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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22화


사삭! 사사삭……!

잠자듯 죽어 있는 영혼이 깨어났다.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으면 잡아내지 못했을 미미한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광부는 서두르지 않았다. 시마공을 연마하면 침착성까지 늘어난다. 사람들은 그를 보고 ‘미친 도끼’라고 불렀지만, 이제는 달리 불러야 할 것이다. 무조건 달려드는 광부가 아니니까. 숨 쉴 틈 없이 몰아쳤을 때 승산이 있는가? 과연 공격할 시기인가? 무공은 어느 정도인가? 모든 것을 면밀히 생각한 후에 도끼를 들 만큼 마음의 여유가 생겼으니까.

사삭! 사사삭……!

소리가 무척 경쾌하다. 소리의 주인이 신법을 펼치고 있는 것이라면 굉장히 날렵한 자일 것이다.

사삭! 사사삭……!

소리는 끊임없이 들렸다. 더욱 크고 명확하게. 거리를 추측해 보면 일 장 정도 떨어져 있다.

‘잡을까?’

또다시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소리는 하나밖에 들리지 않으니 한 명이다. 신법이 경쾌하니 고수다. 거리는 무척 가깝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소리로 미루어 적은 아직 자신을 발견하지 못한 듯하다.

‘잡자!’

광부는 결정을 내렸다. 그의 몸은 신속히 반응했다. 시마공을 거둠과 동시에 폭혈공을 운용했다. 폭혈공은 강맹한 진기다. 전신 혈도를 막강한 기운으로 타통시켜 활기를 불러일으킨다. 진기가 강맹하니 피의 흐름이 기운차게 변한다. 내관에서 본신 내공법으로 전환하는 과정이다. 종리추가 시마공과 함께 몸 상태를 최대한 좋은 상태로 이끌기 위해 준비한 내공법이다. 광부의 몸은 활기로 가득 찼다. 손에 들고 있는 벽력사부에도 진기가 고였다. 그와 벽력사부는 촌각 만에 죽음에서 깨어났으며 일체가 되었다. 이것이 시마공에 이은 폭혈공의 장점이다.

귀식대법 같았으면 깨어나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어도 몸을 움직일 수 있는 상태로 쉽게 돌아오지 못했으리라. 귀식대법은 적에게 발각되면 죽을 수밖에 없다. 최상의 은신처에서 두더지처럼 몸을 숨기는 대법이지만 역시 살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쉬익!

광부의 신형이 번개처럼 날아올랐다. 목표는 미리 선정되어 있었다. 시마공을 펼치면서 잡아두었던 소리의 근원지는 시마공을 거두고 폭혈공으로 전신을 일깨우는 가운데도 끊임없이 추적했다.

쒜에엑…..! 퍼억!

벽력사부가 허공을 찢는가 싶더니 곧 살과 뼈를 으스러뜨리는 파육음이 터져 나왔다. 붉은 피가 광부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순간,

‘잘못됐어!’

광부는 위기를 느꼈다. 이렇게 쉽게 당할 적이 아니다. 아니, 그것보다 파육음이 다르다. 손에 전해지는 느낌이 다르다. 광부가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 육감으로 전해진 위험이었다. 광부는 자신이 잘라낸 것을 확인하지도 않고 뒤로 신형을 물렸다. 아주 신속하게, 아주 빠르게.

종리추는 말했다.

“위험을 감지했을 때는 무조건 피해라. 피할 곳이 없더라도 반 발짝이라도 물러서라. 병기와 병기를 맞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무공으로 겨뤄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들더라도 무조건 피해라.”

절체절명의 상황에서까지 문주의 말을 좇을 수는 없다. 문주도 그럴 양으로 한 말은 아니다. 문주는 철저히 암살자를 키우고 있다. 암살자로서 기본적인 행동법을 가르치고 있다.

쒜에엑……!

위기 예감은 현실로 드러났다. 뒤로 물러선 광부의 신형을 쫓아 날카로운 예기가 밀려들었다. 한 군데가 아니다. 동서남북 네 군데서 동시에 밀려들었다.

‘치잇.’

광부는 벽력사부를 들어 올렸지만 날카로운 예기는 벌써 그의 몸에 닿아 있었다.

“광부 사.”

나지막한 음성이 바로 뒤를 이었다.

“알았소! 치사하게 대형까지 나서다니.”

“후후. 치사하다니, 그 무슨 섭섭한 말씀. 광부, 솔직히 말해 봐. 그쪽에서는 대야가 나서지 않았나?”

광부의 등 뒤에서 말을 던진 사람은 그들의 대형 유구였다. 그에게 병장기를 쏘아온 사람은 유구를 비롯하여 구류검수, 후사도, 혼세천왕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혈영신마와 유회. 그들도 같이 공격해 왔어야 하는데.

“어? 혈영신마와 유회 형님이 보이지 않네? 아!”

광부는 무엇인가 생각난 듯 손바닥으로 이마를 툭 쳤다.

“같이 움직일 때는 동시에 나서는 일을 삼가라. 일부는 살공을 펼치고 일부는 엄호를 해줘야 한다. 목표가 미끼라면 공격하는 쪽이 급습을 받는다.”

‘우리는 개별적으로 움직였는데 대형은 같이 움직이고 있어. 쳇! 각개격파 당하겠군. 진 싸움이야.’

대야 모진아는 왜 각자 행동하자고 했을까?

광부는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죽은 사람이 취하는 행동이다. 그는 싸움이 모두 끝날 때까지 자신이 죽은 위치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옛날, 백전을 수련할 때부터 지켜온 행동이다. 그런데 숨어 있어야 할 혈영신마와 유회가 불쑥 일어섰다. 그들의 표정은 곤혹스러움으로 가득했다.

“기습이다! 피했다!”

유구가 사태를 짐작하고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구류검수의 가랑이 사이로 작은 비수가 불쑥 솟구쳤다. 유구의 두 다리가 방절편으로 칭칭 감겼다. 모두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떠오를 때 혈영신마의 등 뒤에서 작고 볼품없는 사람이 불쑥 일어났다.

모진아다. 그가 말했다.

“광부, 너무 성급했어. 소리의 종류를 잘 파악했어야지. 바보 같으니라고! 사람 소리하고 여우 소리하고도 구분하지 못하나!”

광부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무엇인가 깨달았다.

“대야! 그럼 내가 미끼……? 이, 이런!”

“이런이고 저런이고 넌 죽은 귀신이야!”

모진아의 표정은 사나웠다.

유구 쪽에서는 여우를 잡아 입에 재갈을 물려 소리를 죽였다. 여우 몸뚱이에 끈을 묶어 행동을 제약했다. 그리고 사람 대신 여우를 앞세워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여우는 시마공을 깨기 위한 미끼다. 광부가 시마공을 펼친 이상 그 누구도 광부의 종적을 발견할 수 없었고, 광부 스스로 움직이도록 만들어야 한다.

광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실정이라면 자신은 이미 죽은 시신이 되어 있을 것이기에.

-공격할 때는 사둔보로.

사둔보는 시마공처럼 기척을 죽이는 데 초점을 맞춘 신법이다. 일둔보는 자연 속에 숨는다. 땅속에, 나무 뒤에, 바위 뒤에, 물속에… 내가 자연 속에 숨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나를 흡수하게 만든다. 자연의 성질을 정확히 꿰뚫는 지식을 익혀야 한다.

이둔보는 그림자 속에 숨는다. 세상은 밝음과 어둠이 있다. 낮과 밤의 구분은 물론이고 대낮에도 어둠은 존재한다. 밝음 속에서 어둠을 찾는 것이 이둔보다. 주마간산 격으로 흘겨본 지형지물에서도 밝음과 어둠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주변에서 흔히 보는 – 너무 흔해서 무심히 지나치는 물건들 – 풍경들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과정이다.

삼둔보는 소리를 죽인다. 소리는 물체와 물체가 부딪쳤을 때 흘러나온다. 인간의 발과 땅이 부딪쳤을 때 발자국 소리가 나오며, 바람과 옷이 부딪쳤을 때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소리를 완전히 죽일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의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심할 수는 있다. 조심성이 몸에 배어야 한다. 무심히 길을 걸을 때도 몸에 배인 조심성이 우러나와야 한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도 옆에 사람이 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소리를 죽여야 한다.

사둔보는 기척을 죽인다. 운기로 호흡을 길고 얕게 한다.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기운을 안으로 갈무리한다. 사둔보는 시마공의 변형이다. 시마공처럼 내관에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본신 내공을 운용하되 인위적으로 운용하지 않고 스스로 흐르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종리추는 일반 내공법에 금종수의 무리를 심었다. 중단, 마음의 밭을 단단히 지키면 고요한 평원에 바람이 불 듯 진기가 흐른다. 내관법에 의한 육체 본연의 진기가 아니라 하단전에서 끌어올린 내공이 바람처럼 흐르게 된다.

사둔보 역시 시마공처럼 큰 위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 시마공이 은신하는 내공법에 불과하다면 사둔보는 이동하는 내공법일 뿐이다. 사둔보는 종적이 발각되지 않았을 때, 시간이 넉넉할 때만 사용할 수 있다. 하지만 사둔보를 완벽하게 수련하면 초일류 고수의 이목도 속이고 근접할 수 있다. 시마공의 방패라면 사둔보는 창이다.

살문 살수들에게 대야, 큰 어른이 된 모진아는 유구와 유회 등도 나무랐다.

“네놈들은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겨우 한 놈 죽이자고 우르르 몰려나가다니! 광부를 죽이는 데는 한 명이면 족했어! 나머지는 뒤를 봤어야지! 정신머리 없는 놈들… 쯧!”

모진아의 질책에는 무공으로 모진아와 동수를 이룬 혈영신마도 고개를 숙이고 들었다. 무공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살수로서 싸우는 것이고, 두말할 여지없이 지고 말았다. 무공이 아무리 높은들 무엇하랴. 암습으로 찔러 오는 검도 육신을 저미기에 충분한 살검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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