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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2화


황성산에서 흑봉광괴가 분노에 치를 떨고 있을 무렵, 적지인살은 무릎 깊이로 물이 흐르는 도랑에 몸을 숨기고 어둠 속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천음산이라고 쓰인 나무 팻말에 윤기가 흘렀다. 확실히 천음산 묘지는 돈 있는 사람들이 쓰는 것 같다. 무심히 지나쳐 버릴 나무 팻말까지 공들여 옻칠을 해놨으니.

퍼엉! 펑펑펑!

오색찬란한 폭죽이 밤하늘을 물들였다.

‘개방 전폭…’

적지인살은 폭죽이 무슨 뜻인지 알지 못했다. 개방 밀마는 십 일 단위로 바뀌기 때문에, 운 좋게 폭죽을 읽어낸다 해도 십 일만 지나면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밀마의 뜻은 모르지만 한 가지는 알았다. 개방 문도가 천음산에 깔려 있다는 것.

‘숨어 있어. 무턱대고 들어갔다간 낭패당할 뻔했군.’

개방에는 무서운 것이 세 개 있다. 방주의 강룡십팔장, 방주조차 정확히 숫자를 파악하지 못하는 많은 문도, 그리고 타구진. 개방의 타구진은 무섭다. 타구진을 제대로 펼치기 위해서는 팔백 명이라는 많은 인원이 필요하다. 팔백 명이 연수만 해도 정신이 아찔한데 음양오행에 기반을 둔 진법이 발동되면 어떤 고수라도 헤어 나오기 힘들다. 대타구진에 비해 소타구진은 위력은 한결 감소되지만 이결제자 열 명만 모이면 펼칠 수 있다. 역시 음양오행에 기반을 둔 연수합격이다. 개방 문도 개개인의 무공은 신경 쓸 것 없지만 떼를 지어 곡성을 질러대면 걸려들었다고 봐야 한다. 타구진이 발동된 것이기에.

‘천음산은 포기해야겠군. 이대로 빠져나가야겠어.’

적지인살은 물소리가 나지 않게 천천히 움직였다. 걸음을 떼어놓을 적마다 철벅거리는 물소리가 신경 쓰였지만 지척에서 자세히 듣지 않으면 듣지 못할 만큼 작은 소리였다. 그때,

쉬익! 쉬이익…!

옷자락 날리는 소리가 세차게 들려왔다.

‘적어도 삼십 명은 넘어!’

적지인살은 바짝 긴장했다. 전에는 공격 시간이 되지 않아 개방도를 보더라도 태연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무조건 참살하려고 덤벼들 게다.

‘저자는! 천애유룡…!’

적지인살은 도랑에 바짝 몸을 숙였다.

“음…!”

옆구리에 끼고 있던 종리추가 답답한지 신음 소리를 토해냈다. 적지인살은 보지도 않고 입을 틀어막았다. 개방도가 코앞을 지나가고 있는데 하필이면 이때 신음 소리를 내다니. 다행히 천애유룡은 급한 일이 있는지, 아니면 신경을 다른 곳에 쓰고 있는지 신음 소리를 듣지 못했다.

‘천애유룡… 삼결제자이나 무공은 사결제자에 버금간다. 뛰어난 자군.’

적지인살은 천애유룡의 모습을 단단히 각인했다. 대형에게 십망을 집도한 자. 천애유룡은 언젠가 반드시 죽여야 할 자이고, 가급적이면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싶었다.

‘넌 내게 죽을 거야. 접수됐어, 청부가.’

천애유룡과 개방도들이 어둠 깊은 곳으로 사라졌다.

따각따각따각…!

“끼럇!”

멀리서 힘차게 내딛는 말발굽 소리와 말채찍을 연신 휘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애유룡이 떠나고 한 시진쯤 지났을 때였다. 그때까지 적지인살은 몸을 숨기고 있는 도랑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숨도 크게 쉬지 않았고, 종리추의 입을 막은 손도 치우지 않았다. 살수로서의 본능은 그를 최대한 숨죽이게 만들었다.

따각따각따각…!

말발굽 소리는 급속하게 가까워졌다. 천음산 묘지로 들어오는 길은 하나뿐이며 나가는 길도 하나뿐이다. 평소에도 묘지에 볼일이 있는 사람들 외에는 찾는 사람이 없는 한적하고 외진 길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깊은 밤…

‘개방도다. 개방에서 말을 타는 사람은 전서를 연계해 주는 걸개뿐. 말을 타고 전서를 전달한다? 그럼 적어도 분타주 이상 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적지인살은 숨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천애유룡이 멀리 사라졌을 때 움직일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지만 한 시진만 더 참고 있어보기로 했다. 그 결정이 옳았다. 천애유룡이 없으니 천음산에 있는 사람은 아마도 총타에서 파견된 장로급 무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혹시… 입구를 틀어막으려고?’

적지인살은 곧 고개를 흔들었다. 입구를 틀어막을 것 같으면 이렇게 대놓고 전서를 전달해 오지도 않는다. 개방은 자신을 잡아내지 못하고 있다.

‘확실해. 나를 잡아내지 못하고 있어. 천애유룡이 바쁘게 달려간 것은… 그래! 망양을 틀어막으려는 거야. 예상은 했지만… 아무 데도 갈 수가 없어. 망양은 고사하고 노산, 동창, 구성, 호포 쪽도 막혔을 거야. 돌아가려면 백하를 다시 건너야 하는데 그쪽이라고 버려둘 리 없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포위망은 좁혀질 테고…’

따각따각따각…!

말발굽 소리는 이제 바로 곁에서 들려왔다. 역시 개방도였다. 건장한 말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은 땟물이 질질 흐르는 거지였다.

‘등하불명! 뒤따른다!’

적지인살은 생각과 동시에 움직였다. 말이 힘차게 옆을 스쳐 가는 순간, 적지인살도 도랑에서 튀어나와 말꽁무니에 바짝 붙었다.

쉬이익…!

엄청난 모험이었다.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이었다. 적지인살이 믿는 것은 오직 하나, 개방도가 말발굽 소리를 듣고 먼저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면 개방도가 어디 숨었는지, 몇 명이나 숨었는지, 천음산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만약 말이 지나칠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발각되는 수밖에 없다. 그때는 말 위에 있는 개방도를 쓰러뜨리고 말을 가로챈 후 도망칠 심산이었다. 얼마나 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어이!”

앞쪽에서 개방도가 불쑥 튀어나왔다. 적지인살은 한 수 더 빨랐다. 개방도가 튀어나오는 순간, 그는 길가 풀숲으로 모습을 감췄다.

“워워! 워…!”

말 위에 개방도가 다급히 말고삐를 잡아챘다. 개방도의 기마술은 능수능란했다.

“광호? 분타주님은?”

“먼저 출발하셨네. 전서는?”

“전서는 여기 있는데… 어디로 출발하셨다는 거야?”

“창호. 천평을 틀어막을 계획이셔. 나보고 전갈을 받아 오라셨네.”

“뭣? 아, 안 되는데…”

“왜?”

“창호로 가셨다고 했지?”

“응, 왜 그러는데?”

“천음산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말라는 전갈이란 말이야. 자네는 여기 있게, 내가 달려갈 테니. 이것 참! 끼럇!”

말에 타고 있던 개방도는 황급히 말머리를 돌려 오던 길을 되돌아갔다. 적지인살은 많은 정보를 얻었다. 현재 천음산에는 아무도 없다. 길가 풀숲으로 다시 기어 들어간 광호라는 개방도를 빼고는. 천음산은 오래 있을 곳이 못 된다. 천애유룡에게 명령을 내릴 사람이라면 총타에서 파견된 무인이다. 그는 자신이 천음산에 들릴 것이라고 예측했다.

‘일을 빨리 서둘러야 해.’

광호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아무리 명령이라고 해도 혼자서 공동묘지 입구를 지키고 있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자식, 같이 가면 어디가 덧나나? 혼자서 꽁무니를 빼고 있어.’

광호는 가급적 좋은 생각만 하려고 했지만 장소가 장소이고, 가을바람이 제법 차가워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불이라도 피울까? 아냐, 그러다 치도곤 맞지. 에잉! 그냥 참자. 참는 게 복이다.’

광호는 자꾸만 귀신이 뒷덜미를 낚아채는 기분이 들어 께름칙했다.

“제길! 공동묘지에서 밤을 새울 줄이야.”

기어이 투정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까부터 계속 뒷덜미가 켕겼다. 마치 귀신이 뒤에서 ‘나 좀 봐’ 하고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광호는 돌아보기 싫었다. 한 번 돌아보면 계속 돌아보게 될 것만 같았다.

“지금 세상에 귀신이 어딨어.”

쒜에엑!

날카로운 경풍!

‘이게 아닌데?’

광호는 돌아보려고 했지만 결국 돌아보지 못했다. 목뒤가 화끈거린다 싶었는데 곧 무서운 통증이 엄습했다. 통증은 뼛골을 울리고 머릿속까지 휘저었다. 광호는 부르르 치를 떨었다. 머리를 잃은 채. 적지인살은 광호의 시신을 도랑 속에 처넣었다. 천애유룡이 전서를 받고 발길을 돌려도 내일 정오는 지나야 돌아올 게다. 그는 분명히 천음산 묘지부터 뒤지기 시작할 테고, 입구에 죽어있는 광호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을 게다. 결국 광호의 시신은 내일 저녁때나 발견된다. 적지인살은 거리낌없이 묘지로 들어섰다.

‘중년인의 인피가 필요해.’

묘들 중에서 새로 만들어진 묘를 찾아 헤맸다. 인피를 만드는데 가장 좋은 재료는 죽은 지 한 시진이 지나지 않은 시신에서 얻는다. 한 시진이 경과하면 피부가 수축하기 시작해서 완벽한 인피를 얻을 수 없다. 그러자면 역시 사람을 죽여 얻는 방법이 최고다. 선원 이삼처럼. 이삼의 인피는 소용 가치가 다했다. 얼굴이 알려진 인피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설혹 그렇지 않다 해도 이삼의 인피는 하루를 넘기지 못한다. 인피는 벗기자마자 손질을 해야 한다. 살점을 깨끗이 발라내 두께를 조정하고, 방부제를 쓰고, 윤택한 살결을 유지시켜 줄 약물을 바르고… 인피 하나를 완성하는 데는 적어도 칠 일 이상이 걸린다. 이삼의 인피는 습기를 잃어 말라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적지인살은 살수일망정 미친 살인마는 아니다. 이삼의 경우에는 어쩔 수 없었다. 사태가 워낙 절박해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손질도 되지 않은, 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얼굴 가죽을 뒤집어쓰고 싶겠는가. 그는 인피를 만들기 위해 생사람을 죽일 수 없었다. 그때처럼 절박한 사정도 아닌 바에야.

적지인살은 갓 만들어진 무덤을 쉽게 찾지 못했다. 천음산 묘지는 돈 많은 부자나 사용한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하나같이 화려했다. 무덤 한 구가 횡성산 묘 대여섯 개를 합해놓은 크기다. 왕비석과 묘를 둘러싼 테두리석은 기본이고, 각종 석물과 조경수가 휘황하게 늘어서 있다. 묘 한 구를 조성하는 데 돈이 없는 사람 같으면 평생 먹고 살 돈이었다.

‘이거군.’

적지인살은 묘들 중 한 곳을 선택했다. 석물이 낡았지만 그건 돈을 처바른 결과다. 일부러 오래된 석물을 구해다 세워놓은 것이다. 깔끔하게 새로 입힌 잔디, 조경수에 물을 준 흔적, 진하게 풍기는 흙 냄새. 분명히 새로 조성된 묘였다. 적지인살은 석상을 옆으로 밀치고 대리석을 파냈다. 대리석을 다섯 개쯤 들어내자 과연 생각한 대로 묘혈로 통하는 철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철판까지 들어내자 후텁지근하고 텁텁한 공기가 훅하니 몰아쳤다. 묘 안은 웬만한 사람들 살림집보다 훨씬 호화스러웠다. 벽에는 횃불이 걸려 있고, 관은 까만 흑오석이다. 묘 벽에 그려진 사신도도 금방이라도 살아 나올 듯 생생한 것이 명공의 솜씨다.

“죽어도 이만큼 호강하는 것도 복이지.”

적지인살은 횃불에 불을 켜고, 석관 뚜껑을 열었다. 수의를 입고 잠자듯 누워 있는 시신은 여든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잘만 다듬으면…’

적지인살은 한동안 시선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월도를 뽑았다. 노인이라고 하지만 고생 한 점 모르는 얼굴이라 중년인으로 탈바꿈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악…! 슥슥…!

적지인살은 익숙한 솜씨로 얼굴 가죽을 벗겨냈다. 그리고 여분으로 준비해 둘 허벅지 가죽도 벗겨냈다.

“이거면 망양은 벗어날 수 있겠군.”

벗겨낸 얼굴 가죽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리던 적지인살은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눈길을 의식했다.

“너무 잔인하게 느껴지나?”

“아뇨.”

종리추의 대답은 의외로 선선했다.

“인피 만드는 걸 배우고 있었어요.”

소름이 쫙 돋았다.

‘인피 만드는 걸 배우고 있었다고! 이 아이는… 모르겠어. 어떤 놈인지… 내가 짐작하고 있는 종리추가 아닌 것만은 분명해. 아!’

명치끝이 답답하게 꾹 눌려왔다.

“광호!”

적지인살은 아스라이 들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개방도가 왔다!’

머릿속에서 위급을 알리는 경종이 뎅뎅 울렸다.

쉬익!

행동은 생각보다 더 빨랐다. 황급히 철판과 대리석을 끌어내렸다. 석상 밑바닥을 두 손으로 떠받들어 제자리에 옮겨놓았다. 이제는 뚫린 구멍을 메워야 한다. 대리석을 제자리에 틀어 맞추기 시작했다. 들어낼 때는 쉬웠지만 무덤 속에서 밑에서 위로 맞추자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힘을 빼면 공중에 떠 있는 대리석이 떨어질 판이었다.

‘마지막 한 개.’

적지인살은 발 밑에 놓인 대리석을 집을 수 있는 손이 없었다. 두 손은 대리석 네 개를 한쪽으로 밀쳐 내는 데 모두 사용되었다.

“이거 들 힘이 있나?”

‘어린아이… 들 수 없어.’

대리석은 종리추같이 뼈가 가는 아이가 들어 올리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끙!

종리추가 대리석을 들어 올리기 위해 힘을 썼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도저히 들어 올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대리석이 번쩍 들렸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종리추는 대리석을 하나 남은 빈 공간에 끼워 맞추기까지 했다. 적지인살은 믿는 김에 한 번 더 믿기로 했다. 종리추가 대리석을 밀어 넣는 순간 손가락을 빼고 대리석 네 개를 떠받든다. 종리추가 조금이라도 늦장을 부리면 대리석 네 개가 적지인살의 얼굴로 떨어질 판이었다.

“셋 센다. 하나, 둘… 셋!”

끼익…!

대리석이 빈 공간으로 들어가며 작은 울림을 토해냈다. 적지인살이 아무리 정교하게 손을 놀렸다고 해도 한쪽으로 밀치던 힘이 사라지는 순간 이미 고정되었던 대리석은 흔들렸다. 남은 하나의 대리석이 들어설 공간은 그로써 없어졌다. 소리는 종리추가 반강제적으로 대리석을 밀어 넣자, 대리석끼리 마찰을 일으켜 흘러나온 소리였다.

‘이…건! 말도 안 돼! 내공이 없다면 이럴 수 없어!’

기적이 분명한데, 적지인살은 혼란스럽기만 했다.

“철, 철판을 다오.”

종리추가 철판을 들어 올려 한쪽 구석에서부터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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