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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14화


얼굴에 웃음기가 어리지 않아야 어울리는 여인, 차디찬 이지적 인상이 매력적인 여인, 강단 있는 사내의 기개가 풍겨나는 여인.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앞에 두 사내와 한 여인이 앉아 있건만 좀처럼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말을 건넬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녀의 이마에 새겨진 깊은 골은 얼마나 고민이 깊은가를 여실히 드러내 주었다.

한참 만에 여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쳐들었다.

말은 하지 않았다. 앞에 놓인 서신을 살짝 밀어놓는 것으로 그쳤다.

누구에게도 아니다. 단지 앞으로 놓았을 뿐이다.

그렇잖아도 무슨 일인가 궁금했던 두 사내와 한 여인.

한 사내가 먼저 서신을 펼쳐 보았다.

“앗!”

사내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졌다.

“무슨 일이야?”

다른 사내가 물었다.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이마에도 여인처럼 깊은 골이 새겨졌다.

사내는 서신을 돌렸다.

“흐흐! 이것 참, 재미있네.”

두 번째 사내가 낄낄거렸다.

“무슨 일이야?”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인이 물었다.

청초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여인이다.

“직접 읽어봐. 무척 재미있네.”

사내가 건넨 서신을 읽어본 여인은 아랫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종리추(鍾離秋) 사(死).

살문(殺門) 멸(滅). 기한(期限) 반 년.

서신 밑에는 점 여섯 개가 계인(契印)처럼 찍혀 있다.

“어떡하실 거예요?”

여인이 물었다.

빙화(氷花), 얼음으로 조각해 놓은 것 같은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소고는 대답할 수 없었다.

아직도 그녀의 마음은 결단을 미루고 있었다.

“어떡하긴, 점 여섯 개면 필(必)인데. 우리가 살려면 죽여야지.”

야이간이 낄낄거렸다.

소여은은 눈을 곱게 흘겼다.

살기가 발동했다는 소리다. 그녀는 본격적으로 살행에 나서면서부터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다. 살기가 치밀지 않을 때는 웃음기가 없었고 살기가 치밀면 눈웃음을 쳤다.

“이봐, 내가 아냐. 죽일 놈은 종리추라고.”

“야이간.”

적사가 불렀다.

“왜?”

“입 다물어.”

야이간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아직 적사와 부딪칠 생각이 없었다.

소고가 말했다.

“종리추가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몰라. 우리도 모르고. 정보를 총동원하겠지만 찾는다는 보장은 없어. 그동안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모두 해답을 찾아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소고는 이미 결론을 알고 있다.

적사, 야이간, 소여은도 해답을 안다.

구파일방이 묵월광을 묵인하는 대신 묵월광은 구파일방이 청하는 일에 나서줘야 한다.

점 여섯 개면 필히 행해야 한다. 행하지 않을 경우 구파일방과 맺은 약조는 깨진다.

구파일방이 묵월광을 친다는 협박이나 다름없다.

정보력을 총동원했지만 찾지 못했다는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계인 여섯 개는 하늘의 명령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해야 하며 하지 못할 경우 구파일방과 상대해야 한다.

‘종리추… 우리는 악연인가 봐. 계속 못할 짓만 하네.’

소고는… 진심으로 미안했다. 종리추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은데 못된 일만 시키게 된다. 그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직접 목숨을 거둬야 한다.

묵월광의 정보력을 동원하면 쉽게 찾을 수 있을 게다.

종리추도 먹고 살아야 하는 인간이고, 인간인 이상 사는 데 필요한 생필품을 사야 하니까.

열 명에서 스무 명가량이 소모할 만큼 생필품을 구해가는 자.

적사와 야이간이 물러간 후 소여은은 소고와 마주 앉았다.

“언니, 정말 종리추를 죽일 거예요?”

“……”

“방법이 없을까요?”

소고와 소여은은 서로 마주 봤다.

천성이 독해 살혼부에 선택된 사람들이다. 자라면서는 혹독한 환경에서 강한 살수가 되기 위한 수련을 했다. 비록 여자의 몸이지만 인간의 정 같은 것은 가볍게 내동댕이칠 수 있을 만큼 독하다.

소고가 물었다.

“종리추와 몇 번 만났지?”

“몇 번 안 되죠.”

“나도 그래.”

두 여인은 서로의 심중을 알았다.

종리추를 죽이고 싶지 않은 마음, 하지만……

“이렇게 해. 종리추의 종적이 파악될 때까지 방법을 생각해 봐. 방법이 없으면 죽여야지. 나도 생각해 볼게.”

소여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법밖에는 없었다. 묵월광이 무림에 붙어 있는 길은.

소여은은 생각했다.

‘사무령은 꿈이야. 말 그대로 전설이었어.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구파일방 장문인 열 명이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개방, 무당, 공동파 장문인의 표정이 어두웠다.

다른 사람들도 있다.

삼절기인과 백천의.

구파일방 장문인들 외에는 참석할 수 없는 회합에 참가했다는 것 자체가 특별하다.

삼절기인은 직접 대면한 벽도삼걸에 대해서 소상히 이야기했다. 백천의는 자신이 알고 있는 종리추에 대해 말했다.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장문인들의 안색은 더욱 어두워졌다.

멸문한 줄 알았던 살문이 건재하다는 사실은 큰 충격이다. 더군다나 살문주는 십망을 선포받은 혈영신마를 구해갔다.

그것은 문제가 안 된다. 정작 큰 문제는 종리추다. 삼절기인과 백천의의 말을 들어보니 종리추야말로 위험 인물이다. 위험해도 아주 위험하다.

신출귀몰한 행적.

개방을 누르는 정보력.

뭇 군웅들 앞에서, 삼절기인 앞에서 대담하게 벽도삼걸 행세를 할 수 있는 배포.

대마두의 자질을 고루 갖춘 인물이다.

그 중심에 구파일방의 태두인 소림사도 있다.

소림사 덕분에 벽상촌을 알았고 급습을 가할 수 있었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사전에 얼마든지 차단시킬 수 있는 일을 복잡하게 만든 장본인도 소림사다.

소림사가 천부라는 곳을 진작 알려주기만 했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미타불……! 빈승이 나이가 들어 판단력이 흐려졌나 보오. 이번 일의 책임을 지고 앞으로 소림에서는… 장문인들을 모시지 않겠소.”

엄청난 발언이 새어 나왔다.

소림사는 물론이고 중원무림이 발칵 뒤집힐 발언이다.

소림사에서 장문인들을 모시지 않겠다는 말은 앞으로 소림사에서는 장문인들의 회합을 주관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무림의 태두 소림사라는 명예를 버리겠다는 말과도 같다.

혜공 선사의 말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당면 문제를 좌시하지만은 않겠소. 살문의 종적이 드러나는 대로 백팔나한(百八羅漢)과 칠십이단승(七十二丹僧)을 보내겠소.”

혜공 선사는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고 염주를 굴렸다.

백팔나한, 칠십이단승… 이들 백팔십 명은 소림사의 골수(骨髓)다.

소림 무학의 정수이며 소림이 오늘날의 명예를 누리게 만들어주는 기반이다.

소림사에서 백팔십 명의 무승을 일시에 출사(出寺)시킨 적은 없었다.

“……”

장문인들도 혜공 선사처럼 침묵을 지켰다.

장문인들의 회합은 이 년에 한 번씩 열기로 잠정 합의되었다.

장소는 소림을 제외한 팔파일방이 돌아가며 제공하고 장소를 제공하는 곳이 향후 이 년 동안 무림의 구심점이 된다.

소림을 주축으로 한 중원무림이 구파일방을 구심점으로 한 무림으로 바뀌고 말았다.

조금 과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살문 문주의 거처를 알면서도 멸절시키지 않았던 행위는 어떤 대가로도 치를 수 없었다.

소림이 무림의 태두라는 자리를 내놓았고 백팔십 명의 무승을 출사 시킨다고 공표했는데도 불구하고 신망은 땅에 떨어졌다.

십망……

무림은 처음으로 십망이 실패했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그 죄과는 모두 소림사가 뒤집어썼다. 십망을 이끈 사람은 무당파의 현학 도장이었지만 무당파나 개방에는 아무런 질책도 돌아가지 않았다.

장문인들이 빠져나간 산사는 고즈넉했다.

“빈승은 후회하지 않소.”

“……”

“종리추는 빈승에게 약조했소. 죽일 만한 이유가 없는 자는 죽이지 않겠다고.”

“……”

“그는 그렇게 했소. 우리 소림이 나서서 일거수일투족을 제재하기 전에 스스로 알아서. 살문 살수에게 죽은 자… 아미타불! 인두겁을 쓴 자들이오.”

“……”

조용했다.

이제는 모두 알고 있다.

행와의 장 가주, 동성의 광무자… 모두 묵월광 손에 죽었다.

그런 것을 살문 소행으로 오인했다. 만약 살문이 아니라 묵월광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행동은 전혀 달라졌으리라.

멸문당할 문파는 살문이 아니라 묵월광이다.

종리추는 왜 나서서 부인하지 않았을까?

살문은 형식만 살수 문파이지 명문 정파나 다름없었다. 청부 살인을 한다는 점에서는 결코 명문 정파라고 할 수 없지만 하는 행동에는 엄격한 규율이 있었다.

살문과 살천문이 거의 동시에 멸망했을 때 묵월광이 나타났다.

묵월광의 소고는 구파일방이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한다는 것을 잘 꿰뚫어 봤다.

일이 잘못되기 시작한 시점을 찾으라면 묵월광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때부터다. 아니, 알고는 있었다. 그들이 움직이는 것을 알지 못했을 뿐.

“이제… 종리추가 십망을 선포받은 혈영신마를 구해갔으니 죄를 지은 것이오. 아미타불! 무림에서 기별이 오면 백팔나한과 단승을 보내시오. 아미타불!”

혜공 선사가 말을 끝내자 자리를 함께했던 승려들이 몸을 일으켰다.

소림의 진정한 실력자인 혜 자 돌림의 승려들.

그들은 대사형이자 방장인 혜공 선사의 결단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계율원 원주 혜선 대사, 성격이 강퍅하고 승려이면서도 용서를 몰라 계율원 원주로는 더없이 적합한 사람이다.

그는 혈영신마를 잡으러 먼 길을 떠났다가 빈 허공만 움켜쥐었다.

현학 도장을 쫓아 벽상촌에도 가봤지만 역시 빈 허공뿐이었다. 아니, 사람이 있기는 했다. 백천의의 동생 백천흥이 싸늘한 시신이 되어.

“무슨 일을 그 따위로 하는 게냐!”

혜선 대사의 질책은 매서웠다.

“……”

백천의는 할 말이 없었다.

“떨어진 위신을 회복해야 한다. 알았느냐!”

“예, 명심하겠습니다.”

“명심 정도로는 안 되지.”

“……?”

혜선 대사는 아직 먹물이 마르지 않은 서신을 내밀었다.

서신에는 십여 명에 이르는 사람들의 명호가 적혀 있었다.

“제일 먼저 할 일은 그들을 포섭하는 것이다. 이제 소림도 변해야 한다. 과거의 방법으로는 더 이상 사마의 행동을 저지할 수 없어. 십망이라고 선포한들 무엇 하리. 모두 빠져나가고 마는 것을. 이제는 직접 손에 피를 묻혀야 한다.”

“알겠습니다.”

백천의는 혜선 대사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백천의가 제일 먼저 만난 사람은 삼절기인이다.

삼절기인은 호의적이지 않았다.

“자네가 웬일인가?”

“종리추를 죽이고자 합니다.”

“흥!”

“혈영신마도 죽일 겁니다.”

“그러게.”

“앞으로 중원무림에 사마외도가 발을 붙일 곳은 없을 겁니다.”

“……”

“도와주십시오.”

“허허! 이 늙은이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

“장문인의 뜻이 아닙니다. 제 뜻입니다. 악행을 저지르는 자, 누구를 막론하고 제일 먼저 제 검이 찾아갈 겁니다.”

“진심인가?”

“진심입니다.”

삼절기인의 눈빛이 반짝였다.

백천의는 소림에 등을 돌리는 말을 하고 있다.

소림의 제자로서 소림의 명령에 앞서 검을 뽑겠다는 것은 파문당한다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행동이다.

삼절기인이 물었다.

“어떻게 할 참인가?”

개방에 불행한 사람이 있다.

불의(不義)를 원수처럼 미워해 불의를 보면 다짜고짜 타구봉(打狗棒)부터 치켜들었던 사람, 간사한 자를 보면 면전에서 욕지거리를 해댄 사람.

개방 의기의 표상이던 흑붕광괴.

그는 살혼부 십망을 실패한 다음부터 두문불출(杜門不出), 거처에만 머물고 있다.

그는 또 삼절기인과는 뜻이 맞아 막역한 사이로 지내고 있다.

“삼절… 자네 지금 나보고 방주의 명령을 어기라고 말하는 겐가? 개방을 배신하라고?”

“배신하라는 말은 아니지.”

“그 말이 그 말이지.”

“명예를 바라고 하는 일이 아닐세. 사리사욕은 더더군다나 없네. 무림을 피로 물들이는 악도가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뿐일세.”

“….…”

“우리는 철저하게 비밀리에 움직일 걸세. 죽일 사람만 죽이면 되니 드러날 것도 없을 게고. 개방을 배신하는 행위 같은 것은 없네. 방주에게 보고하지 않고 행동하는 일은 있을지라도.”

“보고하지 않고 움직인다……”

“그거지.”

삼절기인은 흑봉광괴에 이어 공동파의 비영파파를 만났다.

비영파파는 안색이 초췌해져 있었다.

결국은 멸문시키지도 못할 살문을 공격하는 데에 공동파의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육천군 중 사천군이 죽었다. 남은 사람은 단 두 명. 하지만 그들은 살문 싸움이 있고 난 후부터 넋이 나간 듯하다. 아마도 살문과의 싸움이 큰 충격이었나 보다.

비영파파는 흔쾌히 승낙했다.

“종리추를 죽이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개방을 조심해야 될 거외다. 개방의 분운추월은 종리추에게 호의적이었소.”

삼절기인이 구파일방을 돌아다니는 동안 백천의는 사룡 중 삼룡을 만났다.

소림 속가제자 중 가장 뛰어나다는 걸물들.

소림 삼십육방을 통과했으며 무림으로부터도 무공을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정운(鄭澐), 고진명(高振明), 상태수(尙太秀).

무림은 그들을 백천의와 더불어 소림사룡이라 부른다.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소림사룡은 말없이 술잔을 주고받았다.

백천의가 당한 일은 그들 모두가 당한 일이다.

“혜선 대사님의 밀지(密旨)를 받았어. 동참하지.”

“후후! 나도 하겠어.”

“나도 밀지를 받았어. 언제든 달려가지.”

그들은 기꺼이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이기로 결의했다.

똑똑똑.

“들어오시오.”

덜컹!

백천의는 침상에 편히 누워 있다가 야심한 시각에 찾아온 여인을 보자 벌떡 일어났다.

“소, 소저!”

“나도 하겠어요.”

“뭐, 뭐를……?”

“다 들었어요. 종리추를 죽이겠다는 말씀.”

“소저, 이 일은……”

“여자가 필요할 때도 있을 거예요. 저는 이제부터 공화가 아니에요. 복수에 미친 여자일 뿐이에요.”

백천의는 여인의 결심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너무 울어서 퉁퉁 부은 얼굴, 그래도 공화 소저의 미모는 아름답기만 했다.

‘천흥… 우형이 너만 죽인 게 아니구나. 공화 소저도 함께 죽였어. 공화 소저의 마음도.’

천외천(天外天).

구파일방에서도 악을 극도로 미워하면서도 무공이 높은 고수들이 모였다. 속가 무인들 중에서는 삼절기인을 비롯해 무림삼정 중 일인인 철권(鐵拳) 구양춘(歐陽春)이 가세했고, 벽도삼걸을 잃은 하후 가주가 폐관을 깨고 도를 들었다.

그들의 수는 무려 마흔 명에 육박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비밀 결사 집단을 ‘천외천’이라고 명명했으며 악을 멸절시키기 위해서는 방파 간의 알력을 초월하기로 다짐했다.

초대 천주로는 개방의 흑봉광괴가 추대되었다.

개방의 막대한 정보력을 이용하고자 하는 심산이었다.

사마외도와는 상극인 천외천은 이렇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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