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 177화
침묵을 깨뜨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고는 소고대로 소여은은 소여은대로 자신만의 상념에 잠겨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녀들뿐 아니라 경계에 임하지 않은 살문 살수들이라면 모두 깊은 생각에 몰두했다. 종리추와 하양진인의 대결은 여러 사람에게 충격을 주었다. 두 사람의 놀라운 무위는 결전을 지켜본 살문 살수들에게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안겨주었다. 경악, 분노, 좌절, 희망….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벽을 깬 무인들에 대해서 놀랐고, 따라가지 못한 자신에 대해서 분노했고, 영원히 따라가지 못할 것 같은 생각에 좌절했으며, 언젠가는 그와 같은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에 희망을 가졌다.
살문 살수들은 자연스럽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무공 참오에 들어갔다. 천객의 무공은 두말할 나위도 없이 구진법을 통해 얻어졌다. 순간의 검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빨랐다. 종리추가 아니었다면 받아낼 자가 없었으리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종리추의 무공이다. 종리추는 많은 무공을 지니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강한 무공은 신비의 섬인 천부에서 얻은 무공이다. 무공 명칭도 정해지지 않았고 초식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지만 종리추는 그 무공으로 모진아를 제압했다. 종리추가 무공을 완성하는 날, 중원으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에 들떠 있을 때이니 그날의 감격을 잊을 리 없다. 그런데 하양진인과 싸울 때는 그 무공을 사용하지 않았다. 종리추가 사용한 무공은 혈염옹의 혈염무극신공이었다.
물론 혈염무극신공도 뛰어난 절학이다. 하지만 혈염무극신공이 뛰어나다면 소고가 익힌 혈암검귀의 혈뢰삼벽도 추종을 불허하는 뛰어난 절학이다. 모진아가 익힌 무공은 어떤가? 오독마군의 구연진해는 다리 하나와 천객 한 명의 목숨을 맞바꾼 절학이다. 그런 식으로는 하양진인과의 결전을 설명할 수 없다.
소고는 물론이고 그보다 무공이 뒤진 살문 살수들조차도 그런 식으로는 해석하지 않는다. 종리추가 천부에서 얻은 심득이 종리추의 무공을 진일보시켰다. 종리추는 천부에서 단순한 무공을 얻은 것이 아니라 심득을 얻은 것이다. 그것은 내공이 급상승한 것 같은 효과를 가져온다. 삼류무인이 기연을 얻어 절학을 연성한 것과도 같다. 절정고수의 손에 들린 썩은 나뭇가지는 보검이다.
단순한 진리다. 종리추는 그것을 바람이라고 했다. 늘 입버릇처럼 말하던 것이었는데 그것이 무리였다니.
아니, 무리인 줄은 알았다. 어떤 오묘한 무리가 스며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몸으로 깨우치지를 못했다. 정상에 올라가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세상이 환히 보이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살문 살수들은 종리추와 하양 진인의 결전을 보고 난 후에야 비로소 한 가닥 실마리를 잡았다. 그것이 종리추가 말한 바람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단지 “바람에는 약한 바람도 있고, 강풍도 있다. 무풍도 바람이다. 바람은 가지 못하는 곳이 없고 스미지 못하는 곳이 없다.”는 평소의 입버릇을 되새길 뿐이다. 살문 살수들이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은 하양 진인과의 결전 모습이다.
그날 그 순간의 일은 머릿속에 얌전히 담겨 있다. 호흡 한 올, 검초 하나까지 모두 다. 머릿속에 담긴 것과 종리추가 말한 바람을 연결 짓는 일.
살문 살수들은 그 생각에 골몰했다. 더불어서 자신이 지닌 무공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생각했다. 지금은 생각할 것이 많다.
종리추가 왜 굳이 죽음이 분명한 모자도로 향하고 있는지도 생각해야 하고 혈영신마가 죽은 애통함도 끓어오른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잊고 무공 참오에 매달렸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잊고 무공 참오에 매달렸다. 살문 살수들은 알고 있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치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찾아올지 모른다는 것을.
소고가 아픈 상처를 눌러 참고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천천히 검을 뽑았고 혈뢰삼벽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즉아(我則我). 나는 나일 뿐이다. 그런데 왜 자유롭지 못한가. 세상 만물이 자유로운데 왜 나는 자유롭지 못한가.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가축들처럼. 우리 안에 갇혀 있으면서도 갇혀 있는 줄 모르는 가축들처럼 세상이라는 우리 속에 갇혀 있기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 타성에 젖어서. 자유를 찾아야 한다.”
소고는 영혼에 자유를 주었다.
혈뢰삼벽에 기본 구결을 버리고 자유롭게 검을 휘둘렀다. 운기법도 버렸다. 영혼이 이끌면 진기도 따라 올라오리라.
“아즉심(我則心), 심즉아(心則我). 내가 마음이고 마음이 나인 것을. 육신을 염려할 필요가 무엇인가. 마음을 잡으면 육신은 따라오는 것을.”
전에는 진기의 유통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초식을 전개하기 전에 진기를 끌어올렸고, 검을 뻗을 적에도 진기가 제대로 실리도록 신경 썼다. 무공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오른 다음에는 일일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만큼 능수능란해졌지만, 무의식 속에는 늘 진기와 무공을 합일시켜왔다. 진기를 버려야 한다.
마음이 일면 진기가 따라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한다.
종리추가 그랬다. 하양 진인이 그랬다.
“눈을 떠야 해, 영혼의 눈을.”
고오오오…!
소고가 휘두르는 검에서 섬뜩한 요기가 풍겨 나왔다.
검은 묵기가 안개처럼 스멀스멀 피어나 귀신 형상을 하는 듯했다.
“내 진기는 대자연의 힘에 비하면 너무도 무력하다. 내 영혼 역시 광대하고 무한한 신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다. 난 너무 초라하다. 자연을 받아들이기에는 인간이 너무 작은 그릇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연이 인간을 지배하고는 있지만 내 인생은 내가 꾸려가는 것. 내 영이 늘 깨어 있을 때, 내 의지가 좌절로 빠지려는 나를 굳게 붙잡아줄 때 전심이 생긴다. 자연과 나는 교령하고 비로소 진정한 힘을 받게 된다.”
쒜에에엑…!!!
검풍이 일어났다.
검은 부드럽게 흐르고 있으되 검에서 일어나는 바람은 머리카락을 휘날린다.
소고는 자신이 무슨 초식을 펼치고 있는지 의식하지 못했다. 의식할 필요도 없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초식을 펼치면 그만이니까. 그녀가 할 일이라고는 천지자연과 자신의 마음이 하나가 되도록 굳게 붙잡고 있으면 되니까.
세상이란 너무도 공평하다.
농부는 씨를 뿌려야 수확할 수 있다. 씨도 뿌리지 않은 채 수확하기만을 바란다면 필시 굶어 죽는다.
마음을 열어놔야 한다. 진기를 붙잡고 있지 말고 항시 마음을 열어 자연과 영혼을 교류시켜야 한다. 그것이 무인이 할 일이다. 씨를 뿌리는 일이다.
진기를 풀어라. 진기에게 날개를 달아 훨훨 날게 해주어라. 마음껏 돌아다닐 수 있도록.
“내가 관조해야 할 것은 진기가 아니라 영혼이었던 것을.”
소고는 지금까지 참으로 큰 착각을 했다. 그녀만이 아니라 혈뢰삼벽의 창안자인 혈암검귀도 착각을 했다.
그녀가 익힌 혈뢰삼벽은 상단전을 이용한 무공이다. 상단전을 이용한 무공이면 상단전의 진기로 무공을 이끌어가야 하는 것이 순리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하단전의 진기를 이용하려 들었다. 그렇게 되어서는 상단전과 하단전의 진기가 섞이게 된다. 그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천만에! 상단전과 하단전의 진기는 너무 다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여 하단전의 진기가 육신의 진기라면 상단전의 진기는 영혼의 진기다.
절정에 이른 무인들조차도 착각하는 이유는 진기란 것이 의념에 의해 이끌어지기 때문이다. 눈으로 볼 수 있다면 물인지 피인지 알 수 있지만 의념으로 이끌어지는 기이기에 착각했다.
소고의 검은 부드럽고 느렸다.
소여은도 몸을 일으켰다.
전신이 욱신거리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그림을 시전해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절정무공이라고 인증된 공동파의 복마검법을 익혔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늘 절름발이 무공이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공동파에 입문하여 정식으로 무공을 수련한 것과 녹림마왕의 변형된 무공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소여은은 그 차이를 어산적에서 생활하며 터득한 실전 무공을 덧붙임으로서 보충했다. 녹림마왕의 무공은 변형된 무공이 아니었다.
변형된 무공이라고 생각한 마음가짐이 무공 수련을 저해시켰다. 소여은은 초심으로 돌아가 복마검법을 펼쳤다. 녹림마왕에게 처음 가르침을 받던 대로, 녹림마왕이 사문을 만나 싸울 각오로 창안해 낸 무공이 아닌 처음 검을 들었을 때 배웠던 그대로.
쉭! 쉭쉭쉭…!
정교하면서도 웅후한 검광이 허공을 갈랐다.
생각나는 것이 있다. 종리추와 하양 진인의 결투가 생각난다. 하양 진인의 검과 종리추의 검은 완전히 달랐다. 하양 진인이 순간의 검이라면 종리추는 형체를 볼 수 없는 무형의 검이었다. 그 광경이 머릿속 그림하고 얽혀들었다. 소여은 검을 내리고 심호흡을 크게 했다.
“후욱! 후우욱…!”
일부러 깊고 긴 숨을 들이켰다.
결투에서 보았던 검은 그들의 검이다. 하나는 하양 진인의 검이고 또 하나는 종리추의 검이다. 결코 자신의 검이 아니다.
“섞여서는 안 돼. 따라가서는 절대 안 돼.”
다시 검을 들어 기수식을 취했다.
“내 검은 복마검법에 있어.”
공동파의 무공은 현란하지 않다. 오히려 여타 무공보다 간략한 편이다. 그렇기에 일 초식 일 초식에 정교함이 깃들어 있어야 하고 웅휘한 힘이 실려 있어야 한다.
공동파에서는 여문도에게 복마검법을 전수하지 않는다. 체질상 여자보다는 사내에게 적합하도록 창안된 검공이기 때문이다. 대신 여문도는 음풍조와 같은 조공이나 비영파파처럼 기병을 수련한다.
힘은 내력으로 대신한다 해도 무공이 지닌 특성을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소여은은 복마검법을 수련하면서 부족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자신에게는 맞는 검법이고. 중원에 나오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그런데 소고에게 졌다. 지금까지는 그 원인을 소고의 요사한 심공 탓으로 돌렸지만 이제 와 생각하니 복마검법이 지닌 강맹한 힘을 완벽하게 살리지 못했다.
“복마… 마를 굴복시키듯이 일검으로 산을 무너뜨리는 기세로…”
쒜에엑…!
검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뭉클 일어났다.
소여은의 검법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사나웠다. 정교함이 사라지고 난폭함이 묻어났다. 발경을 최대한 이끌어낼 수 있도록 간략함을 버리고 최대한 호선을 그었다. 대신 속도는 전과 같이 사납게 매진할 수밖에 없다.
종리추에게 죽은 비객 제오비주도 복마검법을 전개했다.
그것과는 전혀 다른 검이 되었다. 녹림마왕도 복마검법을 수련하고 전수했지만 녹림마왕과도 전혀 다른 검법이다. 소여은은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을 착실히 쫓으며 숨 돌릴 틈 없이 검을 전개했다.
“이제 얼추 비슷하게 됐군.”
모진아는 나무를 깎아 만든 의족을 신기한 듯 만지작거렸다. 자신이 만들어놓고도 신기한 듯 연신 들여다보며 히죽거렸다. 그의 표정만 보고는 다리가 잘린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만큼 태평했다.
“돌아가면 삼현옹보고 만들어달라고 하세요. 아무래도 뭘 만드는 것은 삼현옹이 낫죠.”
유구가 울적한 심기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사실 천객과 맞서 다리 하나만 잘린 것도 다행이다. 혈영신마는 죽지 않았는가. 하지만 유구는 왠지 모르게 눈물이 솟아지려고 했다. 유구의 몸이 근질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부와 청운 진인의 싸움도 봤고 주공과 하양진인의 싸움도 봤다. 이 두 싸움은 수천 마디의 말보다도 더 큰 깨달음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무공 수련을 할 때가 아니다. 풀 더미 속에 숨어 시마공을 펼치고 있는 살문 살수들처럼 개미 한 마리 기어들 수 없는 경계에 임해야 한다.
살문 살수들은 강하나 무적은 아니다. 천객이 비객 무인들처럼 은신술을 사용하여 다가온다면 살문 살수들로서는 막을 도리가 없다. 유구는 목숨을 내놓을 생각이었다. 천객이라고 상대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일격을 피할 자신이 솔직히 없었다. 그렇다고 곧장 종리추에게 달려가도록 길을 터줄 수는 없지 않은가.
종리추가 상황을 판단하게끔 찰나의 순간만 벌어주면 된다. 그리고 그 정도는 천객이 아니라 천객 할아비가 온다 해도 자신 있었다.
“흐흐, 그럴까? 하기는 이런 건 삼현옹이 훨씬 잘 만들지. 돌아가면 부탁해야겠군.”
모진아는 착용할 수도 없는 의족을 잘린 부위에 대보았다.
모진아의 상처는 족히 반년은 간다. 세상에 진귀하다는 영약을 구해 붙여도 삼 개월 이상은 운신할 수 없다. 지금 모진아는 고열이 끓고 있으리라.
잘린 신경에서 치미는 고통 때문에 식은땀이 줄줄 새어 나오리라.
그래도 그는 웃는다. 웃을 수 있다. 고통을 극한으로 참을 수 있는 무인이라서가 아니라 혈살편복과 혈영신마가 죽었기에.
모진아는 의족에서 시선을 거두고 종리추에게 물었다.
“주공, 모자도로 가는 목적이라도 알면 안 됩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서.”
“….”
종리추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깊은 수심이 가득했다.
혈살편복과 혈영신마의 죽음은 종리추의 가슴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가.
모진아가 대답 듣기를 포기하고 의족으로 시선을 돌릴 때였다. 한참 동안 입을 떼지 않던 종리추가 입을 열었다.
“우리가 왜 모자도로 가느냐고 물었나?”
“예, 주공.”
모진아의 얼굴에 궁금증이 가득했다.
모자도로 가는 이유는 살문 살수들 모두가 궁금해하는 사항이다. 아니, 궁금한 것이 너무 많다. 소고가 당할 것을 어떻게 알고 천음 백석강으로 모이라고 했는가. 그것도 거의 한날 도착할 수 있게 날짜까지 맞춰서.
종리추는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인가. 문주이기에, 주공이기에 믿고 따르지만 궁금증이 치미는 것은 사실이다.
“십망을 받지 않기 위해서야.”
“예?”
십망은 무너졌다. 구파일방은 십망을 포기했다. 그 대신 나온 것이 비객이지 않은가. 무림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터. 또 십망이 존재한다 해도 이미 십망을 한 번 받았고 팔부령에서 그렇게 싸웠는데 두 번인들 받지 못할까.
“정작 무서운 것은 구파일방의 십망이 아니야. 무림군웅들의 십망이지.”
“…..?”
“군웅들이 등을 돌리면 끝나는 거야. 군웅들이 마음속으로 펼치는 십망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거지. 그동안 살수 문파는 구파일방의 제재를 받았다고 하지만 한편으로는 보호도 받은 것이야. 중원에 산재했던 살수 문파가 하루아침에 멸문해 버린 것도 자업자득이지.”
“으음….!”
“군웅들이 살수 문파인 줄 알면서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해. 그것이 일책이었어.”
대충 짐작은 했다. 죽이는 자들이 하나같이 인면수심들이라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리추는 무림인에게, 또는 청부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살문의 이름을 각인시킬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을 찾아냈다. 인면수심을 골라 죽인다는 전략은 주효했다.
문제는 비객과 천외천이다. 그들은 살문에 원한이 깊어서 살문이라면 이를 가는 사람들이다. 인면수심을 죽이든 다른 살수 문파들처럼 무조건 청부를 받든 그들에게는 상관할 바가 못 된다.
실제로 천외천은 비객을 파견했다. 살문 살수들은 더러 몸을 피했고 더러는 접전을 벌여 간신히 빠져나왔다. 소고와 소여은 같은 경우에는 종리추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목숨을 잃었을 게다.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지. 천외천과 비객이 공격할 것이라는 것. 그들은 살문이 어떤 행동을 하든 간에 공격해 올 사람들이었으니까. 특히 후개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흑봉광괴의 정보망은 아주 무서운 적이야.”
“으음…..!”
다시 신음을 터뜨렸다. 지난 며칠간은 지독한 악몽이다.
“그래서 천 노인에게 부탁했지, 묵월광의 정보망을 넘겨주라고. 야이간에게. 후개가 버티고 있는 한 흑봉광괴의 정보는 완벽하지 않아. 그걸 이용한 거지.”
“그럼 백상의 정보에 거짓이…?”
“아주 약간만. 살문 살수들의 종적을 잡아두되 아주 약간의 시간차를 두었지. 뒤만 쫓도록.”
“역시 주공다우십니다.”
“이건 내 생각이 아냐. 벽리군의 생각이지.”
“그랬습니까?”
“팔부령을 떠나올 때 구류검수에게 말한 게 있다. 한 달 정도 걸릴 것이라고. 일책이 성공했다면 우린 지금쯤 팔부령에 들어가 있을 거야. 살문에 대한 인식도 많이 바뀌어 있겠지.”
“나였네. 내가 일책을 망가뜨렸어. 우린 부딪히지 말고 무조건 도주했어야 돼. 그렇지?”
소고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니, 꼭 그렇지만도 않아. 백천의에게 머리가 없다면 몰라도 그는 뛰어난 자야. 백상이 주는 정보를 곧이곧대로 믿을 자가 아니지. 흑봉광괴의 정보와 접목시키면… 한 발 앞서서 살문은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래서 오기가 필요했던 거야. 우리 외장 정보는 광대하지만 전달 속도에는 한계가 있어. 개방 정보망은 제일 빠르지만 흑봉광괴에게 들어갈 여지가 있었지. 하오문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움직일 수만 있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정보망이었어.”
종리추가 팔베개를 하며 누웠다.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며 계속 말했다.
“비객만 움직였다면 피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천객이 움직여서는 곤란해. 오기는 두 가지 소식을 전하는 전달망이었어. 하나는 팔부령으로 돌아가라는 명령, 또 하나는 일정 지점으로 모이라는 명령. 소고에게 싸움이 생기면 천음 백석강으로 가라고 했듯이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명령을 줬어. 장소는 각기 다르지만. 천객이 움직이느냐 움직이지 않는냐. 움직이면 어느 곳으로 움직이느냐… 오기는 그것을 말해줬던 거야. 천객이 움직이면 일책은 실패한 것이니까.”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명령받은 시간에 명령받은 장소로 모인다는 생각은 들어맞았다. 덕분에 비객 상당수를 죽일 수 있었다. 아마도 그렇게 쉽게 비객을 죽일 수 있는 기회도 흔치 않을 게다. 살문은 살수를 양성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다른 살수 문파를 흡수한 것도 아니고 문도를 따로 가한 것도 아니다. 처음보다 늘었다면 소고가 데려온 몇 명 정도다. 그 인원으로는 역부족이다. 살행을 하지 않고 팔부령에 꽁꽁 숨어있다면 몰라도 살행을 한다면 쥐 몰이당하듯이 한 명, 두 명 쫓기다 추살당하고 만다. 모두 하오문 오기 덕분이다. 그들이 개방과 하오문, 그리고 살문 외장을 잇는 광대하고도 치밀한 연락망을 구축해 주었기 때문에 예측된 싸움을 할 수 있었다.
“호호, 백석강에서 똑똑하면 도주할 것이고 미련하면 싸울 것이라고 한 말 생각나네. 먹이가 난무하는데 가장 가까운 데 있는 먹이. 바로 나와 언니. 천객이 우리한테 올 수밖에 없었군.”
소여은도 대화에 가담했다.
“그래서.”
“그래서?”
“천외천과 싸우게 되면 일책은 의미가 없어져. 인면수심 인간들을 죽인 살문은 사라지고 단지 천외천과 살수 문파의 싸움만 부각되지. 예전의 살수 문파로 돌아간 거야.”
“그래서 모자도로 가는 거야?”
소고가 말했다.
“이 책의 시작이지.”
“좋아, 다 좋아. 살문의 인상을 재고시키겠다는 생각은 이해해. 천객이 움직였으니 맞대응하는 것도 이해하고. 하후가와 양가 무인들의 합공을 받은 것은 피치 못했다고 할 수 있어. 급습이었으니까. 아니, 넌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좋아. 그리고 계속 나가서 천객과 정면으로 부딪혔어. 다행히 이겼지만 전부 죽을 수도 있었어. 그것도 좋아. 그만하면 됐지 않아? 뭐 하러 모자도로 가려는 거야?”
소고는 종리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 같으면 절대로 모자도로 들어가는 우매한 행동은 하지 않을 게다.
모두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이것이다. 비객을 그만큼 죽인 것만 해도 큰 성과인데, 천객까지 네 명이나 죽였는데 왜 죽음의 길을 찾아 들어가는가.
“모자도에 도착하면 살 기회가 생길지 모르지만, 가지 않으면 죽는 길밖에 없어. 선택의 여지가 없어.”
모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가.
종리추는 정반대로 말하고 있다. 호랑이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들어가면 살 수 있다니! 호랑이를 피해가는 것이 죽는 길이라니!
“큰 고비는 넘겼어. 이 책에서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 천객의 분산이야. 네 명까지는 고려했지. 내가 한 명, 모진아가 한 명, 혈영신마가 한 명, 그리고 적사와 방삼이 한 명, 다행히도 천객은 세 명밖에 오지 않았어.”
소고는 내심 섭섭했다. 마지막으로 거론되는 사람은 자신일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적사와 사령살수라니. 그들이 자신보다 강하다는 말이지 않은가.
“후후 섭섭해할 것 없어. 적사와 방삼은 기연을 만났어. 나중에 시간 있을 때 겪어보면 알 거야. 아! 소고와 적각녀도 기연을 만났지. 조금만 일찍 기연을 얻었었어도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소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여은도 가만히 있었다. 적각녀란 말만 들으면 발작하던 성미지만 아미조차 찌푸리지 않았다.
종리추가 사람을 보는 눈은 정확하다 못해 소름이 끼친다. 그는 소고와 소여은의 무공 수준을 정확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은 그저 두 여자가 무공 수련을 하고 있겠거니 하고 생각했겠지만 종리추는 머릿속까지 꿰뚫어 본 것 같다.
종리추의 말이 맞을 게다. 전 같았으면 소고보다 적사와 방삼이 더 강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어떤 기연을 얻었는지 모르지만. 모진아는 종리추가 했던 말을 상기했다.
“천객은… 양가의 원한도 있고 하니 아마도 양청이 제일 먼저 나서겠지. 첫 싸움은 내가 맡는다. 두 번째로는 성격 급한 진조고가 나설 터. 암습에는 각법보다 수공이 좋다. 혈영신마가 맡아라. 시마공과 형영신공이라면 제일 마지막으로 청운 진인이 나설 게다. 모진아 차례야. 지금부터 하는 말 명심해 들어라. 천객의 무공에는 허점이 있다. 그야말로 실낱같은 허점이라 잡아낼 수 있을지 몰라도. 허점을 찾아 들어가면 이기는 것이고 찾지 못하면 죽게 된다. 누구도 쉽게 찾을 수 없는 허점이다. 찾아도 파해하기 어려운 허점이다. 우리 중에 천객의 허점을 잡아낼 수 있는 사람은 모진아와 혈영신마뿐이다. 두 사람에게 각별히 당부하니…”
종리추가 양청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면 도움을 줄 수 있지만 허점을 알고 있는 종리추조차도 쉽게 찾아 들어갈 수 없는 허점이라고 했다.
싸움은 누구도 승부를 장담하지 못한다. 모진아는 허점을 발견했으나 어렵게 찾아 들어갔다. 혈영신마는 허점을 찾지 못한 대신 동귀어진으로 대신했다.
종리추는 글들이 오는 것을 정확히 알았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오기가 죽은 시점에서 살문의 정보는 완전히 두절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종리추는 천객 세 명이 온다는 것을, 그들이 누구라는 것을 알았다. 한 명만 더 왔으면 적사와 방삼도 싸움에 가담했을 터인데.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종리추는 무인에 대한 정보를 수집할 때 무공의 강약이나 특성보다는 성격이나 행동 양식을 더 중요시했다. 살수에게는 그런 점이 더 중요하다면서.
과거의 정보만으로도 얼마든지 추론해 낼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천객의 분산…”
왜 그럴까? 종리추의 말대로 천객은 분산되었고 승리를 일궈냈는데 마음이 불안한 것은.
“왜 모자도로 가면 사는데?”
소여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종리추는 하늘만 쳐다봤다. 영원한 침묵 속에 잠긴 것 같았다. 이 책은 같은 살문 살수들에게도 말할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낮 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혹시 있을지도 모를 이목을 꺼리는 것일까.
한참 만에야 혼잣말처럼 작은 소리가 새어 나왔다.
“천외천이나 살문… 둘 중에 하나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해.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모두들 검을 꺾고 심산유곡에 숨어들어서 평생 나오지 않으면 되지.”
그럴 수는 없다.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사령이 되어야 한다는 살혼부 살수들의 염원을 저버린다 해도 이제는 무림이 자신들을 놔두지 않을 것이다.
심산유곡에 숨어? 천외천 무인들은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올 위인들이다. 지금은 개방이 분란에 휩싸여 있어서 그렇지 흑봉광괴가 방주에 오른다면 종적이 발각당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결국 숨으려면 팔부령처럼 사방에 침범할 수 없는 노방을 파놓고 안에 웅크려 있어야 한다. 안에서 뼈를 묻을 각오로.
살문 살수들은 종리추의 말에서 한 가지 사실을 직감했다. 천외천과 살문은 양립할 수 없다. 둘 중 하나는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한다.
“그래… 그때 그런 말이었어.”
소여은은 백석강의 일을 떠올렸다.
종리추가 소고에게 한 귓속말. 그것은 바로 모자도로 간다는 말이었을 게다.
소고는 “미쳤어!”라고 말했다. 확실히 그 말이다. 종리추는 다른 말도 했다. 서 있지 않으면 쓰러져야 한다고. 그 말에 소고는 대꾸도 하지 못했다.
너무 무모한 싸움이다. 모자도로 가면 계획이고 무엇이고 없다. 검이 부러질 때까지, 부러진 검을 들고 싸우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죽는 길밖에 없다. 종리추 말마따나 천외천과는 양립할 수 없는 사이니까.
소여은이 말했다. 백석강에서 한 번 물어본 말이다.
“모자도로 가는 것은 좋은데… 노리는 호랑이가 누구야? 천객은 아닌 것 같아서 묻는 말이야. 천외천을 멸하고 싶은 거야? 비객, 천객, 천외천 고수들 전부?”
풀숲이 바람도 없는데 일렁거렸다. 은신해 있는 살문 살수들도 상당히 긴장했다.
설마… 종리추의 목적이 소여은의 말대로 천외천 멸살에 있단 말인가?
“그건 그렇게 될 거야. 둘 중에 하나만 살아야 한다면 한쪽은 죽을 수밖에.”
종리추는 담담히 대답했다.
“…”
소여은은 괜히 물었다고 내심 후회했다.
마음속으로 지레짐작하고 있느니만 못하다. 종리추에게 직접 들었다고 뭘 더 어찌할 수 있단 말인가. 마음만 더 무거울 뿐이지.
“역시 모자도로 가는 것은 생사일전이야. 죽거나 죽이거나 끝을 보려는 거지. 질질 끌려가서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으니까. 모자도로 들어가면 살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고 하지만… 조금도 기대할 수 없는 희망에 불과해.”
“주공.”
“….”
“주공.”
“말해.”
“전부터 궁금한 것이 있어서….”
“말해.”
“혈영신마가 상대할 자는 하양 진인인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진조고로군요. 진조고는 팔부령에 있었는데 그가 어떻게…?”
종리추는 팔부령에 있던 진조고가 하양 진인과 교체하여 달려온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혈영신마에게 진조고를 상대하라고 말했다. 청운 진인보다 성격 급한 진조고가 먼저 나설 터라고. 모진아의 각법보다는 혈영신마의 수공이 급습에는 훨씬 나을 거라고 하면서.
서로가 교체하여 달려오고 달려가는 거리를 목측해 보면 자신들이 소고를 만나러 백석상으로 달려갈 때 그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기회만 닿으면 묻고 싶었다. 그러나 아까 묻지 않은 것은 무엇인지 모르지만 불안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소고도 소여은도 간과한 것이 있다.
종리추는 천객을 분산시켰다고 했는데, 어떻게 분산시켰는지 묻지 않았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는 의문인데.
천객은 묵월광을 멸살시킬 때도 전부가 움직였다. 살수 문파들을 멸문시킬 때도 거의 같이 움직였다. 그런데 정작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살문을 멸살시킬 때는 세 명만 왔다. 천객 정군유가 싸우다 죽은 것을 알면서도 전부 오지 않고 세 명만 온 것이 과연 우연일까?
조금만 생각 있는 자라면 팔부령이 빈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빈껍데기를 지키기 위해 천객이 두 명이나 매달려 있을 필요가 있을까?
종리추를 제거하기만 하면 팔부령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야 썩은 나뭇가지 부러뜨리듯 가볍게 부러뜨릴 수 있는데.
종리추가 역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정운과 진조고가 팔부령으로 달려갈 때는 우리가 하는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때였어. 뿔뿔이 흩어진 살문 살수들을 제거하는 데 천객 모두가 나설 필요는 없었지. 일책을 전개할 때 두 명씩 짝 지은 것이 그것 때문이야. 천외천 무인들이 공격해 올 것을 감안하면 대여섯 명씩 짝 짓는 것이 좋겠지만 그러면 천객이 더 많이 움직였을 거야. 소고와 적각녀를 죽이는 데는 비객 열 명과 정군유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거지. 팔부령에 가 있는 천객을 불러올 필요도 느끼지 않고.”
이해할 수 있다.
“난 거기다가… 미끼까지 놔뒀어.”
“미끼요?”
“구류검수.”
“음…!”
“한 달이란 기간 동안 일책을 끝내고 돌아가면 아무런 탈이 없겠지만, 이 책으로 들어선 지금은 구류검수의 생사를 장담하지 못해. 난 내가 한 행동이 옳은 것인지 판단할 수가 없어.”
처음이다. 처음으로 종리추가 마음속 번민을 털어놨다. 전에도 이런 번민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수하에게 말한 적은 한 번도 없다. 그만큼 구류검수에 대한 처사에 괴로워하고 있는 게다.
“구류검수가 팔부령에 있으니 여숙상이 움직이겠지. 비객 제일 비주도 움직일 거야. 비객 이조가 같이 움직이는 거지. 그럴 경우 천객은 당연히 따라붙게 되어 있어.”
단지 구류검수의 숙원을 풀어주려는 것이려니 생각했는데…. 한 가지가 더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왜 천객들이 따라붙는단 말인가.
“모진아.”
“네.”
“녹요평 싸움 생각나?”
“허허, 생각나죠. 어떻게 그 일을…”
“만일 그때 홍리족 용사를 전멸시켰다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
“볼 것 있습니까? 마을로 들어가서 노예나 첩으로 쓸 만한 것들은 잡고 밥벌레밖에 되지 않는 것들은 죽이고, 그리고 마을을 확 싸질러… 마을!”
“마을은 터전이야. 그래서 마을이 없어지면 뿌리가 없어지는 거지. 백천의는 그 생각을 한 거야. 우리를 죽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살문을 제거했다고 할 수 없어. 팔부령이 남아있으니까. 더군다나 팔부령에는 비적마의도 있고 삼현옹의 기관진식도 있어. 비객만으로는 부족한 거지. 백천의는 정말 살문을 초토화시키려고 작정했어. 그래서… 우린 모자도로 가지 않을 수 없는 거야.”
백천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팔부령에 정운이 남아 있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솔직히 팔부령에 남아 있는 살수들은 정운 혼자만을 상대하기도 버겁다. 하양 진인과 진조고를 교체하지 않고 진조고만을 빼내 합류시켰더라면 살문 살수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을 게다. 자신도, 종리추도 승리를 일궈내기 힘들었을 게다.
종리추는 네 명까지 생각했다고 하지만 솔직히 모진아 생각으로는 적사와 방삼은 천객 한 명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적사와 방삼이 무너지면 천객의 검은 다른 자를 향했을 거고…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백천의는 왜 굳이 진조고와 하양 진인을 바꿀 필요가 있었을까? 똑같은 천객들인데.
그것은 묻지 않았다.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팔부령에 대한 불길한 예감이 깊이 파고드는 까닭이다. 알 것을 알았지만 모진아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 어스름 내려앉는 어둠만큼이나.
소고는 생각했다.
“팔부령이 위험해!”
종리추가 천객을 분산시키는 것이 관건이라는 말을 했을 때 불현듯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스쳤다.
그래도 굳이 묻지 않았던 것은 이미 지나 버린 일이기 때문이다. 위험하든 위험하지 않든 지금쯤 팔부령은 어떤 결과를 자아냈을 것이다. 현재 살문 살수들은 모자도로 가면서, 혹은 무사히 모자도에 도착해도 죽음밖에 기다리지 않는데.
옆에 누웠던 소여은이 몸을 뒤척이며 말했다.
“언니, 팔부령이 괜찮을까?”
“역시 같은 생각….”
소고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