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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37화


야시장은 사라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계를 걸고 있는 야시장은 거대한 폭발로 폐허만 남았다. 나들보다

조금 더 부지런해서 대낮부터 나와 요것저것 만지작거리던 사람들도 화를 피하지 맛하

고 폭사했다.

묵월광 살수들은 깊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특히 소고에게 청면살수는 특별한 존재다.

우완금, 단우금, 신소미…

이름도 셋이나 되는데 어느것이 진짜 이름인가!

청면살수의 죽음은 소고의 신분 내력마저 미궁 속으로 함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까짓 거 상관없다.

어차피 버려진 자식인데, 죽기로 작정하고 마지막 결전까지 준비했는데 이제 와서 부

모가 누구인들 알아서 뭣 하는가.

청면살수는 사부였으며, 아버지였고, 조부다.

소고에게는 그녀를 보호해 줄 수 있는 모든 역할을 해준 분이다.

소여은의 사부인 미안공자도 죽었다.

적사는 다른 사림들과는 사뭇 달랐다.

쌀쌀맞지는 했지만 적사와 비원살수는 서로 간에 끈끈한 정을 이어왔다. 꼭 말을 해

야 맛인가? 은연중에 툭 던지는 행동 하나에도 정을 읽을 수 있지 않은가.

그런 분들이 죽었다는 것은 천붕이나 다름없다.

또 한 사람 적사… 그는 신비의 고수들을 상대할 자신이 사라졌다.

축혼팔도는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쾌도다.

진기를 일으키는 순간부터 발경하는 순간까지의 시간이 아마 몽고무학과 중원 무학

을 통틀어봐도 제일 짧을 것이다. 공격하는 방향은 진기를 일으키기 전에 먼저 설정되

어 있어야 한다. 진기가 일어남과 동시에 도광이 번쩍이니.

적사 자신이 축혼팔도를 펼치더라도 십이도객보다 별반 다르지 않다. 그들보다 간발

의 차이는 더 빠르다고 자신하지만 실제로 생사를 걸고 도를 맞대보지 않는 한 누가

빠르다고 장담할 수 없다.

여섯 도객이 단 한 명도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모두 죽었다.

상대의 무공은 각기 달랐지만 일격필살이었고… 빠르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또 있다. 소고. 소고도 마찬가지 시정이다.

혈뢰삼벽을 쳘치면 상대할 자신이 있지만 필승은 장담하지 못한다. 진기를 뇌력에 실

어야 하는데 상대들은 그 시간도 주지 않을 것 같다.

뇌력을 발산하여 혼몽하게 만들어도 일단 뽑혀져 나온 검은 머리 속의 다른 생각을

받아들일 틈도 없이 살을 베어낼 것 같다.

피가 떨리도록 빠른 자들이다.

폭멸공 덕분에 알지 못할 신비의 고수와의 싸움은 일단 중지되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면 몰살을 당할 수도 있었다. 어차피 그럴 각오로 맞섰지만.

“사부님께서 북삼사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할 거야?”

소여은의 음성이 앙칼져졌다.

그것보다 처음으로 미안공자를 사부님이라고 불렀다.

여인의 몸을 탐하는 사내를 대하면 자신도 모르게 증오심이 끓어오른다. 어린 몸뚱이

를 더듬던 늙은이의 깡마른 손이 생각나고, 하물을 잘라 버릴 때 물렁하던 느낌이 되살

아나 소름이 끼친다.

그때의 기억만은 잊을 수 없다.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소록소록 되살아난다.

소여은이 사부나 적사, 야이간을 대할 때 자신도 모르게 비웃는 표정이 떠오른 것에

는 그런 속사정이 숨어 있다.

그녀가 탐욕에 물든 사부의 눈길을 잊어버리고 순수한 사부의 모습만 떠올리기로 작

정한 것이다.

“북삼사.”

소고가 중얼거렸다.

“…”

적사는 도만 만지작거렸다.

그의 머리 속에는 북삼사라는 밀마보다 죽은 여섯 도객의 얼굴이 더욱 뚜렷하게 살

아 있을 게다.

북삼사가 의미하는 바는 간단하다.

북에서 동으로 세 치를 움직이면 움직일 방향이 나온다. 묵월광이 가지고 있는 지도

로 측정했을 때.

필부령이다.

마지막 ‘사’는 움직이는 수단을 뜻한다.

사제 미안공자는 마부로 위장했었다.

마차를 이용해서 팔부령으로 들어가는 소리다.

“새끼들! 어디서 그딴 노들이 나왔지! 정말 더럽게 강하네”

소여은의 입에서 상스러운 소리가 터졌다.

모두들 놀란 눈으로 쇼여은을 바라봤다. 그녀의 별호는 백화현녀다. 아름답고 현숙하

고, 조신한 여인이다. 입에서 나오는 말도 품위가 있고 영롱하다.

“하하하!”

적사가 통쾌한 듯 웃었다.

그는 소여은의 이런 말투를 들으 s적이 있다. 어렸을 때… 십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도 몰랐을 때 동혈에 갇혀서.

적사가 고개를 돌려보자 소여은, 안, 적각녀로 돌아간 그녀가 은장도를 꺼내 보였다.

화려하면서도 예쁘장한 은장도다.

“이거 기억나?”

적사는 대답 대신 권추를 꺼내 양 주먹에 찼다.

삐죽 튀어나온 철심히 푸르스름한 독기를 뿜어냈다.

“그때 말야… 적사, 넌 대단했어. 지지 않으려고 앙살거리기는 했지만 너한테 잘못 걸

리면 뼈도 못 추린다는 생각이 들었지. 지금은 어디서 뭐 하는지도 모르지만, 야이간

그 새끼도 같은 생각을 했을걸.”

“후후후!”

적사는 오랜만에 옛날 생각을 떠올렸다.

묵월광 살수들 중 적각녀와 적사만 알고 있는 추억이다.

“그래서 난 네가 뭔가 한가락 할 줄 알았거든. 다으에 만나면 너와 나, 야이간.. 이렇

게 어떻게 한바탕할 줄 알았어.”

“…”

“그런데 이게 뭐냐? 퉤!”

소여은은 옛날의 적각녀, 어산적에 있을 때의 적각녀로 돌아가 말을 했다. 거칠게 침

까지 뱉어대며.

적사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놀란 눈으로 소여은을 바라봤다. 소여은의 이런 모습은

정말 놀랍기 이를 데 없다. 마치 현모양처처럼 행세했다가 정체가 발각이 나니 꼬리를

드러낸 구미호처럼 생각되었다.

“그때 이상한 놈이 한 놈 들어왔지?”

“종리추.”

“그래, 이런 데 있기 싫다며 엉엉 울었어. 덩치는 산만해 가지고.”

“덩치로 따지면 우리 중 제일 컸을걸?”

“기억하고 있나 무르겠네. 내가 동생 삼으라고 그랬는데.”

“조용히 하라고 했지. 모두 죽는다고.”

“…”

적사와 소여은의 눈길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불길이 솟구쳤다. 눈과 눈이 마주치며 불똥이 튀겼다.

이신전심. 적사는 소여은의 마음을 읽었고, 소여은은 적사의 대답을 들었다.

살혼부 살수들이 모두 죽은 지금, 그들은 소고를 도와야 한다는 약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몸이 되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묵월광에는 희망이 없다. 깊은 절망뿐이다.

적사와 소여은은 옛날로 돌아가 종리추를 도와주려는 것이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면 그때의 인연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에

서.

‘북삼사’라는 말뜻이 종리추에게 가라는 뜻인 바에야.

소고는 적사와 소여은이 무슨 말을 나누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말의 내용의 미루

어 무슨 이야기인지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이들은 자신의 대용물이었다.

구파일방은 청면살수에게 우완금이라는 제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이들 네 명은 우

완금을 대신해 죽을 자들이었다. 운이 좋아 살아나더라도 수족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세뇌시켰고.

그때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는 듯하다.

말의 내용도 짐작할 수 있다.

‘북삼사… 종리추에게 가라… 이건 넷째 사숙님의 뜻이 아냐. 아버님, 조부님… 사부님

의 뜻이겠지.’

혈뢰삼벽이면 사무령이 될 줄 알았던 청면살수, 그리고 자신감에 들떴던 소고.

“너도 가지.”

소고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소여은과 적사가 소고를 돌아봤다.

“어차피 죽을 목숨… 종리추나 도우라는 뜻이잖아. 사무령은 강 건너갔고. 가서 도와

주지.”

“언니!”

소여은이 다가와 소고의 손목을 잡았다.

“그런데… 정말 어느 게 진짜야? 헷갈려. 백화현녀가 진짜야, 적각녀가 진짜야?”

“둘 다 진짜는 아니오.”

대답을 한 사름은 소여은이 아니라 적사였다.

“백화현녀도 되었다가 적각녀도 되었다가… 필요할 때마다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는

것은… 내가 알기로는 요괴밖에 없는 줄아는데…”

“적사!”

소여은이 쩌렁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앙증맞은 은장도가 들려 있

었다.

적사는 잡히지 않으려고 신법을 날렸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적사와 적각녀가 어른이 되어 만난 후 옛날 마음으로 돌아가기

는.

청면살수는 살혼부의 죽음으로 젊은 살수들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었다.

절망뿐인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물론 종리추에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소고에게는 사무령을 기대했지만 종리추에게는

기대하지 않는다.

소고에게 기대할 때와 지금과는 무림이 많이 바뀌었다.

아니, 무림은 바뀌지 않았지만 무림을 보는 안목이 많이 높아졌다. 무림이 얼마나 깊

고 넓은지 새삼 알았다는 편이 옳을게다.

현 무림은 사무령을 용납하지 않는다.

살수문파 정도는 도륙하려면 하루아침에 할 수 있고, 실제로 보야주고 있다.

소고 일행을 종리추에게 보내는 것은 그라면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을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사무령이 될 수는 없지만, 끝없이 쫓기는 신세지만 죽지는 않을 것 같은.

그 다음은 모르겠다. 모두들 무림을 깊이 볼 나이가 되면 스스로들 알아서 결정하겠

지.

살혼부 살수들은 편한 마음으로 생을 마쳤다.

‘그래, 가는 거야. 가서 다시 시작하는 거야.’

소고는 오랜만에 검을 품에 안았다. 검의 촉감이 기분 좋게 전해졌다. 무공을 익힐

때는 늘 검의 촉감을 느꼈는데 무림에 나오면서부터, 소고가 되면서부터 검을 단순한

병기로 생각하고 살았다.

이제야 검이 몸의 일부분으로 되살아났다

‘그래, 북삼사… 종리추… 운이 좋은 사내구나. 내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지.

넌 참 운이 좋은 사내야.’

종리추는 참 이상한 사내다.

그는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앉으라고 하면 앉고 서라고 하면 설 것 같다. 무

골호인처럼 마음대로… 그는 늘 가까운 곳에 편안한 모습으로 있다.

종리추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내다. 한 치 높이쯤 있겠지 싶으면 두 치 높이에 있

고, 두 치쯤 있겠지 싶으면 세 치, 네 치 높이에 있다.

그는 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다.

종리추는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까이 있지 않는 묘한 사내다.

지금까지는 그가 왔다. 자신이 명령을 내렸고, 그가 시행했다.

이제는 반대가 되리라. 반대가.. 그가 명령을 내리고…. 자신이 시행하고…

‘운이 좋은 사내…’

검의 감촉이 볼을 간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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