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27화
살문의 정보력이 마비 상태라고 하지만 ‘서호평’이라는 장인을 찾는 데는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외장에서 거둬들인 정보는 추측할 수 없을 만큼 양이 많다. 일부는 벽리군에게 보고되었지만 무림 동향과는 관계없고, 벽리군이 요구하지 않은 정보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요즘 같이 일이 없을 때 등천조는 지난 정보들 중 앞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정보들을 추렸다. 그중 하나가 인맥이다. 어느 지방 어디에 누가 살며, 가족 관계, 친척, 교류하는 사람들, 바람피우는 상대까지…… 수집된 모든 것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사내, 재작년 가을에서 겨울 사이에 서안에 들어온 사람. 나이는 환갑이 넘은 정도. 홀몸이나 가족을 거느리고 있을 가능성도 있음. 초저녁에 잠드는 습관이 있지만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음. 서호평에 대한 정보는 많았다.
그만 하면 아주 쉽게 찾을 수 있는 정보였지만 서호평은 모든 걸 바꾸고도 남았다. 실제로 그는 많은 것을 바꿨다. 벽리군은 환갑이 넘었다고 했지만 머리를 염색해서 환갑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초저녁에 잠드는 버릇이 있다고 했지만 예상대로 바뀌었다. 그는 해시정(밤 10시)이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벽리군이 준 정보 중 맞는 것은 사내이고 재작년 초겨울에 서안에 들어왔으며 아직 홀몸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발걸음에는 교태가 넘쳐흐른다.
기루에 있을 때는 좋아 보였고, 발걸음 하나에 사내의 애간장을 녹이려고 노력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모든 걸 버리려고 한다.
“네 걸음은 이상해. 꼭 그렇게 엉덩이를 흔들면서 걸어야 해? 손도 그래. 그냥 자연스럽게 휘저으면 안 돼? 꼭 사내를 홀리려고 그러는 것 같아. 명심해. 상공을 배신하면 내가 널 죽일 거야.” 어린이의 말은 충격이었다.
그녀는 어린에게 그 말을 들을 때까지 자신에게 기루에서의 습관이 남아 있는 줄은 몰랐다. 아니, 자신의 행동거지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언니. 어린은 언니다. 언니라고 부르고 있다. 자신보다 정말 배는 어린 소녀에게 언니라고 부른다. ‘풋!’ 벽리군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린은 홍리족이면서도 암연족의 풍습을 따른다. 여인에 한해서 중원 풍습이 홍리족보다는 암연족과 비슷한 데가 많기 때문이다.
일부다처제 홍리족은 사내가 죽으면 따라 죽지 않는다. 죽은 사내는 많은 남편들 중에 한 명일 뿐이다. 어린을 사모하는 비부…..
그는 어린만 생각하고 남만에서 풍습이 다른 중원까지 쫓아왔다.
그런데 정작 어린은 홍리족 풍습을 버리고 암연족 풍습을 따르고 있으니.
그런 모든 것이 벽리군을 즐겁게, 우습게 했다.
종리추와의 관계도 그렇다. 종리추와 잠자리를 같이 하기 위해서는 어린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옛날 천부에서처럼. 어린은 십 일에 한 번씩 잠자리를 내어 줬고, 종리추가 들어왔지만 육체적 관계를 맺진 못했다.
‘아직은… 마음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천하의 종리추라도 그런 면에는 숙맥이다.”
“걱정 마요. 이렇게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요. 마음이 허락할 때 안아줘요.”
‘수많은 사내를 접했던 여자…… 이런 나를 받아준 것만도.’
종리추가 정조 문제를 따지는 사내는 아니다. 암연족, 홍리족…… 어느 부족도 그런 점을 따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종리추는 그 부족의 혈행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가 망설이는 이유는 살문의 장래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들. 그래서 인연의 끈을 될 수 있는 대로 적게 맺으려 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벽리군만은 알 수 있다.
같은 방에 있을 때, 문득문득 종리추의 두 눈에서 뜨거운 열기를 엿볼 수 있으니까. 종리추가 어디에 정신을 쏟고 있는지 너무 잘 아니까 아마도…. 그 때부터 장부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벽리군은 종리추에게 맞는 여인이 되기 위해 기녀 생활을 하며 익혔던 모든 습관을 버리기로 했다. 너무 오래 길들여졌던 습관이라 쉽게 없앨 수는 없지만.
‘저기군.’ 벽리군은 등천조가 일러준 버드나무 집을 찾아냈다.
탕! 탕! 탕……! 쇠를 두들기는 소리가 한밤을 울렸다. 주변에 인가가 없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잠 좀 자자고 핀잔 깨나 들었을 게다.
문이 활짝 열려 있는 가운데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빛이 보였다.
덩치 건장한 사내가 웃통을 벗어 던지고 쇠를 두들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벽리군은 안으로 들어섰다.
“밤에는 장사 안 하니 돌아가시오.”
건장한 사내는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탕! 탕! 탕……!
사내가 쇠망치를 휘두를 때마다 붉게 달군 쇠에서 불똥이 튀었다.
“살문주가 보내서 왔는데, 돌아갈까요?”
사내의 손이 허공에 들린 채 우뚝 멈춰 섰다. 그러다 망치로 붉게 달궈진 쇠를 내려쳤다.
탕!
쇳소리와 함께 아름다운 불똥이 사방으로 날았다.
“앉아!”
건장한 사내가 돌아섰다.
근육으로 뭉쳐진 상체, 칠흑 같은 머리, 그러나 얼굴은 검게 그을리기는 했지만 노안이었다.
“벽 총관이군.”
“많이 늙으셨군요.”
“늙기는…… 햇볕에 그을려서 그렇지 보기 좋지 않아?”
사내는 투박하지만 정감 있는 어조로 대했다.
“얼마 만이죠? 이 년이 훌쩍 넘었죠?”
“아마 그쯤 되지? 살문이 멸문하기 전이니까. 그래, 살문주는 잘 있고?”
“염려해 주신 덕분에요.”
“하하하! 통쾌해. 일 낼 줄 알았지.”
사내는 호로병을 들어 꿀꺽꿀꺽 마셨다.
진한 주향이 향긋하게 배어 나왔다.
‘화주.’
벽리군은 술 냄새만으로도 술의 종류를 알 수 있다. 또한 사내가 무슨 술을 즐겨 마시냐에 따라 현재의 마음 상태며 마음도 읽을 수 있다.
“한잔하겠나?”
“아뇨, 술은 한 사람하고만 마셔요.”
사내가 기묘한 눈으로 쳐다봤다.
“소원을 이뤘나 보군.”
“아직은요. 하지만 마음은 얻었죠.”
“하하하! 좋군, 좋아, 모두 잘됐군.”
“…”
“…”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벽리군은 입술이 탔다. 말을 꺼내야겠는데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사내의 행동으로 보아서는 찾아온 목적을 짐작하는 것 같은데 먼저 입을 열지 않고. ‘망설인다고 되는 것도 아니니…’
“살천문주님.” 그녀가 찾아온 사람은 살천문주다.
멸문한 살천문의 문주, 수하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목숨까지 위태로운 비운의 문주. “허허허! 새삼스럽게 옛날 이야기는… 이제는 그저 농기구나 다루는 대장장이일세.”
“돈 좀 빌려주세요.”
“허허! 대장장이가 무슨 돈이 있다고…”
정말이다. 살천문주는 맨몸 하나밖에 없다. 스무 곳이나 되던 그의 은신처는 그를 도려낸 후임 살천문주, 비운적검이 모두 빼앗았다. 스무 곳에 있던 처와 자식들도 모두 도륙당했다. 그는 세상에 남은 것이 없다.
무림에 회의를 느낀 살천문주는 종리추가 마련해 준 비밀 은신처도 버렸다. 하오문주와의 인연도 정리했고… 무림을 떠나 대장장이가 되었다.
중원을 떠돌다 서안에 자리를 잡은 게 재작년 초겨울.
은신처를 떠나서 근 반년이나 떠돌다 정착했다. 그 동안 살천문과 상문이 멸문한 소식도 들었을 테고, 살문의 재등장, 그리고 팔부령 싸움도 귀동냥으로나마 들었을 게다. 그는 무림을 떠나고 싶어한다. 하지만 종리추의 생각은 달랐다.
“한이 많은 사람은 쉽게 무림을 떠나지 못해. 혼자 일어설 엄두가 안 날 뿐이지. 살천문주에게 살문의 명줄을 걸어볼까?”
벽리군은 고집불통 늙은이인 살천문주를 회유해야 한다.
그러나 당장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엉뚱한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숨겨놓은 재산이 어마어마하다던데요? 그러지 마시고 좀 빌려주세요. 이자는 넉넉하게 셈해 드릴게요.”
“살문주가…… 이 늙은이를 원했나?”
벽리군은 긴장했다.
“네.”
“…”
살천문주는 다시 호로병을 들어 화주를 들이켰다.
신분을 속이고자 이름도 개명했다. 하얀 백발도 칠흑같이 염색했다.
‘이번만은 잘못 보신 것 같은데…’
종리추의 혜안을 믿지만 아무래도 이번만은 잘못 생각한 것 같다.
그녀가 보기에 살천문주는 무림에 뜻이 없어 보인다.
또 뜻이 있다고 해도 그렇다.
종리추는 살천문주를 끌어들여 어디에 쓰려는 것일까?
살문에는 살천문주의 무공을 능가하는 고수가 많다. 무공으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무공도 재력도 필요 없다면 남은 것은 경륜이다. 하지만 살천문주의 경륜 정도를 얻으려면 다른 길도 많다.
왜? 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살문의 명줄까지 건다고 했으니 반드시 가담시켜야 하는데.
“총관 생각에도 이 늙은이가 필요한가?”
“아뇨. 솔직히 전 문주님의 뜻을 모르겠어요. 왜 살천문주님께 가보라고 하셨는지.” 벽리군은 솔직히 대답했다.
“문주가 뭐라면서 가보라고 했는가?”
“살문의 명줄을 건다고요.”
“명줄을 건다? 하하하! 하하하하! 그렇군. 그래 하하하하!” 살천문주는 한참 동안 웃었다.
“아직도 팔부령 대래봉에 있나?”
“네, 총단이니까요.”
“백팔나한과 육십칠단승이 포위하고 있다던데?”
“맞아요.”
“총관이 빠져나온 걸 보면 구멍이 생겼군.”
“백칠십오 명으로는 팔부령 전체를 감쌀 수 없죠.”
“그렇겠지.”
“…”
“먼저 돌아가시게.”
“그럼…?”
“문주의 뜻을 알겠으니 준비를 해봄세. 가능하면 찾아갈 것이고. 불가능하면 여기 머물 걸세. 찾아가지 않아도 다시는 찾아오지 말게.” 말을 마친 살천문주는 일어서서 다시 망치를 잡았다. 탕! 탕…!
살천문주가 두들기는 쇳덩이는 이미 식어 빨간 불기가 죽은 후였다.
그래도 살천문주는 계속 두들겨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