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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 – 178화


수많은 소문들이 날개를 달고 중원 하늘을 날아다녔다. 그중에서도 단연 압도적으로 무림인들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소문은 살문과 천외천에 관한 말들이다. 일단의 무인들이 팔부령을 급습했고 비적마의의 숲을 통과해 동굴에 숨어있던 살수들을 일망타진했다는 소문은 오랜만에 듣는 가뭄의 단비였다.

“그놈들 그럴 줄 알았어. 살수 놈들이 버티는 건 한도가 있는 거야. 말로는 뻔한 거지. 흥! 제놈들이라고 다를 줄 알았나 보지?”

살문의 몰락으로 중원에 산재해 있던 살수 문파는 씨가 말랐다.

그러나 무림인들은 곧이어 다른 소식도 듣게 되었다.

“세상에! 비객이 절반이나 죽었대!”

“비객뿐인가? 천객도 거의 대부분 죽었다던데?”

“그럼 살문이 아직 건재한 거야?”

“종리추라는 놈,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놈이 쥐새끼처럼 약삭빠르대. 쉽게 잡기 힘들 거라던데?”

살문과 천외천과의 싸움도 널리 퍼졌다.

비객은 구파일방이 만든 비밀 조직이다. 천외천은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인 비밀 집단이다. 일반 무인들이 알 도리가 없다. 천외천 같은 경우에는 구파일방 장문인들조차도 자신의 문도 중 누가 천외천에 가담했는지 모를 정도이니 말해 무엇 하는가. 하지만 지금은 무인들뿐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입에까지 오르내리고 있다. 내용도 상당히 구체적이다.

비객의 경우에는 각 문파에서 누구누구를 선발했는지 신상 내력이 소상히 유출되었다. 천객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다. 죽은 자들의 신상 내력은 물론이고 산 자 중에서는 하양 진인, 정운, 백천의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천객들이 개방의 비전비공인 구진법을 통해 무공이 급상승한 사실도 비밀 축에 끼이지 못하게 되었다. 무림인은 연속적인 충격에 정신적인 공황 상태에 빠졌다.

한 가지 희한한 점은 그 정도로 비객과 천객의 신상 내력이 밝혀졌다면 개방의 용두방주가 살해된 것도 알려졌어야 마땅한데 그것만은 아직도 비밀 속에 가려져 있었다.

“계획적으로 흘린 소문이야. 비객과 천객을 무림에 알리면서도 개방이 동요하는 것은 바라지 않아.”

백천의는 일정한 보폭을 유지하며 걸었다.

“도대체 소림사는 뭐 하고 있는 거야! 백팔나한이 팔부령을 꽁꽁 에워싸고 있다며? 그 뭐야. 칠십이단승인가 하는 사람들도, 그러면서도 살문이 빠져나가는 것을 알지 못한 거야? 이거야 원 눈뜬장님이지. 소림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나?”

화살은 자연스럽게 소림사로 향했다.

중원에서 살겁이 일어날 때부터 살문이 움직이고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팔부령을 에워싼 소림승들이 허수아비나 다름없다는 것도.

하지만 구파일방에서 걸출하다고 소문난 영걸들이 펑펑 죽어 나가자 금기시되었던 소림을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금기! 그렇다.

당금 무림에서 소림에 대해 입을 여는 것은 금기시되었다. 오랜 무림사를 영도해 온 소림사의 위명에 먹칠하는 것은 무림인들 스스로가 자제해 왔던 것이다.

소림오선사가 죽었을 때도, 소림이 잠전히 팔부령에서 물러나 봉문을 할 때도 소림을 비아냥거리지는 않았다. 그것은 천 년 소림사의 명예를 지켜주는 일일 뿐 아니라 무림인들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자제력마저 무너지고 있는 게다.

“모두들 잘못 생각하고 있어. 그때… 팔부령에서 끝장냈어야 해. 잘못 생각한 거야. 악의 뿌리는 발본색원했어야 해. 단 한 뿌리도 남기지 않고 모두 제거했어야…”

“누구십니까?”

험악하게 생긴 중년인이 백천의의 앞을 가로막았다.

쉬익!

백천의는 대답 대신 날카로운 검풍으로 대답했다.

“크윽!”

중년인은 극히 짧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털썩 무너졌다.

“발본색원. 발본색원해야 돼, 악의 뿌리는.”

백천의는 중년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의 검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심장을 갈랐다. 보지 않아도 손에 전달되는 감각만으로 알 수 있다.

뚜벅뚜벅…..!

백천의의 발걸음 소리만이 고요한 회랑을 울렸다.

아흔아홉 칸은 되지 않아도 능히 사, 오십 칸은 될 법한 커다란 저택인데 바람 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앞을 가로막았던 중년인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인 자다. 그자 이외에는 개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백천의는 굽이굽이 이어진 회랑을 거침없이 걸었다. 처음으로 방문한 곳이지만 내 집처럼 자연스러운 걸음걸이다. 저택에 대한 구조를 상세하게 알지 못하는 한 이처럼 편안히 걷지는 못하리라.

백천의가 목표로 한 곳에 이르렀는지 걸음을 멈췄다.

“피를 부를 셈인가?”

백천의는 냉랭하게 말했다.

안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하하하! 누가 감히 천객 앞에 검을 들이대겠습니까? 들어오시지요, 이들은 호법이란 직책상 제 곁에 머물고 있는 것뿐이니.”

백천의는 문을 밀쳤다.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다.

그들 대부분은 병기를 휴대했고 기도도 심상치 않아 보인다.

적게 잡아도 이십여 명은 되어 보인다. 그들 외에도 사람들이 또 있다. 천장 위에, 대청 바닥에… 은밀히 몸을 숨기고 있는 자들의 숫자만 해도 십여 명쯤은 되는 것 같다. 백천의는 한 사람에게만 눈길을 맞췄다.

탁자에 단정하게 앉아 산수도를 그리고 있는 중년인에게.

“좌우를 물렸으면 좋겠는데.”

중년인… 하오문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소. 어차피 이들도 상황을 정확하게 알고 향후 대책을 모색해야 되니까. 자, 뭐라도 불러 드려야 되겠소? 소림사룡이라는 말은 달갑지 않을 테니 천주라고 불러 드리리다. 천외천 천주, 검에 살기가 깃들어 있던데 하오문을 뿌리 뽑아낼 생각이시오?”

백천의는 빙그레 웃었다.

“그러겠다면?”

“이유만 합당하다면 천외천 천주께서 하지 못할 일이 어디 있겠소. 다만 하오문주로서 이유 정도는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오.”

하오문주나 백천의나 오랜 지기를 만난 것처럼 태연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얼굴 표정도 웃음이 가득해서 수하가 살검에 죽었다는 것을, 문주의 수하를 단검에 베어버렸다는 사실을 잊은 듯했다.

“등천조라는 자를 아나?”

“….”

“죽었지.”

“알고 있소.”

“살천문주는?”

“죽은 것으로 알고 있소.”

“또 죽은 자들이 있지.”

“오기를 말씀하시는 것 같소만….”

“놈들은 간특했어. 하오문과 개방, 살문 외장에서 거둬들인 정보를 종리추에게 전달했지. 반대로 종리추의 명령을 살문 살수들에게 전달하는 역할도 했고.”

“그랬소이까?”

“덕분에 얼마 살지 못했지.”

“금시초문이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을 문책하는 것이라면 책임을 지겠소이다.”

“왜 그랬지?”

“….”

“한낱 살수 놈들에 불과한데 왜 하오문이 도와준 거지?”

“하하하! 그럴 리가 있소이까. 천주 말마따나 한낱 살수 놈들에 불과한데. 오기가 불현듯 떠나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궁색하군.”

하오문주는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하오문을 안다면 서로 이 선에서 끝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소만.”

백천의도 웃었다.

“좋겠지. 하오문을 조금은 아니까.”

하오문은 뿌리 뽑을 수 있는 문파가 아니다. 그들을 뿌리 뽑는다는 것은 음지를 없애는 것과도 같다. 음지가 없으면 양지도 없다. 설혹 존재할 수 있다 해도 양지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무공이란 없어도 살지만 하오문 중 마방 같은 존재는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 수단이다. 하오문의 무공이 형편없이 빈약하면서도 무림에 존속할 수 있었던 원인 중 중요한 부분이다.

백천의도 하오문을 뿌리 뽑을 생각으로 들른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할까?”

“이 몸에 일수비백비란 무공이 있소이다. 절학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하오문주로 만들어준 무공이니 나름대로 자신은 있지요.”

“…..”

“일수비백비로 천주의 무공을 견식해 볼까 합니다.”

“좋겠지.”

“한 시진만 시간을 주었으면 좋겠소이다.”

백천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계획이 틀어졌다. 틀어져도 단단히 틀어졌다.

하오문주는 종리추가 한 말을 떠올렸다.

“일책을 사용할 경우에는 승산이 있지만 일계가 성공할 가능성은 일 할도 되지 않습니다. 살문 살수들 중 어느 한 조라도 실패하는 경우에는 곧바로 이 책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그때 자신은 신들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문은 문파의 특성상 멸문도 되지 않는 문파이지만 무림에 인정받는 문파도 되지 못한다. 절정무공이 없는 것도 명문이 되지 못한 원인이지만, 그것보다는 구파일방의 견제가 가장 큰 주요 원인이었다. 구파일방은 도둑이나 배수 나부랭이들이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지 못한다.

어느 문파에 뒤지지 않는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큰소리 한 번 내지 못하는 문파. 그것이 하오문도들의 한이라면 한이랄까?

그런데 기회가 왔다.

살문은 조용하던 무림에 돌을 던졌다.

다른 문파가 돌을 던졌다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렸을 터이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십망이 사라졌고 구파일방이 흔들리고 있다. 소림사는 봉문까지 했고 중원무림인들은 구심점을 잃고 흔들린다.

세상으로 치면 난세다. 하오문이 명문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회는 이번밖에 없다. 이런 기회를 놓친다면 향후 다시는 명문 반열에 들어설 기회를 잡을 수 없으리라. 설혹 안 된다면 어떤가. 사내로 태어나서 크나큰 모험에 몸을 실어 보는 것도 괜찮은 인생이지 않은가.

“성공할 경우에는 오 년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긴 기간입니다. 오 년 동안 천외천의 이목을 따돌리기도 쉽지 않을 겁니다.”

쉽게 대답해 주었다.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개방과 연계되어 있지 않은가. 살문 외장도 있고. 하하!! 중원에서 가장 깊고 방대한 소식통이 손아귀에 있는데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실패할 경우에는 하루도 장담하지 못합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머릿속을 스쳐 갔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해보지. 할 만한 가치가 있어.”

살문주에게는 빛이 있다.

쓸쓸히 햇볕이나 쬐며 죽어갈 운명이었는데 다시 하오문주로 복위시켜 주었다. 그런데도 구파일방의 눈치를 살피느라 변변한 정보 하나 주지 못했다.

이번에는 빚을 갚을 수 있다. 단순히 빚만 갚는 것도 아니다. 잘만 하면 하오문을 명문 반열에 올라서게 할 수 있다. 하오문을 명문에 올려놓으려면 사람들이 기피하는 문파가 되어서는 안 되는데… 그게 가장 큰 문제다.

세상에 어느 누가 배수를 좋아할 것이며 소매치기를 좋아할까. 기녀를 좋아하는 사내들은 부지기수이지만 내심을 들여다보면 경멸이 스며 있고 마방 역시 필요해서 이용하지만 천직인 것은 틀림없다. 이러한 요인들이 하오문을 무림문파로 인정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진다면 개방 역시 거지들의 집단에 지나지 않고 살문은 사람을 죽이는 살수들의 무리이니 더욱 곤란하다.

“첫째는 강한 결속이다. 풀려고 해도 풀리지 않는 단단한 매듭은 누구도 섣불리 손대지 못한다.”

하오문을 정비했다.

문도들의 마음을 다잡아 배신으로 점철된 하오문 역사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하오문 문도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한이 있더라도 문파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사람들만 모인다면 훨씬 낫다.

보낼 사람은 보냈다. 추릴 사람은 추려냈다. 반심을 지닌 자라도 설득할 수 있으면 했고, 설득이 통하지 않으면 전권을 회수한 후 과감하게 축출했다. 마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문파에 대한 애착심이 떨어지는 사람들도 추려냈다.

구파일방이 건재했다면 벌써 간섭이 들어왔을 터이다.

“문파의 특성을 살려야 돼.”

하오문주는 하오문의 특성을 더욱 강화시켰다. 하오문이 무림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오문만이 취합할 수 있는 정보에 있다. 천대받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거둬들이는 정보.

이런 체제를 구축하는 데는 살문 외장에서 보고 배운 바가 컸다. 정보를 분류하고, 정리하고, 향후 무림 동향을 예측할 수 있는 기관을 따로 만들었다. 모지에게 일임되었던 것을 하오문주의 직할로 신설한 것이다.

각각 무류, 무보, 무예라는 이름을 붙였다.

살문은 잔인무도하게 사람을 죽이는 살수 문파라는 상식을 뛰어넘어 진정으로 억울한 자들의 한을 풀어주는 문파로 재탄생하려고 한다. 무림의 이목이 살문에 쏠려 있을 때 하오문은 암중으로 변신을 시도하는 게다. 아무도 모르게.

종리추의 제안은 정곡을 찔렀고, 흥미로웠으며,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것은 역대 하오문주가 한 번씩은 생각했으나 시도조차 해보지 못한 위험한 변신이었다.

변신을 시도하려고 했던 하오문주들은 모두 제거되었다.

구파일방 고수들 손에 제거되었다면 억울하지나 않으련만 그들이 부추긴 수하의 손에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하오문이 변신을 완성하기까지 살문이 건재해야 한다. 중원 무림의 이목이 하오문으로 쏠리기 전에 건드릴 수 없는 강한 문파로 변신해야 한다.

하오문이 직접 나선다면 당장 무림인의 시선이 집중된다. 종리추는 오기를 달라 했고 하오문주는 흔쾌히 승낙했다. 오기라면 최대한 협조를 해주면서 하오문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막아줄 게다.

그런데 틀어졌다. 오기는 죽었고 종리추는 일책 대신 이 책을 강행하고 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삼무가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삼무에 소속된 문도들이 암중으로 꼭꼭 숨어들었고 이 세상 누구도 그들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올 줄 알았어. 누군가는… 하오문만 건재하면 돼. 삼무가 있는 이상, 하오문도가 정비된 이상 다음 하오문주는 서서히 하오문을 변신시킬 수 있어. 내 역할은 끝난 거야.”

죽음의 그림자는 오기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순간부터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하오문주는 생각을 정리하고 대청에 앉아 있는 모지들에게 눈길을 주었다.

말은 필요 없다.

반심을 지녔던 모지들은 축출되었고 이 자리에 앉아 있는 모지들은 문주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이해하고 있다. 백천의가 왜 찾아왔으며 문중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도. 하오문주는 모지 천은탁을 쳐다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경거망동하지 마라.”

천은탁 모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하오문주는 계속 천은탁 모지를 쳐다보며 이번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천은탁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오문이 드러나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 사내들의 의리가 아니겠습니까. 살문주와의 인연은 문주님보다 제가 더 오래되었잖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문주. 잘 가십시오.”

수많은 말들이 간단한 고갯짓에 녹아 나왔다.

모지들에게 부탁을 따로 할 필요는 없다. 오기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순간 모지 총회합을 열었고 하오문이 나아갈 방향을 결정해 놨다.

하오문주는 붓을 들었다. 그리던 산수화만은 완성시켜야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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