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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5화


꽈광! 꽈아앙…!

폭음은 지축을 뒤흔들었다.

석물, 석상은 가루가 되어 날아가고, 봉분은 흔적없이 사라졌다. 무덤을

둘러싸고 있던 조경수는 뿌리째 넘어갔다. 산새들이 크게 놀라 하늘로

솟아올랐다. 뿌옇게 솟구친 흙먼지가 머리 위로 어깨 위로 분분히

떨어졌다.

아름답게 꾸며졌던 봉분은 폐허밖에 남지 않았다.

움푹 패인 구덩이는 모든 사람의 손길을 떨쳐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갔다.

개방 문도들은 멀찍이 이십 장 밖을 에워싸고 있었다.

그들은 조금씩 포위를 좁히며 땅에 떨어진 것은 하찮은 돌 조각일지라도

유심히 살펴보았다.

“여기 뼈가 있습니다!”

개방도가 소리치기 무섭게 흑봉광괴가 날아왔다.

뼛조각은 싱싱했다. 뼈에 붙어 있는 살점도 썩지 않았다. 피도 묻어있다.

“여기도 있습니다!”

흑봉광괴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조각조각 걸레가 되어버린 옷이었다. 화기에 손상되어 원형을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묻어 있는 피와 살점은 싱싱했다.

“장로님! 여기 머리뼈가 있습니다.!”

흑봉광괴는 이번에도 달려갔다.

개방도가 포위망을 완전히 좁혀 구덩이 한가운데까지 이르렀을 때는

적지인살이 죽었다고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온 인육을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음…!”

흑봉광괴의 안색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아니, 전보다 더욱 굳어졌다.

“천음산을 포기해야겠네.”

흑봉광괴의 입에서 이상한 말이 흘러나왔다.

“분타주!”

“예.”

천애유룡이 급히 앞으로 나섰다.

적지인살이 천음산에 들른 것이 확인된 순간부터 천애유룡은 뒷전에서

맴돌았다. 중대한 실수를 저지른 그가 나설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문도를 이끌고 구성, 망양, 호포를 차단하시게.”

흑봉광괴의 음성은 차분했다.

“노산, 동창은 총타에서 막고 있을 터… 계획대로 천평으로

몰아넣어야겠네.”

“그럼 적지인살이…?”

천애유룡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천애유룡.”

“예.”

“자네는 똑똑해. 똑똑해도 너무 똑똑해. 자네 같은 그릇은 개방에 머물

게 아니라 좀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야지.”

“자, 장로님! 용서를…”

천애유룡은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흑봉광괴의 음성은 차분하고 포근했지만 아직 용서를 한 게 아니라는

것은 명확했다.

“가시게. 구성, 망양, 호포나 철저히 차단하시게. 이번에도 실수한다면

방규로 다스리겠네.”

드디어 흑봉광괴의 입에서 ‘방규’ 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괜한 공갈이 아니다. 흑봉광괴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다.

“머, 먼저 떠나겠습니다.”

천애유룡은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느꼈다.

‘이상해. 적지인살은 분명히 죽었는데 왜…?’

천애유룡은 신법을 펼치면서도 고민을 거듭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해 흑봉광괴의 분노를 샀단 말인가. 순간,

“아!”

천애유룡은 우뚝 서버렸다.

제자들도 신법을 거두며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랬어. 그랬어… 바보같이… 바보 멍텅구리…”

천애유룡은 제자들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고 자책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과 호랑이에게 잡혀가도

정신만 바짝 차리면 산다는 말은 같은 의미를 지닌다.

침착, 냉정함이다.

‘세상 어떤 일에도 현혹되지 않는 부동심을 지녔다고 자부했는데…’

“하… 하하… 하하하하핫!”

천애유룡은 미친 듯이 웃어댔다.

측봉광괴는 방규로 다스리겠다는 말을 했다. 그것은 실수를 용납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분타주의 그릇조차 되지 못하면 알아서 물러서라는

뜻이다.

이제야 이해했다.

천음산 묘지는 명당이라고 소문났다.

무지한 자들 중에는 명당이라는 말에 현혹되어 남몰래, 흔적없이 묘를

쓰는 경우도 많다. 비석은 물론 봉분도 세우지 않는 도묘이지만 아무리

막아도 끊이지 않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개방도들 중에도 장난 삼아, 아니면 진짜 발복을

기원하며 천음산 묘지에 도묘를 쓰는 경우가 있다.

적지인살은 죽지 않았다.

살점이 떨어져 나오고 부서진 뼈마디가 나왔지만 적지인살은 아니다.

도묘를 쓴 다른 누군가의 시신이다.

무림인들에게는 다소 낯선 적지인살의 기형월도가 발견되지 않았다.

적지인살이 데리고 다니는 꼬마의 덜 자란 뼈도 발견되지 않았다.

침착함을 잃은 천애유룡은 장님이었다.

장님이 어떻게 분타를 맡을 것인가.

다급함만이 침착성을 잃게 만드는 건 아니다. 공명심, 지나친 청명함도…

인간이 부딪칠 수 있는 모든 것이 침착함을 잃게 만들 수 있다.

‘적지인살은 천음산에 있다. 용케 폭약을 피해냈지만 벗어날 시간까지는

없었어. 장로님은 호법님들과 같이 적지인살을 상대하려고 하는 거야.

만일의 경우, 적지인살이 빠져나오면… 그때는 내가 맡아야 한다.’

천애유룡은 자신이 어떤 임무를 맡고 있는지 명확하게 깨달았다.

“가자!”

웃음을 그친 천애유룡은 냉정했다.

“으음…!”

적지인살은 정신을 차렸다.

‘죽지는 않았군.’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었다.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눈을 떴다고 생각한 것은

한순간의 착각이었다. 천 근처럼 무거운 눈꺼풀은 좀처럼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당했군.’

두 번째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정신은 말짱한 것 같은데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일어서려고도

해봤고, 손을 올려보려고도 했지만 사지가 절단된 듯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종리추는? 하기는 내가 이 모양이니…’

종리추도 포기했다.

폭발은 엄청난 힘으로 부딪쳐 왔다.

개방도의 말을 듣는 순간 위험하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고, 다급히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지청술이고 뭐고 고려할 시간도 없었다.

폭발은 네가 도망가면 어디로 도망가겠냐고 비웃기라도 하듯 엄청난

거력으로 몰아쳤다. 뒤이어 폭음이 고막을 터뜨릴 듯 거세게 달려들었다.

둔탁한 둔기로 세차게 얻어맞는 충격이 등짝에 느껴지고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떠밀렸다.

갈 곳도 없었다. 앞은 석벽처럼 단단한 흙덩어리뿐이었다.

그 후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직 발견되지 않았어. 발견되었다면 벌써 목이 잘려 나갔겠지.

벗어나야 해. 벗어나야…’

적지인살은 다시 정신을 잃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적지인살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이번에는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전신이 잔뜩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진기를 끌어올려 전신에 휘돌렸다.

몸 상태는 이상없었다. 아픈 곳은 경혈이 아니라 근육이었다.

적지인살은 성급히 일어날 생각을 버리고 전신의 모든 감각이

정상적으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됐어. 이제는…’

몸이 괜찮다고 생각되자 청각을 열어 주위 동정을 살폈다.

세상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짹! 째짹…! 짹!

이름 모를 산새 소리만 구성지게 들려왔다.

‘매복해 있다면… 할 수 없지.’

적지인살은 몸을 일으켰다.

주위는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만큼 공간이 넉넉했다.

자신과 종리추가 살을 맞대고 있을 만큼 작은 공간밖에 없었는데 어디로

떠밀려 왔는지 걸음까지 걸을 수 있을 만큼 널찍했다.

‘여기가 어디… 응?’

발끝에 무엇인가 물컹한 물체가 걸렸다.

허리를 굽히고 손으로 더듬어본 다음에야 물컹한 물체가 종리추라는 걸 알게 되었다.

급히 맥부터 짚어보았다.

‘뛴다! 억세게 명이 긴 놈이군.’

종리추가 살아 있다는 걸 알게 되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시 시작이야, 처음부터. 개방… 몸 좀 달겠군.’

손으로 더듬어 전신을 만져 보았지만 종리추는 혼절했을 뿐 상처를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종리추를 일으켜 앉혀놓고 명문혈을 가볍게 두들겼다.

“컥!”

격한 기침이 토해졌다.

“정신이 없을 테니 잠시 누워 있어라. 곧 제정신이 돌아올 게다.”

적지인살은 종리추를 다시 뉘어놓고 사방을 더듬어갔다.

흙, 흙, 흙…

사방은 흙이었다.

“아직 살아 있네요.”

종리추가 정신을 차렸는지 반가운 음성을 토해냈다.

효웅, 마두, 정체를 알 수 없는 놈… 온갖 생각을 다 했지만 생생한

음성을 들으니 더없이 반가웠다.

적지인살은 이런 현상을 잘 알고 있다.

그토록 경계하던 정이라는 마물이다.

살수에게 정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살수가 정을 느낀다면 스스로

치명적인 약점을 만드는 것과 같다.

정이란 마물은 언젠가 반드시 모습을 바꿔 숨통을 조여올 게다.

적지인살은 대형에게 정을 주었다. 이형에게도, 삼형에게도… 소고에게도

정을 주었다.

정이란 놈은 성질이 워낙 고약해서 막는다고 막아질 놈이 아니다.

정을 막기 위해서는 사람을 만나더라도 계산적이 되어야 한다. 필요한

자, 필요하지 않은 자, 도움이 될 자, 도움이 되지 못할 자, 나중에라도

써먹을 수 있는자, 그렇지 못한 자…

비정하게 들리겠지만 살수의 인생이 원래 비정하지 않은가.

종리추는 써먹을 수 있는 자였다.

그런데 정이 들어버렸다. 어느 새…

‘빌어먹을!’

“어디 갇힌 것 같은데, 어딘지 모르겠다.”

“잡힌 거 아녜요?”

“입 방정 그만 떨고 몸이나 추려.”

“…”

“숨이 편히 쉴 수 있으니 공기가 들어오는 곳이 있다는 말… 말할

기력이 있으면 공기가 들어오는 곳이나 찾아.”

적지인살은 일부러 냉정하게 말했다. 자신의 마음을 부인이라도 하듯이.

우르르…!

흙더미가 밀려 나가며 시원한 공기가 들이닥쳤다.

“아!”

적지인살은 너무 놀라 입을 벌리고 말았다.

폐허.

봉분이 있고, 아름다운 조경수가 있어야 할 곳은 움푹 파인 구덩이

뿐이었다.

“개방이… 개방이…”

오로지 그 말밖에 새어 나오지 않았다.

봉분을 폭파시키다니! 명문정파임을 자처하는 개방이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단 말인가.

“훗! 역시 흑봉광괴군. 광괴, 광괴하기에 어떤 사람인가 싶었더니 정말

미쳤군. 이렇게까지 했는데 잡지 못했으니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겠군.”

적지인살은 어찌 된 영문인지 짐작해 냈다.

개방도 말대로 흑봉광괴는 봉분을 폭파시켰다. 십 장에 이르는 구덩이가

파일 정도이니 상당히 많은 화약이 동원되었을 게다.

적지인살은 다행스럽게도 폭약의 폭파 범위를 벗어났다. 하지만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다. 폭파되는 힘에 밀려 꿈틀거리는 흙의 성질 또한

화약의 힘에 버금갔다.

결국 자신은 흙에 얻어맞은 격이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주위에 약간의 공기가 있었다는 점이다. 숨으로

들이쉬기도 벅찰 만큼 미량의 공기에 불과했지만, 달려드는 흙의 기운을

비틀어놓기는 충분했다. 사람이 한참 달려오는데 살짝 발을 거는 것과

같았다.

공간은 공간을 만들고, 와중에 적지인살과 종리추는 바람에 날리는

가랑잎처럼 이리저리 내던져졌다.

“재미있어. 개방이 봉분을 폭파했다? 후후! 방주가 곤욕깨나 치르겠군.”

권문세가 사람들일수록 발복을 비는 마음은 강하다. 현재 누리고 있는

부귀영화를 자손 대대로 이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일 게다.

폭파된 봉분에서는 아직도 진한 화약 냄새가 풍겼다.

‘사람들이 달려올 거야. 오래 있을 곳은 못돼.’

정말 오래 있을 곳이 아니었다. 흙더미를 파고 나와 잠깐

지체했을뿐인데… 적지인살은 영원히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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