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8권 9화 – 색마(色魔)가 간다!

랜덤 이미지

비뢰도 28권 9화 – 색마(色魔)가 간다!

색마(色魔)가 간다!

우연한 만남? 혹은 운명의 농간?

“하아, 하아!”

하얀 입김이 백의청년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다.

지금은 한창 맑은 봄날인데, 중천에는 아직 밝은 해가 떠 있는데도 백의청년의 파리해진 입술 사이에서는 연신 하얀 입김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덜덜덜 떨고 있는 백의청년의 고개가 간신히 옆으로 돌아가며 한 사람을 쳐다본다.

“커헉, 대사형! 어, 어서 도망가세요……. 부디 복수(復讐)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백의청년은 바닥에 쓰러졌다.

“사제에에에에에에에!”

대사형이라 불린 자의 입에서 비통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쓰러진 백의청년은 마치 온몸이 얼어붙은 듯 하얗게 서리가 덮여 있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그는 이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추적대는 완전히 붕괴된 것이다, 그 혼자만을 남기고.

전멸(全滅)이었다.

지금까지 사제들과 함께라면 두려울 게 없다고 굳게 믿었던 그의 신념은 산산조각이 났다. 대신 그의 마음속에 공포가 가득 차올랐다. “어떻게 저렇게 악마 같은 마공이!’

설마 저 색마가 그 사공을 이미 대성(大成)했을 줄이야! 그 사실을 짐작조차 하지 못했던 것은 오산 중의 오산이었다.

“흐흐흐흐흐, 네놈도 이리 오너라.”

열한 번째 사제를 쓰러뜨린 마두의 하얀 손이 그를 향했다. 기분 나쁠 정도로 창백한 손에서 새하얀 한기가 공기를 얼리고 있었다.

“이제 남은 건 오직 너뿐이다!’

그 손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는 부끄럽지만 저자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명백한 패배였다. 그동안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불었 던 자신의 자존광대가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앞으로 겸손해지고 겸허해지겠다고 반성하고 또 반성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사제들이 살아 돌아오기만 한다면.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한번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었다.

이제는 알 수 있었다. 후회하기 전에 반성해야만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을. 그의 두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죽어도 사제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악!”

반드시 완수해야 할 복수!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살아야 했다. 살아 있어야 복수도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그는 뒤돌아서서 도망쳤다.

치욕(恥辱)을 무릅쓴 채 그는 달렸다. 그의 두 눈에서는 후회의 눈물이 그칠 줄을 몰랐다.

***

비류연과 구출대는 표사로 변장을 한 채 이름없는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좀 더 서두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런 급한 표행은 세인들의 이목을 필요 이상으로 끌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표행의 인원수를 최대한으로 줄이고, 일반 표행보다 약간 속도를 높여서 가는 이동 방법을 택하고 있었다.

일행은 흑천맹으로 가기 위해 최단경로를 골라서 일반인들에겐 약간 험할지도 모를 산길을 걷는 중이었다. 급하게 꾸렸다고는 해도 표행에 동참한 표두들이 모두 경험도 풍부하고 꽤 실력있는 자들이라, 산을 오르는 데 별다른 지체는 없었다. 물론 구출대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특이한 것은, 신분이 가장 낮은 쟁자수 몇몇을 표물을 실은 수레 하나에 태우고 있다는 점이었다. 평상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무공을 모르는 이들이 표행의 속도를 늦출 수 있기 때문에 취한 행동이었다.

보통 이런 경우는 어디선가 세상 물정 모르는 산적들이 어슬렁어슬렁 기어나오는 게 수순이었다. 그러나 고개를 하나 넘고, 둘을 넘고, 셋을 넘어도 산적들은 씨가 마르기라도 했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비류연은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서도 연신 좌우를 둘러보며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애타게 기다려도 산적 같은 건 없을 걸세, 류연.”

뒤에서 따라오던 장홍이 불쑥 한마디 했다. 비류연의 시선이 자연 그를 향해 돌아갔다.

“산채 한두 군데쯤은 만들고도 남을 법한 곳인데요? 사람들의 왕래도 꽤 분주하고.”

적당히 험하고 적당히 으슥한 지름길이기에, 이른바 산적질의 노른자위 같은 곳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정도로 목이 좋으면 영업점이 한두 개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거늘, 장홍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무리 터가 좋으면 뭐 하나, 그 터의 주인이 호랑이인데. 승냥이 떼들은 꼬리를 말고 도망갈 수밖에 없지.”

장홍의 얘기인즉슨 여긴 흑천맹의 영역이고, 그들은 자기들의 영역에서 다른 떨거지들이 어슬렁거리는 것을 매우 눈꼴시어한다는 뜻이었다.

“칫, 간만에 용돈 벌이나 좀 해보나 했더니.”

비류연이 혀를 차며 혼잣말로 아쉬워했다. 본인은 혼잣말이라고 한 것이겠지만, 호북 지국 일행이 듣기에는 충분히 큰 목소리였다. 그의 지나가는 한마디를 들은 중양표국 호북 지국주 철심장(鐵心臟장이하는 무쇠 심장이라는 별호가 무색할 정도로 기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어떤 신경을 가지고 있기에 저런 말을 함부로 한단 말인가? 마치 산적들의 산채가 천하에 산재해 있는 비상용 개인 금고라도 되는 듯한 발언이었다.

이때, 비류연의 옆에서 걸어가고 있던 가냘픈 체구의 표사 한 명이 죽립을 들어 올리며 비류연 쪽을 바라보았다. 허름한 표사 복장인데도 어쩐지 뒷모습마저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끄는 그 표사의 정체는 바로 나예린이었다. 이들 구출대에 낀 여인들의 미모는 너무 지나칠 정도로 대단해서 이목을 끌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죄 다 최대한 허름한 남장 표사 차림을 하고 죽립으로 얼굴을 가렸던 것이다.

“지금은 갈 길이 바쁘니 참도록 해요, 류연. 아쉬우면 나중에 다른 데서 털면 되잖아요?”

천하제일미라 칭송받는 나예린의 입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턴다’라는 말이 나오자, 일행은 말할 수 없는 극심한 충격과 안타까움에 휩싸였다. 하지만 나예린은 조 금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물론 비류연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에이, 번거롭게 산채나 털고 다녀봤자 뭐가 제대로 나오기나 하겠어요? 그냥 너무 아무 말도 없이 걷기만 하는 것 같아서 기분 전환이라도 될까 해서 그런 거죠.” 산적 잡기랑 산채 털기를 기분 전환거리로 삼지 말라고!

라고 외치고 싶은 굴뚝같은 마음을 장이하는 꾹 눌러 참아야만 했다.

“음, 그건 그렇군요.”

한술 더 떠 나예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자 사람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확실히 나예린이 조금 변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그 원인은 비류연의 나쁜 영향 때문일 거라는 것이 그들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역시 예린은 나랑 잘 맞는다니까요. 다들 너무 긴장해 있어요. 너무 심각하다고요. 일의 중요함은 알겠지만, 그렇게 긴장하고 있다가 정작 중요한 순간에 실수하 면 안 되잖아요? 이런 때일수록 긍정적으로 신경을 이완시켜 놔야 해요.”

사실 구출대는 막중한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것은 비류연과 염도, 그리고 빙검 정도였다. 거기다 침묵은 사람을 내면으로 침잠하게 하는 효용이 있었다. 무언가를 심사숙고하거나 수행할 때는 좋지만, 이런 때에는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교차하게 마련이다. 그러면 사람의 특성상 부정적인 생각으 로 머리가 가득 차게 되고, 그것은 엄청난 심력(心力)을 소비하는 일이기도 했다. 심지어 자칫 부(負)의 감정이 넘치면 절망에 빠질 수도 있었다. 행하기도 전에 꺾 여 버리는 사태까지 생기는 것이다.

특히 무엇보다 나예린이 문제였다. 차근히 영령과 함께 길을 걷는 그녀는, 겉으로 드러내고 있진 않지만 속으로는 엄청난 불안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지금 위기에 처한 것은 다름 아닌 그녀의 부친이 아니던가.

그래서 비류연은 강호란도를 떠나면서 자꾸만 나예린의 주의를 환기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그 일에 대해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도록.

“좀 색다른 일이라도 일어났으면 좋겠는데…….”

그것이 그의 솔직한 바람이었다.

사람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본인에게 끌어온다고 했던가? 그리고 세상은 언제나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을 던져 준다고 했던가?

하지만 종종 그것은 너무나 과한 선물로 올 때가 있었다.

감당하기 힘든 선물은 언제나 처치가 곤란해지고, 받은 사람을 난감하게 만들게 마련이다.

비류연이 그 기묘한 일행을 본 것은 표행이 고개 중턱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 일행은 선두에 선 세 명과 이를 뒤따르는 여덟 명 모두 검은 흉복을 걸치고 있었는데, 이들은 놀랍게도 모두 여인들이었다. 그것도 굉장히 눈에 확 띄는 미녀들 이었다.

얼굴에 주름 하나 없는 이 여인들은 각별한 아름다움으로 제각기 빛을 발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단아하고, 어떤 이는 화려했으며, 또 어떤 이는 청초하고, 또 다른 어떤 이는 귀여웠다.

비류연 일행은 이 검은 흉복의 아름다운 여인들을 내심 눈여겨보았다. 그것은 단순히 이들이 고고한 아름다움을 발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이들 모두가 하나둘씩 병장기를 메고 있는 것을 보아 무림인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다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젊어 보이고, 어떻게 보면 얼굴에서 노련한 강호의 노고수 같 은 연륜이 묻어 나오기까지 했다.

특히 선두에서 앞장서듯 걸어가고 있는 세 명의 부인에게서는 기묘한 압박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나예린 역시 한눈에 그녀들의 강함을 알아차렸는지 몸을 긴장시

키고 있었다.

“대체 저 여인들의 정체가 뭐지? 검각이나 아미파를 제외하고 저런 여고수들을 대량으로 배출해 낼 만한 곳이 있었나?”

분명 아미파나 검각은 아니었다. 심지어 저 선두에 선 세 여인의 기도는, 아미파 최고의 천재라는 아미신녀 진소령조차 무색케 하는 기도였다.

나예린의 시선이 맨 앞에서 걸어가는 귀부인을 향했다. 주름 하나 없는 얼굴에 기품이 철철 넘치는 대단한 미인이었는데, 온 세상을 내려다보는 듯한 고고함이 그 녀의 얼굴에 깃들어 있었다.

‘그것도 저 여인의 기운은……..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피부가 따끔해지는 이 감촉, 그것은 틀림없이 초고수들만이 암중에 뿜어낼 수 있다는 무형지기, 그중에서도 날카로운 검기가 분명했다. 이 정도 거리를 두고도 무형의 검기를 느낄 수 있다니…….

‘설마하니 사부님 수준의 여고수란 말인가?”

그녀는 자신의 사부인 검후와의 우위를 점쳐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제자 된 입장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떻게 강호에 검후에 맞먹는 이름없는 여고수가 있을 수 있지??

만일 있다고 하면 그 여인은 이미 오래전에 강호에서 이름을 떨쳤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저런 형색을 하고, 또한 단체로 여고수 집단을 끌고 다니는 최절정 여고수 의 이름은 지금까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대체 누굴까?

그리고 그녀들은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

검은 흉복을 입은 여인들에게 신경을 집중하느라, 나예린은 빙검과 염도의 안색을 살펴보지 못했다. 만일 지금 두 사람의 안색을 살폈다면 아무리 만녕빙정을 조 각해 놓은 것 같다는 평을 듣는 나예린이라도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그들은 평소 좀처럼 짓지 않던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성격이 불같은 염도에 비해 빙검은 늘 침착하고 차분하며, 어떤 일에도 쉽게 경동(驚動)하는 법이 없었다. 거기에는 그가 익힌 빙백심결의 효능도 한몫하고 있었 다. 때문에 그는 종종 얼음보다도 차갑다는 평가를 듣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평에 대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늘 같은 사부님으로부터 빙백(氷魄)을 전수받은 그가 얼음처럼 차가운 것은 어찌 보면 자연의 이치처럼 당연한 일. 아무리 사부님으로부터 염령(焰靈)을 전수받았다지만, 타오르는 불꽃처럼 격렬하고 폭급하여 ‘불타는 개차반’이라고까지 불리는 염도보다는 백배 낫지 않은가 말이다.

하지만 항상 평정심을 유지하던, 꽁꽁 언 명경지수처럼 잔잔했던 그의 마음과 안색은 지금 쩌저적 거대한 금이 가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마치 풍랑을 만난 호수 처럼 격랑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동요, 아니, 격동(激動)은 그의 얼굴과 행동에까지 나타나고 있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가 하면, 그가 늘 그토록 티격태격하며 싫어하던 염도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 하는 지경에 이를 정도였다. 그 행동이란 양손으로 주먹을 꾹 쥔 다음, 그 손으로 두 눈을 세차게 비비는 것이었 다.

자신이 본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지금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하기라도 하듯이.

하지만 세상이란 건 잔인해서 그들이 보고 있는 ‘현실’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자 염도는 물론이고 빙검마저도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충동이 살짝 들었다. 현실을 외면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보고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 그리고 궁극적으로 자각(自覺)을 하지 않으면 된다.

그래, 삶이란 늘 쓸데없는 관심만 끊으면 많은 것이 편안해진다. 그런 삶도 나쁘진 않다. 어차피 남의 밥이 되는 초식(草食) 인생이 운명이라면, 잡아먹히기 바로 전까지는 마음이라도 편안한 것이 낫지 않느냔 말이다.

멈춰 서서 퇴보하는 사람이 있어야 앞으로 진보하는 사람도 나오는 법, 남의 진보를 위해 스스로 퇴보해 주는 그런 눈물겨운 희생정신 역시 나쁘지는 않다. 그러니 못 본 거다. 못 본 거야, 진짜로, 진짜로…….

“핫!”

염도와 빙검이 동시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정신이 영원의 저편으로 아득해지려는 것을 강력한 의지로 간신히 막아낸 것이다.

천하에 손꼽히는 최절정고수인 이 두 사람에게 이 정도까지 정신적 타격을 준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과연 무엇을 보고 이토록 경악한 것일까?

그들의 시선은 바로 기묘한 여인들을 이끌고 가는 세 명의 부인을 향해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녀들 중 두 명은 마치 염도와 빙검이 여성으로 환생하기라도 한 듯, 타오르는 불꽃처럼 선연한 머리칼과 한겨울 깊은 호수의 얼음처럼 청은빛을 띤 머리칼을 길게 나부끼고 있었다. 두 여인은 머리색이 아니더라도 눈에 확 띌 정도로 상당한 미인이었지만, 염도와 빙검의 시선은 그 두 여인에게 오래 머물지 못했 다. 그런 특색있는 여인들에게는 관심도 없다는 듯, 두 사람의 시선은 맨 선두에서 심야(深夜)처럼 검은 옷을 걸친 흑발여인의 모습에 못 박혀 있었다.

둘은 서로를 마주 쳐다보았다.

“…..”

비록 무언이었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했다.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정확한 거냐?”

‘설마 자네도 내가 생각하고 있는 걸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잘못 봤다고 말해. 제발 날 꾸짖어줘, 내가 잘못 본 거라고. 내 눈에 지금 심각한 병이 생겨 환각을 보고 있는 거라고. 이번 한 번만은 특별히 나를 꾸짖는 걸 용납 해 주겠다. 날 합법적으로 꾸짖을 수 있는 기회는 이번뿐이야!”

‘나도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다. 나라고 자넬 안 꾸짖고 싶은 줄 아나? 한 번이 아니라 백만 번이라도 환영이지! 하지만 그전에 부탁이 있다. 자네부터, 자네부 터 내가 본 것을 부정해 주게. 그럼 나도 역시 나를 꾸짖을 기회를 자네에게 주겠다! 난 특별히 두 번 꾸짖어도 좋아!’

그러나 견원지간인 상대를 꾸짖을 수 있는 이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붙잡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 말인즉슨, 절망적이게도 그들이 보고 있는 게 사실이라는 뜻이 었다.

다음 순간,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죽립을 푹 눌러쓰며 그녀들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조용히 표물의 그림자 옆으로 귀신같이 은밀한 신법을 써서 몸을 숨겼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조차 그들의 갑작스런 이동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들은 동시에 속으로 기도했다.

부디 저 사람이 자신들을 발견하지 않도록.

이 표행이 정천 맹주 구출대임이 밝혀지지 않도록.

아끼는 학생들이 몰살당하는 꼴을 결코 보고 싶지 않았기에, 그들은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은 채 산길을 나아갔다.

옆에서 함께 가고 있던 장홍은 두 분 무사부의 은신술이 이 정도로 뛰어난 줄은 몰랐기에 남몰래 감탄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엔 한줄기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천하에 무서운 것이 없는 두 분이 갑자기 왜 저러시지?”

장홍은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서 표행을 서두르게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하네.”

그때, 빙검의 전음이 무겁게 철심장 장이하의 고막을 때렸다. 그 안에 담긴 기세에 장이하는 자신의 심장이 꽁꽁 얼어붙을 것처럼 오싹한 기분을 맛보아야 했다. 그 안에는 무언가 다급함이 담겨 있었다.

“눈알 고정시켜라! 아무도 돌아보지 마! 돌아보면 내 손에 죽는다! 앞으로만 나가는 거다! 앞으로만! 이곳을 빠져나가는 것만 생각해라!”

염도의 전음이 표행 전체에 울려 퍼졌다. 단번에 여러 사람에게 전음을 보내는 ‘다중전음’ 기술은 평범한 공력으로는 결코 행할 수 없는 기적의 기술이었지만, 지 금은 그런 것에 한가히 감탄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표행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너무 급하게 도망치는 느낌을 주면 수상쩍을까 봐 차마 달려가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표행은 앞으로 쭉쭉 나아갔다. 그래도 염도와 빙검은 경공을 전력으로 전개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 답답할 수가 없었다. 저 여인들의 시야에서만 벗어나면 그때부터는 전력으로 경공을 발휘해 이곳을 벗어날 생각 이었다.

그런데 표행의 속도가 세 배 정도나 빨라졌는데도, 검은 흉복을 입은 여인들과의 거리는 어째 더 이상 벌어지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의 속도 에 맞추어 저쪽도 속도를 높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결코 선두를 양보해 줄 수 없다는 듯이.

‘감히 어디를 건방지게 앞지르려 하느냐, 무엄하다!’라고 무언으로 외치기라도 하듯이.

양쪽 다 일언반구도 하지 않는 침묵 속의 기이한 동반이 한동안 계속되었다. 양쪽 다 입을 열지는 않고 있었지만, 결코 양보할 마음이 없는 것만은 분명했다.

왠지 숨이 막힐 듯한 답답함과 압박에 짓눌리면서도 구출대 대원 중 입을 뻥끗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염도와 빙검은 계속해서 몇 차례나 전음으로 일행을 닦달 했다. 좀 더 속도를 내라고. 하지만 여기서 더 속도를 낸다면 남은 건 달리기밖에 없었다. 산적도 없는데 전력질주를 하는 표행이라니, 그건 너무 수상쩍지 않은가. 장홍은 그들을 닦달하는 염도와 빙검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리고는 깜짝 놀랐다.

‘저런 모습은 마치……!’

이 두 사람에게서 드러난 그 감정, 그것은 명백한 ‘두려움’이었다.

‘대체 왜?’

무엇이 저 두 사람을 저토록 두렵게 만들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결코 추월을 용납하지 않으며, 무언의 경주를 벌이며 동행하던 두 부류의 일행이 동시에 멈추었다.

이들을 동시에 멈추게 한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갯길 관도 한복판에 박혀 있는 세 자루의 검 때문이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