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뢰도 7권 12화 – 노사부의 재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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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뢰도 7권 12화 – 노사부의 재등장

노사부의 재등장

•초혼오귀검은 경쟁적으로 음욕을 불태우며 비호처럼 움직였다.

눈에 뵈는 게 없을 정도로 그들은 다급했다.

그런데 종마처럼 다급히 질주하던 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한 줄기 은빛 섬광이었다.

섬광은 가장 급하게 선두에 서서 달려가던 색마 귀명검 강약약의 볼에 한 줄기 혈선(血線)을 남겼다. 날카로운 예기가 볼을 훑고 지나가자 강약약은 본능적으로 뒤로 도약하며 외쳤다.

피잉!

“웬 놈이냐?”

일 장 뒤로 착지하는 그의 손에는 이미 검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지나가던 고인이시다!”

초혼오귀검의 눈 앞에 나타난 사람은 한 명의 노인이었다. 노인의 얼굴이 주작단 열여섯 명의 뇌리에 악몽의 각인으로 남아 있는 바로 그 얼굴임을 이들은 알 리가 없었다.

비류연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몇 년 동안 품 안에 간직해 두었던 인피면구를 꺼내 쓰고 나타난 것이다.

“정체를 밝혀라!”

강약약이 소리쳤다.

“예의를 모르는 놈들이군!”

“뭐라고?”

“옛다! 상이나 받아라!”

“뭐?”

여전히 이들 다섯은 노인에 대한 공경심이 부족했다.

“비환난영무(環亂影舞)!”

“파앗!”

비류연의 양손에서 날아오른 열 개의 비환(飛環)이 예측 불허의 기묘막측한 곡선을 그리며 허공을 수놓았다. 공간을 갈가리 찢어 놓을 듯한 무서운 기세였다. 비환난영무는 비류연이 혼자서 비뢰도의 무공을 접목시켜 만들어 낸 심심풀이 초식이었다. 비록 마구잡이 심심풀이로 만들었다 해서 그 위력까지 약한 건 절대 아 니었다.

“헉!”

너무나 의외의 강력한 일격에 기겁한 초혼오귀검은 자신들의 모든 능력을 회피하는 데 쏟아 부었다.

“슈욱슈욱!”

그러나 춤을 추듯 허공을 선회하는 비환을 완벽하게 피해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비환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혈선이 그어지고 선혈이 흘렀다. 비류연으로서는 이 정도도 봐 준 것이었다.

“노 선배께서 우릴 가로막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귀영살검 상중하가 물었다. 말투가 여실히 바뀌어 있었다. 역시 법보다는 주먹이 빠른 놈들이었다.

“이제야 좀 높임말이 나오는구나! 이제 좀 연장자에 대한 공경심이 돌아오느냐?”

‘누구지?”

상중하는 궁리하기 시작했다.

행색을 보니 무당파에서 온 원군 같지는 않았다. 몸에 아무런 표식도 없으니 소속을 파악하기도 힘겨웠다. 물론 상황을 안다면야 천무학관측을 도와 주기 위해 끼 여드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상황을 모른다면?

초혼오귀검은 수고를 덜고 싶었다. 만만치 않은 절정 고수를 상대로 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실례지만 노 선배님의 존성대명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 딴에는 최대한의 예의를 차려 말한 것이었다.

“그것보다 말일세, 자네 혹시 이런 소문 들어 봤나?”

노사부의 인피면구를 쓴 비류연이 느닷없이 물었다.

“무슨 소문 말입니까?”

“이곳엔 아주 무시무시한 녹림야차(綠林夜叉)가 나타난다네. 노부가 그놈들을 만나 봉변을 당했지 뭔가!”

“크하하하하하하하!”

녹림야차란 간단히 말해 산도적을 가리킨다. 그들에게는 발톱의 때만도 못한 존재였다. 그들의 비웃음은 점점 더 소리가 올라갔다.

노사부로 화한 비류연은 약간 기분이 안 좋아졌다.

“왜 웃나?”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비류연이 물었다.

“산적 따위가 감히 우리의 앞길을 막을 수 있겠소.”

자신만만하게 큰소리 탕탕 치는 상중하. 그는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음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자네들의 앞길을 막을 사람은 누군가?”

“그… 그건..”

불쑥 물어 오는 기습 질문에 상중하는 당장 할 말이 궁했다. 물론 정답은 자신의 눈 앞에 있는, 강도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노인이었다.

“쯔쯧! 자네들 눈물은 있나?”

“사내에게 눈물이 어디 있소? 사내는 부모가 죽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법이오.”

“에잉! 그러면 내 얘기는 못 듣겠군.”

비류연은 혀를 찼다.

“왜입니까?”

“이 노친네의 운명은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기구한 사연이 얽히고설켜 있는 웅장한 한 편의 대 장편 서사시이기 때문일세!”

“허허! 이야기나 들어 봅시다! 기구하다고 자랑하는 그 팔자를 말입니다.”

“이 산에는 아주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는 녹림야차가 살고 있다네.피도 눈물도 콧물도 없는 놈이지! 그는 자신과 만난 사람의 돈을 남겨 둔 적이 없다네. 여비 하 나 남기지 않고 몽땅 털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그의 불문율이지! 그 피도 눈물도 없는 강도놈한테 걸려 알거지 신세가 되었다네.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이 얼마 나 기구한 운명이란 말인가. 그것도 다 늙어서 말이야.”

이때부터 약간은 장황한 비류연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초혼오귀검은 아니꼬웠지만 잠자코 듣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괜히 말을 시켰다고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래서… 그리 된 것일세!”

이야기는 길었지만 전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했다.

“나는 길을 가고 있었다. 산적이 나왔다. 산적에게 털렸다. 그러므로 나는 현재 빈털터리다!’이게 끝이었다.

“그래서… 원하는 게 뭡니까?”

극도의 인내심을 몽땅 발휘하여 겨우겨우 이야기를 다 듣는 쾌거를 이룩한 상중하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물었다.

“혹시 돈 있냐?”

초혼오귀검의 첫째 초귀검 상중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품위 없게시리 갑자기 웬 돈타령이란 말인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노사부의 인피면구를 뒤집어쓴 비류연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아! 녹림야차들에게 노자를 몽땅 털렸으니 빈털터리 신세인 게 당연하지 않나. 그래서 길을 헤매던 중이었네.”

비류연이 능청을 떨며 말했다.

“돈을 털려서 길을 헤매?”

말이 문맥적으로 연결이 되지 않아 다섯 명은 잠시 고개를 갸우뚱 했다.

“저희들이 빌려 드리지요.”

상중하가 얼른 나섰다. 그는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조금 전 비류연이 선보였던 비환난영무 일 초에 낭패만 당하지 않았더라도 이렇게 순순히 굴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호! 폐가 안 되겠나?”

물론 한 번 예의상 해 본 말이었다. 만일, 물론 폐입니다라고 말하면 그 다음도 준비되어 있었다. 그때는 ‘어, 그래? 그럼 몇 대 맞아라!’라고 말하면 끝인 것이다.

“폐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사해의 모든 이가 동도라 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후배의 입장에서 선배 고인의 어려움을 보면 도움이 돼야 하는 것이, 도움이 되어 드리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도리지요! 암요! 그렇고말구요! 사필귀정, 결자해지 아니겠습니까!”

귀영살검 상중하가 문자까지 쓰며,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나머지 네 귀검들은 놀랍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살인과 방화, 겁탈밖에는 없는 줄 알았는데, 꼴에 첫째라고 혀가 이처럼 매끄럽게 돌아갈 줄은 몰랐던 것이다. 모두들 그의 새로운 재능을 엿본 것이다. 과연 우두머리에겐 그 나름의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 있습니다.”

상중하가 얼른 전낭을 뒤져 쌈짓돈을 꺼냈다. 특별 임무를 수행 중이라 임무 수행비도 두둑히 받아 온 터였다.

“쩔그렁!”

언제나 비류연의 귀를 즐겁게 하는 돈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러나 즐겁고 기꺼운 마음과는 반대로 그의 얼굴은 사정없이 흉측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상중하는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풀어 놓은 전낭이 네 개밖에 없었다. 누군가 전낭을 풀지 않은 이가 한 명 있는 것이다. 확인해 보지 않아도 상중하는 누가 범인인지 알고 있었다.

급히 옆에 있던 강약약에게 눈짓을 보냈다. 빨리 돈을 내놓으라는 의미였다. 귀명검 강약약의 안색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안면 근육의 이동 경로와 강약 조절, 그리고 배치와 조합을 볼 때 거부의 의사가 분명했다. 그는 여자도 밝히지만 그에 못지않게 돈도 밝히는 인종이었다. 출신도 모르는 노인네에게 아까운 돈을 주고 싶지 않다는 게 그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어쭈!’

상중하도 강약약의 반응에 대응하는 안면 근육 이동을 시작했다. 그의 미간이 세 겹으로 접히고 눈썹을 관장하는 근육이 쌍심지를 힘차게 하늘로 밀어 올렸다. 안 구 주변의 근육이 급격한 변화를 보이며, 소위 ‘째려본다’라고 불리는 진세를 완성시켰다.

가장 고난도의 기술인 입술 주위 근육이 푸들거리기까지 하자 강약약은 더 이상 반항할 수 없었다.

강약약의 전낭마저 차지하고도 비류연은 여전히 성이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노사부의 찌푸려진 안면 근육은 펴질 줄을 몰랐다. 오히려 살기만 무럭무럭 커져 갔 다.

‘젠장! 당했다.’

초혼오귀검은 그제야 자신들이 똥 밟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눈 앞의 노인네는 그들이 내놓은 일부분의 재산만으로는 절대로 부족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비상금이 더 있다는 걸 알았지?”

걸려도 단단히 걸린 것이다.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인물은 순 날강도였던 것이다. 그것도 고도의 폭력 수단을 동원한!

참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스스로 고수라 칭하면서도 눈 앞에 존재하는 이가 그들보다 얼마나 격이 다른 존재인지 자신들은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무지는 때로 만용을 동반할 권리를 지닌 다. 이들은 만용이라는 자신들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하기로 마음먹었다.

권리의 행사는 폭력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죽어라!”

가장 먼저 달려든 이는 강약약이었다. 기습이라면 충분히 성공할 자신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나머지 네 명이 가세했다. 원래 이들은 기습, 암살, 합 격의 전문가들이었다.

“능력이 된다면!”

비류연의 대답이었다.

이들은 평소 귀찮거나 기분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아주 특색 있는 이성의 소유자들이었다. 때문에 그들은 현재까지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 해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이번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눈 앞에 존재하는 이는 그들의 만용 따위로 간단히 죽을 정도로 허약한 생명력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들의 만용에는 끔찍할 정도의 대가가 뒤따랐다. 그들은 죄책감 대신에 뼈저린 후회를 맛보아야 했다. 기나긴 반성의 시간이 그들에게 주어졌다.

비류연의 입술이 위험한 경고성 곡선을 그렸다. 그 미소 뒤에 따라오는 응징은 처절하다는 표현조차도 가볍게 느껴질 정도로 끔찍한 것이었다. 이럴 땐 얼른 눈치 보지 말고 자리를 피하는 것이 인생에 궁극적인 도움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세상엔 아직 무모함을 용기라 믿고 착각 속에 헤매는 이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체험주의자에겐 체험을 시켜 주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 할 수 있었다. 비류연은 그 도리를 저버릴 만큼 막돼먹은 놈은 아니었다. 그의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약간의 수고를 감내할 마음이 든 것이다. 비류연의 손이 앞으로 섬전처럼 뻗어 갔다. 결과는 이미 뻔하게 정해져 있었다.

“퍼버벅! 쾅쾅! 뚜쉬뚜쉬!”

“끄아아아악!”

비명은 구슬플 정도로 처절했다. 노사부의 손길에 용서란 존재하지 않았다. 하수로서 고수를 알아보지 못한 대가는 그만큼 큰 것이었다.

고수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지극히 간단하고 명확한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 이들의 치명적 실수였다. 그리고 고수는 하수들이 상상도 하지 못하는 방법 으로 하수보다 수많은 일들을 더 많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이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그들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다. 이대로 잔혹한 현실에 순순히 수긍하고 저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일만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을 것이다. 높은 탑에 올라 하계(下界)를 굽어보고 있는데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는 기상 이변이 벌어져 자신을 지탱하고 있던 사회적 지위와 자존심이 한순간에 붕괴되고 만 것이다. 두 번쯤 죽었다 깨어나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참혹한 현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둥바둥 최후의 발악을 하고 싶은 그 마음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예외적으로 비류연만은 그런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럴 필요성도 전 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마냥 귀찮을 뿐이었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어리석고 건방지기 짝이 없는 우민(愚民)들이 그런 우민들을 봐 줘야 할 어떠한 이유 도 찾아내지 못한 비류연의 손속에 동정심이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 때문에 어리석은 우민이라 평가된 초혼오귀검은 단호하게 얻어터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 이, 그 대가가 아픔을 동반하는 것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오늘 그들은 뼛속 깊은 아픔이 무엇인가에 대해 심도 있는 사색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얻는 귀중한 경험을 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아직 치러야 할 대가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아직 여분의 대가가 남아서 그들을 반갑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여러 모로 교훈이 남는 유익한 하루라 할 수 있었다. 절대로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악몽의 하루이기도 했다.

그들은 전 재산을 털린 채 발가벗겨져 돌아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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