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9권 1화 – 서(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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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9권 1화 – 서(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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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序)

-푸른 하늘에 일곱 개의 검은 별이 뜨다

피유우우우우우우!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며 붉은 노을이 깔리기 시작하는 저물녘. 흰 꼬리로 붉은 석양을 가르며 불꽃 하나가 수직으로 올라갔다.

펑!

일정한 높이에 달하자, 불꽃은 검은 꽃을 피우며 터져 나갔다.

피유, 피유, 피~유!

선두를 따르기라도 하는 것일까, 여섯 개의 또 다른 불꽃들이 연달아 날아올랐다.

펑! 펑! 펑! 펑! 펑! 펑!

일곱 개의 불꽃이 차례로 봉오리를 터뜨리자, 아직 날이 밝은데도 불구하고 호북의 하늘에는 검은 별 일곱 개가 떠올랐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멀찍이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또 다른 일곱 개의 불꽃이 쏘아졌고, 어김없이 일곱 개의 검은 별이 떠올랐다.

마치 봉화(烽火)처럼, 무언가를 알리기 위해, 누군가를 부르기 위해

혹은 무언가를 소환하는 듯 일곱 개의 별들은 차례로, 차례로 호북의 하늘에 떠오르며 서서히 북상하기 시작했다.

이름이 있으되 사람들은 대부분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어느 한 바위산 중턱.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우리만치 커다란 나무들이 무성하게 우거진 숲길을 지나면 돌길 하나가 나온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에도 잘 들어오지 않는 그 돌길을 따 라 위로 올라가다 보면, 중간중간 아름드리나무들이 희한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 적나라한 자연 파괴의 현장을 관람하는 불행을 누릴 수 있다.

그냥 부러뜨린 것도, 그렇다고 칼로 벤 것도 아니었다. 톱으로 썰지도 않았다. 뭐랄까, 마치 거대한 힘에 의해 비틀려지고 찌부러진 듯한 모습으로, 나무들은 자신 들이 범인에게 매우 특수한 방법으로 살해당했음을 호소하고 있었다.

자연파괴의 참극이 일어난 현장은 이곳뿐만이 아니었다.

이 장소에서 조금 더 올라가다 보면 거대한 바위들을 병풍처럼 두른 채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라 있는 봉우리가 나오는데, 그 봉우리에 우후죽순처럼 솟아 있는 석주 여기저기에는 크고 길게 푹 파인 자국들이 흉흉하게 그어져 있었다. 이미 무너져 잘디잔 돌무더기로 화한 곳도 있었다. 만일 이것이 석공(石工)의 작품이라면 실로 형편없는 솜씨라 할 수 있었다.

이 자연 파괴에 사용된 흉기는 누구라도 찾을 수 있도록 방치되어 있었다.

상처 입고 무너진 석주 근방에는 수백 개는 되어 보이는 목도들이 부러진 채 여봐란 듯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던 것이다. 마치 안에서 밖으로 터져 나간 듯 처참하 게 박살 난 모습이었다. 가히 목도들의 대량 학살 현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목도들은 흉기이면서 또한 피해자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 현장으로부터 지척에 위치한 단애 끝.

지평선 저 너머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가장 전망 좋은 자리에는, 깎아 지르는 절벽 끄트머리를 향한 채 아담한 크기의 비단 꽃신이 허술하게 놓여 있었다. 신발은 한 켤레가 아니었다. 그 옆엔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가죽 신발이 같은 방향을 한 채 나란히 놓여 있었고, 두 켤레의 비단 꽃신이 더 있었다.

이 넷 중 자연 파괴범은 누구인가?

남자 하나가 지독한 수련을 견디지 못하고 광란증에 빠져 주변을 파괴한 뒤, 여인 셋과 함께 동반 자살이라도 했단 말인가?

그러나 범인은 버젓이 살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실로 대담하게도 파괴 현장의 지척에서 비단 돗자리를 깐 채 육 단짜리 찬합을 앞에 두고는 세 명의 화려한 궁장 미녀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호화로운 궁장을 걸치고 화장을 짙게 한 여인 셋은 모양새로 미루어 보아 고급 기녀가 분명했다. 그것도 이 세 명의 미녀가 호북성에서 가장 유명한 기녀들인 ‘자 하삼기’라는 것을 알면, 사람들은 놀라자빠지거나 그 중심에 있는 사내를 향해 살의를 활활 불태울 게 분명했다.

자하삼기에게 포위되기라도 한 듯 앉아 있는 사내는 제법 준수해 보이는 얼굴에 자색 옷을 걸치고 있었다. 수려한 얼굴에 왠지 서글서글한 인상을 지닌 한량 같은 사내였다. 사내의 눈동자는 특이하게도 햇빛이 눈동자 속에 투과될 때마다 언뜻언뜻 황금빛이 감도는 붉은색을 발했는데, 마치 저녁노을을 품은 듯했다.

세켤레의 비단 꽃신과 한 켤레의 가죽신 너머, 바위산 저 바깥으로 펼쳐진 평원에는 붉은 노을이 번져 나가고 있었다.

띵, 띵, 띵.

자하삼기 중 첫째인 설혜가 도자기처럼 곱고 하얀 손가락으로 비파 현을 퉁기며 아름다운 음률을 자아내기 시작했다.

“하늘은 노을에 물들고 땅은 ‘석양[霞]’에 기대니, 바람[風]의 마음[心中]엔…….”

삼기 중 가장 육감적인 몸매를 가지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는 풍혜가 비파음에 달콤한 목소리로 맞추어 즉흥시를 읊으며 사내가 들고 있는 술잔에 또로록, 맑은 빛 깔의 술을 따랐다. 그러고는 그에게 살며시 부드러운 몸을 기대며 교태가 흐르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霞) 공자님께서는 이 뒤를 어찌 마무리하고 싶으신가요?”

들고 있던 술잔을 들어 올리며 하 공자라 불린 사내가 뒤를 이었다.

“술잔 속의 노을에 그저 취하기만 할 뿐!”

그렇게 뒤를 이은 다음, 사내는 소탈한 웃음을 지으며 노을이 담긴 술을 기쁜 듯 천천히 들이켰다.

“이 남자 설마 목석인 것 아니야? 여자가 은근하게 마음을 보여줬으면 그에 대한 화답을 해야지, 갑자기 웬 뜬금없는 술타령이지? 설마…… 진짜 못 알아들은 거 야?”

풍혜는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내심 투덜거렸다. 때는 이때다 싶은지, 셋 중 각선미가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 셋째 우혜가 나섰다.

“어머, 술잔이 비어버렸네요. 어서 다시 채우지 않으면 안 되겠어요.”

우혜가 술병을 집어 올리자 어찌 된 연유인지 치맛자락 끝이 가락지에 끼이는 바람에 치마도 함께 위로 슬슬 올라오며, 그 사이로 늘씬하게 뻗은 하얀 다리가 맨살 그대로 빠끔히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 보셨나요?”

우혜는 오른손으로 술병을 든 채, 치맛자락 사이로 드러난 허벅지를 왼손으로 수줍게 가리며 새초롬한 어조로 물었다. 가리긴 했지만 치마의 옆트임 사이로 은근 슬쩍 보일 곳은 다 보였다.

“하하하, 물론입니다! 참으로 영롱한 색깔과 향기를 지닌 술이로군요. 역시 명주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좋은 술입니다.”

사내의 눈이 술잔에 따라지는 술에 못 박듯 고정된 것을 보고 우혜는 하마터면 정말로 치마에 발이 걸려 미끄덩 넘어질 뻔했다.

그렇게 줄곧 술을 들이켰으니 이성이 흐릿해질 만도 하건만, 빈 술병이 쌓이면 쌓일수록 그의 눈은 오히려 별빛처럼 더 초롱초롱하게 빛날 뿐이었다.

그는 그녀들의 몸을 탐하고자 하기는커녕, 그저 한 잔의 술을 같이 나누며 풍류를 즐길 벗을 원하는 듯했다.

“이 자식아, 그래도 옆에 미녀가 다가가서 술을 따르면 반응을 해야 할 것 아니야, 반응을! 우리 자하삼기가 이렇게 웃으면서 번갈아 술 따르는 일이 쉽게 있는 일 인 줄 알아?!’

술병을 든 채 웃으면서 우혜는 속으로 분노를 토해냈다. 옆에서 경쟁하듯 술을 따르며 은근슬쩍 사내의 팔에 몸을 기대던 풍혜 역시 불만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자하삼기의 으뜸으로 꼽히는 설혜는 비파 연주와 눈빛을 통해 은근하게 마음을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맑고 밝은 눈으로 술잔만을 바라보고 있자 자존 심이 상할 지경이었다.

“대체 이 남자는 뭐란 말인가? 귀가 제대로 뚫려 있으면 내 아름다운 비파 소리에 취해야지, 이 남자의 귓구멍은 장식이란 말인가?”

예능의 전문가들답게 겉으로 내색은 하지 않고 있지만, 세 미녀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이 뻗치기 시작했다.

“이제는 승부가 문제가 아냐! 이건 우리 ‘자하삼기(紫霞三妓)’의 자존심 문제야!’

자하삼기(紫霞三妓).

그녀들은 호북성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최고급 기루인 자하원의 우상 같은 존재로, 그녀들의 명성은 강호 전체에 퍼져 있을 정도였다.

워낙 유명하고 인기도 많다 보니, 천금(金)을 지닌 자산가들이 아니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그녀들이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만금(萬金)을 지닌 몇몇 특별한 자 들만이 그녀들의 호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사내를 처음 봤을 때, 그녀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준수하긴 했지만 그녀들의 눈에 들어올 만한 특별함은 전 혀 없는 사내였다.

그런데 이 사내는 다른 사내들처럼 그녀들 자하삼기’를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목을 길게 빼거나 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 그저 참한 애들 몇 명하고만 웃고 즐기며 술을 마셨을 뿐이다. 입 재담은 좋았는지 그가 앉은 탁자에는 항상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자하원에서는 일급주인 ‘소시주’를 새로 판매하면서 세 병을 사면 자하삼기 세 명의 전신상이 담긴 화첩 하나를 준다는 행사를 실시하기 시작했 다. 자하삼기의 명성이야 워낙 유명하기에 사람들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리고 그 소시주를 주문하는 자들 중에는 그 자색 옷의 사내도 끼어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설혜는 속으로 ‘훗!’ 하고 비웃었다.

‘그럼 그렇지, 네놈 역시 남자긴 남자구나. 괜히 도도한 척하더니.’

근래 들어 자색 옷의 사내에게 이상스레 시선이 가는 것을 느끼던 그녀는 한꺼번에 스무 병을 주문하는 사내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상실했 다. 싸늘해진 마음으로 돌아서려는 순간, 설혜의 고개가 뒤로 홱 돌아갔다.

‘방금 저 사내가 뭐라고 했지??

행사를 진행하던 점원도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묻고 있었다.

“손님, 화첩 받아 가셔야죠!”

“필요없습니다.”

“하지만 자하삼기의 화첩입니다. 호북에서 제일 잘나가는 초특급 미녀들의 화첩이란 말입니다. 돈 주고도 못 구하는 희귀 물건입니다요.”

그러자 자의 사내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됐습니다.”

무심함이 풀풀 묻어나는 어투였다.

“스무 병이면 화첩이 무려 열 개입니다. 열 개! 이건 팔아도 돈이 꽤 될 겁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선물이라 칠 테니 가지십시오. 대신에 다음부턴 화첩. 같은. 쓸데없는 것. 말고 안.주.나 넉넉하게 부탁드립니다.” 그러고는 허리를 반으로 접는 점원을 뒤로한 채 차라리 ‘나를 주게, 나를!’이라고 외치는 군중들을 헤치며 유유히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는 설혜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옷고름을 꽈악 움켜잡고 있었다.

‘감히 너 따위가!’

그리고 며칠 후, 그 사내를 청했다. 자존심 때문이라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거절당했다.

돈을 내지도 않았는데 만날 이유가 없고, 만나서 바가지 쓰고 싶지도 않다는 얼토당토않은 이유였다.

“나 설혜가 곁들임 안주보다 못하다는 것이냐?!”

설혜는 수치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호호호호, 재미있는 사내네요. 언니에게 꿈쩍도 하지 않다니 말이에요, 오호호호호. 이번에는 내가 해보죠. 나 풍혜가!”

설혜의 실패를 고소해하던 삼기 중의 풍혜가 설혜의 시대는 이제 한물갔다며 그 사내에게 접근했다. 비파 연주는 설혜보다 못했지만 노래에는 일가견이 있었고, 무엇보다 세 명 중 가장 육감적인 몸매를 지니고 있는 그녀였다. 그러나…….

“보기 좋게 거절당하는 모습, 정말 보기 좋았어요, 푸후훗.”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돌아온 풍혜를 향해 우혜가 웃으며 말했다.

“오호호호호호! 할 줄 아는 게 육탄 공세밖에 없는 여인을 누가 좋아하겠어요? 이번에는 지적인 제가 나서도록 하지요. 언니들은 구경이나 하고 계세요.”

긴 교소를 터뜨리며 삼기의 막내인 우혜가 나섰다. 쭉 뻗은 각선미와 지적인 화술이면 어떤 남자든 단번에 넘어오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적인 셋째께서도 무리였나 보지? 오호호호호.”

우거지상이 된 채 돌아온 우혜를 보며 풍혜가 깔깔깔 교소를 터뜨렸다.

“둘 다 실패했으면서 으르렁거리다니, 꼴불견이구나.”

설혜가 한마디 했다.

“왕 내숭은 빠져! 언제까지나 언니가 일등일 거라곤 생각하지 마!”

세 명 중 가장 입이 거친 우혜가 소리쳤다.

“뭐라고? 말 다 했느냐? 한번 해볼 테냐?”

“얼마든지!”

파지지지지지지지직!

세 명 모두 실패하자 이제는 세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튀기 시작한 것이다. 이대로는 자존심 때문에라도 참을 수 없었다.

“언젠가 언니들과는 승부를 가려야겠다고 생각했어.”

“나도 네 건방진 콧대를 눌러줘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으니 마침 잘됐네.”

“좋다! 저 사내를 먼저 함락시키는 사람을 승자로 삼도록 하지. 이대로 그냥 무시당해서야 자하삼기란 이름이 무색해질 테니 말이다.” 웬일인지 설혜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이긴 사람이 자하원의 최고이자 삼기의 새로운 우두머리가 되는 거야. 어때, 언니들?”

“좋아!”

“좋다!”

내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셋은 평소라면 결코 쓰지 않았을 적극적인 방법을 쓰기로 했다. 바로 사내의 본거지로 직접 쳐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녀들의 무기는 지금까지 꾸준히 가꾸어온 몸과 기예. 그 어떤 남자도 함락시키지 못하는 이 없다고 자신했던 그녀들이었기에, 이대로 물러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기다리던 때가 왔다.

어지간히 술을 즐기는지, 스무 병을 사간 지 며칠 되지 않아 또다시 사내가 찾아왔다. 이번에도 화첩은 필요없다고 거절했다. 그때 설혜가 나섰다.

“축하해요, 공자님.”

“축하라니 뭘 말입니까?”

자하삼기의 으뜸이자 자하원의 최고 인기인인 그녀가 직접 말을 거는데도 사내는 별로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이번에 저희 자하원의 우수 고객으로 뽑히셨습니다.”

“그렇습니까?”

“네, 그래서 공자님이 계신 곳으로 스무 병의 미주를 배달해 드리기로 했답니다. 저희 ‘자하삼기’가 직접.”

설혜가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만?”

자하삼기가 직접 간다는데도 사내는 전혀 흥미가 동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흠. 또한 특별 우수 고객님에게는 배달 시에 저희 자하원의 최고 특등급 명주인 ‘자하옥로’를 증정하기로 했는데도요?”

그러자 시큰둥해 보이던 사내의 눈이 갑자기 번쩍 뜨였다.

“자하옥로라면, 단 한 모금만 마셔도 저 드넓은 대초원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 속에서 백팔 명의 젊은 처자가 군무를 추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는 희대의 명주가 아닙니까?”

“네, 그렇죠. 잘 아시네요.”

‘넌 눈앞의 미녀보다 그런 상상 속의 미녀가 더 좋은 거냐!’ 하고 외치고픈 것을 그녀는 꾹 참아야 했다.

“그런데… 제 거처는 조금 멉니다. 번거로우실 텐데.. .?”

사내가 문득 곤란해진 얼굴로 덧붙였다. 그것은 좋은 징조였다. 저러니 더욱더 가고 싶어졌다.

“상관없어요!”

삼기가 동시에 외쳤다.

“조금 높은데…….?

“그것도 상관없어요!”

셋이 또다시 동시에 대답했다.

“굳이 오시겠다니 더 이상 말릴 수는 없겠습니다. 자하옥로도 꼭 마시고 싶고. 그렇다면 이곳을 이용하십시오.”

그러면서 사내는 설혜 앞으로 노란 패 하나를 내밀었다.

“안전수송, 모범접객. 쾌족문 ‘쾌적 택급교’?”

처음 듣는 곳이었다.

“그러실 겁니다. 무림의 신흥문파니까요. 처음 듣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요.”

그 말에 셋은 깜짝 놀랐다. 이 남자는 무림의 사람이었단 말인가?

“특등급 명주를 수송하는 일인데 그만큼 신중을 기해야지요.”

‘술이 미녀 셋보다 더 중요하냐!” 하고 외치고 싶은 것을 삼기는 다시 한 번 꾹 참아야 했다.

결전의 날은 바로 찾아왔다.

다음날.

삼기는 신속하게 쾌족문에 사람을 보냈다.

곧 두 명의 장한이 들고 있는 노란 ‘급행(急行) 택교(宅轎)’ 세 대가 도착했다.

마차가 아니라 웬 가마?

불안해하는 그녀들을 향해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자하옥로(紫霞玉露)’는 절대로 깨지는 일 없이 무사히 운송될 것입니다.”

사내가 미리 언질을 넣어놓은 모양인데, 그 내용이 심히 마음에 거슬렸다.

자하옥로는 사방이 푹신푹신한 솜과 천으로 가득 찬 특수한 상자에 넣어졌다. 술병을 다루는 그들의 손길이 그렇게 극상으로 지극정성일 수가 없었다. 마치 황후 를 모시는 듯했다.

“타시죠.”

그에 비해 그녀들에 대한 태도는 정중하기는 했지만 딱히 더 굉장하지는 않았다.

불안한 마음으로 자하삼기는 가마에 몸을 실었다.

겨우 두 명의 장한이 끄는데도 가마는 말처럼 빨리 달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 좌우로 이리저리 기울어지더니, 가마가 상하로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꼭 잡으십시오, 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이미 손이 창백해질 정도로 세게 손잡이를 잡고 있는 상태였다. 이 콧대 높은 세 미녀가 이리도 죽음을 가까이 느낀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그리고 겨우겨우 살아서 사내가 사는 곳에 도착한 세 미녀는 가마에서 내리자마자 속에 든 것을 모두 게워내고 말았다. 심한 멀미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지 말라고 했는데…….”

사내의 중얼거림에 자하삼기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목표를 앞에 두고 이게 무슨 추태란 말인가!

괴로워하는 그녀들을 보다 못했는지 사내가 다가오더니 그녀들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어딜 감히 함부로 손을 대냐고 뺨을 쳐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그의 손으로부터 따뜻한 기운이 강물처럼 흘러들어 오더니, 그녀들의 뒤흔들렸던 속을 차분하게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잘 오셨습니다. 저희 집, 노을이 보이는 절벽 끝에.”

겨우 멀미가 진정되어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긴 그녀들은 입을 쩍 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들 셋이 당도한 곳은 어느 이름 모를 바위산의 꼭대기 절벽 옆이었던 것이다.

대체 그 가마꾼들은 어떻게 그녀들을 이곳까지 데려올 수 있었을까?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미 주도권을 빼앗긴 그녀들은 경쟁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사내를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화려한 돗자리도 깔고, 맛깔난 음식이 담긴 육 단 찬 합도 열어젖혔지만, 사내의 관심은 오직 그녀들이 가지고 온 술에 집중되어 있었다.

“오오, 이 술이 바로 명품 중의 명품, 신의 땀방울이라고까지 불리는 명주 자하옥로군요. 과연 명불허전입니다.”

사내의 착하고 순진하고 약간은 흐릿해 보이는 눈이, 명주를 앞에 두자 맑게 개이며 별빛처럼 반짝거렸다.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것 같은 그런 눈빛. 순식간에 영혼을 빨아들일 것 같은 신비함과 날카로움이 한데 얽힌 눈빛이었다.

순간 홀린 듯 사내를 바라보고 있던 설혜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자하삼기, 호북제일의 미녀인 그녀들은 몸을 팔지 않는다. 오직 기예만 을 팔 뿐, 마음을 주는 것은 더욱이나 어림도 없다.

다른 삼기 중 둘은 이미 슬슬 기예 쪽에서 은근한 육탄 공세로 전술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아무리 승부라지만, 저 콧대 높은 것들이 저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서다니…….”

마음이 아예 없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잘만 하면 하룻밤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그러나 고소하게도 아직 저 ‘하’ 공자라는 사내를 함락시키지 못하 고 있었다. 남자 주제에 마치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아직 승부는 끝나지 않았어! 이제 곧 밤, 밤은 우리들의 앞마당, 우리들 기녀들의 전장!’

어둠은 인간의 이성을 덮고 숨겨진 욕망의 장막을 벗겨낸다.

‘승부는 이제부터야!’

바로 그때였다.

피유우우우우우!

붉은 노을 위로 신호탄 하나가 긴 꼬리를 그리며 날아올라 와 검은 꽃을 피운 것은!

신호탄은 하나가 아니었다.

그 뒤를 이어 여섯 개의 신호탄이 솟구치며 불꽃이 피어올랐다. 멀리서 보면 마치 한낮에 뜬 북두칠성처럼 보였다.

“저, 저게 뭐죠? 하늘에 웬 검은 불꽃이…… 너무 불길해요.”

여인들은 본능적인 두려움에 몸을 떨며 사내에게 무의식적으로 몸을 기대었다.

“저것은…….”

암벽 위에 짙게 드리워진 노을을 바라보며 태평하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사내의 눈빛에 처음으로 날카로운 예기가 스쳐 갔다.

“흑(黑)의 북두칠성(北斗七星)……!”

기울이던 술잔을 멈춘 사내의 입에서 조용하지만 무거운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설마 하 공자님께서는 아시는 건가요? 저 불길한 불꽃들이 무엇인지를?”

날카로운 눈으로 낮고 무거운 목소리를 흘려내는 그의 모습에 깜짝 놀라 설혜가 물었다.

“저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한 가지죠. 그건 바로…….”

언제 그랬냐는 듯 사내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이 따분한 생활이 오늘부로 종언을 구할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사내는 잠시 검은 별들을 향해 잔을 들어 올린 후 단숨에 들이켰다. 예라도 표하는 것일까? 아니면 인사라도 하려는 것일까? 그의 입가에는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안타깝다니, 하 공자님께서는 따분한 게 좋으세요?”

풍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물론이지요. 이 따분한 평화가 없다면, 제가 어떻게 그대들 같은 미녀들과 이런 풍광 좋은 곳에 앉아 느긋하게 한 잔의 미주를 기울일 수 있겠습니까?”

“그, 그런가요?”

우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따분함과 지루함은 그녀들의 업계에서는 곧 악(惡)이었다. 물리치고 제거해야 할 최고의 적인 것이다. “풍류라는 건 본디 따분할 만큼의 평화를 먹고 무럭무럭 자라는 녀석들이지요. 아아, 놀고먹으며 남는 시간엔 수련이나 하고 살려던 소생의 장대한 계획을 물거품 으로 만드는 것들입니다, 저 검은 별들은.”

그러면서 장난인지 진심인지, 하늘에 뜬 검은 불꽃들을 노려보더니 자못 원망스럽다는 듯 혀를 차며 술잔을 기울인다.

설혜는 이때까지 수없이 많은 남자들을 봐왔고, 그런 그녀의 기준에 의하면 이런 남자는 절대로 조용히 지낼 수 없었다.

눈은 마음의 거울이라고 하지 않던가.

때때로 칼날의 섬광처럼 날카롭게 빛나는 저 눈빛을 보고 있으면, 그가 가만히 있으려 해도 세상이 가만히 놔두지 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무언가 커다란 것을 품고 있지 못한 사람은 저런 눈빛을 가지지 못한다.

“호호호. 공자님 같은 대장부라면 모름지기 청운의 꿈을 품어야 하지 않나요?”

옆에 있던 풍혜가 은근슬쩍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청운의 꿈? 이를테면 입신양명이나 부귀영화, 세계정복 같은 것 말입니까?”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한 말투였다.

“그, 글쎄요, 소녀 같은 아녀자들이야 잘 모르지만, 하 공자님은 무림인이시죠?”

풍혜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 얼른 설혜가 먼저 나서 질문했다.

“일단은 그렇습니다.”

사내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기 저쪽에 부러져 있는 목도들은 다 무엇인가요? 하 공자님이 수련하던 흔적들 아닌가요? 저렇듯 열심히 하셨다는 건 무언가 이루고자 하는 일 Ol…….”

설혜가 말끝을 흐리자 사내가 답했다.

“일부러 부러뜨린 겁니다.”

“일부러요?”

“그래야 열심히 한 것처럼 보이지 않겠습니까?”

말문이 막힌 설혜 대신 눈치 빠른 우혜가 끼어들었다.

“그, 그럼 저쪽에 부러진 채 쓰러져 있는 아름드리나무들은요?”

“며칠 전에 비가 참 많이 왔었죠.”

“그, 그럼 저기 저 산산조각 난 돌무더기는요? 저거야말로 공자님의 무위(武威)가 아닌가요?”

“아, 저건 얼마 전에 지진이 났을 때 생긴 겁니다만?”

사내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진지한 얼굴이었다. 기가 막힌 설혜와 우혜를 두고 풍혜가 다시 물었다.

“그럼 하 공자님이 할 수 있는 건 대체 뭔가요? 무림일통이나 세계정복 같은 거친 건 싫다는 건가요?”

“하하하. 좋고 싫고를 떠나서, 안 하기로 이미 결정했습니다.”

“안 하기로 하셨다는 건 설마 예전엔 그런 걸 하고자 하셨다는 이야기인가요?”

설혜가 다시 짚어내듯 묻자 사내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글쎄요, 과연 어땠을까요? 그건 설 소저의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그 편이 더 재미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풍혜는 그만둘 생각이 없었는지 재차 질문을 던졌다.

“흥, 공자님은 정말 수수께끼투성이군요. 왜 그만두셨는지 말해주시면 안 되나요?”

그러자 잠시 턱에 손을 괸 채 침묵하던 사내가 짧게 대답했다.

“난, 둘째거든.”

그 말은 투명할 정도로 가벼운 한마디였지만, 어째선지 그녀들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마치 한없이 얇고 투명한 면도가 그와 그녀들 사이를 차갑게 저 미듯 갈라놓으며 날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삐삐삐 삐삐삐삐!

난데없이 품에서 짧은 피리를 꺼내어 분 사내는 방금 전까지의 대화는 없었던 일이라는 듯 빙긋 웃으며 여인들에게 말했다.

“오늘의 야유회는 이걸로 끝내야겠군요. 원거리 청원 택급’을 불렀으니 곧 당도할 겁니다.”

그의 말대로 잠시 뒤 노란 옷을 입은 장한들이 끄는 노란 가마 세 대가 마치 나는 듯이 풀숲을 넘어 당도했다. 마치 부르면 언제든지 다시 올 수 있도록 적당한 거리 에서 대기하고 있었던 듯했다.

“쾌속 택급교’의 부름 가마 세 대, 부르심을 받고 당도했습니다.”

“음, 생각보다 빨리 왔군요.”

“아닙니다, 공자님. 누구의 명이라고 저희들이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언제든 부르시면 어디로든 모시겠습니다.”

자하원의 이름난 세 기녀는 샛노란 부름 가마에 몸을 실으면서, 약속이라도 한 듯 사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녀들의 눈에는 진한 아쉬움이 가득했다.

그러나 사내는 담담한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을뿐이었다. 가마의 문이 닫힌 후, 여섯 장정들은 사내에게 인사를 한 다음 노란 가마를 지고 나는 듯이 산 을 내려갔다.

“흐흠, 흑사자패(黑獅子牌)의 주인도 없이 십천군(天君)이 움직이기 시작했단 말이지?” 사내는 씁쓸한 것인지 재미있어하는 것인지 모를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눈을 반짝였다.

“그렇다면 게으른 주인인 이 몸이 별수없이 나타나 드려야겠군.”

그리고 그때, 어느덧 지평선 전체가 불꽃에 휩싸인 듯 짙게 노을 진 산봉우리로 한 마리의 검은 매가 날아들었다. 그를 향해 날아 내린 매의 다리에 검은 끈으로 전 서가 묶여 있는 것을 보고, 그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기광이 번뜩였다.

전서를 펼쳐 본 그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침중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밤이 다가오는군.”

언젠가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건만, 설마 이런 식으로 올 줄은 몰랐다.

그에게 있어 하나뿐인 형님은 밝아오는 새벽이었기에, 그 자신은 저물어가는 노을이 되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물러났다.

셋째 누이의 생각은 달랐으나, 그는 큰형님만을 필요로 하는 세상이 영원하길 바랐다. 그가 워낙 큰형님을 좋아해서이기도 했지만, 지금 강호에는 모든 것을 포용 하는 한낮의 태양처럼 밝고 호탕한 이가 필요했다. 자신은 저 저녁놀처럼 대지를 붉게 물들이는 전란의 시기에, 온 세상을 피로 물들이기 위해 벼리어진 한 쌍의 칼 날일 뿐이었다.

따분한 평화 시에는 쓸모가 없는 존재. 그 대신 그는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기에 오히려 기쁘게 하루하루를 즐길 수 있었다.

베어야 할 무언가가 주어지지 않았기에 이렇듯 잠정 승인된 ‘가출’ 같은 것도 할 수 있었거늘, 어찌 그가 이 평화를 싫어할 수 있었겠는가.

“여섯째 누이보다는 못해도 그 아가씨의 비파 소리는 들어줄 만했는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그가 슬쩍 손을 뻗자, 저 멀리에 팽개쳐진 듯 떨어져 있던 두 자루의 쌍도가 휘리릭 날아와 그의 손에 잡혔다.

놀라운 허공섭물의 경지.

그러나 이 쌍도의 실제 무게를 아는 사람이라면 두 번쯤 더 놀라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리라.

바위산에 작별 인사라도 할 셈인가?

사내는 자신의 뒤에 솟아 있는 암석 기둥을 향해 몸을 빙글 돌리더니, 가볍게 두 손을 흔들었다.

철컥.

사내의 주변에서 무언가가 반짝이는 동시에, 두 자루의 쌍도가 살며시 소리를 냈다. 마치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방금 전 칼집에서 빠져나왔다가 다시 들어가기 라도 했다는 듯이.

“역시 아직은 미완성인가……. 곧 끝이 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불만스러운 듯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을 향해 걸었다.

쿠르르르르르르릉!

쩌저저저저저저적!

뒤쪽의 거대한 석주에 거미줄처럼 방사선의 금이 가더니, 안에서 밖으로 돌들이 요란하게 부서졌다. 석주는 곧 한 무더기의 자갈로 화(化)해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사내는 여전히 관심도 없다는 듯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이런 미완성 작품 따위엔 돌아볼 가치도 없다는 듯이.

“하지만 더는 기다려 줄 수 없겠지요? 저는 아직도 ‘그것’을 보지 못했는데 말입니다.”

누가 옆에 있기라도 한 듯한 중얼거림이었다.

그는 정말로 보고 싶었다.

진짜 강함.

진짜 무(武).

그것은 가까이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그 어떤 것과 유사했다.

그는 점점 더 짙어지는 저녁노을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허리춤에서 검은 사자 모양의 패가 흔들거렸다.

그의 이름은 갈중하. 저 붉디붉은 노을과 같은 이름을 가진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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