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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63화


천애유룡은 십이삼 년 전의 치욕을 잊지 않았다. 결코 잊을 수 없다. 밤에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으면 그날의 치욕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지곤 한다.

승승장구.

천애유룡이란 별호 앞에 붙어 다니던 말이다. 너무 들어서 본인 자신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때가 있었다. 지금 만약 누가 천애유룡 앞에 승승장구라는 말을 붙인다면 이제는 모욕이 된다. 남양 분타주가 되어 일개 살수 하나 잡지 못했다니. 십망이 선포되어 개방 전 문도가 촉각을 곤두세웠고, 그 최전선에 자신이 있었는데.

적지인살……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이다. 어쩌면 자신보다도 당시 십망을 주도했던 흑봉광괴가 더 치욕스러워 할지도 모른다. 십망은 당하는 쪽에서도 고통스럽겠지만 쫓는 쪽에서도 고통이다. 잘해야 본전이다. 십망이라는 큰 사건을 해결했다는 영광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큰 것이겠지만 무인에게는 하찮은 잡일에 불과하다. 그것보다는 절정 마두 누구를 죽였다는 말이 더 좋다.

실패하면 천하 죄인이 된다. 문파가 전력을 기울여 도와주었는데도 마두 한 명 잡지 못한 무능력자가 된다. 당시만 해도 팔팔 날고 기어 다닐 때다. 후계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쳐흘렀고, 지금 후계가 된 선은잠룡을 경쟁 상대로 두었다.

남양 분타주라는 지위도, 후계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도 그날 이후 물거품처럼 꺼져 보였다. 정말 그렇다. 꼭 물거품이다. 세상사가 허무하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그토록 허무하게 무너져 내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개방이 자랑스러워하던 천애유룡이란 별호는 ‘십망 실패자’라는 낙인이 찍혀 돌아다녔다. 십망을 천애유룡이 주관하지도 않았는데 흑봉광괴, 그리고 호법들이 있는데도.

‘살수 놈들! 뿌리를 뽑아버려야 돼.’

마음은 급했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전에는 서두르다가 망쳤다. 포위망에 완전히 걸려들었는데 서두르다가 판단 착오를 했다.

사사사삭……!

몸을 은밀히 숨기는 데는 이골이 났다. 기껏해야 잔재주 나부랭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걸 비기로 여기는 살수 놈들이 불쌍하다. 그의 눈에 종리추의 모습이 비쳤다.

놈은 자신들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태연자약하다. 반쯤 누워 있는 두 여인을 가운데 두고 삼각 축을 이루고 있는 모진아와 유구도 태연하다.

‘후후! 언제까지 태연할지 두고 보겠어.’

천애유룡은 살기가 일어나려는 것을 꾹 눌러 참았다. 이럴 때는 살기조차 흘려서는 안 된다. 완벽한 기습을 하기 위해서는.

‘응?’

천애유룡은 불길한 예감에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종리추와는 십여 장 간격을 두고 있다. 십여 장만 더 나아가면 공격을 할 수 있는데, 불길한 예감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예감을 믿었다. 예감이란 주변의 기운이 본신의 기운과 부딪치며 흘려내는 경고다. 무엇인가 색다른 것이 있으니 본신의 기운이 꿈틀거리는 게다. 그를 따르는 비객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비망사 살수들을 죽이며 터득한 은신술을 펼쳐 지루함을 끈질기게 참아냈다. 그들은 자신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다.

‘움직이면 안 돼. 무엇인가 있어.’

천애유룡은 기다렸다. 이곳에는 자신 말고도 3개 조가 더 있다. 그들은 하나같이 직접 검을 맞대고 겨뤄보기 전에는 승부를 점칠 수 없는 초강고수들이다. 오죽하랴, 그래도 한때는 각 문파에서 제일 뛰어나다는 기재들이었는데.

그들 중 성정이 성급한 자가 먼저 움직일 게다. 그는 틀림없이 죽는다. 종리추는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것이 아니라 준비를 끝내놓고 기다리는 상태다. 처음 공격한 사람은 십중팔구 죽는다.

그래도 공격하는 자는 나온다. 모두들 자신의 무공에는 절대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사실 천객을 본 다음에야 세상이 넓은 것을 알았지, 전에야 자신이 제일인 줄 알았던 사람들이잖은가. 처음 공격하는 자가 어떤 암습을 받아 죽는지 지켜보고 난 후에 공격해도 늦지 않다.

언제 공격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종리추의 목숨을 누가 거두냐가 관건이다. 천애유룡은 종리추의 목숨을 직접 거두고 싶다. 자신의 검으로 단칼에 잘라내고 싶다. 기다렸다가…… 천천히 공격해도 그 기회는 자신의 것으로 만들 자신이 있다.

풀숲에 납작 엎드려 있는 그의 볼 위로 작은 개미가 살금살금 기어갔다. 공격은 좀처럼 시작될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천애유룡은 다른 조에서 먼저 공격을 시작해 주길 바랐지만 그들도 움직일 기미가 없다. 자신을 따르는 비객들도 공격을 시작하자는 신호를 보내오지 않았다.

한두 사람이 느끼는 것이 아니다. 비객들 모두 초원에 넓게 펼쳐진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있다. 야산이라고는 하지만 큰 나무 한 그루 없는 환히 드러난 초원과 다름없는 곳. 전에 비망사에게 은신술을 배우던 지형이 이와 비슷했다. 이런 지형에서는 살수들이 어떻게 은신하는지 소상히 알고 있는데…… 움직일 수 없다. 눈에 보이는 것은 없지만 분명히 위험이 내포되어 있다.

종리추가 움직였다. 그는 일어나 불을 피웠다. 아마도 음식을 끓여 먹을 요량인 듯싶은데, 정말 그렇다면 대단한 배포다. 적이 지근거리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태연하게 음식을 끓여 먹기까지 하다니.

종리추는 불 위에 그릇을 올려놓았다.

‘정말 음식을 해 먹을 작정인가? 놀리고 있군. 공격할 테면 해보라고. 네 이놈!’

신형을 일으켜 한달음에 달려나가도 충분한 거리인데, 비객 4개 조라면 무공으로 겨뤄도 충분히 승산이 있는데. 그래도 경거망동은 삼가야 한다. 하후가, 양가 무인들이 괜히 당한 게 아니다.

종리추는 천외천과 동등한 입장이 되었다. 천외천이 하오문, 개방의 정보를 당당하게 끌어 쓰고 있다면, 종리추는 암중으로 지원을 받고 있다.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후계의 행동이다. 나이도 젊고 사마외도를 철저히 배격하는 개방 방주가 될 사람이 왜 살문 편에 섰는지. 개방을 떠나 비객이 되었지만 천애유룡의 가슴속에는 개방을 아끼는 심정이 살아 있다.

그는 느끼고 있다. 흑봉광괴와 후계가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일장 격돌을 일으킬 것이고 후계는 죽게 될 것이라고. 개방 역사상 단 한 번도 없었던 내분이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 이제 개방은 철저하게 탈바꿈해야 한다. 후계처럼 살수들 편에 서는 우매한 자는 나타나지 못하도록.

종리추가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릇을 들고 소고에게 다가섰다.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이 아니라 약재를 끓인 듯하다. 실제로 향긋한 약 냄새가 콧속을 간질였다.

“음……!”

소고가 신음을 토해냈다. 이를 악다문 신음이지만, 소리는 십여 장 밖에 숨어 있는 천애유룡의 귓전에 생생하게 들렸다.

‘무방비 상태다. 치려면 지금 쳐야 되는데……’

불길한 예감은 아낙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잡초가 무성한 밭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밭일에 몰두하던 여인은 조쾌라는 별호로 불렸다. 하오문 오기 중 한 명으로 하오문주의 호법이기도 했다.

비객은 하오문 오기를 몰살시켰지만 아무 정보도 얻어내지 못했다. 이곳에서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알아내야 하는데, 하다못해 하오문주가 연루되어 있는지조차 알아내지 못했다. 조쾌의 목을 베는 순간 지금과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을 죽이는 데 기분이 좋을 리는 없지만, 그렇게 찜찜한 느낌이 들어보기도 처음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어느덧 두 시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종리추는 할 짓을 다 했다. 처음에는 약재를 끓였지만, 나중에는 정말 음식까지 만들어 먹었다. 탕초어 냄새가 식욕을 돋운다. 종리추는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 틀림없다.

길을 떠나는 사람은 건포면 족하다. 탕초어 같은 음식은 육신이 편한 곳에서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요리다. 준비할 것도 많다. 생선도 그렇고, 기름도 그렇고. 먼 길을 가는 사람이 기름까지 지니고 다닌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미리 준비되어 있었던 것.

천애유룡은 드디어 결심을 굳혔다. 이대로 가만히 기회만 엿보고 있다가는 며칠 밤을 뜬 눈으로 보내게 될지 모른다. 그렇게 해서 기회가 생긴다면 몰라도 행낭을 수습해 떠나는 모습을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으로 지켜보게 될지도. 결단이 필요하다.

‘모두들 잘해줄 거야.’

천애유룡은 더벅머리를 하고 있는 자에게 슬금슬금 기어갔다. 아미파 승려였지만 비객에 들어오면서부터 승적을 버리고, 문파를 버리고 일개 야인이 된 자. 그때부터 기르기 시작한 머리가 꽤나 자랐다. 비객들은 그를 육이라고 부른다. 제육조 두 번째 위치에 있다는 뜻이다.

비객들에게 이름은 필요 없다. 무림에서 활동할 당시의 무명이나 별호, 도호도 필요 없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위치를 나타내 주는 별호만 있으면 된다. 육이, 그는 육일이 죽으면 뒤를 이어 육조를 이끌 사람이다.

육이는 천애유룡이 다가오는 모습만으로도 그의 생각을 읽었다. 육이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좋지 않아.’

천애유룡은 눈을 부릅떴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사라질지도. 누군가는 불을 당겨야 해.’

육이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기다리는 자가 이기는 싸움이야.’

천애유룡은 고집을 꺾지 않고 손을 들어 종리추를 가리켰다.

‘모두들 기다려. 그럼 이길 거야. 기다리는 게 이기는 싸움이라… 그렇지, 그런 싸움이지. 그럼 적이 먼저 움직이도록 해야지. 내가 저놈이 먼저 움직이도록 유도해 주지.’

육이는 천애유룡을 노려보았다. 천애유룡도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뜻이 정 그렇다면…… 조심해.’

육이가 드디어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천애유룡은 비망사 살수들에게 배운 그대로 배를 납작 땅에 붙이고 슬금슬금 기어갔다. 풀이며, 나무며, 물체들이 옷에 닿으며 토해내는 소리를 최대한으로 억눌렀다.

‘소리가 날 것 같으면 움직이지 않는 편이 낫다.’

비망신사는 그런 점을 누누이 역설했다. 비객들은 철저히 배웠다. 살수들의 은신술부터 기습 방법까지 모두 다. 시험도 했다, 비망사를 상대로, 그리고 지금까지 본신 무공에 살수 비기가 합쳐진 결과는 비객을 한층 더 강하게 만들어주었다는 게 확인됐다.

천애유룡은 오감을 최대한으로 열었다. 자신이 소리를 흘리지 않는 것은 당연하고 적이 흘리는 소리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오 장…… 이제 거의 다 왔어.’

언제나 그렇지만 이만한 거리를 남겨두게 되면 갈등이 일어난다. 당장 몸을 튕겨 올려 일격으로 적의 머리를 가격하고 싶다. 그래도 충분할 것 같다.

하나 비망사 살수들은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확신이 선 경우에도 쉽게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최대한 가까이, 중도에 발각되면 발각되는 시점에서,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적의 발밑에까지 이르러 기습을 가했다. 가까이 갈수록 승률은 높아진다. 발밑에 이르러 공격을 가한다면 삼류 무인이 초일류 고수도 무너뜨릴 수 있다. 물론 초일류 고수 정도 되면 공격 범위 안에 적이 들어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지만.

종리추는 어느 정도일까? 공격 범위를 어느 정도로 설정했을까. 이목은 어느 정도나 영민할까. 천애유룡은 조급함을 눌러 참았다.

사삭! 사사사삭……!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옅은 소리가 났다. 소리를 완전히 죽인다는 것은 신이라도 불가능하다. 물체와 물체가 부딪치는 순간 소리가 탄생한다. 요는 그 소리를 어느 정도 자연 속에 묻어버릴 수 있느냐에 살수의 능력이 판가름된다.

바람이 불어 풀밭을 스칠 때, 새들이 날아오를 때, 목표로 한 적이 소리를 흘려낼 때……

‘삼 장. 이제는 발각돼도 일격을……’

병기를 만져 본다든가 하는 서툰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런 사소한 행동이 은신을 깨는 주요 원인이다. 병기는 공격하는 순간에 뽑아야 한다.

‘이 장만 더 가서… 이 장이 안 되면 일 장만이라도 더 가서.’

종리추가 다시 소고에게 시선을 옮겼다. 순간,

사사사사삭……!

천애유룡은 단숨에 일 장이란 거리를 좁혔다. 종리추와의 거리는 이제 이 장. 종리추가 고개를 돌리는 짧은 순간에 가격까지 성공할 수 있는 거리다.

종리추를 뚫어지게 응시했지만 그는 별다른 이상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소고의 상처를 치료해 주고, 소여은의 상처를 보고 있는 모습이 태연하기만 하다.

하후가주를 죽인 놈이니 무시할 수 없는 강자인 것만은 틀림없는데… 비영파파의 월영반을 손쉽게 막아낸 놈이니 강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데… 그런 자가 이렇게 가까이 접근하도록 기미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니.

‘무엇인가 있어. 어쩌면 알면서도 공격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지도. 어쨌든 넌 죽어.’

지금쯤 비객들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을 게다. 오 장 범위 내로 들어섰을 수도 있고, 자신의 바로 뒤까지 따라왔을 수도 있다. 자신이 움직이는 순간 비객 모두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불문가지다.

비객들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을 저며 울리는 불길한 예감의 근원이 무엇이냐는 것. 그것만 알게 되면 공격은 기정사실이다.

‘일 장만 더? 아냐, 그러다가 발각되면 기선 제압이…… 아냐, 지금 여기서 공격했다가는 자칫 일을 그르칠 수도. 그래, 일 장만 더 나가서.’

천애유룡은 일 장을 더 나아가기로 작심하고 종리추를 살폈다. 모진아와 유구도 살펴야 할 대상이다. 소여은이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다. 종리추가 곧 고개를 가로젓는다.

순간, 천애유룡은 일 장이라는 간격을 좁히기 위해 움직이려고 했다. 원래 마음을 먹으면 몸은 따라 움직인다. 이번에는 달랐다. 마음은 움직이고자 했는데 몸은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마음이 갈라졌다. 움직이고자 하는 마음과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마음. 틈을 발견하고 움직여도 된다는 생각까지 들었으면서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마음은 왜 고개를 쳐든 것일까? 불길한 예감 때문이다. 무엇인가 묵직한 살기가 뒤통수를 후려치고 있다. 손가락 하나라도 꼼지락거렸다가는 당장 목숨을 잃을 것 같다.

‘이게 도대체……’

불길한 예감의 근원에 접근했는데, 무엇인지 아직도 알지 못하겠다. 종리추가 지척에 있고 움직임을 소상히 꿰뚫고 있으니 종리추는 아니다. 무엇인가 다른 게 있다.

천애유룡은 일 다경이란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냈다. 종리추는 소여은의 상처를 보살핀 후 유구에게 다가가 뭐라고 말을 주고받는다.

‘좋아. 무엇인지 알아보지. 어차피 버리기로 한 목숨.’

천애유룡은 드디어 공격을 생각했다. 아직 거리는 그가 만족할 만큼 좁히지 못했지만 애초에 비하면 많이 좁혔다. 생각이 일자 몸도 따라 일어났다.

쒸이이익……!

번쩍 뛰어오른 신형이 솔개처럼 날아갔다. 한 손에는 병기인 봉이 들려 있다. 그때,

사아아악!

뱀이 기어가는 듯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다가왔다.

“헛!”

천애유룡은 경악했다. 눈길은 종리추에게서 떨어져 발밑에서 쏘아 올라오는 방절편으로 모아졌다. 설옥으로 만들어서 아름다운 윤기가 자르르 흐른다. 여인이 욕심을 낼 만한 병기.

귀영방편이란 자가 이런 병기를 사용했다. 그는 원인 모를 죽임을 당했지만 병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얼마 후 살문에 설옥으로 만든 방절편을 사용하는 자가 나타났다.

‘혈살편복!’

이자가 왜 여기 있는가. 혈살편복이 언제 종리추와 합류했는가. 이자가 있다는 것을 왜 알지 못했을까. 비광사의 살수비기는 모두 동원했는데. 움직일 때는 쥐도 새도 모르게, 천하의 소리는 모두 들으면서.

온갖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지만 당장 해야 할 행동은 혈살편복의 공격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휘익!

몸을 뒤집으려고 했다. 방절편의 공격에서 벗어나는 길은 몸을 뒤집어 옆으로 빠져나가는 길뿐이다. 하지만 그전에 그의 몸은 방향을 잡았다. 종리추를 향해 내리꽂히는 신법으로.

철컥!

방절편이 몸을 말았다.

‘당했어!’

촌각에 불과한 시간이다. 방절편이 공격해 온다는 기미를 알아차리고 몸을 뒤집어 피하는 순간까지는 눈 한 번 깜빡이는 것보다도 짧은 시간이었다. 혈살편복의 기습은 천애유룡의 상상을 넘어섰다.

파아앗!

혈무가 피어올랐다. 천애유룡은 극심한 통증을 느꼈지만 통증보다 더 큰 경악에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완벽한 살공! 이거야말로 특급 살수!’

자신의 이목까지 속인 은신술, 완벽한 기회에 손쓸 틈도 주지 않는 공격. 살수들은 흔히 말한다. 살수 비기를 절정으로 익히면 초절정고수도 죽일 수 있다고. 그런 미친 소리가 어디 있냐고 코웃음 쳤지만 이제는 믿어야 할 것 같다. 혈살편복 같은 자가 감히 자신에게 덤벼들 줄이야. 감히 자신의 몸을 할퀼 줄이야. 자신이 이런 자에게 죽을 줄이야……

쿵!

천애유룡은 살 맞은 새처럼 떨어졌다. 초원은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조용했다. 천애유룡의 시신에서 흘러나오는 혈향만이 조금 전 무슨 일인가 있었다고 말해 준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천애유룡을 죽인 아름다운 병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천애유룡을 따라 움직였던 비객들은 어디로 갔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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