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29권 3화 – 어둠 끝에 닥친 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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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29권 3화 – 어둠 끝에 닥친 어둠

어둠 끝에 닥친 어둠

-달리는 자와 기다리는 자

신용산객잔 아래로 연결된 비밀 통로는 생각보다 길었다.

만들자마자 완전히 폐쇄되어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탓인지 통로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어 걸을 때마다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힐 정도였다.

진령은 피어오르는 먼지에 코가 간질간질했지만, 혹시나 기척을 들킬까 봐 재채기를 꾹 참고 억눌러야만 했다. 숨소리조차 죽인 채 계속해서 캄캄하고 답답한 통 로를 걸어가는 일은 생각보다 상당한 고역이었다. 든든한 바람막이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염도, 빙검 노사와도 떨어지고 나니 더더욱 마음이 불안했다.

“이럴 때 궁상이 옆에 있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필이면 그 인간은 왜 꼭 이럴 때 곁에 없느냔 말이다. 진령은 순간 짜증이 확 치미는 동시에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며 진저리를 쳤다. 혼자가 아닌데도, 천무학관 의 다른 동료들이 있는데도 갑자기 심장의 반쪽이 사라진 듯 가슴이 헛헛했다.

“대사자도 나처럼 외로움을 느낄까? 비록 그런 대사형이라도 곁에 없으니.

가슴에 손을 올린 채 진령이 시선을 들자, 망설이는 기색이라곤 일절 느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걷고 있는 나예린의 등이 보였다. 한 걸음 한 걸음에 강한 확신이 느껴졌다. 마치 안심하고 따라오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하긴 대사형과 사귀려면 신경이 고래 힘줄보다 더 질겨야 할 거야. 역시 저 정도 배짱은 있어야 되는 건가?”

진령은 나예린의 대담함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새삼 대단해 보이는 대사자 덕분에, 묘하게도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난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위험이 닥친 객잔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면 이 불안감도 함께 사그라질 거라 생각하며 견뎌내었다. 하지만 객잔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불안은 사그라지기는커 녕 점점 더 진령의 마음속 한복판을 점령해 가고 있었다.

한편, 당당하게 앞장서서 걷고 있는 나예린도 기실 진령의 생각처럼 마음이 편한 상태는 아니었다.

“곧 뒤쫓아오시겠다던 염도, 빙검 두 노사님도 소식이 없고……. 이미 그 두 분을 기다리는 건 의미가 없겠구나.’

나예린은 직감했다. 이미 그 두 사람이 쉽사리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말았다. 안다고 해서 뭔가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불 안만 가중될 뿐이지만, 이런 것은 왠지 꼭 알게 되고 말았다.

“역시 그 신마가의 대부인이 움직인 거겠지.’

신마팔선자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그녀들만으로 염도와 빙검을 제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만일 그 큰마님이라 불리는 대부인이 직접 나섰다면…….’

염도와 빙검 노사는 이미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몸이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영원히.

그렇게 되면 남아 있는 구출단의 일원들은 어쩌면 좋단 말인가.

‘류연… 당신이 지금 곁에 있다면 이토록 막막하지는 않았을 것을…….?’

나예린은 무심결에 떠올린 생각에 문득 놀라고 말았다.

언제부터 자신이 이토록 자연스럽게 한 남자를 의지하게 되었을까? 이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게 사내라고 생각했는데.

나예린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려는 상념을 억제하며 약해지는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믿는 거다, 자기 자신을. 홀로 떨어져 있어도 비류연이 안심할 수 있도록, 그가 자신에 대해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그리하여 지켜야 할 사람 들도 마음 놓고 그녀에게 맡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은 함께 있는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다.

“길을 좀 더 서두르도록 하죠.”

비밀 통로 중간의 조금 넓게 나 있는 빈 공동에서 발을 멈추기 시작한 사람들을 향해, 나예린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멈춰서 노사님들을 기다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화섭자를 들고 돌아보는 담 총관, 다섯 번째 거점인 신용산객잔의 총관이자 실질적인 관리자였던 그의 말에 나예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여기서 머뭇거리다가 추적대를 만나면 그때는 두 분 노사님도 힘에 부치실 겁니다.”

“그래도…….”

아무래도 미덥지 못한지 담 총관은 여전히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나예린이 나직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야 합니다, 지금 당장.”

그녀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어떤 확신과도 같은 신비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분들은 곧 따라오실 겁니다. 서두르지요.”

곧이어 한층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나예린이 말했다.

‘곧… 이라……. 따라오지 못할 것을 알고 있으면서…….”

나예린의 얼굴에 자조 섞인 쓸쓸한 미소가 한순간 떠올랐다가, 누구도 눈치채기 전에 금세 사라졌다.

“그, 그것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이제 일각만 더 가면 출구입니다. 많지는 않지만 군데군데 추적자들을 따돌리기 위한 기관들이 장치되어 있으니 조심해서 따 라오십시오.”

다시 길을 안내하는 총관, 담환의 발걸음은 그 자신도 모르는 틈에 어느새 빨라져 있었다.

“자. 서두르세요, 언니.”

나예린이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은 채 조용히 따라오고 있던 영령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 그, 그래……. 그러자꾸나.”

망아(忘) 상태에 빠지기라도 한 듯 영령의 존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하던 나예린이 갑자기 돌아보며 말을 걸자, 영령은 깜짝 놀라며 말을 더듬 고 말았다. 튀어나온 것은 또 반말이었다.

‘왜 이럴까, 정말? 말을 더듬을 정도로 당황해서는 또다시 하대(下待)라니…….?

그러나 여동생을 대하는 듯한 영령의 반말 대꾸에 나예린은 화내기는커녕 살포시 미소만을 지을 뿐이었다.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듯한 미소였다.

“정말 미치겠네.’

차라리 그것 보라고, 자신의 말이 맞지 않느냐고 잘난 척하거나 의사를 강요했다면 영령은 격렬하게 반발했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 말라는 듯한, 모든 것을 이해한 다는 듯한 그 깊은 미소에는 뭐라고 한마디 반박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저 아이를 지키거라! 저 아이를 지키지 못하면 넌 아마 평생 후회하게 될 것이다! 내가 보증하지. 누구처럼 실수하지 마라. 영원히 그 짐을 지고 살아가야 하는 수가 있다.”

귓속에 가시가 되어 박히기라도 했는지, 헤어질 때 해준 염도의 말이 그녀의 귓가에 메아리처럼 맴돌았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리가!’

귓가에 달라붙은 망령을 떨쳐 버리기라도 하듯 영령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대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이제는 나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확신할 수가 없구나.’

시간이 지날수록 혼란이 가시기는커녕 점점 더 증폭될 뿐이었다.

춥다.

으슬으슬, 차가운 어둠이 그녀의 정신을 좀 먹고 있기라도 한 듯 몸과 마음이 싸늘했다. 영령은 그대로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싶었다. 지독히 고독했다.

마치 캄캄한 한밤의 망망대해 속에서 홀로 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때, 오한으로 떨리는 그녀의 어깨를 굳게 잡아주는 따뜻한 손 하나가 있었다.

“얼굴이 파랗게 질렸군요. 왜 그러세요, 언니?”

화들짝 놀란 영령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렇게 캄캄하던 주변이 어느 정도 밝아져 있었다.

““예린아…….”

그녀의 어깨를 잡아준 것은 다름 아닌 나예린의 손이었다.

“아, 아니다. 아무것도. 잠시 한기가 들었을 뿐이다.”

영령은 반대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며 말했다.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북받쳐 올랐다.

“정말 괜찮으신가요?”

“무, 물론 괜찮고말고. 괜찮다는데 왜 자꾸 귀찮게 구는 것이냐?”

‘이, 이게 아닌데…….’

버럭 소리를 지르면서도 속으로는 후회막급이었다.

그런 영령을 바라보는 나예린의 눈에는 여전히 그녀에 대한 연민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눈물이 맺혀 있는걸요?”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어조였다.

“누, 눈물이라니? 그럴 리가 없다! 거짓말하지 마라!”

영령은 당황하며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녀의 손등을 타고 촉촉한 물기가 느껴졌다.

“……!”

대체 어느새?

“조심하세요. 수기(水氣)가 등줄기를 타고 너무 강하게 솟구쳐 뇌를 침범하면, 주화입마에 걸려 한없이 침울해질 수 있으니까요. 잊으셨나요? 그걸 어린 제게 가 르쳐 주신 분은 바로 다름 아닌 령 언니, 당신이셨던 것을.”

“나, 나라고?”

“그럼요. 기억 안 나세요? 화기(火氣)가 너무 강하면 척추의 신경을 태워 버려 사람을 광기에 빠져들게 만들고, 물의 기운, 즉 음기가 너무 강성하여 척추를 타고 솟구쳐 뇌를 침범하면 사람의 정신을 한없이 우울하게 만든다, 그것이 바로 ‘주화’와 ‘입마’다. 제게 그렇게 가르쳐 주셨지요.”

영령은 저항이라도 하듯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기억에 없었다. 있어서도 아니 되었다.

그때, 영령의 머릿속 한구석을 꿰뚫듯 스쳐 가는 뭔가가 있었다.

“그러니까, 알겠지? 이 언니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몰라? .잘 들어! 이제… 본론. 몸과 정신.. 항상 똑바로.. 유지. 해. 지켜. 괴로워도… 지켜내… 내가 도와줄게! 그 어떤 놈도. 상처…… 따위 입히게.. 놔두지 않아! 왜냐하면..

마음… 어린…… 너의 마음을! 아무리……

왜냐하면, 왜냐하면, 왜냐하면, 왜냐하면, 왜냐하면, 왜냐하면… 뭔가 중요한 말이 뒤에 더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더 이상은 도무지 떠오르질 않았다.

‘큭…….?’

영령은 갑자기 머리가 빠개질 듯 아파졌다.

“괜찮으세요? 안색이 더욱 창백해졌어요.”

짝!

“저리 가! 내게 가까이 오지 마라!”

영령이 나예린의 손을 세차게 내치며 소리쳤다.

….언니……..?”

붉게 변한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며 나예린은 망연자실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영령도 당황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내 얼굴을 표독스럽게 굳히며 다시 외쳤다.

“저리 가라. 가까이 오지 말란 말이다. 네가 가까이 오면 날 아프고 괴롭게 할 뿐이다. 어서 저리 가!”

명백한 거부, 혼돈, 수치, 그리고 고독.

온갖 감정이 영령의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나예린은 영령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현 상황에서 자신이 더 이상 접근하면 그녀를 정신적인 위험에 빠뜨릴지도 모른다는 결론을 내렸다. 더구나 영령이 괴로 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그녀 자신에게도 괴로움이었다.

“제가 언니를 괴롭게 한다면, 어쩔 수 없지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나예린은 쓸쓸한 표정으로 포권을 취한 다음, 일행의 선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멀어지는 나예린의 등을 바라보는 영령의 눈동자에 만감이 교차했다. 뒤늦게 내 뻗은 손은 허무하게 텅 빈 허공을 움켜쥘 뿐이었다.

한순간 밝아졌다고 생각했던 미로가 다시금 새카만 어둠으로 꽉 들어찼다.

어디에도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여깁니다. 이 기관 장치를 누르면 비밀 문이 열릴 겁니다.”

마침내 비밀 통로의 끝에 도착한 담 총관이 한층 밝아진 얼굴로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벽 오른쪽에 있는 동그란 기관 장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설마 밖에 매복자는 없겠죠?”

나예린의 옆에 와서 멈춘 진령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담 총관의 얼굴은 여전히 밝았다.

“걱정 마십시오. 이 문 너머는 성 외곽에 펼쳐진 숲입니다. 성곽 너머에 위치한 한적한 곳이죠. 누가 그런 곳에 성내와 통하는 비밀 통로가 있다고 생각하겠습니 까?”

“역시 통로가 길면 길수록 탈출구를 예측하긴 힘든 일이겠지요.”

묵묵히 일행의 뒤쪽에 섞여 있었던 공손절휘가 담 총관의 말에 긍정했다. 그러고는 굳어 있던 표정을 펴며 한마디 더 덧붙였다.

“후와, 이 갑갑했던 통로도 이것으로 작별이군요!”

모용휘나 비류연 등을 따라가지 못한 그는, 딱히 대화를 나눌 상대도 없고 그럴 만한 분위기도 아니었기에 적당히 일행의 뒤쪽에 위치를 잡고 비밀 통로를 이동해 왔다. 그러다 보니 그의 뒤에는 왠지 입장이 미묘한 일행이라 할 수 있는 무명, 장소옥, 옥유경 등이, 그리고 바로 앞에는 진령과 영령, 금영호 등이 위치하게 되어, 여태껏 싫든 좋든 침묵을 지키고 있던 터였다.

그가 걸어오면서 들은 것이라고는 뒤에서 두어 번 장소옥이 무명에게 타박을 놓는 소리뿐이었다. 그 외에는 앞뒤로도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데다, 안 그래도 그가 끼어들 곳이라곤 전혀 없었다. 금영호는 그가 말을 건네면 받아줄 것 같은 상대였으나, 왠지 그랬다가는 대인 관계에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될 것 같은 위기감이 들었다. 때문에 공손절휘는 그냥 어둠 속에서 내내 알 수 없는 고독을 소처럼 되새김질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마치 십 년 만에 침묵을 깨고 입을 연 듯한 기분에 감격하고 있을 때, 일행 맨 앞쪽에서 걸어왔던 마하령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쩐지, 그래서 통로가 그렇게 길었군요. 이상할 정도로 오랫동안 걷는다 했더니 성벽 바깥쪽일 줄이야.”

답답한 건 앞이나 뒤나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통로가 갑갑하셨던 게로군요.”

빙긋 웃으며 말하는 담 총관의 한마디에 마하령은 머쓱한 듯 괜히 콧방귀를 뀌었다.

“흥, 그냥 비좁은 곳보다는 넓은 곳이 더 좋은 것뿐이에요.”

사실은 폭이 좁고 쓸데없이 길기만 한 통로에 꽉 끼어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마하령은 아까부터 속으로 치를 떨던 참이었다. 좁은 곳은 딱 질색이었다.

“하하, 그렇습니까? 아무튼 만든 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비밀 통로입니다. 노출되었을 가능성은 절대 없을 겁니다.”

총관담환이 자신있게 말했다. 용천명이 마하령의 곁에 한 발짝 다가서며 부드럽게 말했다.

“지금은 담 총관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소, 하령. 일단 문 너머에 살기는 느껴지지 않으니 별일없을 거요. 설혹 무슨 일이 있다 하더라도 당신은 내가 지켜줄 테니 걱정 마시오.”

그러자 마하령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누가 걱정한다는 거예요? 비록 ‘가냘프고 연약한 몸’이지만, 제 몸 하나는 저 혼자서도 지킬 수 있어요! 천명, 당신의 대장은 누구죠?”

“물론 하령 당신이 나의 대장이오.”

망설임없이 나온 용천명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흡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마하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당신의 대장은 나 마하령이에요. 하지만… 뭐, 꼭 지켜주겠다면 굳이 말리진 않겠어요.”

말은 톡톡 쏘면서도, 은근슬쩍 용천명에게 몸을 기대는 마하령이었다.

“물론 난 당신을 지킬 거요. 나 용천명만 믿으시오.”

“나도 천명 당신을 지켜주겠어요. 당신은 나의 부대장이니까요.”

나만의…… 라고 말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허참, 이거 눈꼴셔서 차마 못 보겠네요. 어이쿠, 연인 없는 사람 어디 서러워서 살겠나?”

두 남녀가 하는 꼴을 기가 막힌다는 듯 다채로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금영호는 점입가경인 두 사람의 행태에 두터운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부러운 것이다. 가문도 빵빵하고 돈도 빠방한 자신에게 연인이 없다니! 이건 잘못되어도 뭔가 크게 잘못된 게 분명하다고 확신하는 금영호였다.

“예전엔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난 견원지간이었으면서…….”

언제부터 저렇게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닭살을 양산하는 사이가 되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가냘프다니, 대체 누가…….”

투덜투덜하며 삐딱한 표정으로 입을 놀리던 금영호는 마하령의 쏘아보는 시선을 깨닫고는 그대로 합죽이가 되었다.

‘죽고 싶나요??

그 눈빛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아무 데도 없었다.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하하하하하! 제가 무슨 말 했나요? 전 아무 말도 안 했는데요?”

그제야 마하령은 희번덕거렸던 눈빛을 거두어들였다. 그럼에도 금영호의 심장은 여전히 진정되지 않은 채 쿵쾅거렸다.

‘어휴, 농담 한마디 잘못했다가 도끼눈에 찍혀 죽는 줄 알았네.’

용천명과의 일이 매듭지어진 이후, 뭔가를 한 꺼풀 벗었는지 점점 더 책임자로서의 위엄을 갖추어가고 있는 마하령이었다. 예전의 날카롭고 앙칼지고 오만한 모습 이 서서히 엷어지고, 날이 갈수록 더욱 당당한 모습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게다가 언뜻언뜻 귀여운 모습도 보이고 있어서 추종자가 예전보다 상당히 늘어가고 있는 추세였다.

“그럼 문을 열겠습니다.”

그르르릉.

담총관이 기관장치를 건드리자 미약한 작동음과 함께 비밀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으잉? 으악! 이, 이게 뭐야! 에퉤퉤퉤퉤!”

입에 들어와 사각거리는 모래를 뱉어내며 금영호가 외쳤다.

“걱정 마십시오. 뭐, 개미들이야 몇 마리 섞여 있을지도 모르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습니다. 독도 없고요.”

“에퉤퉤! 그런 문제가 아니잖소!”

특이하게도 기관장치와 함께 열린 것은 그녀들의 앞쪽 문이 아니라 머리 위, 천장 쪽이었다. 천장의 문이 열리면서 그 위에 위장용으로 쌓여 있던 모래의 일부가 쏟아져 내렸고, 마침 거기에 우연찮게 금영호가 서 있었던 것이다.

“풉! 어머, 너무 깜짝 놀라서 어쩐지 웃음이 나와 버렸네요.”

모래를 뱉어내는 금영호를 보며 마하령이 고소하다는 듯 웃었다.

.그런데, 그럼 이쪽 문은 대체 뭐죠?”

진령이 두 마리 용 조각까지 들어가 있는 정면의 문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자 담환이 웃으며 말했다.

“그야 가짜 문이지요. 하하, 참 그럴싸하죠? 하지만 저라면 그 문으로는 안 들어갈 겁니다.”

“그건 왜죠?”

진령의 질문에 담 총관은 자못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그야 저 뒤에는 살인 기관장치가 가득한 죽음의 절진이 도사리고 있으니까요.”

“…..!””

“사람들은 보통 겉모습에 잘 속게 마련이죠.”

담 총관의 말에 마하령은 약간 오싹함을 느끼며 요란하게 장식된 정면 문을 바라보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상식의 허를 찌르는 함정이란 것이군요?”

만일 담환의 안내 없이 이 통로에 들어왔다면..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웃으며 죽음의 절진에 발을 들여놓았으리라.

“이 경우엔 상식 그 자체가 함정이지요. 더구나 다급하고 비상시일수록, 세심한 데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어지는 게 보통이기 때문에 의외로 다들 잘 낚인답니다.” 마치 오늘 점심은 이런저런 조리법으로 만들었습니다, 하고 말하는 듯한 가벼운 말투였으나 그 안에 담긴 의미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그들이 오늘 이 함정에 빠지지 않았던 건 그들이 담환의 ‘적(敵)’이 아닌 ‘아군’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마음에서도 입에서도 한동안 찝찝함이 가시지 않을 태세였으나, 고개를 들자 천장에 열린 문 사이로 밤하늘에 걸린 달이 금영호의 눈에 들어왔다.

차가운 밤공기가 숲 내음과 함께 통로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폐부까지 시원해지는 신선한 공기였다.

“자, 그럼 후딱후딱 이 답답한 통로를 빠져나갑시다.”

남들보다 몸이 퉁퉁한 탓에 남들보다 배로 갑갑함을 느끼고 있던 금영호였던지라 이곳을 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기다리세요.”

뛰쳐나가려던 금영호의 발걸음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왜 그러십니까, 나 소저?”

금영호가 씰룩씰룩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를 멈춰 세운 것은, 출구에 도달한 일행이 다들 안도하며 대화를 주고받기 시작하자 도리어 한마디도 없이 침묵을 지 키던 나예린이었다.

“잠시 기다려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뭔가 이상한 낌새라도 느끼셨습니까?”

담 총관이 긴장하며 물었으나 나예린은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그럼……?”

의아해하는 담 총관의 질문에 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답했다.

“그냥, 입니다.”

“그냥…… 이오?”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하겠네요.”

옆에서 그 대화를 듣던 금영호의 볼이 다시 한 번 씰룩거렸다.

“믿지 못하시는 듯하군요.”

그 말에 금영호가 재빨리 입을 열어 말했다.

“네? 아뇨, 당치도 않습니다. 아, 아하하하. 좀 기다리죠 뭐, 아하하하.”

성격상 다른 사람 말은 그냥 무시할 수도 있지만, 대사저 격인 나예린의 말을 무시했다가는 나중에 돌아올 후환이 두려웠다. ‘그가 어떤 제재를 어떻게 가할지 알 수 없는데 어찌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상태에서 일각이 지났다.

“……”

깊은 침묵이 통로 안을 가득 메웠다. 입을 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금영호가 다시금 대표로 입을 열었다.

“음, 저기, 대사저?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만?”

“그렇군요. 아직은 아무 일도 안 일어났군요.”

자신의 예상이 틀렸다는 것에 대해서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지, 아니면 아직 그 확신이 변하지 않은 건지 나예린의 대답은 담담하기만 했다.

“그럼 이젠 나가도 되는 거겠죠?”

“글쎄요, 그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루 종일 이런 좁고 답답한 곳에 틀어박혀 있을 순 없지 않습니까?”

“일각 정도 더 기다려 보는 게 어떨까요?”

나예린의 반문에 금영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겨우 일각 가지고 뭔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게다가 이미 한 번은 말씀대로 기다렸지 않습니까?”

두 번은 싫다는 이야기였다.

“그럼, 그러지요.”

나예린은 약간 불만스러운 듯했지만, 금영호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나가고 싶어하는 기색이 너무나 역력해서 거부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하면 또다시, 보이지 않는 마음의 불만이 그녀를 향해 쏟아져 들어올 거라는 걸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 담 총관. 이제 어떻게 하면 됩니까?”

신이 난 목소리로 금영호가 물었다.

“저기…… 좀 더 기다려 보는 게 어떻습니까? 일각 정도는 별로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지 않습니까?”

담환은 찜찜했다. 그림자 속에서 일하는 자답게 그는 위험을 본능적으로 감지하는 능력이 다른 이들보다 월등히 발달되어 있었다. 그런 그가 보기에 나예린의 말 은 왠지 무시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위험을 경고하는 자가 하나라도 발생하는 경우엔 좀 더 신중을 기하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다.

“여기서 더 지체했다가 추적이 따라붙어서 우리들이 몽땅 잡히면 담 총관이 책임질 겁니까?”

“그야 그럴 수는 없죠.”

담환한테 한 말이었지만 은근히 나예린도 들으라고 한 말이나 진배없었다. 담환은 좀 더 강하게 주장해 볼까 했으나, 딱히 나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기엔 사람 들을 설득시킬 만한 근거가 없었기에 포기하기로 했다.

“하아, 알겠습니다. 사다리를 내리지요.”

담환이 오른쪽 벽의 한곳을 꾹 누르자, 나무 계단이 주르륵 미끄러지듯 내려왔다.

“여러분! 나가시죠.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단,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저 때문이라고만은 하지 마십시오. 저는 분명히 반대했으니까요.”

이렇게 못을 박아둔 다음, 담 총관은 화섭자를 든 채 천장 문으로 통하는 나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화섭자가 막 천장에 열린 문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순간.

“멈추세요!”

가만히 있던 나예린이 담 총관을 향해 급히 손을 뻗으며 외쳤다.

나예린의 말에 신경을 쓰고 있던 터라, 무의식중에 담환의 몸이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촤라라라락!

그녀의 소매 안에서 긴 비단 끈이 채찍처럼 뻗어 나가더니 담환의 몸을 그대로 끌어 내렸다.

“대체 무슨 일…….?”

다음 순간.

펑!

느닷없는 폭음과 함께 담환이 들고 있던 화섭자가 불이 붙은 채 그대로 터져 버렸다. 그러자 붉은 반딧불 무리 같은 불티가 지푸라기와 뒤섞여 허공에서 나풀나풀 날렸다.

만일 그가 순간적으로 멈칫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나예린이 손을 제때에 쓰지 않았다면 그의 머리통은 신 용산객잔의 경쟁 업체인 황학루 오 층에서 떨어진 수박처럼 산산이 부서져 나가고 말았으리라.

“헉! 이, 이게 대체…….”

놀란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린 채 통로 안으로 몸을 숨긴 담환은 간담이 서늘해져서 말을 잇지 못했다.

“바, 방금 그 공격은 대체 뭐였죠? 검기류는 분명 아니었는데?”

공손절휘는 손잡이만 달랑 남은 화섭자의 끝동을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마하령이 그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검기류의 장거리 공격이었다면 날아오는 궤적이 보였을 거예요. 하지만 방금 건 어떤 전조도 없이 그냥 닥쳐온 느낌이었어요! 격공장(隔掌) 계열의 장 공(掌功)이었을까요?”

“설마! 소림의 백보신권(百步神拳) 같은 원거리 격공권이 아니라면 이런 위력은 내기 힘들 텐데요?”

진령은 마하령의 말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최소한 십장(丈)의 거리를 격하고도 이만한 위력이라니…….”

기척을 감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면 최소한 십장 밖에 배치되어 있었다는 얘기였다.

“절정고수가 아니라면 삼 장 이상의 거리에서는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게 바로 격공계(隔空系)의 무공인데…….”

“맞아요. 허공을 가로지르는 도중에 대부분의 위력이 소실되기 때문이죠.”

진령의 말을 마하령이 도중에 가로챘다. 용천명도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게다가 격공장 특유의 파공성도 들리지 않았소, 하령.”

격공장이든 격공권(隔空拳)이든 격공지(隔空指)이든, 허공을 격하여 공격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 거센 공기의 흔들림이 발생하며 특유의 파공성을 내게 마련 이다. 그 거센 공기의 흔들림이야말로 파괴력을 전달하는 데는 필수적인 파동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뭐가 날아온 거죠?”

“쳇, 어떤 종류의 기습인 줄 알아야 대비를 하든 말든 하지!”

아까부터 나가고 싶어 안달이 났던 금영호가 옆에서 참지 못하고 불만을 터뜨렸다.

차라리 활이나 창칼 같은 기습에 대처하는 데는 마음이 편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암습은 그 종류를 알지 못하면 기습이 오는 걸 알면서도 당할 위험이 있었다. 이미 그들은 매복에 당한 것으로 한 수, 아니, 서너 수 쯤 먼저 빼앗긴 상황이었다.

“아마 격공장 계열이 아니라 음공(功) 계열일 겁니다.”

가만히 지켜보다가 조용히 입을 연 것은 다름 아닌 나예린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나예린을 향해 쏠렸다.

“음공이라고요? 음악 소리는커녕 숨소리조차 들은 기억이 없었는데?”

마하령은 선뜻 믿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마 ‘무음탄주일 겁니다.”

나예린의 그 한마디에 모두들 깜짝 놀랐다.

“무음탄주라면 설마… 그 무음탄주를 말하는 건 아니시겠죠?”

진령이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뇨, 안타깝지만 바로 그 무음탄주예요.”

그 단호한 대답에 공손절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음탄주라니? 소리를 내지 않는 음공이라는 게 가당키나 합니까?”

경악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천음선자 홍란 선생님의 음공 수업 시간에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 현 무림에서 그 정도 경지에 오른 이는 모두 다 해도 다섯 손가락을 넘지 않을 거라 하셨죠.”

무음탄주(無音彈奏)!

음공의 공부가 절정의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쓸 수 있다는 음공 오의(奧義).

격공장은 공기의 파동에 힘을 실어 보내고, 음공은 소리 자체의 파동에 힘을 실어 보낸다. 물론 때에 따라서 소리가 공기를 뒤흔들기도 한다. 어쨌든 음공이 제 위

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소리의 존재가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무음탄주만은 다르다.

이것은 말 그대로 무음(無音)에 힘을 실어 보낼 수 있는 경지였다. 현은 튕기지만 소리가 나지 않고, 그 파동만이 고스란히 위력을 간직한 채 날아가 적을 격살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검공의 최상승 경지 중 하나인 ‘보이지 않는 칼날[不可視刃]’에 필적하는 경지였다. 그 경지에 달해 있는 다섯 중 하나, 혹은 하나 이상이 지금 여 기에 와 있다는 뜻이었다.

“전 안 들었잖습니까, 음공 수업.”

“하긴. 이 금 돼지님은 돈이 안 되는 건 극히 배우기 꺼리는 성격이죠.”

진령이 톡 쏘듯 한마디 했다.

“뭇슨 쏘리! 음악도 팔기에 따라선 얼마나 돈이 되는데? 다만 시, 서, 화, 예, 음률 같은 문화는 정말 까다롭단 말이야. 어설프게 들어갔다간 망할 뿐이지. 난 내가 모르는 걸 팔고 싶지 않을 뿐이야.”

“어머머, 금 돼지, 너한테 상매매의 철학이 있을 줄은 몰랐는걸? 조금 다시 봤어. 그럼 앞으로도 안 팔 거겠네?”

진령이 비웃는 말에 금영호는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난 아직 준비가 안 됐을 뿐이야. 울 아버지 말씀이, 무형의 것을 파는 것이야말로 장사의 정수라고 했거든. 각지마다 쭉쭉 빵빵한 가희들을 선발해서 가무 대회를 여는 것도 생각 중이지.”

자기 입으로 준비가 안 됐다고 말한 주제에 벌써 사업 구상까지 마친 모양이었다

“애들 뽑을 땐 꼭 장 ‘교주님한테 심사를 맡아달라고 해야지! 아, 진령이 너도 관심있으면 연락해!”

“뭐 날? 내가 좀 예쁘긴 하지만…… 난 아미파의 제자고…….”

“음, 너 정도면 나름 괜찮아!”

됐거든?”

콰악!

금영호가 진령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진령의 두 손가락이 ‘응조탐안(鷹鳥貪眼)’의 초식으로 금영호의 눈을 콱 찍었다.

“끄아아아악! 내 눈! 내 눈!”

두 눈을 부여잡은 금영호가 격하게 전후로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를 가엾게 여기기는커녕 가까이 가면 변태가 옮을까 봐 멀찌감치 거리를 두는 동료들을 보며 금 영호는 두 번째 눈물을 흘려야 했다.

“휴우, 아무튼…… 설마 그런 희귀한 무공을 지닌 고수랑 맞닥뜨릴 줄은 몰랐네요. 차라리 검이나 도를 쓰는 고수라면 대응하기가 훨씬 편했을 텐데 말이에요.” 금영호 덕분에 긴장을 조금 떨쳐 낸 마하령이 고심하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 기가 드센 마 씨 아가씨는 이런 식으로 손발이 모두 묶인 채 궁지에 몰리는 게 가 장 싫었다.

“그럼 뾰족한 생각이라도 있소, 하령?”

묻는 용천명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마하령이 오히려 되물었다.

“제가 그 희귀하다는 음공의 최절정고수와 싸운 경험은 얼마나 될 것 같나요?”

“그야… 두세 번 정도?”

마하령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틀렸어요. 전무(全無)예요. 아마 다른 사람들도 다르지 않을걸요?”

아무도 그녀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음공의 절정고수와 손속을 나눠본 자는 일행 중에 전무했다. 다들 경험이 일천하다는 것은, 그만큼 음공의 최절정고수가 희귀한 존재라는 말이기도 했다. “으음…….”

모두들 깊은 고민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무음탄주를 막는다는 것은 곧 보이지 않는 칼날이 날아왔을 때 어떻게 막을 것인가와 다름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함부로 사지에 목을 내밀 수 있겠는가.

열심히 대응책을 짜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회의는 결론도 안 나는 주제에 너무 길었다.

밖에서 기다리는 누군가를 짜증나게 할 정도로.

* * *

“어라, 얘네들 안 나오는데? 뭐가 그리 부끄럽다고 이렇게 꾸물거리는 거지? 어서 나와서 나랑 면담 좀 하자, 얘들아.”

비밀 통로의 출입구로부터 서남쪽으로 약 십 장 정도 떨어진 우거진 풀숲.

무성한 나뭇가지와 풀들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은신잠행술로 기척을 죽이고 있던 신마팔선자의 일곱째인 갈효효가 나직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품에는 장창 대신 에 커다란 은금을 안은 채였다. 그러자 옆에서 차분하지만 어딘지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바로 곁에서 들려온, 힐난의 감정이 풍부하게 실린 음색에 갈효효의 몸이 흠칫 굳어졌다.

“하하, 여섯째 언니도 참. 그러면 마치 내가 실수라도 한 것 같잖아.”

상대가 상대인지라 갈효효는 금방 표정을 풀고는 함박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네 성급한 행동 때문에 연주가 엉망이 된 건 아니라고 생각하나 보지? 덕분에 무음탄주의 효용이 반의 반으로 줄지 않았느냐.”

원래 무음탄주는 육합전성처럼 소리의 진원지와 방향을 알기 어렵게 사용하는 데 그 묘용이 있었다. 공격 방향을 알 수 없는 방향에서 진력이 실린 ‘소리’가 ‘소리 도 없이’ 덮치기에 무서운 것이다.

보이지 않는 불가시 공격이야말로 이 기예의 정수라 할 수 있는데, 이렇게 대놓고 쓰면 당연히 효과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성급하게 자신의 패(牌)만 내보인 격이었다.

도방에서든 강호에서든, 먼저 패(牌)를 보인 쪽이 패敗)하는 법이다.

“아니, 그게…….?

“먼저 성급히 달려가니 연주 전체가 깨져 버린 것 아니더냐?”

흑과 백이 섞인 비단 끈으로 한데 묶은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흘러내리는 여인. 그 여인의 전신에는 마치 한 마리의 고고한 학을 연상케 하는 기품이 서려 있었다. 한 손에 벽옥으로 된 옥소를 들고 있었는데, 그녀가 바로 신마팔선자의 여섯째인 ‘천음선녀’ 갈효민이었다.

“할 말 없습니다.”

갈효효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이 여섯째 언니 앞에서는 항상 어려지는 갈효효였다.

“항상 일곱째 언니가 문제라니까. 생긴 것도 머슴아 같으면서 성격도 머슴아 같다니, 정말 못 말리겠어.”

옆에서 얄밉게 맞장구를 치고 나선 것은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고양이처럼 귀여운 소녀였다. 소녀의 어깨에는 털이 새카만 한 마리의 흑묘(黑猫)가 올라타고 있 었는데, 움직임이 빛살처럼 빨라 어지간한 고수라 해도 그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영물 중의 영물, ‘흑설묘(黑雪猫)’였다. 즉, 이 앙증맞게 생긴 소녀는 다름 아니라 신마팔선자의 막내인 표묘선녀(漂猫仙女) 갈효묘였다.

“어이, 이 땅콩 고양이야, 까불래? 누가 머슴아처럼 생겼다는 거야! 이 몸은 그저 키가 좀 큰 것뿐이라고, 요 땅꼬마야!”

발끈한 갈효효가 막내를 노려보았다. 여섯째 언니한테야 찌그러져 있었지만, 막내한테까지 무시를 당해서는 손위 언니로서 체면이 서지 않는다.

“뭣? 누가 땅꼬마라는 거야? 나같이 앙증맞은 귀염둥이를 보고 땅꼬마라니! 이 멀대 머슴아!”

“크으윽, 이게 정말……!”

머슴처럼 생겼다는 것은 갈효효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었다. 특히나 이 막내 녀석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복장이 세 배로 뒤집혔다. 갈효효는 쭉 뻗은 다리에 늘씬한 각선미를 지니고 있는데다 키도 크고 몸매도 좋았지만, 얼굴은 여덟 형제 중에서 가장 평범한 축에 속했다.

워낙 훤칠하고 호리호리한 몸매에 사내다운 활달함까지 갖추었으니, 신마가의 여무사들 사이에서 그녀의 인기는 단연 으뜸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미묘하게 도 드높은 인기를 단순히 기뻐할 수만은 없는 갈효효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 녀석한테까지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아!”

“왜? .훗, 하긴 난 너무 예쁘니까!”

땋은 머리카락을 아무렇지도 않게 오른손으로 쓸어 넘기며, 막내 효묘가 작고 앙증맞은 어깨를 으쓱했다.

“잘났다, 잘났어!”

갈효효는 기가 막힌다는 투로 헛웃음을 흘렸다.

“흐흥, 당연히 잘났지! 예쁘다는 건 좋은 거니까. 부럽지? 부럽지?”

쟤들보다 너부터 나랑 면담 좀 해야겠구나, 동생아.”

갈효효는 떨리는 주먹을 치켜들며 애써 미소를 지었다.

“꺅! 그 두터운 주먹으로 나 때리려고? 나중에 엄마한테 이른다?”

협박 아닌 협박을 던졌는데 그게 의외로 효과가 있었는지 갈효효의 주먹이 움찔했다.

“…..하긴, 띠동갑인 너랑 싸워봤자 나만 손해지. 이 어르신이 이번 한 번만 참아주마.”

사실 갈효효는 신마팔선자 중 가장 여자답지 못하다는 것에 대해 약간의 열등감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 꼬맹이한테까지 이런 말을 듣는 것만

은 자존심상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이 막내와 한 번씩 입씨름을 할 때마다 갈효효는 자신이 왠지 비참해지고 억수로 손해 보는 듯한 느낌을 팍팍 절감해야만 했 다.

“어휴, 저걸 한 대 콱 쥐어박을 수도 없고…….’

그랬다가는 둘을 낳아준 친어머니인 홍련선자 단혜에게 불벼락을 맞을 게 뻔했던 것이다. 힘들게 얻은 막내인데다가, 어릴 때부터 유달리 허약하고 병치레가 많아 단혜의 관심과 애정이 유달리 각별했던 것이다.

“뭐 또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어차피 기쁨조일 뿐인데 말이야.’

너무 오냐오냐 봐주면서 키웠더니, 지금은 언제 병약했냐는 듯 기고만장하고 씽씽, 팔팔한 고양이 그 자체가 된 막내였다. 게다가 어찌나 귀여움과 아양을 잘 떠는 지, 어머니들은 물론 효효를 제외한 나머지 여섯 자매들의 사랑을 거의 독차지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저 어깨의 영물 고양이 흑설묘도 저 조용한 육매 갈효민에게서 받은 것이었다. 효효 자신에게는 날마다 엄하게 대하면서 막내한테는 저런 귀한 선물까지 주다니, 차별 대우도 이쯤 되면 너무 도가 지나치다고 할 수 있었다.

모두들 막내에게는 물러도 너무 물렀다.

‘이 야생 괭이 녀석은 다른 언니들한테는 안 개기면서 왜 유독 나한테만 이렇게 박박 개기는 거야? 아, 그렇군. 키가 작다는 열등감 때문이야, 분명해! 내 다리가 자 기보다 훨씬 기니까 질투하는 거라고!’

막내보다 작은 사람은 나머지 일곱 중에 아무도 없었지만, 갈효효는 그렇게 생각하며 위안을 삼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그만 언젠가 효묘를 된통 패버릴 것 같았다.

“이 와중에도 둘이서 화기애애하게 노는 걸 보니 우애가 느껴져서 보기가 참 좋구나.”

잠자코 두 사람이 하는 꼴을 지켜보고 있던 갈효민이 조용히 한마디를 했다. 갈효효와 갈효묘의 몸이 동시에 움찔했다. 갈효묘의 어깨 위에 앉은 흑설묘까지도 순 간 움찔했다.

“자, 이제 잡담 그만 하고 일해야지, 막내야?”

갈효묘의 어깨에 손을 턱 올리며 갈효효가 웃으며 말했다.

“응, 우리 열심히 하자, 효효 언니!”

아무리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불거리는 막내였지만, 그 역시 여섯째 언니의 눈길은 무서운 모양이었다.

“어릴 때 여우 잡이 했을 때처럼 굴에다가 불을 지를까? 따로 파놓은 구멍도 없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연기가 들어가면 튀어나오겠지.”

“불은 안 된다.”

“왜?”

“불은 나무를 태우고, 나무와 숲이 사라지면 동물들이 갈 곳이 없어지지 않느냐? 게다가 그렇게 하면 옷에 그을음이 묻지 않느냐?”

무척이나 질색인 듯한 표정을 지으며 갈효민이 반대했다.

“어차피 검은 옷이잖아?”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갈효효가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상시에는 학(鶴)처럼 소매랑 앞섶에 검은 줄이 들어간 백색 비단옷을 즐겨 입는 갈효민이었지만, 지금 은 흉사가 있어 검은 흉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흰 바탕에 검은 줄이 들어간 것은 거의 무릎까지 내려오는 그녀의 길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묶고 있는 긴 머리끈 뿐이었다.

“그래도 그을음 아니냐. 난 연기가 싫다.”

고고한 학처럼 깔끔한 것을 무척이나 따지는 갈효민이었다. 이쯤 되면 아무도 못 말렸다.

“그럼 불은 취소.”

가뿐하게 말하는 갈효효 옆에서 효묘가 재촉했다.

“꺽다리 언니, 빨리 좀 생각해 봐. 민언니 얼굴이 점점 굳어가고 있어.”

“생각하고 있는데 방해하지 마. 에라, 모르겠다, 이렇게 된 거 내가 나서지 뭐.”

마음이 다급해지니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간 갈효효가 스―읍 숨을 깊게 들이쉰 다음 목청을 높여 외치기 시작했다.

“들어라! 나는 신마가의 일곱째 갈효효라 한다! 너희들도 무사라면 당당히 나와서 싸워라! 만일 다섯을 셀 때까지 나오지 않는다면 큰코다치게 될 것이다!”

답답하긴 답답했던 모양인지 갈효효는 결국 선전포고를 하고 말았다. 깊고 정순한 내공이 실린 탓에 밤의 공기가 쩌렁쩌렁 울렸다. 물론 그렇게 다짜고짜 외친다 고 덜컥 나올 리가 만무했다.

“넌 그걸 위협이라고 한 것이냐?”

한심하다는 얼굴로 갈효민이 한마디 했다.

“응. 역시 좀 그랬나?”

“좀 그런 정도가 아니잖아, 이 꺽다리 언니야!”

옆에서 얄밉게 끼어드는 효묘를 갈효효가 노려보자, 갈효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렇게 된 이상, 너의 장기인 그 ‘힘’으로 끝내 버리자꾸나.”

“아, 무력시위 말이지? 좋네, 좋아.”

그거라면 자신있다는 듯 갈효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언니가 좀 도와주면 안 될까? 나 혼자로는 좀 모자랄 것 같아서. 아, 이걸로 할 거야, 이걸로.”

손에 든 은금을 가리켜 보이는 갈효효를 보고 갈효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참 뻔뻔도 하구나.”

그제야 갈효효는 싱긋 웃으며 본론을 말했다.

“내가 원래 그렇잖아, 하하. 자, 그럼 오랜만에 그거 어때?”

“그 곡… 을 말함이냐? 으음, 그럼 간주는 됐다. 바로 본 연주로 들어가도록 해라.”

효묘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알았어. 민 언니, 뒤에서는 언니가 잘 받쳐 주리라 믿어. 난 미세한 힘 조절이 잘 안 되잖아.”

“그래, 저들을 생매장시킬 수야 없지. 알았다, 오랜만에 소리를 맞춰보도록 하자꾸나. 너에게 혼자 맡겨놨다가 또 흥에 겨워 폭주를 하면 곤란하니 말이다.”

갈효민은 자신의 품에서 흑요석을 깎아 만든 것처럼 검은 광택으로 빛나는 흑옥의 피리를 꺼내 들었다. 차가운 한기를 뿜어내는 흑옥의 나신 위에 은사로 백수의 왕인 사자가 음각되어 있는 기물이었다.

음공이 특기인 그녀는 모든 악기를 다룰 줄 알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흑소를 매우 아꼈다. 이 흑소는 음악에 심취한 그녀를 위해 큰 오라버니인 갈중천이 어렵게 어렵게 구해서 선물로 줬던 것이다. 이런 값비싼 기물을 그냥 받을 수는 없다며 갈효민이 극구 사양하자, 그때 갈중천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괜찮다, 괜찮아. 천금을 주고도 아깝지 않은 최고의 연주를 공짜로 듣는 몸 아니냐. 그런 호사는 아무리 흑천맹의 맹주라 해도 쉽게 누릴 수 없는 일이지. 평생 네 연주를 듣는 값이라고 생각하면 이 흑소 도 싸게 먹힌 거란다. 천상의 음악을 평생 공짜로 듣겠다는 큰 오라비의 사악한 음모라고 생각하고 받아두거라.”

그리고 갈중천은 이제 더 이상 그녀의 흑소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영원히.

그리하여 그녀 또한 영원히 이 흑소의 값을 갚을 수 없게 되었다.

‘큰 오라버님, 이 곡은 오라버니에게 바치는 진혼곡의 첫 소절이 될 것입니다.’

소용돌이치는 감정과는 다르게, 조용하고 차분한 얼굴로 갈효민은 흑소를 자신의 입에 갖다 댔다.

바닥에 놓은 은금 앞에 앉은 갈효효가 칠현 위에 양손을 올려놓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 녀석들 얼굴에서 웃음이 싹 가시겠는걸.”

그리고 합주가 시작되었다.

딩―! 띵띠디딩띵! 휘리리리리리리—!

청아하고 맑은 피리 소리와 함께 점점 더 빠르게 고조되어 가는 은금의 소리가 서늘한 숲의 밤하늘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악몽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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