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1화
종리추는 귀신과의 대화를 한 시진째 계속했다.
“무공을 배우는 데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다. 넌 군소리 없이 배우려고 하는데 어떤 목적이냐?”
“편히 살고 싶어요.”
“…?”
“도망 다니는 것은 이제 질렸어요.”
“하하!”
적지인살은 실소를 터뜨렸다.
‘아마도 네 꿈은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겠구나.’
그가 종리추에게 무공을 전수하는 것은 살수로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소고에게 도움이 될 만한, 자신이나 다른 의형들이 대형을 돕듯이 가능하면 한 팔이 되어 충성을 바치는. 그런 목적이 아니라면 무공을 전수할 필요가 없었다. 적지인살은 종리추에게 주인이 있다는 것을 뇌리에 각인시킬 필요를 느꼈다.
“잘 들어라. 네게는 주인이 있다.”
“…”
‘또 천진난만한 얼굴. 알면서도 섬뜩하군. 백계를 마음속에 품은 능구렁이 같아.’
“현재는 그냥 소고라고 불린다. 작고 외로운 거인이지. 훗날 장성하게 되면 부주가 될 게다. 살혼부는 멸문했으니 어떤 부가 될지는 모르겠다. 그분이 너의 주인이시다.”
“…”
종리추는 알아들었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쳐다보기만 했다.
“네 무공이 더 강해도…”
‘내가 왜 이런 말을 하지? 더 강해질 리가 없는데… 대형에게는 소고를 무적으로 키울 무공이 있다고 했어. 소고의 자질은 천에 하나 날까 말까 하고. 풋! 불가능한 일을 걱정하고 있군.’
“그분은 너의 주인이시다. 견마지로라는 말이 있다. 개나 말같이 온 정성을 다해 받들어 모셔야 한다는 것이지. 네가 그래야 한다, 소고라는 분에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무공이 더 강하다면… 아니 강하지 않아도 장성한 젊은이가 남의 밑에 들어가서 수족이 되려고 할까? 안 하겠지. 안 할 거야. 이형 말씀대로 조치를 취해야 돼.’
대형은 호탕하게 웃으며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런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겠지. 무공이나 기품으로 제압하지 못할 것 같으면 부주가 되지 못한다네. 이제가 말한 것은 임시방편이야. 그렇게 해서는 거인이 되지 못해. 놔두게. 소고도 자신이 헤쳐 나가야 할 길은 헤쳐 나가야 되겠지.”
그러나 종리추의 맑은 눈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알지 못할 불안감이 엄습했다.
‘아냐, 이형 말씀대로 조치를 취해야 돼. 우선 여기를 빠져나간 다음 곧바로…’
“방금 한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느냐?”
종리추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더욱 불안했다. 종리추는 살천문의 추적에서 살아남았다. 살기 위해서 천진스런 얼굴로 시종을 자처했다. 그런 아이가 지금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랴. 적지인살은 종리추의 대답을 곧이곧대로 믿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세상 사람은 모두 의심하고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듯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게 몸에 배인 살수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그럼 이제 가르쳐 준 대로 수련을 해봐라.”
종리추는 허물어져 귀기스런 무덤 앞에 앉아 눈을 감고 양손을 내밀었다. 어떤 사람은 백일이 아니라 십 년이 걸려도 귀신을 보지 못한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삼사 일째부터 귀신을 보는 사람도 있다.
‘모두 네가 할 탓…’
적지인살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사실 그 역시 금종수를 익히지 못했다. 수련 방법을 알고 있고, 수련도 해보았지만 귀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타나기만 하면 두부를 으깨듯 부숴 버릴 준비가 되었건만 귀신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무덤이 아니었다면 금종수라는 무공 자체도 언급하지 않았으리라. 길을 가는 도중이지만 살수로서 수련을 시키기로 작심했고, 환경에 맞는 수련을 생각하다 보니 금종수를 떠올리게 된 것뿐이다. 금종수를 익히지 못한다 해도 무덤 앞에서 수련을 하다 보면 강심은 되지 않겠는가. 종리추가 깊은 상념에 젖은 것을 본 적지인살은 몸을 일으켜 무덤을 배회했다.
‘이게 좋겠군.’
그는 갓 만들어놓은 듯한 무덤을 찾아냈다. 무덤에서는 흙냄새가 진하게 풍겨 나왔다. 무덤을 만든 지 삼 일이 지나지 않았다. 적지인살은 기형월도를 꺼내 무덤을 파헤쳤다. 무덤에서 관도 없는 여자 시신이 발굴되었다. 관을 살 형편도 되지 못했는지 여자는 거적때기에 둘둘 말려 묻혀 있었다. 시신은 장작개비처럼 딱딱했고, 악취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만들었지만 부패가 심하지는 않았다. 적지인살은 시신을 엎어놓고 익숙한 솜씨로 머리 뒤쪽에서부터 머리가죽을 벗겼다.
슥…! 사삭…!
고요한 밤에 월도 움직이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가죽을 벗겨낸 여자의 머리가죽을 곱게 접어 행낭 속에 꾸려 넣은 적지인살은 다시 시신의 하의를 걷어 올렸다. 고의도 입지 않은 여인의 하체가 달빛 아래 푸른빛을 띠며 요요롭게 드러났다. 월도가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 벗겨내는 가죽은 여인의 허벅지였다. 양쪽 허벅지에서 살가죽을 넉넉하게 벗겨낸 적지인살은 여인이 둘러쓰고 있던 거적때기를 곱게 덮어주었다. 그리고 처음처럼 야트막한 봉분을 쌓았다. 적지인살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묘지를 돌아다니며 새로 쌓은 봉분은 어김없이 파내고 인피를 벗겨냈다. 한 시진 동안 그가 벗겨낸 인피는 무려 여섯 구에 이르렀다.
‘이만하면 한동안은 버티겠지.’
종리추는 여전히 무덤 앞에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리 나와서 내 손을 잡아라. 이리 나와서 내 손을 잡아라…”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공동묘지의 괴기한 분위기와 어울려 모골을 송연하게 만들었다.
“이제 가자.”
적지인살은 종리추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여기서 자는 게 아녜요?”
종리추는 즉시 몸을 일으켰다. 순간, 적지인살의 눈매가 사납게 돌변했다.
“무공을 수련할 때는 일념으로 해야 된다. 너처럼 간섭할 것 다 하고, 생각할 것 다 해서는 무공을 수련하지 못해. 누가 와서 네 목을 베어가도 모를 만큼 집중하지 않으려면 처음부터 때려치워라.”
“…”
종리추는 주눅조차 들지 않았다.
‘변검을 배웠다고 했지…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맞으며 배웠을 테니, 곱게 말해서는 콧방귀도 안 뀌겠군. 힘들겠어. 두들겨 패가며 가르치려면.’
적지인살은 자신도 모르게 소고와 종리추를 비교했다. 소고는 연공을 시작하면 누가 떠메어가도 모를 만큼 몰입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기를 시작하면 어깨에 손을 얹는 정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내면에 깊숙이 파묻혀 운기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소고의 연공은 염려스러웠다. 운기 중에 들짐승이라도 나타나 물어뜯기라도 한다면 여지 없이 기혈이 뒤틀려 주화입마를 당할 공산이 컸다. 종리추는… 몰입하지를 못한다. 끈기 있게 앉아 있는 것은 변검을 배우며 익힌 습관에 불과하고, 점혈을 쉽게 배운 것도 습관의 연속이다. 무공을 배울 만한 자질은 있는 것인가.
상승무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고루 갖춰져야 한다. 첫째는 근골이다. 근골이 약하다고 무공을 익히지 못하라는 법은 없지만 강인한 근골을 지녀야만 상승무공을 접할 수 있다. 둘째는 지력이다. 무공은 정도를 더해갈수록 높은 지력을 요구한다. 끈기만 있으면 무공을 익힐 수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한계가 있다. 상승무공으로 들어서면 깨달음을 얻어야 하고, 지력이 뛰어날수록 빨리 얻게 된다. 셋째는 집중력이다. 연공할 때도, 실제로 검을 들어 싸울 때도 자신에 몰입해야 하고 상대에 몰입해야 하며, 싸움 자체에 몰입해야 한다. 진기를 끌어올릴 때는 운기에 몰입해야 하며, 타격을 할 때는 일점에 집중해야 한다.
‘무공이란 집중력이다’고 단언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리추는 점점 실망을 준다. 적지인살은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아이를 데려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치밀었다. 다른 아이들은 육체 공지장이 무려 오 년이나 공을 들여 발굴해 낸 아이들이다. 그런데 자신은…
‘아직 어린 아이라… 나중에 차분히 수련시킬 때 보면 알겠지.’
“휴우! 가자.”
적지인살은 종리추를 옆구리에 끼고, 신법을 전개했다.
“아직은 온기가 남아있어.”
다섯 호법 중 눈이 큰 호법이 무덤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말했다. 호법이 손을 대고 있는 곳은 다른 곳과 달랐다. 잡초들이 눕혀 있었다. 누가 앉았다는 증거! 손을 대보니 은은한 온기가 느껴졌다. 이마가 툭 불거져 어렸을 적에는 짱구라고 놀림깨나 받았을 호법이 재빨리 땅에 귀를 대고 지청술을 시전했다. 그의 귀에 만물의 소리가 잡혔다.
찌르륵…! 컹컹! 훅훅…!
그러나 기대하던 소리는 잡히지 않았다.
“소리가 잡히지 않아. 일 다경쯤 지난 것 같군.”
“일 다경이라… 쳇! 거의 다 잡았는데.”
“이것 봐. 묘를 파헤쳤는데?”
머리가 흑봉광괴처럼 봉두난발인 호법이 갓 만들어놓은 무덤 앞에서 소리쳤다. “아이구! 이를 어쩌나! 살아서 고생만 죽도록 하더니 죽어서도 편히 쉬지 못하고! 아이구! 얼굴 가죽까지 벗겨졌으니 이 원한을 어디서 갚나! 아이구! 아이구…!”
여기저기서 소란이 일었다. 어떤 사람은 너무 놀라 까무러치기까지 했다. 특히 자식을 땅에 묻은 부모는 사뭇 서럽디서럽게 오열을 터뜨렸다.
“제 명을 채우지도 못하고 죽었는데, 어린 놈이라 봉분도 쓰지 못하고 묻었는데… 아휴! 아휴!”
험한 꼴을 많이 봤다는 흑봉광괴와 다섯 호법이지만 눈앞에 벌어진 참상은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웠다. 어떻게 죽은 사람의 얼굴 가죽을 벗긴단 말인가. 그보다 더욱 난감한 것은 여인의 시체 두 구다. 시신들은 모두 얼굴 가죽과 함께 허벅지 가죽도 벗겨졌는데, 여인의 경우에는 죽었을망정 정조를 잃은 것으로 간주된다.
“내 아내가 아냐! 너희도 어미가 없다고 생각해라!”
극단적인 말까지 튀어나오고 자칫 싸움까지 벌어질 상황이었다.
“휴우! 천인공노할! 가서 인적 사항을 파악해 오너라. 가능하다면 자세히 화상을 그려오고. 인피면구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놈을 잡으면 산 채로 가죽을 벗겨 버리도록 하지.”
흑봉광괴는 정말 분노했다.
“남양 분타주에게는 천음산을 비우지 말라고 하게. 이곳에 있는 사신은 인피면구를 만들기에는 적절치 않아. 굶주릴 대로 굶주린 사람들이라… 천음산 묘지는 돈 있는 사람들이 이용한다고 했나?”
“네, 그렇게 들었습니다.”
“기름기 있는 인피가 필요할 걸세. 천애유룡에게 전갈을 보내서 근래에 조성된 묘를 잘 관찰하라고 하게.”
“예. 알겠습니다.”
“놈이 어느 쪽으로 갔다고 했는가?”
“흔적으로 보아 망양 쪽입니다.”
“생각대로군. 놈은 천평으로 갈 수밖에 없어. 방주님께 전서를 보내게.”
“장로님, 아직 놈을 놓친 게…”
“놈을 놓쳐서 방주님께 전갈을 보내는 것이 아니네. 놈은 치가 떨리게 만들어. 이 일은 방주님이 직접 처리하실 문제일세. 얌전히 죽일 수 없는 놈이야. 성이 풀리지 않지.”
“예!”
얼굴에 검상이 있어 싸늘해 보이는 호법이 색깔이 다른 폭죽 네 개를 쏘아 올렸다. 이제 대개방의 방주가 움직이리라. 노산, 동창, 구성, 망양, 호포, 천평은 만여 명이 넘는 개방도들로 득실거릴 것이다.
“놈이 빠져나갈 구멍은 없어.”
흑봉광괴는 성명병기 흑봉을 으스러지게 움켜쥐었다. 천음산에 있던 천애유룡은 횡성산에서부터 몇십 단계를 거쳐 전해져 왔을 폭죽을 보았다.
“방주님께 드리는 전갈이야.”
천애유룡은 불똥이 되어 떨어지는 폭죽의 잔재를 지켜보았다. 그는 생각했다.
‘적지인살은 보기라도 한 듯 한 걸음 앞서 달리고 있어. 일 다경 차이라… 횡성산에서 지체하는 관계로 시간은 두 시진으로 벌어졌어. 두 시진이면 망양 근처에 이르렀을 터.’
천애유룡은 산골짜기에서 쏘아진 두 번째 폭죽을 보았다. 빨간색 폭죽이 선두에 솟구쳤으니 자신에게 전해진 전갈이었고, 파란색 폭죽이 두 번째로 솟구쳤으니 움직이지 말라는 뜻이다. 세 번째로 솟구친 백색 폭죽은 강조다. 내일 정오까지는 절대 천음산을 벗어나지 말라는 전갈이다. 마지막으로 솟구친 녹색 폭죽은 전서구를 날렸으니 받아보라는 뜻인데…
‘횡성산에서 출발한 자… 두 시진이면 벌써 천음산을 지나쳤는데 천음산을 지키라니… 여기서 지체하면 지체할수록 놈에게 여유를 줄 뿐이야. 지름길로 해서 천평으로 가야 돼. 앞서 가야 잡을 수 있어. 좋아, 천평으로 가서 매복한다.’
천애유룡은 결정을 내렸다.
“전해달라! 천음산에 있는 문도는 창호에서 집결한다. 시간은 내일 동이 틀 때까지. 늦은 자는 문규로 다스린다! 광호! 너는 묘지 입구에 있다가 전서를 가져오면 즉시 가져와.”
“창호로 말입니까?”
“그래, 동이 트기 전까지 창호에 도착하지 못했으면 곧바로 천평으로 오고.”
“알겠습니다.”
천애유룡은 전서를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전서구는 천음산에서 십 리 떨어진 을막으로 전달된다. 을막에서 키운 비둘기이니 을막까지만 찾아오는 것이다. 을막에 있는 문도가 전서구를 받고, 말을 타고 달려온다 해도… 아무리 짧게 잡아도 한 시진은 소요된다. 한 시진이면 적지인살이 망양을 빙글 돌고 있을 무렵이지 않은가. 전서를 기다리기에는 마음이 너무 조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