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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69화


정운은 하양 진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당파를 버리고 개방의 구진법을 받은 주제에 마치 도인이라도 된 듯이 행동하는 게 껄끄럽기까지 했다. 천객이면 천객으로 족해야 한다. 인의와 도의를 따지겠다면 애당초 천객에 들어오지 말았어야 한다. 눈앞에서 영재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버텼던 자가 이제 와 인의와 도의를 따진다면 어불성설이다.

정운은 산 중턱에 이르자 잠시 숨을 돌렸다. 하양 진인은 다른 길을 통해 산 밑으로 내려갔다. 그와 떨어져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홀가분한데…… 하양 진인은 살문 살수들을 곧이곧대로 보지 않는다. 살문 살수라 해도 죽일 자는 죽이고 살릴 자는 살려야 한다는 주의다. 그러면서도 냉철할 때는 얼음이 돋는 듯하고. 속을 알 수 없는 자다. 잠시 숨을 고른 정운은 산정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삼현옹은 지극히 은밀하게 밀실을 만들어 놓았지만, 현운자는 삼현옹의 기관 설치 방식을 낱낱이 일러주었다. 소림사룡이라는 말은 괜히 들은 것이 아니다. 수백, 어쩌면 수천에 이를지도 모를 숙가제자들 중에서 사룡이 되기까지는 뛰어난 두뇌와 타고난 무재가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덜컹!

석판은 손쉽게 열렸다. 살문 살수들이 아직도 밀실에 숨어 있는지, 밖에 나와서 무너진 동혈을 수리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들은 먼저 석판부터 막아 놓았어야 한다. 그랬다면 입구를 찾기 위해 며칠 동안은 끙끙거렸을 게다.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살문 살수들을 의식해서 발자국 소리는 내지 않았다. 삼현옹의 기관진식을 배웠다고는 하지만 실전에서 부딪치면 상당한 난관을 겪어야 한다. 몇 명은 잡지 못하고 흘려버릴 수도 있다. 사서 고생을 할 필요는 없다. 혹시 밖에 나와 있다면 나와 있는 그대로 잡아들이면 된다.

정운은 코를 찡그렸다. 동혈을 떠날 때는 피 냄새, 폭약 냄새만 가득했는데 향긋한 향 내음이 풍기고 있다.

‘이놈들! 사람을 너무 우습게 보았군.’

아직은 향을 피울 때가 아니다. 비부인가 뭔가 했던 그자, 또는 절벽 아래서 죽은 몽고인을 위해 피우는 향이겠지만 너무 성급하다. 이들은 향을 피우기 전에 천객이 완전히 물러갔는지부터 살폈어야 한다. 설혹 완전히 물러갔다고 판단이 들어도 향을 피우는 것 같은 어수룩한 행동은 금물이다. 정운은 서두르지 않고 향 내음이 풍기는 곳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그가 맡은 냄새는 향 내음이 아니었다. 정운은 향 내음의 진원지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에서야 향 내음이 아니라 여인의 분 내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미련한 것들이다. 싸움터에서 분을 바르고 있다니. 설마 비적마의가 영원히 보호해 줄 수 있다고 믿은 건 아닐 텐데.

앞에 펼쳐진 넓은 공지에는 많은 여인들이 서성이고 있다. 일부는 물을 뿌리고 있고 일부는 곳곳에 흩어진 살점을 주워 모으고 있다. 그중에는 사내도 보인다. 정운은 사내의 이름을 짐작해 냈다. 적지인살. 살혼부 살수들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물이다. 살혼부라는 이름 자체가 무림에서 사라져 버렸으니 그도 운명을 같이해야 한다. 생사를 같이하던 사람들이 모두 죽었는데 혼자만 살아 있다면 미안하지 않은가. 정운은 여인들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아!”

비부의 살점을 주워 모으던 화령 살수가 제일 먼저 정운을 발견하고 탄성을 토해냈다. 여인의 탄성을 들은 다른 여인들이 고개를 돌렸다. 정운은 여인들의 주목거리가 되었다. 여인들은 미련하기 짝이 없다. 낯선 자가 나타났으면 제일 먼저 횃불부터 꺼야 한다. 그러면 혹 살길이 있을지도 모른다. 여인들은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감히 검을 뽑아 들었다. 검을 잡은 모습을 보니 검을 사용할 줄은 아는가 본데, 한데 아직은 멀었다. 무공이 겨우 이 정도라면 구진법을 통과하기 전이라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

“검을 내려놔, 죽기 싫으면.”

여인들은 내려놓지 않았다. 말도 건네오지 않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자신들이 누구를 상대하는지 아는 눈치다.

“죽음을 각오했군. 좋은 각오야.”

정운은 상황을 즐겼다. 많은 여인을 상대로 싸워볼 기회는 많지 않다. 많은 여인을 일시에 죽일 기회는 더 더욱 없다. 소림사룡이라는 신분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지만 천객의 신분이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래서 천객이 좋지 않은가.

쉬이익!

제일 먼저 공격을 가해온 자는 예상했던 대로 적지인살이다. 적지인살의 무공은 가히 초일류 고수급이다. 초식의 배합이나 전개하는 것만을 놓고 보면, 아쉽게도 초식을 받쳐 줄 내력이 부족하지만. 정운은 검이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뒷짐을 지고 기다렸다가 지척에 이르자 슬며시 일검을 뻗어냈다. 그에게는 평범한 검이다. 그러나 적지인살에게는 벼락같이 보였을 게다. 전신 근육이 최고조로 팽창한 가운데 펼치는 검이 어찌 그렇지 않으랴.

“컥!”

적지인살은 너무 쉽게 무너졌다. 그의 일생에 걸쳐 이처럼 허무하게 무너진 싸움도 없었을 게다. 정운의 검은 정확히 적지인살의 목젖을 꿰뚫었고, 적지인살은 눈만 깜빡이다가 숨을 거뒀다. 그때,

쉬익! 쉬이이익!

어둠 한구석에서, 횃불이 미처 밝히지 못한 어둠 속에서 섬광처럼 불꽃이 일어나며 비수가 날아왔다.

“하하! 하오문주의 한성천류비결! 배금향이라는 여자군. 좋아!”

정운은 가볍게 손목만 몇 번 꺾었다.

탕탕! 탕탕탕……!

배금향이 던진 비수는 싱겁게 떨어져 나뒹굴었다. 종리추에게 한성천류비결을 전수해 준 사람은 배금향이다. 하지만 그녀의 한성천류비결은 종리추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녀는 종리추만큼 수련하지 못했고, 겨우 흉내나 내는 수준에 불과하다. 처음부터 천객을 어찌해 본다는 생각으로 전개한 무공은 아닐 게다.

배금향은 물러서지 않았다. 상대가 되지 않을 게 자명한데도 장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

“알고 있어. 적지인살과 부부 간이라고. 황천 가는 길이 외로운 것 같으니 선심 쓰지.”

정운은 장검을 아래에서 위로 치올렸다.

사각……!

장검 끝에 배금향의 전신이 걸렸다. 배금향의 봉목이 부릅떠졌다. 그녀의 눈은 이미 죽어 넘어진 적지인살의 시신을 뒤쫓았다.

정운은 다음 상대를 골랐다.

‘무공을 익힌 계집이……’

그의 눈에 비친 여인들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모두들 약간씩 잔재주를 익힌 것 같은데 무림에 나가 활보할 수조차 없을 만큼 미약해 보인다.

‘그렇군. 이 계집들… 살수 놈들과 배 맞은 계집들이군. 그것도 운명. 살수 놈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을 맛봐야 해.’

정운은 여인들 모두를 죽이기로 결심을 굳혔다.

저벅! 저벅……!

그의 발걸음 소리에 섬뜩한 귀기가 묻어났다.

쒜에엑……!

겁에 질린 여인이 검을 휘둘러 왔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짓쳐오는 검인 것 같다.

“어리석은!”

정운은 곧바로 마주쳐 갔다. 마주칠 필요도 없다. 가까이 다가오기를 기다려 검을 내려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상황은 정운이 생각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아!”

여인이 공격을 멈췄다. 여인은 정운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다.

‘응?’

정운도 여인을 바라봤다. 아는 여인인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은……?

“저, 정운… 오라버니.”

‘오라버니?’

정운은 여인의 얼굴을 좀 더 자세히 뜯어봤다. 아무리 살펴봐도 낯선 얼굴이다. 귀여운 얼굴이지만 비슷한 얼굴조차도 기억에 없다.

“나를 아나?”

“저, 정운 오라버니, 소매… 향아예요.”

여인은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가슴의 기복도 점점 높아져 내심 심히 격동하고 있는 듯했다.

“향아?”

정운은 여인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말해 오는 것을 보니 어디서 만난 것 같기도 하고.

“난 기억에 없는……”

정운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여인은 그가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가슴팍으로 확 안겨왔다.

“흑흑흑……!”

여인은 서럽게 울었다. 어깨를 들먹이며 양손으로 옷을 꼭 부여잡고 섧디섧게 울었다.

“이, 이봐!”

“오라버니. 흑!”

여인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비 맞은 참새처럼 애처롭게 떨며 가슴을 파고들었다. 정운은 다른 여인들을 주시했다. 검을 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여인들. 아무리 천객이라 해도 무방비 상태에서는 당할 수 있다. 만취되어 제정신을 잃어버린다면 천하제일 무공을 익혔어도 소용없듯이.

“오라버니, 저 좀… 저 좀 여기서 구해주세요. 네?”

정운은 여인의 말을 잠시 되새겼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이런 여인을 만난 기억이 없다. 향아라는 이름은 흔하디흔해서 촌 동네에서도 한두 명쯤은 같은 이름을 가진 여인들이 있다.

“이봐, 잠시……”

정운은 이번에도 말을 끝내지 못했다. 방긋 웃는 여인, 그러나 웃음의 종류가 다르다. 여인은 어느새 정운의 목에 세침을 박아 넣었다.

“후후후! 겨우 이런 것이었나?”

정운은 여인의 목줄기를 움켜잡았다.

“호호! 겨우 이런 것? 침에는 화홍사의 독이 묻어 있어. 네놈도 곧 한 줌의 핏물로 녹아내릴 거야.”

“그러지. 그럼 조만간 지옥에서 만나겠군.”

정운은 여인의 목줄기를 비틀었다. 그리고 말했다.

“구진법 중 이진법이 무엇인지 아나? 흑섬서 속에서 버티는 거야. 후후! 풍륭승운혜. 이진법을 벗어나게 만든 심결이지. 상대를 잘못 택했어.”

목이 비틀린 여인은 혀를 빼물고 축 늘어졌다. 화령 살수의 죽음은 정운에게서 흥미를 빼앗아갔다. 여인들을 죽이는 것은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반항하면 죽는다. 모두들 밖으로 나가.”

천객에게는 있을 수 없는 포획이다. 어쩌면 종리추를 위협할 수도 있다는, 꽁꽁 숨었을 경우 제 발로 걸어나오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계산도 깔렸다. 살아남은 화령 살수들이 힘없이 검을 버렸다. 화홍사의 독으로도 어쩌지 못한 괴물을 이길 방도는 없었다.

정운은 문득 있어야 할 사람이 없는 것을 발견해 냈다.

“삼현옹은 어디 있나?”

화령 살수가 대답했다.

“문주님을 따라갔어요, 큰 싸움이 있다고 하시면서.”

정운이 피바람을 일으킨 동혈은 적막에 잠겨 깨어나지 못했다. 개미들이 죽은 시신을 뜯어 먹기 위해 달려들었다. 개미뿐만이 아니라 온갖 곤충들이 시신 주변을 맴돌았다. 그렇게 하루 해가 뜨고 졌다.

그르르릉……!

암벽 한 귀퉁이가 굉음을 흘리며 밀려났다. 그리고 안에서 몇 사람이 걸어 나왔다. 놀랍게도 그중에는 이미 죽어 있는 적지인살과 배금향도 포함되어 있다.

“불쌍한 것들……”

배금향은 죽은 여인을 안아 들었다.

“안 돼요. 그대로 놔둬야 해요. 여기 있는 모든 것들…… 하나도 손대면 안 돼요. 죽은 아이들의 뜻을 저버리지 마세요.”

벽리군이 다급히 말했다. 종리추는 살문의 모든 것이다. 적지인살과 배금향은 종리추의 부모다. 그것이 화령 살수와 사령 살수가 그들을 위해 대신 죽음을 택한 이유였다.

“부디 살아주셔야 합니다. 주공께서 통한의 피눈물을 흘려서는 안 됩니다. 사물령이… 뜻이 사물령이셨으니 사물령이 되어주시기를 지하에서나마 바란다고……”

적지인살은 눈물을 머금고 그들의 얼굴에 인피면구를 씌웠다. 이를 때를 대비한 것은 아니지만 종리추는 여러 장의 인피면구를 준비해 뒀다. 사람의 얼굴에서 가죽을 벗겨내지 않고도, 동물의 가죽으로 인피면구를 제작할 수 있는 기법을 연구해 낸 다음이다. 그는 벽리군의 얼굴도, 어린의 얼굴도 만들어주었다. 모두들 재미있어했다. 설마 오늘 같은 날, 이처럼 비극적인 상황에서 사용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적지인살로 분한 사령 살수는 정운의 눈을 속였다. 배금향으로 분한 화령 살수도 완벽한 연기를 해냈다. 정운의 이목을 완전히 따돌리기 위해 화령 살수가 목숨을 바쳐 정운의 목에 세침을 박았다. 지금까지는 완벽했다. 그러나 혹시 모른다, 정운이 또다시 동혈을 찾아들지.

배금향은 안아 들었던 화령 살수의 시신을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내려놓았다.

“이제부터 여길 빠져나가야 해요. 할아버지?”

벽리군에게 할아버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다.

“흠! 잔혹한 놈들! 소위 정파 놈이란 것들이 이따위 짓거리나 하고. 살수 놈들도 마음에 들지 않지만 장파 놈들은……”

삼현옹은 혀를 끌끌 찼다.

“따라와. 계곡을 따라가는 길이 있다.”

삼현옹은 빠져나온 밀실의 문을 닫고 다른 쪽 암벽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르릉……!

암벽이 밀려나며 또 다른 입을 열었다. 다른 쪽 밀실과는 다른 시원한 바람도 불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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