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13화
종리추는 첩첩산중(疊疊山中)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앞에 사람이 있나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산이 워낙 높고 골이 깊어 웬만한 사람은 들어올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산중이니 사람이 있을 턱이 없었다.
“거, 바람 한번 모지네.”
모진아는 산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투덜거렸다.
이곳은 보아하니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낄 정도로 깊은 곳이다. 하물며 겨울산이니 말해 무엇 하랴.
종리추는 쉬지도 않았다.
지난 한 달 동안 못 걸은 걸음을 마저 걷겠다는 듯 신법을 펼친 것이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빨리 걸었다.
혈영신마는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종리추는 언젠가 이곳에 와본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는 이렇게 길을 잘 알고 있을 리 없다. 그는 머뭇거리는 것도 없고 방향을 잡느라 산을 둘러보는 일도 없다. 마치 동네 골목이라도 되는 듯 익숙하게 걷는다.
반면에 종리추를 ‘주공’이라 부르는 모진아는 걸음이 서툴다.
첫눈에도 처음 와본 사람이다.
한 사람은 잘 알고 한 사람은 전혀 모르고…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주공’이라고 부르면서?
새벽부터 걷기 시작한 걸음이 한낮이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보통 사람들은 하루 종일 걸려도 오를까 말까 한 산을 두 개나 넘었다.
산을 내려오자 또다시 산이 나왔다.
사방이 산이다. 높고 높은 산봉우리가 시야를 가려 하늘이 주먹만하게 보인다.
때는 정오가 약간 지났을 뿐인데 산자락에는 벌써 어둠이 깃들기 시작했다.
종리추는 산을 올라가지 않고 골짜기 안으로 파고들었다.
태곳적부터 사람 발길이 닿지 않았던 듯한 원시림은 세 사람을 반기지 않았다.
눈과 바위, 험한 산길… 군데군데 얼어붙어 있는 얼음들.
‘사람이 산다. 아니다. 산다고는 할 수 없어도 사람 발길이 닿은 곳이야.’
혈영신마는 곳곳에서 사람의 자취를 찾아냈다.
어떤 곳은 눈에 발자국이 찍혀 있기도 했고 어떤 곳은 길을 내느라고 나뭇가지를 자른 듯하다.
‘살문이 여기 숨어 있나?’
혈영신마는 곧 고개를 저었다.
살문이 이곳에 있다면 모진아의 발걸음이 이처럼 서툴지는 않을 것이다.
골짜기를 타고 걸어 들어가기를 근 한 시진.
세상으로 어둠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니 하늘은 아직도 새파랗다. 하지만 골짜기는 초저녁이라도 된 듯 어둑어둑하다.
산굽이를 굽이굽이 돌았다.
말이 골짜기를 타는 것이지 산을 몇 개나 지나쳤는지 모른다.
하늘도 어둠이 깃들 무렵, 그러니까 산속에서 꼬박 하루를 보낸 후에야 종리추의 발걸음이 멈췄다.
“주공, 여기가 어딥니까?”
“목적지.”
“옛?”
모진아는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종리추가 목적지라고 한 곳은 사람이 머물 만한 곳이 아니었다. 좌우는 벼랑에 가까운 비탈이고 그나마도 바위가 푸석푸석해 기어오를 수도 없다.
앞으로 나가기도 그렇다. 길이 끊어지고 울창한 수림만 가득하다.
수림도 수림 나름, 이곳 수림은 한결같이 장정 서너 명이 팔을 둘러야 감쌀 수 있는 거목들이다.
이런 곳에서는 집 한 채를 지을래도 며칠이 걸린다.
집만 지으면 사람이 사는 곳인가? 먹을 것은? 당장 필요한 물은?
이런 곳에 머물 것 같았으면 지나쳐 온 길에도 머물 곳이 많았는데.
적어도 이곳보다는 훨씬 양호한 곳인데.
“주공, 이곳은 아무래도……”
모진아의 말이 중간에서 끊겼다.
그는 들었다. 사방에서 압박해 오는 살기를, 그리고 사박사박 걸어오는 소리를.
“모진아.”
“네.”
“혈영신마.”
“말하시오.”
“살기를 느꼈나?”
“……”
“대항해 봐. 틈이 보이면 죽여도 좋아.”
“…..!”
혈영신마와 모진아는 종리추를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진심이야!’
종리추는 무공을 한껏 펼쳐도 좋다는 듯 사방을 두리번거리고 있다.
살기를 쫓는 것은 아니다. 그는 산세를 살피고 있다.
혈영신마가 먼저 움직였다. 회공부지(回空浮地)라는 신법을 펼쳐 나무 사이를 가로질렀다. 지금처럼 나무가 울창한 수림에서 펼치는 신법으로 나무를 박차고 다음 나무로, 또 박차고 다음 나무로…… 발이 땅에 닿지 않는 신법이다.
‘우측에 셋, 좌측에는 둘. 셋을 처리하겠다 이거지.’
모진아는 선수를 놓쳤지만 행동은 뒤지지 않았다. 그 역시 혈영신마와 같은 회공부지를 펼치며 좌측에서 뻗어 나오는 살기를 향해 쏘아갔다.
“엇!”
“앗!”
모진아와 혈영신마는 거의 동시에 경악성을 토해냈다.
새까만 파리 떼 수천 마리가 달려든다. 한겨울에 무슨 파리? 얼핏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망설이고 있을 여유가 없다.
두 사람은 일제히 신형을 퉁겨냈다.
앞으로 옆이고 빠져나갈 공간이 없었다. 그들은 뒤로 물러섰다.
“엇!”
“이런!”
두 사람은 또 한 번 경악성을 토해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땅이었는데 땅은 어디로 사라지고 시커먼 동혈(洞穴)이 입을 쩍 벌리고 있다. 그것도 그들이 착지하려는 곳에.
두 사람은 허공에서 신형을 비틀며 조금 더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땅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파리 떼! 파리 떼가 어디 갔지?’
두 사람은 마치 귀신에 홀린 듯했다.
분명히 수천 마리의 파리 떼가 달려들었는데 수림은 무슨 파리가 있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 파리는커녕 파리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땅을 쳐다봤다.
동혈도 사라졌다.
시커먼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는데… 그 속에서 독아(毒牙)처럼 번뜩이는 창날을 보았는데… 그리고 보니 살기도 씻은 듯이 사라지고 없지 않은가?
“주공, 이, 이게……”
종리추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방금 전 그들을 향해 입을 벌렸던 땅을 밟으며.
“무사했군요.”
모진아는 낯익은 음성, 낯익은 얼굴을 보고 멍한 표정이 되었다.
홍리족의 족장 구맥.
그가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 하지만 종리추와 어린의 관계를 생각해서 마음속에 묻어놓고 꺼내놓지 못하는 연심(戀心)의 여인 구맥이 활짝 웃으며 마중했다.
“조, 족장! 족장은 천부에……”
“저희도 바로 떠났어요. 족장님께서 떠나고 반나절 후에.”
“그럼 여긴?”
“새 보금자리에요.”
모진아는 종리추를 향해 도끼눈을 했다.
“주공!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이런 일이 있는데도 감쪽같이 숨기고! 아니, 오는 도중에라도 언질도 못 줍니까!”
“그래서? 모진아, 목청이 많이 높아진 것 같은데?”
모진아는 새롭게 들리는 음성을 듣자 슬그머니 몸을 뒤로 뺐다.
그가 가장 분통 터지고, 귀찮고, 무서워하는 존재가 나타났다. 어린.
모진아는 반가운 사람들을 만났다.
“무사했구나!”
“그럼 어떻게 될 줄 알았습니까? 사부님이 무사하신데 우리도 무사해야죠. 사부님보다 먼저 죽으면 불충 아닙니까?”
모진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찌 들으면 맞는 말 같기도 한데… 좌우지간 썩 좋은 말은 아닌 것 같다.
“말만 늘어가지고…… 그래, 척퇴비침은?”
유구와 유회는 발을 들어 보였다.
“그게 척퇴비침이냐? 어디 한번 사용해 봐.”
“누구에게요?”
모진아는 유구의 말속에서 상당한 자부심을 읽었다. 그는 자신이 시험해 봐주기를 바라고 있다.
“건방진 놈! 자잘한 병기 좀 얻었다고.”
쉬익!
모진아는 말을 하는 중간에 번개같이 짓쳐 갔다.
그가 기습을 감행한 것이다. 유구와 유회는 어차피 살수의 길을 걷고 있다. 그들에게는 강한 무공보다 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현실이 중요하다.
패애앵……!
유구가 자오각으로 맞섰다.
발을 뻗는 시기가 적절해 상당히 멋진 각법이었지만 모진아가 보기에는 아직도 부족했다. 시기 좋고, 각도 좋고, 경력도 강하지만 세기(細技)가 부족하다.
힘을 중시할 경우 왕왕 세기를 경시하게 된다.
잘못된 생각이다. 세기가 완벽해야 보다 강한 경력이 나온다.
패앵……!
모진아도 똑같은 자오각을 뻗어냈다.
모진아의 자오각은 유구의 자오각을 차단하고, 이어서 전개한 흑살각은 번개같이 유구의 가슴을 찍어냈다. 하지만.
“엇!”
이번에도 모진아는 헛바람을 내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자오각으로 자오각을 밀어냈는데… 밀린 자오각이 환영각으로 변해 복부를 차온다.
물론 신경 쓸 것도 없다.
흑살각에 가슴을 맞으면 가슴 뼈가 모두 으스러져 버린다. 섬전처럼 빠른 환영각을 펼쳤어도 맞지 않는다. 가슴이 으스러진 유구의 몸이 넘어갈 것이고, 중심이 흔들린 환영각은 목표를 맞추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도 모진아가 물러선 것은 발끝에서 튀어 나가는 칼날 때문이다.
칼날은… 만약 들은 대로 칼날이 발사될 수 있다면… 양패구상(兩敗俱傷)이다. 유구는 흑살각에 맞아 죽겠지만 모진아도 무사하지 못한다.
칼날이 노리는 부위가 복부에서 가슴까지이니 모진아 역시 죽음을 면하기 어렵다. 발사되는 칼날은 몸을 뚫고 나갈 테니까. 날이 톱니처럼 서 있어 오장육부를 훑어내면서 관통할 테니까.
“하하! 어떻습니까?”
유구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모진아는 이제야 종리추가 병장기를 얻으라 한 이유를 알았다. 사실 그는 종리추의 명을 같이 듣기는 했지만 구연진해라면 특별한 병기가 필요하지 않을 줄 알았다.
있어서 나쁠 게 전혀 없는 병기다. 척퇴비침을 소지함으로써 유구는 절정고수 반열에 들었다고 봐도 좋다.
“좋군, 좋아. 하하하!”
모진아는 흔쾌하게 웃어젖혔다.
혈살편복은 새로 얻은 병기 방절편을 손에 익히느라 눈코 뜰 새 없었다.
모두 같은 처지였다.
유구와 유회는 구연진해를 펼치는 도중 언제라도 척퇴비침을 발동시킬 수 있어야 한다. 가급적이면 척퇴비침이 튀어나온 상태에서 무공을 사용하는 것보다 상대가 격중되기 직전에 발동시키는 것이 좋다.
음양철극은 더 힘들다.
그는 양손에 하나씩 한 쌍으로 이루어진 쌍극을 사용했다. 날이 두 개라서 쌍극이 아니라 극을 두 개 사용해서 음양쌍극이다.
그는 백조쌍극을 얻었다. 무게도 다르고 한 손으로 사용해야 한다.
광부는 눈이 뜨면서부터 저녁에 잠들 때까지 벽력사부를 갈고닦았다. 오랜 세월 광에 처박아두어 녹이 잔뜩 슨 것을 닦아내야 한다. 단지 녹을 벗겨내는 작업이 아니다. 명품은 스스로 주인을 찾는다고 한다. 온갖 성의를 다해서 벽력사부와 하나가 되어야 한다.
뭐니 뭐니 해도 좌리살검이 가장 힘들다고 봐야 했다.
그는 천왕검제의 천왕구식을 수련한다.
자신이 사용했던 무공이 아닌 전혀 다른 무공을 수련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이제 와서 새로운 무공을 익히느니 차라리 자신의 무공을 갈고닦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지만 한다. 종리추가 시킨 일이니까.
구류검수는 가장 편한 편이다.
사실 그는 할 일이 없다.
가끔 새로 얻은 검자로 화산파의 매화검법을 펼쳐 보는 것이 유일하게 할 일이다.
그는 좌리살검의 무공 수련을 돕고 있다. 그들이 보았던 천왕구식은 천왕검제의 무공이었고, 좌리살검의 천왕구식이 되도록 지켜보고 조언해준다.
후사도는 음양철극과 같은 입장이다.
그의 병기는 소도였으나 끝이 쫙 벌어진 표도를 사용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는 혼세천왕도 같다.
그가 처음으로 가진 병기는 종리추가 만들어준 단병쌍추였으나 이제 낭아추를 익힌다.
모두 한가하게 잡담이나 하고 있을 틈이 전혀 없다.
새로운 보금자리는 사흘을 둘러봐야 할 만큼 넓고 복잡했다.
혈영신마와 모진아는 자신들이 봤던 파리 떼의 실체를 보고 고소를 금치 못했다.
그들이 파리라고 봤던 것은 그물코에 불과했다.
이것은 죽은 살문사살의 병기에서 착안한 기관이라고 봐야 한다.
수겹으로 겹쳐진 그물이 한꺼번에 튀어나오면 누구라도 파리 떼가 날아드는 것처럼 보리라. 그물코에 파리 형상의 나뭇조각이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또 나뭇조각은 몸에 구멍이 나 있어 묘한 소리를 흘려낸다. 마치 파리가 날갯짓을 하는 듯한.
설혹 그물을 알아본 사람이 있어도 위험은 변하지 않는다.
살문사살은 그물에 독가시를 붙였다.
기관에서 발사된 그물에도 독가시가 붙어 있다. 살문사살의 그물보다 더욱 지독해서 그물에 닿기만 하면 독가시가 살을 파고든다.
살문사살의 그물은 전개한 후 거둬들이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단 한 번밖에 공격을 하지 못했다.
기관은 그런 단점마저도 보완했다. 전개된 그물이 허공을 때리면 위로 쳐들리며 뒤로 돌아간다. 둘둘 말리면서.
아름드리나무를 최대한 이용한 걸작이다.
수림에는 그물뿐만이 아니라 다른 기관도 설치되어 있다.
그들이 봤던 함정처럼 순식간에 열렸다 닫히는 함정이 하나둘이 아니다.
혈영신마와 모진아가 수림을 돌아다니며 가야 할 곳과 가지 말아야 할 곳을 아는 데만 사흘이 걸렸다.
모진아는 구맥이 제일 먼저 마중 나온 이유도 알았다.
적지인살, 배금향, 구맥, 비부.
그동안 살문의 보호를 받을 뿐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여기서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들이 기관을 조종한다.
종리추, 혈영신마, 모진아는 구맥이 조종하는 기관 안으로 들어섰고, 당연히 구맥이 제일 먼저 마중할 수밖에 없다.
“너무 정교해. 이건 철옹성이야. 백만 대군이 쳐들어와도 어쩌지 못하겠어.”
혈영신마가 감탄한 것처럼 수림은 요새였다.
이만한 요새를 하루 이틀 사이에 만들었을 리 없다.
요새를 만든 사람은 벽리군이다.
아무도 짐작하지 못했으리라. 벽리군이 이만한 일을 해냈으리라고는.
하오문의 일개 향주가 무림사에 기록될 만한 일을 해내리라고는.
물론 벽리군 혼자서는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기관을 알지도 못하고 설치할 만한 장소를 물색할 만큼 중원을 많이 알지도 못한다.
용금화.
지도를 제작하던 노인.
종리추는 용금화에게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은 지도 보완 작업을 멈추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종리추는 용금화를 살혼부 비처로 보냈다.
용금화를 중간에서 가로챈 사람은 벽리군이다.
종리추가 죽음을 무릅쓰고 살문에 남을 때, 자신과 정원지를 비밀 통로로 내보낼 때 그녀는 비밀 통로를 지나며 용금화를 떠올렸다.
미로를 지나 안전이 확인되자 그녀는 종리추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살혼부 비처로 찾아가 용금화를 만났다.
“문주님은 살아남기 힘들 거예요.”
“……”
“살아난다 해도 재기는 불가능하겠죠. 어쩌면 중원 무림의 공적이 될지도 몰라요.”
“……”
“문주님이 살수이기는 하지만 죽일 사람만 죽였어요. 그것만은 인정해 주세요.”
“바라는 게 뭐요?”
“문주님께서 머물 공간이 필요해요. 중원에서 말이에요.”
“나는 지도를 만들 뿐……”
“살문은 기관 천지였어요. 살문에 기관을 설치하신 분이 누군지 아시죠? 알려주세요.”
“나는 지도를 만드는 사람이오. 기관 같은 것은 모르오. 그런 사람도 모르고 관심도 없소.”
“아실 거예요. 지도를 만드려면 중원 각지를 떠돌아야죠. 중원 방방곡곡 안 가보신 데가 없을 거예요. 기인이사도 많이 아실 거고, 한 번만 도와주세요.”
“살문을 재건할 심산이오?”
‘아니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그래야 용금화가 나서줄 것 같았다.
“예, 문주님께서 살아남으시고 하시겠다면요.”
“……”
“그런 데가 없어도 문주님은 하실 거예요. 하시겠다고 작심하면 문주님을 아시잖아요.”
“……”
용금화는 오래 생각했다.
앉은 자리에서 꼬박 반나절을 침묵으로 보냈다. 그런 연후에 대답했다.
“한번 알아보리다.”
벽리군은 천부에 들어간 다음에도 용금화와 연락을 끊지 않았다.
그가 어디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묻지도 않았다. 서로 선만 닿아 있으면 언젠가는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작 중원 무림의 공적이 되어도 살아남을 수 있는 장소를 찾고, 살문에 버금가는 기관을 설치할 때가 되면 용금화 쪽에서 은자를 요구해 오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하잘것없는 정보를 얻느라 지불되는 돈이 더 아까웠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었을 때 용금화가 전서를 보내왔다.
산서성(山西省) 태원부(太原府) 팔부령(八賦嶺) 구인곡(蚯蚓谷)
몇 자 안 되는 간단한 글, 그리고 약도(略圖).
다른 것은 없었다. 기관을 설치할 테니 은자를 얼마 보내라는 말도, 어떤 곳인지 간략한 설명도.
그러나 좋았다. 가슴이 뛰었다.
천부 말고도 종리추가 은신할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었으니.
벽리군은 구인곡에 대한 비밀을 종리추가 떠나기 전날, 어린의 처소에서 알몸을 보인 날, 그날 옷을 입고 난 후 알려주었다.
세부적인 계획은 즉시 잡혔다.
어차피 천전흥을 제거해야 되는 마당이고, 그러면 천부를 벗어나야 하니.
백천의는 너무 둔했다.
살문의 정보망이 어떻게 운용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믿지 않았다. 촌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건네지는 정보가 얼마나 신빙성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으리라.
용금화가 만든 지도와 벽리군이 꾸준히 유지해 온 정보망이 없었다면 이번 계획은 실패했을 공산이 크다. 성공했다 하더라도 병기를 구하려고 무림에 나간 수하들은 무사하지 못했으리라.
“이건 수림 전체가 기관이야. 이거야원… 발을 딛기가 겁나니.”
“이렇게 사람 냄새가 안 나면서도 무섭게 만들 수 있다니 놀랍군요. 자연을 최대한 이용했어요. 손을 댄 건 모두 땅속이나 나무 속으로 숨기고.”
모진아의 경탄에 혈영신마가 맞장구쳤다.
수림에는 모진아조차 처음 보는 인물이 있다.
이름도 밝히지 않아 사람들이 부르는 대로 삼현옹(三絃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노인이다.
나이는 칠십이 넘은 듯한데 안광은 새파랗게 살아 있다.
그는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사람을 벌레 취급하는 것이 단점이다.
어쨌든 이토록 큰 공사를 감독, 보완하는 데 쓰라고 준 은자 오천 냥으로 해결했다는 게 놀랍기만 하다.
삼현옹은 기관의 총책임자로 적지인살 등 네 명을 지도하며 오늘도 수림을 뒤지고 있다. 무공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칠십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새 보금자리는 너무 외진 곳으로 깊숙이 들어왔다는 단점을 제외하고는 완벽했다. 이토록 외진 곳을 찾을 사람도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