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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19화


적사의 우려는 기우에 그쳤다.

“주제넘은 말인지는 모르지만….”

종리추가 입을 열자 작은 움막에는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고요함에 휩싸였다.

“묵월광은 힘이 있습니다. 적각녀의….”

“백화현녀!”

소여은의 냉담한 말에 종리추는 빙긋 웃었다. 아무런 악의도 엿볼 수 없는 싱그러운 웃음이다. 그것은 가진 자, 있는 자가 누릴 수 있는 여유요, 특권이다.

“실수했소. 정정하죠. 백화현녀의 지모는 뛰어납니다. 적사의 무공은 단연 돋보이고. 이십팔숙도 큰 힘이 되죠.”

“이십팔숙까지 알고 있다니!”

소고의 얼굴빛이 싸늘해졌다. 자신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기분 나쁜 일이 또 있을까.

“새삼스러운 게 아니죠. 아마 구파일방에서도 이십팔숙을 알고 있을 겁니다. 야이간이 등을 돌렸고 구파일방이 동조했다면 그들도 위험에 빠졌다고 봐야 옳을 겁니다. 천 노인도 마찬가지.”

모든 게 드러났다면 종리추 말이 백 번 맞다. 구파일방은 묵월광의 가지라고 할 수 있는 이십팔숙을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또 야이간은 천 노인을 방치하지 않으리라. 그가 등을 돌린 원인이 천 노인의 재력에 있으므로. 어쩌면 지금쯤 벌써 이승을 하직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소고는 힘이 쭉 빠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야이간을 정확히 보지 않은 것이 실수다. 일이 벌어질 것을 예상했다면 마땅히 대응책을 세워놓았어야 하는데 아무런 방비 없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과 진배없으니.

“문제는 소고가 강하다는 겁니다.”

종리추의 이어지는 말에 소고의 아미가 찌푸려졌다. 자신이 강한 게 문제라니? 다른 사람의 얼굴에도 의아함이 떠올랐다. 사무령을 꿈꾸는 소고다. 그녀는 강해질 수 있는 한 강해져야 한다. 그런데 종리추는 그것이 문제란다.

“총관.”

“예.”

종리추의 부름을 받자 벽리군이 일어서며 말했다.

“묵월광은 하나의 힘으로 합쳐진 듯하지만 실상은 각기 다른 세력으로 나눠져 있죠. 적사는 적사대로, 백화현녀는 백화현녀대로, 소고는 소고대로. 전부 소고 때문입니다.”

소고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안면에는 기분 나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소고가 강하니 소여은은 지시만 받습니다. 즉, 책사가 책사 역할을 못한다는 겁니다. 또 소고가 강하니 적사도 지시만 받습니다. 살수의 임무가 지시받은 것을 처리하는 것이지만, 신흥 문파의 경우에는 어느 정도 자율성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모두들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반면에 소고의 안색은 하얗다 못해 흑색으로 변했다. 벽리군은 사람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시켜야 한다는 요지로 말을 하고 있지만, 내면에 숨은 뜻은 소고는 묵월광을 이끌 힘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소고에게는 소여은을 압도할 만한 지략이 없다. 적사를 압도하는 무공도 없다. 거의 대등하다. 그렇기 때문에 묵월광은 성장을 하지 못하고 창건한 상태 그대로이다. 이게 대놓고 면박을 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저희 살문에서는 이런 현상을 경험 부족으로 보고 있습니다. 무공이 높고,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 있고, 활동하기에 넉넉한 돈이 있으면서도 크게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 경륜이 짧기 때문입니다.”

‘그럼 살문은? 종리추는 경륜이 많아서 당하지 않았다는 거야?!’

소고는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녀는 패자다. 이 자리에는 그녀를 지금의 위치까지 밀어 올려준 살혼부 살수들도 있다. 소고는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렀다.

“그래서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이 살혼부 선배님 들이십니다. 단 여섯 명으로 살천문과 어깨를 당당히 했던 살혼부가 아닙니까. 살혼부 선배님들이 조언을 아끼지 않으신다면 묵월광은 거듭날 수 있다는 판단입니다.”

벽리군이 말을 마치고 자리에 앉자 종리추가 말했다.

“이제.. 어차피 묵월광과 살문은 다른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묵월광은 묵월광의 길을, 살문은 살문의 길을. 여기서 한 가지만 약속드리죠.”

수십 개의 눈길이 종리추에게 꽂혔다.

“묵월광이 있는 곳에 살문은 없습니다.”

뜻밖의 말에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문….주, 지금 그 말, 어떻게 해석해야 되지?”

소고가 물었다. 그녀는 기어이 ‘문주’ 라는 말을 입 밖에 내고 말았다. 스스로 종리추를 수하가 아닌 일문의 문주로 인정한 셈이다. 이런 일은 살문을 무림인들에게 먹이로 던져 주는 순간부터 예정된 수순일 게다.

소고는 종리추에게 어떤 일도 요구할 수 없는 입장이다. 종리추가 그때 일을 트집 삼아 묵월광을 습격해도 할 말이 없다. 그리고 그런 일은 살수계에서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기도 한다. 하극상. 질서가 잡힌 무림에서는 일어날 수 없고 용납도 되지 않는 일이지만 살수계에서는 다반사로 일어난다. 철저한 강자존의 세계. 암살, 독살, 음모가 늘 존재하는 세계.

살수라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동정이나 기대도 바라서는 안 된다. 하물며 살수 문파를 이끄는 문주라면 비정과 잔혹과 피의 신이 되어야 한다. 살수에게 약속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살수가 약속이란 말을 사용할 때는 청부를 받을 때뿐이다.

종리추는 약속을 한다고 했다. 묵월광이 있는 곳에 살문은 없다. 묵월광이 세를 넓히면 스스로 알아서 물러서겠다는 소리다. 묵월광과는 청부를 다투지 않겠다는 말이다. 이런 경우는 상대 문파를 완전히 흡수했을 때나 가능하다. 종리추가 무엇 때문에 이런 약속을 한단 말인가. 선대의 은원 때문에? 그런 이유를 붙이기에는 대가가 너무 크지 않은가.

“말 그대로입니다. 아버님은 대백님께 세 번의 예를 갖췄습니다. 주군과 신하의 예. 대형과 동생의 예. 그리고…. 목숨을 공유하는 예.”

청면살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면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공지장은 움막에서 나누는 대화를 빠른 필치로 써 나갔다. 청면살수의 배에. 그런 공지장의 입가도 실룩거리고 있었다.

“난 소고에게 주군과 신하의 예를 갖췄습니다. 대형과 동생의 예 대신에 살문을 주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목숨을 맞바꿀 수 있을 만한 일은…. 현재 내가 소고에게 줄 수 있는 것 중 가장 큰 것은 양보입니다. 영원한 양보. 약속하지만, 내가 살아 있는 한 묵월광은 살문을 경계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게 명확해졌다. 적지인살이 고개를 숙이며 굵은 눈물을 떨궜다. 아들…. 소고의 수하로 키운 아들. 소고를 위해 목숨을 던지게끔 키운 아들. 아들이 기어이 아비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날이 밝자 묵월광 살수들은 떠날 준비를 했다. 준비라고 해봐야 사령 살수들은 병기만 들면 고작이고 화령 살수들도 화장을 하고 옷매무새를 매만지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살문 살수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뚫고 나갈 길을 다시 한 번 점검하기 위해 새벽 일찍 나간 것이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만 종리추는 그렇게 했다. 살문 살수들이 돌아오면, 그리고 길이 안전하다는 보고를 하면 묵월광은 떠난다. 살혼부 살수들은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긴긴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지난 회포를 풀기에 한낮과 한밤은 너무 짧았다. 모두들 긴장 반, 설레임 반으로 살문 살수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 종리추에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적사였다. 종리추와 만난 후에도 가볍게 눈인사만 했을 뿐 별다른 이야기를 주고받은 적이 없는 적사다. 묵월광에 있을 적에도 서로의 존재만 알고 있었지 이야기를 나눈 기억은 없다. 그가 찾아왔다. 지도를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열심히 말하던 벽리군이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지도를 접었다. 그리고 화덕이 있는 곳으로 가 찻물을 올려놓았다. 적사는 벽리군을 힐끔 쳐다본 후 종리추에게 말했다.

“무림인들이 모여들고 있는데…. 괜찮겠지?”

종리추는 적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웃음기가 없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고 턱 주변으로는 거칠게 자란 수염이 가시처럼 삐져 나와 있다.

‘진심이군. 편하게 말하고 있어.’

종리추는 적사의 마음을 읽었다. 그는 종리추를 친구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삼이도에서는 거들떠볼 필요도 없는 사내였다. 묵월광에서는 기이한 사내였다. 지금은 친구다. 적사에게 종리추는 경쟁자나 무공으로 제압해야 할 상대가 아니라 친구가 되었다. 종리추도 마음을 풀고 입을 열었다.

“훗! 걱정 마. 대비책이 서 있으니까. 팔부령에서 살문을 몰아내려면 대가를 크게 치러야 할 거야.”

“안심이군.”

적사는 더 묻지도 않고 등을 돌렸다. 무뚝뚝한 적사가 베풀 수 있는 최고의 호의는 여기까지였다. 종리추가 돌아서는 적사의 등 뒤에다 물었다.

“나도 하나 물어보지. 소고야, 적각녀야?”

“….!”

“자네 같은 사람이 묵월광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곰곰이 생각해 봤지, 묵월광만 벗어나면 일문의 종주가 될 만한 무공을 지니고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뭘까 하고.”

“….!”

적사가 다시 몸을 돌려세웠다.

“어느 쪽이야?”

“적각녀.”

“….?”

“조금 뜻밖이라서.”

적사가 뚜벅뚜벅 걸어와 탁자 맞은편에 앉았다.

“그래?”

“소고와 적각녀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지. 적각녀는 온유하나 독가시를 품고 있어. 소고는 고슴도치처럼 비늘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속은 무르지. 정반대야. 그중에 적각녀라 하하!”

벽리군이 향긋하게 다려진 차를 두 사람에게 내놨다.

“마셔보게. 총관이 끓여주는 차는 일품이야. 이런 차 맛은 쉽게 맛볼 수 없어.”

적사는 찻잔을 들어 냉수 마시듯 후루룩 마셔버렸다. 마시기 적당하게 데웠다고는 해도 한 번에 마시기에는 어지간히 뜨거웠을 텐데 적사는 인상조차 찡그리지 않았다.

살문 살수들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두터운 털옷으로 몸을 감싼 살문 살수들은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한 명 두 명 돌아왔다. 그들이 돌아와 종리추의 움막으로 들어갈 때마다 묵월광 살수들은 긴장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혈혈단신으로 천군만마를 뚫고 나가는 기분 같았다. 팔부령을 에워싸고 있는 무림군웅들에게 발각이라도 되는 날에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이번에는 저번과 같은 요행도 없을 것이다. 종리추의 움막에서 벽리군이 나오더니 소고의 거처로 다가왔다.

“준비가 되셨답니다.”

소고는 적사와 소여은을 쳐다봤다. 말없는 움직임이 눈빛을 통해 오고 갔다.

종리추와 적지인살, 그리고 용금화라는 이름을 가진 노인과 삼현옹이라는 기인, 여인들…. 팔부령에 남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살문 살수와 묵월광 살수들은 발길을 옮겼다. 묵월광 살수만 스물두 명, 거동이 불편한 살혼부 살수가 다섯 명. 서른 명에 가까운 인원이 흔적을 남기지 않고 이동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더군다나 팔부령에는 눈이 수북이 쌓여 있어 걸음마다 깊은 족적을 새겨놓는다. 묵월광 살수들은 지하 통로를 생각했다. 천음곡에서 살문 거처로 구사일생 도주할 때 지하 통로를 이용했지 않은가. 혈영신마와 각법의 달인 모진아가 앞장섰다. 두 사람은 옆집 마실이라도 가는 듯 여유있게 뒷짐을 지고 가벼운 담소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비무를 할 때는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는 듯이 매서웠지만 비무가 끝난 후부터는 친형제 간처럼 붙어 다녔다. 묵월광 살수들은 두 사람의 뒤를 좇았다. 묵월광 살수들 뒤에 또 따라붙는 사람들이 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살문 살수들이 기척도 없이 따라붙고 있다. 그들은 팔부령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알고 있다. 거처를 정한 곳이니 당연하다. 싶겠지만 소고와 적사, 소여은 같은 고수들의 이목까지 속일 정도로 은밀하게 뒤를 밟으려면 그저 아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팔부령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만이 그럴 수 있다. 소고는 다시 한 번 살문의 힘을 느꼈다. 야이간이 등을 돌리지 않았어도, 무림인들이 개입하지 않았어도, 원래 목적대로 살문을 공격했다면 낭패를 당할 사람은 묵월광 살수들이다. 살문 살수들은 미색에 동요하지 않는다. 화령 살수들이 소용없다는 뜻이다. 야이간이 거느렸던 조령 살수들쯤은 거침없이 베어넘겼을 게고, 그나마 버틸 수 있는 사람들이 사령 살수들인데 그들도 오래 버티지는 못했으리라. 숨을 곳이 많은 곳에서 숨어서 공격하는 사람을 당할 도리는 없다. 힘들어도 굉장히 힘든 싸움이 됐을 게다.

혈영신마와 모진아는 굉장히 천천히 걸었다. 일행 중 가장 발걸음이 더딘 사람은 화령 살수들인데, 그녀들조차도 답답함을 느낄 정도였다. 길을 사전 점검할 정도로 주의를 기울였던 것과 불의의 사태가 벌어졌을 경우 행동해야 할 치밀한 계획과 비교하면 정말 이해하지 못할 움직임이다.

종리추는 무림인과 부딪치게 되면 무작정 도주해야 한다고 했다. 산 하나 정도는 숨도 쉬지 않고 넘어야 한다고 강조에 강조를 거듭했다.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상관하지 말고 갈 길을 가라고. 화령 살수들을 염려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령 살수들과 짝을 이뤄놓기도 했다. 일이 벌어지면 사령 살수는 예정된 화령 살수를 등에 업고 혈영신마와 모진아가 이끄는 길로 냅다 뛰어야 한다. 화령 살수들에 살혼부 살수들까지 도주에 관한 모든 책임이 사령 살수들에게 넘겨졌다. 움막을 떠나는 순간 묵월광 살수들의 긴장은 도를 넘었다.

눈에 핏발이 곤두서고 신경이 예민해졌다. 그런데 여유만만하게 담소를 나누며 길을 가다니…. 길이 끊어졌다. 혈영신마와 모진아는 좁은 산길을 버리고 산줄기를 타기 시작했다. 말이 산줄기지 절벽이나 다름없다. 겨우내 내린 눈은 얼음처럼 굳어있어 조금만 주의가 흐트러지면 주르륵 미끄러진다. 사령 살수들은 화령 살수들의 손을 움켜잡고, 혹은 아예 등에 업고 산줄기를 기어올랐다. 이번에는 더딘 산행이 도움이 되었다. 낯선 산길에 극악의 조건을 만났는데 속도까지 낸다면 참으로 고된 산행이었을 게다.

혈영신마와 모진아는 문득문득 걸음을 멈추고 산세를 둘러보았다. 무공을 모르는 일반 사람들이 그런다면 숨이 가빠 잠시 쉬는 것으로 생각했으리라. 산 정상 부근에 이르렀을 즈음,

‘음? 이간…. 피비린내닷!’

혈영신마와 모진아의 등 뒤를 바짝 쫓던 적사는 긴장을 하며 진기를 끌어올렸다. 뒤따라오는 살수들의 눈빛도 예사롭지 않게 빛났다. 그들도 바람결에 풍겨오는 피비린내를 맡은 것이다. 가장 후미에서 따라오는 소고와 소여은도 병기를 움켜잡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무감각한 사람은 혈영신마와 모진아다. 그들은 코가 마비된 사람처럼 덤덤히 걸었다. 그러나…. 걸음을 옮길수록 피비린내는 더욱 강하게 풍겨왔다. 혈향의 근원은 오래지 않아 찾아냈다. 널찍한 바위 뒤에 머리를 처박고 다리는 바위 위에 걸쳐 물구나무를 선 모야세로 죽어 있는 무인. 무인의 머리는 반이나 갈라졌고 복부도 절반이나 갈라져 창자가 삐져 나와 있다.

“이자는!”

적사는 죽은 무인을 알아봤다. 하남성에서 파천권으로 유명한 파천신군 우준도다. 주먹을 보면 파천신군임이 틀림없다. 돌덩이처럼 투박하고 거칠며 크기도 어린아이 머리만한 주먹을 가진 사람은 파천신군밖에 없다.

그는 낭인으로 출발해 무림세가를 일으킨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하릴없는 사람이 낭인들의 입신양명에 대해 조사한 것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낭인들 중 무림인으로 명성을 얻어 일가를 세우는 사람은 천 명 중 한 명이 안 된다고 한다. 절반은 비무 중 죽고 절반은 뜻을 접고 병기를 버린다. 병기를 버린 사람들 중 대부분이 파락호로 전락하여 제명에 죽지 못하지만. 하기는 이름이 드높은 무림인이라 할지라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곳이 무림인데 하물며 무공을 입증하려는 사람들이야 어련하랴. 한데 수많은 싸움에서 승승장구하던 파천신군 우준도가 사람 발길이 끊긴 팔부령 한구석에서 죽다니. 문득 의문이 생겼다. 우준도가 왜 여기에 있었을까? 적사는 널찍한 바위 위에 올라 산 아래를 내려다봤다. 환히 보였다. 워낙 숲이 우거진 곳이라 세세하게 볼 수는 없지만 산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더군다나 산길이라고 할 수 있는 소로는 뚜렷하게 보였다.

우준도는 감시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요처를 차지했다. 파천신군 우준도는 명망이 있는 사람이다. 매서운 겨울 한바람을 맞으면서 길목이나 감시할 사람은 아니다. 그는 명령을 내리는 사람 축에 속하지 명령을 받는 사람 쪽은 아닌 것이다. 파천신군이 명망을 버리고 겨울 긴긴 밤을 산정에서 보냈다는 것은 구파일방이 살문을 얼마나 비중있게 생각하는지 여실히 말해 준다. 살문이 살천문의 공격에서 살아남은 것은 큰 충격이다. 사실 그 싸움은 살천문이 전면에 나섰지만 개방과 공동파의 연수합격이라는 편이 옳다.

두 번째, 살문은 묵월광을 구했다. 단지 구했다는 사실보다도 무림군웅들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물러서게 만들었던 치밀한 안배가 두려웠을 게다. 팔부령 넓디넓은 산중에서 하필이면 천음곡에 안배를 풀어놨다는 것은….

‘살문 살수야. 이들이 앞서 나가면서 경계 무인들을 제거하고 있어. 그래서 천천히 가는 거야. 그래서….’

모두들 다급한 심정에 비해 너무도 느린 행보에 답답함을 느끼던 차였다. 지금은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파천신군의 시신을 보고도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매하기 이를 데 없는 자다. 우매한 자는 살수가 될 수 없다. 쥐새끼처럼 약삭빠르고 간사한 자는 살수가 될 수 있어도 황소처럼 우직한 자는 살수가 될 수 없다. 될 수는 있을 것이다. 빨리 죽어서 탈이지. 묵월광 살수들은 무공의 높낮이는 있어도 우매하지는 않다. 무공이 낮은 화령 살수들도 사람 마음을 읽어야 하는 살행에 성공하는 만큼 우매하지는 않다.

‘비명도 듣지 못했는데 언제….’

파천신군의 상흔에서는 뜨거운 피가 흘러나와 눈밭을 적시고 있다. 죽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시신이다. 묵월광 살수들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행보를 한 만큼 웬만한 소리는 다 들을 수 있었는데, 특히 사람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는 놓치지 않을 텐데 전혀 듣지 못했다. 그것은 두 가지 사실을 말해 준다. 파천신군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또 파천신군을 죽인 자는 그야말로 감쪽같이 죽였다. 그를 죽인 자는 살수로서 최고의 능력을 가진 자다.

‘누가 죽였을까? 혈영신마와 모진아는 여기 있는데…. 몇 명 안되는 살문이지만 특급살수들만 모여 있군. 옛날 살혼부 처럼.’

혈영신마와 모진아가 발걸음을 멈췄다. 두 사람은 조그만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산 아래를 굽어보았다. 마치 유람이라도 나온 사람들처럼.

우두커니 앉아 찬바람 맞기를 얼마간, 혈영신마와 모진아가 다시 움직였다.

‘새소리! 새소리야!’

소고는 두 사람이 어떤 신호에 따라 움직이는지 알아냈다.

“짹! 짹짹! 짹!”

얼핏 들으면 산새소리로 흘려 버릴 수 있는 작은 소리다. 혈영신마와 모진아는 잡담을 나누는 듯이 보였지만 실상은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신호를 기다렸던 것이다.

‘앞에서 길을 뚫고 있어. 그냥 따라오는 줄 알았는데 언제 앞서 가서 길을 뚫고 있단 말인가?’

살문은 알면 알수록 신비스러웠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살문을 떠나올 때부터 감지했던 그림자들은 여전히 따라붙고 있다. 그들의 숫자는 대략 십여 명에 달하는데, 그 정도라면 살문 살수들 전부가 아니겠는가. 길을 뚫을 사람이 없는데 분명히 길을 뚫고 있다. 생각은 옳았다. 묵월광 살수들은 오래가지 않아 또 다른 시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또 다른 시신도. 팔부령은 무인으로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살문이 팔부령에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지만 어느 곳에 있는지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이 없다. 팔부령을 이 잡듯이 뒤지면 알아내지 못할 리도 없지만 그러자면 적어도 두어 달은 지나야 하리라. 살문을 치기 위해 무림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팔부령 곳곳에 밝은 눈을 심어 놓아 사람이 눈에 띄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는 수색을 하면서. 산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고수들이 자리했다. 물론 죽은 시신으로. 이상한 것은 그들 간의 간격이 그리 넓지 않고, 또 서로의 모습을 지켜볼 수 있을 만한 곳인데 한결같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점이다. 앞서 죽은 사람을 보지 못한 게 틀림없다. 다투는 소리는 물론 죽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뒤에 남은 사람들도 힘없이 거꾸러지고 있다.

‘엄청난 살수야. 이런 자가 내 목숨을 노린다면…. 당할지도 몰라. 아니, 당하게 될 거야.’

놀람이 아니라 공포였다. 소고, 적사, 소여은은 서로를 쳐다보며 할 말을 잃었다. 무공이라면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을 만큼 극한의 수련을 거친 사령 살수들도 큰 한숨만 내쉬었다.

암습에 당한 사람을 보면 무림인들은 방심을 탓하며 경계심을 북돋지만 살수들은 상대 살수의 입장으로 돌아가 살인 방법을 관찰하게 된다. 절정고수를 소리도 지르지 못하게. 고수들이 주위에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눈치채지 못하도록 감쪽같이. 정말 어렵다. 고수들을 죽인 살수는 누구인가. 누구이기에 이런 살행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혈영신마와 모진아만 해도 상대하기 벅찬데, 그만한 고수가 또 있었단 말인가. 누구인가. 얼굴이라도 봤으면. 감탄이 절로 새어 나왔다. 살문은 몇 사람밖에 되지 않지만 묵월광조차도 어쩔 수 없는 강한 살수 문파다. 옛날 살혼부가 그랬듯이.

옥진 도인, 무불신개. 현재 팔부령에 모인 고수들 중 최고 배분인 두 사람은 어처구니가 없다 못해 웃음이 새어 나왔다. 눈이 많이 쌓인 곳이라 산불은 곧 진화되었다. 처음부터 기름을 먹이지 않았다면 그렇게 크게 일어날 산불도 아니었다.

“말은 들었지만 굉장히 약은 놈이오.”

“그러나저러나 묵월광과 살문이 만났으니….”

“제 수명만 더 빨리 단축시킬 뿐입니다.”

두 고인은 팔부령을 에워싸고 있을 뿐 적극적인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그들의 소임은 팔부령에 틀어박힌 살수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데 있다. 그들은 서둘 필요가 없다. 묵월광 살수들을 놓쳤고 개방의 타구진이 뭇 군웅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했지만 그 정도로 이성을 잃을 두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두 사람의 이성은 더욱 밝고 투명해졌다.

‘놈들이 어디 숨었는지 파악하는 게 급선무.’

‘무작정 뒤지다가는 애꿎은 피해만 늘어날 뿐.’

두 사람의 생각은 똑같았다. 그런 면에서는 곤륜파에서 왔다는 현무길이라는 자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는 묵월광 살수들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살문에 대해서는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살문의 문주가 종리추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살문 살수들이 몇 명이나 되는지, 어디에 숨어 있는지….

‘고수들이 도착할 때까지 서두르면 안 돼.’

무불신개는 팔부령에 모인 개방 문도 삼백여 명을 모두 풀어 탐문에 주력했다. 팔부령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은 모두 만나보도록 지시했다. 약초를 캐는 사람, 화전을 일구는 사람, 사냥을 하는 엽사들…. 한 뼘이라도 팔부령을 밟아본 사람들이라면 빠짐없이 만나서 정보를 얻으라고 지시했다. 팔부령을 알 수 있을 만큼 많은 정보를 수집해 놓은 상태였지만 더욱 구체적인 정보가 필요했다. 살문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어차피 구파일방에서 파견한 고수들이 도착할 때까지는 하루 이틀 정도 시간이 있으니까.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된 것일까?’

옥진 도인은 머리 속에 깃들기 시작한 어두운 그림자를 떼어내지 못했다.

무림은 은근히, 축축하게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격으로 조금씩 혈풍에 잠겨들고 있다. 분명히 혈풍이 불고 있다. 중원에 암약하는 살수 집단들이야. 상대가 되지 않으니 신경 쓸 것도 없다. 그들은 콧김만으로도 천 리 밖으로 날려 버릴 수 있는 미미한 존재다. 살혼부, 살천문, 살문, 묵월광…. 그들이 정을 표방하며 무림문파를 세웠다면 무림 일각을 차지할 수도 있는 노릇이었으나 살수 문파를 선택하면서 스스로 하찮은 미물로 전락했다. 하찮은 미물…. 지렁이처럼 언제든 밟아 죽일 수 있는 미물. 그런 미물 때문에 중원이 술렁이고 있다. 묵월광의 숨통을 자르지 못했고 살문의 소재는 파악조차 못하고 있다. 더욱이 다 잡은 혈영신마를 놓치는 우를 범했으니. 십망까지 선포한 혈영신마인데….

구파일방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팔부령으로 잠적한 살수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 그런데 무불신개는 종리추가 제 무덤을 팠다고 하지만…. 옥진 도인은 종리추가 어떤 사내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혈영신마와 묵월광 살수들을 구출하는 과정을 보면, 그는 철저히 싸움을 피하고 있다. 무공은 모르지만 머리 하나는 기가 막히게 뛰어난 자다. 그런 자가 숨통을 조여오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리 있겠는가. 옥진 도인은 구파일방 장문인들이 어떤 행동을 취할지 짐작하고 있다. 개방 장로인 무불신개도 짐작하고 있을 터이고 예측은 빗나가지 않으리라. 다른 때 같으면 틀림없이 그렇게 한다. 하지만 이번은 조금 다르다. 십망을 선포받은 혈영신마가 살문과 같이 있다. 전대에 십망을 받아 죽은 혈암검귀의 무공을 익힌 소고가 팔부령에 있다. 살문에. 장문인들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분명한 것은 살문은 팔부령에서 반드시 제거해야 하고 그 책임이 자신에게 지워져 있다는 사실이다.

무불신개는 살문의 소재를 파악하기로 했다. 그동안 화산파는 군웅들을 지휘하여 팔부령을 에워싸는 역할을 맡았다.

‘한 명도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 돼. 한 명도….’

그런데 자꾸만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천여 명에 이르는 군웅이 운집해 있지만 그 정도의 인원으로도 팔부령을 에워싸기는 너무 부족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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