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74화
‘이, 이건 말도 안 돼!’
이제 어지간한 일이라면 안색도 바꾸지 않을 소고조차도 너무 놀라 할 말을 잃어버렸다. 도망 다녀도 시원치 않을 판에 오히려 찾아가다니. 종리추의 목적지는 명확해졌다. 백석강을 지나 연운에 이르렀을 때만 해도 팔부령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다. 연운을 지나 마천을 지났을 때도 같은 생각이었다. 성운을 지날 때부터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팔부령으로 가려면 수로를 타는 편이 빠르고 안전하다. 종리추는 육로만 고집했다. 천외천 인물들이 공격해 오라는 듯 버젓이 대로를 활보했다. 이상한 점은 그래도 비객이나 천객이 공격해 오지 않는다는 점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요행수를 믿고 행동하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다. 성운을 지나서 적하를 건너자 확실해졌다. 종리추는 모자도를 향해 길을 재촉하고 있다.
소고는 종리추를 쳐다봤다. 굳게 다문 입술은 강인한 의지를 대변한다. 좀처럼 뜻을 굽힐 사내가 아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고요하게 닫힌 눈꺼풀은 깊은 이지를 말해주는 듯하다. 소고는 처음으로 종리추가 사내로 보였다. 지난 며칠 동안 종리추에게 가슴을 보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체취를 맡으며 함께 여행을 한 탓일까? 전에도 매력 있는 사내라고 느낀 적은 있지만 지금처럼 품 안에 안기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적은 없었다.
소고는 마음을 읽힌 것 같아 얼굴을 붉혔다. 종리추가 여전히 눈을 감고 있는데도.
그런 그녀의 상념을 소여은이 깼다.
“언니, 아무래도 모자도로 가는 것 같지?”
“응.”
“뭐 하러 가지?”
“……”
대답할 말이 궁색해진다. 모자도로 가는 목적이야 단 한 가지. 천외천과 싸우기 위해서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무모하다. 천외천은 고수들이 우글거린다. 그들 중 한 명도 강자 아닌 사람이 없다.
“싸울 거야. 그렇지?”
“그렇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것 같다.”
“……”
소고는 이번에도 할 말을 잃었다. 그녀 생각에도 종리추의 이번 모자도행은 무모한 행동이다. 그렇다고 소여은처럼 ‘미친 짓’이라고 매도하기는 싫었다.
“휴우! 어떤 놈에게 죽을지 모르지만…… 강한 놈과 같이 죽었으면 좋겠어.”
‘죽지 않아.’
소고는 그 말을 해주고 싶었다. 허나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죽을 것이 분명한 자리에 가면서 죽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면 삼척동자도 비웃는다.
그때 한 사내가 다가오며 소고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했다.
“넌 죽지 않아.”
소여은의 눈이 화등잔처럼 치켜졌다.
“왜 죽지 않는 줄 알아? 주공께서 말씀하신 게 있지. 특급 살수는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줄 알아야 한다고. 난 특급 살수야.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능력은 있어.”
한참 만에야 소여은이 벌린 입을 다물며 말했다.
“말… 잘하네?”
“쓸데없는 생각 말고 몸이나 빨리 완쾌하도록 해.”
사내는 언제나처럼 무뚝뚝하게 몸을 돌렸다.
소여은이 멍한 표정으로 말했다.
“언니, 내가 홀린 거야?”
“아니.”
“그럼 지금 적사가 내게 뭐라고 하고 갔어?”
“사랑한다고.”
소여은은 피식 웃었다.
“미친놈, 더위 먹었나……”
더위를 먹은 게 아니다. 적사는 오래전부터 소여은에게 눈길을 주어왔다. 왜, 사랑이란 하는 사람보다 지켜보는 사람이 더 정확히 안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다른 사람은 다 느끼고 있는데 정작 소여은만이 모르고 있다. 당사자만이.
“네놈들의 악행은 진작부터 전해 들었다. 못된 놈들! 내 단단히 혼쭐을……!”
이름도 알지 못하는 무인들이 길을 막고 소리를 질러댔다. 종리추는 무인들을 상대하지 않았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겨 좀처럼 깨어나지 못했다. 일이 틀어졌다.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되 성사 여부는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한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잘못 꿰어진 단추는 소고가 정군유와 싸운 것이다. 싸우지 말고 피했어야 한다.
‘인면수심의 인간만 살해하는 살수 문파’라는 말을 들었어야 하는데, 지금은 무모하게 좌충우돌 닥치는 대로 부딪치는 살수 문파가 되고 말았다. 좀 더 시간을 끌었어야 했다. 중원인 모두가 살수 문파이지만 검을 들기에는 명분이 미약한, 그런 문파로 인식시킨 후에 천외천과 겨뤘어야 했다. 도주만 했다면 무난했던 일이 틀어져 버렸다. 혹시나 하면서도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심정으로 준비한 이 책을 사용하고 있으니……
일책을 사용했을 경우, 오기는 일 년 정도 살 수 있었다. 하오문과의 연계도 이토록 급박하게 끊어질 리 없고, 개방도 좀 더 부드럽게 재편을 단행할 수 있었다. 지금은 모두가 위험해졌다. 오기는 한 달도 못 되어 죽었다. 혈영신마가 죽었고, 혈살편복이 죽었다. 모두 소고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시간만 있었다면 죽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을.
무엇보다 종리추를 난감하게 하는 것은 생각하지 못했던 무림인들의 동향이다. 살문의 살행에 병기를 들었으나 천외천의 위치를 몰라 주저앉았던 무인들이 하나둘 병기를 들고 일어선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변화다. 이들을 모두 죽일 수는 없다. 지금 길을 막고 있는 무인처럼 이름도 모르는 무인이 대부분이다. 외장을 한껏 가동시킬 때도 살행에 나서기 위해서는 치밀한 정보를 수집했었다. 지금은 외장의 힘을 빌릴 수 없다. 하오문과의 연계도 끊어졌고 후개도 나서지 못한다.
후개는 자신이 할 일을 착실히 해주었다. 종리추가 그에게 바란 것은 방주로서의 취임 의사 표시를 해달라는 것이다. 그것으로 천객을 분산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천객 모두가 나섰다면 필패였다. 두말할 나위도 없다. 살문은 모두 이름 없는 구릉에 뼈를 묻었을 게다. 비객들이 죽어 넘어진 곳에 살문 살수들의 시신이 넘어져 있겠지. 후개 덕분에 천객 몇 명이 빠졌다. 힘든 상황이었지만 잘 견뎌냈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자신의 능력도 모르고 병기를 휘둘러 대는 무인들을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 달려드는 족족 죽여 넘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피해 나갈 방도는 더욱 없고.
종리추는 눈을 떴다.
“죽여!”
간단한 명령. 순간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던 무인의 발밑이 푹 꺼졌다. 아니다, 땅거죽이 들썩이며 자그마한 무인이 불쑥 튀어나왔다.
“엇!”
무인은 상당히 놀랐는지 뒤로 두어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그런 틈을 허락할 광부가 아니다. 그는 힘차게 도끼를 휘둘렀고, 얼떨결에 병기를 치켜든 무인은 병기와 함께 머리가 쪼개졌다. 광부는 신들린 듯 도끼를 휘둘렀다. 시마공을 알지 못하는 무인들은 급작스러운 광부의 등장에 당황했고, 무지막지한 공방에 기가 질렸다. 더군다나 정작 살문 문주는 싸움에 끼어들지도 않고 있으니.
광부가 싸움을 끝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다니는 관도에 시신 네 구가 놓였다. 모두 도끼에 당해 고개를 돌릴 만큼 처참한 광경이다. 살문 살수들의 손속은 날이 갈수록 잔인해진다. 싸움에 지쳐 가고 있다는 증거다. 편히 쉴 틈도 없이 계속해서 은신술을 펼치고 있으니 심력이 소모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싸움은 무의미해. 악명만 높일 뿐이야.’
종리추가 무인들을 죽이면 죽일수록 천외천은 명분을 얻는다.
‘결단을 내려야 해,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서는.’
“부상자를 버린다.”
종리추의 일갈은 모두에게 충격을 주었다. 소고가 멍한 표정으로 종리추를 바라봤다. 소고보다는 양호하지만 역시 싸움을 할 수 없는 소여은도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 발이 잘린 모진아만이 그윽한 눈길로 종리추를 바라볼 뿐이다.
종리추는 절대 수하를 버리지 않는다. 죽음에 임박해서도 혼자만 살겠다고 도주하는 속물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종리추를 문주로 모시며 따랐던 것은 살문이 강해서라기보다는 종리추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이다. 이제 버린단다. 살문 살수들 중 종리추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은 없다. 종리추의 말을 바꿔보면 상황이 그만큼 어려워졌다는 것을 뜻한다.
“주공!”
적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적각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모두 아는 사실. 적각녀 혼자 버려두고 갈 수 없으니 내가 보살피죠.”
적각녀라는 말만 들으면 팔짝 뛰는 소여은도 이번에는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적사가 사랑한다는 말을 했어도 듣지 못한 듯 종리추만 쳐다봤다. 종리추가 부상자를 버린다는 말은…… 종리추가 불쌍해 보인다.
뜻밖의 말이지만 종리추는 순순히 응낙했다.
“그것도 좋겠지.”
“주공!”
이번에는 유구가 말문을 열었다.
“사부님은 한 발이 없으십니다. 얼굴도 많이 알려졌고… 남만인이라 단번에 티가 나고… 해서 제가 모실까 합니다.”
종리추는 유구를 쳐다보았다. 그는 두 사람이 연달아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감정적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냐. 부상자는 확실히 손을 묶어두기만 해.”
“주공!”
좌리살검이 종리추를 노려보며 말문을 열었다.
“왜 이제야 말하십니까?”
“……”
“혼자 가시겠다고 말입니다. 지금은 부상자를 버리고, 다음은 누구를 버릴 생각입니까! 그렇게 한 사람 두 사람 버리다가 종내에는 모두 버리고 혼자 가실 생각 아닙니까?”
“……”
“그럴 생각이었다면 왜 살문에 끼어들게 만들었습니까! 구류검수만 숙원이 있는 줄 아십니까! 우리도 있어요. 주공, 잊지 마세요. 주공은 우리에게 빚이 있습니다. 빚만 져놓고 어디로 도망가겠다고…… 무식해서 조리 있게 말하지는 못하지만 좌우지간 떼놓고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세요!”
종리추가 좌리살검을 쳐다보며 피식 웃었다.
“조리 있게 말하지 못했다고? 아냐, 조리 있게 잘 말했어.”
종리추가 순순히 인정하니 더 이상하다.
“그래, 그러도록 하지. 빚이 있다는 걸 잊어버렸군. 모두 함께 가도록 하지.”
더욱더 이상해진다. 종리추가 이렇게 순순히 뜻을 바꾼 적은 없었다. 모두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가 종리추의 얼굴을 쳐다보곤 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종리추의 내심을 알 수는 없지만 쓸데없는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단단히 감시하자는 표정이 역력했다.
종리추는 다른 생각을 했다. 이들을 버린다는 것은 역시 잘못된 생각이다. 시작을 같이했으면 끝도 같이 가야 하는 것을.
‘생각해 내야 해, 죽지 않는 수를. 죽이지 않고도 살문이 존속되는 길을. 이대로 가는 길밖에 없지만, 이 길을 가면서도 죽지 않는 길을 찾아내야 해.’
시선을 푸르디푸른 하늘에 두었다. 종달새 한 마리가 시름없이 하늘을 날고 있다.
‘단 한 명도 죽이지 않겠어. 죽음은 혈영신마, 혈살편복으로 족해. 후후후! 모두에게 특급 살수가 되라고 했으면서 정작 나는…… 나부터 특급 살수가 되어야지. 사랑하는 사람을 절대 죽이지 않는. 언제나 보호할 수 있는……’
종리추는 자신에게 가장 중대한 문제를 냈다. 어쩌면 영원히 풀리지 않을 문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