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18화
하루가 가고 이틀 지나도록 종리추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소고와 화령 살수들에게는 벽리군이, 사령 살수들에게는 그들을 안내해 왔던 혈살편복이 수발을 들어주어 불편한 것은 없었지만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몹시 궁금했다.
“구파일방이 모두 팔부령으로 모여들고 있다는데……”
“전 몰라요. 전 빨래나 해주고 밥이나 해주는 사람인걸요.”
벽리군이 배시시 웃으며 말했지만 믿을 수 없었다. 살문에서 벽리군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고 있기에 더더욱 믿을 수 없었다. 정보라면 단연 그녀이지 않은가. 그녀의 손을 벗어난 정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 않은가.
“여기 모두 몇 명이나 있소?”
적사가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물었지만, “….” 혈살편복은 벙어리인 양 침묵을 지켰다. 사령 살수들이 초라한 움막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이랄 것도 없는 곳을 돌아다니며 얻어온 정보는 기가 막히게도 형편없었다. 이곳에는 고작해야 대여섯 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여자 몇 명과 살혼부 살수이자 종리추의 아버지인 적지인살, 그리고 혈살편복. 그날 이후 살문 살수들은 흔적 없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는지, 또 산불을 지르러 간 것인지…. 그들이 사라진 이유는 팔부령에 모여든 군웅들과도 무관하지 않을 테지만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말해 주는 사람이 없으니 알 방도가 없었다.
소여은은 특이한 행동을 했다. 그녀와 화령 살수들은 살문 살수들을 접하고도 다른 묵월광 살수들처럼 발걸음이 굳어진다거나 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화령 살수들이 그러는 것은 당연하다. 그녀들은 아직 진정한 고수가 누구인지 판별해 낼 능력이 부족하다. 그러나 소여은은 종리추가 어떤 경지에 들어섰는지, 살문 살수들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만한데 고개만 까딱 숙여 보였을 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종리추 일행이 종적을 감춘 다음에도 소여은은 화령 살수들을 챙기기에 급급했다.
“이제 훌훌 털어버려. 죽은 사람은 빨리 잊어. 나쁜 기억은 빨리 잊을수록 좋아. 묵월광은 와해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너희들이 가고 싶다면 보내줄게.”
“언니….”
“너희들이 지닌 재주라면 돈 많은 사람 첩실쯤은 무난히 꿰찰 수 있을 거야. 그게 편히 사는 길인지도 모르지.”
“싫어. 난 언니와 같이 있을래.”
“나도 언니와 같이 있을 거야.”
“나와 같이 있으면 죽어.”
“알아, 언니. 언니는 조령주 야이간을 죽이려는 거잖아. 우리도 그래. 조령주만은 죽이고 싶어. 금색화가 내 눈앞에서 죽었단 말야. 내가 부축을 했는데 화살이 등을 뚫고 들어와 가슴까지 삐져 나왔어. 잊을 수 없어. 금색화가 동그랗게 뜬 눈…. 죽은 사람이 어찌 금색화뿐인가. 서른일곱 명 중 무려 서른 명이나 죽었다. 하나같이 친자매 간처럼 정이 깊이 든 여인들이었어. 소여은에게 그녀들은 살수가 아니었어. 외롭게, 살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아온 지난날에 대한 보상이었지. 그녀들은 세상천지에 일가붙이 하나 없는 소여은에게 친자매 역할을 해주었어.”
‘야이간…. 죽이고 말 거야.’
소여은에게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아무 목적 없이, 목적은 있었지만 선대의 약속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살행을 저질렀던 묵월광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확실한 목표가 생겼다.
“좋아. 같이 있을 사람은 있어. 하지만 이제부터 난 너희들에게 정을 주지 않을 거야. 지금부터 내 곁에 붙어 있는 사람은 도구에 불과해. 사람을 죽이는 살인 도구. 도구가 망가지거나 귀찮아지면 가차 없이 버릴 거야.”
화령 살수들의 눈가에 독기가 피어올랐다. 뭇 사내들 앞에서 옷까지 벗어 던진 그녀들이다. 한 명이라도 더 죽일 수 있다면 배까지 갈라 내장을 꺼내줄 수도 있다.
“그래, 그럼 우린 다시 태어나는 거야. 준비해.”
“여인이 지닌 가장 무서운 무기는 육신이다. 언제 어느 상황에서 누가 보든 감탄을 터뜨릴 수 있을 만큼 미모를 가꿔라. 무림인, 특히 고수들이라면 웬만한 미인계 따위에는 넘어가지 않는다. 외모보다는 내면에서 솟구치는 향기를 뿜어내라. 몸에는 팽팽한 활력이 샘물처럼 솟구쳐야 한다. 그런 다음 화장을 하고 몸맵시를 정갈히 해라.”
소여은이 살혼부 살수이자 사부인 미안공자에게 배운 것은 하나둘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이 배운 모든 것을 화령 살수들에게 전수했다.
‘준비해’
그 한마디에 화령 살수들은 활기를 찾았다. 계곡을 찾아 얼굴을 씻고, 몸을 씻고, 빨래를 하고, 화장을 하고…. 화령 살수들은 사내라면 눈길을 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여자가 되기 위해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제 육십구화 – 고요
종리추를 비롯한 살문 살수들이 모습을 다시 나타낸 것은 그날 밤 자정이 넘어서였다. 짐작했던 대로다. 살문 살수들은 미리 약조라도 한 듯이 벽리군의 움막으로 모여들었다.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났는가 싶으면 곧장 벽리군의 거처로 발길을 옮겼으니. 벽리군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잠시 후 벽리군의 움막에서 한바탕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왁자지껄하니 떠들어대는 소리가 팔부령 곳곳으로 파고드는 듯했다. 소고는 웃음을 잃었다. 생각이 멈춰 버렸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는 지독한 고독이 몸과 마음을 얼려 버렸다.
철이 들 무렵 그녀의 곁에는 검이 놓여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답게 말을 건네주는 사람도 없었다. 가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을 때는 죽을병에 걸린 줄 알았다. 초경을 했을 때는 주화입마의 징조가 아닌가 싶어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외롭지 않았다. 살수가 무엇인지, 사무령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단 하나,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여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알았다.
“넌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여자가 되어야 한다. 네 위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내도, 여인도. 넌 세상 모든 사람을 굽어봐야 한다. 그게 사무령의 위치다.”
“난 그렇게 만들어줄 수 있다. 사무령을 만들어줄 준비가 완비되었다. 무공과 돈과 사람이 있다. 또 넌 사무령이 될 만한 자질이 있다. 준비해라. 쉬지 마라. 눈을 뜨면서 잠이 들 때까지, 아니, 잠을 자는 중간에도 무공을 생각해라.”
외로울 틈도 없었다. 하지만 한 번의 좌절을 겪고 나자 생각이 바뀌었다. 외롭다.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가. 종리추, 적사, 소여은, 야이간…. 모두 고아다. 종리추에게는 살문 살수들이 있다. 적사에게는 사령 살수들이, 소여은에게는 화령 살수들이 있다. 야이간도 모르긴 몰라도 지금 이 시간 외롭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게다. 야이간을 곁에 두는 순간부터 배반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를 곁에 둔 것은 오직 한 사람, 소천나찰 때문이다. 소천나찰의 일생은 청면살수에게서 시작해 야이간에서 끝난다고 봐야 한다. 그것이 소천나찰이라는 살수의 전 생애다.
“스스로 등을 돌리기 전까지는 곁에 두어라. 의제들이 약속을 지킨 이상 나도 도리를 해야겠다. 한두 번의 배신은 있을 것이나 그것으로 목숨을 잃지 않는 한 감수해 다오.”
확실히 이번 배신은 조금 빨랐다. 야이간의 이번 행동만은 조금도 기미를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야이간은 목적한 바를 이루지 못하리라. 이십팔숙이 하남에 남겨졌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묵월광의 재산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천 노인 또한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는다. 그들을 믿는다. 믿을 수 없었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를 팔부령 싸움터에 묵월광 전 세력을 동원해 달려오지도 못했을 게다. 이곳만 빠져나가면 재기할 기반이 있다. 사부와의 언약도 지켰으니 마음 놓고 칠 사람은 치고 거느릴 사람은 거느리면서 제이의 묵월광을 만들어낼 수 있다. 사무령의 꿈은 아직도 존재한다. 그런데…. 그런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날아갈 뻔했다. 군웅들에게 둘러싸였을 때, 하남에 남겨진 이십팔숙과 천 노인이 지니고 있는 거액의 재산도 모두 한낱 뜬구름에 불과했다. 그때 자신에게 남겨진 것은 사무령을 향해 달려가는 꿈이 아니라, 어떻게 죽음을 맞이해야 하나 하는 고독한 결정만이 남겨졌다. 그 순간을 겪지 않았다면 지금의 외로움도 느끼지 못했겠지만. 사지에서 빠져나온 순간, 종리추를 대한 순간 쉴 생각을 하지 않고 팔부령을 빠져나갈 길부터 물어봤겠지.
벽리군의 움막에서 한바탕 웃어 젖히던 살문 살수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하하! 형님, 스무 냥 내기할까?”
“돈 많네. 언제 스무 냥씩이나 꿍쳐 놨냐?”
“있기는. 딸 자신이 있으니까 내기하자는 거지.”
“그런 소리는 나도 하겠다. 그러지 말고 현실적으로 내기하는 건 어때?”
“현실적이요?”
“가령.. 그래 앞으로 한 달 동안 밥 시중들기는 어때? 아냐, 그건 너무 부족하다. 한 달 동안 하인처럼 부려먹기. 어때?”
“좋수다. 형님이 먼저 말한 거유.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유?”
“흐흐흐 하인 한 명 생겼네.”
“하하! 그거 좋은데? 이봐, 우리도 저 내기할까?”
“넌 어느 쪽에 걸려고?”
살문 살수들에게서는 도무지 근심 걱정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흔쾌하게 웃고 떠들며 공지를 뺑 둘러가며 횃불을 밝혔다. 여인들도 나왔다. 어린 벽리군, 배금향, 구맥…. 정원지는 어린아이를 품에 안고 나왔다. 그녀들의 얼굴에도 근심은 어려 있지 않았다. 구파일방의 무서운 고수들이 팔부령을 에워싸고 있는데….
이들이라고 두렵지 않을 리 없다. 싸움이 언제 닥칠지, 죽음이 언제 다가올지 두려울 게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믿음이 있다. 자신의 무공을 믿는 마음도 크겠지만 서로를 믿는 마음이 더 크다. 그래서 웃을 수 있고, 그것이 소고는 부러웠다. 소고를 외로움에 잠기게 만든 원인이기도 하고. 종리추를 비롯해 살문 살수들이 둥글게 켜진 횃불을 따라 빙 둘러섰다. 그리고 원안으로 두 사람이 들어서서 마주 보고 섰다.
‘비무닷!’
무덤덤하게 바라보고 있던 적사의 눈이 부릅떠졌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 사령 살수들도 공지로 나왔다. 소여은도, 화령 살수들도. 살문 살수들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동안 말은 많이 들어왔다. 실제로 살문에서 실행한 청부치고 실패한 청부는 단 한 건도 없다. 가장 가까이는 무림명숙인 삼절기인이 청부를 당했고, 죽었다. 그 사건에서 살문은 자신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떳떳하게 삼절기인을 죽인 사람들이 자신들임을 밝혔다. 삼절기인을 죽인 살수가 누군가? 종리추가 구해갔다는 혈영신마는 아니다. 삼절기인의 시신에는 혈영신마의 독문표식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럼 혈영신마 외에 또 누가 삼절기인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종리추인가? 무림인들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공지 한가운데에서 마주 선 두 사람은 한눈에도 만만치 않은 고수들이다. 젊은 사람과 중년인이다. 단단한 체구에 인상만 봐도 강자임을 알 수 있는 젊은이와 키가 작고 뼈마디가 가늘며 졸린 듯한 눈빛을 지녀 무인보다는 인심 좋은 옆집 아저씨를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 맞섰다. 두 사람은 모두 병기를 지니고 있지 않다. 적수공권으로 마주 선 두 사람. 젊은 사람이 양손을 반듯하게 펴 어깨 높이로 들어 올렸다. 보법을 사용하여 몸을 움직이는 모습이 무척 가볍다.
“음….!”
적사가 신음을 토해냈다.
“저 사람이…. 말로만 듣던 혈영신마군요.”
소여은이 적사의 신음을 맞받았다. 어깨 높이로 들어 올린 양손이 바다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미풍에 가랑잎이 날리듯 가볍게. 뚜렷한 특징이라면 양손이 핏물에 담갔다 꺼내놓은 듯 시뻘겋다는 것.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종류의 장공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지만 진기를 일으키는 순간 양손의 색깔이 변하는 장공은 혈영신공뿐이다.
단신으로 중원무림 전체와 맞서려고 했던 자. 그는 강자임에 틀림없다.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무모하기로는 아마 천하제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구파일방으로부터 십망을 선포받았다는 자체만으로도 그는 인정받은 고수다. 그럼 그와 맞선 자는?
쒜에엑! 페엑! 파파팍…..! 허공으로 솟구친 자그마한 몸뚱이에서 두 발이 튀어나왔다. 원래부터 신체에 붙어 있던 발이니 튀어나왔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지만 지켜보던 사람들이 보기에는 잔뜩 웅크린 거북이가 발을 뻗어 내듯이 불쑥 튀어나왔다. 몸은 보이지 않았다. 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무섭도록 빠르고 현란한 발의 움직임에 모든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사실 발의 움직임을 쫓기에도 두 눈의 움직임이 느리다고 생각할 판이었다. 중년인의 양 발은 수천 개의 화살이 되어 내리꽂혔다.
“아!”
여기저기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묵월광 살수들뿐만이 아니라 살문 살수들도 감탄을 터뜨렸다. 중년인은 땅을 밟지 않았다. 어쩌다 땅에 내려서게 되더라도 곧바로 되튕겨 올라갔으며 숨 돌릴 틈을 주지 않고 맹공을 퍼부었다. 파팟! 파파팟….! 주변 공기마저 진탕하는 듯했다.
‘엄청나게 빠르다! 가히 각법으로는 천하제일이라 할 만하다. 저 사람이 누구기에….’
묵월광 살수들은 귀동냥으로조차 들어보지 못했던 낯선 고수에게서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낯설기는 살문 살수들 대부분이 낯설다. 개중에는 무명이나 이름자깨나 들어본 사람도 있지만 거의 대부분 중원 무림인들에게는 생소한 이름들이다. 무림에 나서지 않아서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이름이 날 정도로 무공이 뛰어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기껏해야 낭인이나 표사. 그들이 몇 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이토록 무섭게 성장했다고는 믿을 수 없다. 하지만 어쩌랴. 지금 혈영신마와 싸우고 있는 사람은 묵월광 살수들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게 하는 것을.
싸움은 중년인이 유리한 듯 보였다. 두 발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은 중년인의 각법은 혈영신마로 하여금 제대로 움직이지조차 못하게 만들었다. 혈영신마는 피하기에 급급했다. 탈명신도를 비롯해 정파 무인 십여 명을 단숨에 죽여 버린 혈영신공은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중년인이 미친 듯 몰아치는 돌풍이라면 혈영신마는 바람에 휘날리는 가랑잎이었다. 혈영신마는 빠른 사람이다. 그가 만일 중년인이 아닌 다른 사람과 싸움을 벌였다면 맹공을 퍼붓고 있는 사람은 혈영신마이리라. 그가 밟고 있는 보법이나 신법을 지켜보자면 초식을 떠나 동물적인 감각까지 느껴진다. 그런 사람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각법에 여지없이 밀린다. 쉬익! 쒸이익….! 쒜엑! 중년인의 각법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빠르고 정교하고 변화무쌍해졌다. 인간의 다리가 저렇게 꺾일 수도 있구나. 저런 자세에서도 저런 각법이 나올 수가 있구나. 지켜보던 무인들은 또 다른 무의 세계를 경험하는 기분이었다. 남권북퇴라는 말이 있다.
중원 이북의 권법은 수공이 삼 할인 반면에 각법이 칠 할을 이룬다. 중원 이남은 정반대의 구성으로 되어 있다. 언뜻 보면 중원 이남의 무림인은 각법을 사용하지 않고 수공만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며 중원 이북의 무림인은 각법만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두 사람은 수공과 각법의 절정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혈영신마가 쓰러지지 않는다. 맞받기는커녕 각법을 피하기에도 힘들어 보이는데도, 신법이 헝클어지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는데도. 묵월광 사령 살수들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마에 깊은 주름살을 지을 뿐 곤혹스러워하지는 않았다. 원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년인은 결정적인 순간에 공격을 물렸다. 조금만 더, 한 치만 더 뻗으면 혈영신마의 육신을 강타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 어김없이 뒤로 물러섰다.
‘상대가 안 되는군. 세상에! 혈영신마가 이렇게 몰리다니!’
첫 번째 든 생각이다.
‘이상한데? 최선을 다하는 것 같은데 왜 공격을 마무리 짓지 않는 거지?’
두 번째 든 생각이다. 적어도 혈영신마와 중년인의 비무를 제대로 볼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두 사람이 서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중년인은 일부러 공격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멈출 수밖에 없는 사정에 처한 것이다. 그게 무엇일까? 혈영신마는 허우적거릴 뿐인데.
‘공격을 물리는 게 아니다. 부딪치지 않으려는 거야. 옷자락이 스치는 것조차 경계하고 있어.’
세 번째 생각은 몇 사람만이 했다. 그들은 난무하는 권각 속에 숨어 있는 뜻을 읽었다. 혈영신마는 육장을 부딪치려고 한다. 장법을 사용하고 있으니 육장을 부딪치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에 혈영신마의 의도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중년인은 육장을 피하려고 한다. 상대가 장법을 사용하니 육장을 피하려고 하는 것도 당연하다. 상대의 장법을 피하고 쇠몽둥이 같은 각으로 공격하는 것이니 이상하게 볼 점이 없다. 이기려니 치려는 것이고 맞지 않으려니 피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싸움은 다르다. 일반적인 공방이 아니라 필사적인 공방이다. 공격을 가하는 사람은 중년인인데, 그는 살이 닿는 것을 꺼려 한다. 수비에 급급한 사람은 혈영신마인데, 그는 여유가 있다.
‘뭔가, 이건….? 단 한 번 닿기만 하면 이긴다는 뜻이잖은가! 혈영신공…. 도대체 어떤 무공이기에….’
지켜보는 사람들 중 단 몇 사람만이 정확하게 싸움을 읽었다.
이상한 싸움은 한 시진이 넘게 지속되었다. 중년인의 각법은 한 시진이 넘도록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금방 쓰러질 것같이 위태로워 보이던 혈영신마도 쉽게 쓰러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 쉬익- 중년인이 연삼퇴를 가한 후 훌쩍 몸을 날려 이 장 뒤로 물러섰다. 한줄기 가는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갔다. 혈영신마는 호흡을 골랐다. 중년인도 호흡을 가다듬었다.
‘최후의 일격. 둘 중에 한 명은 죽는다.’
팽팽한 긴장이 팔부령 이름 모를 골짜기에 흘렀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치고 사람을 죽여보지 않은 사람이 없고 자신보다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사람과 겨뤄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모두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알고 있다. 자신이 싸우는 입장이라면…. 최후의 절초를 준비하리라. 그것은 아마도 상대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게고 자신도 성하지 못할 공산이 크다. 동귀어진까지 생각해야 한다. 그때,
“그만!”
“….”
“그만해! 죽고 살 일이 아니라면 여기서 멈추는 게 좋겠어. 한 번 더 부딪치면 양패동사야.”
혈영신마와 중년인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두 눈에서는 질 수 없다는 투지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러다 혈영신마가 느닷없이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하! 하하하핫! 우하하하하….!”
혈영신마의 앙천대소는 길게 이어졌다. 가슴속에 풀어야 할 한이라도 쌓여 있는 듯 길고 처절한 웃음소리였다.
“아직 멀었군, 아직 멀었어. 한 번의 패배. 한 번의 동수. 천하무적 혈영신공을 겨우 이 정도로 전락시키다니. 하하하! 우하하하하!”
젊은이는 역시 혈영신마였다. 혈영신마가 웃음을 그치며 말했다.
“동수…. 인정합니다.”
중년인이 혈영신마의 말을 받았다.
“너무 괴로워 말게. 자네가 혈영신공이 최고의 무공이라고 생각하듯이 나도 내 무공이 최고라고 생각하니까. 충격은 자네만 받은 게 아닐세. 좋아! 동수, 인정하지.”
두 사람은 서로 무승부를 인정했다.
“내년 오늘. 살아 있다면 다시 한 번 겨뤄보고 싶소.”
“좋지. 후후! 그건 나도 바라는 바야. 날 꺾은 다음에는 주공께 도전할 생각인가?”
중년인의 물음에 혈영신마는 종리추를 힐끔 쳐다봤다.
‘겨뤄보고 싶어 하는군.’
혈영신마의 마음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묵월광 살수들은…. 살문 살수들도 혈영신마가 왜 중년인을 꺾은 다음에야 종리추에게 도전하려는 것인지 이유를 알지 못했다. 혈영신마가 종리추에게 패배한 사실은 더더욱 알지 못했고.
벽리군이 술과 안주를 내왔다. 술은 값싼 화주였고, 안주는 꽁꽁 얼어붙은 소 허벅지 살이었다.
“크으! 좋다! 역시 이 맛이란 말야. 겨울밤 찬 이슬을 맞아 꽁꽁 얼어붙은 몸을 확 달궈놓는 술기운. 달 밝고 공기 좋고 입 심심하지 않고. 사람 사는 맛 중에 이 맛이 제일 좋은 것 같아.”
“하하! 그건 네가 아직 임자를 못 만나서 그래.”
“임자? 끄흐흐! 형님, 그런 소리 마쇼. 내게 임자란 없소. 강한 놈을 만나면 죽는 거고 약한 놈을 만나면 죽이는 거지, 결국 영원히 임자는 있을 수 없소.”
“이런, 돌머리 하고는…. 누가 그런 임자 말하는 줄 알아? 넌 이 형님을 보고도 아직 모르겠냐!”
유구가 유회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유회는 짐짓 피하는 척했지만 고스란히 맞았다. 유회에게 유구는 의형 이상의 의미가 있다. 친혈육보다도 더욱 깊은 정을 주는 사이가 된 지는 이미 오래다. 중원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모진아라는 사부를 모신 사형제 정도의 의리밖에 없었지만 살문에 몸을 담고 살수행을 하면서 서로 한 몸이나 진배없게 되었다.
암연족 전사들은 홍리족 사내를 사내 취급도 하지 않는다. 계집 치마폭에 휘감겨 잠자리까지 여자 처분을 기다리는 꼴이라니. 특히 암연족 전사들 중에서도 최고의 전사였던 유구와 유회에게 홍리족 사내는 버러지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예외가 생겼다. 역석. 죽은 역석이 예외다. 그는 홍리족 사내지만 유구, 유회 둘 다 형제로 받아들이는 데 망설이지 않았다. 모두 종리추와 함께 살문을 이끄는 동안 싹튼 우정 때문이다. 죽음을 몸에 붙이고 사는 사람들에게 정이란 게 붙으면 같은 피를 물려받는 것보다 더 끈끈해진다.
“아! 형님이 말한 임자가 형수님이었소?”
“느물거리지 마. 먹은 것 넘어와.”
정원지는 아기를 껴안고 유구 옆에 다소곳이 앉아 정겹게 주고받는 농담을 들었다. 여기저기서 농이 새어 나왔다. 혈영신마와 모진아라고 불리는 중년인도 함께 웃고 떠든다. 이들은 싸운 게 아니다. 일문의 문도가 무공 수련을 하듯이 무공을 겨뤄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으로 인해 서열이 바뀐다거나 상대를 찍어 누르는 적자생존 같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 기회만 있으면 문파를 차지하고자 발버둥 치는 여타 살수 문파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한편 묵월광 살수들은 어울리지 못했다. 소고 역시 침묵을 지켰다. 한때는 수하였으나 지금은 일문의 문주가 된 종리추에게 간섭을 할 권리가 그녀에게는 없었다. 따지고 보면 종리추를 수하로 부린 것도 선대의 약속 때문이지 삼이도의 약속 때문은 아니다. 그는 삼이도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싸울 생각은 없었으니까. 더군다나 그에게 악명, 오명만 뒤집어씌웠으니…. 적사와 사령 살수들도 침묵을 지켰다.
어떤 이는 대도를 품에 안고 드러누워 있었고, 어떤 이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멀거니 밤하늘만 쳐다보았다. 그들은 호쾌한 민족이다. 말을 타고 광야를 질주하며 술잔을 기울일 때는 독주를 항아리째 들이붓고는 했다. 거치적거리는 것은 쓸어버렸다. 신경에 거슬리는 것은 정복하고 반항하는 사람은 죽였다. 중원은 사정이 다르다. 그들은 손톱에 낀 가시 같은 존재들이고, 가시를 빼내고자 하는 힘과 싸워 뽑히지 않아야 한다. 뽑힌다는 것은 죽는 것을 의미하니까. 그들에게 희망은 없다. 언제 죽느냐 그것이 문제일 뿐.
‘이런 분위기는 좋지 않아. 고독한 늑대는 고독하게 지내야 해. 내일은 이 지겨운 팔부령을 벗어나야겠군.’
적사는 사령 살수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여은은 달랐다.
“술판이 벌어진 것 같은데…. 가서 목이나 축여.”
“헤….! 그러잖아도 아까부터 술 향기가 달짝지근하게 풍겨왔는데. 언니, 언니도 같이 가서 마셔요.”
“그래.”
소여은은 몸을 일으켜 술판이 벌어진 공지로 갔다.
“술 좀 나눠 마셔도 될까?”
소여은이 종리추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종리추는 오랜 지우를 만난 사람처럼 정겹게 젊은 웃음을 지었다. 화령 살수들은 하나같이 요녀들이다. 그녀들은 전문적으로 사내를 미혹시키는 수련을 쌓았다. 생사절명의 순간에도 색으로 개방 걸개들을 암살한 여인들이다. 그녀들은 낯선 사내 곁에 서슴없이 앉았다.
“어멋! 이 우람한 근육 좀 봐.”
혼세천왕 옆에 앉은 화령 살수가 혼세천왕의 팔 근육을 살짝 찔러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그녀뿐이 아니다. 살문 살수들 곁에 앉은 화령 살수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교태를 부렸다. 몸에 배어 떨쳐 내려야 떨칠 수 없는, 천성이라고 말해도 좋을 수련이요, 습관이다.
“하하! 우람하면 뭐 하나? 죽으면 썩어버릴 육신인데. 그러나저러나 천음곡에서는 대단했어. 비녀로 찔러 죽이는 솜씨라니! 하하! 나라도 꼼짝없이 당했을 거야.”
죽음의 절곡이 천음곡이었던가? 혼세천왕은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흔쾌하게 옆 자리를 내주었다. 화령 살수들은 어디를 가나 주의를 끌 만한 미모를 지녔으니 당연하다 하겠지만 살문 살수들은 고적한 곳에서 사내들끼리 북적거리며 살았으니 여자가 그리웠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사람들…. 정말 무서운 사람들이다!’
소여은은 찬물을 뒤집어쓴 듯 전신에 냉기가 스쳐 갔다. 살문 살수들 눈에는 탐욕이 이글거리지 않는다. 궁핍한 곳에서 고독하게 살아온 사내들이라면, 아니, 혈기왕성한 사내라면 누구나 표출시켜야 할 욕정이 보이지 않는다.
‘이 사람들은 송곳이야. 부드러운 웃음으로 날카로움을 감추고 있지만 이 자리에서까지 긴장을 풀지 않는 마음가짐은 천부적인 살수들이야!’
그리고 보니 흔쾌하게 웃고 떠들며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누구 하나 취한 사람이 없다.
살문 살수들은 화령 살수를 여자로 보지 않는다. 그들은 화령 살수들을 동등한 살수로 대하고 있다. 여자가 아닌 살수로. 무공이 형편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자신들과 같은 살수로 대하기 쉽지 않다. 살수는 죽이는 사람이다. 무공이 높은 사람이 아니라 확실하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뛰어난 살수다. 살문 살수들은 살수로서 화령 살수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살수의 본질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그만큼 강하다는 증거다. 무인이 아닌 살수로.
주흥이 무르익었다.
“그것참 재미있네. 또 이야기해 봐요.”
“진 대인이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말이 좋아 대인이지 순 호색꾼이죠.”
“하하하! 호색꾼이라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겠는데.”
“진 대인을 죽이는 건 어렵지 않은데 문제는 그가 고용한 무인이에요. 절명신도라고 거창한 무명을 사용하는 자인데, 정말 무공 하나는 뛰어난 것 같더군요.”
“호오! 그래서?”
“더군다나 그자는 고지식하기까지 해서 진 대인을 목숨처럼 호법 서는 거예요.”
이야기는 주로 화령 살수들이 했다. 수줍은 듯 눈을 살짝 내리깔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화사한 웃음을 활짝 배어 물고 이야기하는 여인도 있고. 살문 살수들은 그저 추켜올리는 정도가 아니라 진심으로 귀를 기울여 들었다.
“절명신도를 어떻게 요리할까 고민하다가 그자부터 유혹하기로 작심했죠. 성주를 유혹하는 게 아니라 성벽을 허무는 거죠.”
소여은은 틈을 노렸다.
‘누구를 죽일까? 가장 쉽게 죽일 수 있는 자는….’
죽일 만한 자를 찾았다. 술판의 분위기는 소여은에게도 익숙하다. 어산적 해적들이 사냥을 나갔다 돌아온 후에는 반드시 이런 술판을 열었다. 술은 독한 것으로, 안주는 되는대로, 장소는 아무 데나 엉덩이를 걸칠 수 있는 곳이면. 예의를 지킬 필요도 없다.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껴안고 싶은 계집이 있으면 껴안으면 된다.
‘지독한 자들….’
소여은은 절로 감탄이 새어 나왔다. 묵월광 살수들은 그녀가 보기에도 지독하다. 소고가 암암리에 거느리고 있는 이십팔숙은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그들은 어둠 속에 숨어 있다. 그들도 사람인 이상 밝음을 찾아 나올 법도 하건만 어둠의 화신인 듯 어둠 속에 숨어 있다. 지독하게 수련받은 자들이다. 적사가 거느린 사령 살수도 매섭다. 그들은 폭풍이다. 죽은 듯이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있지만 도를 뽑아 들면 전광석화처럼 몰아친다. 아마도 살수치고 진신무공으로 정정당당히 살인을 하는 사람은 사령 살수들뿐이리라. 묵월광은 그들이 있어서 강하다.
반면 살문 살수들은 또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이들은 자유로우면서도 규율이 있고 흐트러짐 속에 정결함을 갖추고 있다. 소여은은 암습의 기회를 찾지 못했다. 한 명쯤은 취기에, 여인에, 분위기에 젖어 긴장을 늦추는 자가 있을 법도 하건만 단 한 명도 틈을 보이지 않는다. 몸과 손은 항상 병기를 쥘 준비가 되어 있다. 이들을 공격하면 무공 대 무공으로 겨뤄 이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암습은 어렵다.
‘이들은 무공으로도 일류 고수들이야. 종리추….. 대단하구나, 이런 사람들을 거느릴 수 있다니.’
종리추는 항상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살천문주와 타협한 것도 그렇고 살문 단신으로 무림의 협공을 피해 살아남은 사실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소여은은 술잔을 집어 들었다. 두 손으로 들어야 될 만큼 큰 사발에 진한 독주가 가득 담겨 있었다.
다음날은 조용하게 흘러갔다. 무림인들이 발 디딜 틈도 없게 몰려든 팔부령이지만 이곳만은 상관 없다는 듯 평화롭기만 했다. 살문 살수들은 편하게 앉거나 누워 양광을 쬐었다. 소고는 종리추를 찾았다.
“구해준 것 사례도 표하지 못했네.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산골 움막과는 어울리지 않게 화선지를 펼쳐 놓고 그림을 그리던 종리추가 고개를 쳐들었다. 근심 걱정이 없는 밝고 싱그러운 얼굴이다. 그의 곁에는 벽리군이 앉아 먹을 갈고 있었다. 화선지에서는 쭉쭉 뻗어 올라간 대나무 그림이 살아 있는 듯 맑은 죽향을 풍겨냈다.
“내일 떠나요.”
“….”
“오늘 저녁쯤에 손님이 올 겁니다. 만나보고 떠나도록 해요. 장자까지 길 안내를 해드리죠.”
소고는 봉목을 부릅떴다. 종리추는 오늘 저녁 손님이 온다고 했다. 만나보고 떠나라는 말과 함께. 누가 오는 것일까? 또 장자까지 길 안내를 해주겠다고 했다. 장자라면 팔부령을 넘어야 한다. 산을 넘는 것보다 팔부령을 빼곡히 에워싼 무림인들의 이목을 피해 등 뒤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한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지, 지금 장자까지….?”
“사람이 많아서 배를 준비해 놨어요. 물길로 하남까지 무사히 들어갈 겁니다.”
어디로 갈 것인지까지 짐작하고 있다. 하기는 살혼부가 남긴 힘으로 일어선 소고이니 그녀가 갈 곳이 어디겠는가. 살혼부의 힘이 남아 있는 곳, 돈을 움켜쥐고 있는 천 노인과 그녀의 팔다리가 되어줄 이십팔숙이 있는 곳이다.
“오늘 오는 사람, 내가 꼭 만나봐야 되나?”
“반가울 겁니다.”
“….?”
소고는 더욱 오리무중에 빠졌다. 반갑다니? 그러나 종리추는 빙긋 웃기만 할 뿐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오후도 한참 지나 한밤중이 되었을 때 숲 저쪽에서 두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찬바람이 스며들지 않도록 문을 꼭 닫고 있었지만 워낙 조용한 산속인지라 사람의 음성은 명확하게 들렸다.
“깊이도 숨었군.”
“깊기는 해도 진퇴가 용이한 곳입니다.”
“이런 곳을 벽리군이라는 그 여자가 만들었단 말인가? 대단하군.”
“벽 총관 혼자 만든 것은 아닙니다. 용 노인과 삼현옹이 없었다면 꿈도 꾸지 못했을 겁니다.”
“허허! 자네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있군. 삼현옹 같은 고집불통을 끌어들이라니 말야.”
“아십니까?”
“알지는 못하지만 이름은 들어봤지. 기관진학의 대가라면 삼현옹을 빼놓을 수 없지. 사문은 불투명하지만 최고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런 사람을 끌어들이라니. 허허!”
‘이 음성은!’
소고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한달음에 달려나갔다.
공지장의 등에 업힌 청면살수. 살혼부의 전대 부주가 야심한 밤에 찾아온 손님이다. 살혼부주만 찾아온 게 아니다. 소천나찰, 비원살수, 미안공자.. 살혼부를 움직였던 죽음의 손들이 모두 모였다. 두 다리가 잘린 비원살수는 청면살수처럼 미안공자의 등에 업혀 있었고 소천나찰은 산행이 힘들었는지 이마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의족에 몸을 지탱하고 산을 타기가 힘들었으리라. 아니다. 그것보다 야이간이 등을 돌렸다는 데 충격을 받아 심신이 상해서 땀을 흘리는 것일 게다.
“대형! 형님들!”
제일 반가운 사람은 적지인살이었다. 그는 맨발로 달려 나와 청면살수의 몸을 만져 댔다.
“하하! 잘 있었는가?”
청면살수는 듣지 못하지만 느낌만으로도 자신을 만지는 사람이 적지인살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냈다.
“형님, 원로에 노고가 많았습니다.”
“자네, 혈색이 좋아졌는걸! 요즘 신수가 훤해진 것 같아.”
“형님, 밤공기가 찹니다. 안으로 드시죠.”
“하하! 소고야, 안색이 좋지 않구나, 살다 보면 별일을 다 겪는 거야. 그만한 일로 좌절하면 안 돼.”
청면살수는 소고가 옆에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하지만 소고는 옆에 있지 않았다. 한달음에 달려 나오기는 했지만 청면살수에게 달려갈 수 없었다. 소고의 눈길은 최대한 공경한 자세로 살혼부 고수들을 모시고 있는 종리추에게 고정되었다.
‘고마워….’
그녀는 종리추의 마음을 알았다. 태연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지만 묵월광 절반이 잘려 나간 소고의 충격은 예상외로 컸다. 안정된 기반 위에 사무령을 향해 달려가려던 그녀의 야심이 일순간에 물거품으로 변해 흔적 없이 사라졌다는 충격이 더 컸으리라. 묵월광을 재건할 돈도 있고 살수도 있지만 어떤 명분으로 일어설 것인가. 구파일방이 등을 돌렸는데,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살행을 할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소고에게 백 마디 천 마디 위로를 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 오히려 소고의 자존심만 상처 내기 십상이다. 종리추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다. 죽음의 계곡, 천음곡에서 일어난 일도 말하지 않았고 산불을 일으켜 목숨을 구한 것도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그는 될 수 있는 한 소고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소고뿐만이 아니라 적사, 소여은과도 만나지 않으려고 애썼다. 지난 며칠 동안은 몰랐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그렇다. 종리추는 백 마디 말보다 한 가지 행동으로 최고의 위로를 해준다. 극단의 상황까지 치몰렸던 살혼부 살수들은 소고에게 커다란 용기를 주었다.
적사도 한달음에 뛰쳐나오기는 했지만 비원살수에게 달려가지는 못했다. 그는 살혼부 살수들의 등장이 반갑지만은 않았다. 사부이자 아버지와 다름없는 비원살수를 다시 만난 것은 반갑기 이를 데 없었지만 지금도 비원살수가 무림인의 협공을 받아 두 다리가 잘리던 광경을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지고 울분이 치솟는다. 사람의 정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반가운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무림에 몸을 담고 있고 살행을 하는 살수가 되었다. 무림의 판도, 무림의 정세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주도권이 넘어갔어. 소고에서 종리추에게. 종리추, 네놈은 간웅이었던가?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단 말인가?’
소고의 근원은 살혼부에 있다. 살혼부의 부주인 청면살수가 자신이 이룩했던 모든 것을 소고에게 물려주었고, 그럼으로써 오늘날의 묵월광이 탄생했다. 소고가 익힌 무공도 청면살수에게서 나왔다. 소고가 이룩한 기반도 청면살수의 전폭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하다. 자신은 물론 적각녀, 야이간, 종리추 모두 청면살수의 머릿속에서 구상되었고 실행된 작품들이다. 적사는 살혼부 살수들의 움직임에 신경이 쓰였다. 그들이 이곳에 머문다면 소고는 정통성을 잃게 된다. 살수에게, 그것도 묵월광과 살문에게만 적용되는 정통성이지만 살문이 이미 묵월광의 통제를 벗어난 지금 살혼부 살수들이 살문에 머문다면….
‘아니야, 잠시 들른 것뿐이야. 하지만 잠시 들르려고 그 먼 길을 왔단 말인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아니야, 계획된 거야. 사부님, 사숙님이 머문 곳에서 이곳까지 오려면 적어도 한 달은 걸리는데 한 달 전부터 움직였다면…. 묵월광이 살문을 치기 전이다. 살문의 종적이 드러나기 전이다. 종리추는 혈영신마를 구하겠다고 작심한 순간부터 사람을 풀어 살혼부 살수들을 움직였다. 시기를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혈영신마를 구해 도주할 때다.
살혼부 살수들은 잠시 들르려고 온 것이 아니다. 머물려고 온 것이다. 그때 묵월광이 살문을 칠 것이라 예측했고 야이간의 배반까지 짐작했다고 우긴다면 타당한 행동이 되지만.
‘살혼부 살수들을 모신다? 기막힌 발상이군. 폐물이나 다름없는 사람들이니 누가 모셔도 상관없다? 아니야, 그렇지 않아. 소고는 살혼부에 등을 돌릴 수 없어. 이렇게 되면 살문이 본진이 되고 묵월광이 분타가 되는 격인데….’
적사는 음울한 눈으로 비원살수를 쳐다봤다. 사부는 어떤 생각에서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소여은은 사뿐히 걸어가 미안공자의 손을 잡았다.
“잘… 있었…느냐?”
미안공자의 음성이 가늘게 떨려 나왔다. 부엉이가 울부짖는 듯 탁하고 거센 음성이었다.
“어산적은 어때요?”
“그렇지 뭐.”
“적수가 누구예요?”
“응조비원.”
“뭐요? 응, 응조비원? 그 원숭이가 적수가 됐어요? 정말이에요?”
“그, 그래.”
“호호호! 어산적도 갈 데까지 다 갔군요, 응조비원이 적수가 되다니. 원숭이가 적수가 될 때까지 다른 사람들은 뭐 했대요?”
“응조비원이 보기에는 그래도 꾀가 많잖니.”
“호호호! 그건 그래요. 꾀 하나는 알아주는 사람이죠.”
어산적의 지낭은 응조비원이다. 명유마괴, 녹림마왕이 적수로 있을 적에는 한쪽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지낭 역할만 했다. 그는 능력을 철저하게 숨겼다. 그것만이 녹림마왕의 손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란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효웅 밑에 있으려면 능력을 숨겨라. 질시의 눈길을 받는 순간 목숨을 잃을 공산은 구 할이 넘는다. 반드시 죽는다고 봐도 좋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일을 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감추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니까. 나서야 할 곳과 나서지 말아야 할 곳, 제안을 해 사태를 타개하는 순간과 멍청이처럼 우두커니 있어야 할 순간을 잘 파악해야 하니까. 응조비원은 녹림마왕이 암살을 당한 후 진면목을 드러냈다. 그는 지리멸렬한 어산족을 재규합했다. 자신이 총채주로 등극하지는 않았다. 자신은 소두목 중 한 명으로 남았고 총채주는 자신의 수족 중 한 명을 내세웠다. 그가 총채주로부터 적수 이양을 받은 것은 어산적이 녹림마왕 때처럼 기세를 드높인 다음이다. 그는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어산적을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예상했던 일이다. 녹림마왕이 사라진 빈자리를 채울 사람은 많은 소두목들 가운데서 응조비원이 가장 유력했다.
“힘드셨겠네요, 응조비원 밑에 계셨으니.”
“그렇지도 않아. 응조비원은 쓸모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간이라도 빼주는 성격이잖니. 이 사부가 이래 봬도 아직 팔팔하단다. 그까짓 해적 무리들에게 치일까.”
미안공자의 음성이 많이 차분해졌다. 미안공자가 소여은에게 품고 있는 연정. 소여은도 자신을 향한 사부의 마음이 단순히 어른이 주는 은정만이 아니란 걸 알고 있다. 사부는 문득문득 그녀를 여인으로 보았고 여인으로 대했다.
사내와 여인과의 관계를 어려서부터 알고 있는 그녀였기에 사부의 마음을 알아채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더군다나 미안공자에게 전수받은 것이 미인계이니. 중원에 들어설 때만 해도 그녀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지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었다.
‘멀리 떨어지는 거야, 사내새끼들이란.’
미안공자가 사부로 보이지 않았다. 색을 탐하는, 마음속에 흑심을 품고 있는 이중인격자로만 보였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한 대로 미안공자와 떨어져 홀가분한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삼 년이 지난 지금 더 많은 사내들을 알게 되고 죽이고 난 지금…. 그녀는 미안공자를 이해하게 되었다. 사부가 자신에게 연정을 품고 있지만 그것은 몸뚱이를 탐하는 육체적인 연정이 아니라 그녀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물론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하지만 현명하게 타개할 수 있을 정도로 경험을 쌓았다. 소여은은 어산적에 대한 몇 마디 말로 사부와의 경계를 단단히 했다. 더불어 사부와 제자의 정도 돈독히 했다. 나머지, 사부가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오로지 사부의 몫이다. 사부의 행동 여하에 따라서 누구보다도 끈끈한 사제지간이 될 수도 있고 평생 얼굴을 보지 않는 경계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일단 소여은은 제자로서 사부를 맞았고, 미안공자도 사부로서 소여은을 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