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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00화


강물이 꽁꽁 얼어붙었다. 섬과 육지를 오갈 수 있는 소선은 발이 묶여 휑뎅그렁 놓여 있다.

바람이 쌩쌩 불었지만 춥지는 않았다. 바람막이 하나 없는 백사장 한가운데지만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열기는 추위를 몰아내고 뜨거움을 안겨주었다.

오랜만에 모든 사람이 둘러앉았다. 섬에 있는 사람은 빠짐없이 한자리에 모였다. 갓난아기 조미까지도 정원지의 품에 안겨 낯익은 얼굴들을 빠끔히 바라봤다.

등천조가 모닥불에 노릿노릿 익은 돼지고기를 베어냈다. 구운 고기에서 풍겨나는 육향(肉香)이 벌써부터 뱃속을 건드리던 참이었다.

“주공, 이것도……”

유회가 입맛을 다시며 술 단지를 가리켰다. 무려 삼십여 독에 이르는 술 단지가 백사장 한 귀퉁이를 차지한 채 놓여 있다.

종리추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고갯짓이 떨어지자마자 광부가 혼세천왕에게 고함을 버럭 질렀다.

“야, 뭐 해! 빨리 날라야 할 것 아냐!”

“알았수, 제길! 딱 삼 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광부 형님을 부려먹는 건데.”

“이놈의 새끼가 궁시렁거리기는……”

“아, 내 입 가지고 말도 못 하오?”

“못한다, 어쩔래! 앞으로 말할 때는 허락받고 해.”

“형님, ‘제길!’이라고 말하고 싶은데, 해도 되오?”

“뭐? 이놈의 자식이!”

광부가 짐짓 주먹질을 해댔고 혼세천왕은 황급히 몸을 빼 술 단지를 날라왔다.

광부가 혼세천왕을 막 대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혼세천왕은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거력(巨力)을 지니고 있지만 무공이 극히 미비했다.

종리추가 비호무영보와 혈염무극신공을 가르쳤지만 절름발이인지라 비호무영보를 펼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혈염무극신공을 바탕으로 펼치는 혈염도법도 도를 중심으로 펼치는 무공이라서 혼세천왕의 병기인 단병쌍추로는 제 위력을 나타내지 못했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신력이 워낙 강해 살수로서 부족함은 없지만 절정 고수에게는 어린아이와 같은 상대였다.

그런 상태에서 종리추는 무공 수련에 들어갔다. 혼세천왕을 돌봐줄 정신적 여력이 있을 리 없었다.

비호무영보와 혈염무극신공에 가장 정통한 적지인살이 혼세천왕의 사부가 되었다. 비호무영보와 혈염도법을 혼세천왕에게 맞게 고치고 수련시켰다.

문제는 적지인살이 무공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십여 년 전에 배금향으로부터 당한 상처는 두고두고 적지인살의 발목을 잡았다. 개방 수천호법의 이목을 속이기 위해서는 부득이 취한 독수였지만……

적지인살이 지도해 주지 못하는 실전 수련을 광부가 대신했다. 광부는 혼세천왕보다 이해가 빨랐다.

그 역시 절정 무공을 익히고 있지 않았는지라 비호무영보와 혈염도법이 필요했고 적지인살이 가르쳐 주는 내용, 내력이 깃들지 않은 시연(試演)만 보고도 요지를 파악해 냈다.

적지인살이 광부에게 전수한 무공은 다시 혼세천왕에게 이어졌다. 혼세천왕에게 광부는 제이의 사부인 셈이다.

“겨울이 가기 전에 최고의 병기를 찾도록.”

술이 얼큰히 들어간 다음 종리추의 입에서 나온 일성(一聲)이다.

“……?”

“유구, 유회는 각법이 뛰어나니 척퇴비침을 찾아봐.”

“척… 퇴비침? 그게 뭡니까?”

유회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신발 밑창에 숨기는 비침이오. 신발 앞쪽, 뒤쪽, 자유자재로 침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거둘 수도 있죠. 만들기에 따라서는 침을 날릴 수도 있고, 각법을 잘 쓰는 사람이 척퇴비침까지 사용하면 상대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죠. 웬만한 고수들은 펑펑 나가떨어질 겁니다.”

종리추 대신 구류검수가 대답해 줬다.

“그거 어디 가서 구하는데?”

“사천당문.”

“……”

갑자기 조용해졌다. 현 무림에서 척퇴비침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구류검수가 사천당문을 이야기한 것은 사천당문에서 만든 척퇴비침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비침의 진퇴(進退), 날카로움, 발사의 용이성… 모든 면에서.

“등천조, 제조 기법을 알아봐.”

“네.”

종리추가 간단히 침묵을 잠재웠다.

“혈살편복.”

“네!”

대답 소리에 활력이 깃들었다. 종리추는 지금 ‘움직임’을 말하고 있다. 지난 일 년간 잔뜩 움츠렸던 육신을 일으킬 시기가 됐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산서(山西) 태평(太平)에 가면 귀영방편(鬼影方鞭)이라는 자가 있어. 병기를 빌려와.”

무인이 병기를 빌려줄 리가 있는가. 죽이라는 말이다. 죽이고 빼앗아 오라는 말이다.

“병기 때문이라면 제가 가진 것도……”

“귀영방편은 방절편(方節鞭)의 달인이야. 그의 방절편은 설옥(雪玉)으로 만들어서 가볍기는 새털 같고 강하기는 묵한강철을 능가한다고 하지.”

“음……”

혈살편복은 침음했다. 그런 병기라면 혁편(革鞭)의 효용을 최대한 살리면서 강도(剛刀)의 역할까지 할 수 있다. 펼칠 수 있는 초식이 다양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절정 신공을 익힌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

“반드시 빌려오겠습니다.”

목숨을 거두기도 쉽지 않으리라.

“음양철극.”

“네, 어디로 갈까요?”

음양철극은 기대에 가득 찬 눈빛이다. 지금 종리추가 시키는 일은 그들 무공을 적어도 한 단계 이상 발전시키는 일이다. 그동안은 병기의 중요성을 간과해 왔지만… 생각해 보니 병기처럼 중요한 것이 또 어디 있는가. 무인이.

“강서(江西) 건창(建昌).”

“강서 건창.”

“백조쌍극(白彫雙戟)이라는 무인이 있지.”

“그놈 참… 무명 한번 거창하네.”

“하하, 쌍극은 날 위로 떨어뜨린 머리칼도 베어낼 정도로 날카롭다고 하지.”

음양철극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정도입니까?”

“여포(呂布)가 백조쌍극의 쌍극을 봤다면 방천화극(方天畵戟) 대신 쌍극을 취했을 겁니다. 지금 주공께서 말씀하신 방절편이나 쌍극은 모두 송나라 장인(匠人)인 포사(包蓑)가 만든 병기죠. 갈고닦지 않아도 날카로움이 천 년을 가고 사람을 베어도 기름이 묻지 않는다는 명기(名器)들입니다.”

구류검수가 보충 설명을 했다. 구류검수는 명가 출신답게 아는 것이 많았다.

“쉽지 않겠군.”

음양철극이 자신의 쌍극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쉽지 않은 건 쌍극을 취하는 것보다 두 자루의 쌍극에 익숙해진 무공을 한 자루의 쌍극으로 펼치는 것일 거야. 백조쌍극의 쌍극은 무게가 스무 근, 한 손으로 펼칠 수 없지. 하지만 해내야 해.”

무공에 병기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병기에 무공을 맞춘다? 금시초문이지만 종리추가 말한 것이니 해내야 한다. 그것은 틀림없이 무공을 진일보시킬 테니까.

“광부.”

“말씀하십시오.”

“대부(大斧)를 병기로 쓰는 사람은 많아도 소부(小斧)를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알고 있습니다.”

“운이 좋아.”

“……?”

“많지 않은 사람들 가운데 명품을 가진 사람이 있으니 말이야.”

종리추는 확실히 변했다. 전 같으면 이런 말은 하지 않았다. 할 말만 딱딱 부러지게 했다.

“누굽니까, 그자가?”

“멀리 있어. 호광성 방성산에 가서 동찬모라는 자를 찾아.”

“흐흐! 걱정하지 마십시오. 틀림없이 빌려오겠습니다.”

“죽이지는 마.”

“……?”

“갈 때 총관에게 들려서 은자 백 냥을 가지고 가.”

“지금… 돈을 주고… 빌려오라는 말입니까?”

“무공을 모르는 자인데 구태여 죽일 필요가 없지.”

“무, 무공을 모르다니요? 그런 자가 어떻게 명품을……?”

“가보(家寶)라 지니고 있을 뿐이야. 벽력사부(霹靂四斧)라는 명품이지만 헛간 한구석에 처박아놨다더군. 녹을 제거하고 마음을 심으면 다시 명품으로 돌아올 거야.”

“죽일 놈! 벽력부를 겨우 헛간에 처박아놓다니!”

광부가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화도 난다는 듯 말했다.

벽력부는 부를 사용하는 무인들이 꿈에라도 갖고 싶어 하는 명품 중에 명품이다. 그것 또한 송의 장인인 포사가 만든 병기로 무공을 모르는 범인이 사용해도 거목을 단숨에 쓰러뜨리는 날카로움을 지녔다고 한다.

지금도 그 정도로 날카롭다면 동찬모라는 자가 헛간에 처박아놓을 리 없다. 많이 손봐야 되리라. 옛날의 날카로움을 되찾으려면. 그래도 쇠의 질과 담금질 정도가 남다르니 다른 소부와는 비교할 수 없으리라.

“좌리살검.”

“네.”

“좌리살검은 천왕검제의 천왕구식을 익히도록 해.”

“……?”

“좌리살검의 묵린은 자체가 뛰어난 병기야. 그런 종류의 병기는 흔하지 않지. 어떤 신병이기보다 뛰어나. 거기에 천왕검제의 천왕구식을 가미하면 더욱 날카로워질 거야.”

종리추는 비급 한 권을 건네줬다. 비급의 겉면에는 ‘천왕구식’이라는 글씨가 투박하게 쓰여 있었다.

“이건!”

“천왕검제가 언젠가 이런 말을 했지. 좌리살검이 자신의 천왕구식을 익히든가 자신이 묵린검을 소지한다면 지금보다 배는 강해질 거라고. 나도 동감해.”

좌리살검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비급을 받았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친형제보다 가깝게 느꼈던 사람들이다. 천왕검제는 바로 위의 의형이기도 하다.

폭풍처럼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몰아치는 천왕구식. 죽은 사람의 무공이 이어지고 있다.

“구류검수.”

“네!”

구류검수는 침울해지는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밝게 대답했다.

“매화검법을 사용해.”

“……”

구류검수는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했지만 자기 자신이 우울해지고 말았다.

화산파를 떠나면서부터 매화검법은 사용하지 않았다. 매화검법을 사용할 경우 이십사수 매화검법의 독특한 상흔(傷痕) 때문에 종적이 드러날 위험도 있거니와 화산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종리추는 매화검법을 다시 사용하라고 한다. 어쩌자고……? 왜?

“도망만 다닌다고 능사가 아냐. 은원이 있으면 풀어야지. 구류검수, 이제는 풀어.”

‘풀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풀지. 난 사매를 만나야 해. 하지만 만날 수 없어. 사매를 만나기 전에 사부, 사형, 사제들 손에 죽고 말아. 오면 싸워야 하고… 난… 먼저 죽을 수도 없고 죽일 수 있는 능력이 돼도… 그들을 죽일 수 없어.’

구류검수는 점점 더 침울해졌다.

종리추가 말한 것은 누구도 말할 수 없다. 구류검수의 사정을 아는 사람이라면 백이면 백 그렇게 말할 게다. 도망만 다니지 말고 풀어야 한다고.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도 그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을까?

‘아직은 어린 문주……’

종리추의 무공은 확실히 놀랍다. 자신이 열 번 죽었다 깨어나도 따를 수 없는 자질을 지녔다. 지혜도 번뜩인다. 그의 행동 뒤에는 항상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다.

하지만 역시 경륜이 부족하다. 세상살이를 조금만 안다면 지금 이와 같은 말을 하진 않았을 게다.

종리추가 말을 이었다.

“매화검법을 사용하면 당장 화산파 문도가 달려올 테지.”

‘그럴 거요.’

“우리가 처리하지.”

‘원하는 바가 아니오.’

“싸움을 한다는 건 아냐. 따돌린다는 거지. 약속하지. 화산파 문도를 만나기 전에 사매라는 여인부터 만나게 해주겠어.”

“……!”

구류검수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그럴 수도 있단 말인가? 어떻게……?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백 번, 천 번 죽어도 사용하리라. 매화검법이 아니라 무공을 사용할 때마다 팔다리 하나씩을 잘라내야 된다고 해도 기꺼이 사용하리라.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럴 수는 없다. 그런 방법이 있으면 진작 사용해 봤을 게다. 생각이란 걸 하는 때가 있다면 오직 그런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할 때뿐이다. 매화검법을 사용하는 순간……

“매화검법을 사용할 용의가 있나?”

구류검수는 서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매부터 만나게 해주겠다는데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그 약속을 종리추가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종리추… 세상에서 가장 순박한 사람이 약속을 했다고 해도 안 믿었을 게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가 약속을 했어도 마찬가지다. 종리추는 믿는다.

그랬다. 섬에 있는 사람들은 일 년 사이에 자신들의 마음이 어떻게 변했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일 년 전과 지금을 비교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일 년 전의 종리추는 강하고 유능한 문주였다. 그에게 사적인 일을 의논하기 위해 살문에 들어왔지만 완벽하게 믿는 마음은 없었다. 어차피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마찬가지 입장이라는 생각이 짙게 깔려 있었고, 살수로 암약하다 보면 자신의 구원(舊怨)을 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졌다.

지금은 완전히 믿는다. 그런 변화를 무인들은 감지해 내지 못했다.

종리추의 인상에서 강한 기운이 사라지기 시작했을 때부터다. 종리추의 얼굴에서 은은한 웃음이 번져 나올 때부터다.

그때부터다. 종리추가 편안하게 느껴지면서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내로 부각되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원인은 모른다. 그를 보는 순간 마음속에서 우러난 느낌이니까.

“매화검법을 사용하는 데는 폭이 얇은 검이 좋겠지. 남경(南京)에 가면 검자(劍刺)의 달인이 한 명 있어.”

검자… 검신에 톱니처럼 홈이 패인 검이다. 찌르는 공격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으며 베는 공격도 쓸어내기 때문에 흉포하기 이를 데 없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홈이 패인 만큼 검신이 얇아 중병(重兵)과 부딪쳤을 때는 부러지기 쉽다는 점이다.

“가져오죠.”

구류검수는 들뜬 음성으로 말했다. 검자인들 어떻고 시중에서 동전 열 냥에 살 수 있는 청강장검이면 어떤가. 요원하게만 느껴졌던 꿈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는 느낌인데.

종리추는 후사도와 혼세천왕에게도 신병(神兵)을 누가 가지고 있는지 일러줬다.

후사도는 소도와는 모양새가 완전히 다른 표도(鏢刀: 소도이나 도 끝이 나팔꽃처럼 벌어진 도)를, 혼세천왕은 낭아추(狼牙鎚)를 구하러 가야 한다.

표도는 다른 병기들처럼 포사가 만든 병기다. 종리추가 말한 대로 모두 병장기를 빌려올 경우 포사가 죽는 순간 단 여덟 개의 병기만 남기고 모두 부러뜨리라고 유언한 여덟 개 중 다섯 개가 모이게 된다.

낭아추는 포사가 만든 것은 아니지만 능히 기병에 속할 만했다.

낭아추 자체는 시중에서 만든 것과 다름없지만 눈독을 들이는 부분은 낭아추와 손을 연결해 주는 추사(鎚絲)다. 질기기가 철사를 능가한다는 은잠사, 그것도 부족해서 은잠사에 쇠털처럼 가늘게 달라붙은 모침(毛針)에는 극독이 묻어 있으니……

낭아추가 펼쳐지는 이 장 범위는 죽음의 구역이 된다.

‘됐어. 이것으로 이들 모두… 절세고수가 되는 거야.’

종리추는 만반의 준비를 갖춘 다음에야 무림에 나갈 생각이다. 일 년 전, 무림에 나간다는 결정을 내렸을 때부터 생각해 둔 방법이다.

그러고 보면 막대한 은자를 소모해 가며 거둬들인 정보가 전혀 쓸모없었던 것은 아니다. 포사의 팔대기병(八大奇兵) 중 다섯 개의 행방을 찾아냈으니까.

종리추는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찬바람이 혹독하게 몰아쳤지만 자리를 일어서는 사람은 없었다. 여인들도,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정원지조차도 자리를 지켰다.

혼세천왕이 돼지 멱따는 소리로 노래를 불러댔다. 살문에 들어올 때부터 외팔이였던 좌리살검이 흥에 겨운지 일어나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으하하하! 팔병신이 춤을 추니 영 보기가 그렇네. 이왕이면 내가 짝을 맞춰줘야지.”

살문 싸움에서 팔을 잃은 광부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일어나 같이 춤을 추었다.

밤이 지나가고 새벽이 다가올 무렵, 모닥불도 불씨만 남은 채 마지막 몸부림을 쳤다. 아무도 불씨를 살리려 들지 않았다.

고기도 떨어지고 술도 떨어졌다. 춤을 추는 사람도,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없다.

휘이잉……!

찬바람이 머릿결을 날리며 지나갔다.

종리추는 이들에게 무거운 짐을 안겼다. 살수가 익혀야 할 살인 기법을 이들처럼 능숙하게 사용하는 사람들도 없을 게다.

문제는 죽일 요량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아니, 죽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게… 세상에서 완전히 잊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실종(失踪).

실종이다.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 아니라 실종당했다고 믿게 만들어야 한다. 살문이 재건한다는 기미를 조금이라도 보여서는 안 된다.

“구파일방은 물론이고 묵월광, 하오문… 모든 사람을 속여라.”

잔인한 명령이다. 그렇잖아도 얼굴이 알려져 무림에 나가는 것조차 모험인 사람들인데……

어쩌면 이들 중 몇몇은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섬에서 벗어나 강을 건너는 순간부터 이들의 목숨은 도마 위에 올려진 생선이 된다.

“술도 떨어졌고… 다녀오죠.”

혈살편복이 일어섰다. 광부, 혼세천왕도 주섬주섬 일어섰다.

강이 꽁꽁 얼어붙어 얼음을 깨가며 나가야 한다.

퍽! 퍽……!

혼세천왕이 벌써 얼음을 깨기 시작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동안 소문주님 소식도 있었으면 좋겠군요.”

후사도의 짓궂은 말에 어린의 볼을 붉혔다.

“봄이 되기 전까지 돌아와.”

종리추는 담담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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