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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16화


일 년 열두 달 사람 자취라고는 찾아볼 수 없던 팔부령이 많은 무인들로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곳은 팔부령 안이 아니라 바깥 마을 쪽이기에 산속의 고요함은 잃지 않은 상태였다.

‘틀렸어. 살릴 방도가 없어.’

소고에게는 오직 한 가지 방도밖에 남지 않았다.

종리추 사(死).

그는 어쩌자고 무림인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삼절기인을 죽였단 말인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소림사에서 백팔나한과 칠십이 단승이 출사했다고 한다.

무당파도 현복 도인을 필두로 백여 명에 이르는 절정 고수들이 대거 도관을 박차고 나왔으며 화산, 공동, 청성… 구파일방에서 파견한 고수들의 수만 해도 천여 명이 넘어선다. 거기에 분노한 군웅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으니.

“너무 무모했네요. 이렇게 정면으로 맞설 필요는 없는데.”

소여은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들은 팔부령 산속으로 들어왔다.

그들 역시 군웅들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살수 문파이기에 군웅들과 어울려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의 눈을 피해 산속에 자리를 잡는 게 최선이었다.

머물 곳 하나도 마음대로 정할 수 없는 입장.

그것이 구파일방의 눈치를 보는 살수 문파의 현실이다.

“소고, 한마디만 해도 되겠소?”

적사가 안개 속으로 몸을 숨긴 팔부령을 보며 말했다.

“말해 봐.”

“난… 이 싸움에서 빠지고 싶소.”

“……”

“……”

소고와 적사의 눈이 마주쳤다.

이건 분명한 항명(抗命)이다. 살수 문파에서 항명은 곧 죽음과 이어진다.

“이유가 뭐야?”

적사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그는 사무령이기 때문이오.”

“뭣!”

소고는 깜짝 놀랐다.

적사가 한 말은 늘 그녀의 가슴속에 앙금처럼 눌어붙어 있던 잔재였다.

그녀는 사무령이 되고자 노력했다.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손에 얼음이 들어도 검을 잡았다.

그녀는 묵월광을 단단하게 고정시킨 후 영역을 넓혀갈 생각이었다.

사천성, 산서성, 절강성…… 결국은 중원 살수계를 일통하고 살수계의 여왕으로 군림하고자 했다.

묵월광이 그렇게 커진다면 누가 감히 뭐라고 하겠는가.

소고는 한 성(省)에 하나의 살수 문파만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들이 영역을 넓히지 못하고 자신의 영역 안에만 안주하는 까닭도 알게 되었다.

소림 장문인으로부터 묵월광의 활동을 묵인받았을 때 그녀는 자신했다.

‘이제 시작이야.’

그러나 그것은 시작이 아니라 끝이었다.

묵월광이 더 뻗어 나갈 곳은 없었다. 구파일방은 사사건건 간섭했고 이유 없는 살생을 할까 봐 눈을 번뜩였다.

그들이 살수 문파를 묵인하는 데는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겠다는 의도보다 더 큰 뜻이 담겨 있다. 민중의 원한이나 분노는 어떻게든 해결해 주어야 한다.

소림사를 찾는 사람들은 무공을 익힌 무인뿐만이 아니라 부처님을 모시는 불자가 더 많다. 무당파를 찾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무인보다는 도교를 믿는 도인(道人)들이 훨씬 더 많다.

그들은 원한과 분노, 한이 생겼을 때 그들이 믿고 따르는 소림이나 무당, 화산, 청성 같은 문파를 찾게 된다.

구파일방은 어떻게든 그들의 원한을 풀어줘야 한다.

말도 되지 않는 억지 같으면 훈계를 할 수도 있지만 그들의 분노는 대부분 합당한 이유가 있다.

그렇다고 같은 정도인을 향해, 무공을 모르는 범인들을 향해 검을 뽑아야 하는가.

살수 문파는 악(惡)이지만 존재해야 하는 필요악(必要惡)이다.

소고가 사무령이 될 길은 막혔다.

그녀는 자신의 한계를 절감했고, 절감하는 순간부터 종리추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살수 문파를 창건했으면서도 구파일방의 눈치를 살피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다.

구파일방과 약간의 끈은 맺었지만 살문의 행동을 제어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라면 사무령이 될 수 있을지도……’

소고는 비로소 알았다.

사무령은 무공만 가지고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언니, 나도 이 싸움에서 빠지고 싶어.”

소여은이 힘든 표정으로 말했다.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살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나는 사무령이 아냐. 적사, 소여은…… 당당하게 살인하고 구파일방과 맞선 무지한 자를 사무령으로 인정하고 있어. 여기서 죽으면 무지한 자이지만 살아난다면 사무령이 될 거야.’

소고는 전신의 힘이 쭉 빠졌다.

“야이간, 네 생각은… 야이간? 야이간!”

소고는 야이간을 찾았다.

그는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뒤를 쫓아왔는데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가 데리고 있던 청살괴 살수 서른 명은 만사가 귀찮다는 듯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데 야이간만이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길을 잃었나?’

얼핏 떠오른 생각이지만 곧 도리질했다.

그는 멍청하지 않다. 영특하다 못해 간사할 정도다. 그래서 그를 짓눌렀다. 잔머리를 굴리지 못하도록 자존심이고 뭐고 없이 철저히 짓뭉갰다.

이제는 묵월광에 동화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세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고 똑같은 생각을 했다.

‘위험해!’

그 시간 야이간은 무림 군웅들이 운집한 마을로 들어섰다.

‘종리추는 미련한 놈이 아니지. 정면으로 무림과 맞설 때는 다 생각이 있을 것, 괜히 선두에 서서 칼 맞을 필요 없지. 후후! 소고, 잊은 게 있어. 살수라면 말이야, 항상 등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조심해야 하는 거야.’

그는 군웅들이 모여 있는 마을에 이르자 곧바로 구파일방의 장로들이 모여 있다는 집으로 향했다.

구파일방에서 파견한 문도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화산파에서 보내온 매화검수 서른네 명과 전부터 와서 팔부령 곳곳을 뒤지던 개방 문도 삼백여 명이 전부였다.

화산파의 옥진(玉塵) 도인(道人)과 개방의 무불신개(無不神丐)가 지금까지 팔부령에 달려온 사람 중 제일 배분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군웅들을 추스릴 뿐 성급하게 달려들지 않았다.

야이간은 그들이 머문다는 집의 대문을 불쑥 밀었지만 예상했던 대로 화산파의 매화검수와 개방의 호법들에게 길이 막혔다.

“무슨 일이오?”

“장로님을 뵈러 왔소.”

야이간은 당당했다. 그에게는 그만한 자격이 있었다.

너무도 당당한 모습에 매화검수와 개방 호법들은 잠시 야이간을 훑어보더니 다시 물었다.

“어느 장로님을 뵈러 오셨소?”

“옥진 도장님과 무불신개 장로님이 계신 것으로 알고 왔소. 두 분을 모두 뵈어야겠소.”

“소협의 존성대명이 어찌 되시는지……?”

“곤륜에서 온 현무길(玄武吉)이오.”

“고, 곤륜?”

곤륜이라는 말에 매화검수와 개방 호법들은 당혹스러웠다.

곤륜파의 무공은 중원에 널리 알려져 있다. 곤륜파의 무공 중 최고의 절학이라면 단연 운룡대구식과 분심검법(分心劍法)이다.

무인이 아니라 해도 중원 사람 치고 곤륜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산지조종(山之祖宗)은 곤륜산(崑崙山)이요, 수지조종(水之祖宗)은 황하수(黃河水)라.

곤륜산의 본래 이름은 수미산(須彌山)이며 중원 모든 산의 어머니라고 할 수도 있는, 중원에서 가장 정기가 그득한 영산(靈山)이다.

곤륜산은 흔히 쓰는 말속에도 내재되어 있다.

옥석혼교(玉石混交), 옥석동가(玉石同架)……

여기에 쓰이는 옥(玉)은 모두 곤륜산에서 나는 옥이다.

그러나 이들 중 곤륜파의 무학을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은 없었다.

곤륜파는 청해(靑海) 너머에 있다. 중원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중원에서 곤륜산으로 가려면 사막을 가로질러야 한다.

곤륜은 누구나 알고 있으면서도 너무 모르고 있는 곳이다.

“지금 곤륜이라고 하셨소?”

“현무길, 곤륜의 현무길이오.”

야이간은 최대한 정중한 모습으로 예를 취하며 말했다.

“자, 잠깐만 기다리시오. 장로님께 여쭤보고 오겠소.”

옥진 도인, 무불신개와 마주 앉은 야이간은 사심 없는 맑은 얼굴로 말했다.

“하남 무림에 묵월광이라는 살수 문파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들었네.”

“그중 한 명은 제가 처단했습니다. 이름이 야이간이라고… 상당히 사악해 보였습니다.”

“그런가? 잘했네.”

장로 두 사람은 느닷없이 찾아온 곤륜파의 현무길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묵월광이 여기 와 있다는 것은 알고 계십니까?”

무불신개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들은 묵월광이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왜 왔는지도. 인상을 찡그린 것은 현무길의 태도가 마치 추궁하는 듯이 비쳤기 때문이다.

현무길은 곧 사과했다.

“아, 죄송합니다. 제 언사가 너무 지나쳤습니다. 묵월광의 소고라는 자에게 원한이 깊다 보니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무불신개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고라는 자와 원한이 있으신가?”

“중원에 간여하지 않는 곤륜에서 저를 보낸 이유는 중원 무림에 악의 싹이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의 싹?”

“소고가 익힌 무공은 혈암검귀의 혈뢰삼벽입니다.”

“뭣!”

“그런 일이!”

두 장로는 크게 놀랐다.

십망을 받아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혈암검귀의 무공이 묵월광 소고에게 이어지고 있다니!

“그 밑에 사령주 적사라는 자는 몽골 내만족의 무공을 익혔습니다. 살기가 매우 진한 도법이죠.”

“음……!”

이제는 침음이 새어 나왔다.

“화령주 소여은이라는 여인도 있습니다. 돌이켜 보시면… 중원 무림에서 지난 일 년 동안 독살당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헤아릴 수 있을 겁니다.”

“소협이 어찌 그렇게 잘 아는가?”

‘드디어 심문이 시작되었군. 늙은 여우들……’

“소고는 저희 곤륜의 무가지보(無價之寶)인 분심검급(分心劍級)을 훔쳐 달아났습니다. 저는 그래서 파견되었고 소고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죄송하고 창피한 노릇이지만 저의 무공으로는 어찌 할 수 없어서……”

야이간은 정말 창피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허허! 그럴 걸세. 곤륜 무학이 뛰어나지만 묵월광도 만만치 않지. 소협 혼자서는 어쩔 수 없었을 거네. 그런데… 그런 점을 알면서 소협 혼자만 보냈는가?”

‘두 번째 심문.’

“제가 연락을 드리면 사문에서 사형제들을 보낼 겁니다. 저도 그럴 생각으로 지금까지는 숨어 지냈지만……”

“말을 계속 해보시게.”

“소고는 종리추와 손을 잡으려 합니다.”

“그럴 리가 없을 거네. 장담하지.”

“제가 직접 보고 들은 말입니다. 소고는 종리추를 사무령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 사무령!”

“사무령…… 음……!”

‘여우들 흔들리고 있군. 하기는 사무령이라는 말처럼 심신을 뒤흔드는 말도 없을 테지.’

“소협의 사부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옥진 도인이 물었다.

“광(光) 자(字), 운(雲) 자(字)를 쓰십니다.”

“광운 진인! 자네가 정말 광운 진인의 고제자인가?”

‘시험이 끝났군.’

“말씀 받들기 어렵습니다. 무학을 전수받기는 했지만 소생이 자질이 너무 우둔해서……”

화산파는 도가 문파다. 곤륜파도 도가를 신봉한다.

도력이 높은 광운 진인과 옥진 도인은 서로 만난 적은 없지만 이름자는 들어봤다.

야이간은 쐐기를 박을 필요성을 느끼고 허리에 찬 검을 풀어 앞으로 내밀었다.

사부 광운 진인은 무학의 귀재였다.

그는 곤륜파의 절학인 분심검법에 역시 곤륜파의 절학인 용호풍운조(龍虎風雲爪)를 가미시켜 그만의 독특한 검법인 분심분광검법(分心分光劍法)을 창안해 냈다.

야이간이 익힌 검법은 분심분광검법이다.

그가 내민 검에는 분심분광(分心分光) 광운(光雲)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보지는 않았지만 말로는 들은 바 있는 광운 진인의 보검이다.

야이간이 광운 진인의 보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그의 제자라는 말이지 않은가.

야이간이 한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정파 무인이 될 수도, 살수가 될 수도 있는 몸이었다.

지금까지는 살수였으나 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곤륜파에서도 그의 소식을 모를 것이다. 원래 세속 일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도(道)만을 추구하는 도인들이니.

야이간의 검을 본 옥진 도인과 무불신개는 의심을 버렸다.

“그러나저러나 묵월광이 종리추와 손을 잡는다면 희생이 더 커질 것 같은데… 도장의 생각은 어떠시오?”

“음… 살수 문파의 전설이 사무령이라고 들었소이다. 종리추가 당당히 맞서는 것을 보고 사무령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죠. 둘이 손을 잡게 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됐군.’

“어차피 살문의 은거지는 당분간 파악하기 힘들 듯하니……”

결정은 내려졌다.

야이간은 묵월광의 힘을 너무 잘 안다.

화령주의 화령들은 고려할 필요가 없다. 그녀들은 암습에는 달인들이지만 정통 무공과는 거리가 먼 여인들이다. 그보다는 자신이 데리고 있던 청살괴와 적사의 십칠사령이 무섭다.

야이간의 말을 세세하게 들은 두 장로는 치를 떨었다.

그들이 막연히 생각하고 있던 묵월광과 실제의 묵월광은 너무 달랐다. 겨우 살수 나부랭이로 생각했는데 말을 듣고 보니 지나치게 큰 세력이지 않은가.

두 장로는 묵월광이 종리추와 손을 잡을 경우를 생각하자 다급해졌다.

“소협이 길을 안내해 주시게.”

“희생이 많을 겁니다.”

“감수해야지. 종리추와 손을 잡으면 더 많은 사람이 죽네.”

묵월광도 무섭지만 살문도 무섭다.

살문주 종리추는 몇 명 되지 않는 사람들로 살천문을 몰살시켰다.

더군다나 공동파에서 자랑하던 육천군에게도 재기할 수 없는 타격을 입혔다.

완력은 두렵지 않은 법이다. 정작 두려운 것은 머리를 쓰는 자다.

군웅들이 부산하게 병장기를 손질했다. 이미 머리카락도 잘릴 만큼 날카롭게 날이 선 병기들이지만 결전을 앞두니 흥분이 앞섰다.

소고는 부지런히 산속으로 파고들었다.

애초의 계획은 산을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그만 길을 잘못 들고 말았다.

하기는 산을 넘어간다는 계획도 터무니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야이간이 잔꾀를 부린다면 팔부령을 벗어나기 전에 곤경에 처할 것이 자명했다.

“여기가 어디지?”

“모르겠어요. 좌우지간 기분은 좋지 않은 곳이네요.”

소여은의 대답처럼 묵월광은 사지(死地)로 접어들었다.

지금이 전쟁 중이고 소고가 병사를 이끄는 군사라면 꼭 죽기 십상인 곳으로 기어 들어온 셈이다.

사방이 깎아지른 절벽이니 위에서 바위를 굴리면 압사당하게 된다.

앞뒤로 길을 막고 화살을 쏘아대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

물론 전쟁일 때의 경우다.

“야이간… 그놈은 내 손으로 죽이겠어.”

적사가 이를 부드득 갈았다.

그는 간특한 야이간을 계속 데리고 있는 소고가 못마땅했다. 그가 일만 냥으로 저지른 행동만 봐도 그의 심성이 어떤지 짐작했어야 하지 않는가.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한다.

묵월광에서 야이간처럼 무공이 높은 자도 드물다.

그는 곤륜파의 정통 무학을 전수받았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적사나 소여은보다 더 소용이 될 수도 있다.

사실 묵월광에서 정통 무공을 익힌 자는 야이간 한 사람뿐이지 않은가.

그가 데리고 있는 청살괴도 그런대로 쓸 만하다.

돈에 무공을 판 자들이지만 살인 솜씨 하나만은 알아줄 만하다. 사천성을 휘어잡고 있는 살수 문파의 문도들이고 그중에서도 정예만 추려왔다고 하니 되물을 필요도 없다.

그들은 야이간이 떠났다는 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따라오고 있다.

소고처럼 그들에게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워낙 피에 절어 산 사람들이라 겉모습부터 군웅들로부터 의심을 받게 되어 있다. 그들의 퇴폐적인 모습을 접한 군웅들이 무슨 행동을 할지는 불문가지다.

“우선 여기를 빠져나가……”

소고는 입을 다물었다.

지금이 전쟁 중인가? 아니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들이 절벽 위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이렇게 빨리 따라오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팔부령은 십여 보만 걸어도 자신이 걸어온 길을 잊어버릴 만큼 수림이 우거진 곳이다. 산속으로 숨어든다면 하늘을 나는 재주가 있어도 찾기 힘들다.

그런데 아니다. 이들은 너무 간단하게 따라왔다.

‘뭔가 있어!’

적사는 뒤로 물러섰다.

“소고, 내가 뒤를 맡을 테니 전력으로 빠져나가시오!”

그들에게 남은 길은 돌아가느냐, 앞으로 짓쳐들어가느냐 두 가닥 길밖에 없었다.

쉬익!

소고가 먼저 신형을 띄웠다.

쉬익! 쉬이익……!

소고의 곁에 있던 화령주와 화령이 그 다음으로 달려나갔고 십칠사령이 뒤를 받쳤다.

이상한 일은 그때 일어났다.

당연히 따라서 신형을 날려야 할 청살괴 살수들이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저놈들이군! 저놈들이 길 안내를 했어!’

마음 같아서는 도륙을 내버리고 싶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쉬익! 쉬이익……!

절벽 위에서 화살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아악!”

키가 작고, 적당히 살이 쪘고, 얼굴이 귀엽기 이를 데 없는 여인이 비명을 내질렀다.

화살이 그녀의 등 뒤로 파고들어 앞가슴을 비집고 나왔다.

“아아악!”

눈매가 서늘해서 맑은 인상을 풍기던 여인도 비명을 토해냈다.

그녀는 눈에 화살을 맞았고, 화살 촉은 머리 뒤로 삐져나왔다.

화령들이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쓰러졌다.

그녀들은 원래 무인이 아니다. 사내에게 버림받았고, 한 번쯤 목숨을 끊었던 한 많은 여인들에 불과하다. 소여은이 그들에게 가르친 것도 사내를 침상으로 끌어들여 죽이는 비술뿐이다. 화령이 펼치는 신법이래야 이제 갓 무공을 접한 어린아이 수준이니……

창창창……!

십칠사령은 전력을 다해 화살을 막았다.

그들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적사가 수련시킨 지옥 수련은 그들로 하여금 인간이 지닌 두려움을 아예 없애 버렸다.

죽음.

다른 사람들에게는 두려운 말이지만 십칠사령에게는 전혀 낯설지 않다.

하지만 그들도 한 명, 두 명 쓰러졌다.

누구와 싸워서 쓰러진 것도 아니고 하늘에서 쏟아지는 화살 비를 막다가 쓰러졌다.

“사령을… 십칠사령을 앞세워! 그들이라도 살려!”

소여은이 발악을 하듯 고함을 질렀지만 이미 어수선해진 화령들은 길을 비키지 않았다.

“아악!”

“아아악!”

비명이 연이어 터졌다.

야이간은 옥진 도장과 함께 길을 뚫었다.

청살괴 살수들은 착실하게도 그가 지시한 대로 곳곳에 흔적을 남겨놓았다.

한 사람당 은자 이천 냥.

막대한 돈이다.

그만한 돈을 주겠다는데 동조하지 않을 자가 없다. 그리고 야이간의 말은 믿어도 좋았다. 그들도 봤다. 소고에게 얼마나 돈이 많은지. 매달 중원 각지에서 얼마나 많은 돈이 쏟아져 들어오는지.

소고는 살수 문파를 세우지 않아도 호의호식하며 먹고 살 수 있는 여자다.

그런 여자가 왜 살수 문파를 창건하여 고생을 사서 하는지 청살괴 살수들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야이간이 돈을 준다는 데는 마다할 리가 없었다.

청살괴는 모여서 의논했다.

“야이간이 소고를 죽일 생각인 것 같은데… 그럼 묵월광은 우리 차지가 되나?”

“야이간이 소고를 죽이면 우린 야이간을 죽이는 거야. 묵월광을 통째로 삼키는 거지. 어때?”

“좋아.”

의논은 간단히 통일했다.

야이간은 청살괴 살수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자신의 말을 듣게 되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미련한 놈들! 내가 너희 같은 놈들에게 당할 것 같아?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말이 있단다. 토끼를 잡고 나면 사냥개는 필요 없는 법이지.’

앞에서 두런두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야이간이 우뚝 서자 옥진 도장이 야이간보다 먼저 걸음을 멈췄다.

옥진 도장의 손이 위로 쳐들렸다.

쉬익! 쉬이익……!

서른일곱 명의 매화검수가 청살괴 살수를 향해 일제히 솟구쳤다.

소고가 협곡(峽谷)을 빠져나왔을 때 살아남은 사람은 절반에 불과했다.

그들 중 화령은 아홉 명밖에 남지 않았다.

스물여덟 명이 처참하게 죽어간 것이다.

적사가 독사처럼 매섭게 키운 십칠사령도 다섯 명이나 유명을 달리했다.

소고는 움직일 생각마저도 잃어버렸다.

적사, 소여은, 살아남은 화령 아홉 명, 이제는 열두 명으로 줄어든 십이사령.

모두 움직일 생각을 포기했다.

협곡만 빠져나오면 괜찮을 것 같았는데……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가히 장관이다.

울울창창한 수림, 그리고 수림마다 보이는 각기 다른 사람들.

군웅들은 협곡 밖에서 그들이 나올 때를 기다렸다.

“내가 말해 보지. 도대체 왜 우리를 공격하는지.”

앞으로 나서려는 소고의 소매를 소여은이 잡았다.

그녀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군웅들의 눈가에 떠오른 빛은 증오다. 경멸이다. 그들은 묵월광을 사로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죽여서 멸절시키려는 거다.

도대체 야이간은 이들에게 무슨 짓을 했단 말인가. 어떤 감언이설(甘言利說)을 늘어놓았기에 이들의 눈가에 살기가 피어나고 있단 말인가.

“이제는 끝이네요.”

소여은이 손가락만 한 은장도를 꺼내 들었다.

그녀가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 먼저 만진 병기다.

소여은의 모습을 본 적사가 픽 웃으며 권추를 꺼내 손에 끼었다.

“못된 짓을 했지?”

“……?”

“종리추에게 말이야.”

“……”

“만약… 이건 만약인데… 내가 묵월광을 포기하고 종리추와 손을 잡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후후! 너무 늦은 말이지만… 아마도 지금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겠지.”

적사는 소고를 장문인으로 대하지 않았다.

지금은 옛날… 살혼부 살수들이 네 명의 아이를 데리고 암동으로 들어갔던 때로 돌아갔다.

“종리추는 사무령이 될 수 있을까?”

소고는 손바닥만 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언니, 이 꼴 보기 싫은 작자들을 생각해서라도 사무령이 되어주기를 빌어야지.”

“그래, 그래야지.”

정말 어처구니없다. 하필이면 야이간이 이때 움직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야이간은 간사한 것만큼이나 결단력이 빠르다.

그는 과연 효웅이 될 자격이 있다.

아주 잠깐 보인 틈… 일파를 뒤집기에는 틈이라고 할 수도 없는 미세한 균열이었는데 야이간은 망치로 두들겨 벽을 무너뜨리고 있다.

‘할아버지……’

소고는 마지막으로 청면살수를 떠올렸다.

청면살수와는 피가 섞였다고 할 수 없다. 그에게서 무공 비급을 받았고 살혼부의 숨은 힘을 건네받았지만 사부라고 할 것도 없다. 그런 채무 관계는 자신이 사무령이 되는 순간 모두 탕감된다.

그러나 소고는 청면살수에게서 할아버지의 진한 정을 느꼈다. 아니, 아버지의 정을 느꼈다.

청면살수는 할머니의 연인이다.

그가 모든 것을 잃고 처참한 모습이 된 것도 전부 할머니 탓이지 않은가.

할아버지…… 입으로는 그렇게 부를지라도 그는 아버지다.

‘미안하구요. 사무령이 되어보려고 했는데. 풋! 사무령… 정말 전설인가 봐요. 하지만 며칠만 참아보세요. 종리추가 이 사람들과 일전을 벌일 테니 사무령이 될지 안 될지는 조만간 판가름나요.’

손바닥만 한 하늘은 정말 푸르렀다.

녹음이 짙은 수풀에서는 맑은 풀잎 냄새가 풍겼다.

군웅들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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