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40화
용두방주는 언제 어디서든 곁을 떠나지 않는 팔 호법과 함께 길을 나섰다.
세상이 어둠에 잠긴 밤이다.
하지만 그가 총타를 나서는 순간부터 세상은 어둠에서 깨어나기 시작했다.
하늘에는 새가 날아다니고 땅에서는 생명이 깨어났다.
깨어난 생명이 길을 막아섰다.
“방주님이시다! 물러서라!”
호법이 냉랭하게 외치면 깨어난 생명은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용두방주가 지나갈 때까지 깨어난 생명은 오체투지한 채 일어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개방도에게 용두방주는 절대신이다.
용두방주가 지나간 다음에는 상황이 달라진다.
하늘에 새가 난다.
절대신은 너무 온화하다. 악은 철저히 뿌리를 뽑아버려야 다시 자라지 않는데 신이라는 사람은 그렇게 할 생각이 없는 듯하다. 그래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을 절대신으로 모시기로 했다.
“사람들도 참… 짧은 세월에 많이도 변했군.”
용두방주는 제자들을 다그치지 않았다.
신비의 고수들… 그자들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개방의 누구와 관련 있는지는 안다. 많이들 관련되어 있겠지만 방주가 짐작하는 사람은 단 한 사람이다.
모자도에 있는 흑붕광괴.
그에게 날아가는 전서구가 유독 많다.
꼭 그래서라기보다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는 흑붕광괴의 성격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
강변에 이르자 개방도가 비조선을 몰고 왔다. 좌우로 두 단의 노가 있어 상당히 빨리 나아갈 수 있는 배다.
호법 두 명이 먼저 배에 탄 다음 요모조모 살폈다.
“…”
용두방주는 호법들의 눈빛만 읽고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냈다. 한두 해 같이 다닌 사람들이 아니다. 공적인 일을 떠나 사적인 자리에서 어울린다면 벗과 버금갈 만큼 친분이 두텁다.
용두방주가 타고 호법 세 명이 더 탔다.
가장 마지막에 남은 세 명은 타지 않았다.
“방주님, 저희는 여기까지.”
용두방주의 눈이 부릅떠졌다.
“자네들까지!”
“죄송합니다. 악이 보이는데 잘라내지 않고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는 방주님의 말씀… 공감하지 못하겠습니다.”
“알았어. 그럴 수도 있지.”
“…”
“자네들은 여기 있어. 아직 호법에서 제외된 것은 아니니 이곳을 단단히 지키도록 해.”
“알겠습니다.”
세 호법은 박달나무로 만든 타구봉을 발 앞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포권지례를 취했다.
삐이걱… 삐걱!…
노 젓는 소리가 들리며 배가 점점 깊은 안개 사이로 사라져 갔다.
세 호법은 포권지례를 취한 채 일어서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굳어진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미리 전서를 받은 흑붕광괴는 피하지 않았다.
때가 구질구질하게 낀 돗자리를 깔아놓고 그 위에 아담한 상을 차렸다. 술도 있고, 나물도 있고, 고기도 있다.
고기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독주에는 역시 장작불에 구운 오리 고기가 제 맛이다.
흑붕광괴는 오리 고기도 준비했다.
기름이 쫙 빠진 오리 고기에서는 구수한 냄새가 풍겨났다.
저벅. 저벅!…
흑붕광괴는 발걸음 소리를 듣고 몸을 일으켰다.
“방주님.”
“흑붕광괴…”
“술 한잔 없을 수 없어 준비했습니다. 앉으십시오.”
용두방주는 구질구질한 돗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흑붕광괴가 공손히 술을 따라 바쳤다.
“삼배를 올리겠습니다. 이 잔에는 사부님을 담았습니다.”
“사부님이라고 했는가?”
“네.”
방주는 흑붕광괴가 올리는 술을 받아 마셨다.
흑붕광괴가 두 번째 술을 올렸다.
“이 잔에는 방주님을 담았습니다.”
“술이란 마셔 버리면 사라지는 것이지. 사부님을 잊어버리고, 날 잊어버리고… 허허! 마지막은 무엇을 담을까?”
방주는 두 번째 잔도 훌훌 털어 마셨다.
“이 잔에는 개방을 담았습니다.”
용두방주는 쉽게 받지 못했다.
“꼭… 그렇게 해야 하겠나?”
“척마 척사에 뜻을 품으니 마음이 가볍습니다.”
“…”
“…”
용두방주와 흑붕광괴는 서로를 담담히 마주 봤다. 설득을 해서 들을 만한 나이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용두방주가 술잔을 받아 천천히 들이켰다.
“시간을… 얼마나 주면 좋겠나?”
“허허! 그동안 필요한 만큼 얻었습니다. 매도 빨리 맞는 것이 낫다고 매일 아침 바로 터뜨리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파문.
그러나 이야기의 핵심을 말로 꺼내지는 않았다.
서로가 알고 있고, 가슴만 아픈 이야기다.
“이제는 방주도 아니니 우리 형이라고 해야겠군. 우리 형으로 물어보겠네. 예상 인원이 어느 정도나 되는가?”
“뜻을 같이하는 사람은 몇 되지 않지만… 모두 점조직으로 이루어져 저도 얼마나 될지 짐작할 수 없습니다.”
흑붕광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천외천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정말 몇 명 되지 않는다. 그 외에는 사부, 사형의 뜻이기에 따르고 있다. 모두 용두방주의 뜻인 줄 알고…
흑붕광괴가 파문된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들이 믿고 따르던 사부, 사형이 파문되어 개방도라는 울타리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지금까지 맹목적으로 쫓아왔던 개방도들 중 상당수는 다시 개방에 흡수될 것이 틀림없다.
개방의 안일 무사함을 벗어나 척사 척마의 기치를 세우자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공염불에 불과하다. 개방이라는 단단한 성벽을 허물어뜨리기에는 너무 역부족이다.
흑붕광괴는 자신을 따르는 소수의 걸개들만 데리고 개방을 떠나야 한다.
“그래 그러지. 그럼 내일 날이 밝는 대로 마무리 짓도록 하지.”
용두방주가 일어섰다.
밤새도록 술잔을 나누고, 고기도 뜯으면서 회포를 풀 수도 있겠지만 좋은 일도 아니고 서로 마음만 상하기 쉽다.
용두방주가 휘적휘적 걸어 나간 끝자락, 흑붕광괴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개방은 환골탈태해야 합니다. 용서를…”
용두방주는 길을 가로막는 무인들을 보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대들이 살수문파를 몰살시켰는가?”
“그렇습니다. 방주님.”
청년들은 공손했다.
“그렇군, 자네들이었군. 그대는 알지. 소림 사룡이지. 백천의, 정운도 알고… 허허! 무당삼반 하양 진인도 있었군. 청성파의 청운 진인이라… 우리 개방의 후계도 이 자리에 있었다면 모양새가 좋을 뻔했군.”
“후계는 영웅이라기보다는 모사가 어울릴 겁니다. 그래서 사양했습니다.”
“그렇군. 아! 어쩐지 안면이 있다 했더니… 삼절기인의 자제였군. 삼절수사?”
“알아주시니 영광입니다.”
삼절수사 정군유가 포권지례를 취했다.
“저 소협은 안면이 없는데… 이 늙은이의 무례를 용서하시오.”
“아닙니다. 기억에 없으신 것도 당연합니다. 칠성검문 소문주 진조고가 용두방주님께 인사드립니다.”
용두방주가 청년 고수들과 말을 나누는 사이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늘어섰다.
이름만 들어도 깜짝 놀랄 만한 사람들의 얼굴이다.
일일이 그들의 외호를 말하기도 부담스럽다.
하후가주를 비롯하여 무림삼정 중 마지막 일인인 철권 구양춘, 공동파의 꽃이었으나 흐르는 세월은 어쩌지 못한 비영파파…
용두방주는 다른 사람들도 봤다.
개방도…
개방에도 후계로 낙점해도 좋을 뻔했던 열 명의 기재들.
개방도의 의복인 누더기 옷을 던져 버렸다.
봉두난발도 말끔히 다듬어 뒤로 넘겼고, 영웅건으로 마무리했다.
사결 이상의 사제들이다.
흑붕광괴와 함께 살혼부 십망에 나섰던 천애유룡도 있다.
천애유룡은 살혼부 처단 사건에 몹시 큰 충격을 받아 오로지 무공 수련에 매진했고, 큰 성취를 이뤄냈다. 전에도 사결과 엇비슷하다는 평을 듣던 무공이었으나 그날 이후로는 오결과 비슷한 경지로 올라섰다.
그는 비객이 되었다.
비객… 비객도 모자도에 왔다.
방주를 보고도 가벼운 눈인사조차 하지 않고, 개방의 상징인 매듭조차 풀어버렸다.
개방도가 아니다.
비객을 만들 당시부터 이런 상황은 예상했지만 어쩌면 이렇게 매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비객이 신비의 고수들과 같이 있는 것이 불안하다.
비객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있어야 한다. 구대문파 장문인들이 연서를 날리기 전에는 움직여선 안 된다.
‘이들이었군. 이들이 있었으니 비객을 쉽게 움직일 수 있었어. 흑붕광괴, 비영파파, 하후가주… 당신들은 큰 실수를 했어. 당신들조차 제어할 수 없는 힘을 만들어 버렸어. 허허! 하긴 누굴 원망할까. 우리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른 마당에.’
백천의가 말했다.
“방주님, 우린 개방이 필요합니다.”
“그렇겠지.”
“용서를…”
스르릉!…
백천의가 검을 뽑았다.
다섯 호법이 재빨리 타구봉을 꼬나 잡고 방주의 좌우를 지켰다.
용두방주는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살아서 나갈 수 없다. 모자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위험은 항상 도사렸다.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랐지만… 벌어진다면 막아낼 수 없다.
“방주님.”
“…”
“저희들이 어떻게 해서 이토록 강해진 줄 아십니까?”
“…?”
“맞춰보십시오.”
용두방주는 화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흑붕광괴를 찾고자 해서다. 하지만 흑붕광괴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술상을 차려놓은 곳에 그대로 있으리라.
“이런!…”
용두방주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금단의 무공을 익혔군.”
“보여 드리겠습니다.”
백천의를 제외한 천객 무인들이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천외천 천객의 무공은 비객을 위시한 다른 무인들에게도 호기심거리였다.
천객들은 열 손가락도 모두 채우지 못하는 적은 인원으로 살수문파를 몰살시켰다.
비객이 구십 명 모두를 동원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적은 인원이다.
인원이야 상관없다.
비객도 마음만 먹으면 열 명이 아니라 다섯 명만으로도 살수문파를 몰살시킬 자신이 있다.
흑붕광괴가 무적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무공, 개방 구진법… 금단의 열매를 먹은 자들의 무공,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눈으로 보고 싶었다.
개방 호법들의 무공은 정평이 나 있다.
방주의 호법은 최소한 육결 이상으로 개방 무인들 중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강자다.
다섯 명이 타구봉을 꼬나 들자 엄밀한 막이 생겼다.
천객 무인들이 성큼성큼 다가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 타구봉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도, 호법들의 눈동자가 차분히 가라앉아 절정의 기운을 뿜어낸다는 것도, 모두 보이지 않는 듯…
저벅! 저벅!…
“방주님…”
호법 중 한 명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했다.
“저희들도 여기까지밖에 모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호법들도 구진법을 알고 있다.
구진법을 연성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구진법을 익힌 다음 어떤 경지에 이르는지도 알고 있다.
긴가민가했는데… 천객 무인들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니, 그들의 허와 실을 염탐해 보니 틀림없다.
천객은 말 그대로 찰나의 틈을 노린다.
중원 무공 중에서 ‘섬전’이니 ‘극쾌’니 하는 말들이 떠돌고, 실제로 눈부실 만큼 빠른 무공이 많지만 천객의 무공에는 비할 수 없다.
구진법을 익히면 초식이 없어진다.
인체의 모든 근육이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며 근육 사이사이로, 혈맥 사이사이로 진기가 끊임없이 흐른다. 전신이 진기로 팽배해 있으니 진기를 따로 끌어올릴 필요도 없다.
터뜨리고 싶다는 마음이 일자마자 발경이 터져 나간다.
검을 휘두르는 것 자체가 무공이다.
“허허허!”
용두방주는 힘없이 웃었다.
그도 보았다. 천객들의 몸가짐, 움직임… 구진법을 완성한 사람들의 신법을.
‘상대가 안 돼.’
솔직한 심정이다. 어쩌면 무림 역사상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타구봉법마저 지게 될지도 모른다. 하물며 타구봉법조차 모르는 호법들이 상대하기에는 너무 벅찬 상대다.
“편히들 가시게.”
방주가 호법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그것이 고작이었다.
주위에 둘러선 무인들은 모두 승부를 직감했다.
그들은 고수다. 꼭 검을 맞대 보아야만 길고 짧은 것을 가릴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검을 든 모습만 보고도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또 용두방주만큼이나 팔 호법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방주가 그렇게 생각하듯이 사적인 자리에서는 스스럼없이 농을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친분이 두터운 걸개도 있다.
그들은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이 정도에서 끝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싸움은 시작되었다.
쒜에엑!… 쒜에엑!…
타구봉이 먼저 허공을 갈랐다.
다섯 호법은 마지막 한 올의 진기까지 모두 짜내 타구봉에 실었고, 각기 가장 능통한 절기를 펼쳐 천객을 공격해 갔다. 천객은 아주 잠깐… 아주 짧은 순간에 몸을 살짝 비틀기만 했다. 몸도 아니다. 어깨만 살짝 비틀었다.
파앗!
개방 다섯 호법이 뚝 멈췄다.
타구봉을 전개하지도 못했고, 신법을 전개해 나아가지도 못했다.
호법의 얼굴이 잘 익은 꽈리처럼 벌어지며 피가 솟구쳤다. 다른 호법은 가슴이 터졌고, 또 다른 호법은 목에 입이 하나 더 생겼다.
쿵쿵!
다섯 호법은 거의 동시에 쓰러졌다.
차가운 전율이 스쳐 갔다.
초식도 필요 없는 절대 강자들.
이들 앞에 검을 들이대는 자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지금은 다섯 호법이 죽었지만 이들과 맞서려는 자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제일 비객 유홍은 생각했다. 비객 구십 명이 은신술을 펼쳐 덤빈다 해도 천객을 당할 수 없을 거라고. 비영파파는 생각했다. 공동파가 전력을 다해 싸워도, 공동파 비장의 절학인 능공십팔응을 완성해도 천객들의 상대가 되기에는 벅찰 거라고.
“바, 방주… 타, 타구봉을….”
비영파파는 차마 타구봉을 내려놓으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개방 용두방주를 욕되게 하는 것 같아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더듬더듬… 용두방주가 대충 알아듣고 타구봉을 내려놓으면 좋겠다는 심정에 입을 열었다.
“허허허! 비영파파, 이 우둔한 사람을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구려. 이럴 줄 알았으면 젊었을 적에 청혼이나 해보는 건데 그랬소.”
용두방주는 오히려 지켜보는 사람들보다 밝은 표정이었다.
“모두들 구진법이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아니고 구진법은 최고의 무공이 아니오.”
용두방주의 말에 모두의 귀가 솔깃했다.
그들이 본 천객의 무공은 최강이다. 한데 그것조차 최강이 아니라면….
“구파일방… 모두 구진법을 깰 만한 무공을 지니고 있소. 허허허! 우리 개방에도 구진법을 깰 무공이 있소. 타구봉법? 아니오. 타구봉법이 개방 최고의 무공인 것은 틀림없지만 구진법을 깰 수 있는 무공은 아니오.”
이게 무슨 장난 같은 소리인가?
개방 최고의 무공은 타구봉법. 하지만 천객의 무공을 깰 무공은 따로 있다니. 그리고 구대문파에도 각기 그런 무공이 있다니.
“허언이 아니오. 틀림없이 있소이다. 허허허! 개방에서 왜 구진법 수련을 금지시킨 줄 아시오? 연공 중에 열에 아홉은 죽소이다. 너무 살기가 짙은 무공이오.”
거기까지는 모두 알고 있다. 그래서 수련이 금지되었다는 것도.
“하지만 연성하기만 하면 전신 근육과 맥이 스스로 살아서 꿈틀거리니 이보다 더 빠른 발경은 없소. 뛰어난 무공 수련법이오. 허허허!”
보았다. 천객은 너무 간단히 무림 초절정 고수 다섯 명을 죽였다.
만약 그들이 구진법을 익히기 전이었다면 오히려 다섯 호법에게 쩔쩔맸을 게다. 천객 중에는 무림 후기지수에도 간신히 끼어든 자가 있다. 칠성검문 소문주… 그런 자가 어떻게 초강 고수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강해도 너무 강하다… 욕심난다.
수련 방법이 아무리 잔혹하다 해도 수련하고 싶다.
“문제는 너무 간단히 무너진다는 것이오. 파훼법이 너무 간단해서… 허허!”
“화, 화약!”
누군가 소리쳤다.
천객 중 검곡 소곡주 우경삼이 화약에 당했다는 사실은 널리 소문났다.
“허허허! 화약 같은 거라면 말도 꺼내지 않았을 것이오. 허언이 아니라고 했소이다. 구파일방 어느 문파에나 모두 파훼법이 있다고 했소이다. 암습이 아니오. 무공 대 무공으로 겨뤄서 이기는 파훼법이오.”
듣고 있던 사람들은 용두방주의 말을 믿었다.
“방주님께서 말씀하신 파훼법… 직접 견식해 보고 싶습니다.”
백천의가 검을 들고 나섰다.
“허허! 난 익히지 못했네.”
“알고는 있으나 방주님조차 익히지 못한 무공이라면 존재 가치가 없는 무공이겠죠. 아니면 평생 허언을 하지 않던 분이 처음으로 하는 허언이거나.”
백천의의 음성에 강한 자부심이 묻어 나왔다.
“그럼… 무적의 무공, 타구봉법을 견식하겠습니다.”
백천의는 결코 살려둘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칼은 이미 뽑혔다. 물은 이미 엎질러졌고, 화살은 쏘아졌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
정파인들끼리 아무런 원한도 없이 병기를 들고 싸웠다. 그리고 죽었다.
방주의 호법을 죽였다는 자체만으로도 천객과 개방은 원수지간이 되었다. 방주의 호법이란 방주의 분신, 분신에게 고의적으로 검을 들어댔으니 방주를 죽이려고 한 것과 같다.
하물며 호법을 죽였다.
“허허허! 그러지.”
용두방주는 허리춤에서 청록색 타구봉을 뽑아 들었다.
쒜엑!
백천의는 거침없이 검공을 전개했다.
용두방주는 뒤로 한 걸음 훌쩍 물러섰다.
싸우려는 의도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백천의가 검을 움직일 기미만 보이면 뒤로 물러섰다.
무인으로서 수치다. 병기를 맞대지 못하고 물러서기만 하니 이처럼 큰 수치가 어디 있는가. 그것도 대개방의 용두방주가. 하지만 아무도 용두방주를 탓하는 사람은 없었다.
천객들의 무공을 견식한 후라 자신이 싸워도 용두방주와 같은 방식으로밖에는 싸울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기를 맞대면 진다.
백천의가 검을 전개하기 전에 움직여서 피해야 한다.
백천의가 마음을 독하게 먹고 쉴 새 없이 속공을 펼친다면?
거기에 대한 해답은 없다. 지금은 눈앞에 전개되는 일검을 피하기도 급급하다.
쉬익!
백천의가 다시 일검을 전개했고, 그전에 용두방주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전개한 검은 피하지 못하지만 검을 전개하기 직전은 읽어낼 수 있다. 몸의 상태, 마음의 상태로…
백천의의 검공은 무척 빨랐지만 역시 용두방주는 노련했다. 그런데, 쉬익!
백천의가 다시 일검을 전개하고 용두방주가 훌쩍 뒤로 물러설 때,
쉬익!
“…!”
방주의 두 눈이 분노로 부릅떠졌다.
지켜보던 사람들도 모두 분노를 표출했다.
비객들도 인상을 찡그렸다.
소림 사룡 중 한 명인 정운이 용두방주의 등에 일검을 박았다.
“저 정도… 가 땅에 떨어졌군. 혜, 혜공… 허허허! 이게 그대가 자랑하던 소림 사룡이군. 허허허!”
용두방주는 숨을 거뒀다.
무림 거성이 떨어졌다. 정도인에 의해, 비겁한 암습에.
“흑흑흑!…”
후계는 오열했다.
이럴 수는 없다. 이렇게 방주님이 죽을 수는 없다.
비겁하게 등 뒤에서 내갈긴 검에 맞아 죽을 수는 없다.
후계는 한달음에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의 몸은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어 손가락 하나 뻗어내지 못했다.
“후계, 참아야 합니다. 지금 나서면 죽음뿐. 방주님께서 마지막에 하신 말씀을 되새겨야 합니다. 개방에 무공이 있습니다. 구진법을 깨뜨릴 무공이. 그걸 찾아내야 합니다.”
용두방주는 군웅들에게 말한 게 아니다.
그는 후계가 모자도에 들어와 있으리라 직감했다. 그러지 않기를 바랐고, 지금쯤 폐관 수련에 들어가 있기를 원했지만 그렇게 순순히 말을 들을 후계가 아니다.
후계는 조력자를 데려왔을 게다.
그중에는… 가장 믿을 수 있는 분운추월이 있다. 세상천지가 변해도 분운추월 같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또 한 사람… 평소 방주의 생각을 못마땅해하던 장로가 있다.
무불신개.
그는 팔부령 싸움에 살수들을 끄집어낸 것에 대해 아주 못마땅해한다.
그런 사람도 변하지 않는다.
또 누구를 찾아냈을까?
그것은 이제 후계의 몫이다. 후계가 누구를 곁에 두느냐, 그들 전부를 믿을 수 있느냐… 모든 것이 후계 몫이다.
분운추월이라면 후계가 경거망동하는 것을 막아주리라.
과연 분운추월은 후계의 마혈을 짚었다. 다섯 호법이 절명하는 바로 그 순간에.
사실은 분운추월도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래서 모두 일장에 때려죽이고 싶었다.
심모원려… 생각은 깊게 하고 멀리 내다봐야 한다.
후계와 분운추월, 무불신개, 그리고 화두망은 모자도에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세심히 살폈다. 그리고 살며시 물러났다.
청산이 있는 한 녹수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방주의 죽음을 알고 있으면 된다.
누가 죽였는지도… 지금 당장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후계의 안전이다. 후계의 안정을 책임지는 일이야말로 장로들의 임무 중에서 가장 큰 것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