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8권 7화 – 어머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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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8권 7화 – 어머니들

어머니들

– 현녀(女) 출세(出世)

무화는 한쪽 손잡이가 부러진 자단목 의자에 앉은 채 미동도 없이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이 언제 이곳으로 옮겨온 것인지, 한동안 기억이 잘 나지 않았 다.

그러다 단편적으로 끊어져 있던 기억들이 하나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비탄에 잠겨 몸부림치는 그녀에게서 죽음의 기(氣)가 흘러나와 초록 숲이 시들어가고 있었다. 어둠과 함께 장대비가 찾아왔는데도 숲은 검게 타들어가기만 했다. 그 숲 한가운데에서 그녀는 비를 흠뻑 맞으며, 끝없이 검고 차갑고 정적으로 가득 찬 절망의 나락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의 한쪽 어깨에 무언가가 와 닿는 것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타오르는 불꽃 하나가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었다. 눈을 한번 깜빡여 보니, 그것은 오열하는 여인의 붉은 머리카락이 되어 있었다. 그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 하나가 오열하면서 그녀의 어깨를 흔들다가 감싸 안는 것이 보였다. 넋을 잃은 채로 초목을 검게 태우던 무 화의 살기에도 개의치 않는 듯, 여인은 두 팔로 그녀를 꼬옥 안으며 몸을 떨었다. 아니, 떠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열심히 외치느라 몸이 울리고 있었다.

무화는 무의식중에 물끄러미 그 여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언…… 큰…… 들리…… 언니……..

분절된 입 모양을 멍하니 되뇌는 순간, 그것은 오열로 변하여 다가왔다.

.언니……! 큰언니……! 들리십니까! 제발…… 제발……!”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갑자기, 미칠 듯한 빗소리가 여인의 울부짖음에 뒤섞여 그녀의 고막을 터뜨릴 듯이 가득 채웠다. 차가운 오한이 그녀의 몸을 떨게 만들고, 거칠고 질척해진 옷자락 이 진흙과 뒤섞여 그녀를 불쾌하게 침범해 왔다.

“둘째…… 동생…….”

그녀가 빗속에서도 메말라 버린 입술을 달싹거리자, 그녀를 껴안고 울부짖던 붉은 머리칼의 여인이 숨을 들이켜며 외쳤다.

“이제…… 이제는 들리시는 겝니까!”

갈효홍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깊게 타오르는 붉은색을 몸에 두른 여인, 평소엔 그토록 활력이 넘치고 정열적이며 웃음이 끊이지 않던 둘째 동생 단혜가 눈물을 하 염없이 흘리며 그녀를 향해 서럽게 울부짖고 있었다.

“혼자서. .! 혼자서 나락으로 떨어지시면 우린 어떡해야 한단 말입니까, 큰언니! 저는…… 저는 겁이 납니다. .! 그 아이를 잃은 것으로도 이토록 견딜 수가 없는데……! 큰언니마저 잃게 된다면……! 우린…… 남겨지는 우리는…… 그 고통을 껴안고 어찌 살라는 말입니까, 큰언니!”

갑작스레 몸을 찔러온 오한 때문일까, 아니면 비통한 둘째의 외침 때문일까.

그녀, 무화는 경련을 일으키듯 부들부들 떨었다.

“그만…… 나를…… 놓아다오……. 그런 끔찍한 말일랑. 나는 그 아이를…… 잃지 않았다, 잃지 않았어. ……! 나는 남겨진 어미 같은 것이 아니니라……! 그 아이를.. 그 아이를 나는 떠나보내지 않았느니라……!”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핏덩이처럼 왈칵왈칵, 그녀는 비탄을 토해냈다. 이미 아이를 잃었다는 것을, 이미 남겨진 어미가 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렇지 않다고 온 힘을 다해 외치면서.

하지만 단혜는 그런 그녀를 결코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힘껏 그녀를 붙잡고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다.

“그래요, 그래! 우리도 떠나보내지 않겠습니다! 그 아이는 큰언니의 몸으로부터 세상에 나왔지만……! 우리들의 손으로 함께 기른 아이지 않습니까……!! 우리 들의 살점을 떼어내 먹인다 해도 아까울 것이 없는 아들이지 않았습니까!! 그 아이의 어미는.. 큰언니 하나만이 아닙니다! 그러니…… 가려면 같이 갑시 다……! 제발…… 제게 놓아달라고만은 하지 마십시오, 큰언니!”

무화는 그 뜨거운 외침에 눈앞이 아득해지면서, 달궈진 쇳덩이 같은 것이 뒤틀린 폐부로부터 올라오려는 것을 느꼈다.

그때, 쏟아지는 빗줄기 같은 무엇인가가 그녀의 왼손을 사로잡았다. 그러자 한줄기 청량함이 그녀의 손을 타고 전해져 오면서, 비탄의 업화에 타오르다 못해 폭발 하려던 그녀의 기혈을 서서히 진정시켜 주었다.

그녀는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깊고 투명한 물빛의 머리카락을 지닌 우아한 여인이 그녀의 손을 잡은 채 어둡고도 맑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셋째 동생 사란의 얼굴에는 한없는 적막 감과 아득함만이 어려 있어서, 그녀의 뺨 위를 흐르고 있는 것이 눈물인지 빗물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었다.

사란은 끊이지 않도록 청량한 기운을 무화에게 전달하면서, 고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마음을 태우는 심화(心火)를 가라앉히고 정신을 집중하십시오. 섣불리 기를 낭비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앞날을 생각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거칠게 귓가를 때리는 빗소리와 단혜의 흐느낌 속에서도 사란의 말은 또렷하게 들려와 박혔다. 머리를 씻어 내리는 것 같은 그 목소

리에 정신이 든 무화는, 시야가 또다시 투명한 물막으로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앞날. 앞날이라. 셋째 동생 사란아……. 말해보아라. 그래, 나의 앞날엔 무엇이 있을 것 같으냐? 비통이냐? 한탄이냐? 그도 아니면 깨어나지 못할 악몽 일 것이냐? 나는 생각할 수가 없다! 차마 앞날을 바라볼 수가 없구나!”

서럽게 오열하는 무화에게 사란은 한층 더 맑은 기운을 보내오며 말했다.

“셋째 동생 사란도 그럼 묻겠습니다. 다들 슬픔에 눈이 가려져 이미 망각했단 말입니까? 비탄에 빠지기 전에 해야 할 일을, 그 아이에게 마지막으로 주어야 할 우 리의 선물을 잊어버린 채, 그저 외면하고 있을 것입니까?”

흐느끼던 단혜와 무화는 그 말에,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사란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선물이라니……. 현명한 사란아, 말해다오! 우리가 그 아이에게 무엇을 줄 수 있단 말이냐?”

혼란스러워하는 무화의 물음에 사란은 한없이 깊고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것은 그 아이를 해한 흉수(手)의 목을 베어 그 두개골로 만들 향로와 그 몸을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 태울 향불입니다.”

***

검은 옷의 여인, 무화는 조용히 현월전 안을 둘러보았다.

전각 위로 뚫린 작은 창에서 새어든 새벽녘의 여명이, 텅 빈 현월전 곳곳을 어느덧 파르스름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오늘도 해는 떠오를 모양이었다.

그녀는 문득 웃고 싶어졌다. 아들을 위한 ‘향불을 직접 태우기 전에는 더 이상 눈물을 흘릴 수가 없었기에, 속으로부터 넘쳐흐르는 뭔가를 토해내려면 이젠 웃기 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웃음이란 건 언제부터 이렇듯 어려운 것이었던가.

그녀는 결국 현월전의 돌바닥이 아침햇살을 받아 뿌옇게 흰 빛을 발할 때까지도 웃음을 지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쓸데없는 노력을 포기하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두 눈을 꼭 감았다.

간밤의 폭포수 같은 빗물 속에 슬픔이 씻겨 나간 것일까?

다시금 눈을 떴을 때, 그녀의 검고 깊은 눈동자는 어느덧 현현(玄玄)한 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마침내 옆에 놓여 있던 용두장을 집어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현월전 밖을 향해 걸어나갔다.

전각 밖에는 이미 두 명의 동생과 여덟 명의 아이가 무장을 갖추고 여장을 꾸린 채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흉사(凶事)가 있었음을 나타내는 검은 흉복을 입고 있었다. 아직은 ‘그’를 떠나보낼 수 없다고 다짐이라도 한 듯, 하얀 상복을 입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두에 서 있던 두 여인 중 타오르는 불꽃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여인이 정식 예를 취하며 말했다.

“신마가(神魔家)의 둘째 처 단혜가, 셋째 처사란(瀉瀾)과 함께 서서 여덟 명의 아이를 이끌고 가모(家母)님의 명을 기다립니다.”

단혜의 눈동자 속에선 분노와 의지가 부딪치며 불꽃처럼 작렬했다.

무화가 따로 명령을 내릴 필요조차 없었다. 한 남자를 같이 모시며 수십 년 동안 동고동락해 온 동생들이었다.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이 그녀들은 모든 것을 갖추어 놓은 채였다.

가문에 신경 쓰는 일이 없이 그 행적이 신비하고 표홀(飄忽)했던 무신마 갈중혁의 성향 때문에, 가문에 대한 영향력은 남자보다도 오히려 여자들이 더 압도적인 곳, 흑천맹주 갈중천조차도 기를 제대로 펴지 못하게 했던 여걸(傑)들이 모인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그녀들은 기다리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다. 기다리기보다는 스스로 나서는 것이 바로 그녀들의 역할. 후원에 모여 있는 식솔들을 일별한 후 무화의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이 열렸다.

“피는 피로 씻는다. 그 상대가 누구라 해도, 비록 상대가 정천맹의 맹주가 아니라 옥황상제라 해도 이 혈(血債)는 반드시 갚아야 할 것이다. 알겠느냐?”

“네, 가모님!”

모두가 일제히 예를 취하며 비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마가의 아이들은 모두 준비를 마쳤느냐?”

“예! 여덟 명 모두 이미 준비를 마치고 명을 기다립니다.”

여덟 명 중 맨 선두에 서 있던, 검은 흉복에 백호피로 어깨를 두른 여인이 대답했다. 그녀가 바로 신마팔선자 중 장녀인 갈효인이었다. 본명보다는 호랑이 선녀로 더 유명한 여인이기도 했다.

무화는 한번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후 입을 열었다.

“본녀는 직접 흉수 나백천에게 천벌을 내리겠다. 나머지는 그 흉수를 갈가리 찢어 불태운 다음에 다시 생각하도록 하자꾸나. 오늘부터는 모두들 눈물을 멈추어라. 어떤 작은 흐느낌도 용납할 수 없다. 복수를 하지 않은 자는 눈물을 흘릴 자격이 없으니, 소임을 완수하기 전에는 모두들 화장조차 흐트러뜨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신마가의 여인들이라면 응당, 원수에게 눈물로 얼룩진 화장을 보여주어서는 안 될 것이니라!”

눈물이 맺혀 있던 몇몇 여인들이 서둘러 소매를 눈가를 훔쳤다. 그리고는 모두가 빈틈없이 매무새를 다듬었다.

“지금부터 걷는 길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복수의 그날까지! 알겠느냐?”

“예, 가모님!”

여인들이 일제히 읍하며 대답했다. 화장을 고치고 옷매무새를 바로 한 그녀들의 눈빛에서는 섬뜩한 기광이 번뜩였다. 그녀들의 눈동자는 마치 비수처럼 날카로운 투지가 빛나고 있었다.

검은 옷의 여인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후 선언했다.

“출진(出陣)한다.”

신마가의 여주인이 직접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아들의 혈한을 그 손으로 직접 갚기 위해.

그것은 흑도 전체를 들썩일 만한 대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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