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사신 – 10화


배가 나루터를 출발하고 반 시진이 흘렀을 때, 적지인살은 선원의 혼혈을 짚었다. 선원은 목뒤 천추혈을 집히자 어깨를 움찔하더니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피그르르 쓰러져 버렸다. 적지인살은 등짐을 풀어 종리추를 꺼내 들었다.

“조금 있으면 강변이 온통 거지 떼로 뒤덮일 게다. 빠져나갈 기회는 지금밖에 없어. 수영할 줄 아니?”

종리추는 고개를 좌우로 살래살래 흔들었다.

“그럼 지금 배우도록 해.”

적지인살은 다짜고짜 종리추를 백하로 집어 던졌다.

풍덩!

거센 물보라가 일었다.

“어어! 저!”

“사람이 빠졌다.”

범선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큰일이라도 벌어진 듯 벌떡 일어서서 소리를 질렀다. 적지인살은 얼굴에 쓰고 있던 인피면구를 벗어 던지고 백하로 뛰어들었다.

풍덩!

“사람이 뛰어 들었어!”

“아냐. 저 사람이 집어 던졌어! 저 사람이 집어 던졌다고!”

웅성거리는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종리추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 적지인살은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종리추를 허리춤을 움켜잡고 더욱 깊이 잠수해 들어갔다. 그는 물 밑으로 범선을 가로질러 반대쪽으로 튀어나왔다.

“휴우!”

참았던 숨을 토해냈다. 종리추는 그사이에 혼절해 있었다. 하기는 어린아이에게는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여기서 죽는다면 그것도 네 운명.’

숨을 돌려줄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고 그럴 만한 장소도 아니었다. 반대쪽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흩어지기 전에 강변에 올라서야 한다. 혹, 이쪽을 보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니 주의해야 한다. 적지인살은 다시 물속으로 잠수했다.

“컥!”

종리추는 격한 기침과 함께 강물을 토해냈다.

“아직 죽을 운명은 아니군.”

“컥컥!”

종리추는 중완혈을 누를 때마다 격한 기침을 토해내며 점차 정신을 차렸다.

“수영을 배웠냐?”

“모, 몰라요. 살았으니 배운 것 같은데요.”

“하하! 그래. 그럼 또 가야지?”

적지인살은 사정없이 몰아쳤다. 그도 이제 갓 정신을 차린 아이가 다시 길을 떠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살수라면 언제 어디서도 제 한 몸은 추스를 줄 알아야 한다.

‘배움은 빠를수록 좋겠지.’

적지인살은 교육을 시작했다.

“형은 점소이, 너는 뭘 했니?”

“변검을 배웠어요.”

“뭐, 뭣!”

적지인살은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만큼 깜짝 놀랐다.

“변검을 배웠단 말이냐?”

“네.”

적지인살은 종리추에게 품었던 모든 의문이 일시에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변검은 가면을 빨리 쓰는 기술이며, 가예 중 하나로 일인비전, 비인부전이다. 대체로 변검을 익힌 자는 고아 중에 계승자를 물색한다. 나이도 철이 나기 전인 대여섯 살 때부터 입양하다시피 데려와 키우면서 가르친다. 교육은 혹독하다. 아이에게 부모가 있다면 그럴 수 있냐고 항의를 할 만큼 지독하게 맞으면서 배운다. 변검의 최고수는 십보십변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가면은 몸속 어디에나 숨길 수 있으나 타인에게 발각돼서는 안 된다. 보통 범인들과 다름없는 평범한 모습. 그런 모습으로 열 걸음 걷는 동안 가면 열 개를 바꿔 쓴다. 손은 자유롭게 얼굴까지 올릴 수 있지만, 손에 가면을 들고 있다거나 바꿔 쓰는 모습이 들켜서는 안 된다. 바로 눈 앞에서 지켜보더라도 감쪽같이 가면이 바뀌었다고 믿을 만큼 신속해야 한다. 그와 같은 경지로 십수탈면이 있다. 사람을 눈앞에 세워놓고 얼굴 모습을 열 번 바꾸는데, 한 번 바꾸는 데 촌각을 넘어서면 안 된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얼굴 모습이 바뀌는 것이다. 변검은 공연을 하고 즉석에서 던져두는 공연료를 받는다. 그것이 생계를 유지하는 돈이다. 종리추는 열 살이니 벌써 공연을 했을 게다. 많은 사람 앞에서 변검을 선보였을 터이다. 공연에 천진난만한 얼굴, 티 없이 맑은 얼굴은 필수적인 요소다. 점혈을 빨리 배운 것도 이해가 된다. 변검을 배웠으니 오죽 손동작이 빠르랴. 거기에 총명까지 더해졌다면 살천문을 피해 도망 다닌 것도, 그동안에 애 어른이 아닌가 싶을 만큼 약삭빨랐던 것도 이해가 된다.

“변검을 보여줄 수 있겠니?”

“가면이 없는걸요.”

“그럼 이걸 빼앗아봐라.”

적지인살은 동전 하나를 꺼내 손바닥에 올려놓고 흔들어 보였다.

쉬익!

눈 깜짝할 순간에 손이 왔다 갔다. 그리고 동전이 없어졌다. 적지인살조차도 종리추의 손 모습을 뚜렷이 보지 못했다. 무인의 반응으로 피하려면 피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보고자 했던 것은 종리추가 변검을 익혔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었으니.

“정말… 변검을 익혔구나.”

“네.”

“어느 수준까지 배웠니?”

“십보십변은 못해도 심보삼변은 할 수 있어요.”

“음…! 양부는 누구냐?”

“돌아가셨어요. 살천문에.”

거기까지는 조사하지 못했다. 조사를 했더라면 좀 더 일찍 오해가 풀렸을 텐데. 적지인살은 무공을 전수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제일 먼저 가르친 것이 금종수다.

공동묘지는 여러 문파가 무공 수련 장소로 활용한다. 묘지에는 귀신이 있다. 실제로 귀신이 있고 없고는 상관없다. 있다고 믿으면 그만이다. 묘지와 같이 기분 나쁜 곳은 인간의 상상을 이상한 방향으로 몰고 간다. 꼭 귀신이 나올 것 같은. 그걸 믿으면 된다. 그런 기분은 공포심 때문에 나오는 것이며 희한하게도 공포심은 상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든다. 외가무공 중 금종수는 묘지에서 익히는 무공이다. 묘지에서 묘 하나를 선택해 눈을 감고 앉는다. 조용한 마음으로 손을 내밀며 ‘이리 나와 내 손을 잡아라’ 하고 명령을 내린다. 백일을 매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같은 말을 반복하면 귀신이 나와 손을 잡는데, 이 손을 잡아끌어 이겨야 한다. 만약 지게 되면 정신 이상자가 되어버린다. 여기까지는 차력사들이 말하는 신차력과 다름없다. 금종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물러서는 귀신을 쫓아가 내려쳐야 한다. 허깨비나 다름없는 귀신이 바위처럼 단단해 보이고, 바위를 내려치는 촉감이 느껴지고, 귀신의 형상이 바위처럼 부서져 나갈 때 금종수는 완성된다. 강한 정신력이 있어야만 익힐 수 있는 무공이 금종수다. 금종수를 익히고자 한 사람은 많지만 실제로 익힌 사람은 드물다. 꾸준한 인내와 강인한 정신력, 확고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금종수의 위력은 가히 소림의 대력금강장과 비교할 만하다. 당분간은 노숙을 할 생각이고, 도망자에게 노숙지로는 묘지가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니 겸사겸사 가르치는 생각에서 시작한 무공 전수였다.

“믿음이 없으면 절대 배우지 못하는 무공이다. 귀신이 있다고 믿어야 한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믿어야 한다.”

종리추는 어느새 깊은 침묵에 잠겨 있었다.


흑봉광괴는 인상을 찡그렸다. 적지인살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어떤 놈보다도 약삭빨랐다.

“아이를 먼저 빠뜨리고 나중에 빠졌다…”

흑봉광괴는 아이가 빠졌다는 쪽을 바라보다가 반대쪽 강변을 바라보았다.

“약은 놈이군. 머리가 비상해.”

처음으로 잡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길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래서는 안 되지. 개방 망신이야. 놓친다면 무슨 낯으로 무림동도를 대할꼬.’

“천율진을 중심으로 반경 백 리를 샅샅이 뒤져라. 약속한 삼 일이 지났으니 보는 즉시 참살하도록 하고. 반 시진 차이밖에 나지 않았으니 멀리는 못 갔을 거야.”

흑봉광괴는 편안한 음성이 아니었다.

“네.”

걸개 다섯 명이 신속하게 쾌속선으로 갈아탔다. 총타에서부터 적지인살의 추살을 목적으로 데려온 다섯 호법이다. 그들은 호법이라는 직위에 있으나 실은 추적의 달인들이다. 다섯 호법이 건너편 강변에 내려서 신형을 날리는 모습을 본 후, 흑봉광괴의 입이 다시 열렸다.

“구성, 망양, 호포로 가는 길을 철저히 차단하도록.”

“예.”

천애유룡은 적지인살의 도주가 마치 자신의 책임같이 여겨져 괴로웠다. 범선에 탄 것을 알았고, 강변을 막으라는 명을 받았는데도 놓치고 말았으니 무슨 면목이 서랴. 그는 또 적지인살이 사라졌다는 소리를 듣고 어찌해야 좋을지를 몰랐다. 감쪽같이 사라졌으니 어디서 종적을 찾는단 말인가. 흑봉광괴의 명을 받자 비로소 확연히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그래, 도주하지 못해. 반 시진 차이밖에 안 나. 반 시진이면 아무리 빨라도 백 리 밖으로 벗어날 수 없어. 구성, 망양, 호포를 차단하면… 문도는 피할 수 있어도 발걸음을 더디게 할 수 있어.’

흑봉광괴의 경륜은 천애유룡에게 많은 깨우침을 주었다. 천애유룡은 폭죽을 꺼내 사방으로 다섯 개를 쏘아 올렸다.

“노산, 동창까지 막는 게냐?”

“구성, 망양, 호포를 벗어나면 노산, 동창입니다. 문도를 피하려면 산을 탄다 해도 천평으로 갈 수밖에 없는데, 천평은 평야입니다. 멀리서도 한눈에 뛸 겁니다. 천평에 문도를 풀어 놓겠습니다.”

흑봉광괴가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여 인정했다. 천율진에서 오 리 정도 떨어진 강변에서 어린아이가 누웠던 것과 비슷한 자국이 발견되었다. 모래사장에 새겨진 자국은 이리저리 엉켜 있어 뒤척였던 자국이 틀림없었다.

“강물을 토해냈군.”

다섯 호법 중 유난히 큰 호법이 말했다. 그는 모래를 손에 들고 비벼보기도 하고 냄새를 맡기도 했다.

“시간은?”

“모래가 마르지 않았어. 물기가 그대로야. 냄새는… 음! 장로님 말씀이 맞았어. 겨우 반 시진 상관이야.”

다섯 호법은 모래사장에서 발자국을 찾아냈다. 크고 작은 발자국 네 개. 발자국은 모래사장을 지나 자갈밭으로 이어졌다. 다섯 호법은 발자국과 이어진 자갈밭을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자갈 사이에 떨어진 모래를 찾아냈다. 물에 젖은 옷에서 흘러내린 물기는 모래를 단단하게 굳혀놓았다. 자갈밭을 지나 풀밭에 이르자 흔적은 더욱 뚜렷해졌다. 풀잎이 누운 흔적, 군데군데 떨어져 있는 물기.. 모든 게 추적의 실마리였다. 다섯 호법 중 볼에 검상이 있는 호법이 이결제자를 불렀다.

“이리 곧장 가면 어디가 나오느냐?”

“망양이 나옵니다.”

“망양… 망양을 가기 전에 마을은?”

“농가가 몇 채 있고 촌 마을이 십여 개 됩니다만…”

“마을에 들리지 않고 노숙을 해야 한다면 어디서 하겠느냐?”

“칠석각도 있고…”

“사람을 한 명도 만나지 않고 노숙해야 한다면?”

“묘지밖에 없습죠.”

“묘지가 있다더냐?”

“공동묘지가 두 군데 있습죠. 공동묘지에는 묘를 지킨다고 쳐 놓은 움막이 몇 개 있어서 비바람은 피할 수 있습죠. 낡고 허물어져 볼품은 없지만.”

다섯 호법의 눈과 눈이 마주쳤다.

“묘지가 두 군데라고 했는데 어디 어디냐?”

“천음산은 작은 산이지만 명당자리라고 소문이 나서 돈 많은 사람들이 주로 묘를 쓰고, 횡성산은 돈 없는 사람들이 거적때기에 싸다 묻는 곳입죠. 저 같으면 천음산에서…”

“장로님께 급전을 보내라. 분타 문도는 천음산을 에워싸고 타구진을 펼쳐 놓으시라고. 우리는 횡성산으로 간다. 그 말도 전해 올려라.”

“횡… 성산입니까요?”

물음을 던진 문도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다섯 호법은 어느새 신형을 날려 멀찌감치 멀어져 갔다. 그들의 신형은 하늘을 나는 비조 같았다.

“아! 대팔건곤보! 이봐, 저분들이 펼친 게 대팔건곤보 맞지?”

“그런 것 같은데?”

“똑같은 대팔건곤보인데 어쩜 이렇게 차이가 나지?”

이결제자는 직접 대팔건곤보를 펼쳐 보았다. 다섯 호법이 펼친 것에 비하면 봉황에 까마귀였다.

“이봐, 뭐 해! 장로님께 빨리 연락을 드려야지.”

“아참, 내 정신 하고는.”

이결제자는 황급히 폭죽을 쏘아 올리고는 범선이 있는 곳으로 치달려갔다. 이결제자와 흑봉광괴는 얼마 가지 않아서 만났다.

“횡성산이라고 했느냐?”

“네. 분명히 그렇게 들었습니다. 분타주님과 저희에게는 천음산에서 타구진을 펼치라고 하셨고.”

“분타주, 문도를 이끌고 가시게. 천음산을 밑에서부터 조여 올라가야 하네.”

“직접… 치십니까?”

“있으면 치시게. 타구진은 잘 수련되었는지 모르겠군.”

“어느 분타보다도 잘 수련시켰다고 자부합니다.”

“그럼 가보시게.”

흑봉광괴는 다시 여유를 찾았다. 그의 음성에는 개방도에 대한 자부심과 반드시 잡을 수 있다는 확신으로 가득 찼다.

“천음산에서 종적을 찾지 못하면 곧바로 망양으로 가게. 그때쯤 밀마를 볼 수 있을 터… 보지 못한다면 놓친 것으로 알고 방주님께 전갈을 드리게.”

“바, 방주님이라고 하셨습니까?”

그것은 특명을 말한다. 개방 전 문도가 매달려야 할 사안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죽이는 것이 낫지 놓친 다음에 후회해 봤자 여러 문파에게서 받을 수모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흑봉광괴는 포위망을 완벽하게 좁혔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놓친다면 정말 개방이 총력을 기울여야 해. 계속 뒤만 쫓아갈 수는 없어.’

놓칠 리 없지만….

흑봉광괴는 횡성산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랜덤 이미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