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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76화


야이간은 절강성으로 들어섰다. 하남성에서 절강성까지는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다. 야이간에게는 가까운 거리다. 목숨이 걸린 대사인데 결코 멀다고 할 수 없다.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지상에는 소주, 항주가 있다는 이천오백 년의 고도. 절강성은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기분이 좋았다. 평원이 넓고 숲과 운하가 많다는 이유 때문이 아니다. 기후가 온화하고 땅은 기름져 한 해에 두 번이나 추수를 한다는 고창 지대도 관심 밖이다. 중원에서 가장 살기 좋은 천국이지만 야이간에게는 주마간산에 불과하다.

‘빨리 해결해야 돼. 이번이 아니면 기회가 없어’

야이간은 서둘렀다. 쫓아오는 사람도 없건만 등 뒤에 귀신이라도 따라붙은 듯 잰걸음으로 길을 재촉했다. 그에게는 제약이 있다. 길을 서두르기는 하지만 사람들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 특히 무인들은 이제 갓 검을 잡은 풋내기조차도 만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을 완벽하게 숨기면서 길을 재촉해야 한다. 말도 일부러 타지 않았다. 마차는 더욱 타지 않았다. 말이나 같은 것은 당장 하오문과 연결된다. 아무리 쥐새끼처럼 마차 안에 꽁꽁 숨어 있어도 하오문의 이목을 따돌릴 수 없다.

길을 걷는 것도 난제다. 길가에는 개방 문도가 득실거린다. 시장이나 번화한 곳에는 어김없이 거지 새끼들이 진을 치고 있다. 야이간은 근 보름 동안 음식다운 음식을 먹어보지 못했다. 그래도 괜찮다. 이보 전진을 위해 일보 후퇴한 것뿐이니까. 야이간은 먼 길을 무사히 왔다. 형식에 불과하지만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백상, 그리고 개방과 하오문의 이목을 완전히 따돌렸다고 자신한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취국이다. 취국을 데려오지 않은 것이 불안했지만 목숨이 걸린 중차대한 일이면서 촌각을 다투는 일이니 혼자 올 수밖에 없었다. 불안? 불안하다.

취국 같은 여자는 하루도 사내 없이는 살 수 없는 여자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어느 놈과 눈이 맞아 살을 섞을지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그럴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그 뜨거운 육신을 삭이지 못한다.

‘빨리 돌아가야 해. 빨리 가서 연놈을 일 장에 쳐 죽이고….’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일 장에 쳐 죽일 사람은 사내뿐이다. 취국을 곁에 두면 종내에는 폐인이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는 분명히 그렇다. 그래서 몇 번이고 때려 죽이려고 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녀를 대하는 순간 운집한 진기는 봄눈 녹듯 녹아버린다. 대신 그녀의 풋풋한 살 냄새에 파묻혀 정신없이 여체를 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취국은 그런 여자다. 죽이고 싶어도 죽일 수 없는 여자다. 데리고 살 생각도 해 보았지만 그건 어렵다. 취국이 옆에 있으면 다른 여인에게 정을 붙일 수 없을 것 같다. 그녀의 야들야들한 육체는 정말 뇌살적이다.

‘제길! 멀기도 하네. 절강성이라는 팻말을 본 게 아침녘인데 하루 해가 다 질 때까지 걸은 것이 고작 정안이니, 앞으로 남은 거리가 이백 리. 신법을 펼치지 않는 이상 아무리 빨라도 모레나 되어야 도착할 것 같군.’

야이간은 한적한 들판을 찾았다. 잠을 청하기에는 산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산신각이 가장 좋지만 혹여 개방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다리 밑도 마찬가지고 폐허가 된 집도 피해야 한다. 객잔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런 곳이야말로 무인들을 만나기 십상이다. 무인들은 하늘의 별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고, 그들이 자신을 알아볼 리도 없지만 그래도 피해야 한다. 팔부령에 운집했던 군웅들이 어디 한두 명인가. 재수 없으면 발각된다. 야이간은 사방이 훤히 트인 들판을 숙소로 정했다. 들판이야말로 야이간 같은 사람에게는 최적의 숙소이다. 가을이 다가오는지라 밤 공기가 싸늘해서 그렇지 다가오는 사람을 미리 발견하고 몸을 숨길 수 있으니 그만한 곳이 없다. 야이간은 들판 중에서도 움푹 들어간 지형을 골라 몸을 뉘었다.

‘이게 무슨 생고생이야, 이 천하의 야이간이.’

지금쯤 백상은 발칵 뒤집혔을 게다. 서신을 남겨놓기는 했지만 항상 감시해야 될 자가 사라졌으니 얼마나 놀라고 있을까. 백천의는 더욱 놀랐으리라. 천 노인을 수중에 넣었다고 호언장담한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작자이니 눈에 불을 켜고 찾을지도 모른다.

‘이제 이틀이면 돼.’

야이간은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지금은 종적을 숨길 때다. 말 그대로 발자국까지 완전히 지워 버리면서 움직여야 한다.

진주에 들어설 때까지가 고된 여정이었지, 진주에 들어선 다음 언가를 찾는 것은 매우 쉬웠다. 진주에 사는 사람이라면 코흘리개까지도 진주 언가를 알았다. 진주 언가는 진주 외곽에 위치한다. 외곽이라고는 하지만 풍광이 좋아 대부호들이 운집해 있는 곳이다.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패옥을 찼고 비단옷을 입었다. 여인 한 명이 몸에 두른 장신구만 팔아도 보통 사람 이삼 년의 생계는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관원도 끊임없이 오간다. 관원들의 할 일이란 게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이 머뭇거리면 신분 조사를 하는 것이다. 거지나 행상이 들어서면 내쫓는 일을 한다. 대부호 집에서 집사가 나와 전갈이라도 주면 관청으로 한달음에 달려가 전달해준다. 잘 사는 사람들을 위한 별천지다.

“어이, 거기!”

야이간을 본 관원들이 다가섰다. 무림인들에게 발각되지 않으려고 평복을 한 것이 관원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다.

“그러지 마슈. 지금 갈 생각이오. 잘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잘 사나 구경하는 것도 죈가.”

“야! 너 거기 서봐.”

야이간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 관원들이 무서운 것은 아니지만 신경을 건드릴 필요는 없다. 밤이 으슥해진 후 야이간은 다시 진주 언가를 찾았다. 밤에도 낮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이십 장 간격으로 화톳불이 켜져 있어 대로가 환하게 빛난다. 화톳불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관원들이 서 있다. 야이간은 신법을 펼쳐 담장 위로 올라섰다. 이제야 비로소 정원 안을 살필 수 있게 되었다.

‘강남의 정원은 중원 제일이요, 소주의 정원은 강남 제일’이라는 말이 있다. 진주는 소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장원 형식은 소주를 본떴다. 장원은 동원, 중원, 서원으로 나뉘어 있고, 거의 육 할 가까이가 연못으로 조성되었다. 연못 주변은 기암괴석으로 풍취를 돋우고 희귀한 모양의 나무를 심었다. 연못 중앙에는 주변 경관을 감상할 수 있게 정자가 세워져 있다.

‘호사의 극치군.’

야이간은 기분이 좋았다. 자신이 바라던 생활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았다.

파앗! 쉬이익!

야이간은 담장 위를 비호처럼 달렸다. 관원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지만 신법으로 이름난 곤륜파의 절학을 발견해 낼 리가 없다. 담장에서 담장으로 또 담장에서 담장으로…. 대부호의 저택들은 너무 넓어서 평수를 계산할 수 없다. 그것조차도 야이간에게는 기쁨이다. 발품을 조금 더 팔아야 하지만 마음은 날아갈 것 같다.

진주언가(眞珠彦家)

드디어 현판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부터는 조심해야 돼. 진주 언가 놈들…. 예사 놈들이 아냐.’

쉬익! 쉬이익…..!

야이간은 다람쥐처럼 나무와 기암괴석 사이를 누볐다. 정원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은 좋지만 침입자에게 너무 노출되어 있는 점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 정도에 기관 몇 개라도 설치해 놨어야지.’

야이간은 기관이 설치되어 있는지 꼼꼼히 살펴봤지만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실제로 몸을 날렸어도 기관이 작동할 때 발출하는 기괴한 음은 들리지 않았다. 진주 언가 역시 장원을 셋으로 나눴다. 하지만 용도는 일반 대부호의 장원과 크게 달랐다. 동원은 문도들이 수련하는 곳이다. 동원에도 연못이 있고 나무들이 울창하게 서 있다. 다른 점은 소리가 들린다는 것. 그리고 사람이 보인다는 것.

진주 언가 문도들은 실전을 방불케 하는 격렬한 수련을 한다. 야이간은 잠시 진짜 비무가 아닌가 하고 주의를 기울였을 정도다. 동원을 넘어 중원으로 들어섰다.

중원은 진주 언가의 대소사를 처리하는 곳인 듯하다. 대소전각들이 가득 들어서 있는데, 삼경이 가까운 시각인데도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곳이 많다. 진주 언가는 강대 문파다. 하루에도 열몇 개씩 일어섰다 망하는 중원 무림에서 꿋꿋하게 명성을 유지할 만한 문파다. 그러나 침입자에 대해서 좀 더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놨어야 한다. 명문세가라고 해서 침입자가 없으리란 생각을 했다면 오만이다.

야이간은 중원도 거침없이 지나쳐 서원으로 들어섰다. 목표로 한 곳이다. 문득 야이간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침입자에 대한 대비책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건 조용해도 너무 조용하다. 하다못해 경계를 서는 무인조차도 없다. 천석지기만 되더라도 경계를 세우는 것이 당연한데…..

‘낯선 풍경이야. 무림 문파치고 이럴 수는 없어.’

야이간은 위기를 느꼈다. 이럴 때는 무조건 숨어야 한다. 담장에서 내려와 나무 그늘에 몸을 숨겼다. 그렇게 한 시진 동안이나 숨을 죽이고 주위를 살폈다.

‘이상해. 아무래도 이상해. 마음이 내키지 않아.’

야이간은 물러서기로 작심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찜찜한 일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본인은 자각하지 못할지라도 주변 만물이 이상한 기운을 내뿜어 경고를 해주는 거다.

그때 벌컥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나왔다.

‘저 여자는…..?’

언동의 시녀인 것만은 확실한데 이름이…..

‘키가 크고 마른 여자…. 마른 여자….. 그래! 취취라고 했지. 취취야 후후!!’

목표가 제 발로 나왔다.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원숭이를 잡기 위해서는 나무를 베어내는 것이 제일 상책이다. 뛰어올라 갈 나무가 없으니 원숭이는 땅 위에서 발악하다 잡히게 된다. 백화탄금 언동에게는 앵앵과 취취가 나무 역할을 한다. 두 시녀만 없다면 언동은 나무에서 떨어진 원숭이가 된다.

‘어떻게 한다?’

물러서느냐, 일을 시도하느냐.

취취는 연못으로 다가와 물속에 비친 달을 쳐다보고 있다. 불안한 느낌만 없다면 절호의 기회다. 야이간은 품에서 복면을 꺼내 뒤집어썼다. 일을 벌이기로 작심한 것이다.

쉬익!!

“누, 누구!”

취취가 깜짝 놀라 일어섰다. 하지만 그녀 역시 진주 언가에서 권법을 갈고닦은 몸이다. 시녀의 신분으로 언동의 호법 역할을 하고 있는 고수다.

폐에엑….!

여자의 일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강맹한 권법이 터져 나왔다.

‘후후, 진주 언가의 권법이라면 앵앵에게서 어느 정도 보았지.’

야이간은 앵앵에게 그랬듯 천기신보를 밟으며 취취의 눈을 현혹시켰다. 한편으로는 종학금룡수를 전개하여 완맥을 움켜잡아 갔다.

“흥!”

취취가 코웃음을 치며 세를 바꿨다. 진주 언가의 권법은 장타보다 단타가 많다. 근접전에서 최대의 효과를 올리는 권법으로 파괴력보다는 기교에 중점을 둔다. 초식만 그렇다는 것이다. 권법에 실린 진기는 중원 무림인 모두가 알고 있듯이 강시공이다. 도문에서 도인들이 말하는 강시가 아니라 진주 언가권을 구련하면 인체의 골격이 강시처럼 강하게 변한다고 해서 강시공이라고 한다. 진주 언가권은 스쳐 맞기만 해도 멍이 들 정도로 강하다. 더군다나 단타 위주라 접전이 부득이하다. 취취는 종학금룡수를 주먹 바깥쪽으로 쳐내며 다른 주먹으로 안면을 가격해 왔다.

쉬이이익!

종학금룡수가 일변했다. 완맥을 잡아가던 상태에서 손가락을 안으로 최대한 구부려 고권을 취하면서 취취의 왼 손목 관절을 가격했다. 안면을 공격해 오는 일권은 고개를 약간 돌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패에엑!

취취의 일권이 안면을 스쳐 가며 매서운 바람을 일으켰다. 정통으로 맞았다면 코뼈가 으스러졌으리라. 불행히도 취취는 앵앵이 사용하던 초식을 사용했다. 이미 야이간이 알고 있는 초식을 사용해 왔는데 제압하지 못한다면 위신 문제다.

파앗!

취취의 왼손이 허공으로 쳐들렸다. 종학금룡수에 왼 손목을 강타당했으니 당분간은 주먹을 쥘 수 없을 만큼 얼얼할 게다. 종학금룡수는 다시 변했다. 네 손가락이 한 점에 모이고 엄지손가락은 무명지 아래에 들어가는 계구(鷄口)로. 계구는 일정 지점을 타격할 때 좋다.

쉬이익!

천기신보를 펼친 신형이 취취의 쳐들려진 왼손 안쪽을 파고들며 임맥의 요혈로 가슴뼈 맨 아래에 있는 구미혈을 타격했다.

“컥”

취취가 짧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폭삭 주저앉았다.

“컥! 커컥….!”

취취는 몹시 고통스러운 듯 가슴을 움켜잡고 몸을 떨었다. 야이간은 주위를 돌아보았다. 취취와 싸우는 동안 적지 않은 고함 소리가 터졌는데,,,,,

‘아무래도 안 좋아. 빨리 끝내고 가는 것이 상책이겠어.’

그가 알기로는 취취와 앵앵은 떨어지지 않는다. 앵앵을 겁간한 것도 여인만이 지닌 달거리라는 특수한 사정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취취와 앵앵이 같이 붙어 다니는 것뿐만이 아니라 두 시녀는 언동에게서 한 걸음도 떨어지지 않는다. 만약 두 시녀가 틈을 보였다면 하룻밤 몸풀이에 불과한 시녀를 상대로 무공을 구사하는 구차한 일 따위는 벌이지 않았다. 지금은 조용하다. 언동은 물론이고 앵앵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야이간은 헐떡이는 취취에게 다가가 다시 일격을 가했다. 담경의 요혈로 눈꼬리 옆에 있는 동자료, 취취는 의식을 잃고 축 늘어졌다.

‘이, 이런!’

야이간은 당황했다. 취취를 끌고 나무들이 밀집한 곳까지는 무사히 왔는데… 양물이 서지 않는다. 아직 옷을 벗기지 않아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전 같으면 겁간한다는 흥분에 누워 있는 모습만 보고도 양물이 곤두섰다.

‘취국… 네년이…’

머릿속으로 취국의 살 내음이 지나갔다.

‘그래도 옷을 벗기면… 알몸을 보면 설지도…’

야이간은 취취의 옷에 손을 댔다. 그때,

“흥! 역시 네놈이군.”

야이간의 등 뒤에서 매몰찬 한성이 들려왔다.

‘이럴 수가! 내가 등 뒤까지 사람이 다가오도록 몰랐다니!’

양물이 발기되지 않는 충격이 방심을 유도했다. 다른 때라면 주의를 게을리했어도 사람이 다가오는 기척 정도는 감지했을 터인데. 역시 예감은 맞다. 찜찜한 마음이 들면 아무리 욕심나는 일이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야이간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봤다.

‘아!’

야이간은 통곡이라도 하고 싶었다. 진주 언가는 아무나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경계 서는 무인이 없는 것도 아니다. 야이간은 들어오도록 내버려 둔 게다. 빠져나갈 수 없는 곳까지 들어오도록. 백화탄금 언동의 서릿발 같은 얼굴도 조인다. 진주 언가주 언위생도 차디찬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앵앵은 눈빛만 가지고 말한다면 살을 태우고도 남을 불꽃을 튀겨내고 있다. 그들만이 아니다. 주변에는 어느새 모여들었는지 진주 언가의 문도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앵앵.. 수치도 모르는 계집.’

야이간의 분노는 앵앵에게 폭발했다. 여자가 어떻게 겁간을 당하고도 주절주절 내뱉을 수 있단 말인가. 불문가지, 뻔한 일이다. 진주 언가에서는 침입자의 존재를 알았지만 취취를 통해 한 가지를 확인하려고 했던 게다. 침입자가 예전에 팔부령에서 앵앵을 겁간한 자인지를.

‘여기서 빠져나갈 길은…’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녹록한 자가 없다. 하나같이 신광이 안으로 갈무리된 것이 절정 고수들이다. 한두 명 정도는 어떻게 할 수 있지만 언가주 언위생까지 와 있는 마당에서는 몸을 뺄 수 없다.

‘그렇다고 맞아 죽을 수는 없는 일’

야이간은 재빨리 취취를 안아 일으켰다. 품에서 꺼낸 소도는 취취의 목을 겨냥했다.

“도망가게만 해줘”

야이간은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언동이 말을 걸어왔다.

“현 소협? 현 소협이군요. 호호호! 놀랐는데요? 천하의 현 소협이 여인네를 겁탈하는 파렴치한이었다니.”

‘빌어먹을! 이럴 줄 알았다면 백천의나 다그치는 건데.’

이제 다 틀렸다. 언동을 아내로 맞아 일신의 안위를 도모하겠다는 생각은 강 건너갔다. 이제는 백천의가 나선다고 해도 안 된다. 물론 전에도 안 되는 것은 확실했다. 언가주 언위생은 야이간이 살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백천의가 아니라 소림 방장이 중매를 서준다고 해도 승낙할 리 없다.

방법은 있다. 언동을 헌 처녀로 만드는 것이다. 앵앵과 취취를 겁간하고 그녀들은 언동 주변에서 떠나지 않을 때, 그녀들을 겁간할 때 썼던 복면을 슬쩍 흘린다면 틀림없이 몸을 일으킬 게다. 언동은 그때 취하면 된다. 언동이 낯선 복면인에게 겁간당했다면, 딸을 가진 아비의 입장으로서 웬만한 곳이면 시집 보내려고 할 것이다. 백천의가 때를 맞춰 중매를 서면…

모든 게 끝났다. 언동을 아내로 맞이하기는커녕 이제는 정도 무림에 발조차 딛지 못할 상황이 됐다.

“흐흐흐, 현 소협이라… 좋아, 어떤 놈인지는 모르지만 사모하는 님이 있었군.”

“호호호, 그래요. 현 소협이란 사람에게 호감을 가졌죠. 살수라는 걸 몰랐을 것 같아요? 알면서도 끌릴 수밖에 없는 남자였죠. 살수가 그렇게 변신하기도 쉽지 않으니까. 확실히 그런 남자는 쉽게 찾아볼 수 없어요. 그러나 지금 태도는 아주 실망이네요. 남자가 여자나 위협해서 안위를 도모하다뇨? 제가 생각한 현 소협은 아니군요”

‘제길! 진작 뜻이라도 밝힐 것이지. 얌전히 기다리느니만 못했군.’

“도망가게만 해주면 이 계집은…”

“죽여요”

“뭣?”

“죽이라고요.”

야이간은 언동의 눈을 들여다봤다. 농담이 아닌 것 같다. 가식도 아닌 것 같다. 언동의 눈빛에서는 취취를 잃을지언정 진주 언가에 침입해 시녀를 겁탈하려고 했던 자를 그냥 보내지 않겠다는 뜻이 다분히 담겨 있다. 언가주 언위생이나 다른 자들도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후후후, 죽이라면 죽일 수밖에. 이왕 죽는 몸, 하나라도 더 죽이면 득이지.”

야이간은 소도로 취취의 목을 살짝 그었다. 붉은 핏방울이 점점이 떨어졌다. 허나 언동이나 언위생의 눈가에는 일점 동요도 없다.

‘이놈들, 정말 죽여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놈들이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방법이 있다.

쐐애액…!

야이간은 다짜고짜 신법을 전개했다. 곤륜파에서도 가장 뛰어난 신법인 운룡대구식이다. 야이간은 신법 한 번으로 진주 언가 문도들의 머리를 타 넘었다. 또 한 기회를 놓칠세라 취취의 몸을 문도들의 머리 위로 내던졌다.

턱!

한 명이 취취의 몸을 받아 들었다.

‘됐어!’

야이간은 취취를 안아 들고 있는 자의 머리를 찍었다. 타격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신법을 전개하기 위해 디딤돌로 사용하려는 목적이다. 언가 문도들이 신형을 허공으로 솟구치며 일권을 내질러 왔다. 권법을 위주로 하는 문파는 이럴 경우 대부분 각법을 전개한다. 진주 언가처럼 권법으로 허공에 뜬 상대를 공격하는 문파는 희귀하다. 그러나 야이간에게는 더욱 좋다.

파앗!

제일 먼저 솟구친 진주 언가 문도의 일권을 발로 찼다. 차는 기세를 빌어 허공으로 더욱 높이 솟구쳤다. 사람 하나 높이는 올라갔을 게다. 장담할 수 있는데, 중원에는 이런 신법을 따라올 신법이 없다. 그런데,

타타탁! 파앗!

언가주 언위생이 담장을 향해 뛰어갔다. 뛰어가는 것도 일순간 담장을 박차고 솟구쳐 올랐다. 야이간을 전면으로.

‘이런!’

야이간은 급히 몸을 틀어 옆으로 빠져나갔다. 허공에서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는 것도 운룡대구식의 장점 중 하나다.

쒸이익!

권풍이 밀려왔다. 하지만 상대할 여력이 없다. 일권을 맞받는 순간 신형은 추락하게 되고 언가 문도들에게 휩쓸리고 만다. 그들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취취의 몸뚱이도 없고.

빠아악!

허벅지에서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헉!’

야이간은 휘청거렸다. 신법이 한꺼번에 풀어지는 느낌이다.

‘도망가야 돼!’

왼쪽 다리가 마비된 것 같다. 그렇다고 주저앉으면 끝장이다. 담장을 타 넘었다. 아직 끝난 것은 아니다. 자신이 담장을 넘었으면 언가 문도들도 타 넘을 수 있다.

‘하아! 하늘은 아직 날 버리지 않았어’

야이간의 눈에 호화찬란한 마차가 들어왔다. 늦은 밤 어느 기녀의 치맛자락을 들치다 귀가하는 대부호의 마차이리라. 야이간은 한달음에 달려가 마부를 격타했다. 그리고 말고삐를 낚아채자마자 힘차게 내몰았다.

‘이럇!’

그를 쫓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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