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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26화


섬서성의 성도는 서안이다.

황하강 중류 지역에 위치하며 주 진 한 시대부터 수 당에 이르기까지 역대 국도로서 발전을 거듭했다. 서안에는 많은 명승지와 유적들이 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서안으로 밀려들었다가 빠져나간다. 사는 형편은 부유한 편이라서 상점 하나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도 타지방에 가면 천석꾼 행세를 하며 살 수 있다. 벽리군은 서안으로 들어섰다. 한 가지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이고, 다른 한 가지는 고집불통 늙은이를 회유하는 일이다. 어느 것 한가지 쉽지 않다.

벽리군을 노리는 사람은 많다. 중원 곳곳에 죽음의 칼이 도사리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그녀를 노리는 죽음의 칼과 살문은 하등 상관이 없다. 중원 무인들은 그녀를 대면하고도 살문에 몸담고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못한다. 우선 그녀를 아는 사람은 없다.

벽리군은 살문 식솔이 된 다음 무림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다.

‘살문 총관이 여인이다’, ‘과거에 하오문 개봉 기문 향주였다’ 등 여타의 정보들은 널리 퍼졌지만 벽리군의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은 흔치 않다.

개봉에서는 널리 알려진 얼굴이지만 서안에서는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다. 살문과 연관되어 죽을 위험은 희박하다. 그녀를 노리는 칼은 하오문에 도사리고 있다. 개봉 만주 천은탁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음 앞에 노출되었다. 전임 하오문주의 복위에 동참한 하오문 고수들은 모두 같은 입장이다. 누구에게나 따르는 사람이 있다.

비록 밀려나 목숨을 다한 사람이지만 반란을 일으키고 하오문주라는 직위를 차지했던 사람에게는 추종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고, 틈을 보이면 여지없이 칼을 들이댈 것이다.

비록 하오문을 떠나 살문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고 해도.

벽리군은 그런 사정을 알면서도 홀홀단신 하오문을 들어섰다.

‘일을 빨리 끝내야 되는데……’

벽리군은 주위를 세심하게 살피며 부유가 넘쳐흐르는 지상 거리를 걸었다.

종이 장사는 가격의 등락이 심하지만 장사꾼들이 독점하고 있는 관제로 이윤은 상당한 편이다. 벽리군은 종이 더미에 묻힌 기분이 들었다.

좌우로 종이를 파는 상점들이 모여 있는 골목이라고 해서 거리 이름도 ‘지상’이겠는가. 그러나 거리 풍경은 의외로 조용했다.

종이를 찾는 손님은 한정되어 있다. 농사나 짓는 농사꾼이 종이를 사는 일은 없다. 사람이 죽으면 여비로 건네주는 지전도 종이고, 지전이라도 팔면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릴지도 모르지만 지전은 지상에서는 순수한 종이 이외에는 취급하지 않는다. 간혹 지전을 찾는 손님들이 있지만 점주는 거만한 눈으로 장례 용품을 찾아가라고 말할 뿐이다.

종이 장사꾼은 나름대로 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들과 거래하는 사람들이 주로 선비들이기 때문에. 그런 여유로 상점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호객 행위 따위는 눈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다. 당연히 상점은 많아도 한적할 수밖에 없다. 벽리군은 많은 상점 중에서도 유난히 깨끗하고 점원도 세 명이나 되는 상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종이를 파는 상점에 점원이 세 명이나 된다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그들의 인력을 사용할 만큼 거래가 많지도 않다. 그래서 대부분의 종이 상점들은 점원을 두지 않는다. 벽리군이 걸음을 멈춘 상점은 다른 상점보다 크기는 배나 크고 종이도 가득 쌓여 있지만 한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일행인 듯한 선비 두어 명이 점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고작이다. 다른 점원 두 명은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으며 점주인 듯한 사람은 꾸벅꾸벅 졸고 있다.

“흠!”

벽리군이 헛기침을 했을 때야 잡담을 나누던 점원 중 한 명이 일어나 다가왔다. 점주는 낮잠이 깊이 들었는지 고개를 연신 꾸벅거린다.

“손님, 찾으시는 종이라도 있으신지요?”

말은 공손했지만 태도는 공손하지 않았다.

한참 재미있게 이야기를 나누는데 웬 귀찮은 손님이냐는 투였다.

“황지 있어요?”

“황지야 많습니다만 어떤 황지를 찾으시는지.”

“광동성 여동현에서 만든 황지요.”

“…….”

점원의 눈빛이 바뀌었다.

점원은 별 촌스러운 사람을 다 봤다는 듯 비웃음을 떠올렸지만 두 눈은 재빨리 상점 주변을 훑었다. 상점에 있던 선비들도 이상한 주문에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봤다. 광동성 여동현은 유명한 종이 산지다. 여동현의 종이는 먹이 번지지 않기로 유명해서 찾는 사람이 특히 많다. 하지만 이 여자 손님처럼 ‘광동성 여동현에서 만든 황지’를 찾지는 않는다. 그냥 ‘여동 황지’라고만 해도 모두 알아 듣고, 그렇게 찾는다.

“화조도를 배우려고 하는데 광동성 여동현에서 나는 황지에 그려야 된다고 해서요.” 선비들이 고개를 돌렸다.

글을 알지도 못하고 그림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무턱대고 좋은 종이만 찾는다. 특히 동전 몇 닢에 몸을 파는 창기나 기녀들이 어울리지 않는 짓거리를 종종 한다. “여동 황지는 비싼데…… 알고 있죠?”

“네.”

“얼마치나 드릴까요?”

“아홉 냥 다섯 푼 어치요.”

선비들이 다시 고개를 돌려 힐끔 쳐다봤다.

아홉 냥 다섯 푼 …… 그렇게 주문하는 경우도 있던가?

“제가 가진 돈이 그 것 밖에 없어서요.”

이어지는 벽리군의 말에 선비들은 기어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선비들이 돌아가자마자 상점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점원들은 이런 일에 매우 익숙하다. 선비를 접대하던 점원이 배웅하는 척하며 상점 밖으로 나가 주위 동정을 살폈다. 벽리군을 맞이하던 점원과 아직까지 잡담을 나누던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던 점원은 슬그머니 뒤쪽으로 물러섰다. 그들은 그냥 물러선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간 곳은 종이에 가려 상점 밖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작은 막대기들이 꽂혀 있었다. 점원들은 막대기를 잡고 언제든지 잡아당길 만반의 준비를 했다.

꾸벅꾸벅 졸던 점주가 눈을 떴다. 두 눈에서 불 같은 신광이 뻗어 나와 상점 주변을 살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안으로 드시죠. 기다리고 계십니다.”

살문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남은 재산도 없고 돈이 없으니 막대한 정보를 물어다 주던 외장도 유지가 곤란해졌다. 살문의 정보는 돈을 주고 사는 정보다.

돈을 주지 않는데도 살문에 정보를 물어줄 사람은 십여 명에 불과하다.

그들 십여 명이 벽리군 앞에 앉아 있다.

“하오문으로 돌아가실 분은 돌아가도 좋아요. 문주님의 뜻이에요.”

“…….”

모두 고개만 숙인 채 말을 하지 않았다.

당금 살문은 누가 봐도 어렵다. 중원 무인들 전부가 공적으로 치부하고 있으며 살문과 연관 있다는 소문만 들려도 무인들이 한 무더기나 달려드는 형편이다. 활동 자금도 넉넉지 않다. 이들 십여 명은 각기 십여 명의 수족을 거느리고 있지만 그들에게 동전 한 닢 건네주지 못하고 있다.

수족들은 또 어떤가? 그들에게도 또 십여 명의 수하들이 있고, 그 밑에는……

“문주님께서 정녕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섭섭하군요.” 완연한 팔자 눈썹을 지녀 순한 인상을 풍기는 등천조다. 개봉 망주 천은탁은 정말 수족으로 쓰기에는 아까운 사람들은 보내줬다. 그중 한 명이 남오였고, 또 한 명은 진무동이다. 그리고 등천조까지 보내줬다. 살문은 이들이 있었기에 정보를 세밀하게 피할 수 있었고 싸움 준비를 했다.

살행에 나갈 때도 안심하고 나갈 수 있었다. 남오가 죽었다. 진무동이 죽었다. 명주 천은탁이 보내온 사람 중 살아남은 사람은 등천조 뿐이다.

살문 살수들은 비록 악행이나마 명성이 높아졌다.

하지만 이들은 아직도 음지에 머물고 있으며 죽는 순간까지도 살문과의 관계를 부인해야 하는 입장이다. 남오처럼, 진무동이 그랬던 것처럼.

등천조가 말을 꺼냈는데도 다른 사람들은 침묵을 지켰다.

그들은 모두 하오문에서 온 사람들이다. 하오문의 문규는 특이해서 위로 올라갈수록 엄격하다. 잡다한 신분에 다양한 인간들, 무인이 아닌 문도가 더 많은 하오문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문규다.

이제 갓 입문한 문도는 문규라는 것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하지만 무공을 배우고 하오문에서 바라는 것을 행하다 보면 점점 엄격해지는 문규를 알게 된다. 비로소 받아들인다. 문규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만 요구하는 곳이 하오문이다. 또 그만큼 비밀을 공유하는 폭도 제한된다.

지상에 모인 사람들은 하오문을 떠나 살문 문도가 되었지만 실제로 살문에 적을 둔 적은 없다. 그들은 살문을 위해서 일하지만 문주의 얼굴조차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존경하는 사람은 등천조이며, 벽리군이다.

그들은 아직도 하오문도다. 등천조와 벽리군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자신들이 끼어들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문주님의 뜻은 알지만……”

“내 말을 들어요.”

벽리군은 이들을 잡고 싶다. 이들이 계속 머물러 살문의 힘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살문은 너무 곤궁하다. 앞으로 잘된다는 보장도 없다. 종리추가 사무령을 택한 이상 지옥을 걸어가는 것보다 험한 가시밭길을 걷게 될 게다. 사랑하는 님, 종리추…… 그가 생각한 바를 말해줄 필요가 있다. “등천조.”

“말해보세요.”

“외장을 맡아왔으니 사정을 잘 알 거예요. 현재 살문은 청부도 제대로 받지 못해요. 있는 돈은 모두 썼고…… 가진 게 없어요. 팔부령 싸움은 소문으로 들어서 이미……”

“알고 있어요, 살문이 곤궁한 것도, 팔부령 싸움도 모두 알고 있어요. 하지만 이 생각은 해보셨는지 모르겠네요. 우리가 하오문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면 문주님께서 받아주실까요?”

“그건 망주님께 말씀드려서……”

“알면서 그러시는 거예요. 정말 모르시는 거예요?”

“…….”

벽리군은 입을 다물었다.

하오문주 일수혈…… 종리추의 힘을 빌어 폭멸살도를 제거하고 문주직을 되찾은 불세출의 기재.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는 하오문주도 자신에게 힘을 빌려준 살문을 등져야만 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하오문주에게 십망이 떨어졌을 게다. 하오문주는 살문과의 관계를 철저하게 끊었다. 살문과 교류하는 하오문도는 파문하겠다는 엄명도 내렸다. 그러나…… 살문에 머물고 있던 사람은 그대로 두었다. 하오문으로 복귀시키는 것이 순리인데 그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벽을 쌓기는 하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어했다.

등천조는 그런 하오문주의 마음을 알고 있다.

충심을 다해 살문주를 보좌하는 것이 하오문주에 대한 충성이라는 것을.

하오문주 일수혈은 자신을 복위시켜 준 살문주를 도울 수 없다.

살문주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등천조뿐이다. 그것이 하오문주의 보답을 대신 갚는 길이다. 목숨을 바쳐서. “정말 문주님은 이해할 수 없는 분이야. 사무령이 되시겠다는 분이 정이 너무 많아. 난 여태껏 마두라면 인정사정없는 줄 알았는데, 문주님 마두 맞아?” 등천조가 농담조로 말했다.

벽리군은 남몰래 가슴을 쓸어 내렸다. ‘역시 떠날 사람들이 아냐.’

예상은 했지만 역시 종리추의 배려를 받아들일 사람들이 아니다.

사실 종리추는 이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들이 없다면 살문은 눈과 귀가 닫힌 장님에 귀머거리 신세가 된다. “그들이 필요해요.”

“강요할 수는 없어.”

“돈을 바라고 살문에 들어온 사람들이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바라는 것도 없잖아.”

“여기 있는 살수들이 바라는 것이 있어서 남아있는 줄 알아요?”

“숙원은 있지. 나는 그걸 풀어줄 의무가 있고, 난 믿어, 죽은 사람들이 편히 눈 감았을 거라고.

왜 그런 줄 알아? 비록 살아생전에는 원을 이루지 못했지만 내가 반드시 풀어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야.”

“그들도 믿어요.”

“…”

“장부께서 하후가주를 복위시킨 은혜는 하늘보다도 커요. 그 사람들 마음을 정말 모르겠어요? 또 보내면 어떡할 건데요? 외장은 필요하니 다른 사람을 구해야 될 것 아니에요. 등천조만한 사람을 쉽게 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왜 그런 일을 해요?”

장부……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부르기 시작한 호칭. 벽리군은 종리추를 남편으로 의지한다. 종리추도 벽리군을 아내로 생각한다.

비록 합방을 하지는 않았지만 서로의 의식은 서로를 보살펴 주고 있다.

벽리군은 해가 지날수록 종리추와의 나이 차가 줄어드는 것이 좋았다. 근본적인 나이 차이야 줄어들 리 없지만, 거의 배에 가깝던 나이 차가 조금씩 좁혀지고 있으니 나이를 먹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요상한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렇게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으면서도 중대한 일은 종리추에게 의지하게 된다. 전에는 혼자만의 결단으로 해결했던 문제도 종리추와 상의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사내는 든든한 존재다.

기루에 있을 때는 귀찮은 존재들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눈으로 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 일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막고 싶었다. 그들을 떠나보내서는 절대 안 되기 때문에. “가서 말해. 난 하후가주에게 빚이 있었어. 가주를 복위시킨 것은 내 빚을 갚은 거야. 거기에 은혜는 없어. 설혹 있다 해도 남오와 진무동으로 충분해. 그만 하면 충분히 희생을 치렀어.” 벽리군은 종리추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종리추는 등천조에게 줄 것이 없다. 살문 살수들은 한솥밥을 먹는 사람들이니 죽어도 같이 죽지만 외장 문도는 하오문 사람들이다.

돌려주려는 게다. 종리추에게는 살문 문도만이 필요한 게다.

역시 유구의 죽음이 큰 충격을 주었다. 노예라고는 하지만 유구는 친형과 같은 존재였다. 누구 한 사람 소중하지 않은 사람 없고, 그들이 죽을 때마다 가슴 아파한다. 이렇게 치열한 싸움 속에서 줄 것이 없는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잡고 있다는 게 마음 걸리는 게다.

“가서 말해 볼게요. 어차피 외장도 수습해야 하니까. 하지만 그들이 떠나지 않는다면 저도 어쩔 수 없어요.”

‘그래서 장부의 마음이 편해진다면 얼마든지 말할게요.’

외장 수습. 상당히 곤란한 일이다. 등천조의 조직은 아직도 건재하다.

“팔부령에서 생사도박을 벌이고 있으니 좋은 핑곗거리지. 지금은 팔부령 싸움이 급하다. 여기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렇게 말하며 외장과 연관 있는 사람들이 흩어지지 않게 다독거려 왔다.

지금이라도 당장 정보를 가져오라고 하면 책상이 수북하도록 정보를 물어올 게다. 물론 그에 따른 돈을 지불해 줘야 하지만. 등천조가 관리하는 조직은 두 단계 밑으로 내려가면 살문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서 조직력을 기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시간이 지날수록 정보를 수집해 팔아먹어야겠다는 생각도 희박해진다.

빨리 가동시켜야 하는데 돈이 없다. 등천조는 자신의 재주를 써먹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그래도 개봉에서는 가장 빠른 손을 지닌 도수였지 않은가. 하지만 하오문도도 아니면서 그들의 영역을 침범할 수는 없다.

그것은 자신이 몸담았던 문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결국 등천조는 굶주림을 택했다.

“두 가지만 약조해 줘요. 하나는 하오문과 연을 끊고 살문 문도가 되어달라는 거예요. 완전한 살문 문도. 하오문주 일수혈을 암살하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하겠다고요.” 모두 놀란 눈을 했다. 벽리군은 하오문 향주였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이런 말까지 나오다니! “총…관, 만약 총관이 그런 명령을 받는다면……”

“죽일 거예요. 하오문주를.”

“…”

“또 한 가지 약조는 뭡니까?”

“살문이 멸문하게 되면 복수해 줘요.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완전한 살문도가 되어 달라는 말이다.

과거를 깨끗이 잊고 살문만을 위해서 살아 달라는 거다.

신과 다름없는 하오문주 일수혈의 암살까지 각오하고.

이런 일에 거짓 약조는 할 수 없다. 할 수도 있겠지만 등천조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아니, 하오문주 일수혈의 이름 앞에 거짓 죽음을 놓을 수 없다.

그렇다고 살문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무공을 주는 것도 아니다. 명예와 부귀를 주는 것도 아니다. 살문은 끝없이 요구하면서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총관, 하나만 묻겠습니다.”

“…….”

“문주께서 사무령이 될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

“…….”

“총관.”

“일…할이요. 아니, 그것보다 적어요.”

“풋! 그럼 모두 죽는다는 거네.”

“그럴 거예요.”

“총관, 제가 외장을 관리했다는 걸 잊었습니까?”

“…”

“저는 많은 정보를 듣습니다. 팔부령 싸움이 시작되기 전에 문주께서 사무령이 될 가능성은 일 푼도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팔부령 싸움이 끝난 지금 사무령이 될 가능성은 사 할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정말 섭섭하게 하오문에 대해서는 다 잊어버렸군요.”

“아!”

벽리군은 등천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챘다.

하오문에는 도문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도문에는 도군들이 있고, 하오문 도군들은 내기를 좋아한다. 내기판에서 하오문 도군들의 승률 예측은 정확하기로 소문나 있다. 하오문의 방대한 정보를 활용하여 승률을 예측한 것이니 정확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종리추를 사 할 높이로 올려놨다.

벽리군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대단한 승률이다.

“총관이 말한 약조를 따르죠. 두 가지 다 약조 드립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사무령의 탄생을 보고 싶기 때문이에요. 구파일방의 제약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문파의 모습을. 하하! 어떤 문파가 될지 기대되네요.”

‘됐어. 이제 외장은 수습됐어. 돈만 해결하면 돼. 돈만…….’

벽리군은 지금 이 자리에 종리추가 없는 게 아쉬웠다. 그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아할까. 얼마나 마음 든든해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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