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인혈(血).
유은성은 그 악명 높은 살수집단이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도 상세히 알고 있었다.
지난 수년간 폐관수련에 전념했던 아미신녀 진소령보다는 강호의 견문이 훨씬 더 넓었기에 단박에 알아보았던 것이다.
“이들이 그 소문의 천인혈이란 말입니까?”
진소령도 흘러 다니는 소문으로는 그 이름을 접한 적이 있기에 그의 말에 반문했다.
“그렇습니다, 신녀. 뺨에 붉은 글씨로 숫자를 새기고 혈(血)자를 붙여놓는 이들은 이 넓은 강호 안에서도 오직 천인혈뿐입니다. 과거엔 가장 유명한 암살조직이었지만, 강호제일의 살수라 불리던 최흉살(最凶殺) 천일혈(千一血)이 의뢰에 실패하고 행방불명된 이후, 신용 하락으로 사양길을
걸어왔지요. 망한 게 아닌가 했는데 건재했던 모양입니다.”
오늘 이렇게 떡하니 나타난 걸 보면 말이다. 유은성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오늘의 이 공격… 누군가가 천인혈 전체를 통째로 사서 투입한 것만 같군요.”
이 정도 인원을 동원하려면 막대한 청부금이 들 것이 분명했다. 그 청부금을 지불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배후가 심상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직 세 자릿수라면 괜찮습니다. 이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이들은 ‘천중혈(衆+血)’이라 불리는데, 한 자릿수의 번호를 가진 암살자들입니다. 이들은 스스로의 숫자를 야행복의 가슴에 새겨놓는답니다. 실력에 자신한 나머지 복면도 쓰지 않는다 하더군요.” 말하는 와중에도 유은성에게 덤볐다가 서걱, 복면이 잘려 나간 자객의 뺨에는 구구혈(九九血)이라는 붉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아무래도 세 자릿수가 모두 떨어진 모양이군요.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저 유은성이 목숨을 바쳐 두 분을 지키겠습니다!”
“말씀 감사하지만, 제 목숨은 제가 지킬 수 있습니다. 그분의 호위와 마차를 모는 데 전념해 주세요.”
두 자릿수의 공격은 세 자릿수의 공격보다 훨씬 더 매섭고 방식도 다양했다. 도, 검, 창, 활을 가리지 않는 다양한 무기들이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각도로 공격을 해왔다.
마차를 죄여오는 압력이 더욱 커져 가자 유은성이 혀를 찼다. 마구잡이식 공격이긴 했지만 그런 만큼 더욱더 번거로웠다.
“제가 청소하지요.”
진소령은 들고 있었던 검을 살짝 놓았다. 하지만 그녀의 검은 땅에 떨어지지 않고 허공중에 뜬 채 여덟 개로 나뉘어 마차 주위를 감쌌다.
반쯤 눈을 감은 그녀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피어라, 만개홍(滿開紅)! 붉게 만개하거라!”
슉슉슉슉! 마차 주위에 허공을 수놓은 여덟 송이의 연화가 화려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연이어 진소령의 손이 살짝 움직이는가 싶더니, 마차 주위를 감싸 듯 여덟 송이의 연화가 피어올랐다.
아미파 난화검의 정화인 ‘비상련화 중 상급 경지인 팔련화로, 허공중에 동시에 여덟 송이의 연화를 피우는 기술이었다. 꽃잎 하나하나가 검강이며, 연꽃 한 송이 한 송이가 검강의 집약체라 할 수 있었다. 지금 선보인 검기에 비하자면 예전에 천무학관에서 남궁상에게 보여주었던 것은 애들 장난에 불과하게 보일 정도였다.
진소령이 마지막으로 조용히 명했다.
“피어 흩어져라! 산화(散華)!”
여덟 송이의 연화가 일제히 만개하며, 꽃잎을 활짝 열며 무수한 검기의 비로 화해 사방으로 쏟아져 나갔다. 일말의 자비도 없는 전방위 검기의 세례였다. 춤추듯 아름다우면서도 무자비한 검무였다. 단 한 초식에 주변이 초토화되었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너무 큰 기술을 사용하시면 소중한 옥신에 무리가 갑니다. 자중하십시오.”
진소령의 안색이 창백해진 것을 본 유은성이 걱정스런 어조로 말했다.
“걱정 고맙습니다. 하지만 아직 전 괜찮습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훔치며 진소령이 부드럽게 답했다.
드디어 마차는 절명고개의 꼭대기를 넘었다. 그러자 작은 협곡이 나타났다. 이제 눈앞에 보이는 협곡만 빠져나가면 숲을 탈출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매복도 지금보다 훨씬 줄어들게 분명했다.
“기다리겠죠?”
유은성의 고삐를 늦추지 않은 채 물었다.
“기다릴 겁니다. 반드시.”
좁지만 높은 협곡 사이로 뚫린 마차 두 대 정도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 이런 절호의 지형에 매복이 없을 리 없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유은성이 진소령의 의견을 물었다.
“멈추지 마십시오. 절대로.”
그 단호한 대답에 유은성은 미소 지었다.
“제 맘에 꼭 드는 대답입니다. 꽉 잡으십시오, 신녀.”
유은성은 협곡 앞에서 마차를 멈추기는커녕 채찍질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여섯 마리 검은 준마가, 멈추고 싶은 본능을 억누르며 협곡 사이에 난 길을 내달렸다.
구구구호가 협곡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협곡 전체가 부르르 진동하더니, 굉음과 함께 돌더미랑 나무들이 떨어지며 협곡의 입구를 봉쇄해 버렸다. “협곡에 암석이라, 창의력이라고는 눈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는 진부한 전법이군요.”
협곡 입구가 막히는 걸 보면서도 진소령의 감상은 차분했다. 마차의 고삐를 늦추지 않은 채 유은성이 웃으며 대답했다.
“고전적인 수법이지만, 그만큼 효과적이니 아직까지 쓰이는 것이겠죠. 아마 다음은……”
쿠르르릉, 다시 한 번 굉음이 울려 퍼지며 입구 쪽뿐 아니라 구구구호가 달려가는 머리 위로 바위 덩어리들이 떨어져 내렸다. 정석대로의 공격이 이어지는 것을 보며 유은성은 속으로 혀를 찼다. 매복한 놈들은 참으로 융통성 없는 녀석들인 모양이었다.
“멈추면 끝입니다! 달리세요!”
진소령이 날카롭게 외치며 바로 마차 위로 떨어지는 바위 하나를 양단했다.
쿠쿵, 두 조각 난 바위가 달려가는 마차의 좌우에 떨어져 내렸다.
퇴로가 막힌 것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이런 협곡에서 양쪽이 다 막히면 보기 좋은 과녁에 불과하게 될 뿐이었다.
아미파(峨嵋派) 독문검법(獨門劍法)
난화검(劍)비기(秘技)
난화선풍亂華 風) 참암식(斬巖式)
차르르륵, 떨어져 내리는 바위들이 흩날리는 꽃잎 같은 검기에 휩싸였다.
여인의 손길처럼 너무나도 부드러운 검기에 휩싸였던 바위들은 모두 서걱서걱 산산조각이 난 채로 떨어져 내렸다. 한숨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검기였으나 그 위력은 놀라웠다. 유은성은 유은성대로, 말 위에 떨어져 내리는 바위들을 채찍으로 쳐 내며 질주했다.
앞으로 십 장. 이제 조금만 더 가면 협곡을 빠져나갈 수 있을 터였다.
바로 그때였다.
“당겨라!”
누군가 외치는 순간, 좁은 협곡 바닥에서 거대한 벽이 굉음과 함께 쾌속하게 솟아나왔다. 진소령이 즉시 앞으로 도약해 검을 휘둘렀으나 하는 쇳소리와 함께 튕겨져 나올 뿐이었다.
“강철 벽(壁)?!”
급히 유은성이 내력을 운영하며 고삐를 잡아당겼다. 허공을 몇 번 찬 다음 공중제비를 두 번 돌며 다시 마차 지붕을 밟은 진소령이 마차의 바퀴 옆에 달려 있는 손잡이를 급히 당기자, 바퀴가 급격히 멈추며 노란 불꽃을 일으켰다.
마차는 달리던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삐걱삐걱 쇳소리로 비명을 내지르며 간신히 강철 벽 앞에 멈춰 섰다. 아무리 강고함을 자랑하는 구구구호라 해도 이 정도 두께의 강철 벽을 뚫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진소령의 검기를 견뎌낸 걸 보면 단순한 강철도 아님이 분명했다.
“으음푸푸푸푸푸푸! 드디어 걸렸구나!”
협곡 위에서 괴이하면서도 헤픈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유은성과 진소령의 시선이 협곡 위를 향했다.
“드디어 나타났군요. 될 수 있으면 안 만나고 싶었는데.”
“이 품위가 결렬된 웃음소리. 과연 조무래기 악당다운 천박한 웃음입니다.”
“으- 음푸푸푸푸푸, 센 척해도 소용없다! 이곳이 네놈들의 무덤이 될 테니깐 말이다. 으음푸푸푸푸푸푸!”
협곡 위에서 광소가 터져 나오더니, 붉은 옷을 걸친 자들이 나타났다. 그 수는 총 십(十) 명 늘어선 혈의의 사내들 뺨에는 사(四)에서 십삼(三)까지의
숫자가 새겨져 있었다.
“잘 들어라. 우리들은 바로·
그때, 진소령이 차갑게 한마디 내뱉었다.
“네놈들 같은 삼류 자객의 이름 따위, 궁금하지도 않으니 썩 꺼지거라.”
진소령의 얼음 같은 기세에,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려던 천사혈이 움찔했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목소리였다.
“사… 삼류…………!”
그것은 그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었다. 먼저 분노를 터뜨린 것은 천십삼혈이었다.
“이, 이년이! 해서는 안 될 말을!”
그 순간, 빛의 화살이 천십삼혈의 입을 꿰뚫고 지나갔다. 사일검법의 검강시였다.
“닥쳐라!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것은 네놈이다. 감히 신녀께 무례를 범하다니! 저승에서 반성해라.”
협봉검을 앞으로 쭉 뻗은 채 분노한 목소리로 유은성이 으르렁거렸다. 입 좀 잘못 놀렸다고 내공 소모도 마다않고 엄청난 장거리를 격해 강기시를
날려 보내다니…………. 과연 무시무시한 연모가 아닐 수 없었다.
천십삼혈이 허무하게 당하는 것을 본 천사혈이 분노해서 외쳤다.
“이놈들, 각오해라! 아무리 네놈들이 고수라 해도 여기서 너희의 인생은 끝난다!”
지금 이 자리에서 천인혈 전 부대를 이끌고 있는 총대장은 바로 그였다. 마구 무시당해도 좋은 위치가 아니었다. 그러나 진소령은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어리석은 것. 한 고수가 한 하수보다 열 배 강하다 해서, 하수 열 명을 모아온다고 그 고수를 이길 수 있을 성싶으냐? 동격이 될 것 같더냐?” “크윽!”
천사혈을 비롯한 천인혈의 신생(生) 천중십혈(눈 깜짝할 사이에 천사구혈이 된) 이 수치심을 견디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열 명의 무명무사보다 한 명의 유명고수가 더 낫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것이 바로 격이 다르다는 것이지. 네놈들처럼 어둠 속에 숨은 겁쟁이들과는 다르단 말이다!”
진소령이 단호한 목소리로 호통쳤다.
한 표국에서 열 명의 표사를 뽑는다고 하자. 그런데 백 명의 응시자가 모였다고 하자. 그럼 경쟁률이 십 대 일이다. 그럼 아홉 명만 이기면 될 것 같지만, 그건 착각이다. 그들은 다른 구십 명보다 뛰어나야만 한다. 그러므로 실질적인 경쟁률은 십 대 일이 아니라 구십 대 일이 되는 것이며, 그렇기에 고수들의 이름에는 그 가치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제대로 무시당한 천사혈은 부글부글 분노하며 외쳤다.
“크으으! 열 명으로 안 된다면, 이백 명이면 어떠냐? 그래도 네놈들이 당해낼 수 있을까?”
천사혈의 신호에 따라 좌우에서 수십 명의 검은 그림자가 일제히 우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수는 이백을 넘고, 그 그림자는 협곡 위를 빼곡히 메울 정도였다. 오늘 자객집단 천인혈의 모든 전력이 이 조그만 고개에 모인 모양이었다.
“우리 일류 자객집단 천인살이 자랑하는 독룡의 진을 보여주마! 이런 협곡에서는 대라신선이 와도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섬멸 공격이다!”
지시를 받은 천인혈의 자객들이 일제히 무언가를 들어 올리더니 옆구리에 끼었다. 그것은 기다란 고깔처럼 끝이 뾰족한 거대한 창같이 생긴 물건이었다.
하지만 창치고는 너무 육중해 보였다. 게다가 이런 협곡에서의 이차 정석은 화살 공격이다. 철저히 상대를 소모시킨 다음 내려와 죽이는 것이다. 그때, 기다란 창끝에서 검은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철갑마차 옆에 떨어졌다.
치이이익.
검은 액이 떨어진 자리에서 연기가 타면서 바위가 녹기 시작했다. 바위에 부딪쳐 튀어 오른 검은 물방울 몇 방울은, 철갑마차에 닿아 철갑 일부를 파스스 녹이기까지 했다.
유은성과 진소령은 이 괴사에 깜짝 놀랐다. 천사혈은 여봐란 듯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음푸푸푸! 어떠냐? 쇠도 녹이는 강산의 맛이! 수십 개의 독수창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산의 세례를 막을 수 있을까? 그렇게 좁은 협곡에서? 음푸푸푸! 으-
음푸푸푸푸푸!”
천사혈은 이미 타인의 생사를 손에 쥔 자만이 지을 수 있는 오만한 표정으로 웃어댔다.
‘당했다! 설마 저런 식으로 공격해 올 줄이야!’
진소령과 유은성, 두 사람은 떨어지는 바위는 물론이고 쏟아지는 화살비도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베어도 그저 방울방울 흩어지는 강산의
세례를 막아낼 자신은 없었다. 더구나 마차 안에 있는 빙월선자 예청까지 지켜낼 자신은 없었다.
지금 그들의 임무는 요인 호위. 호위 대상을 잃는다는 것은 곧 그들의 패배이자, 나아가 정천맹의 패배였다.
“과연 네놈들이 고수라고 빼기는데, 바위는 막아도 ‘물’을 막을 수 있을까?”
공격 신호를 내리는 천사혈의 입가에 흡족한 듯 잔인한 미소가 걸렸다.
“물론 안 되겠지. 못하겠지? 당연히 못하고말고, 크하하하!”
천사혈이 미친 듯이 웃었다. 유은성은 속으로 침음성을 삼켰다.
“죄송해요, 유 대협. 아무래도 오늘 이 자리를 빠져나가기나 어려울 것 같네요. 제 저승길 길동무로 함께 어울려 주시겠어요?”
결의를 굳힌 진소령의 말에 유은성이 활짝 웃었다.
“물론입니다. 신녀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함께 싸우다 함께 죽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저 유은성은 여한이 없습니다.”
‘이 한 몸 죽더라도, 예청 마님과 신녀만큼은 지키리라.’
유은성은 애검 천궁검(劍)을 들어 올리며 조용히 결심했다.
승기가 넘어오자 천사혈은 기가 살았다.
“자, 어떠냐? 좀 전의 기세는 다 어디 갔느냐? 고수라고 뻐기더니 찍소리도 못하는구나, 크하하하하하! 또 모르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를 막아낼 수 있는 신력이라도 있다면!”
한마디로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물론 이 경우 그것이 뼈와 살은 물론 쇠까지 녹이는 강산의 세례지만 말이다, 으~ 음푸푸푸푸! 크하하하하하!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
어디선가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응? 누가 나 불렀느냐?”
웅- 웅- 웅~!
단순히 지나가는 한마디처럼 던진 노인의 목소리에 협곡 전체가 웅웅웅 진동했다.
천사혈이 깜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누, 누구냐?! 나와라, 우리 이백 정예가 무섭지 않다면 어서 모습을 보여라!”
그러자 다시 대답이 돌아왔다.
“에게게게, 고작 이백? 좀 더 쓰지 그러느냐?”
투덜대듯 가벼운 목소리였지만, 협곡 안의 모든 이가 그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