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72화
하양 진인은 어두컴컴한 동혈을 더듬어 나갔다. 축축한 습기가 묻어나는 것으로 미루어 사람이 살지 않는 것 같다. 준비해 온 횃불에 불을 붙이자 한 무리의 박쥐 떼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지독하군.”
하양 진인은 인상을 찡그렸다. 동혈 바닥은 박쥐 똥으로 엉망이었다. 천장에서 떨어진 새끼 박쥐가 똥 속에 파묻혀 죽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박쥐 똥은 인간에게는 극히 해롭다. 이런 장소에 오래 머문다면 틀림없이 병을 얻어 죽을 게다. 하양 진인은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었다.
“으음……!”
“으으음……!”
자세히 듣지 않으면 들을 수 없는 미약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한두 명이 내지르는 소리가 아닌 것으로 보아 여러 명이 있는 듯하다. 하양 진인은 신법을 펼쳐 황급히 쏘아갔다. 신음 소리가 들려온 곳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이, 이런!”
너무 놀라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가 목도하고 있는 참상은 차마 인간이 저질렀다고 볼 수 없는 잔인한 광경이다. 여인 다섯 명이 박쥐 똥이 가득한 곳에 널브러져 있다. 모두들 두 다리가 잘렸으나 죽음을 피하게끔 응급조치만 해두었다. 여인들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피로 범벅이 되고, 박쥐 똥에 파묻혀 하얀 얼굴까지 더럽혀졌다. 어떤 여인은 피부가 손상당해 진물이 흐르고 있다.
“정운……”
하양 진인은 여인들의 정체를 알고 있다. 여인들은 화령 살수들이다. 한때는 무림을 공포로 물들게 한 여인들이지만, 그래서 죽여야 할 여인들이지만 이런 식으로 죽여서는 안 된다.
“살려줄까, 죽여줄까?”
하양 진인은 진심으로 물었다. 여인들은 세상에 나가도 사람 구실을 못할 만큼 폐인이 되었다. 그렇다고 생에 대한 욕심이 있을 터인데 무작정 죽이는 것도 마음이 편치 않다.
“주, 죽여……”
힘없이 하양 진인을 쳐다본 여인이 중얼거렸다.
하양 진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머리 위 백회혈에 손가락이 닿자 여인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떤 사람이나 죽음은 두려워하는 법인가. 그토록 많은 사람을 죽인 살수도 두려워하니. 진기를 모아 손가락에 집중시키자 백회혈이 푹 꺼졌다.
“끄륵……!”
여인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순식간에 죽음에 이르게 했으니 지금 상태에서는 최선의 죽음을 선사한 게다. 하양 진인은 다른 네 명의 여인도 차례차례 안락사시켰다.
정운의 뒤를 밟기는 했지만 혹시나 했는데…… 하양 진인은 평생 갈고닦아 온 도와 무림의 협 사이에서 번민했다. 도와 협은 상충하는 점이 많다. 하양 진인도 젊은 나이에 이끌려 협을 따르고 싶지만, 또 그렇게 행동하지만 과도한 행동을 볼 적마다 회의가 치밀곤 했다. 용두방주를 암살할 때, 그리고 지금처럼 잔혹한 광경을 볼 때.
자신은 후개를 죽이자고 했다. 천외천의 굳건함을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다. 또한 그것은 무인과 무인 간의 대결이다. 정이 든 사이든 무인 대 무인으로 싸워야 할 것이 있는 게다. 그 외의 싸움은 무의미하다. 간혹 이런 생각까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어떤 때는 극단으로 치달려 인명을 해하여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마인은 철저하게 징계해야 한다는 생각이 서로 싸울 때도 있다. 다른 천객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하양 진인은 구진법을 통과한 것이 짐이 되어 어깨를 짓눌렀다.
‘모두에게 무인의 혼을 보여줘야 해. 그것이 천객이 할 일.’
이 생각만은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도인이든 무인이든 승려이든 범부에 불과하든 어떤 위치에 있어도 무공을 닦은 무인의 진솔한 혼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은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생각을 굳힌 하양 진인은 길을 재촉했다. 천외천과의 연락을 두절시켰다. 변복을 하여 개방도의 눈길도 피했다. 번화한 도시를 피해서 길을 잡았다. 야이간, 혹은 하오문도에게 발각될 요소도 제거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숨을 필요가 있다.
‘지저분한 관계에서 벗어나 무인이 되어보는 거야. 구진법을 받기 전의 상태로.’
생각해 보니 짧은 삶 중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가 무당파에 입문하여 무공을 수련할 때였다. 당시는 꿈도 많았고 모든 꿈이 마음먹은 대로 이루어질 것 같았다. 조금만 노력하면.
하양 진인은 닷새 동안 쉬엄쉬엄 걸었다. 허름한 주점이 나오자 서슴없이 들어갔다. 큰 주점 같으면 눈길을 피해야 하지만 산골에 있는 작은 주점은 이목을 피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그는 이 주점에서 볼일이 있다.
“소채 한 접시.”
하양 진인은 습관적인 주문을 했다. 점소이가 잠시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투박한 그릇에 소채 한 접시를 담아왔다. 점소이의 눈길에 세상에 풀만 먹고 사는 인간도 있나 하는 경멸의 빛이 스쳐 갔다.
‘훗!’
하양 진인은 웃었다. 도복을 입고 있을 때는 소채 한 접시만 시켜도 모두 공손히 대접했다. 어떤 주점에서는 돈을 받지 않고 오히려 시주를 하는 경우도 있었고. 소채 한 접시를 게 눈 감추듯 먹어치운 하양 진인은 주점을 둘러보았다. 찾았다. 찾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 서로 간의 길을 맞췄고 날짜까지 어림 계산했는데 정확히 만났다.
하양 진인은 구석진 탁자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고 있는 젊은 사내에게 다가갔다. 사내의 주변에는 몇 사람이 호위를 서고 있다. 맞은편에는 상처를 입은 여인도 있다. 살문주 종리추와 그의 일행들이다. 살수들은 또 있다. 천장에도 있고 문밖에도 있다. 살수들은 요소요소에 숨어 있다.
하양 진인은 포권지례를 취했다. 종리추의 눈빛이 반짝였다.
“무당의 하양이라 하오.”
“……”
“그대를 죽이러 왔소.”
“하하!”
“……”
“먼 길을 왔듯한데… 앉으시오. 누가 죽고 누가 살든 차나 같이 마십시다.”
하양 진인은 눈빛을 빛내며 탁자에 앉았다.
‘이자는… 종주다. 일파의 종주……’
올 때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했건만…… 승부를 자신할 수 없게 되었다. 종리추와 하양 진인은 서로 검을 겨눴다. 이상한 싸움이지만 살문주와 천객의 싸움인 것만은 틀림없다. 서로가 죽이려고 할 게고 손속에 사정을 남겨둘 형편도 되지 못한다.
“무당파에 태극혜검이란 검법이 있고. 난 태극혜검을 절정으로 수련했소.”
“태극혜검…… 좋은 검법 같군. 난 그렇게 우아한 검법을 수련하지 못해서.”
“그래도 무슨 절초를 지녔는지 알고 싶소.”
“혈염옹이란 사람이 혈염도법을 완성했지. 혈염삼절이라고도 하고. 난 그 도법을 종종 검법으로 변환시켜 사용하곤 했는데, 태극혜검에 어울릴지 몰라.”
나이로 보면 하양 진인이 훨씬 많아 보였다. 하지만 하양 진인은 말을 올렸고 종리추는 내렸다. 둘 다 자연스러워 보였다. 말을 올린 하양 진인은 인품 자체가 조용하고 차분해 보였으며, 종리추는 조용한 가운데 날카로웠다.
“그럼 먼저.”
하양 진인이 기수식을 취했다. 천객이 기수식을 취하기는 처음이다. 그는 구진법을 통해서 얻은 감각에 무당파의 태극혜검을 실으려는 게다.
쉬이익!
속도는 비할 바가 못 되게 빨랐다. 기수식을 취할 때만 해도 우아해 보였는데, 막상 초식을 전개하기 시작하자 숨 쉴 틈 없이 몰아붙였다.
파앗! 파파팟!
종리추는 연신 물러섰다. 적룡검을 들어 간간이 병기를 부딪치기는 했지만 검음이 세차게 울리지는 않았다. 하양 진인이 검을 거두기 때문이다. 검이 부딪친다 싶은 순간 검을 물리고 다른 초식을 전개하는 모습이 원래 초식이 그랬던 것처럼 부드러웠다. 그러면서도 무지막지하게 빨랐다.
“지독하네! 나 같으면 일 초도 못 받겠어.”
좌리살검이 중얼거렸다. 그의 말은 모든 살수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말이다. 모진아와 혈영신마는 비등한 비무를 했다. 빠르기는 모진아가 빨랐지만 일격을 가하고 난 후 뒤이어 다가올 혈영신마의 반격을 완벽하게 피해낼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비무였다. 혈영신마도 같은 생각이었다. 일각을 맞아 중상을 입게 될지라도 일장만 격중시키면 즉사까지 시킬 수 있는 장공이었기에 태연히 접전을 벌였다.
천객은 서슴지 않고 공격했다. 물론 상대가 혈영신마라는 점을 몰랐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차 하는 순간에 혈영신마만 당할 뻔했다. 모진아는 더욱 가관이다. 빠름에는 자신있다는 사람이 다리 하나를 내주었다. 천객의 빠름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 인간이 펼칠 수 있는 무공 중 가장 빠른 무공이 아닐까?
피윳! 피우우웃!
하양 진인과 종리추의 결전은 삼십 합을 넘어섰다. 말이 삼십 합이지 너무 빨리 주고받는 통에 지켜보는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겨우 사오 초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다.
슈우욱……!
태극혜검이 돌변했다. 지금까지의 부드러운 기운 대신 끈끈한 기운이 물밀 듯이 번졌다. 검이 닿으면 떨어질까 의심스럽고, 옷에 닿아도 떨어지지 않을 것 같다. 검에 암경이 실렸다. 검이든 바위든 나무든, 검에 닿는 순간 집중된 힘이 엄청나게 몰아친다. 검이 흐르는 순간은 부드러워도 닿는 순간에는 거력이 발휘된다. 거기에 하양 진인의 검은 반격할 기회마저 빼앗았다.
“후욱!”
종리추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의 의복은 땀에 젖어 번들거렸다. 종리추가 중원에 나와 이토록 고전해 보기도 처음이다.
파라라랑……!
종리추의 검법도 일변했다. 천지 사방으로 회오리바람이 번져 나가는 듯 어지럽게 검을 휘둘렀다. 일면 팔방풍우와도 흡사해 보인다. 하양 진인도 종리추의 검을 맞받지 못했다. 종리추는 상대의 검에서 맥을 찾는다. 검법이 흘러나오는 경로를 분석해서 미처 다 흘러나오기도 전에 중도에서 차단해 버린다. 천부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터득한 무공이다. 모진아에게는 효과를 봤다. 모진아의 구연진해는 종리추의 구연진해 앞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천객에게도 효과가 통한다. 마음으로 일어난 검에 맥까지 짚어대니 어지간한 검은 뚫고 들어올 생각을 하지 못한다.
“타앗!”
하양 진인이 거센 고함을 내지르며 검을 옆으로 뉘인 채 달려 나왔다. 종리추는 검을 잡은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왼쪽 다리도 들어 올려 오른쪽 무릎에 올려놓았다.
“비응회선!”
모진아가 비응회선을 알아보았다. 옛날, 적지인살이 사용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때밖에 보지 못했지만, 중원 무학에 대해 새로이 인식하는 계기가 된 것만은 사실이다.
꾸우우욱……!
하양 진인의 검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상당히 느렸다. 천천히, 천천히 거리를 좁혀왔다. 가볍게 볼 수 없는 검법이다. 다른 점은 고사하고 하양 진인의 이마에 구슬처럼 흘러내리는 땀방울만 보아도 얼마나 지고한 심력이 깃들어 있는지 알 만하다.
“세상에! 천하의 변화를 일검에 모았어. 검을 쳐내려는 순간 만변이 일어나. 태극혜검이라더니…… 저거야말로 태극이야!”
소고는 입을 쩍 벌린 채 다물지 못했다. 전부 우물 안 개구리였다. 뛰어난 기인의 절학을 익히고 있지만 중원 구파일방의 절학이 이토록 심오한 줄은 몰랐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처음 견식해 본다는 편이 옳을 게다.
휘익! 휘이이익! 휘이이이익……!
종리추의 신형이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처음에는 느리고, 조금 지나서는 무척 빠르게 돌았다. 적지인살의 비응회선에는 화린이 숨어 있다. 적의 병기가 부딪쳐 오는 순간 화린이 터져 나가고, 적의 살결은 이글이글 타버린다. 종리추는 화린을 섞지 않았다. 노을빛 적룡검의 광채가 천지 사방으로 비산했다.
고오오오……!
하양 진인의 검이 회오리바람을 가르고 들어왔다.
캉캉캉캉캉……!
두 사람이 결전을 치른 후 처음으로 검명이 거세게 울었다. 두 사람의 내력이 결집된 울음이라 귓전이 멍할 만큼 우렁찼다.
“헉헉!”
하양 진인은 세 걸음이나 뒷걸음질쳤다. 그는 상당히 낭패한 모습이다. 옷은 걸레처럼 찢어졌고 머리는 산발해 있다. 접전 도중에 이마를 찢겼는지 가는 피를 흘리고 있다.
종리추도 낭패한 모습이다. 옷이 서너 군데나 크게 베여 있다. 한 치만 깊게 베였어도 중상을 입었을 치명적인 요혈 부근에.
“놀라운 무공이군.”
종리추가 솔직히 감탄했다. 하양 진인은 종리추가 겪어본 고수들 중에 최고의 고수다. 분운추월도, 후개도, 소림의 방장도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다.
“후후! 나야 구진법이라는 기연을 얻었으니까 그렇다고 하지만 살문주야말로 놀랍소. 젊은 나이에 이토록 가공할 무학을 익혔으니. 천객들이 죽었다고 해서 믿지 않았더니 믿을 수밖에 없소.”
“계속?”
“아니, 그만합시다. 솔직히 이번 싸움은 내가 밀리는 것 같소. 하하! 무당으로 돌아가야겠소. 나중에…… 정말 나중에,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한 번 더 겨뤄봅시다.”
“후후후!”
종리추는 가늘게 웃었다. 하양 진인의 낯빛이 약간 딱딱하게 굳어졌다. 놀리는 것으로 오해했을 수도.
“당신과 똑같은 말을 남긴 사람이 있지.”
하양 진인이 퍼뜩 한 사람이 생각났다.
“양가주? 맞소?”
“맞아. 나중에… 기회가 닿을지 모르지만 닿으면 그때는 꺾어보겠다고 하더군.”
“하하하! 좋은 고수를 적으로 두었으니 축하하오.”
“……”
“그럼 이만.”
하양 진인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전개한 초식은 무극태극변이오. 내 생각에는 오성 정도 깨우친 것 같은데…… 살문주가 전개한 초식은 무엇이오?”
“비응회선.”
“몇 성이오?”
“십이성.”
하양 진인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다. 이번에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