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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28화


“으앙! 으앙…!”

“거 얘 새끼 좀 울리지 마! 이거야 원, 시끄러워서 살겠나?”

“누군 울리고 싶어서 울리나! 젖 먹고 싶어서 우는 걸 무슨 수로 말려! 흥! 그렇게 유세 떨고 싶으면 가서 나무껍질이라도 벗겨올 것이지 처자식이 굶어 죽는 판에…”

“이놈의 여편네가!”

“왜! 내가 뭘 잘못 말했어? 꼴에 사내라고.”

“이놈의 여편네, 주둥이를 콱 찢어놓고 말지!”

부부가 다투는 소리는 치고 박는 소리로 바뀌었고 곧 무엇인가 집어 던지는 소리가 되었다.

싸움은 곧 끝났다. 일다경도 걸리지 않았다. 여자는 우는 아이를 달랬고, 사내는 호미와 광주리를 지고 먹을 것을 찾아 나섰다.

“빌어먹을! 살문인가 오살할 놈들 때문에…”

사내는 연신 투덜거렸다.

종리추는 바로 곁을 스쳐 지나가며 내뱉는 말을 듣고도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이들이 일궜을 법한 밭은 황폐했다.

싹이 돋고 제각각의 모습대로 자라 있어야 할 곡식들 대신 쓸모없는 잡초만 가득했다.

마을 사람들은 하나같이 굶주려 뼈만 앙상하다.

그러잖아도 춘궁기는 견디기 힘들다.

하물며 산에 불을 놓아 화전을 일구는 사람들에게 봄은 결코 반가운 손님이 아니다. 지난겨울은 어떻게 보냈을지 모르지만 가을이 되어 밭작물을 수확할 때까지는 먹을 것이 없다.

이들은 가을이 되어도 굶주림을 면하기 어려울 게다. 밭에 심어야 할 씨앗까지 모두 먹어 버렸으니.

원래는 이렇게 굶주리지 않을 사람들이다.

산에는 먹을 것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움직이는 동물부터 야생초까지 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먹을 것 투성이다.

약초를 캐서 장에 나가 팔아도 된다.

땅꾼은 뱀을 잡고, 심마니는 삼을 캐고, 엽사는 사냥을 하면 된다.

그것이 살문 때문에 모든 생계가 막혔다.

무림군웅이 팔부령을 에워쌌지만 이들에게 도움을 준 것은 없다.

무림군웅은 오히려 위험하다는 이유로 이들의 행동을 구속했다.

“살문 살수로 오인을 받을 수 있으니 집에만 틀어박혀 있어!”

죽지 않으려면 방구석을 벗어나지 말란 협박이다.

팔부령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당장 먹을 것이 떨어졌어도 창칼이 두려워 나서지 못했다.

군웅들이 물러간 다음 마을 사람들에게 남은 것은 폐허밖에 없다.

조금 평평하다 싶은 곳은 천여 명이 북적거렸으니.

산으로 올라가려고 해도 비적마의인가 하는 개미가 두려워 올라갈 수 없고, 더군다나 사람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살귀들이 산에 박혀 있으니 감히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돈이라도 모아놓은 것이 있다면 마을로 내려갔을 것이다.

조금만 일찍 싸움이 끝났어도 팔부령을 떠나 다른 산으로 옮겨갔을 게다. 그곳에 불을 싸지르고 밭을 일구면 되니까.

씨앗까지 모두 삶아 먹은 다음에야 물러가면 어쩌란 말인가. 살귀들이나 요절 냈으면 몰라도 산에 그대로 두고.

화전민들은 서로서로 머리를 맞댔지만 결론이라고는 다른 산으로 옮겨가는 것뿐이다.

팔부령은 넓다.

살문 살수들이 대래봉에 있으니 대래봉과 먼 산자락으로 옮겨가면 하다못해 토끼라도 잡아먹을 수 있고 약초라도 캘 수 있다. 달리 뾰족한 수가 없다. 살귀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밤에 편히 잠도 자지 못하는 상황인데 무슨 미련이 남았겠는가.

화전민들은 한 명 두 명 짐을 꾸렸다.

일부는 다른 산자락을 찾아서 떠나갔고, 일부는 아직 떠나지 못했다. 남아있는 사람도 하루 이틀 사이에 모두 떠날 게다. 떠나야만 살 수 있으니.

‘이 사람들은 무림에는 관심 없어. 소림사가 어떻고 무당파가 어떻고…… 전혀 관심 없어. 하지만 살문은 다르지. 사람을 죽이는 살귀들이니까. 자신들 목숨하고 직접 관계가 있으니까.’

사내가 떠난 집에서 아이를 잠재운 아낙이 빨랫감을 들고 나왔다. 광주리에 하나 가득 든 것은 아이의 기저귀로 보였다.

종리추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낙에게 걸어갔다.

“밥 좀 얻어먹읍시다.”

아낙이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쳐다봤다.

검을 차고 있는 무인이 달가울 리 없었다. 하지만 종리추의 인상이 그리 나쁘지 않았는지 곧 평소의 무감각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밥? 먹고 죽으려 해도 없수.”

“그럼 풀 죽이라도 한 그릇 주시오. 밥값은 치르겠고. 산에만 있었더니 속이 허해서.”

‘산’이라는 말에 여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사, 산이라면 사, 사, 살… 살문…… 이, 인가 하는……”

“아! 이야기 들었군요. 정말 힘들게 싸워서인지 불기 있는 음식을 먹고 싶군요.”

여인은 사시나무 떨 듯 떨었다.

남편이라도 있었으면,…… 아니다, 남편이 있었으면 틀림없이 죽는다. 이 사람들은 무림의 제일 강하다는 소림 오선사인가 육선사인가 하는 사람들도 죽여 버린 사람들인데, 그들뿐인가, 팔부령에서 죽어간 무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줄초상을 치르게 만들지 않았는가.

“셈은 해줄 테니 야박하게 거절하지 말고 따뜻한 음식 좀 주시오.”

“어, 어, 없어요. 저, 정말이에요. 아, 아무것도 머, 먹을 게 어, 어, 없는데……”

“쯧! 그래서 어떻게 춘궁기를 벗어나려고… 부탁 좀 해도 되겠습니까?”

“예? 예 예.”

“마을에 가서 쌀을 좀 사와 주시겠습니까? 그걸로 밥 좀 지어 주세요. 아시다시피 산을 마음대로 내려갈 입장이 못 돼서.”

“예? 싸, 쌀을요? 아이구! 제발 살려주십시오. 저희는……”

후들후들 다리를 떨며 사정하던 아낙은 종리추가 내민 손을 보고 깜짝 놀랐다.

동전 네 개.

며칠간 먹을 쌀을 사 올 수 있다.

여인은 쉽게 손을 내밀지 못했다. 사내가 그 무서운 살수이니 덥석 돈을 받았다가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안 받을 수도 없고.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올게요. 찬은 신경 쓰지 마시고 따뜻한 밥만 해주시면 됩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한동안 곡기를 입에 대지 못했더니 지금은 밥만 봐도 목구멍에서 손이 나올 지경입니다. 하하!”

종리추는 밝게 웃었다.

팔부령 산속에 틀어박힌 화전민촌의 사정은 거의 비슷했다.

“그것참……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더니만 정말 안됐어요. 그렇게 굶고도 살 수 있는지.”

혼세천왕이 말했다.

“네 인상이 좀 사나운 편인데 겁주지는 않았지?”

모진아가 물었다.

“제 인상을 보고 겁 안 먹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더군다나 여기서 피바람이 한바탕 불었었는데, 주공께서 말씀하신 대로 편한 인상을 주려고 노력은 했습니다만 경계심을 풀지 않더라고요.”

“하하! 그럴 거야. 네놈 인상을 보면 없던 겁도 생기지.”

모진아는 밝았다.

유구도 밝은 표정이다.

그들은 암연족 전사다. 중원에 나와 있지만 뿌리는 암연족에 있다.

역석에 이어 유회의 죽음은 뼈가 부서지는 아픔을 주었다.

유회가 편히 죽은 것도 아니고 십망을 받아 사지육신이 갈가리 찢겨 죽었으니 들끓는 복수심이야 이루 말할 수 없다.

죽음 자체는 슬퍼하지 않는다.

유회는 전신 아부타의 곁으로 갔다.

유회는 전사 중의 전사였으니 아마도 아부타의 총애를 듬뿍 받을 게다. 어쩌면 모진아와 유구가 죽어 아부타의 곁으로 갔을 때 먼저 자리 잡았다고 텃세를 부릴지도 모르지.

정작 슬퍼하고 분노한 사람들은 다른 살수들이다.

“형님, 이 원한……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가서라도 받아내겠소.”

후사도가 이를 갈았다.

“복수는 반드시 해야지. 하지만 유회의 죽음을 슬퍼하지는 마. 편안한 곳으로 갔으니까.”

살수들을 위로한 사람은 오히려 모진아와 유구였다.

다른 살수들은 기가 막혔다. 꼭 정신병자를 대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들도 암연족 전통에 대해서는 들어서 알고 있지만 어쩌면 이렇게 죽음에 대해 담담할 수 있을까. 가식적인 행동이 아니다.

모진아와 유구는 정말로 유회의 죽음을 잊는 듯 밝은 표정이었다.

밝은 표정을 짓는 사람은 그 둘만이 아니다. 어린, 구맥, 비부……

홍리족 사람들도 별로 슬퍼하지 않았다.

슬픔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너무 슬퍼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도록 울었고 보는 사람이 안쓰러울 정도로 비탄에 잠겼다.

그러던 사람들이 며칠 지나서는 오히려 더 밝아졌다.

“내일은 가서 밥들 얻어먹고 와, 맛있게들 먹어.”

종리추가 말했다.

종리추는 같은 시각에 아낙이 사는 집으로 갔다.

“어, 오셨어요?”

아낙이 나와 쭈뼛거리면서 말했다.

사내도 모습을 보였다. 여차하면 싸울 태세다.

집 안 곳곳에, 울타리 뒤에, 부엌 안에 사내들이 숨어 있다. 숨으려면 똑바로 숨을 것이지 약간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어설프게 숨어 있다.

“아! 쌀을 구하셨군요. 밥 짓는 냄새가 구수합니다. 이 냄새가 얼마나 그리웠던지. 아주머니, 뱃가죽이 등에 달라붙겠어요. 설익어도 좋으니 빨리 주십시오.”

종리추는 정말 밥이 먹고 싶은 사람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여인이 부엌에 들어가더니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밥 한 공기를 들고 왔다.

상도 없고, 반찬도 없고, 오로지 이빨 빠진 사발에 담긴 밥 한 공기.

종리추는 밥을 보자마자 확 달려들었다.

남편인 듯한 사내가 깜짝 놀라 몽둥이를 집으려고 했다. 숨어 있던 사내들도 뛰어나오려고 움찔거렸다.

그러나 그들은 뛰어 나오지 않았다. 남편도 몽둥이를 들지 않았다.

그들은 종리추가 허겁지겁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우는 모습에 입을 벌렸다.

그들도 굶주렸지만 이 사람은 정말 굶주린 듯하지 않은가.

종리추는 눈 깜짝할 순간에 밥을 먹어치우고 입맛을 쩍쩍 다셨다.

“그것참, 괜히 밥을 먹었나? 입맛을 버린 것 같네.”

“더, 더, 더 있……어요.”

아낙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들은 종리추가 빨리 밥을 먹어치우고 떠나가기를 바란다. 자신의 남편과 아는 사람들이 해를 당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럴 수는 없죠, 밥을 지어주셨는데…… 그건 드세요. 보아하니 아주머니도 밥을 드신 지 오래된 것 같은데, 이렇게 하면 어떻겠습니까? 내일 한 번 더 수고해 주시면. 아직 허기가 가시지 않아서.”

종리추는 다시 동전 네 닢을 주었다.

“빌어먹을! 가보니까 아무도 없더라니까요. 그것 봐요. 내가 뭐라고 했어요? 괜히 돈만 버린다고 하지 않았어요?”

혼세천왕은 연신 투덜거렸다. 광부도 투덜거렸다. 한 팔이 없는 좌리살검도 투덜거렸다.

그래도 인상이 좀 순해 보이는 사람은 밥을 얻어먹었고, 무섭게 생긴 사람은 바람만 마시고 왔다.

도주한 것이다.

그들은 살문 살수들을 또 만나느니 좀 더 빨리 떠나는 쪽을 택했다.

“됐어. 남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혼세천왕, 내일은 나와 같이 가지. 따뜻한 밥 먹어본 지 오래됐으니 한 끼 정도는 먹어봐야지. 보나마나 간에 기별도 안 가겠지만.”

종리추는 혼세천왕을 데리고 화전민촌을 찾았다.

역시 아낙의 집에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그들은 숨어 있다고 숨어 있지만 종리추나 혼세천왕이 보기에는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다.

“이 친구도 밥을 좀 먹고 싶다고 해서 같이 왔습니다. 괜찮으시다면 두 그릇 부탁합니다.”

“예, 예.”

아낙은 황소 만한 덩치에 사납게 생긴 사내가 딱 버티고 앉아서인지 아예 밥솥을 들고 왔다.

“아, 밥을 많이 하셨군요.”

“…….”

여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화전민촌 사람들이 모두 모여 먹을 밥이다.

내일은 당장 굶어 죽더라도 오늘 생긴 음식은 모두 같이 나눠 먹어야 한다. 그것이 없는 사람들의 인심이다.

종리추와 혼세천왕은 작은 사발을 달라고 해서 딱 한 공기씩만 먹었다.

나머지는 그대로 놓아두고 미련 없이 발길을 돌렸다.

외장을 돌릴 만한 돈은 없지만 화전민촌 사람들에게 밥 한 끼 먹일 돈은 있다.

종리추는 있는 돈 모두를 아낌없이 풀었다.

사람을 번갈아 보내 오늘은 이쪽 화전민촌으로, 내일은 저쪽으로…… 밥을 달라고 하기도 하고 닭을 삶아달라고도 했다. 어떤 날은 돼지 한 마리 잡자고도 했다.

화전민촌 사내들이 갑자기 바빠졌다.

그들은 하루 한 번씩은 이십여 리나 떨어져 있는 마을까지 다녀와야 했다.

“저희는 살수들입니다. 살수가 먹을 거라고 하면 여러분이 피해를 당할 수도 있으니 가급적 마을은 두 번 들르지 마세요.”

“예, 알겠습니다. 염려 놓으세요.”

화전민촌 사람들에게 살문은 더 이상 무서운 살귀들이 아니었다.

살문 살수들은 방구석에만 처박혔던 무림군웅들보다 훨씬 인간적이다. 살문 살수들은 짐승을 잡아오기도 했다.

토끼나 꿩 같은 작은 짐승들을 잡아올 때는 국을 끓여 나눠 먹었고, 곰이라고 잡아오는 날에는 마을 사람 전부가 고기로 배를 채우고도 남았다.

화전민촌은 옛날로 돌아갔다.

사내들은 거리낌 없이 산을 드나들었지만 살문 살수들이 말한 곳은 절대 가지 않았다.

비적마의라는 개미가 있는 곳이니까.

늦었지만 씨앗도 뿌렸다. 모두 살문에서 첫 작물을 준다는 조건으로 내어준 돈 덕분이다.

한량들이 기루에서 하룻밤에 술값으로 버리는 돈이 화전민촌 사람들에게는 일 년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주었다.

“우리는 자주 내려오지 못합니다. 아직 팔부령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여러분이 옛 생활로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드린 것뿐입니다. 이제는 안심하고 농사짓고 사냥하세요. 비적마의가 있는 곳에만 들어가지 말고.”

화전민촌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생각할 수 있는 머리가 있다.

그들은 아마 느끼고 있었다.

등천조에게 외정을 다시 한 번 점검하라는 명을 내렸다. 돈만 준비되면 언제든지 가동할 수 있도록. 살천문주에게서도 희망적인 답변을 들었다.

팔부령으로 들어서는 벽리군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그런데,

‘응?’

벽리군은 무엇인가 바뀐 것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다르다. 떠날 때와 다르다.

황폐하던 밭들이 정갈하게 고랑을 이루고 있다.

밭농사가 시작되었다.

공포에 질려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돈다. 굶주림에 지친 얼굴이 활기에 넘쳐 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갑자기 불안이 엄습했다.

사람들이 평온을 되찾을 때는 주위에 도사리고 있던 위험이 없어졌을 때다.

이 사람들에게 주위의 위험이란 바로 살문이다. 살문이 있기에 공포에 떨었다.

반대로 말하면 살문이 사라졌기에 활기에 넘친다고 할 수 있다.

벽리군은 밭에서 일하고 있는 아낙을 붙잡고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살문이…… 살문이!’

쉬익!

벽리군은 신법을 펼쳤다.

사람들이 보든 말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팔부령에 백팔나한과 육십칠단승이 머물러 있지만 상관없었다.

그녀에게는 살문이라는 존재가 가장 중요했다. 아니, 종리추의 안위가 그녀의 전부였다.

대래봉 정상까지 어떻게 올라왔는지……

벽리군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불안한 느낌이 들어 눈물이 솟구쳤다.

쉬이익……!

한달음에 일 장씩 쭉쭉 나아갔다. 그때,

“어딜, 그렇게 황망히 가지?”

갑자기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이 소리는? 환청이야. 환청이 들리다니…… 흑! 이제는 환청까지……’

“여기서 바람 좀 쐬다 가지. 봄바람이 따뜻한 게 아주 좋군.”

벽리군은 그제야 환청이 아님을 알았다. 귀에 들리는 음성은 너무 또렷했다.

벽리군은 석상처럼 굳어졌다.

안도와 기쁨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무섭도록 치달리던 두 다리도 힘이 빠졌다. 한 걸음도 떼어놓을 수 없었다.

쉬익!

종리추가 날렵하게 내려섰다.

“방금 전에 전서를 받았는데 이렇게 빨리 올라오다니.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벽리군은 갑자기 종리추가 야속했다. 너무나 태연한 모습이 얄미웠다. 그래도 속에 있는 말을 끄집어내지 못했다. 자신의 한마디가 종리추를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

“이런! 옷도 다 찢어지고…… 하하하! 그렇군. 사람들의 표정을 보고 지레짐작했군. 살문에 무슨 일이라도 있나 하고.”

벽리군은 속상한 마음을 감췄다. 모두 무사하고…… 종리추가 무사하고…… 살문이 건재하니 다행이다. 더 바랄 게 없다.

“맡은 일은…… 잘 되었어요. 오곡동에 들어가서 자세히 말씀드릴게요.”

벽리군은 몸을 돌렸다.

정말 어떻게 달려왔는지 모르겠다.

나뭇가지에 옷이 걸려 찢어지는 것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따끔거린다. 신법을 펼치면서 나무에 얼굴이 쓸린 모양이다.

‘혼자 괜히 바보짓을 했어.’

벽리군은 일면 안도하는 마음이 크게 일어나면서도 일면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종리추가 야속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녀의 팔이 단단한 족쇄에 꽉 잡혔다.

그녀의 신형이 돌려세워졌다.

“장부, 들어가서 옷 좀 갈아입…… 흡!”

벽리군은 종리추의 입맞춤에 전신을 내맡겼다.

입맞춤 정도는 과거의 그녀에게는 가벼운 유흥거리도 아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달아, 너무 달아.’

입속으로 파고든 혀가 너무 달았다.

전신이 나른하면서 한없이 기대고 싶어진다. 그러다 문득 종리추에게 누님이 아니라 여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은 언니에게 부탁해야겠어, 잠자리를 양보해 달라고.’

온갖 야속함이 밀물처럼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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