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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58화


살수는 무공으로 싸워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에든 살수의 비기로 싸워야 한다. 유구는 종리추의 말을 철저히 좇았다. 다른 살문 살수들에게는 종리추가 절대 명을 복종해야 하는 문주로 생각되겠지만 유구에게는 문주 이상이다.

종리추는 주공이다. 주공에게 도움이 된다면 명을 거역할 수도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철저히 복종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말을 듣지 않는 골칫거리다.

유구는 판단했다. 지금은 주공의 말을 좇아 살수비기로 싸울 때라고. 상대가 급박하게 달려들지만 이럴수록 주공 말을 좇아야 한다고. 설혹 이름 모를 강변에서 죽는 한이 있어도 상대에게 살수들과 싸웠다는 느낌을 들게 만들어야 한다고.

다행히도 사방이 어둡다. 공격해 오는 자들같이 절정으로 무공을 익힌 자들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을 어둠이겠지만, 어둠은 살수에게도 상당히 유용하다.

유구는 철수를 꺼내 양손에 끼었다. 옛날 대외산 살문 시절, 살천문주의 전갈을 가져온 살수를 쫓아 살문까지 뛰어든 살수를 죽이고 얻은 전리품이다. 전리품이라고는 하지만 독거미를 편히 사용하기 위해서였지 병기로 써 거둔 것은 아니다. 지금은 병기로 써야 할지도 모른다.

발로 땅도 차봤다. 척퇴비침 역시 철수와 마찬가지로 써먹을 일이 없겠거니 생각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동원해야 한다. 발가락 끝과 뒤꿈치에 장착된 비침이 자신감을 북돋아주었다. 비침은 시전하는 유구조차 감지하지 못할 만큼 신속하게 튀어나왔다가 들어간다. 신발에 설치하기는 했지만 느낌도 감촉도 없다.

유구가 느낀 것은 기분이다. 주비를 마친 유구는 털썩 땅에 엎드렸다. 무너지듯 엎드린 그였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자리를 이동하여 좋은 목을 골라 은신했다.

적이 봤을까? 봤을 게다. 상당한 무공을 익힌 고수들이니 보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교만이다. 살수비기를 정통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시마공을 펼쳐야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어차피 위치가 발각된 바에는.

유구는 품속을 더듬어 목갑을 꺼내 들었다. 목갑에는 흑거미가 들어 있다. 생사가 급박한 절대절명의 순간에 늘 목숨을 구해주던 절대 수호신이다.

‘하나… 둘…’

저벅, 저벅……!

‘셋… 넷……!’

저벅, 저벅!

상대도 몸을 숨기지 않는다. 이런 지경에서는 몸을 숨길 필요가 없다. 아무리 은신술이 뛰어난 살수라 해도 은신술을 펼칠 공간이 넉넉지 않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싸우는 방법은 오직 하나, 무공 대 무공으로 겨루는 방법뿐이다.

그것은 유구도 알고 있고 상대도 안다.

‘잘 가거라.’

유구는 흑거미를 풀어놓았다. 흑거미는 쏜살같이 치달려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놈은 인정이 없다. 그토록 정성을 들였지만 아직도 사람의 손길을 거부한다. 유구조차도 기회만 생기면 물려고 덤벼드는 놈이다.

하지만 유구에게 흑거미는 단순한 미물이 아니다. 애완 동물이다. 강력한 살상력을 지녔지만 놈을 사용해 본 기억도 별로 없다. 사용할 필요가 없는 경우가 태반이라서.

몸의 일부분처럼 여겨왔던 놈. 놈은 비로소 자유를 찾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광야로 풀려난 흑거미를 다시 찾을 방도는 없다. 대낮에도 풀자마자 잡아들여야 했던 놈인데, 어둠과 같은 색인 놈을 잡아들이기는 용이하지 않다.

놈은 보금자리를 찾아 떠날 것이다. 따뜻하고 습기가 차 눅눅한 곳으로. 그전까지는…… 앞에 거치적거리는 것은 모두 깨물어 뜯을 것이다. 물리는 즉시 독성이 심장에 파고드는 강력한 독을 뿜어내고, 그것도 모자라 살점을 녹여 빨아먹으리라.

“크윽!”

벌써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 거리낌 없이 유구를 향해 다가오던 도객 중 한 명이 주춤거리는가 싶더니 썩은 고목처럼 무너졌다. 도객에게는 마지막 일격을 쥐어짜 낼 힘밖에 남아 있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것조차도 전개할 곳이 없으니 속절없이 죽는 수밖에 없다.

“뭐야!”

“왜 그래!”

거침없이 다가서던 발걸음이 우뚝 멈춰졌다.

‘기회!’

유구는 풀숲을 헤치며 나아갔다. 자칫 자신이 흑거미의 제물이 될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지만 어차피 목숨을 내놓아야 끝장이 나는 싸움이다.

“이봐, 사제! 왜 그래!”

“도, 독……”

흑거미에게 물린 자가 마지막 일성을 쥐어짜 냈다.

“독?”

말을 걸던 도객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떠올랐다. 아무리 무공이 절륜해도 독이라면 역시 두려움의 대상이다.

“헉!”

도객 바로 곁에 있던 창수가 헛바람을 내지르며 허리를 굽혔다. 아니, 허리를 굽혔다고 생각되었는데 그 자세 그대로 무너졌다. 흑거미가 두 명이나 공격할 수 있었다니 천만다행이다.

사사삭……!

유구는 은신술을 전개하며 바싹 다가섰다. 몸을 숨기는 것까지는 보았겠지만 이렇게 바싹 다가서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게다. 이자들은 아직도 숨어서 일격을 노리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겠지.

“으음! 독거미군!”

창수가 독거미에 물려 쓰러질 때, 다른 창수는 쓰러지는 창수를 보지 않고 땅을 훑었다. 첫 번째 도객이 쓰러지는 순간부터, ‘독’이라는 말을 중얼거리는 순간부터 독에 대한 경계를 높였던 터이다.

쉬익!

시퍼런 창날이 야음을 찔렀다. 그가 들어 올린 창에 흑거미가 따라 올라왔다. 등판이 꿰뚫린 채.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아 징그러운 다리를 연신 꿈틀거리면서.

“하찮은 미물이!”

창수는 창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럴수록 흑거미의 등짝은 너덜너덜 해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놀랍다. 아주 정교한 창술이다. 창에 물체를 매달아놓고, 물체는 고정시킨 채 창만 휘돌리는 수법은 예사로이 볼 수 없다.

창수가 흑거미를 작은 조각으로 갈라내고 있을 때 유구는 그들의 발밑까지 접근했다.

사아악!

기습이 시작되었다.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나며 가장 가까이에 있던 자의 복부를 걷어찼다. 수법은 오독마군의 원음각. 각법 중에서 가장 파공음이 적게 난다. 유구 정도라면 소리를 완전히 죽일 수 있다. 무공이 일정 경지에 이르면 기감이 뛰어나게 되니 미풍이 불어온다는 느낌 정도는 갖겠지만.

퍼억!

맞은 자는 도객이다. 유구의 오른발은 도객의 복부에 틀어박혔고, 격중되는 순간 신발에서 비침이 불쑥 튀어나와 살을 찢고 들어갔다. 도객은 외마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슈우욱!

창수의 반응도 빨라서 도객이 변을 당하는 순간 창을 뻗어냈다. 유구는 손으로 땅을 짚고 빙그르르 몸을 돌리며 천둔각을 펼쳤다. 천둔각이 절정에 이르면, 모래밭에서 천둔각을 펼치면 모래 폭풍이 일어난다.

빠각!

창수는 자세가 낮은 유구를 노리고 좌부보저평창(다리는 오른 무릎을 구부리고 왼다리를 앞으로 뻗치면서 지면과 가까이, 창은 낮은 위치에서 수평으로)을 펼쳤지만 유구의 천둔각은 창대를 분질러 버렸다.

유구는 천둔각 초식이 끝나는 순간 허공으로 솟구치며 난화각을 전개했다.

파팍! 빠빠박……!

창수에게는 척퇴비침을 발출할 필요도 없었다. 천둔각에서 난화각으로 변화하는 초식의 연결은 무척 빨랐다. 한 손으로는 땅을 짚고 양발을 휘돌린 상태에서, 양손으로 땅을 튕기며 허공으로 솟구치며… 거꾸로 선 자세로 일식에 열두 번의 변화를 내포한 난화각을 펼쳤다.

각법으로만 세상의 모든 동작을 취할 수 있다는 구연진해라지만 상상을 불허하는 초식의 연결이다. 현란한 각법에 대응하지 못한 창수는 안면을 서너 차례 가격당했고 잘 익은 꽈리가 터지듯 피투성이가 되었다.

“크윽!”

뒤늦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창수는 자신이 비명을 터뜨리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으리라. 그는 얼굴뼈가 함몰되어 움푹 들어간 모습으로 휘청거렸다.

빠악!

난화각의 마지막 초식이 옆얼굴을 가격하자 머리가 휙 돌아갔다.


갑자기 대나무 숲이 생겨났다. 발 디딜 틈도 없을 만큼 빼곡이 들어선 대나무들은 한낱 나무가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는 무인들이다.

모진아는 천천히 걸었다. 자신이 익힌 오독마군의 구연진해는 오독마군이 창안한 구연진해와는 사뭇 다르다. 절정에 이른 오독마군의 구연진해가 어떤 것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종리추의 심득을 가미한 구연진해는 모진아의 몸에서 새롭게 태어났다.

그것은 종리추가 익힌 구연진해와 또 다르다. 종리추는 많은 무공으로 넓게 펼쳐 나가지만, 자신은 한 우물을 파듯 오직 구연진해만을 탐구해 왔다. 구연진해를 최고봉으로 익힌 무인은 세 사람이다. 오독마군, 종리추, 모진아.

하지만 세 명의 구연진해는 모두 다르다. 수련하는 과정은 같았을지 모르지만, 초식도 같지만, 일각에 깃들어 있는 힘과 흐름은 완전히 다르다. 모진아의 구연진해는 오독마군의 무결을 지나쳐 자신만의 무공으로 들어선 지 오래이다.

오독마군이 살아 돌아와 정통의 구연진해를 펼쳐 보았으면 좋겠다. 서로 같으면서도 완전히 다른 무공을 견줘봤으면 좋겠다.

모진아는 유구가 살수비기로 무인들을 상대하는 이유를 안다.

‘살수는 무공으로 싸우지 않는다. 어떤 경우든 살수비기로 싸워야 한다. 고지식한 놈…… 하기는 그런 고집이 지금의 네놈을 만들었지만. 지금의 경지를 넘어서려면 그 고지식함부터 버려야 할 게야.’

종리추는 다른 말도 했다.

“살수는 항시 힘을 비축시켜 놓아야 한다. 내력이 고갈되었다면 죽은 살수다. 심력이 바닥을 드러내도 죽은 몸이다. 살수에게는 죽이는 것 외에 한 가지 의무가 더 있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 살아서 돌아올 만한 내력이나 심력은 남겨놓아야 한다. 청부 대상을 죽였으되,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기진맥진해졌다면 실패한 청부다.”

무인은 싸워서 승부가 결정지어지면 끝난다. 이긴 자, 진 자 모두 자신들의 갈 길을 간다. 살수는 이기는 것 외에도 한 가지가 더 있다.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는 것.

유구의 선택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한 명이라도 더 죽이기 위해서는 살수비기를 써야 한다.

하지만 은신술이 어떤 것인가. 상대를 속이기 위해 숨어야 한다. 상대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심력을 소진해야 한다. 아마도 유구는 이 싸움이 끝날 무렵에는 죽었거나 기진맥진해 있으리라. 한두 명이면 모르겠거니와 이백여 명에 이르는 무인들이 병기를 곤두세우고 있는 마당에서는.

‘가장 빨리, 가장 깨끗하게 끝내야 하는 싸움인 것을……’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는 무인들이나 생각할 호사스러운 선택이다. 살수들의 입장에서는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한 빨리 싸움을 끝내야 한다. 이번 싸움이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번 싸움이 끝난 후 곧바로 다른 무리가 나타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쒜에엑……!

일도가 날아들었다. 동시에 좌우측에서 삼창이 몸통을 노리고 찔러왔다. 어느새 등 뒤로 돌아간 도객은 섬전도법을 전개했다. 단 일격에 목숨을 빼앗고자 하는 지독한 살공이다.

이들의 공격은 반격을 당해도 멈추지 않으리라. 일 대 일의 싸움이라면 당연히 피해야 될 공격도 피하지 않을 것이다. 동귀어진이면 감지덕지고, 자신의 목숨이 끊어지더라도 적의 몸에 상처만 입힐 수 있으면 손을 멈추지 않겠다는 각오다.

쉬익!

모진아는 환영각을 말 그대로 환영처럼 펼쳤다. 왼발을 축으로 빙그르르 한 바퀴 선회하며 짓쳐오는 창과 도를 차냈다. 도는 도신을, 창은 창대를. 한 치라도 벗어나든가 중심을 정확히 타격하지 않으면, 또는 공격해 오는 속도에 조금이라도 뒤처진다면 여지없이 핏줄기가 뻗칠 위험한 수비다.

파파파팟!

모진아의 철각은 자로 잰 듯 정확하게 병기들을 퉁겨냈다. 모진아의 작고 볼품없는 몸뚱이가 다시 탄력 있게 튀어 올랐다. 옛날, 녹요평에서 종리추와 겨루던 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온다. 겨우 열다섯에 불과한 어린아이와 싸워서 패하다니. 방심했다고는 하지만 이토록 뛰어난 절기를 익히고 있는데도 가치를 모르고 있었다니.

그때 그 시절이 어린아이들의 소꿉장난처럼 여겨지는 모진아다. 삼절기인을 죽였을 때보다도 한층 농익은 무공이다. 그만큼 성장했고 강해졌다.

그가 화를 내기 시작했다.

“타아앗!”

병기를 쳐낸 환영각에 이어 또 한 번 환영각을 펼쳤지만 도객이나 창수들은 형체를 잡아내지 못했다. 같은 초식을 반복하여 펼칠 경우 눈에 익히게 되고, 눈에 익히면 허점이 발견되고, 반격을 받는 것이 당연한데. 도객이나 창수들은 반격할 생각조차 못한 채 주춤주춤 물러섰다.

모진아의 각법은 빨라도 너무 빨랐다. 쾌도를 추구하는 하후가, 장병의 효용을 최대한 살려 중원제일창의 명성을 가져간 양가. 하후가나 양가의 무인들은 자신이 느리다고 생각했다. 느리다고 생각해 본 적은 결단코 없었는데. 빠름에 대해서는 일가견을 지녔다고 생각했는데.

‘아! 천객이나 상대할 자……’

모진아의 각법이 바뀌었다. 빠르고 현란한 각법에서 쇠몽둥이로 내려치는 것과 같은 묵직한 각법이다. 그리고 그 끝에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던 도객 한 명이 걸려 들었다.

빠악!

도객의 머리에서는 철봉으로 맞았을 때나 터져 나올 법한 기음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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