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39화
용두방주는 추적추적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봤다.
처마 끝에 매달렸다 또르륵 굴러 떨어지는 빗방울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장문인의 명을 받지 않는 문도…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사방에서 그런 조짐이 보이고 있다.
올라올 보고가 올라오지 않는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조차도 파악하지 못했다며 숨
겨 버린다.
분운추월은 사곡을 멸문시킨 곳은 살문이라는 사견을 피력했다. 공식적인 보고는 정
확한 흉수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고, 자적으로는 살문을 지목했다.
그 정도는 이해한다.
소림사와의 관계가 있으니 곧이곧대로 살문이 흉수라고 보고해 오면 오히려 골치가
아파진다.
분운추월과 후개는 현명한 보고를 했다.
묵월광의 발목을 잡으러 갔던 무불신개는 맥없이 돌아왔다.
야시장이 살혼부의 비기로 보이는 폭멸공에 날아가 버렸다. 개방은 묵월광의 발목을
잡지 않았는데 북월광이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신비의 고수들 소행이 아닌가 싶다.
무불신개의 보고는 답답하다.
당금 개방의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닌가 싶다.’라는 말은 사견이 아니라 추측이다. 언제 개방이 이렇게 추측이나 일삼
는 무리가 되었는지. 신비의 고수들이 중원을 휘젓고 다니는데 그림자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니 말이나 되는다.
문운추월이 사견을 내놓고, 묵월광이 종적을 감췄으니 화두망 장로가 알아낼 것이 없
다.
요즘의 개방을 보고 있자면 정말로 한심한 생각이 든다.
보고는 막히고, 문도는 말을 듣지 않는다. 동으로 가라고 하면 “네!”하고 시원하게 대
답하면서도 결과를 보녀 서에 가 있다.
이런 문제는 비단 개방뿐만이 아니라 각 파, 아니 정 중원에 걸쳐 벌어지고 있다.
한두 사람 정치한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장문인들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사마 한두 명 죽인다고 끝날 문제가 아냐. 무림 질서가 무너지고 있어. 방규가 깨지
고 있어. 문파라는 것이 산산조각날 수도 있어.’
“지금 일장로는 어디 있냐?”
용두방주가 지나가는 듯한 말로 물었다.
“모자도에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요즘 모자도에 부쩍 잘 가는군. 꿀단지라도 숨겨둔 것인가…”
“…”
아무리 생각해도 대안이 서지 않는다.
말을 듣는 자는 누구이고 듣지 않는 자는 누구인가.
분명한 것은 신비의 고수들이나 비객에 대한 보고가 일절 올라오지 않는 것으로 보
아 상당수의 개방도가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문도가 말을 듣지 않으면 무슨 방주가 필요할까. 허허허!’
용두방주는 혜공 방장이 생각났다.
마른 체격에 늘 고뇌가 깃들어 있는 듯한 표정.
소림 방장쯤 되면 후덕하고 온화한 이상을 지녔어야 하거늘 날카로운 인상만 풍겨내
던 기인.
소림 방장이 삼 년 봉문을 선언했을 때, 이제 소림도 한물갔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
만… 지금은 부럽기까지 하다. 이런 혼란에 쉽쓸리지 않고 있으니.
늦은 밤, 용두방주는 후개의 처소를 찾았다.
“방주님!”
후개가 책을 읽다말고 깜짝 놀라 일어섰다.
방주가 후개의 처소를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마도 개방 역사상 처음일 게
다. 용두방주는 자리를 지키는 자이지 찾아다니는 자가 아니다.
“무슨 책이냐?”
“예기입니다.”
“예기? 허허! 거지가 예기라…”
“…”
“종리추는 만나봤고?”
후개가 팔부령을 다녀온 지도 오래되었건만 처음으로 묻는 소리다. 전에도 마주 않아
이야기할 기회는 많았지만 종리추에 대하서, 팔부령에서 있었던 일은 묻지 않았다.
“예”
용두방주도, 후개도 서로 숨길 것이 없다.
“어떤 사내로 보이더냐?”
“…”
“괜찮으니 말해 봐.”
“못난 제자의… 평생 숙적처럼 보였습니다.”
“허허허!!”
용두방주는 기막혀 했다.
“그 정도였더냐?”
“…”
“하기는… 그렇게 보는 게 맞겠지. 뛰어난 자야. 수하들도 뛰어나고, 한데 내분이 생
겼어. 그런 느낌 받지 못했니?”
“…?”
후개는 뚫어지게 방주의 눈을 쳐다봤다.
방주는 잔잔하기만 하다. 바람 한 점 없는 날씨에 고여 있는 물처럼 파랑이 일지 않
는다.
“섬서성 살수들이 대표적이지. 살무주는 분명히 숨어 있으라고 했을거야. 활동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릴 때까지 절대로.”
“…?”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후개는 용두방주의 눈을 쳐다봤고, 눈빛을 반짝 빛냈다.
고요하기 이를 데 없는 방주의 눈빛에서 무엇인가를 읽을 수 있었다.
‘방주님은 개방 이야기를 하고 있어. 살문에 빗대서.’
“그런데 살문이 움직였어. 은밀히.. 사곡을 감쪽같이 멸망시켰지. 소림승은 빠져나간
자들이 없다고 하지만 세상에 구멍없는 담은 없는 법이지.”
‘살수문파를 멸살한 것은 비객, 그리고 신비의 고수들.. 그들은 은밀히 움직였고, 살수
문파를 감쪽같이 멸망시켰다. 소림승? 이건 우리 개방에 빗대서 생각해 보면.. 개방도는
움직이지 않았다고 하지만 구멍없는 담은 없다? 개방도가 움직여 비객을 도왔다는 뜻
이다.’
“살문주도 알고 있을까? 수하가 사곡을 없애 버렸는데.”
“알고 있을 겁니다.”
후개는 대답했다. 용두방주가 알고 있지 않은가.
“짐작은 하겠지 하지만 누가 죽였는지까지 알 수 있을까? 나가 있는 살수들이 워낙
많으니 살문주의 명령을 받지 않고 사곡을 멸문시켰다면 종리추에게 보고할 리도 없을
테고”
‘개방의 모반자들.. 그들은 방주에게 보고하지 않는다.’
“결국 그것이 종리추를 힘들게 할 거야.”
‘결국 그것이 종리추를 힘들게 한다?’
“그렇겠죠…”
후개는 힘들게 대답했다.
용두방주가 밝게 웃으며 후개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어디 자네 손금 한번 볼까?”
‘손금?’
후개는 손을 내밀었다.
용두방주의 관상술은 정평이 나 있다.
정통으로 익힌 것이 아니라 동냥하며 어깨너머로 훔쳐 배운 재주지만 나름대로 깨우
친 바가 있어 상당히 잘 맞춘다.
그런데… 손금까지 봤던가?
후개의 손을 자은 용두방주는 손금을 보는 듯 만지작거렸다.
‘이, 이건!’
후개는 깜짝 놀랐다.
손바닥에 쓰여지는 글자들…
물어볼 틈이 없다. 정신을 집중해서 손바닥에 쓰인 글자를 외워야한다. 용두방주는
두 번 다시 쓰지 않을 것이고, 궁금한 점이 있어도 물어보지 못할 것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근 일 다경가량 손만 만지작거리던 용두방주가 잠시 눈길로 돌
리면서 큰 숨을 쉬었다.
후개는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방주가 마지막으로 쓴 글자…
‘심십육로 타구봉법.’
구결로만 전수하며 용두방주로 취임하기 직전에 청록색 타구봉과 함/께 전수한다는
개방 최후의 무공.
용두방주가 입을 열었다.
“이 선이 지혜 성이지. 여기서 끊긴 걸 보면 그리 똑똑하지는 못한 것 같은데 이상한
일이군.”
‘얼마나 익혔나 물어오고 있어.’
후개는 소도를 꺼내 손바닥을 그었다..
“이제는 지혜 선이 바닥까지 닿았으니 똑똑해질 겁니다.”
용두방주가 싱긋 웃었다.
“이제 곧 연공 수련에 들어가야 할 텐데 그만한 일로 손에 상처를 내면 어째. 쯧! 경
거망동 하고는… 걱정이야, 너의 그 경거망동이.”
‘무엇이 그리 걱정되십니까?’
“손금을 보니 수명은 길겠군.”
‘이, 이 말뜻은!’
“당 중간에 액겁이 있으니 잘 피해가야 해. 먼 훗날의 일이니 아마 그때쯤은 내가 곁
에 없겠지. 인생이란 그런거지. 한때는 내 시대였지만 어느새 밀려나 뒷방 신세가 되
고…”
‘방주님은 죽음가지 생각하고 계신다. 이 일이 그토록! 그래, 그렇겠지. 중원에서 살
수문파를 싹 쓸어낼 정도라면… 개방도 관련되어 있고.. 그자들은 방주님보다도 더 큰
원한을 가지고 있어. 질서가.. 무너졌어.’
후개는 비로소 용두방주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왜 타구봉법을 전수해 주었으며, 바로 연공 수련에 들어가라고 하는지도.
용두방주는 싸움을 생각하고 있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싸움이다.
흑봉광괴, 분운추월.. 누가 될지 모른다. 적과 아군을 가를 수 없는 혼란한 싸움이다.
방주는 어떤 식으로 싸움을 시작하고 어떤 식으로 마무리 지을 것인가. 이런 싸움에
는 정해진 방식이 없는데… 자칫하면 정말 피를 흘리게 될지도 모르는데.
방주는 또 후개에게 명령했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연공 수련에 들어가라고.
가장 좋은 방법은 개방도가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방주님께 충성을 바치는 것인데…
그건 이미 늦은 것 같고.
‘방주님은 한시라도 빨리 수련에 들어가기를 바라셔.’
후개는 말했다.
“내일 당장 연공 수련에 들어가겠습니다. 살문주 정도는 눈 아래로 굽어볼 수 있을
만큼… 자신을 갖춘 다음에야 나오겠습니다.”
“그래, 그러도록 해.”
용두방주가 희미하게 웃었다.
후개는 잠자리에 누워 창문을 쳐다봤다.
부서진 창문 너머로 밝은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불은 켜지 않았다. 용두방주가 돌아가는 즉시 불을 껐다.
꾸루루! 꾸루루룩…!
전서구 한 마리가 하늘을 날았다.
수많은 전서구가 들어오고 나간다.
개중에는 급한 연락도 있고 쓸모없는 연락도 있다. 하지만 방금 날아간 전서구를 쓸
모가 있다.
용두방주가 후개의 처소에 들렀다가 돌아갔다는 내용이 담겨 있을게다. 두 사람이 주
고받은 내용도, 내일 장장 연공 수련에 들어가라는 말도 모두 기재되어 있으리라.
주변에 미지의 고수들과 연이 닿는 제자가 있다는 것은 진작부터 알았다.
후개느 사실을 캐내기가 두려웠다.
얼마나 많은 문도가 연결되어 있을까? 방주가 그들을 일괄 파문했을 경우에는 어찌
되는가.
개방이 절반으로 축소될지도 모른다.
파문된 제자들은 개방 무공을 사용해서도 안 되고, 개방과 연관된 모든 일에서 손을
떼야 한다. 그러지 않을 경우 법개가 방규로 다스린다.
저들에게 힘이 있고 없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림은 파문당한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자리도 같이 앉지 않고, 얼굴을 봐도 외면해
버린다.
파문당하느니 무림에서 은거하는 펴이 훨씬 낫다는 말조차 있다.
후개에게 닥친 가장 큰 난관이다.
‘믿을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해’
절대적으로 믿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후개는 분운추월을 떠올렸다.
지금에 와서는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분운추월만은 믿어도 좋을 성
싶다.
혜명 대사의 인간성, 불심… 그런 고승과 막역한 사이가 되려면 고승만큼이나 세상
이치를 올바르게 깨우치고 있어야 하리라.
후개는 곧장 분운추월의 침소를 찾아갔다.
개방도가 세상에서 안심해도 좋은 곳이 총타다. 총타에서는 발가벗고 난리를 쳐도 입
수문이 나지 않는다. 그만큼 개방도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두터운 곳이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후개는 분운추월의 처소까지 오면서 수많은 눈길을 의식했다.
그들 중 일부는 여전히 존경의 념을 담아오겠지만, 일부는 감시의 눈초리로 바뀌었을
데다.
“후개께서 어쩐 일이시오?”
분운추월은 반갑게 맞았다.
분운추월과 후개는 둘만의 비밀이 있다. 혜명 대사와 만난 일과 종리추를 만나 낭패
를 당한 게 그것이다.
‘역시 믿을 만해’
후개는 자신의 사람 보는 눈을 믿기로 했다. 분운추월을 보자 찾아오길 잘했다는 생
각이 들었다.
하기는 지금 처지에서는 그것밖에 남은 게 없다. 개방에 흘러드는 정보라는 것이 거
의 전부 일차 걸러진 정보이니.
“장로님께 경공 전수를 부탁드리고 싶어 찾아왔습니다.”
“하하! 그래요? 이 늙은이에게 남은 건 그것밖에 없는데 그것마저 울궈갈 심산이신
가 봅니다. 하하하!”
후개의 손이 현란한 움직임을 보였다.
수화다.
‘방주님께서 타구봉법을 전수해 주셨습니다.’
‘뭐요! 그러잖아도 걱정하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곡 무슨 일인가
터질 것만 같은 기류가 흘러요.’
분운추월도 수화로 답했다.
‘암주에 숨어 있는, 살수무림을 초토화시킨 고수들과 연관이 있을 겁니다. 물론 비객
은 빼고, 제 생각에는…’
‘제일장로를 생각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그분밖에 없습니다.’
후개와 분운추월은 연신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수화를 펼쳤다.
그리고 어느 한 순간, 의견을 주고받은 후개와 분운추월은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며
헤어졌다.
두 사라은 또 다른 사라을 만나러 갔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