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29화
짹! 째짹……! 산새들의 울음소리가 유난히 맑았다.
벽리군은 살며시 일어나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종리추를 바라봤다. 쳐다만 봐도 행복했다. 숱한 사내와 잠자리를 같이했지만 지금처럼 행복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다. 종리추는 젊은 사내답게 밤새도록 밀어붙였다.
‘미친놈, 그만 좀 하지. 피곤해 죽겠는데……’
전에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번에는 다른 생각을 했다.
‘이 사람이…… 이 사람이…… 내 사람이야.’
사랑이란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온다더니 정말 그렇다.
하오문주를 처음 봤을 때 벽리군은 사랑을 느꼈다. 저런 사내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어도 좋다는 생각을 했다. 첫눈에 반한 사랑이다.
종리추는 첫눈에 반한 사랑이 아니다. 우선 너무 어렸고, 사랑 운운하기에는 너무 냉혹했다. 당시 주점에서 종리추를 처음 봤을 때 머리 속에 자리 잡은 생각은 자칫 잘못하면 여기서 개죽음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뿐이었다. 지금도 종리추를 위해서 목숨을 걸겠다는 생각 같은 건 들지 않는다. 무조건 좋다. 이 사람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줄 수 있다. 세상에 그 어떤 일이라도 서슴없이 행할 수 있다. 이 사내를 위해서라면. 벽리군은 종리추가 깨지 않도록 주의하며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종리추에게 헝클어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부스스한 얼굴, 헝클어진 머리를 보이고 싶지 않다.
동굴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옷을 보자 어젯밤의 격정이 되살아났다. 옷뿐이 아니라 하복부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감촉이 정말 합방을 했다는 실감을 느끼게 했다.
벽리군은 얼굴 붉히며 옷을 주워 들었다. 그런데,
“날이 밝으려면 아직 멀었는데 벌써 일어나는 거야?”
종리추가 등 뒤에서 말을 건네 왔다.
“어멋! 왜 벌써 일어났어요?”
벽리군은 왠지 부끄러웠다. 그가 자신의 알몸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눈 둘 곳이 없었다. 마치 처음 관계를 가졌을 때처럼 가슴이 콩닥거렸다.
“일어나기에는 너무 일러. 이리 와.”
벽리군은 확 잡아끄는 손길에 빨려들 듯 끌려 들어갔다.
소리도 크게 지르지 못했다.
오곡동에는 그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살문 살수들이 모두 있다. 각자 ‘방’이라는 것을 만들었지만 동혈에 벽을 대용할 천을 친 것이 고작이다.
또한 동혈은 소리가 울린다.
간밤에도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억지로 눌러 삼켰는데……
“좀 더 자. 먼 길을 다녀왔는데 피곤하지도 않아?”
종리추의 손은 사내 손답지 않게 부드럽다. 옥으로 깎아 만든 듯 섬세하기까지 하다. 손만 보고는 사내 손으로 보지 않으리라.
그 손이 가슴을 더듬었다.
‘하악……!’
벽리군의 의지는 또 한 번 무너져 내렸다.
‘사람들 얼굴을 어떻게 보지?’
벽리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살문 살수들 중에 부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은 단 두 쌍뿐이다.
종리추와 어린, 유구와 정원지.
그들은 숨을 죽이며 관계를 맺고 있지만 자세히 귀를 기울이면 뜨거운 숨소리를 들을 수 있다.
어젯밤은 종리추가 어린이가 아니라 자신과 합방을 했으니 짓궂은 사람들은 귀를 쫑긋 거렸을 게다.
하지만 밝은 햇살이 환히 비치는 곳까지 걸어 나왔는데도 살문 살수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동혈 입구에는 비부가 예의 든든한 모습으로 밖을 살피고 있을 뿐이다.
비부가 고개를 돌려 벽리군임을 확인하고 인사를 건네왔다.
“잘 주무셨어요?”
벽리군은 그 말이 꼭 어젯밤 일을 말하는 것 같아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응. 모두들 어디 갔어?”
“새벽 연공이오.”
벽리군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떠날 적만 해도 새벽 연공은 없었다.
살문 살수들은 이제나저제나 오곡동을 벗어나 살수의 길을 걸을 때만 학수고대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던 것 같은데……
‘맞아! 어제!’
평온하던 사람들, 그들은 보고 당황했던 일, 마음이 쫓겨 한달음에 달려올 수밖에 없었던 상황……
“방금 전에 전서를 받았는데, 이렇게 빨리……”
종리추는 분명히 방금 전에 전서를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오곡동에는 전서가 없다. 비둘기는커녕 새 한 마리 기르지 않는다. 그런데 무슨 전서이며 어디서 오는 전서란 말인가. 외장은 분명히 숨죽이고 숨어 있는데.
종리추의 선물이 너무 뜻밖이고 황홀해서 어제의 일을 망각하고 있었다.
“그동안 오곡동에 무슨 일이……”
벽리군은 말을 잇지 못했다. 구구구구……!
하늘을 훨훨 날아오는 것은 분명히 비둘기다.
방향으로 보아 목적지는 오곡동이 틀림없고.
‘이, 이게 도대체……!’
비둘기는 오곡동으로 날아들어 왔다. 비부가 손을 내밀자 잘 길들여진 것처럼 팔 위에 사뿐히 날아 내렸다.
비둘기 발목에 묶인 천을 힐끔 쳐다본 비부가 말했다.
‘백팔나한이 아침 수련을 한다는 전서군요. 아! 몰랐죠? 놈들은 아침 이 시각이면 꼭 장사곡에서 수련해요.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으니 지독한 놈들이에요. 하긴 하릴 없는 중이니……’
‘이, 이게 도대체……’
벽리군은 어안이 벙벙했다.
살문이 팔부령에서 벌어지는 일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알고 있지 않은가.
“세상에!”
벽리군은 기어이 탄성을 토해냈다.
종리추는 주변 화전민들을 모두 한편으로 끌어들였다.
있는 돈을 탈탈 털었다지만 성심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가진 돈이라고 해봐야 중원에 나가면 정보 몇 개 얻을 돈밖에 없었는데.
이건 기적이나 다름없다.
화전민은 눈에 보이는 것, 약간 특이하다 싶거나 낯선 사람이 나타났을 경우에는 재빨리 전서를 보내온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라 비둘기 발에 묶인 천 색깔과 그림으로 사실을 전해온다. 붉은 천이면 여자, 푸른 천이면 사내다. 낯선 사람이 나타났을 경우다. 희귀한 일은 보았을 때는 노란 천을 사용한다.
사람 숫자는 작대기 표시로 나타내고, 무인일 경우에는 맨 위에 동그라미를 하나 더 그려 넣는다. 맨 밑에는 어디서 날렸다는 표식을 한다. 종리추는 화전민마다 분별 있게 독특한 기호를 주었다.
노란 천으로 쓸 때는 주변 지형을 그린다. 독특한 지형 하나만 그려도 팔부령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살문 살수들은 단번에 알 수 있다.
“전서구는 어디서 났는데요?”
“상공이 돈을 주었고 화전민촌 사람들이 사 왔어. 물론 상공이 길들였고. 상공이 짐승 말을 잘한다는 거 알아? 온갖 짐승 말을 다 알아듣지. 상공은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짐승 길들이는 사육사가 되었을 거야.”
어린이 대답해 주었다.
“아!”
벽리군은 또 한 번 감탄했다.
소림사 백팔나한과 육십칠단승. 그들은 팔부령에 머물며 살문을 감시하고 있지만 정작 감시를 당하는 사람은 그들이다.
종리추는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살문에 활로를 열었다.
소림승들의 거취를 낱낱이 파악하고 있으니 그들을 피해 팔부령을 오가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다.
‘놀라운 사람…….’
놀랍기도 하고 가슴 뿌듯하기도 했다.
“그건 그렇고 동생, 어젯밤에는 즐거웠어?”
어린이 짓궂은 표정으로 물었다.
“예? 저 그게……”
“호호호! 얼굴 빨개지는 거 봐. 굉장히 좋았던 모양이네?”
“너, 너무 짓궂어요.”
“부탁 하나 해도 돼?”
벽리군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어린이 표정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
‘역시 여자였어. 홍리족은 여러 사내를 남편으로 삼는 부족이라던데 한 사내를 같이 모시는 입장이니……’
그러나 어린이 말은 뜻밖이었다.
“아이를 낳아 줘.”
“……!”
“난 아기를 못 낳나 봐. 상공이랑 그렇게 잠자리를 같이했어도 아이가 안 생겨. 상공은 외로운 사람이라 아기가 보고 싶을 텐데………. 아기를 꼭 낳아서…… 첫 아기…… 나 줄래?”
벽리군은 웃을 수만은 없었다. 어린이 아기에 대한 욕심은 종리추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그래요. 약속할게요. 아기를 낳으면 첫 아기는 꼭 언니 드릴게요. 그리고 언니는 젊으니까 걱정하지 마요. 십 년씩 안 생긴 사람도 아이를 낳는걸요.”
“정말이야?”
“그럼요.”
벽리군은 어린이 손을 잡아주었다.
십여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다른 사람에게는 지루했을지 모르지만 벽리군에게는 꿈 같은 나날이었다.
종리추와 벽리군이 합방을 한 다음부터 어린은 공평하게 날짜를 배정했다.
합방하는 날짜를.
벽리군은 이틀 걸러 하루씩 종리추의 품에 안겼다.
꿈만 같다. 영원히 이런 날이 없을 줄 알았는데……
구구구구……!
전서구는 부지런히 날아들었다.
화전민들은 살문 살수들을 위해 필요 없는 일, 하찮은 일조차 부지런히 전해왔다.
소림승들이 매일 반복하는 일과도 꾸준히 보고했다.
“같은 일은 전서를 띄우지 말라고 할까요?”
벽리군은 고개를 내둘렀다.
“아뇨, 귀찮더라도 받아야 해요. 하나를 거르면 둘을 거르게 되어 있어요.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전서를 띄우는 것이 습관으로 굳혀져야 돼요.”
화전민들의 마음을 돌린 것은 종리추였지만 소관은 벽리군이다.
벽리군은 여전히 살문의 총관이었고, 살문의 살림살이는 총관 몫이다. 그리고 살문에 전달되는 정보도.
꿈 같은 십여 일이 지나갈 무렵이다.
‘오늘도 하루가 지나갔군.’
벽리군은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을 바라봤다.
오늘은 어린이가 합방을 하는 날이다. 어린은 종리추를 몹시도 괴롭혔다.
“상공이 지금처럼 한가한 적이 없었잖아. 이럴 때 아기를 갖지 않으면 일, 이 년은 금방 갈 거야.”
어린이 말처럼 요즘은 너무 한가하다.
팔부령에 길이 뚫렸는데도 종리추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살문 살수들이 마을에 나가 작은 청부라도 받아서 생계를 해결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도 묵묵부답이다.
생계……
살문은 생계를 걱정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화전민에게 식량을 구해줄 돈은 물론이고 살문 살수들의 생계조차 걱정해야 한다.
청부를 위해 갈아둔 병기는 짐승을 잡는 데 사용되었다.
짐승을 잡아 고기를 구워 먹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유지해 간다.
동혈 안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구수하게 퍼져 나왔다.
“이러다 사냥꾼으로 전락하는 것 아냐?”
혈살편복이 꼬치에 꿰인 꿩고기를 돌리며 말했다.
“이럴 때 산화단창이 있었다면 신바람 났을 거야. 그렇죠?”
혼세천왕이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빌어먹을! 산화단창 이야기는 왜 꺼내!”
혼세천왕은 움찔하여 입을 다물었다.
죽은 사람들…… 그들은 아픔으로 남아 있다.
얼굴은 물론 그들이 말하던 모습까지. 음성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나는데 정작 사람은 없다.
‘청부를 받아야 해. 그렇지 않으면 방법이 없어. 한데 무슨 수로……? 아냐, 포기하면 안 돼. 방법을 찾아야 돼. 무슨 수가 있기는 있을 거야.’
그때였다. 구구구구……!
절벽 밑에서 회색 비둘기 한 마리가 힘차게 날개를 저으며 날아올랐다.
‘소림승이 적운사에서 저녁 예불을 드린다는 보고……’
소림승은 적운사를 작은 소림사로 삼고 거주했다.
적운사는 절이 아니다. 소림승들이 거주하기 위해 지어 놓은 움막 군락이다. 장사곡에서 백여 보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적운사라는 말은 아침저녁으로 장사곡에서 피어오른 물안개가 자욱이 쌓이기 때문에 붙여졌다.
소림승은 항상 지금 이 시간쯤에는 저녁 예불을 드린다.
벽리군은 무심히 팔을 내밀어 전서구를 받았다.
‘푸른색? 남자. 작대기 하나, 한 명. 무인?’
무인은 곧장 대래봉으로 올라오고 있다. 대래봉으로 올라오는 길에는 소림승이 감시의 눈초리를 번뜩이고 있는데 당당하게 올라온다.
종리추가 새 그림을 표식으로 준 화전민촌에서 날아온 전서이니 틀림없이 대래봉으로 올라오는 길이다.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혹시 청부?’
벽리군은 청실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찾아온 무인은 해검지에 검을 풀어놓았다. 그리고 청석이 깔린 곳으로 와서 머리를 조아렸다.
‘청부야!’
벽리군은 숨이 탁 트이는 듯했다.
무인의 청부라면 큰 건이다. 하나만 맡아도 일 년 동안 돈 걱정 할 일은 없다. 외장을 돌리기에는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그것이 어디인가. 그런데…… 그녀의 발 밑에서 반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이 일은 내가 맡지. 벽 매, 가서 저녁이나 들어.”
종리추였다. 종리추가 직접 청부를 받으려고 한다.
벽리군은 재빨리 몸을 비켰다.
청실은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정도로 작은 암굴이다. 대래봉 정상에 있는 청석과 음성이 통하지만 몸을 비집고 올라서야 한다.
벽리군이 내려오고 종리추가 청실로 올라섰다.
“여우골에 화전민촌이 있소. 그곳에 서신을 넣어둘 테니 가면서 받아 가세요.”
‘응? 이게 무슨 소리지?’
벽리군은 위에서 들리는 종리추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의 뜻을 곰곰이 되짚어봐도 청부를 받는 것 같지는 않다.
“쌍암을 지나면 육십칠단승이 길을 막을 겁니다.”
소림승과 살문은 쌍바위를 경계로 삼고 침범하지 않는다.
대래봉에서 소림 오선사가 열반에 든 쌍바위까지는 살문의 영역이고, 그 밖은 소림의 영역인 셈이다.
“그렇군요. 잘하셨습니다. 어차피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드러날 일이니까 솔직히 말하는 것도 좋겠죠.”
‘뭐가 드러나고, 뭘 솔직히 말한다는 거지?’
“하하하! 어련히 알아서 해주시겠습니까.”
‘뭘 부탁하는 것 같은데…… 상공이 부탁할 사람이 누군지? 중원 천지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모두 여기 모여 있는데.’
“아마도 일 년쯤 걸리겠죠?”
‘일 년? 뭐가 일 년이야? 너무해. 이렇게 궁금하게 만들고……’
벽리군은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너무 궁금했다.
“알았습니다. 약속드리죠. 배웅은 못 해 드립니다.”
그 말을 끝으로 종리추가 내려왔다.
종리추는 동혈 입구로 가서 비둘기 소리를 냈다.
“구구구! 구구구구! 구구……!”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신기하기만 하다. 종리추가 흘리는 소리는 정말 꼭 닮았다. 무슨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눈으로 보지 않으면 정말 비둘기가 울고 있는 줄 알겠다.
절벽 밑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솟구쳐 팔에 내려섰다.
종리추는 미리 준비해 놓은 듯 품에서 서신을 꺼내 비둘기의 발목에 감았다.
비둘기가 훨훨 날아갔다.
‘여우골로 가는 비둘기야.’
벽리군은 비둘기가 날아가는 방향을 보고 어디로 가는 전서인지 짐작했다. 청실에서 들은 말과 섞어보면 찾아온 무인에게 전하는 전서일 게다.
“상공,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벽리군은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벽 매의 힘이 컸어.”
종리추가 다정히 손을 잡았다.
“뭐가요? 내가 뭘 했는데요? 아이, 자세히 좀 말해 줘요.”
버리려고 했는데…… 또 교태가 나오고 말았다. 기루에서 붙인 버릇은 모두 버리려고 했는데……
“살천문주가 합류했어.”
“뭐예요? 그럼 찾아온 사람이!”
종리추는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대체 살천문주에게 뭘 부탁했는데요?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왜 살천문주가 살문의 명줄을 움켜쥐고 있다는 거죠?”
“후후! 청부를 받아줄 테니까.”
“네엣?!”
“살문은 팔부령에서 움직이지 않아. 하지만 살문은 중원 곳곳에 있어. 도깨비가 움직이는 거지.”
“정말…… 그렇겠네요.”
“소림사가 빠졌으니 대파는 다른 방도를 강구할 거야. 옴짝달싹할 수 없는 계획이거나 죽음의 함정이겠지. 걸려들 순 없잖아? 빌미를 빼앗는 거지.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빌미가 되지 않으니까.”
“아!”
벽리군은 감탄했다.
구파일방에서 소림사가 빠졌다.
무림은 십망을 포기했지만 그와 유사한 다른 장치를 만들어 낼 게다. 훨씬 지독하고 빠져나갈 수 없는. 그것이 무엇일지는 짐작도 할 수 없지만 발효되기만 하면 정말로 목숨을 조여올 게다.
구파일방은 충분히 그런 힘이 있다.
솔직히 구파일방 중 어느 한 문파만 전력을 다해도 살문 정도는 요절 났을 게다.
문파를 다치지 않게 하려는 이기심이 살문을 살렸다고나 할까.
그런 요행은 두 번 다시 바라기 어렵다.
종리추는 거기까지 내다보고 있다.
살천문주는 그래서 필요했다. 살천문이라는 살수 단체를 움직인 사람이니 청부를 받는 요령도 잘 알 테고, 그가 물어오는 청부는 자잘한 청부 열 건, 스무 건을 능가하는 커다란 일일 것이다.
살문은 조용히 나가 처리하면 된다.
백팔나한과 육십칠단승이 지키고 있으니 살문이 빠져나가 살수 행각을 벌였다고는 믿지 않을 게다. 살문 살수들은 비적마의로 담이 쳐진 안쪽에서 사냥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언제 어떻게 밖으로 나갈 수 있었겠는가.
그러면서도 중원에는 살문이 활동을 재개했다는 소문이 나돌 테고. 귀신이 생기는 거다.
그렇게만 되면 외장도 돌릴 수 있고 많은 정보를 토대로 다시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다.
처음 시작하는 것이 어렵지 나중은 가만히 내버려 둬도 돌아간다.
그것이 살수의 세계다.
그런 것도 모르고 마을로 내려가 청부를 받아올 생각을 했으니.
“정말 여우가 따로 없네요. 그런데 뭘 잘했다고 했어요?”
“살천문주의 신분.”
“네?”
“소림승이 길을 막기에 살천문주라고 신분을 밝혔다는군. 팔부령 싸움 이야기를 듣고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다 회개를 종용하러 왔다고 말했대.”
“회개요? 호호호!”
벽리군은 오랜만에 마음껏 웃었다. 그러다 문득 또 의문이 치밀었다.
소림승은 대래봉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다. 대래봉에서 나오는 사람은 물론 대래봉으로 청부를 하러 가는 사람조차 막는다. 그런데 자신이 들어올 때는 아무도 막는 사람이 없었다. 정신없이 신법을 전개한 탓에 소림승이 지키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잊고 쌍암으로 신법을 전개했다.
만약 소림승이 지켜보고 있었다면 벽리군이 살문 사람인 것을 알고 있을 테니 길은 막지 않았을 테고, 나가는 구멍이 뚫렸다는 건 알았을 게다.
“사, 상공! 큰일 났어요. 제가 밖에 나갔다 온 걸 소림승이 알아요. 그날 전 너무 정신없어서……”
종리추가 벽리군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석양을 바라봤다.
“아름답지?”
“상공!”
“벽 매는 똑똑하니 성동격서가 무슨 말인지 알지? 나중에 기회 생기면 음양철극에게 참한 여자나 소개시켜 줘. 그날 소림승들 따돌리느라고 고생께나 했으니까.”
“그, 그런 일이!”
“하하! 정보가 얼마나 소중한지 확실히 알았지? 하하하!”
그때 그들의 등 뒤에서 앙칼진 소리가 들려왔다.
“동생 오늘은 내 차지인데 이렇게 가로챌 거야?”
고개를 돌리자 허리에 양팔을 올려놓은 어린이 모습이 보였다.
“흥! 상공도 마찬가지야. 동생을 허락해 줬더니 이제는 막 내놓고 조앙신이야? 그래도 되는 거야?”
“아!”
종리추의 당당함도 어린 앞에서는 무너진다.
‘풋!’
벽리군은 정말 마음 편하게 웃었다.
광살
소고 일행은 하남성으로 돌아왔다.
목월광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돌아갈 이유도 없었다. 보나마나 폐허만 남았을 게 분명했다.
이십팔숙이 당했다면 등봉 천의원도 공격받았다고 봐야 한다.
“소행산으로.”
소고는 미련 없이 등봉 천의원을 버렸다.
소향산은 작은 향산이라고 불린 만큼 절경이 빼어난 곳이다.
산이 높지도 낮지도 않아 땀을 조금 흘릴 정도면 정상에 오를 수 있으며 산길은 완만한 편이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편하게 찾는 산이다.
소고는 밤이 되기를 기다려 소향산에 들어섰다.
모두를 묵묵히 뒤쫓았다.
소원진 사건은 모두에게서 말을 빼앗아갔다.
그 후 이십팔숙의 귀를 자른 인물들은 별다른 경고를 해오지 않았다. 자칫 그들의 손아귀를 벗어났다고 자신할 만큼 흔적은커녕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안다. 그들이 바로 곁에 있다는 것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감지할 수 없는 곳에서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감시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찾을 때까지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산길을 올라가고 있지만 소고는 마치 전에 와봤던 것처럼 능숙하게 산을 탔다.
길이 있는 곳만 가는 게 아니다.
어느 순간에 길을 벗어나 잡목 숲을 헤치고 가더니 계곡을 건너 건너편 산을 탔다.
거미줄이 끈적끈적하게 얼굴이며 손이며 가리지 않고 달라붙었다.
산거미는 유난히 지독하다. 거미줄이 끈끈하게 달라붙어 영 기분이 나쁘다. 거미줄을 쳐 놓는 범위도 넓다. 앞사람이 거미줄을 훑고 지나갔으면 뒷사람은 당연히 거미줄이 묻지 않아야 하는데 일행 스물다섯 명 모두에게 거미줄 맛을 보여 주었다.
사람이 다니지 않은 길이다.
그런데도 소고는 망설이지 않는다.
정원을 거닐 듯이 쑥쑥 앞으로 나아간다.
소고의 뒤를 바짝 따르던 사람들도 편안한 마음으로 쫓아간다.
청면살수, 소천나찰, 비원살수, 미안공자, 공지장…… 모두 와봤던 길을 가는 사람처럼 편안하기만 하다.
사령, 회령 살수들은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살혼부 살수들이 꼼꼼하게 비막을 만들어 놓은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니까.
소고가 커다란 바위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더 이상 나아갈 길도 없었다. 사람 덩치의 스무 배는 될 것 같은 커다란 바위가 앞을 막고 있다.
소고는 큰 바위 옆으로 돌아서 작은 바위를 붙잡았다.
작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사람보다 작지는 않아 보였다.
구르릉……!
바위가 구르면서 시커먼 입을 드러냈다.
푸득! 푸드득……!
놀란 박쥐들이 시커먼 아가리 속에서 뛰쳐나와 넓은 창공으로 날아갔다.
동혈 안에 있는 횃불을 켜자 수십, 수백 마리는 될 것 같은 박쥐들이 보였다.
동혈 바닥은 온통 박쥐 똥으로 가득했다.
이제 갓 태어난 듯한 박쥐가 박쥐 똥 속에서 뒹굴고 있다. 천장에 붙어 있을 힘이 없어 떨어진 듯한데 모순되게도 자신들이 싸놓은 배설물 속에 파묻혀 죽어간다.
동혈 안에 들어온 소고는 한쪽 구석으로 가서 모로 눕더니 곧 잠에 빠져들었다.
묵월광 살수들에게 ‘편한 곳에 자리를 잡고 누워라’, 혹은 ‘오늘은 여기서 쉰다’는 등 한마디쯤은 던질 만한데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살혼부 살수들도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공지장이 널찍한 바위로 다가가 박쥐 똥을 쓸어냈다. 그 위에 거적때기를 널어놓고 청면살수를 눕혔다. 천장에 붙어 있는 박쥐도 쫓았다.
이런 곳에서 많이 자본 듯 태연한 행동이다.
소천나찰 등도 질리도록 태연했다.
길을 같이하면서 느낀 점이지만 살혼부 살수들의 인내심 하나만은 정말 배울 만했다.
그들은 어떤 환경, 어떤 어려움에 직면해도 불평 한마디 늘어놓지 않았다. 그들은 그곳에서 최상의 여건을 찾아내고 편히 쉬었다.
그러려면 오감이 마비되어야 한다.
더러운 것을 보지 못하는 눈, 악취를 맡지 못하는 코, 징그러운 소리를 듣지 못하는 귀, 지독히 쓰고 매운 것도 무덤덤하게 먹을 수 있는 혀, 그리고 살갗에 스멀스멀 기어가는 벌레가 있어도 태연하게 잠들 수 있는 촉감.
살혼부 살수들도 무인인 이상 오감을 최고조로 발달시켰으리라. 그리고 거기에 하나를 더 보태 오감을 죽일 수 있는 인내심까지 발달시켰다.
살수란 바르고 매서운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참고, 참고, 또 참을 수 있어야 살수다.
살혼부 살수들은 직접 몸으로 살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살혼부 살수들이 모두 자리를 잡자 사령 살수들이 움직였다.
화령 살수들은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들은 동혈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코를 찔러대는 박쥐 냄새에 코를 틀어막고 있었다.
소여은이 말했다.
“나가자. 여긴 여자가 잘 곳이 아냐. 차라리 밖이 낫겠어.”
소여은이 화령 살수를 데리고 나갈 때도 누구 하나 뭐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소고는 푹신한 침상에라도 누운 듯 한낮이 될 때까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사령 살수들이 일어나 주변을 살피고, 화령 살수들이 몸단장을 하고, 살혼부 살수들이 어슬렁어슬렁 주변을 산책할 때까지 소고는 깊은 잠만 잤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난 소고는 어제의 소고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은 반짝반짝 빛이 났고, 전신에서는 활력이 넘쳐흘렀다. 얼음처럼 차디찬 표정은 변함없었지만 전신에서 이글거리는 생동감이 타올랐다.
“여은아, 화령 살수를 마을로 보내.”
“언니?”
“묵월광의 기반은 하남성이야. 묵월광이 무너졌으니 구파일방은 또 어떤 허수아비를 내세웠겠지. 그게 어느 문파이고, 총단은 어디고, 살수들은 몇 명이나 되고….. 모두, 알아볼 수 있는 건 모두 알아와, 가급적 세세하게.”
“알았어요, 언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십팔숙을 간단히 처리한 인물들이면 화령 살수들의 존재도 알고 있을 터이다. 묵월광을 대신해 하남성을 제패한 살수들의 뒷조사를 하고 다닌다면…… 그들이 가만있을까?
하지만 소여은은 하기로 했다.
소고가 종리추를 치러 가기 전의 자신만만하던 모습을 되찾았다.
‘그래, 언니. 이제 시작해 보자. 언제까지나 달아날 수만은 없잖아.’
소여은은 화령 살수들을 이끌고 산을 내려갔다.
“쳇!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괜히 올라왔잖아. 산 밑에서 자도 되는데……”
화령 살수들의 중얼거림,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소리인데도 중얼거림을 들으니 꼭 껴안아주고 싶은 생각이 든다. 너무 앙증맞고 귀엽게 말해서.
소고는 소여은이 화령 살수와 함께 산을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적사.”
“……”
“사령 살수들이 익힌 축혼팔도. 얼마나 믿을 수 있어?”
“누구라도.”
“죽일 수 있다?”
“……”
“그럼 죽여.”
“……?”
“쥐새끼 네 마리가 있어. 처리해.”
“……”
적사가 대답 없이 등을 돌렸다.
“명심할 건…… 동시에 네 명을 처리해야 된다는 거야. 하나라도 늦게 처리했다가는…… 우리 모두 위험해져.”
적사가 사령 살수들에게 눈짓을 했다.
사령 살수들은 몽고의 용사들이다.
호탕하게 초원을 질주했다. 거치적거리는 것은 대도로 베어냈다.
중원에서의 싸움은 그들 싸움이 아니다. 지금까지 중원에 들어와 싸운 것은 허수아비 같은 쓰레기 몇 명을 베어 넘긴 것이 고작이다.
그러면서도 참 많이 죽었다.
이제 열두 명밖에 남지 않았다.
싸우다 죽었다면 원이라도 없겠지만 비겁하게 화살에 맞아 죽었다.
중원이들은 그들의 방식을 싸우지 않는다.
사령 살수들이 도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그들의 눈은 굶주린 늑대들이 풍겨내는 광기로 번들거렸다.
소고는 공지장을 불렀다.
“지금 가장 빨리, 은밀히 움직일 수 있는 분은 공 사숙님이에요. 양성에 다녀오세요.”
“양성? 염왕채 굴리는 천 노인에게?”
“예.”
“지금 가면 위험할 텐데?”
“그렇겠죠.”
공지장은 태연하게 대답하는 소고를 봤다.
소고의 눈이 염기로 가득해 심신을 울렁거리게 만든다.
‘이, 이건…… 혈뢰삼벽이 세맥을 칠 때 나타나는 현상!’
소고의 혈뢰삼벽은 완벽을 향해 치달리고 있다.
무공이 급진전하고 있다. 아마도 팔부령에서의 충격이 새로운 무공의 세계로 이끈 듯하다.
모든 무공은 진리를 깨우쳐야 극성에 도달할 수 있다. 참선에 몰두한 노승이 진리를 깨우치듯 무공의 이치를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삼류 무공이라 할지라도 진리를 깨우치면 절정 무공이 되고, 상승 무공이라 해도 무리를 깨우치지 못하면 삼류 무공으로 전락하고 만다.
소고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혈뢰삼벽은 마공인가, 사공인가, 정공인가!
과거 혈암검귀는 살심이 너무 강했다. 그에게 검을 들이댄 자는 틀림없이 죽었고, 하다못해 가벼운 농담을 건넨 자도 기분이 나쁘면 죽였다.
원래 심성이 악독해서 강한 살심이 발동한 것인가, 아니면 혈뢰삼벽이 심성을 바꾼 것인가?
후자라면…… 혈뢰삼벽은 마공이다.
소고의 무공은 강할 뿐만이 아니라 요상한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소고 앞에 서면 검을 들 수 없게 된다. 강한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도저히 검을 쳐내서는 안 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혈뢰삼벽의 독특한 운기가 최면력까지 발휘하는 듯한데……
공지장은 소고의 무공이 높아질수록 불안했다.
“천 노인에게 뭐라고 말할까?”
“말할 건 없어요. 이십팔숙 중 화를 피한 일곱 명이 있을 거예요. 그들에게 이리 오라고 하세요.”
“음……! 만일의 경우에는……”
“천 노인을 죽이면 입이 닫혀져요.”
‘무, 무서운 심성……’
살혼부를 위해 온갖 간난신고를 무릅쓴 천 노인을 서슴없이 죽이라고 한다. 소고는 인성을 버리기 시작했다. 철저한 살수가 되어가고 있다. 이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그리고 또 하나. 아시죠? 저들이 왜 우리에게 경고를 보냈는지.”
“음……!”
“무공만 가지고는 문파를 일으키기가 어렵죠. 특히 살수 문파는. 살수 문파의 뒤에는 항상 든든한 재력가가 있어요. 재력가가 존재하는 한 살수 문파는 계속 생겨나죠. 저들은 그 뿌리를 뽑으려는 거예요.”
“……”
“최악의 경우에도 돈 이야기만은 하지 마세요. 절대로.”
“천 노인의 돈을 쓰지 않을 생각이냐?”
“아직은요.”
“알았다. 대형을 잘 부탁한다.”
“걱정 마세요.”
공지장은 다시 한 번 소고를 쳐다본 후 산을 내려갔다.
황주일학
호광성 황주에서 신법이 가장 빠른 무인을 일컫는 말이다.
중원 제일의 경공 대가는 단영 개방의 분운추월이다.
분운추월의 영역은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지고하다.
분운추월은 경공으로 도전하는 사람을 거절한 적이 없고, 언제나 이겼다.
황주일학도 분운추월과 경공 시합을 했고, 졌다.
“중원일학으로 불리기를 원했지만 황주일학이 되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중원일학으로 불릴 날이 있을 것이다.”
분운추월에게 패한 후 황주일학이 남긴 말은 패자의 씁쓸함을 대변하는 말이 되어 버렸다.
황주일학은 빠르다.
분운추월에게는 졌지만, 황주일학이 빠르다는 점에 이의를 달 무인은 없다.
황주일학은 팔부령 싸움에도 일조했다.
그는 제구로 전초를 맡았다.
비적마의에게 물려 초죽음을 당한 일은 아직도 씻기지 않은 모욕으로 기억된다.
한탄 개미에게 물려 신법도 펼치지 못하고 쩔쩔맸다니, 살수 놈들을 앞에 놓고……
‘살수 놈들은 모두 씨를 말려야 돼.’
황주일학이 살수들에게 품은 증오는 하늘에 닿았다.
아내가 살수 놈들 때문에 죽었다. 살수 놈들만 아니었다면 아내를 때려 죽이는 불상사도 벌어지지 않았을 게다. 아내가 바람이 나지도 않았을 테고, 바람이 났다 해도 남편을 암살하려는 기도 따위는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게다.
살수가 존재했기에 아내가 당당해졌다.
겁이 많은 여인이었는데…… 겁이 없어졌다. 남편을 죽일 생각까지 서슴없이 할 만큼.
모두 살수 놈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살수 놈들은 지상에서 씨를 말려야 한다. 돈을 받고 다른 사람을 죽이는 인간 말종은 한 놈도 남김없이 쓸어버려야 한다.
황주일학은 벽곡단을 꺼내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벽곡단은 다 좋은데 향기가 너무 진한 것이 탈이다. 향기가 입안에만 머물면 다행이지만 공기 속에 흩어져 퍼져 나간다.
범인들은 무감각하게 지나칠 정도로 미약한 냄새인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땀 냄새까지 구별해 내는 무인들에게는 강렬한 향기로 맡아질 게다.
황주일학은 향기가 입안에만 머물도록 입을 벌리지 않았다.
이빨도 사용하지 않았다. 소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금물이다.
벽곡단을 입에 넣고 혀와 입천장만으로 살살 녹여냈다.
전신 감각은 활짝 열어두었다. 언제든지 경공을 전개해 뛰쳐나갈 태세를 마쳤다.
누가 언제 어디서 공격을 해오든 경공을 전개하기만 하면 잡히지 않을 자신이 있다.
팔부령에서 비적마의에게 당한 후이기 때문에 개미 한 마리가 기어오르는 것까지 세심하게 신경 썼다.
벽곡단 한 알을 녹여 먹고 두 알째 집어 입안에 넣었을 때.
‘가만! 이 소리는……?’
황주일학은 진기를 귀에 집중시켰다.
청력이 활짝 열리며 사방의 소리를 집중시켰다.
사삭! 사사사삭……!
‘암습이다! 쳇! 눈치챘군.’
황주일학에게는 익숙한 소리다. 자신이 그런 소리를 내며, 자신을 암습했던 살수가 이와 같은 소리를 냈다.
황주일학은 머뭇거리지 않고 신형을 뽑아 올렸다.
황주일학의 신법은 점창파의 유운신법과 궤를 같이한다.
황주일학은 사천성에 가본 적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다. 그에게 신법을 전수해 준 사부도 호광성에서 태어나 호광성에서 죽었다. 사부의 사부도, 또 그 위의 사부도.
하지만 점창파의 유운신법과 닮은 점이 워낙 많다.
구름이 흐르는 듯 부드럽기 때문만은 아니다. 점창파 고수를 만나 직접 비교해 보았는데 너무 유사했다.
점창파의 유운신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
닮은 점도 많았지만 다른 부분도 상당히 많았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유운신법이 황주일학의 사조가 창안한 것으로 짐작되는 유룡신법을 참조했거나, 아니면 유룡신법이 유운신법을 참조했다는 정도다.
구파일방 중 일파로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는 점창파의 독문신법에 비해 하등 밀리지 않는 유룡신법이 펼쳐졌다.
스으윽……!
미풍이 살짝 부는 듯 바람이 일렁이는 사이, 황주일학의 신형은 숨어 있던 수풀을 떠나 나무 위로 솟구쳤다.
한 가지 할 일이 더 있다.
자신의 종적이 발각당했다면 다른 사람도 위험할 것이 틀림없다.
자신은 경공이라도 빠르니 충분히 피해낼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무공으로 맞서야 하고, 암습 대 무공이라면 암습이 훨씬 유리하다. 무공이 월등하게 높다면 몰라도 서로 비슷한 수준으로 추측되니.
황주일학은 허공으로 솟구치며 허리춤에서 죽통을 꺼냈다.
‘알려야 해.’
아직 암습자의 모습은 파악하지 못했다.
자칫 아무 일도 없었는데 종적만 드러내는 결과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황주일학은 자신의 감각을 믿었다.
‘암습이 틀림없어.’
커다란 노목으로 날아오르며 죽통 하단에 돌출된 부분을 눌렀다.
퍼엉!
죽통이 터지며 붉은 운무가 풀썩 피어났다. 그런데, 퍼엉! 퍼엉! 펑!
황주일학이 죽통을 터뜨린 것과 거의 동시에 다른 세 곳에서도 붉은 운무가 솟구쳤다.
‘이건!’
황주일학은 위기를 느꼈다.
도주한다는 생각 외에 다시 힘을 얻었다. 황주일학의 신형이 빙글 맴돌며 일 장 옆에 흐르는 개울로 뛰쳐나갔다.
전광석화와 같은 경공이요, 행동이다. 순간,
쒜에엑……!
그가 향하던 곳에서 세상을 반으로 갈라 버릴 듯한 도기가 밀려왔다.
“헛!”
헛바람을 토해낸 황주일학은 급히 허리춤에 손을 갖다 댔다.
그의 허리에는 전낭과 모양은 같으나 크기는 조금 더 큰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언제나 위급할 때면 황주일학의 목숨을 구해주던 투골정이 이백여 개나 들어 있다.
다급한 황주일학은 손에 잡히는 대로 투골정을 꺼내 흩뿌렸다.
쒜엑! 쒜에엑……!
투골정이 매서운 바람을 일으키며 날았다. 특정한 목표가 없이 반경 일 장여를 모두 휩쓸어 버리는 공격이다.
강렬한 도기가 물렁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상대가 공격을 멈추고 뒤로 물러설 때 이런 느낌이 들곤 했다.
‘상대할 필요 없어. 우선은 몸을 빼는 것이 급해.’
황주일학은 급히 땅에 내려섰다. 아니, 내려서자마자 다시 튕겨 올랐다.
신형을 날리는 방향은 너무나 당연하게 산 밑 쪽이다.
스으윽……!
소리 없는 유룡신법.
쒜에엑……!
전면에서 다시 날아오는 도기.
‘제길! 포위되었어!’
방향을 바꿔 달리는데도 계속 도기가 밀려온다면 뻔하지 않은가.
황주일학은 다시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어 투골정을 꺼냈다. 그러나 전처럼 멈추지는 않았다. 도기 속으로 신형을 날리며 투골정을 뿌렸다.
쒜에에엑!
투골정은 이번에도 그의 기대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그 틈에 도기를 비켜 신형을 날려야 한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자신 있다. 수백 번도 더 해본 행동이다.
도기가 물러갔다.
황주일학은 암습자의 모습을 보았다.
‘사령 살수 놈들! 두고 보자, 네놈들을 그냥 두지……’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르겠다. 도기도 느껴지지 않았고, 파공음도 일어나지 않았다. 감각이 열려 있건만 누가 나타났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끄윽!”
이제야 비명이 새어 나왔다.
고개를 돌려 바라봤고, 먼저 개울에서 도기를 날렸던 그자임을 알아봤다.
약간의 방심을 이용한 함정이다.
이들은 투골정 정도로는 상대할 수 없는 강자들이다. 등에 일도를 가해 척추 뼈란 뼈는 모두 갈라 버린 이자는 처음 도기만으로도 투골정을 상대할 수 있는 고수다.
그런데 물러섰다. 확실한 기회를 잡기 위해서 물러섰을 게다.
쿵!
황주일학의 신형이 거칠게 떨어졌다.
이토록 모양새 없게 착지한 것이 얼마 만인가. 아마도 무공이란 것을 처음 배우기 시작했을 때였으니…… 삼십 년도 더 된 것 같다.
“잘했다. 깨끗했어.”
황주일학은 부르르 치를 떨었다.
흐릿하게 보이는 사내가 내뿜는 음성은 지옥의 사신처럼 으스스했다.
붉은 비녀, 혈잠
언제부터인가 살인이 일어난 곳에는 피를 머금은 붉은 비녀가 떨어져 있었다.
살인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일어났다.
주먹 깨나 휘두르고 다니던 파라호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 전신에 서른아홉 곳이나 칼자국이 나 있었다. 원한 관계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살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원한 관계를 부인했다. 칼에 찔린 상처 중 한 곳에 붉은 비녀가 깊숙이 박혀 있었기 때문에.
팔순을 넘긴 노인이 살해당했다.
성품이 온후하고 덕을 많이 베풀어 누구에게 원한을 살 만한 일은 평생 하지 않은 노인이었다.
노인은 저녁 잠자리에 든 모습 그대로 침상에서 숨져 있었다. 머리가 반으로 갈라진 채.
이번에도 사람들은 원한 관계를 부인했다. 잘려진 머리 속에 붉은 비녀가 박혀 있었으니까.
여인도, 어린아이도…… 힘을 잘 쓰던 사람이나 병약한 사람에게나 살겁이 휘몰아쳤다. 어떤 때는 부모와 자식 둘, 일가족이 하루 상관으로 죽어간 적도 있다.
원한이 많은 사람은 이해할 수 있지만 노인처럼 평생 선행만 베푼 사람은 무슨 이유로 죽였단 말인가.
“살혼부가 잠잠해지니까 살천문이 기승을 부리고, 살천문이 폭삭 무너지니까 묵월광이라는 놈들이 날뛰더니만 이제는 붉은 비녀일세 그려.”
“그놈의 살수 놈들은 어디서 이렇게 끝없이 나오는 거야?”
“쉿! 그러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고 싶냐?”
“죽을 운명이면 죽는 거지 뭐. 혈잠화가 어디 사람 가리는 것 봤어? 죽지 않으려면 이런 말을 삼가는 것이 아니라 돈 모으는 사람들을 조심해. 언제 청부할지 모르니.”
“제길!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어야 말이지. 정말 이러다 어느 날 갑자기 내 몸에도 혈잠이 박히는 것 아냐? 이보게들, 원한 있으면 말해 주게, 내 고칠 테니.”
“하하하! 그럼 자네 마누라 좀 빌려줄 텐가? 앗! 아아! 실수! 여보게 농담인 것 알지? 내 정말 머리 조아려 사죄할 테니 용서해 주게.”
사람들은 붉은 비녀를 혈잠이라고 불렀고, 비녀를 놓고 가는 사람을 혈잠화라고 칭했다. 사람들 간에는 점점 말이 뜸해졌고, 눈인사만 하고 지나치는 경우도 왕왕 보게 된다.
혹, 말을 했다가 실수하는 경우를 경계했다.
낮과 밤, 밝음과 어둠이다.
사람들은 낮에 활동하고 밤에 쉰다. 짐승들도 낮에 활동하고 밤에는 보금자리로 돌아간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동물도 야행성이 있다.
짐승들 중 야행성 동물은 대체로 난폭한 경우가 많다. 호랑이도 밤에 활동하며 사자도 밤에 사냥을 한다. 맹수들은 주로 밤에 움직인다.
사람도 그럴까?
낮에는 쓸쓸하기 짝이 없다가 밤만 되면 활기에 넘치는 곳.
야시장도 그런 종류 중 한 곳이다.
없는 것이 없고 구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야시장.
소고는 야시장으로 들어섰다. 온갖 음식 냄새가 구수하게 진동한다.
야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음식 장사다. 즉석에서 기름으로 튀겨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집에서 쉽게 해 먹을 수 없는 음식도 싼값에 먹을 수 있고,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음식을 먹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다.
야시장은 늦은 밤이 되었어도 사람들은 발 디딜 틈이 없다.
낮과 다름없는 활기가 넘쳐흐른다.
소고는 천천히 음식들을 구경하며 지나갔다.
길이만 백여 장에 이르는 커다란 공지가 어느새 장사꾼들로 가득 찼고, 각 노점상마다 음식을 기다리는 손님도 십여 명씩은 된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저녁 하루를 즐기고 있다.
야시장은 돈벌이로도 말할 나위 없이 좋다. 야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는 사람은 대로에 큰 점포를 가진 사람보다 부자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으며, 대부분은 사실이다.
이권이 있는 곳에 따라다니는 것이 있으니 폭력이다.
상인들을 등쳐먹는 파락호들이나 주변에 있는 무림 문파가 개입되어 일정한 금액을 상납받는다.
상인들도 거절하는 경우가 드물다.
명색은 상인들의 보호비. 상인들도 거절하는 경우가 드물다.
야시장은 밤에만 형성되는 노점상이지만 점포를 가진 사람처럼 자기 자리가 있다. 힘이 세다고, 아니면 먼저 왔다고 아무 자리나 차지할 수가 없다.
상인들은 약간의 보호비를 떼어주고 야시장의 질서를 유지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땅도 아니지만 자리를 내어줄 때는 집을 사고 파는 것처럼 돈을 받고 넘겨준다. 그런 질서가 유지되기를 원한다.
큰 질서 중에 하나로 노점상의 숫자 제한 문제도 있다.
야시장에서 노점상을 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들어와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야시장은 점점 넓어질 것이고, 아무래도 손님을 빼앗기게 된다.
노점상의 수를 일정하게 조절할 필요, 기득권을 유지하여 자리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할 필요가 있다.
무력과 노점상들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니 돈이 오간다.
소고는 천천히 걸어 야시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구경했다.
많은 사람들이 소고와 같이 구경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다가 구미가 당기는 음식이 있으면 약간 사 먹고 또 걷는다.
절대 많이 사 먹지는 않는다. 될 수 있으면 여러 종류의 음식을 골고루 먹는다. 그것이 야시장을 들르는 재미다.
길이가 백여 장에 이르는 큰 시장이고, 노점상의 수만 이백여 개에 이르지만 그래도 끝은 있다.
소고는 야시장의 끝 부분에 이르렀다.
사통팔달한 야시장이니 처음과 끝이 있을 수 없다. 소고가 들어온 곳이 시작이 될 수도 있고, 끝 부분에 도착했다고 생각되는 시작이 될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소고가 있는 부분으로 들어섰다.
소고는 조금 더 걸었다.
야시장 가장자리에 파락호 몇 명이 술판을 벌여놓고 흥청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노래를 불러 대기도 하고 잡담을 나누기도 하고……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즐거움에 흠뻑 빠져 있다.
노점상과 손님 간에 시비가 붙었을 경우 싸움을 해결해 주기 위해 대기하고 있는 파락호들이다.
“저……”
파락호들이 힐끔 쳐다보는가 싶더니 벌떡 일어섰다.
소고의 차디찬 인상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마치 빙옥을 깎아 만든 빙옥산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멀리서 지켜보기만 해야지 만져서는 안 될 것 같은 여인. 만지기만 해도 흠집이 날 것 같은 여인.
‘기, 기가 막힌 미인……’
‘세상에! 사람이 이렇게 아름답다니!’
파락호들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읽지 못할 사람은 없으리라.
“여기서 장사를 하고 싶은데요.”
파락호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여인의 매혹적인 분위기는 자신 같은 사람들이 탐내는 정도를 넘어섰다.
현재 야시장에는 새로운 장사치가 들어올 공간이 없다. 노점상들도 자릿세를 꼬박꼬박 내고 있어 트집 잡을 일도 없고, 하긴 트집을 잡자고 마음만 먹으면 잡지 못할 것도 없지만 그랬다가는 상인과 파락호들 간의 신뢰가 깨진다.
트집을 잡더라도 잡을 이유를 확실히 해야 한다. 자신들의 권한을 벗어난 일이다.
“여, 여기 잠깐만 앉아요.”
“자, 잠시만 기다려요. 대형께 여쭤봐야 되거든요.”
파락호들은 서둘러 자리를 마련했다. 그중 한 명은 어느새 저만큼 달려가는 중이었다.
사람들은 정한수를 이름 대신 야왕이라고 부른다. 야시장이 생성될 때 제일 먼저 이권에 파고든 사람이 그였고, 수십 번에 걸친 야시장 쟁탈전을 이겨냈다.
야시장을 노린 사람들 중에는 무인도 있다.
약간의 무명을 얻은 무인이거나 중소 문파의 장문인들이다.
명문대파는 야시장같이 조그만 이권에는 눈도 돌리지 않는다. 야시장같이 작은 이권은 중소 문파의 차지다.
야왕은 그들과의 싸움도 물리쳤다.
가장 격렬했던 싸움은 십여 년 전에 벌였던 적성문과의 싸움으로 장장 일 년여에 걸쳐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지속되었다.
싸움은 적성문주와 야왕과의 무공 대결로 끝이 났다.
당시 적성문주는 낭아도법을 구사하는 무인으로 초일류는 아니더라도 일류 고수 정도는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야시장이 한참 장사를 벌이고 있는 시각, 파락호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는 자리에서 펼쳐진 싸움. 구경 나온 사람들의 숫자만 해도 근 삼천여 명에 이르렀다.
승부는 눈 깜짝할 순간에 끝났다.
야왕이 전개한 일검에 적성문주는 낭아도법을 펼치지도 못하고 두 손이 절단되었다.
야왕은 잔인하게도 적성문주의 생명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검에 베인 상처가 무려 백여 군데가 넘었다니……
마지막 일검에 적성문주의 목이 떨어지고, 그것이 야왕이 펼친 마지막 무공이었다. 그 후 야왕은 다시 싸움에 나서지 않아도 되었으니까.
사람들은 야왕이 무림 고수일 거라는 추측만 했지 뒤를 캐볼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었다. 자신들의 뒤를 지켜주는 사람이 강하면 그것으로 족했다.
야왕은 침상에서 내려와 옷을 입었다.
침상에는 은자 스무 냥을 주고 사 온 동녀가 누워 있다. 부끄러운 듯 이불을 덮고 있지만 이불 밖으로 삐져나온 어깻살이 무척 탐스럽다.
방금 전까지 격렬한 정사를 벌인 탓에 침상이 마구 구겨져 있지만 동녀가 나신으로 누워 있기에 아름답다.
옷을 입은 야왕은 탁자로 가 차를 따라 마셨다.
“저년 단단히 길들여서 팔아치워. 퉤! 처녀인 줄 알았더니만 어린년이…… 저런 걸 스무 냥이나 주고 사 왔으니……”
동녀는 바들바들 떨기만 했다.
사내 두 명이 들어와 동녀에게 옷을 집어 던졌다.
“빨리 옷 입지 못해?”
동녀는 시퍼런 서슬에 화들짝 놀라 부리나케 옷을 입었다. 가슴이 막 발달하기 시작한 어린 소녀다.
야왕은 성질이 풀리지 않는지 차를 입에 넣어 헹궜다가 소녀에게 뿜었다.
“퉤! 빨리 저년 치워. 꼴도 보기 싫으니까.”
정작 꼴 보기 싫은 것은 본인 자신이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소녀로만 알고 두 달간이나 목을 메고 있었으니.
두 사내가 동녀를 끌고 나가는 것과 교차하여 한 사내가 들어섰다.
“대형, 야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싶다는 사람이 있답니다.”
“야시장? 그건 네가 알아서 해.”
“자리가 없습니다.”
“그럼 못하는 거지…… 야! 내가 그런 문제까지 신경 써야 되는 거야! 네 머리는 돌이야!”
“저도 내치려고 했습니다만…… 자리를 줘야 할 것 같습니다.”
“……?”
“기가 막힌 미인입니다.”
야왕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석심광검은 여자 보기를 돌보듯 한다. 술도 좋아하지 않고, 도박도 하지 않는다. 재물에도 관심이 없다. 그가 관심 있는 것은 오직 싸움뿐이다.
그래서 그에게 야시장을 맡겼다.
그런 자가 기막힌 미인이라 자리를 줘야겠다면……
“가자!”
야왕은 석심광검을 앞질러 갔다. 잘하면 동녀에게 속은 마음을 풀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소고를 본 야왕은 근엄한 얼굴로 바뀌었다.
여인을 탐할 때의 모습이 아니다. 술에 찌든 모습도 아니다. 노점상들을 으름장 놓던 얼굴도 아니다.
“석심광검.”
야왕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석심광검을 불렀다. 야왕의 눈은 소고에게서 떠나지 않고 붙박였다.
“네.”
무심한 음성이 들렸다.
“자리를 줘야겠다고?”
“네.”
“넌 어디로 봐서 저 여자가 야시장에서 장사를 할 여자로 보이냐?”
“……”
“눈을 빼야겠구나.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눈은 달고 다닐 필요가 없어.”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네 손으로 눈을 뽑아.”
“……?”
석심광검의 안색이 미미하게 흔들렸다.
지금까지는 소고의 미모에 감탄해 흘린 말로 알아들었지만 야왕의 어조에는 진심이 담겨 있다.
“석심광검.”
“네.”
“검을 내놔.”
야왕이 손을 내밀었다.
석심광검이 검을 풀어 내줬다.
야왕은 검을 뽑아 허공에 한번 휘저은 후 소고에게 뚜벅뚜벅 걸어왔다.
소고는 파락호들이 내어준 자리에서 파락호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파락호들은 야왕이 오는 순간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여전히 술잔을 기울였다.
“수하들이 사람을 몰라본 죄, 대신 사과합니다. 찾아오신 용건이 무엇인지……”
“내가 누군지 알아?”
소고는 다짜고짜 반말을 했다.
한 사람, 두 사람…… 구경꾼이 모여들었다. 파락호들이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있어 가까이 다가서지는 못했지만 야왕이 검을 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야시장 전체를 들썩거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고수라 예의를 표해줬더니만 너무 건방지군.”
야왕의 말투도 바뀌었다.
“이 정도로 격동하다니…… 쯧! 혈잠화답지 않은데?”
“뭐! 뭣!”
야왕이 깜짝 놀라 뒤로 두 걸음 물러섰다.
“누, 누구냐!”
야왕의 눈에는 살기가 어렸다.
파락호들은 영문을 알지 못하겠다는 듯 서로를 쳐다봤다. 혈잠화…… 야왕이 혈잠화라니, 그럼 살수였단 말인가?
“내가 누구냐? 좋은 질문이야.”
소고가 일어섰다.
“난 묵월광을 이끌고 있어. 내가 자리를 잠시 비운 사이 네놈이 자리를 파고들었더군. 이봐, 살수 문파를 이끌려면 한 가지 규칙을 지켜야 돼. 살수 문파를 개파하기 전에 혈배를 들어야 한다는 것. 넌 그 규칙마저도 어겼어. 너무 예의 없지 않아? 넌 쥐새끼처럼 남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음식을 훔쳐 먹은 거야.”
“소, 소고!”
“네놈에게 불리라고 지은 이름이 아냐!”
소고의 얼굴에서 차디찬 바람이 불었다.
소고가 묵월광주라고 신분을 밝히자 파락호들은 물론 구경하던 사람들도 뒤로 한 발자국씩 물러섰다.
묵월광은 야시장의 눈치를 보는 살수 문파지만 야시장 패거리 정도는 하루아침에 요절낼 수 있는 살귀들이다. 더군다나 눈앞에 서 있는 여인은 묵월광을 이끄는 광주란다. 어쩐지 지독하게 예쁜 것이 범상치 않다 싶더니.
“순순히 당하지만은 않을 터!”
야왕이 이를 악물며 검을 추켜올렸다.
허보에 검을 든 팔은 상단으로 들어 올렸는데 검 끝은 상대를 가리키고 있고, 검을 들지 않은 왼손은 가슴 앞에 모은 기묘한 기수식이다.
“호오! 추령검법 기수식이군. 적성문주의 낭아도법을 꺾은 검법이 무엇인지 궁금했지. 그렇군. 그대도 살수였어. 살수였으니 살수 문파를 이끌고 싶었겠지. 이런 야시장으로는 성이 찰 리 없지. 하지만 이제 모두 끝났어, 혈잠화. 지금쯤 네가 뿌려놓은 붉은 비녀들은 모두 도륙당하고 있을 거야. 정말 끝이지.”
“죽어라!”
야왕이 잰걸음으로 달려왔다.
소고가 우수를 들어 올렸다.
‘나를 정말 죽일 거야? 추령검법은 전문적으로 손목을 자른다면서? 그 검으로 내 손을 자를 거야? 이 손을 봐. 이렇게 연약한 손인데 정말 자를 거야?’
야왕은 눈을 끔뻑거렸다.
자신의 귀에 대고 속삭이는 듯한 음성……. 절세의 미녀가 무릎을 꿇고 바짓가랑이를 잡고 애원하는 듯한 음성……
‘응? 이게 뭐야. 한동안 사람을 죽이지 않았더니 마음이 약해졌군. 이런……’
‘차라리 날 죽여줘. 손목을 자르지 말고 죽여줘. 알잖아, 이 손이 없으면 어떻게 살아. 사람들은 벌레 보듯 할 거야. 난 그렇게 살 수 없어. 제발 날 죽여줘.’
‘이런!’
야왕은 추령검법을 전개하지 못하고 옆으로 검을 흘렸다. 그때,
슈우욱! 퍼엉!
미미한 바람이 분다 싶더니 부드러운 섬섬옥수가 가슴을 쓰다듬었다. 가슴에 닿을 때는 분명 섬섬옥수였다. 너무 부드러워 뼈가 있는지 의심되었다.
그런데 가슴에 닿은 손에서 거대한 경력이 밀려 나왔다.
쇠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다. 여인이 때린 게 아니라 황소도 단숨에 쓰러뜨리는 거한 역사가 후려친 것 같다. 거대한 쇠망치로.
“크윽!”
야왕은 신음을 토하며 비틀 물러섰다.
퍼억!
바로 뒤따라온 섬섬옥수가 머리에 닿았다. 닿을 때 참 기분 좋다.
이어지는 고통만 없다면.
“악!”
야왕은 짧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쓰러졌다.
두개골이 부서져 누런 뇌수가 흘러나왔다.
소고가 말했다.
“석심광검, 앞으로 야시장은 묵월광에서 관리한다.”
“열일곱 명 제거.”
죽음이 풀풀 피어나는 삭막한 음성이다.
“열다섯 명 보냈어요.”
듣기만 해도 마음이 시원해지는 음성이다.
“스물한 명. 산 자는 없습니다.”
허공에서 웅웅 울리는 듯한 음성이다.
“됐어. 모두 수고했어. 묵월광이 자리를 비웠으니 살수들이 틈을 파고드는 것은 당연해. 혈잠화는 추령검법을 사용했어. 이십 년 전, 광동성을 휘어잡은 살수 문파 흑잠화의 후손이지. 그런 자들이 또 있을 거야.”
소고의 음성은 차디찼다.
“당분간 청부는 없어. 자리를 굳혀야 돼. 혈배를 들고자 하는 놈들은 찾아서 철저히 분쇄해. 뿌리를 뽑아야 돼.”
모두 죽이라는 말이다.
소고는 지독하게 살심이 강해졌다.
“또 하나, 우리는 겉에 나설 수 없어. 무림인들로부터 철저하게 숨어야 돼. 특히 하오문과 개방을 조심해. 그러면서 하남성에 뿌리를 내리려는 살수 문파는 철저히 궤멸시키는 거야. 사숙님들은 야시장을 맡아줘요. 천 노인 자금은 철저히 숨기고, 당분간은 야시장에서 흘러드는 자금으로 묵월광을 운용할 거예요.”
적사와 그의 사령 살수 열두 명 십이사령, 소여은과 화령 살수 일곱 명 칠선녀, 그리고 양성에서 돌아온 이십팔숙, 아니, 이제는 칠살수.
그들의 병기에는 피가 진득하게 묻어 있다.
하남성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던 혈잠화가 하남성에서 사라진 밤이다.
비살
왕삼은 백주 대낮부터 술독에 파묻혔다.
“이봐, 왕삼. 이제 술은 그만해. 허구한 날 그렇게 술독에만 파묻혀 있으면 어떻게 해. 쯧! 이제 그만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 응? 집에서 기다리는 가족도 생각해야지.”
“비켜! 저리 비켜! 귀찮게 하지 말란 말이야!”
왕삼은 만류하는 주점 주인을 거칠게 떼밀고 술독을 집어 들었다.
벌컥! 벌컥!
누르스름한 술이 목 속으로 흘러들었다. 반은 입안으로, 반은 쏟아져 나와 옷을 적셨다.
왕삼은 이미 인사불성인 상태로 마셨지만 정신은 또렷해 보였다.
그는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술에 만취하여 탁자에 꼬부라지는 날도 많았고, 길가에 엎어져 제 집인 양 곯아떨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술에 취한 것은 육신일 뿐 정신은 날로 또렷해졌다.
마을 사람들은 왕삼의 추태를 묵인해 주었다.
어려서부터 항우장사라는 소리를 들으며 컸지만 누구를 괴롭혀 본 적은 없다. 집안이 워낙 가난하여 농사지을 땅 한 평 없는지라 마차를 수리하는 일을 배우면서도 불평 한마디 하는 걸 들은 사람이 없다.
워낙 순박하고 착한 사람이다.
왕삼은 그토록 소원하던 마부가 되었고, 처자식을 건사해야 하는 가장도 되었다.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다.
불행은 하루아침에 느닷없이 찾아왔다.
그가 모는 마차에 어린아이가 뛰어들었다. 그렇게 빨리 몰지도 않았는데 워낙 갑작스럽게 뛰어드는 바람에 마차를 멈추지 못했다.
아이는 그야말로 묵사발이 되어 죽었다.
지켜본 사람들 말로는 마차에 마가 낀 것 같다고 했다. 멀쩡하게 놀던 아이가 마차에 달려들었는데, 마치 자살을 하려던 것 같았다는 것이다.
아이가 자살을 기도한 것은 아니고 마차에 달려드는 모습이 꼭 그랬다는 것이다.
상황은 불가피했다는 쪽으로 결론이 모아졌다. 왕삼은 죽음의 책임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정작 왕삼을 괴롭히는 것은 본인 자신이다.
죽은 아이의 모습이 떠올라 견딜 수가 없다. 술에 만취되어도 아이의 영상은 뚜렷하게 되살아난다.
사람들은 왕삼이 왜 술독에 파묻혀 사는지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은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그만하면 아이도 좋은 곳으로 갔을 거라고 다독거렸다. 술을 마시지 말고 사찰에 가서 아이의 극락행을 염원하라고 충고하는 이도 있었다.
“내가 죽였어. 내가 죽였어.”
왕삼은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며 탁자에 머리를 처박았다.
어린아이를 유괴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 한 가지가 덧붙여진다면 좀 생각을 해야 한다.
아이를 유괴해 길가에 사지를 묶어놓고 마차로 치여 죽이는 것.
그곳이 한적한 길도 아니고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대로라면 한 번 더 생각을 해야 한다.
‘순식간에 해치우는 거야. 눈 한번 찔끔 감으면 끝나.’
아이를 죽인다는 죄책감 같은 것은 애당초 없었다.
그는 등에 메고 있던 자루를 내려놓고 주둥이를 풀었다.
안에서 어린 사내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땟국물이 자르르 흐르는 시골 촌부의 자식이다. 입고 있는 옷도 누덕누덕 기워 누더기나 다름없다. 나이는 이제 겨우 예닐곱 살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다.
아이는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어른도 복용하면 삼 일 동안이나 취한다는 삼일몽을 복용시켰으니 곯아떨어지지 않을 수 없으리라.
둥! 둥! 둥……!
삼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대로에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어졌다. 순찰도 이틀에 한 번씩 도는데 오늘은 돌지 않는 날이다.
사람이 우르르 몰려다니면 곤란하겠지만 한두 명쯤 나다니는 것은 상관없다.
그는 자루에서 아이를 꺼냈다.
대로에 아이를 큰대 자로 뉘이고, 미리 박아놓은 말뚝에 팔과 다리를 묶었다. 아이는 피할 구석이 없다.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무심히 지나가는 마차에 깔려 죽을 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는 없다. 죽음은 제 손으로 확실히 마무리 지어야 한다.
그는 이십여 장 떨어진 곳으로 갔다. 예정했던 대로 이두마차가 비어 있다. 그는 마차에 올라탔다.
‘무공도 모르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너무 쉬운 일이야.’
그는 싱긋 웃으며 말고삐를 낚아챘다.
“이랴!”
그의 생각대로 눈 한번 끔벅이면 끝나는 일이다.
다각, 다각, 다각다각, 다각다각다각……!
마차가 서서히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거리를 이십여 장이나 둔 것은 마차가 속도를 충분히 낼 만한 것도 계산했기 때문이다.
다각다각다각……!
마차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그때,
삐걱! 우당탕탕……!
갑자기 마차 바퀴가 빠져나가며 마차가 기울었다. 말은 두 발을 추켜올렸고, 마차는 정신없이 넘어갔다.
콰앙!
야반삼경에 지축을 뒤흔드는 소리가 터졌다.
‘이런! 제길!’
일이 뒤틀렸다.
살인을 십여 번이나 했지만 이렇게 재수 없는 경우는 처음이다.
그냥 칼로 목줄을 따 오라고 했으면 벌써 일을 마치고 술 한잔 기울일 시간인데.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새로운 마차가 필요하다. 준비된 마차는 바퀴가 빠져 넘어졌고, 말 두 마리는 마차와 함께 쓰러졌다가 일어서서 푸드덕거린다.
‘이런, 오밤중에 어디서 마차를 구해. 일이 꼬이는군.’
어쩌면 오늘은 이것으로 일을 끝내야 할지도 모른다. 잠에 취한 아이를 다시 자루에 집어넣고 데려가야 할지도.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의 눈이 번쩍 빛났다.
운 좋게도 다루 앞에 매여진 마차를 발견했다. 마차 주인은 다루에 들렀다가 곧장 기루로 간 듯하다.
‘세상에 별 미친놈도 다 있군, 내 마차 훔쳐 가라고 떠벌리는 것과 같잖아.’
어쨌든 하늘은 그에게 오늘 할 일은 오늘 마무리 지으라는 계시를 내렸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마차로 다가갔다.
마차 주인이 나타나 따따부따 지랄을 해대도 상관없다. 만약 그렇게만 한다면 단숨에 숨통을 끊어주리라. 청부와는 상관없는 죽음이지만 까짓것 덤으로 하나 더 주지 뭐.
그는 망설이지 않고 어자석에 앉았다.
“끼랴!”
고삐조차 매여 있지 않던 말들은 그의 말을 순순히 들었다.
그가 이끄는 대로 뚜벅뚜벅 걸음을 떼어놓았다.
말이 충분히 속도를 낼 수 있는 거리 이십여 장…… 그러나 말은 이십여 장을 걸어간 다음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다.
그는 고삐를 잡아당기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정수리가 파고든 도끼가 가슴까지, 그의 상반신을 정확히 반으로 갈라 버렸다.
분수처럼 솟구친 핏물이 흘러 어자석을 적셨다. 마차를 온통 적시고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무심히 걸음을 떼어놓는 말의 궁둥이에도 핏물이 묻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에게 어떻게 당했는지도 몰랐다.
‘깨끗하군. 너무 깨끗해 허허! 내게 이런 살수들만 있었어도…… 있기는 있었지. 뛰어난 살수들이. 모두 말아먹었지만. 허허!’
살인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노인.
그는 허허롭게 걸었다.
삶의 의미를 상실한 노인이 걷는 것처럼 휘적휘적 걸었다.
그는 아이가 묶여 있는 곳으로 가서 밧줄을 푼 후 안아 들었다.
“몹쓸 놈 같으니…… 아이에게 삼일몽을 먹이다니. 쯧! 살수들에게도 도의가 있는 법이거늘. 이 일로 네 아비가 정신 차리고 술 좀 그만 마셨으면 좋겠구나. 쯧쯧!”
살천문주다.
살천문주는 아이를 왕삼의 집에 데려다주었다.
깜짝 놀라는 아낙에게는 자초지정을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아이가 삼일몽을 복용하여 근 삼 일 가까이 잠만 잘 것이라는 것과 살인 청부가 들어갔었던 일까지.
아이를 데려다줄 일이 아니다.
정녕 아이를 생각했다면 왕삼 부부에게서 아이를 넘겨받아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놨어야 한다.
살수 문파는 청부를 끝까지 수행한다. 살수 한 명이 실패했다고 해서 중간에 포기하는 일은 없다.
살천문주는 왕삼의 집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도끼로 내리찍은 솜씨는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다.
도끼 같은 중병기를 그토록 섬세하게 쓸 수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병기에 손상된 살갗은 손상된 부위가 안으로 오므라든다. 거칠게 베였느냐, 깨끗이 베였느냐에 따라 오므라지는 정도도 다르다.
상대는 꽤 강한 무공을 지녔다.
무공으로만 상대해서는 도저히 승산이 없는 초강자다.
“반항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예, 암습을 받은 것 같습니다.”
“암습…… 누가 우릴 상대로 혈배를 들었단 말이냐?”
“아직 파악된 것이 없습니다. 그쪽 부분도 염두에 두고 가능성 있는 인물들을 점검해 보았지만 움직임이 없습니다. 아마도 새로운 세력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절도 있는 언행들이다.
상좌에 앉은 자가 다시 말했다.
“청부금이 얼마지?”
“은자 백 냥입니다.”
“그래, 은자 백 냥이야. 겨우 은자 백 냥.”
은자 백 냥은 적은 돈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은자 백 냥을 보면 목숨을 걸고 싸울 만한 큰돈이다. 하지만 상좌에 앉아 있는 사내에게는 하룻밤 용돈에 불과하다.
“청부 대상자는 누구지?”
“꼬마 아이입니다.”
“그래, 꼬마 아이. 겨우 은자 백 냥에 꼬마 아이 하나 죽이는 거야. 이 일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봐.”
널따란 대청에는 근 백여 명이 앉거나 서 있지만 아무도 손드는 사람이 없었다.
“그럼 은자 백 냥에 목숨을 걸겠다는 사람 있으면 손 들어봐.”
이번에도 조용하기만 했다.
“은자 백 냥짜리 청부에 꼬마 아이야. 그런데 죽었어.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
“당장 누가 죽였는지 찾아와! 꼬마는 오늘 중으로 없애 버리고.”
명령이 내려지자 대청에 있던 사내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사람 수는 백여 명에 이르지만 발걸음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가난한 마부의 집은 곧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구호가 당했어. 방심하면 나도 당할지 몰라.’
사내는 몹시 신중했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휘이잉……!
바람이 안마당을 쓸고 지나갔다.
현재 집 안에는 세 사람이 있다. 왕삼과 그의 아내와 자식.
단번에 쳐들어가 주먹으로 때려눕혀도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는 무지렁이들이다.
‘마차에 깔려 죽여야 한다고? 빌어먹을!’
청부에서 가장 많이 내거는 조건은 자연사처럼 위장해 달라는 것이다. 그다음이 반드시 죽여달라는 것이고, 그다음은 시신조차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처리해 달라는 거다.
마차로 깔아 죽이라는 조건은 흔치 않은 조건이다.
어려운 조건을 내거는 사람은 대부분 원한이 뼈에 사무친 사람들로 눈빛도 광기에 가득 차 있다.
사내는 청부자를 본 적이 없다.
청부는 지밀에서 받아들이며 사내와 같은 살수들은 순서대로 청부를 배정받는다.
같은 살수들끼리도 누가 무슨 청부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다. 정작 살행에 나서야 하는 살수도 밀지를 뜯어볼 때까지는 무슨 청부 건인지 짐작도 하지 못한다.
대부분 어려울 것이 없는 청부다.
사곡은 무인의 청부는 절대 받지 않는다. 무인을 상대할 만한 살수도 없을뿐더러 무인의 청부를 잘못 받아들였다가는 문파의 존립이 위태롭다.
사곡은 범인들만을 상대로 살수를 펼친다.
청부금은 적을 수밖에 없지만 일거리가 많아 수입 면에서는 다른 살수 문파들보다 뒤지지 않는다.
위험도 없고, 살행도 쉽고, 돈도 많이 버는 좋은 직업이다.
‘빨리 끝내고 가자.’
사내가 드디어 움직였다.
마당까지 접근하는 데 거치적거리는 것은 없었다. 대문도 없이 훤히 뚫린 마당인데 거추장스러운 것이 있을 리 없다.
창문을 살짝 열고 방 안으로 취혼무를 흘려 넣었다.
한두 번 해본 것이 아니니 솜씨가 익숙한 것은 당연하다.
사내는 나무 그늘을 찾아 몸을 숨겼다.
취혼무가 효력을 발휘하려면 약 일 다경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가 방문을 열고 들어설 무렵에는 누가 떠메어가도 모를 만큼 정신없이 곯아떨어져 있을 게다.
‘하나, 둘……’
수를 헤아리기 시작했다.
취혼무를 흘려 넣은 다음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동안 심심풀이로 한두 번 헤아리던 것이 습관이 되었다.
일 다경이 흘렀다.
다시 시간이 흘러 반 각이 되었다.
한 시진, 두 시진…… 무심한 시간은 자꾸 흘러 먼동이 터 왔다.
그래도 사내는 움직이지 않았다.
사내는 자신이 ‘구호’라고 말했던 사내처럼 머리부터 가슴까지 반으로 쩍 갈라져 있었다.
쓰러지지도 못했다. 나무에 등을 기대고 누워 누런 뇌수와 붉은 피를 있는 대로 쏟아냈다.
‘종리추가 사람은 잘 가르쳤구먼. 무공으로 겨뤄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데 철저하게 암습으로 죽였어. 자신이 있는데도 무공을 드러내지 않은 사람은 드물지. 허허허!’
살천문주는 배반을 당해 문주 직에서 쫓겨난 것이 다행이다 싶었다.
만약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못난 놈이 그랬던 것처럼 구파일방의 노리개가 되어 살문을 쳤을 게다. 묵월광에게 뒤통수를 얻어맞았을 테고.
그런 일이 없어도 종리추를 적으로 두고 싶지는 않다. 그의 적은 살아남지 못한다. 그가 죽이고자 하면 죽이지 못할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살천문주는 이 시대가 배출한 가장 강한 살수다.
살천문주는 광부의 종적을 잡아내지 못했다.
사곡 살수의 지척에까지 기어가 벽력사부를 휘두른 다음 어디론가 숨어버렸는데 어디로 숨었는지 종적을 잡아낼 수 없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지만 광부의 은신술이 완벽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간이 지나 새벽닭이 울 무렵 왕삼의 집으로 다가서는 낯선 자들이 보였다.
그들은 청부를 이행하러 온 자들이 아닌 듯싶었다.
나무 그늘에 숨어있는 살수의 시신을 보았고, 상처가 손상되지 않도록 조심하며 들것에 실었다.
두 명이 들것을 들고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들의 모습은 곧 새벽 안개에 가려져 희미해졌다.
남은 자들은 천을 꺼내 펼쳐 놓고 땅에 떨어진 장기를 수습했다. 살점 한 조각도 남겨놓지 않았다.
한 사내가 천을 둘둘 말아 밧줄로 묶는 동안 다른 사내들은 핏자국을 지웠다.
지운다고 지워질 핏자국이 아니다.
사내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 피는 작은 개울이 되어 흐른다.
현장을 수습한 사내들이 사라져 갔다.
‘이제부터 태동이야.’
살천문주는 오래도록 사내들이 사라져 간 방향을 쳐다봤다.
작은 청부가 큰 싸움을 불러왔다.
살수 두 명이 연속해서 살해당한 것은 간과할 일이 아니다. 꼬마 아이 하나 죽여달라는 청부를 아직껏 이행하지 못한 것은 망신이다.
“어떤 놈이냐?”
“……”
대답이 있을 리 없다. 심호가 왕삼의 집으로 들어가는 것까지 보았고, 취혼무를 불어 넣는 것도 보았다. 십호는 나무 그늘에 가서 기다렸고…… 기다렸고……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십호가 죽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암살자의 신형은커녕 그림자조차 보지 못했는데.
사곡주는 침중한 낯빛을 거두지 못했다. 수하들의 표정만 보고도 사정 내막을 짐작할 수 있다.
‘혈배야. 혈배를 들려는 놈들이야.’
사곡주는 아침도 거른 채 길을 나섰다. 이런 사건은 속전속결로 해치워야 한다.
혈배를 들려는 자들은 지나치리만큼 세심하게 준비한다. 사곡 사정을 충분히 파악했을 테고, 살수들의 능력은 물론 자신의 무공 정도까지 모두 정리해 놓았을 게다. 그리고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도끼질을 해댔겠지.
사곡주는 도성을 빠져나와 감주로 방향을 잡았다.
성을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선도교에 이르렀다. 관도와 이어진 다리로, 사두마차 두 대가 지나갈 만큼 큰 다리다. 다리 아래로는 선강이 흘렀다.
‘놈! 잘못 알았어. 얼마나 무모한 행동이었는지 똑똑히 가르쳐 주지. 꼭 후회하게 만들어주겠어.’
사곡주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선도교 다리 밑에서 힘을 얻었을 것이고 활력을 되찾을 것이다. 도끼를 휘둘러 대는 미친놈이 누군지도 알아낼 것이고 잘하면 놈의 무공까지, 놈에게 공범이 있는지도 알아낼 수 있다.
다리 밑으로 내려갔다. 선도교 다리 밑은 축축한 습기로 가득했고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놈의 냄새는 언제 맡아도 지겨워. 대단한 놈들이야. 이런 냄새 속에서는 하루도 살지 못하겠는데.’
다리 밑은 대단했다. 바람과 추위를 막느라고 쳐놓은 거적때기가 줄지어 늘어섰다. 수많은 거지들이 득실거렸다.
“내 바가지 어느 놈이 가져갔어?”
“야, 그만 일어나지 못해!”
“이런 개놈의 새끼, 어디서 뒈지려고 어르신 발을 밟아. 눈깔이 개눈깔이냐!”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사람들이 일어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지만 거지들은 벌써부터 부산하게 움직였다.
아침 동냥을 나가려는 것은 아니다. 아침 동냥은 제대로 되지도 않을뿐더러 재수 없다는 핀잔만 얻어먹는다.
동냥은 해가 뜨고 난 다음에도 한참이 지나서야 시작된다.
그렇다고 아침을 거를 수는 없다. 이들은 성내로 들어가 돼지 밥도 훔쳐오고 간밤에 버린 술안주도 주워온다.
사곡주는 거지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에게 시비를 거는 거지는 아무도 없었다. 사곡주의 얼굴은 거지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고, 알려진 사람은 건들지 않는다.
살이 닿기만 해도 병이 옮을 것 같은 거지들의 틈을 헤치고 얼마간 걸어간 후, 남루한 거적때기를 들추고 안으로 들어섰다.
“응? 사곡주 아니오? 사곡주께서 식전 댓바람에 무슨 일이오?”
얼굴에 땟국이 자르르 흐르는 거지가 물었다.
사곡주는 어제저녁에 먹은 것이 올라오는 듯했다. 먹다 남은 국수는 퉁퉁 불어 있는데 신주단지 모시듯 고이 모셔놓고 있다. 아침으로 먹을 요량인 것 같다.
“분타주께 여쭤볼 말이 있어서 찾아왔소이다.”
“그러시오? 무슨 말인데 그럴까? 아는 데까지 대답해 줄 테니 어디 들어봅시다. 앉으시오.”
앞의 말들은 다 좋은데, 맨 뒤의 말이 좋지 않다.
방바닥 대용으로 쓰는 거적때기에서는 썩는 냄새가 풀풀 피어났다. 음식도 흘리고 신발을 신은 채 오간다.
돼지우리라 해도 이보다는 깨끗할 게다.
사곡주는 거적때기 위에 앉았다.
“지금 막 아침을 먹으려던 중인데, 같이 한술 뜨시려우?”
“아니, 됐습니다.”
아침만은 같이 못 먹겠다.
누가 버린 건지도 모르고, 쉬어 터진 건지도 모른다. 안에 침을 뱉았을 수도 있고……
좌우지간 불결하기 짝이 없는 음식이다.
족히 일 년 동안은 머리를 안 감은 듯 수세미 머리를 한 걸개가 국수를 먹기 시작했다.
사곡주는 욕지기가 치밀었다. 멀찌감치 놓여 있을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 가져와 먹기 시작하자 이상한 구린내가 비위를 뒤틀었다.
“분타주, 얘들 두 명이 당했습니다.”
“그래요?”
분타주는 놀란 듯했지만 여전히 국수를 먹고 있다. 그것도 아주 맛있게.
“정수리부터 가슴까지 쪼개져 죽었는데 솜씨가 아주 깨끗했지요.”
“허허! 사곡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정말 솜씨가 깨끗한 솜씨였던가 봅니다.”
‘능구렁이…… 죽어서야 저 버릇을 고치지.’
사곡주는 개방 서안 분타주 도룡신개와 어느 정도 친분을 유지했다고 생각한다. 개방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야만 섬서성에서 활개 치고 다닐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다 알면서 모른 척 시치미를 뗄 때는 정말 오만정이 떨어진다.
“제 생각에는 혈배를 들고 싶은 놈들 짓 같은데……”
“아! 그래요?”
“하하! 수치스럽게도 저희 사곡에서는 흉수를 잡아내지 못해서……”
사곡주는 말꼬리를 흐리면서 도룡신개를 쳐다봤다.
“……”
도룡신개는 여전히 국수만 먹고 있다.
퉁퉁 불어 터진 국수를 다 먹고, 쉬어 터진 국물까지 다 먹은 것도 모자라 이빨 빠진 사발을 혀로 핥고 있다.
‘같이 먹자고 했으면 큰일 날 뻔했군.’
사곡주는 묵직한 전낭을 내밀었다.
은자 이백 냥…… 개방에 도움을 요청할 때마다 건네는 액수다.
전낭은 어느새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좌우지간 도룡신개가 전낭을 가로채 품속에 찔러 넣는 솜씨만은 천하제일일 게다.
“헤헤! 일이 많아서……”
전낭을 가로챈 다음에는 늘 같은 소리다.
“그럼 분타주만 믿겠소이다.”
“그러시구려.”
분타주는 아쉬운 듯 국수 사발을 들어 다시 핥았다.
왕삼은 자식이 깨어나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낯선 노인에게서 살수 청부가 있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깜짝 놀랐다. 비록 직접 듣지는 못했지만 삼일몽에 취해 있는 자식을 보니 마음이 언짢았다.
자신이 죽인 아이에 대한 죄책감도 사라졌다.
뭐니 뭐니 해도 혈육이 최고다.
아마 자식 목숨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을 달라고 했으면 기꺼이 줬을 게다. 살인 청부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어도, 청부가 미수에 그쳤어도 목숨을 내맡겼을 게다.
아이를 죽인 죄책감은 왕삼의 몸과 마음을 모두 갉아먹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고통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자기 자식이 죽었다고 똑같은 방법으로 남의 자식을 죽이라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왕삼은 삼 일 동안 자식 곁에서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았다.
집 마당이 피바다로 변해 있는 모습을 본 다음에는 더욱 조심했다.
왜 자신에게 알지 못할 일들이 일어난단 말인가.
자식이 삼일몽에서 깨어나 배고프다고 말할 때는 하늘을 날 듯 기뻤다.
“깨어났어! 깨어났어!”
자식을 껴안고 볼을 비볐다.
“아빠! 따가워, 따갑단 말야!”
자식이 귀여운 앙탈을 부렸지만 오늘만은 개의치 않았다.
그런 그에게 또 알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자신들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이 찾아온 것이다.
“그 낯선 자의 용모가 어떻게 생겼는데?”
능글맞게 웃어대는 걸인에게 왕삼 부부는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아요. 약간 배가 나온 것 외에는.”
“몇 살이나 되어 보이고?”
“글쎄요? 한 오십 정도? 나이는 들어 보이는데 머리가 새치 하나 없이 검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개방 문도가 찾아와 묻는 데는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방 문도는 걸식을 하지만 사람 목숨에 관해서만은 옳은 일을 한다는 믿음이 있다.
“뭐 무기 같은 건 갖고 있지 않았고? 도끼 같은 것 말야.”
“그런 건 없었는데요.”
아낙이 기억을 되새기며 말했다.
“무인 같지 않았어?”
“글쎄요…… 무인이 뭐 이마에 써 붙이고 다니나요.”
“말귀를 못 알아듣기는…… 이마에 써 붙이지는 않았어도 느낌이 있을 것 아냐.”
“그렇게 말하니 무인 같기는 하네요. 몸에 살이 붙었기는 하지만 단단해 보였거든요.”
“이거야 원 뜬구름 잡기지…… 좋아, 그럼 기억을 되새겨서 잘 찍어봐.”
왕삼 부부 앞에 걸개 열 명이 일렬로 늘어섰다.
걸인들이 입고 있는 누더기를 걸쳤으니 걸인은 확실한데 얼굴에 복면을 쓴 자들이다.
“먼저 이마. 어느 놈 닮았어?”
걸개들이 복면을 눈썹 위까지 벗었다.
머리카락을 뒤로 묶어 이마가 훤히 드러났다.
“모르겠는데요……”
“하나 찍어봐.”
아낙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 사람을 지명했다.
“글쎄요…… 저 사람을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다음은 눈썹이다. 걸개들은 복면을 뒤집어썼고, 눈 있는 부분만 천을 떼어냈다.
특이하게 만든 복면이다.
눈 있는 부분, 코 있는 부분, 입 부분…… 모두 각개로 떼어낼 수 있도록 천을 엮어 만든 복면이다.
걸개들은 이목구비를 하나씩 드러냈고, 아낙은 한 명씩 찍었다.
“얼굴을 보면 모를까, 이렇게 조금씩 보니까 더 모르겠어요.”
화공이 걸개들의 얼굴을 그렸다.
아낙이 짚어준 순서에 따라 이마, 눈썹, 코…… 한 명씩 화공 앞에 섰고, 차례차례 그려 나갔다.
약 반 각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화공은 한 명의 화상을 그려 걸개가 그림을 가져왔다.
“이 사람 맞아?”
“아뇨, 코가 좀 더 뭉툭한 것 같고…… 볼살은 좀 더 진 것 같아요. 아! 입술도 좀 더 두텁고요.”
화상을 보자 여인은 기억이 되살아난 듯 활기차게 말했다.
화공이 다시 그림을 그렸다. 그린 그림은 아낙에게, 그리고 아낙이 수정했고, 화공이 다시 그림을 그렸다.
같은 일이 무려 십여 번이나 반복됐다.
걸개들이 왕삼의 집을 찾아온 건 아침 녘인데 벌써 점심때가 훌쩍 넘어섰다.
“비슷해요. 그래요. 이 사람과 비슷해요. 어쩜……! 정말 잘 그리네요.”
아낙이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이 사람이 정말 무기는 들지 않았단 말이지?”
“네, 정말 안 들었어요.”
“아이를 데려온 다음 한 번도 다시 본 적이 없고?”
“네, 없어요.”
아낙이 대답하는 사이 화공은 똑같은 그림을 그려냈다. 처음에는 걸개가 준 화상을 보고 그렸지만, 대여섯 장이 넘어가면서부터는 화상을 보지 않고도 그려냈다.
걸개들이 화상을 가지고 서안 도성을 이 잡듯 뒤지고 다녔다.
“이 사람 본 적 있소?”
“없는데요.”
“보면 바로 알려주시오.”
“그럼요.”
사람들은 거지를 무시하지 못했다.
동냥을 왔을 때는 타박도 했지만, 이렇게 정색을 하며 무엇인가를 찾아다닐 때는 신경을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저녁 무렵이 되었을 때, 걸개들은 몇 가지 정보를 추가로 얻었다.
화상 속의 인물은 서호평이라는 장인이다.
병기를 만드는 장인도 아니고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농기구를 만든다. 솜씨는 썩 좋지 못했다. 다른 곳보다 절반이나 싸지 않았다면 서호평에게 농기구를 사는 사람은 없었을 게다.
서호평이 팔았다는 대장간은 텅 빈 채 먼지만 가득했다.
화로에도 불길이 오른 지 꽤 된 듯 차디찬 냉기만 흘렀다.
서안 분타주 도룡신개는 일결 제자들을 거적때기 움막으로 불렀다.
“뭐 더 알아낸 것 없지?”
“네, 오늘은……”
“됐어, 그만하면.”
“네?”
“야! 돼지! 넌 지금 사곡으로 가서 서호평이라는 장인이 흉수라고 말해줘.”
“분타주님, 서호평은……”
“자식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지 말이 많아! 너 뒈질래!”
“아, 아뇨.”
“빨리 가라. 어쭈! 행동 굼뜬 것 봐! 셋 센다. 셋 셀 동안 꼬라지가 사라지지 않으면 반쯤 뒈지는 거야. 셋!”
돼지라고 불린 걸개는 이미 움막을 나가고 없었다. 도룡신개가 셋을 센다면 정말 셋을 센다. 경험 없는 백의개는 열이면 열 모두 걸려드는 수법이다.
돼지가 사라지고 난 후, 도룡신개는 지경 제자들을 돌아봤다. 장난기는 사라지고 냉정한 표정이다.
“이자가 누군지 알아?”
“분타주님도 참…… 서호평이지 누구……”
대답하던 걸개는 무서운 눈길을 보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겉만 보지 마. 이 자는 살천문주야. 멸문한 살천문의 문주. 살수파 문주치고는 진짜 무공을 지닌 자야. 아주 강해.”
이결 제자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분타주님, 그럼 왜 사곡주에게……”
“시끄럽다! 아직 내 말 안 끝났어!”
“……”
“바로 총단에 보고해.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어. 살천문주는 검을 쓰지 도끼를 쓰지 않아. 제삼의 인물이 있다는 거야. 살천문주는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뜻도 되지. 그 제삼의 인물이 사곡을 점찍었다면…… 사곡은 아마도 멸문하게 될 거야. 견딜 수 없지.”
“그, 그런 일이!”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어. 우린 살천문주의 움직임을 잡아내지 못했어. 더군다나 제삼의 인물이라니…… 살문에 이어 제삼의 인물…… 아니지, 살문주가 살천문주를 구해준 전력이 있으니 아마도 살문이 움직였을 가능성이 커.”
“하지만 살문은 팔부령에……”
“생각 좀 하자, 이 돌대가리들아!”
도룡신개는 한참 동안 생각했다.
“야! 넌 물 좀 떠오고, 나머지는 모두 나가. 나가는 즉시 바로 총단에 보고하고.”
“예, 예.”
이결 제자들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도룡신개는 첫 살인이 벌어졌을 때 자신이 맡고 있는 서안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죽은 자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사곡주가 제 발로 찾아오니 모든 게 명백해졌다.
그러잖아도 팔부령 싸움 때문에 살수 문제로 이를 앓고 있는 판인데……
이결 제자 중 물을 뜨러 간 자가 사발에 물을 떠왔다.
도룡신개는 급히 적은 서신을 제자에게 주었다.
조용한 눈빛이 오고 가는 동안, 이결 제자는 서신을 재빨리 품속에 찔러 넣었다.
말은 필요 없다. 누구에게 전하라는 말 따위는 입만 아프다. 개방 내에도 몇몇 사람만이 연결 고리를 맺고 있으니 천외천이다. 개방에서 가장 강직한 성품을 지닌 사람, 흑살광괴가 정신적 지주다. 방주가 알게 되면 모두 축출이 되리라. 이결 제자가 움막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조용히 다리 밑을 벗어나 길을 재촉했다.
쌍객
사실상 십망은 무너졌다.
구파일방을 정신적 지주로 삼고 있던 무림군웅들은 공허했다. 십망이 무너졌다는 것은 구파일방의 토대가 무너진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마인들을 제어할 도구가 사라진 것이니까. 구파일방은 아직도 건재하다.
십망이 건재했던 때와 조금도 다름없는 하루가 지나간다.
소림사가 봉문에 들어가 참배객을 받지 않는 것 이외에는 달라진 것이 조금도 없다. 그래도 허전한 마음은 가눌 길 없다. 구파일방은 든든한 보호막이었다. 심성이 악독한 마인이 나타나면 곧바로 징계에 들어갔으니 염려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마인이 자신의 지역에 출몰하면 직접 병기를 들고 맞서야 한다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위기감은 강함을 추구하게 만든다.
중소문파, 혹은 홀로 중원을 떠도는 명숙들은 한시도 병기를 떼어놓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십망이 무너졌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경각심이 일깨워졌다.
“그것도 좋겠지. 무공이란 자극이 있어야 발전되는 법이니까. 사실 그동안 무림은 너무 조용했어. 조용한 것은 나쁘지 않지만 고인 물이 되어서는 곤란해.”
무당 장문인 현현 도인이 했다는 말이 무림에 퍼지면서 무림군웅은 병기를 다듬었다.
달빛이 참 밝다.
어렸을 때도 달을 봤지만 지금과는 전혀 다른 눈으로 봤다. 달 속에는 선녀가 살았고 토끼가 살았다.
지금은 전혀 다른 것이 산다.
스스슥……!
기척이 감지된다.
주변 야산은 큰 나무가 거의 없어 평원이나 다를 바 없다. 흙이 산처럼 솟아 있지 않고 평평하다면 농사짓기 딱 좋은 평원이다.
땅이 솟은 곳도 웬만한 산 높이이니 그냥 산이라고 하자. 언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높으니.
산 위에 올라서면 사방이 훤히 보인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사방 천여 리는 한눈에 들어온다.
그는 산정에 앉아 달을 쳐다봤다.
경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사방이 탁 트인 곳을 공격하려는 자는 우둔하기 짝이 없는 자다.
저들에게도 장점은 있다. 사방이 탁 트였다고는 하지만 풀이 한 길이나 자라 납작 엎드리면 보이지 않는다.
배를 땅에 대고 엎드려 웬만한 산 높이의 구릉을 올라온다?
미친 짓이다. 그런 식으로 구릉을 올라온다면 아무리 못해도 족히 하루는 걸릴 게다.
사사사삭……!
풀이 흔들렸다.
바람이 불었기 때문인가? 아니다. 이것은 적이 다가오는 신호다. 모순되게도 신호는 적이 보내준다.
풀숲은 신형을 가려주지만 살수들에게는 좋은 감청 역할도 해준다.
‘지겨워. 언제까지 이런 짓을 반복해야 될지……’
달빛에 병색이 완연해 누렇게 뜬 얼굴이 보였다.
살수들은 그런 얼굴을 한두 명씩은 가지고 있다. 아버지의 얼굴이 될 수도 있고 어머니의 얼굴이 될 수도 있다. 처자식의 얼굴일 경우에는 더욱 애잔하다.
사사사사삭!
다시 풀이 소리를 냈다.
규칙적으로 일정하게 흔들리는 소리라면 틀림없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소리는 바람이 흔들어대는 소리와 다르다.
바람은 불규칙적이라 예측할 수 없지만, 사람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예측할 수 있다.
사사사삭….!
좀 전보다 훨씬 민활한 움직임이 전개되었다.
풀숲에 숨어 있던 살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영활한 독사를 능가했다.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새처럼 구릉 곳곳을 누볐다. 숨어서 싸우는 것이라면 살수를 능가할 자가 없다.
이곳처럼 사방이 탁 트여 일어설 수 없고 풀숲에 숨어서 싸워야 할 경우 살수의 능력은 일당백이 된다.
파아앗!
인영 하나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우아한 한 마리 학처럼 날렵하고 부드러운 신법을 지닌 자다. 하지만 그는 졌다.
살수에게 밀려 풀숲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는 진 게다.
목숨을 잃은 게다.
이런 싸움은 밀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가 먼저 밀려나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대로 있으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지금처럼 밀어낼 수 있고, 밀어내기만 하면 틀림없이 죽인다.
쉬이익……..!
허공으로 신형을 날린 자는 쭉 날아 일 장 밖으로 떨어져 내렸다.
순간 그는 움찔했다.
‘죽었군.’
몰랐을 게다. 먹이를 밀어내는 순간 살수들은 그가 내려설 자리에 미리 대기하고 있다.
그는 눈이 있어도 볼 수 없다. 살수의 은신술은 목숨을 걸고 익힌 비기(秘技)니까.
아무것도 없다고 확신하는 순간 검이 날아와 치명적인 사혈(死穴)을 베어낸다.
소리도 기척도 없는 무검(無劍)이다.
살수들의 검에는 생명이 없다. 활기도 없고, 살기도 없다.
어떻게 완전히 생명을 끊어놓느냐, 송장처럼 완전히 죽은 검을 가지느냐에 따라 살수의 능력이 결정된다.
사사사삭….!
또 하나의 인영이 밀려나고 있다.
허공으로 솟구치거나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움직임이 빨라졌다는 것은 이미 밀려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소리를 흘리는 순간 그는 죽었다.
사사사삭…!
재빨리 움직이는 한 점을 사방에서 포위하고 달려드는 살수들.
그는 살수들을 보지 못하지만 살수들은 그를 본다.
파앗!
드디어 밀려났다. 검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까지 이르도록 접근을 눈치채지 못한 그가 위기를 느끼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그런 행동밖에 할 수 없다.
사방에서 검이 쇄도하게 되면 일단 위험한 자리를 벗어나고자 하는 게 사람의 심리다.
그런 행동은 특히 신법에 자신을 가진 무인일수록 쉽게 드러난다.
허공에 뜬 무인이 방향을 트는 순간 풀숲에 엎드려 있던 살수들이 비호처럼 움직였다.
그는 허공에서 아래를 보고 있지만 살수들의 움직임을 감지해 내지 못한다.
똑같은 풀숲이지만 풀숲에서 생활한 자와 생활하지 않은 자의 차이는 명확하다.
풀의 생리를 알고 이용하는 자, 풀을 모르는 자. 아는가!
살수는 자연을 친구로 둔 자연인이다.
자연과 가장 닮은 사람들이다.
하얀 달에 뼈만 앙상한 노파의 얼굴이 그려졌다.
‘참 지지리도 가난하게 살았어.’
아버지는 노름판에서 어설프게 사기를 치다가 몰매를 맞았다.
정말 죽도록 맞았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좋으련만 얼마나 생명이 질긴지 죽지도 않았다. 척추만 다쳤고 반신불수가 되어 없는 살림에 무거운 입 하나만 얹었다.
어머니가 가진 것은 몸뚱이뿐이다.
어머니는 거적때기를 들고 나섰다.
어렸을 때는 그것이 무엇을 하는 것인지 몰랐다. 간혹 쌀이라고 들여오면 마냥 좋기만 했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은 모두 밖으로 쫓겨나는 날이다.
낯선 사내가 들어갔고, 숨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달 속에서 말라 빠진 노파의 얼굴을 보게 된 이 순간까지도 그때의 숨소리는 뚜렷하게 살아난다.
반신불수가 된 노인네는 등을 돌리고 누워있다.
등 뒤에서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려도 귀머거리가 된 듯 아무 소리도 하지 못한다.
아니, 숨소리에 방해가 될까 봐 자신의 숨소리마저 숨긴다.
그러면 돈이 생긴다.
어머니의 얼굴에 주름이 생기면서부터 누이가 대신 거적때기를 들고 나섰다.
세상이 개 같다는 것은 그때 알았다.
다행히도 누이는 거적때기를 몇 년 들지 않았다.
하체에서 고름이 쏟아지더니 열이 팔팔 끓고 시름시름 앓다가 약 한 첩 써보지 못하고 갔다.
‘개 같은 세상….’
스스스슥….!
전과는 조금 다른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이번 움직임은 극히 은밀하여 마치 살수가 움직이는 것 같다.
하지만 방향이 다르다. 살수는 구릉 아래쪽으로 움직이는데, 이번 움직임은 위로 올라온다.
달빛이 반으로 갈라지면서 피를 흘려냈다.
그가 움직일 차례다.
“하하! 또 졌군.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무리인가? 좋아, 한 번 더 해보지. 이번에는 조심해야 할 걸세. 자네들 움직임을 어느 정도 알아냈거든.”
“…..”
“사람 참 무뚝뚝하기는. 웃으면 어디 덧나나?”
그는 웃었다.
개 같은 세상에서는 힘 있는 자의 말에 따라야 한다.
“그래, 그렇게 웃으니 얼마나 보기 좋은가. 자! 다시 한번 해보세. 다시 한다!”
그는 달을 쳐다봤다.
달 속에는 입가에 피를 머금고 있는 귀신이 산다.
자신의 얼굴이다. 자신의 얼굴이 밝고 맑은 모습이 아니라 귀신의 형상이 되어 나타난다.
‘죽을 때가 다 됐군.’
살수가 느끼는 죽음의 예감은 거의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비객은 어느 정도까지 수련을 마쳤습니까?”
청성파 장문인이 물었다.
“모두 영민해서 육성 정도까지 수련을 마쳤답니다.”
무당파 장문인이 대답했다.
“오! 그래요? 그것 참, 놀랍군요.”
“모두 장문인들께서 성심을 다해주셨기 때문이지요.”
“당연한 일인 걸요. 그러나저러나 소림이 빠져서 좀 마음이 무겁습니다.”
“소림이 자초한 일 아닙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습니다.”
화산파 장문인이 말했다.
초식과 발경 기법은 다르지만 어느 문파나 무공을 익히는 순서는 비슷하다.
무공의 토대가 되는 기본공으로 몸을 만든 다음 초식을 수련한다.
투로가 어느 정도 몸에 붙으면 내공을 수련하게 된다.
조금 더 지나 진기라는 것을 느낄 즈음 무기술을 수련한다.
무기를 익힌 다음에는 실전에 대비하여 산타 수련을 하고, 마지막으로 의술을 익힌다.
두부를 자르듯 칼로 잘라 말하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무공은 이제는 어느 단계로 넘어가자 하고 딱 부러지게 말할 수 없다.
초식을 수련하는 단계를 구별할 수는 있지만 대체로 복합적으로 수련하게 된다.
여기에 한 가지 수련이 더 가미되었다.
살수들이나 익히는 은신술.
팔부령 싸움으로 숨어서 싸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자각한 것이다.
살수도 병기를 들고 싸우는 인간이니 그들을 상대할 방법이 필요하다.
그러자면 자연히 은신술을 배워야 하고 파훼하는 방법을 터득해야 한다.
하지만 정종 무공만 수련한 명문대파에 은신술 같은 것이 있을 리 없다.
장문인들은 고민 끝에 살수 문파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된 곳이 호광성의 비망사.
이번 팔부령 싸움에 비망사도 살수를 파견했고, 모두 전멸했다.
삼현옹이 펼쳐 놓은 천우진은 비망사도 뚫지 못했다.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는다.
어차피 살수 놈들이 무공이래야 별것 아니잖는가.
그들에게서 배울 것은 은신술뿐이다.
구파일방 장문인들이 토론한 끝에 중원에 퍼져 있는 살수 문파 중 은신술로 가장 강한 곳은 비망사라는 결론을 내렸다.
무당파는 비망사를 움직였고, 그들은 각 파에서 파견된 젊은 영재들을 수련시키고 있다.
살수가 명문대파의 영재들을 수련시킨다면 고개를 갸웃거리겠지만…
비객이라 불리는 그들은 무공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전신 무공은 꼭꼭 숨겨놓고, 단지 신법만을 활용하여 살수들과 겨룬다.
은신술이란 느낌이다.
감각으로 알아야 하고 느껴야 한다.
비객이 비망사를 누르고 하산하는 날, 무림은 또 한 번의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십망이 사라진 대신 비객이 움직인다.
그들은 중원 전 문파의 지원을 받을 것이고 사마의 무리들을 제거하는 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비객이다.
죽이기만 하면 된다. 정파인으로서 차마 하지 못할 일이라고 생각되는 행동도 서슴없이 할 수 있으며, 인의, 도의에 어긋난 일도 용납이 된다.
비객은 절대무쌍의 권한을 갖게 되는 게다.
무림인은 과정을 알 필요가 없다. 결과만 알면 된다.
소림을 제외한 아홉 파가 동의했다.
나이는 스물에서 서른, 무공은 차기 장문인으로 생각할 만큼 걸출해야 하고, 심성은 악을 원수처럼 미워해야 한다.
그들은 비객이 되는 순간부터 자신의 문파를 잊게 된다.
지금까지 자신을 키워준 문파이고 사연도 많겠지만 모두 떨쳐야 한다.
혈연도 끊어야 한다.
비객은 이름도 없으며 단지 비객으로 불릴 뿐이다.
비객의 우두머리는 제일 비객이라 불릴 것이며 제일 비객이란 자리는 비객 스스로들 알아서 정하게 만들었다. 모두가 공감하는 최고 강자에게 자리를 맡기도록.
활동 기한은 십 년으로 생각하고 있다.
제일대 비객이 움직이는 순간부터 제이대 비객이 양성될 것이다.
제이대 비객 때는 살수들에게 은신술을 배우는 일 따위는 없을 게다. 은신술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알게 될 테니까…
활동 기한을 십 년으로 내정한 것은…..
그동안 무림에 나타났던 마두들을 생각해 봤다.
혈암검귀, 오독마군, 혈영신마, 종리추… 십망을 펼치고도 놓친 자들.
비객에게 최고의 지원을 해줘도 그들과 같은 자와 겨룬다면 희생이 불가피하다.
혈암검귀 한 명을 죽이는 데 비객 스무 명은 죽을 것이다. 그것도 최고의 조건 하에서 암습, 연수, 독살 등 온갖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싸운다는 가정 아래 내려진 결론이다.
십 년이면 제일대 비객은 모두 죽는다.
살수 문파가 차도살인 이용물이었던 것처럼 비객도 소모품이다.
무쌍한 권력을 쥐어줬다는 것만 빼면,
걸출한 인재들인데 누가 죽기를 바라겠는가.
그들을 선발할 때는 뼈를 깎는 아픔이 수반된 것을 누가 알까.
비객이 어느 한 파의 소유물이 되지 않도록 견제하는 장치도 필요하다.
장문인들은 팔파일방 장문인들이 전원 찬성할 경우에만 비객을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비객들은 장문인도 만나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의 은신처에 머물 것이며 제일 비객이 팔파일방 장문인들의 연서를 받은 후에야 움직이리라.
각 파에서 선출된 구십 명의 비객.
그들이 비망사에게 은신술을 배우고 있다. 아니, 비망사와 은신술을 겨루고 있다.
무공을 펼치면 상대도 되지 않을 미미한 존재이지만 목적이 비망사 아닌 이상 은신술로만 겨루면 된다.
“방주, 최근 서안에서 벌어진 일은 뭡니까?”
공동파 장문인이 물었다.
“그게… 그것 참…. 사곡 살수가 죽었는데 꼭 살문의 행위 같단 말입니다.”
“살문이요? 살문은 팔부령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잖습니까?”
“그러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요. 살문은 움직이지 않는데 움직이는 것 같으니…”
“무슨 근거라도 있습니까?”
“살천문주가 누군가의 하수인이 되어 나타났어요. 살천문주를 하수인으로 부릴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되십니까? 살수 중에.”
“종리추.”
“그렇지요. 그런데 종리추는 팔부령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단 말입니다. 허!”
개방 방주가 하는 소리이니 의심할 필요도 없다.
살문은 움직이지 않고 있다.
“또 그 놈의 살문이군. 살문……”
살문은 팔부령에 틀어박혀 있지만 여전히 눈엣가시였다.
“장문인들께서 십망을 대신할 수단으로 비객을 양성하고 있소.”
“들었습니다.”
“비객… 좋은 대안이오. 이제야 정신들을 차리다니.”
“비객에 우리 천인이 몇 명이나 들어 있습니까?”
“아흔 명 중 열네 명이오.”
“그만하면 됐습니다. 잘하면 비객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겁니다.”
“난 결심했소. 우리도 비객에 상응하는 절대 강자를 양성할 필요가 있소. 비객이란 명칭은 이미 사용했으니 우리는 천객이라고 합시다.”
“천객…..”
“팔부령에서처럼 무력하게 물러서지 않으려면 살수들을 능가하는 살수가 필요하오. 살수! 그렇소. 우리는 살수를 양성해야 하오. 저들보다 훨씬 잔혹한 살수를 말이오.”
“찬성입니다.”
“좋습니다.”
“좋아요.”
늙은 음성, 여인의 음성, 젊은 청년의 음성…. 모든 음성이 골고루 섞여 나왔다.
“세상에서 가장 혹독한 수련을 시킬 것이오. 적자생존의 수련이 될 터인즉 주변에서 천거할 사람이 있으면 천거해 주시오. 수련을 마치지 못한 자는…. 죽을 것이오.”
진득한 살기가 풍겼다.
“제가 제일 먼저 추천합니다. 접니다. 제가 천객의 일원이 되겠습니다. 전 제일천객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하지만 비객은 제일 강한 자가 제일 비객이 된다고 합니다. 저도 그 규칙에 따르겠습니다. 공정하게 수련할 것이고, 저보다 강한 자가 나타나면 기꺼이 제일천객 자리를 내놓겠습니다.”
“하하! 소림 사룡 백천의를 무시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 자청하지 않아도 부탁할 생각이었네. 자네처럼 살수들을 증오하는 사람도 없으니 아주 적격이지.”
소림 사룡 백천의… 특이한 사람이다.
“그렇지만 자네도 혹독한 수련을 거쳐야 할 걸세. 다른 천객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물론입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은 흑봉광괴 어르신께서 준비하신 그 수련이란 것….. 도대체 어떤 수련입니까?”
모두 흑봉광괴에게 시선을 모았다.
흑봉광괴가 장담하니 믿어야 하지만 어떤 수련인지 알고 싶은 마음은 억누를 수 없다.
“비객은 각 파의 무공에 단지 은신술만 더한 것뿐이야. 활동 기한도 십 년이라고 하지. 십 년이면 모두 죽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야. 그 말이 맞지. 그런 식이라면 십 년만 버텨도 용하지.”
“…..”
“개방에는 잊혀진 수련법이 있다네. 너무 잔혹하다 해서 폐지된 수련법이지.”
“천봉세맥타동!”
“천봉세맥타동은 구진법 중 첫 일진법일세. 구진법은 모두 수련하면… 천하제일 강자 반열에 들지. 하지만… 열에 아홉은 실패하는 수련이야.”
“………..”
모두 침묵했다.
개방의 구진법은 혹독하기로 악명 높다. 소문만 들었지 실제로 보지 못한 구진법이 거론되고 있다.
“난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수련을 마치지 못한 자는 죽일 생각이네. 그 점은 이해하고………. 사람들을 천거해 주게.”
무거운 침묵이 내리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