이네만?”

빙검이 인상을 찌푸린 채 남궁진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오랫동안 대무사부로서 천무학관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에 남궁진하고도 안면이 있었다. 그러나 남궁 진은 어둡게 그늘진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빙검의 염원에 보답해 줄 수 없어 미안하다는 듯이.

“대체 이유가 뭐죠? 이렇게 갑작스럽게 전쟁이라니? 말도 안 돼요.”

예청의 의문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원래 전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수차례에 걸친 자잘한 충돌이 반복되면서, 쌍방의 불만이 고조되기 시작한 악의가 전의(戰意)로 축적되고, 그것 이 또다시 어느 임계점에 달해 폭발할 때 발생한다. 특히 국소전이 아닌 전면전쟁이란 대단히 정치적인 행위였다. 거기에 휘말리는 백성에게는 끔찍한 악몽이자 지 옥이지만, 윗선에서 보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종의 정치적인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백성들이 가장 먼저 죽고, 맨 위에 있는 자는 맨 나중에 죽는 것이므로.

그렇다 해도 어쨌든 전쟁이 나면 백성들이야 이기든 지든 소모품처럼 많이들 죽어나가게 되고, 양측 다 엄청난 출혈을 감수해야만 한다.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막 대한 이득이 걸려 있지 않으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아무런 수순도 밟지 않고 갑작스럽게 전면전쟁이라니? 아무런 명분도 없이?

“대체 명분이 뭐죠?”

명분없는 전쟁은 불가능하다.

사소한 일대일 비무에도 명분이 필요한데, 하물며 전쟁에서야 두말할 게 무엇이 있겠는가.

대전쟁에 필요한 것은 대의명분(大義名分).

그것을 먼저 손에 쥔 자에게 전쟁의 개막을 선언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원래 제각각이라 쉽게 모이지 않는다. 옳은 것보다 이익을 더 따지는 흑도이기에 그 정도는 더욱더 심하다. 때문에 더욱더 대의명분이 필 요한 것이다. 상대를 칠 수 있는 대의명분. 그 대의명분만이, 흩어져 있는 흑도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흑도와 백도는 천겁령의 발호를 억제한다는 대의명분 아래 어찌 되었든 겉으로는 평화체제를 구축해 놓고 있었다. 공동의 적이 완전히 사멸되 지 않는 이상, 서로 힘을 합쳐 그 힘을 견제한다는 명목으로 지난 백 년을 버텨왔던 것이다.

“대체 어떤 ‘명분’으로 제이(第二)의 천겁혈세를 방지한다는 ‘대의명분’을 갈아엎는다는 것이죠? 그 명분이 약하다면 아무리 흑천맹의 결정이라 해도 씨알도 안 먹힐 텐데?”

남궁진이 침중한 얼굴로 청천벽력 같은 말을 내뱉었다.

“흑천맹주 갈중천님이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예청의 눈이 부릅떠졌다. 간신히 냉정을 유지하고 있던 표정이 깨어져 나갔다. 그녀의 몸이 휘청거렸다.

“갈 오라버니가? 대체 누가 감히 그런 무도한 짓을!”

남궁진이 말하기 너무나 송구스럽다는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들의 주장에 의하면…… 나백천맹주님의 소행이라고 합니다.”

창백해진 예청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백섬이 날아갔지 않은가. 그들의 딸이 구출되었다는 사실을, 그 소식을 써 보낸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 자신이었다. 그녀가 직접 그 기쁜 사실을 써서 남편에 게 날려보내지 않았던가.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

설혹 딸이 여전히 잡혀 있다 해도, 그녀의 남편은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못 됐다. 딸아이 한 명을 위해 강호 전체를 전화(戰)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는 양반이 못 되었다. 때문에 이를 악물고 그녀 역시 각오하고 있었던 것이다.

최후의 최후 순간에 선택지가 주어졌을 때의 선택을 대비한 각오를.

그런데…….

“그럴 리가 없어요. 그럴 리가.”

예청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털썩.

주저앉고 싶은 것을 참으며 간신히 의자에 쓰러지듯 걸터앉았다.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없어.

고개를 가로젓고 또 가로저었다.

그녀의 하늘이 통째로 무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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