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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65화


세 사내는 거침없이 걸어왔다. 그들은 비객들처럼 은신술을 펼쳐 몸을 숨기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서두르지도 않았고 긴장하지도 않았다. 후원을 산책하듯이 걸어올 뿐이다.

유구가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의 손에는 손바닥에 꼭 들어갈 만큼 작은 피리가 들려 있었는데, 손가락이 움직이자 작은 소리를 토해냈다. 바람 소리라고 착각하기 쉬울 만큼 아주 작은 소리다.

“주공.”

모진아가 다가와 종리추 곁에 섰다.

“……”

“이것 아십니까? 꼬마였을 때 주공이 훨씬 더 귀여웠다는 것.”

“하하!”

“쬐끔한 놈이 얼마나 사납게 날뛰던지.”

“……”

“요즘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중원에 괜히 왔다는.”

“돌아가고 싶나?”

“그럴 수만 있다면……”

“가도 좋아.”

“가야죠. 저놈도 데려가겠습니다.”

모진아는 유구를 가리켰다.

“……”

종리추는 대답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묵묵히 듣기만 했다.

“허허! 남만의 폭우가 그립군요. 비나 왔으면……”

“……”

“주공은 제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줬지만…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분은 아닌 것 같습니다.”

“……”

“살수에게도 행복이 필요합니다. 행복이 없으면 하루도 견디기 힘든 게 세상사 아니겠습니까? 허허! 노망난 늙은이 주책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아직 노망날 정도로 늙진 않았어.”

종리추와 모진아의 눈길이 마주쳤다. 훈훈한 정이 스민 눈길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도, 죽음에 대한 공포도 깃들지 않은 행복한 인간의 눈길이다.

“흠! 아실지 모르지만 구명은……”

“모진아답지 않아. 여자를 가로채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어. 문제는 뒤야. 뒤를 돌봐줘야지.”

“……”

이번에는 모진아가 대답하지 않았다. 구릉 아래쪽에 눈길을 주었던 모진아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허허, 오독마군을 괜히 만나 가지고…… 무공도 적당하게 익혀야 재미있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회의가 치밉니다. 꼭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 같은 느낌이 들어서.”

“……”

“갔다 오죠.”

모진아는 구릉 아래쪽에서 걸어오는 세 사람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자신의 뒷모습을 오래 보이지 않았다. 그 역시 다른 살수들처럼 은신술을 펼쳐 풀숲으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정면 대결이야! 정면 대결을 하고 있어!’

소고는 살문 살수들을 다시 봤다. 정말 종리추의 행동은 신출귀몰하다. 살행을 명받았을 때는 단순히 살문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서인 줄 알았다. 이유 있는 살인을 함으로써 살수 문파의 나쁜 모습을 희석시켜보려는 생각인 줄.

다른 생각이 들기도 했다. 종리추라면 무엇인가 복안을 깔아놨을 것 같은 막연한 생각만 했다. 천외천과 살문은 한 세상에서 공존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서로 은원이 얽히고설켜 풀래야 풀 수 없는 매듭처럼 원한이 중첩되었다. 하후가, 양가 무인들이 급습해 온 것은 당연하다. 그들에게는 많은 눈과 귀가 있으니 어디로 간다 한들 쫓지 못할 이유가 없다.

비객이 출현한 것도 자초한 일이다. 벌건 대낮에 낯 내놓고 돌아다니는데 누가 공격하지 않으랴. 모든 게 계획된 일이다. 종리추의 머리 속에서 계산된 대로 움직이고 있다.

천천히 걸어오는 천객 세 명. 그들은 무적이다. 살문 살수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종리추가 천객 한 명을 죽였지만 세 명까지 상대할 수 있을지. 종리추는 피하지 않는다. 여기서 결판을 낼 심산이다.

하후가, 양가를 끌어들였다. 비객은 찾아온 것이 아니라 안배에 따라 굴러들었다. 천객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제 발로 걸어왔지만 그들이 걸어온 길은 종리추가 정해주었다. 이들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나타날 게다. 어쩌면 천외천 무인들 모두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소고는 비로소 자신의 상처가 별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종리추의 무심한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있다. 이번 일전에 살문과 천외천의 생사가 갈려진다. 무모하다. 이렇게 무모한 계획은 없다. 살문 살수들만으로 천외천을 상대할 수는 없다.

모진아가 종리추에게 한 말도 죽음을 각오했기에 할 수 있는 말들이다. 혈영신마와 버금가는 무공을 지닌 모진아조차도 이번 일전에서는 생사를 장담하지 못한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 같은 모진아이지만, 죽음에 가장 근접해 싸워야 하는 싸움이다.

‘살문 살수들 모두가 모였어. 저 속에는 적사도 있을 거야. 모두… 모두 여기 모였어.’

소고는 일어나 앉았다. 살문 살수들이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다. 그녀도 한때는 사령관이 되고자 했다. 살수들의 신이 되어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태산이 되고 싶었다. 살문 살수들은 한때 그녀의 수하였다. 자신이 직접 거느리지는 못했지만 종리추를 통해 숱한 일을 의뢰했던 살수들이다. 그들이 현 무림에서 가장 강하다는 초강고수들과 싸우는 모습을 봐야 한다.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정도의 아픔에 인상을 찡그리는 것은 죽음을 앞에 두고 싸우는 살수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잘 싸워봐.”

소고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소리였다.

석양이 진다. 붉게 물든 노을이 산하를 비추고 있다. 노을은 그 자체만으로는 아름다움이 없다. 구름에 엉켜 있어야 노을다운 맛이 난다. 실구름은 실구름대로, 뭉게구름은 뭉게구름대로, 하늘 가득히 펼쳐진 구름의 형태에 따라서 노을의 맛이 달라진다.

쒜에엑!

옥빛 광채가 노을과 어울렸다. 붉은 빛무리 속에서 청아한 옥빛이 물결쳤다.

“혈살편복이란 놈이군.”

상대는 당황하지 않았다. 천애유룡은 단숨에 죽인 기습 살공이지만 천객은 유유자적했다. 혈살편복은 완벽한 기회를 잡았다.

적이 지근거리에 다가온 때까지 시마공을 펼쳐 호흡과 기운을 죽였다. 시마공을 풀고 폭혈공을 펼치는 시기는 거리에 따라 달라진다. 비수와 같은 짧은 병기는 몸에 부딪칠 정도 바짝 다가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좋지만, 혈살편복의 방절편처럼 장병을 지닌 경우에는 병기가 닿을 거리를 계산해 내는 게 중요하다.

혈살편복은 완벽한 거리를 계산했다. 적은 다가왔고, 일시에 폭혈공을 전개해 진기를 사지로 돌렸다. 공격도 성공적이다. 천애유룡은 이 일격에 목숨을 잃었다.

까앙!

쇠와 쇠가 부딪치는 소리가 터졌다.

‘치잇!’

혈살편복은 일이 틀어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살수의 기습에서는 병장기가 부딪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병장기가 부딪치면 이차 공격을 해야 되고, 그때부터는 무공 대 무공의 싸움이 된다. 한마디로 병장기가 부딪치는 순간 살수의 생명은 끝난다. 그 후부터는 오직 무인이라는 존재만이 남을 뿐.

‘기습에 실패하면 무조건 물러서라. 자신의 목숨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특급 살수다. 공격하기 전에 반드시 퇴로를 찾아두어라.’

퇴로를 찾아두었다. 혈살편복은 일격이 실패하자 옆으로 미끄러지듯 이동했다. 그곳에는 작은 구덩이가 있어서 일시에 몸을 은신하기에는 더없이 적합한 곳이다. 상대를 쳐다볼 필요도 없다. 상대가 공격해 오는지 물러서는지 지켜볼 필요도 없다.

상대는 공격해 오고 있다. 방절편과 검이 맞부딪치는 순간 상대의 의도를 짐작해 냈다.

쉬이익……!

혈살편복은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상의 신법을 펼쳐 물러섰다. 이럴 경우, 대부분은 성공한다. 움직일까 말까 생각한 후에 펼치는 신법이 아니다. 병장기가 부딪치는 순간 이미 몸을 물렸다. 적어도 상대보다 한 걸음 빠른 판단이다.

상대는 공격해 오겠지만 허공만 스치고……

“헉!”

혈살편복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움찔했다. 허공을 스치고 지나갔어야 할 검이 등을 후려갈겼다. 무엇으로 표현할까? 등에서 시작된 전율이 전신을 마비시키고 있는 이 상황을.

“크윽!”

혈살편복은 짧은 단말마로 최적의 표현을 했다.

“이게 바로 칠성검문의 칠성검법이야. 무인들이 삼류 무공이라고 경멸하는 검법이지.”

등 뒤에서 칠성검문의 소문주인 진조고의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진조고는 그 뒤로도 몇 마디 더 중얼거린 듯한데 혈살편복은 듣지 못했다. 그의 육신은 그가 애초 퇴로로 정했던 구덩이에 던져지듯 무너져 내렸다.

혈살편복의 죽음은 커다란 경종이다. 천객은 비객과 다르다. 비객에게는 시마공에 이은 폭혈공이 유효하게 작용했지만 천객의 반사적인 무공 앞에는 무용지물로 전락했다. 천객에게도 시마공, 폭혈공이 통할 것인가. 물음에 대한 답이 나왔다. 혈살편복이 죽음으로 가르쳐 준 값비싼 해답이다.

사실 혈살편복은 종리추의 명을 거역했다. 종리추는 천객의 무공을 거의 정확하게 짚어냈다. 살문 살수들이 받은 서신에는 ‘공격을 하되 하지 마라. 기습하는 모양만 보이고 즉시 물러서라’는 말이 두 번이나 적혀 있었다.

혈살편복은 기습하는 모양만 보인 것이 아니라 정말 기습을 가했다. 필살에 자신이 있어서 그랬겠지만. 누구라도 그랬을 게다. 혈살편복이 가장 먼저 공격을 가해서 그랬지, 누구라도 먼저 공격을 취한 자는 모양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 공격했을 게다.

시마공에 이은 폭혈공은 필살의 자신감을 주었다. 어떠한 적도 기습을 감당해 내지 못했다. 팔부령을 떠나 살행을 하면서 숱하게 경험해 보았지만 변변하게 막아내는 자들이 없었다. 구파일방이 십망을 대신해 만든 최후의 보루, 비객들조차도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그런 마당인데 어찌 공격하지 않겠는가. 병장기가 부딪치는 순간 혈살편복은 죽은 목숨이었다. 다른 무인들 같으면 한 수 빠른 판단이 목숨을 구해주었겠지만, 천객의 가공할 빠름에는 당해내지 못한다. 천객의 살공에서 벗어나려면 두어 수 빠른 판단이 필요하다. 무조건 물러서는 것만이 살길이라는 말과도 상통하는 말이지만.

‘일 살 역사. 후퇴.’

종리추의 또 다른 명령이다. 누구든 한 명이라도 죽으면 무조건 물러서라는 강압적인 명령이다. 살문 살수들은 물러섰다. 혈살편복의 죽음에 피눈물이 흘렀지만 복수는 차후에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또 혈살편복이 당했다면 자신들이 나서봤자 죽음밖에 돌아오는 것이 없다.

사사사삭……!

바람도 없는데 풀숲이 흔들렸다. 살문 살수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움직임이다. 그래도 천객은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천천히 처음부터 걸어왔던 그 속도로 걸어왔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진조고만이 피 묻은 검을 들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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