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8권 8화 – 연화기 휘날리며

랜덤 이미지

비뢰도 28권 8화 – 연화기 휘날리며

연화기 휘날리며

-붐비는 문앞

바람에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검과 연꽃이 새겨진 깃발이 바람에 세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그것은 때때로 기묘하게도 이름에 비(飛)자가 들어간 사람이 앞을 지나갈 때마다 반사적으로 ‘너는 오지 마! 못 본 걸로 하고 그냥 가!’라는 기세를 뿜으며 격렬하게 몸부림치듯 펄럭이기도 하는 독특한 깃발이었다.

한때는 사천의 일부 지역에서만 펄럭이던 이 깃발은 요 몇 년 사이에 강호 전체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강호 표국계의 절대강자라 할 수 있는 중원표국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급속한 세력 확장에, 전 무림이 경악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급기야 천무학관과 정천맹과도 거래 관계를 트면서 이제 이 깃발의 주인들, 즉 중양표 국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게 되었다. 표국 업계의 절대강자로 군림하던 중원표국 역시 중양표국의 급속한 세력 확장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하지만 수년 전까지만 해도 사천 변방의 무명 표국에 불과하던 중양표국이 왜 이렇게까지 급성장을 하게 되었는지, 그 숨겨진 저력과 비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그 어느 곳도 알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그 깃발은 사천성을 벗어나 호북성 한가운데서도 펄럭이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 깃발을 바라보고 있는 자가 있었으니, 그는 앞머리가 눈을 가릴 정도로 긴 청년이었다. 청년의 앞머리는 바람에 살랑살랑 좌 우로 흔들렸지만, 바람이 그토록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아쉽게도 얼굴을 드러내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비류연이 구출대를 이끌고 이곳 중양표국 호북 지국이 있는 곳까지 이동해 온 것이다.

호북 지국은 흑천맹이 있는 곳보다 훨씬 남쪽에 위치하고 있어 돌아가는 길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잠입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지금 중양표국 호북 지국 앞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표업이 잘되니 잘된 일이라 해야겠지만, 아무래도 붐비는 사람들의 행색이 표행을 의뢰하는 의뢰인은 아닌 듯했다. 왜냐하면 꽤 잘 차려입은 오십대 초반의 중년 인들이 모두들 젊은 여인네들을 대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이 차를 생각할 때 처는 아니었고, 태도로 보아하니 애첩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녀냐 하면 화려하게 차려입은 것을 보아 그것도 아니었다.

처도 아니고 첩도 아니고 하녀도 아니니 남은 것은…….

“딸이로군.”

중양표국 호북 지국의 정문 옆에 따로 설치된 접수처 앞에 몰려든 남녀지간을 훑어본 장홍이 한마디 툭 내뱉었다.

“근거있어요, 장형?”

비류연이 가볍게 되물었다.

“처도 아니고, 첩도 아니고, 하녀도 아니니, 남은 건 딸밖에 없지 않나? 게다가 애첩이라면 좀 더 사람들 앞에 드러내 뽐내려 하지, 저렇게 조심스럽게 숨기려 들지 는 않는다네.”

하긴 약간 돈 좀 있어 보이는 중년 사내들이 처녀들을 데리고 있었는데, 면사로 얼굴을 가린 아가씨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몇몇 건장한 하인으로 보이는 이들 이 그 처녀들 각각을 둘러싼 채 사방으로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다들 어딘가 불안해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러네요.”

납득이 간다는 듯 비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다들 신분이 낮지 않은 듯 보이는데, 이렇게 규중처녀를 데리고 표국에 오다니… 기이한 일이로군.”

“그것도 그러네요.”

장홍은 호기심이 이는 것을 느꼈다. 이럴 때는 관계자에게 물어보는 게 제일 빨랐다.

“이보게, 말 좀 묻세. 대체 무슨 일이기에 저렇게 사람이 붐비나?”

장홍의 물음에 표국의 경비가 대답했다.

“아, 저거요? 모두들 ‘보표’를 구하려고 저 난리들인 겁니다.”

“경호무사 말인가? 저렇게나 많이?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표사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중에서 보표는 개인의 경호를 담당하는 업무를 주로 맡고 있었다. 물건의 운반을 호위하는 것만이 표국의 일은 아니었다. 다 만 그 일이 가장 유명할 뿐.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제각기 딸을 끌고 와서 경호무사를 찾는다는 것은 범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니, 모르셨습니까?”

“대체 뭘 말인가? 앞머리 떼고 뒤꼬리도 떼곤 그게 무슨 말인가? 남는 게 뭐 있어야 알아먹든 말든 하지, 원.”

“고목나무 사건 말입니다, 고목.나.무.”

행여 다른 손님들이 들을까 봐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며 경비표사가 소곤소곤 말했다.

“고목나무 사건?”

그런 경비의 마음 씀씀이를 무색하게 장홍이 큰 소리로 반문했다.

순간, 소란하던 임시 접수처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그리고는 다들 경기(驚氣)라도 일으킬 듯한 얼굴로 장홍을 바라보았다, 그런 흉사를 어찌 그리도 부주의하 게 입에 담을 수 있냐는 듯이. 그것은 명백하게 비난의 눈빛이었다. 사람들의 비난이 담뿍 담긴 시선을 일제히 받으니 장홍도 머쓱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쉿! 조용히 좀 하십시오. 조용히.”

경비가 기겁하며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인가? 속 시원하게 좀 말해보게.”

“그 일을 모르시는 걸 보니 이 지역 분이 아니시군요. 요즘 호북성 내에 ‘연속 부녀자 납치 살해 사건’이 벌어지고 있습니다요. 그런데 괴이한 일은 납치당한 처녀 들이 이런 일 저런 일을 당한 다음에, 고목나무처럼 온몸이 삐쩍 마른 채 버려지고 있답니다.”

있답니다…… 라는 걸 보니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정말인가?”

“그렇고말고요. 그래서 귀신의 소행이라는 이야기도 있었습죠. 사실 다른 처녀들은 납치된 이후 종적을 찾을 수 없었는데, 며칠 전 행방불명된 처자 중 하나가 삐 쩍 마른 채 강물을 타고 흘러나왔습죠. 처음엔 뼈하고 쭈글쭈글해진 가죽만 남아서 누군지 몰랐는데, 입고 있던 옷을 보고 일주일 전에 납치되었던 처녀였다는 사실 이 밝혀졌던 겁니다요.”

납치되었던 처녀들의 말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밝혀지자 호북성 전체가 발칵 뒤집혔다. 그것은 그냥 납치되어 강간당한 다음 기루에 팔려 나가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벌어졌던 처녀 납치 사건의 범인이 아무래도 ‘동일인물인 것 같다는 거의 확신에 가까운 의혹이 생겨났다. 게다가 처녀들의 신 분 역시 가리지 않는 무차별 납치였다. 얼굴도 그다지 많이 가리는 편은 아니었다. 처녀면 무조건 좋다는 처녀맹종증(處女盲從症)에 걸리기라도 한 듯이.

그러니 어찌 딸 가진 아버지들이 안심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이렇게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이 죄다 경호무사를 구하러 사방팔방 뛰어다니는 것이었다. 덕분에 호북 지국 역시 보표 손님들이 대거 몰려 표행에 돌릴 표사의 수가 다 부족해질 지경이었다.

“허허, 그런 일이……. 확실히 괴이하기 짝이 없는 일이로군.”

“심지어 얼마 전 그 시체가 발견된 딸의 아비는 상당한 지주였는데, 그 색마 놈을 잡아달라고 무림정파에 색마 토벌을 부탁하러 돈을 싸들고 갔다는 이야기까지 있습니다요.”

“복수를 해달라는 거군.”

색마 토벌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딸의 복수를 부탁하러 가는 거였다. 물론 명색이 무림 정파가 ‘복수’를 대행해 줄 수는 없겠지만, 연쇄강간살인마를 잡아달라는 부탁이라면 명분이 선다. 사실상으로도 표국에 이렇게 사람이 붐비는 걸 보면 사태가 상당히 심각한 것 같았다.

“대체 처녀 실종 사건이 몇 건이나 있었기에 그런가?”

“듣기로는 지난 몇 년 전부터 벌어졌던 일을 모두 합치면 백 건이 넘는다고 합니다.”

“배, 백 건이나……!”

경비의 말에 장홍을 비롯한 중인들은 입을 쩍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열을 넘어가는 것만 해도 이미 지나치게 많은 숫자인데, 백이라니…….

“찢어 죽일 놈! 그런 색마는 천참만륙당해야 마땅하다! 이래서 사내놈들이란! 단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어! 이런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다 잘라야 해!” 옆에서 듣고 있던 옥유경의 온몸에서 일순간 무시무시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살을 에는 듯한 섬뜩한 살기에 주위의 사내들은 찔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절로 오금이 저려오게 만드는 그런 살기였던 것이다. 특히 장홍의 안색은 갑자기 핏기가 쭉 빠져나간 것처럼 아주 파리해졌다.

생명의 위협을 심하게 받은 장홍은 어떻게든 주의를 환기시킬 필요가 있었다.

“어흠, 그 외엔 사체에 다른 특징이 없었나?”

그는 평소보다 더욱 진지하고 침착하고 힘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음, 그러고 보니 배꼽 바로 위쪽에 푸른색 장인(掌印:손바닥 자국)이 찍혀 있었다는 이야기를 언뜻 들은 것도 같습니다.”

“푸른색 장인!”

순간 장홍의 눈이 크게 떠졌다.

“왜 그래요, 장 아저씨? 뭐 짐작 가는 거라고 있어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ᅳ그렇다! 그는 주의를 환기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ᅳ장홍은 곧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것도 아닐세. 설마 그럴 리가 없겠지. 그자는 벌써 오십 년 전에 죽었으니까.”

그의 마지막 말은 너무 작은 혼잣말이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더 이상 쓸데없이 입소문을 늘리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차피 그 색마의 일은 그 들의 일이 아니었다. 그 일은 의뢰받았다는 명문정파에 맡기고, 그들에게는 지금 달리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건 그렇고 손님들께서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요?”

그제야 경비는 자신의 본래 임무가 생각났는지 그들이 온 용건을 물었다.

“지국주는 안에 있나요?”

비류연이 대뜸 물었다. 경비는 웬 젊은 놈이 앞으로 나서서 묻자 눈살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지국주님을 만나러 오셨습니까?”

“뭐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어디서 오신 분들이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요?”

일단 그들의 신분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건 말해줄 수 없어요.”

비류연이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들이 이곳 호북 지역에 들어왔다는 사실은 될 수 있으면 알리지 않는 게 좋았다. 어디에 흑천맹의 눈과 귀가 있을지 알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그건 좀 곤란한 대답이신데요.”

경비는 땀을 삐질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본분상, 신원도 밝히지 않는 사람을 함부로 안으로 들여보낼 수는 없었다.

“약속은 하셨습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개중에는 자신 같은 쫄따구한테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아서 얼버무릴 뿐인 부류의 사람도 많았던 것이다.

“전혀.”

비류연은 대답은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 그럼 면담은 곤란합니다요. 적어도 신분은 밝히셔야…….”

“그럼 당신 이름은 뭐죠?”

비류연이 오히려 반문하며 웃었다.

“전 표승이라는 일개 표사입니다요.”

경비가 포권하며 대답했다.

부들부들한 말투와는 달리 의외로 이 경비는 기개가 있었다. 중양표국이 아랫사람 교육은 제법 잘 시키고 있는 모양이었다. 의외로 이 경비표사는 나중에 중양표 국에서 한자리를 할지도 몰랐다. 어느 조직이든 인재를 목말라 하는 것은 본능과도 같은 것이기에.

하지만 저쪽이 이름을 밝혔다고 해서 이쪽도 신분을 밝힐 생각은 전혀 없었다. 대신 비류연은 이렇게 말했다.

“흠, 기억해 두죠, 한 반 시진 정도.”

반 시진은 무척이나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이름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에는, 이를테면 비류연이 ‘아참, 그 문간에 있던 표승이던가 하는 경비는 그 럭저럭 쓸 만한 것 같더군요’라는 한마디를 내뱉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개 표사 표승은 이 짧은 기억이 이후 자신의 운명의 갈림길이 될 줄 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들어가서 ‘연화검패(蓮花劍牌)’의 주인이 왔다고 전해요. 그럼 알 거니까.”

그로부터 잠시 후.

중양표국 호북 지국 지국주 철심장 장이하는 맨발로 단숨에 달려왔다. 얼마나 급했는지 신발 신는 것도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그가 헐떡거리는 숨을 간신히 진정 시킨 후, 읍하며 말했다.

“공자께서 ‘연화검패’의 주인이십니까?”

비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품에서 패 하나를 꺼내 보여주었다. 물론 얼마 전에 중양표국의 국주 십팔검, 아니, 이제는 일진표걸이라 불리는 장우양에게 받은 것이 었다. 이 연화검패의 주인은 국주와 거의 동등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장우양에게 일진표걸이라는 별호가 덧붙은 것은 중양표국이 일진광풍과도 같은 기세로 세력을 확장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로 폐국을 방문하셨습니까, 공자님?”

장이하의 태도는 지극히 공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연화검패의 주인은 중양표국의 공동 경영자나 다름없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부탁할 일이 있어서요.”

“뭐든지 부탁하시지요. 즉시 봉행하겠습니다.”

장이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급히 표행 하나를 꾸려주세요, 무창(武昌)으로 향하는 놈으로.”

다수의 무인들을 숨기는 데는 표행만 한 데가 없었다. 무인임을 숨기지 않고도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론적으로는 그러했지만, 실제로 그걸 행하기 위 해서는 많은 난점들이 산재해 있었다.

우선 이 일행에는 사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이가 너무 많았다. 개중 몇몇은 흑백 정사를 통틀어서 모르는 사람이 아는 사람보다 적은 그런 인종들이었다. 특히나 타오르는 불처럼 시뻘건 도객과 얼음처럼 차가운 청은발의 검객 두 명이 쌍으로 있으면 눈구멍이 제대로 뚫린 강호인들은 대번에 그들을 알아보게 마련이다.

‘확 떼어놓고 가버릴까?’ 하는 생각이 안 든 것도 아니지만, 그러기에는 그들이 지닌 전력이 너무 아까웠다.

그러니 우선은 이들의 특이 신체를 꼭꼭 숨기되 무림인인 건 숨기지 않은 채로 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표행을 떠난 표사를 가장하는 것만큼 좋은 게 없었다. 무의식중에 흘러나가는 기세를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어도 의지로 어느 정도 약하게 보이도록 조절은 가능하니 문제는 없을뿐더러, 집단으로 움직이기에도 표행이 딱 적당했다.

더구나 이곳 호북 지국쯤 되면 흑천맹이 자리한 무창 쪽으로 몇 번씩이나 표행을 다녀왔을 테고, 그쪽 관부와는 면면을 텄을 가능성도 높았다.

그리하여 약간의 분주한 움직임 끝에, 그날 당장 중양표국 밖으로 나가는 표행 하나가 급히 출발했다. 놀랍게도 선두에 선 사람은 호북 지국주 철심장 장이하였다.

한 가지 기이한 점은, 거의 모든 표사들이 옷을 헐렁하게 입고 죽립을 눌러써 얼굴을 가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장이하의 인도에 따라 표행은 곧장 북상(上)하기 시작했다.

다가올 암운과 폭풍의 중심점을 향해.

어떤 혹독한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알지 못한 채.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